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열두살 샘>


공고롭게도, 열두살 때 백혈병으로 친구를 잃었다. 영화 <열두살 샘>은 백혈병으로 죽음을 앞둔 열두살 샘의 이야기이다. ⓒ㈜미디어데이



어린 시절, 친구 몇 명을 잃었다. 12살 때 반 친구가 백혈병으로 하늘나라로 갔고, 13살 때 동네 친구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중학생 때는 함께 놀던 다른 반 친구가 무슨 연유 때문인지 기억내지 않는 이유로 죽었다. 12살 때는 증조할머니도 돌아가셨던 것 같다. 그보다 어렸을 땐 외할머니이 돌아가신 모습도 봤고. 그때마다 충격으로 울음을 감추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 울음은 슬픔이 아닌 공포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사람을 다신 볼 수 없다는 슬픔이 아닌, 내가 죽음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 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공포는 중학생이 되기도 전부터 나를 괴롭혀 온 것 같다. '죽음이 뭐지, 죽으면 어떻게 되지, 죽으면 어디로 가지' 등, 그 어린 나에게 그보다 두려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12살 때 백혈병으로 앓다가 세상을 떠난 친구는 아직도 생생하다. 반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백혈병으로 학교에 나오지 못했고 상태가 호전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결국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는 소식까지. 우리 반 전체는 친구를 기리며 묵념하고 울었다. 그 친구의 자리에는 꽃이 놓였다. 


죽음을 앞두고도 '용기' 있는 열두살 샘


샘에겐 상상 못할 '용기'가 있다. 삶보다 죽음이 가깝지만, 누구보다 삶과 가까이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미디어데이



영화 <열두살 샘>은 백혈병에 걸려 죽음을 앞둔 12살 샘의 이야기다. 너무 공교롭게도 나의 경험이 반쯤 완벽하게 투영되어 있어 놀라기도 했는데, 한편 그 불편한 기억을 조금은 좋은 쪽으로 희석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죽음과 처절히 싸워 이기는 내용이 아니라, 죽음에 직면해 오히려 삶에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용기가 영화의 포인트다. 


열두살에 불과한 샘, 백혈병으로 시한부 선보를 받은 상태다. 85%의 완치 확률을 자랑하는(?) 백혈병이지만 샘은 세 번이나 재발했고 두 번 항암치료를 받았다. 그는 완치되지 못했고 1년 안에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샘은 병원에서 만난 절친 펠릭스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만든다. 


세계 신기록 깨기, 에스컬레이터 거꾸로 올라가기, 공포영화 보기, 담배 피기, 술 마시기, 진하게 키스하기, 여자친구 사귀기, 과학자 되기, 비행선 타기, 귀신 보기, 우주선 타고 별 보기. 샘은 펠릭스와 함께, 혼자서, 아빠와 함께, 여자친구와 함께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은 이 모든 버킷리스트를 실행에 옮긴다. 


한편,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다름 아닌 '아빠'. 아빠는 아픈 샘을 마치 외계인 보듯이 한다. 아빠의 투철한 이성이 반드시 죽음으로 치닫는 백혈병에 걸린 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거기엔 이성이 아닌 감성이 필요한 부분이 있을 텐데 말이다. 과연 샘과 아빠는 선을 넘을 수 있을까?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 펠릭스, 죽음 앞에서도 명랑했던 샘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잘 이겨내고 끝까지 용기를 지닐 수 있을까?


핵심을 찌르는 한마디, "신파는 아니겠지?"


이 영화, 신파가 아니다. 통통 튀기까지 하는데, 그게 감동을 자아낸다. 묘하다. ⓒ㈜미디어데이



죽어가는 자신의 이야기로 일기를 쓰고 영상으로 남기는 샘, 그 사실을 알게된 아빠와의 단문단답이 의미심장하면서 영화의 핵심을 찌른다. 이런저런 얘기가 끝나고 방을 나가기 전에 아빠가 묻는다. "사랑 무지개로 가득 찬 질질 짜는... 신파는 아니겠지?" 샘이 질색하며 "아니에요."라고 답하니, 아빠가 씨익 웃으며 "다행이다."라고 하고는 나간다. <열두살 샘>은 신파가 아니라는 거다. 


12살 어린 나이의 아이가 죽어가는 데 신파가 아닐 수 있다? 가장 우선적으로 당사자가 대단한 용기를 지녀야 한다. 그런데, 12살이면 나도 그랬듯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나이다. 공포로 벌벌 떨며 잠 못이룰 수 있는 나이인 것이다. 그런데 샘은 어찌 죽음에 초연하다 못해 유머러스할 수가 있을까? 영화라서?


