[한국 대표 소설 읽기] <필론의 돼지>


<필론의 돼지> 표지 ⓒ아시아



"필론이 한번은 배를 타고 여행을 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큰 폭풍우를 만나자 사람들은 우왕좌왕 배 안은 곧 수라장이 됐다. 울부짖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뗏목을 엮는 사람… 필론은 현자인 자기가 거기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도무지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배 선창에는 돼지 한 마리가 사람들의 소동에는 아랑곳없이 편안하게 잠자고 있었다. 결국 필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돼지의 흉내를 내는 것 뿐이었다." (본문 58~59쪽 중에서)


많은 사람의 정곡을 찌를 우화이다. 굳이 내가 무엇을 하지 않아도, 세상은 돌아가게 마련이다. 관성의 법칙도 있지 않은가? 세상은 제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조급하게 나서서 뭐라도 해보려고 하니, 현자가 보기에는 딱할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필론이 현자가 아닌 거다. 


필론과 돼지의 우화로 사회를 바라보다


이문열의 <필론의 돼지>는 필론과 돼지의 우화를 바탕으로 사회를 바라보았다. 이 소설도 그의 스타일에 맞게, 어떤 특수한 상황을 설정하고 그곳에 여러 인간 군상을 배치시켰다. 곧 사회의 축소판이다. <필론의 돼지>의 특수한 상황은 이렇다. 1980년대 대학을 졸업한, 우쭐댈 만한 학력을 가진 주인공이 군대를 제대하고 군용열차에 올랐다. 그곳에서 멍청하기 짝이 없었던 훈련소 동기 '홍'을 만나고, 얼마쯤 지나 술 취한 '검은 각반 두른 현역' 즉, 특전사 현역이 난장을 피우며 돈을 빼앗는 장면을 목격한다. 백 명에 육박하는 육군 예비역들은 다섯에 불과한 특전사들에게 꼼짝도 못하거니와, 그 또한 아무것도 못하고 똑같이 돈을 빼앗길 뿐이다. 


그에게 특전사보다 앞 선 문제는 다름 아닌 홍이다. 본명이 홍덕동인 홍은 워낙 멍청했기에 '홍 똥덩이'라고 불렸는데, 그런 홍이 자꾸 자신과 맞먹으려 하는 게 아닌가. 그가 이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바를 홍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홍은 분노는 커녕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는 반면 그는 이 상황에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그도 결국은 홍처럼 행동하고 만다. 


그런 경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어느 모로 보아도 나보다 못한 사람과 섞이기 싫어할 때가, 그런데 생각은 다를지 몰라도 그나 나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걸 알게 될 때가, 그렇게 분노와 좌절과 자기혐오를 느낄 때가 말이다. 내가 그 반대로 못한 사람일 때는 움츠려들고 아무것도 못하곤 하는데, 하필 내가 잘난 사람인 것 같을 때는 그렇게 되곤 한다. <필론의 돼지>에서 그는 현자 필론이고, 홍은 돼지일 거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은 '말짱 황'이다. 


정작 중요한 건 '폭력'의 정당성 여부


술취한 특전사 현역 다섯 명이 육군 예비역 100여 명이 몸을 실고 기분 좋게 집으로 향하는 객실로 난입해, 되지도 않는 노래를 부르며 돈을 갈취한다. 대부분의 예비역들은 3년 간 '당했던' 뼛속 깊은 무력감으로 순순히 돈을 준다. 종종 저항의 불꽃이 일지만 더 이상 번지지 못하고 사그라든다. 그 또한 분노로 치를 떨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니,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중, 익명의 목소리가 들린다. 100명이 다섯 명을 이기지 못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말한다. 다같이 달려들면 당연히 이길 거라고 말한다. 이 선동에 맞춰 수많은 발길질이 특전사 현역 다섯이 아닌 한 명씩으로 향한다. 아무리 단련된 그들이라고 당해낼 도리가 없다. 무참히 쓰러져 얼마 전까지 그들이 행했던 바를 그들이 당한다. 소수 권력의 무참한 말로다. 


이 지점이 논란 거리가 될 수 있다. 이 소설은 주인공으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지식인이 행동하지 않을 때 돼지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역설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바는 '폭력'의 정당성 여부에 있다. 작가는 주인공의 생각을 빌어 폭력의 악순환을 비판하고자 한 것 같다. 