먼저, 시간적으로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세 번의 재발과 두 번의 항암치료를 겪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항암치료는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동반한다고 알려져 있기에, 그걸 뚫고온 샘에게 죽음은 차라리 친숙한 존재일수도 있는 것이다. 그건 펠릭스도 마찬가지. 그래서 옆에서 지켜보는 부모님들이 더 힘들어 한다. 


그리고 학교를 가지 못하는 그들을 위해 특수교육가정교사가 주기적으로 오는데, 그 시간이 그들에게 크게 작용한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도, 샘이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영상으로 옮기는 것도 다 그 시간 덕분인 것이다. 교사는 그들에게 조심스럽지만 결코 숨기지 않고 말해준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 말이다. 


"결국 인류는 영원한 삶이란 불가능하단 걸 깨달았지. 하지만 우리는 뭔가를 영원히 남길 수 있단다. 바로 예술 작품이야."


'죽음'이 아닌 '삶'으로의 강한 끌림


결국, '삶'이다. 죽으면 모든 게 끝나니 사랑도 뭣도 필요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샘은 첫사랑에 설렌다. 내가 나일 수 있는... ⓒ㈜미디어데이



영화는 일종의 파트가 나뉘어져 있는데, 샘이 던지는 정답이 없는 문제와 그에 대한 나름의 답에 따라서다. 죽음에 대해서 어린 아이답지만 굉장히 원론적이고 진지한 질문이다. 예를 들면, '죽으면 아플까?' '사람은 왜 죽어야 할까?' 등이다. 과학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접근하면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정작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런 답들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그럼에도 답을 찾으려는, 정답이 없는 줄 알면서도 답을 찾으려는 샘의 행동은 삶으로의 강력한 끌림 때문이겠다. 


우린 이 영화로 '죽음'이 아닌 '삶'을 본다. 어린 아이의 치기어린 호기심으로 별 의미 없고 허접한 죽음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라, 어엿한 인간의 진심어린 고민과 치열하고 고등한 삶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고귀한 삶의 투쟁을 지켜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보고 삶 또는 죽음에 대한 정답을 찾을 수는 없다. '정답은 없다'는 정답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다만, 방향은 어렴풋이 짚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일종의 균형 감각이라고 할까. 삶과 죽음, 죽음과 삶을 그 어느 것도 멀리 하지 않고, 모두 끌어안되 내가 나일 수 있는 방법을 계속 강구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삶에도 죽음에도 매몰되지 않고 '나'를 이어나간다는 게, 추상적이기도 하거니와 인지한다고 해도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막상 죽음이 닥치면 그게 가능할까 심히 의문이 들지만, 또 못할 게 무언가 싶기도 하게 만드는,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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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스파이 브릿지>



영화 <스파이 브릿지> 포스터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2012년 작 <링컨>로 위대한 신념, 모두가 반대한 선택, 숨겨진 실화를 완벽에 가깝게 그려냈다. 2013년 아카데미에 12개 부분에 노미네이트되어 다니엘 데이 루이스에게 남우주연상 최초 3회 수상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3년 만에 다시금 위대한 신념, 모두가 반대한 선택, 숨겨진 실화의 이야기를 들고 온 스티븐 스필버그. 이번에는 그의 페르소나 톰 행크스와 함께 했다. 영화 <스파이 브릿지>다. 20세기 중반 냉전 시대의 스파이가 주인공이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스케일이 큰 영화에 탁월한 솜씨를 보이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연출과 각본에 참여한 코엔 형제의 이야기, 믿고 보는 배우 톰 행크스의 연기를 기대해본다. 


누구나 변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


아무런 설명 없이 한 남자를 쫓으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그가 길을 나서자 감시자들이 붙는다. 곧 그의 집을 수색하고 그를 끌고 간다. 아무래도 그가 스파이인 것 같다. 때는 미국과 소련 간의 핵무기 공포가 최극단으로 치단 1957년, 로젠버그 부부가 원자 폭탄 설계의 스파이 용의자로 구금되어 3년 만에 사형 당한 지 4년 후였다. 그 와중에 루돌프 아벨(마크 라이런스 분)은 소련 스파이로 지목된다. 