"만약 이들을 진실로 죽여야 할 대의가 있다면, 그에게도 동료 제대병들과 함께 살인죄를 나눌 양심과 용기는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곳을 지배하는 것은 눈먼 증오와 격양된 감정이 있을 뿐, 대의는 없었다."(본문 68쪽 중에서)


지배자의 폭력과 피지배자의 폭력은 같지 않다


과연 그럴까. 과연 그런 것일까. 주인공의 눈에는 지배자의 폭력과 피지배자의 폭력이 같아 보이는가. 작가도 그렇다. 주인공이 돼지와 다를 바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곳에 대의가 없다는 핑계를 댔다고 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곳에서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주인공에게서 그런 생각이 나오는 건 어불성설이다. 물론 하나의 우화로 작동하는 것이겠지만, 폭력에 대한 생각은 우화로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일제 시대 친일 부역자들을 모조리 잡아 그에 맞는 벌을 받게 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냥 좋은 게 좋은 것이야, 하면서 그들은 그들대로 나는 나대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많이 오버된 것 같지만, 충분히 같은 맥락이다. 


물론 크게 보면 특전사 현역이나 육군 예비역이나 국가와 시대가 낳은 피해자일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생각이 일언반구 들지 않게 한다. 단지 폭력에 당한 만큼 폭력으로 갚는다는 것이 대의에 맞지 않는다고 보고 있을 뿐이다. 현상만 볼 뿐 본질은 보지 '않은' 것 같다. 본질을 보았으면, 한 발 더 나아가 폭력과 폭력이 만나게 된 그 상위층의 폭력에 대해 생각했어야 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못지 않은 탁월한 알레고리 형식으로 1980년대 우리 사회를 들여다본 이 소설은, 그러나 이처럼 잘못된, 좋게 말해 논란 거리가 되는 바를 남겼다. 그럼에도 하나는 확실하다. '필론의 돼지'는 1980년대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그 어느 때 어느 곳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그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현명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떻게 보든 '그들'은 분명 혐오스러운 존재다. 


그런데, '그들'이 언제까지 '그들'일까. '우리'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 때도 여전히 혐오스러운 존재일까. 문제는 그 혐오스러운 존재들이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많이 있다는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그 혐오스러운 존재들을 환영하고 그들이 더 많아지길 바라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다. 필론의 돼지가 스스로가 아닌 그들이 만들어낸 거라면, 세상이 어떻게 될지 심히 걱정된다. 


아시아 출판사가 후원하는 '한국 대표 소설 읽기'의 일환입니다.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과 함께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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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문학사상사

영화배우 홍경인은 20대가 되기 전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인물 두 사람을 훌륭히 연기한 바 있다. 1992<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엄석대', 1995<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전태일'이다. 앞의 인물은 가상의 인물이고, 뒤의 인물은 실존 인물이다. 이 두 영화는 당시 논란의 중심에 있으면서 많은 시사점을 남겼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들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유효하다.

 

이 중 '엄석대'라는 인물은 작가 이문열이 만든 캐릭터이다.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주인공으로, 한국 현대사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한지 오래다. 소설에는 엄석대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돼 있다. 모두가 확실한 캐릭터로, 그들이 갖는 상징성은 확고하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을 통해 작가 이문열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다.

 

아니꼽고 하찮은 시골 학교의 '소왕국'

 

소설은 1950년대 말~1960년대 초를 시대적 배경으로, 시골 초등학교의 5학년 교실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화자인 '' 한병태가 26년 전을 회상하며 내레이션 조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새삼 '26'이란 단어가 다가온다. 1987년에 출간된 소설의 화자 '' 한병태가 26년 전을 회상하는 것과, 필자가 2013년에 26년 전인 1987년 출간된 소설을 리뷰하는 것.

 

한병태는 서울의 고급 공무원인 아버지가 시골로 좌천되는 바람에 서울에서 시골로 전학을 가게 된다. 그는 전학을 오자마자 시골 학교를 매도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자유와 합리'를 내세우며, 엄석대 왕국에 반기를 드는 것이었다. 그의 눈에는 시골 학교의 '소왕국'이 아니꼽고 하찮게 보였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미 작가의 이데올로기적 형상화 작업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초등학생 아이들의 행동으로 보여주는 자유와 폭력, 합리와 불합리의 대립. 현실정치를 우화적으로 비판·풍자하려는 움직임이다.