영화 <스파이 브릿지>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한편 잘 나가는 보험 전문 변호사 제임스 도노반(톰 행크스 분)에게 웃기지도 않은 의뢰가 들어온다. 그것도 강제적으로. 다름 아닌 루돌프 아벨의 변호를 맡으라는 것이었다. 즉각 처분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그를 변호함으로써 미국이 어떤 나라 인지를 보여주라는 의도였다. 이에 도노반은 수락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의 신념은 '누구나 변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였다. 설령 스파이라 할지라도. 


뜬금없지만 영화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병치한다. 최고의 전투기 비행사들을 CIA가 포섭해 적국을 상공에서 고도의 카메라로 찍게 하려는 미국의 수작이다. 왜 이 이야기가 필요하고 얼마나 중요한지는 나중에 나오지만, 너무 끼워 맞춘 게 아닌지 의아하게 만든다. 마치 도노반의 신념을 지켜주기 위해 필수불가결하게 진행되어야만 한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영화가 실화임을 인지한다면 꼭 그렇지도 않다. 


세상과 맞서는 도노반의 신념


도노반의 신념은 많은 이들을 분노케 한다. 당장에라도 핵 전쟁이 터질 것 같은 시기에 적국 스파이로 의심되는 이를 변호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게 아닌가.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게 당연하다. 심지어 누구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행동하고 생각해야 할 법정의 판사조차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도노반의 합리적이고 실현 가능한 예언(?)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또한 그의 신념은 그의 가족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그 피해를 크게 그리고 있진 않지만, 알 수 없는 이가 집에 총을 난사한다 거나 그걸 조사하러 온 경찰이 오히려 도노반과 가족들에게 성을 낸다 거나 도노반의 변호에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 앞에 진을 치고 항의를 한다 거나 하는 것들이다. 링컨이 신념을 위해 아들을 사지로 내몬 것보다는 덜 하겠지만, 신념은 때로 내가 내 자신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의 가족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제일 크게 다가오는 딜레마일 것이다. <링컨>과는 달리 <스파이 브릿지>에서는 그걸 크게 부각 시키진 않았다. 조금 아쉽게 다가온다. 



영화 <스파이 브릿지>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도노반은 첫 번째 신념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두 번째 신념 전쟁을 치르러 베를린으로 떠난다. 그가 예언 했듯이 미국인 군인이 소련 측에 붙잡혔고 루벨과 맞교환을 하기 위해서 였다. 소련 측에서 먼저 원했기 때문에 일은 순조로울 것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 또 한 명의 미국인 학생이 소련 측에 붙잡힌다. 정확히는 소련의 위성국가 동독에. 도노반은 군인과 루벨과의 맞교환만 실행하면 되는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도노반은 군인과 학생을 루벨과 교환하려는 신념이 생긴다. '모든 사람은 변호 받을 권리가 있다'는 신념에 이어지는 것일 테다. '모든 사람'에는 당연히 미국인 군인과 학생, 소련 스파이 루벨도 포함된다. 그리하여 도노반은 CIA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인 군인과 학생을 동시에 돌려보내기 위해 고군분투를 마다하지 않는데... 한낱 민간인 신분으로 국가가 반대하는 일을, 그것도 그 험악한 시기에 행할 수 있을까? 



스티븐 스필버그, 그만의 휴머니즘이 한계에 이르다


실화를 이야기할 때 언제나 휴머니즘에 천착하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메시지가 이번 영화에도 통용될까? 자칫 잘못하면 영화가 이상하게 흘러갈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매번 같은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의 스타일에 질릴 수도 있다. 물론 그는 그의 스타일을 고수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문제는 영화의 배경이 그 어떤 전작보다 더 암울하다는 점이다. 


그럴수록 긴장과 함께 감동이 배가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감독이자 작가이자 배우이다. 반전을 최대한 배제하고 '왜'와 '어떻게'에 초점을 맞춘다.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거기에는 개인의 용기와 신념이 절대적이다. 그 용기와 신념은, 어떻게 실천에 옮길 지가 매우 중요하다. 이 또한 개인의 능력이 절대적이다. 



영화 <스파이 브릿지>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개인의 용기와 신념과 능력이 절대적으로 적용되는 상황, 결코 좋지 만은 않아 보인다. 영웅이 없으면 사회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것인가? 위대한 개인들만이 세계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인가? 영화는 말하고 있다. '맞아도 맞아도 계속 일어나 서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 어떻게 세상에 그런 사람들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그런 사람들만이 있을 수 없다고 치자. 그렇다면 몇몇 사람들에게 그런 능력을 기대한다는 것인데, 그 몇몇 개인들은 왜 그래야만 하는 건지? 평범한 사람들은 할 수 없으니, 평범한 사람들의 거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몇몇 개인들이 그 일을 도맡아 하고,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영웅 대접을 받고 살라는 것인지? 그 사람들이 단지 뛰어난 용기와 신념과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 만으로?