 

엄석대 왕국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다만 그가 다른 아이들보다 2~3살이 많고, 키는 머리 하나만큼 더 크며, 축구를 잘 한다는 것. 그리고 전교 1등의 시험 성적. 이런 저런 이유와 그의 카리스마가 빚어낸 리더십은 확고부동한 엄석대 1인 독재체제를 만들어 놓았다. 한병태는 외롭게 저항하다가 결국 굴복하고 만다.

 

하지만 엄석대 왕국은 조악하기 짝이 없다. 초등학교 5학년 학급이라는 공간적 배경에서 오는 선결적 조악함과 더불어, 엄석대의 능력에서 오는 조악함이다. 사실 엄석대는 다른 아이들보다 나이가 많다는 연유로 독재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전교 1등의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대리시험 때문이었다.

 

당시의 정치상황을 담으려한 작가의 의도

 

이는 소설이 출간된 1987년 당시의 정치상황을 담으려한 작가가 의도한 바일 것이다. 소설적 배경은 1960년대지만, 작가는 1987년을 말하고자 했다. 엄석대 왕국의 조악함은 그 첫 번째이다. , 당시의 정치판이 초등학교 5학년 교실만큼 조악하다는 비판의 일갈이다. 여기에는 당시 대통령인 전두환이 조악함의 반석 위에 서 있다는 것과, 그 자신 조악함의 상징과도 같다는 것이 읽힌다. 또한 한병태로 상징되는 변절자들의 이미지도 보인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 인물이 있다. 바로 엄석대 왕국 교실의 5학년 담임선생님이다. 그는 한병태가 엄석대의 비리와 횡포를 알아내 호소할 때, 방관자적이며 무기력한 현실순응주의자적인 모습을 보인다. "석대의 위협이나 속임수에 넘어간 거짓된 것일지라도, 반 아이들 모두의 지지를 받고 있는 석대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들이 보이지만, 학급이 겉으로 아무 문제없이 잘 돌아가므로 그 속과는 상관없이 괜찮다는 것이었다. 작가 이문열은 이를 두고 "폭력적이고 반민주적인 독재 정권을 실리에 따라서 허락한 60~70년대 미국 외교 정책"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한 장면. 새로운 6학년 담임 선생님. ⓒ 대동흥업


6학년이 되자 새로운 담임선생님이 등장한다. 사범대를 갓 졸업해서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유능하면서도 성실하고 예민한 사람이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엄석대 왕국의 실체를 알게 되고, 몇 일만에 엄석대 왕국을 무너뜨려 버린다. 모든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엄석대의 대리시험을 까발리고, 그를 매질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며 그는 말한다.

 

"너희들은 당연히 너희 몫을 빼앗기고도 분한 줄 몰랐고, 불의한 힘 앞에 굴복하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만약 너희들이 계속해 그런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앞으로 맛보게 될 아픔은 오늘 내게 맞은 것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그런 너희들이 어른이 되어 만들 세상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본문속에서)

 

그로 말할 것 같으면, 방관자적이며 무기력한 현실순응주의자적인 모습의 5학년 담임선생님과 다르게 민주적 절차와 방법을 존중하면서 개혁적 의지를 실천하는 인물로 보인다.

 

1950년대 말과 1987년의 기막힌 대치

 

여기서 작가가 의도하는 두 번째 포인트가 잡힌다. 역시 1987년 당시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엄석대 왕국은 1950년대 말 무너져 가는 자유당 또는 이승만 정권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의도는 무너져 가는 전두환 정권에 있었다.

 

1987114"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로 유명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학생들은 분노를 금치 못하고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계속했다. 그러던 413일 전두환은 호헌조치를 발표한다. 거세진 민주화 요구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가 활발히 이뤄진 시기에, 갑자기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한 것이었다. 이에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급기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됐다는 성명까지 발표하게 된다. 이어서 민주화 투쟁은 전국적으로 번진다. 69일에는 고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다음 날인 610일에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이 참여한 6·10 민주항쟁이 시작된다. 이후 2백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쏟아져 나왔고, 결국 629일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은 직선제 개헌 특별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이로써 신군부 전두환 독재체제는 허망하게 막을 내린다.

 

겉으로는 확고부동한 독재체제의 엄석대 왕국은 6학년 담임선생님이 부임한지 한 달도 안 되어, 겨우 한 나절 만에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여기에는 새로 온 6학년 담임선생님의 의지가 큰 몫을 차지했지만, 교실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도 상당한 몫을 차지했다.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엄석대에 대한 고발과 그를 향한 매서운 화살들.

 

이는 허망하게 막을 내린 전두환 정권을 상징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씁쓸하기 짝이 없다. 아이들이 보이는 눈물에 그것이 보인다. 그들은 승리했지만 영원한 승리를 보장받지 못할 것이었고, 이미 폭압에 대한 순응에 적응돼 있었으며, 독재자 엄석대는 어딘가에서 잘 먹고 잘살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힘없는 민중일 따름일 터였다.

 

작품의 높은 문학적 경지

 

이 소설은 얼핏 보면 독재체제에 대한 비판과 독재자의 말로를 애돌아 표현한 알레고리 소설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만 했다면, 굉장히 통속적으로 또는 유치하게 읽혀졌을 수도 있다. 또한 2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그 위상이 지속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 다른 이유가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평론가 이어령은 1987년 이상문학상 심사평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 작품이 소설적으로 크게 성공하고 있는 부분은 교활한 독재자 엄석대의 일그러진 생애가 아니라 그에 대한 내레이터의 태도, 시각, 그리고 그 해석에 있다. 여기의 내레이터는 엄석대를 그리기 위한 단순한 화자가 아니라 실질적인 행위자로서의 주인공인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도식으로 이룩된 엄석대나 새로 온 담임선생 같은 인물보다는 <> 한병태가 보여주는 복합성이 이 작품의 높은 문학적 경지를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소설의 알레고리가 그 힘을 잃었을 때 비로소 발휘될 것이다. 하루 빨리 그럴 때가 왔으면 하는 마음이다. 소설의 또 다른 성공에 대한 생각은 차치하고, 그럴 때에야 야만의 시대가 가고 만민의 시대가 오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 2013.8.2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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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박맹호' 이름 석 자가 주는 힘... <박맹호 자서전 책>

띠끌 자옥한 이땅 위의 일을 한바탕 긴 봄꿈이라 이를 수 있다면, 그 한바탕 꿈을 꾸미고 보태 이야기함 또한 부질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같은 냇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 없고, 때의 흐름은 다만 나아갈 뿐 되돌아오지 않는 것을, 새삼 지나간 날 스러진 삶을 돌이켜 길게 적어나감도, 마찬가지로 헛되이 값진 종이를 버려 남의 눈만 어지럽히는 일이 되리라. (경향신문 1983.10.24)


ⓒ 민음사

이문열 작가의 1988년 작 <평역 삼국지>(민음사)의 출간 전 <경향신문> 연재 당시, 1회 첫 소절이다. "지금까지 모두 합쳐서 1800만 부가량 필린 슈퍼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은"(185쪽) 이 작품은 많은 사람들한테 읽힌 만큼, 많은 사연들이 있을 것이다. 필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저자 이문열과 이번에 소개할 책 <박맹호 자서전 책>(민음사)의 저자 박맹호 회장 사이의 사연을 소개하기에 앞서 간단히 소개해 본다. 

이야기 하나, 15년여 전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다. 위인전을 다 띠고, 본격적인 문학소년으로의 길을 걷기 위해 알맞은 책을 알아보던 중이었다. 내 눈에 들어왔던 책은 다름아닌 출간된지 10년 남짓 지난 초대형 베스트 셀러이자, 전 국민 필독서격이었던 이문열 작가의 <평역 삼국지>. 당시 많지 않은 나이로 10권 분량의 소설은 무리였을지 모르지만, 무작정 부모님을 졸라 처음으로 책을 '구입'했었다. 그렇게 그 작품은 당시 겨울 방학 내내 나의 머릿속을 헤집어 놨고, 중국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후에 나는 중국학과를 졸업했다.) 


<박맹호 자서전 책> 5장을 보면 1983년 당시 등단 3년 남짓한 신인이었던 이문열과 민음사 박맹호 사장의 흥미로운 만남이 나온다. 어릴 때부터 박맹호 회장은 <삼국지>를 특별히 생각해 왔는데, 마침 <경향신문>과 뜻이 맞아 연재할 기회가 생기게 된 것이다. 

박맹호 회장은 이문열에게 제안했고, 처음엔 뜨악한 반응을 보였던 이문열은 "이 작업은 노후의 양식이 될 테니, 반드시 한번 해 보시오"(183쪽)라는 권유와 파격적인 대우로 마침내 성사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평역 삼국지>는 "한국 출판 역사상 가장 만이 팔린 책 중 하나가 되었다."(184쪽)

박맹호 회장이 누구이기에 작가 이문열을 키웠다시피 한 것일까? 출판 특성상 책 이름은 알아도 출판사의 이름은 생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출판사의 스태프라고 알 턱이 있을까. 그럼에도 출판계에서 '박맹호'라는 이름 석 자가 주는 힘은 가히 대단하다. 

출판인이자 지식인 박맹호는 1933년 충청북도 보은에서 출생했다. 정확히는 "비룡소를 300년 넘도록 지켜 온 초가"(5쪽)에서. 비룡소란 이무기가 날아오른 못이라는 뜻인데, "나중에 민음사 출판 그룹의 아동 출판사를 만들 때 그 이름을 비룡소로 정했다"(7쪽)고 한다. 이후 경복중학교, 청주고등학교를 거쳐 195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박맹호는, 출판수업을 거쳐 "1966년 5월 19일, '민음사'라는 이름의 출판사"(60쪽)를 설립했다. 1달이 채 안되어 "외국책을 일본어로 번역한 <요가>라는 책을 들고 와"(60쪽) 다시 한국어로 번역해 책을 내었는데, 대박을 터뜨렸다. 하지만 바로 다음 작품에서 참단한 실패를 겪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본격적인 단행본 출판을 시작하고 시인 고은, 문학 평론가 김현이라는 한국 현대 인문계의 거물들과 친분을 맺는다. 문학 출판을 시작한 박맹호 회장은 한국 출판계의 최초가 될만한 사건들을 연출한다. '세계 시인선', '오늘의 시인 총서', '이데아 총서', '현대 사상의 모험', '대우 학술 총서', '세계 문학 전집'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리즈를 펴내면서 한국 출판계의 대표적 출판사로 이름을 올린다. 또한 "단행본 출판 사상 거의 최로로 모든 책에 본격적으로 가로쓰기를 도입했고"(107쪽), 신구문화사에서 편집자로 있던 정병규를 영입해 "한국 최초의 전문 북 디자이너라는 닉네임이 생기게"(116쪽) 도와주기도 하였다. '최초의 사건'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전집류를 제외하곤 신문 5단 광고 전체를 할애해서 단행본 한 권의 책을 광고한 것도 해방 이후에는 민음사가 거의 처음이었고, 전면 컬러 광고를 과감하게 시작한 것도 민음사가 거의 처음이었다."(119쪽)

<박맹호 자서전 책>의 부록에 박맹호 회장의 21세 때 소설 <자유 풍속>이 실려 있듯이, 박맹호 회장의 삶에서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히 컸었다고 생각된다. 그의 생각이 고스란히 투영된 계간지 <세계의 문학>과 '오늘의 작가상', '김수영 문학상'을 보면 말이다. 황석영, 박완서, 최인훈, 박경리 등 한국 문단의 거성들의 작품들을 다룬 <세계의 문학>. 이성복, 김용택, 장정일 등의 시인을 배출한 '김수영 문학상'. 

이야기 둘, 도올 김용옥이라는 존재를 본격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된 책이 민음사에서, 그것도 박맹호 회장에 의해서 라는 것을 아시는가? 1983년 <세계의 문학> 에 수록된 김용옥의 눈문인 '우리는 동양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로 바꿔 출간해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었다고 한다. 

책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으로써, 박맹호 회장의 자서전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책은 지은이보다도, 만든 이보다도, 읽는 이보다도 오래 남는다"(255쪽)는 말씀. 책을 누구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나의 생각을 알아주는 듯하다. 그럼에도 책을 만들어 살아가기란 너무나도 힘든 게 현실이다. 같은 값으로 다른 무엇을 살 때보다, 책을 살 때 더 많은 것을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책을 만들 때는 자기한테 도움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구매하려 들지 않는 합리적 독자를 늘 염두에 둬야한다"(256쪽)고 말하는 것일 게다. 

<박맹호 자서전 책>은 단순히 한 사람의 자서전으로만 끝나지 않고 나아가 한국 출판계, 한국 대표 출판사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한국 출판문화에 대한 공부가 될 것 같다. 

"오늘날 출판 위기론이 팽배해 있지만, 동료나 선후배 출판인들의 한없는 열정이야말로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가장 큰 잠재력이라고 본다."(257쪽)

다른 누가 아닌 한국 출판계 큰어른이 후배들의 등을 토닥여주는 것만 같다. 



"오마이뉴스" 2012.12.25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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