영화는 거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그건 스티븐 스필버그 또한 마찬가지다. 그의 영화가 기막힌 울림과 감동과 재미와 여운을 주는 건 맞지만, 그것에 계속적으로 천착해 누구나 인정하는 거장의 반열에 올라간 건 맞지만, 아직 그 이후를 보여주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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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10월의 쌀쌀한 날씨, 새벽의 진솔한 대화로 우리는 전에 없이 친해졌다. 소심하기 짝이 없는 나였기에 선뜻 '사귀자'라는 말을 전하진 못했지만, 우리는 성의껏 붙어다녔다. 수업하는 반이 달라서 평일 수업시간에는 같이 할 수 없었지만, 저녁이면 같이 밥을 먹고 주말이면 같이 놀러다니곤 했다. 종종 점심도 같이 먹고. 


점심하니까 생각나는 게 있다. 그녀가 좋아하는 그것. 다름 아닌 '치킨 버거'. 그것도 학교 내 매점에서 파는 허접한(?) 치킨 버거를 그렇게 좋아했다. 점심만 되면 그것만 먹었던 것 같다. 참 특이한 순서로 먹었는데, 버거라면 응당 한 입에 내용물을 가득 넣어 먹어야 하거늘 그녀는 빵 따로 야채 따로 치킨 패티 따로 먹었다. 재료의 오리지널을 느껴야 한대나 뭐래나. 그 지론은 지금도 변함 없다. 


또 하나 좋아하던 점심의 주 메뉴가 있었는데, 다름 아닌 '라면'이었다. 한국 라면이 아닌 중국 라면! 그건 나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무슨 말이냐면, 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너무 너무 너무 저렴하고 맛있었다. 라면 하면 한국, 한국 라면 하면 신라면인줄 알고 살아왔는데 그게 아니었다. 특히 컵라면을 즐겼는데, 6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환상의 맛이다. 우리는 한마음 한뜻으로 중국 라면을 즐겼다.


자, 이런 걸 함께 할 정도로 우린 친해졌다. 전에 없이 친해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봐도 '쟤네 정말 친해 보인다.'라고 느낄 정도로 말이다. 급기야는 사귀는 게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았으니. 그런데 문제는 당사자들이었다. 내가 연장자고 남자인데 먼저 말을 꺼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난 시간이 가도 가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왜? 도대체 왜? '용기'가 없었다. 그 놈의 용기가 터무니 없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공식적으로 사귀지만 않을 뿐 누가 봐도 사귀는 것처럼 보이는 이상한 관계. 우리는 지쳐갔다. 아마 그녀가 훨씬 더 지쳤을 것이다. 이 바보 멍청이. 친해지면 다야? 친해지는 게 목표인거야? 이 먼 타향 땅에서 그저 외로움을 덜고자 친하게 지내는 게 다란 말이야?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지르는 절규 아닌 절규가 들리는 듯했다. 그런데 어쩌랴... 용기 없는 나의 모습을...


어떻게 해야 할까. 전전긍긍. 뭐라고 말해야 할까. 노심초사. 과연 날 받아줄까. 이럴 땐 경거망동할 필요가 있는데. 너무 안타깝다. 그때의 나에게 말하고 싶다. 진짜 사랑한다면 앞뒤 가리지 말고 고백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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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부키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2년이 지났다. 10살 때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20년 동안 혼자 사신 건데, 그럼에도 외할아버지는 정말 건강하셨다. 돌아가시기 1년 전에 쓰려지셔서 투병 생활을 하시다가, 건강을 되찾고 집으로 돌아오셨다고 했다. 그러고는 얼마 안 있어서 다시금 쓰러지시곤 일어나지 못하셨다.  


그때 집안 어른들은 외할아버지를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호스피스 병원으로 모셨다. 그리고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관계된 모든 가족들이 한 번씩 왔다 갈 때까지 살아 계셨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임종을 맞이하셨다. 외할아버지는 당신 생의 마지막에 만족하셨을까? 혹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가족들을 원망하셨을까?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생의 끝까지 죽음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과 이별 후에 남겨질 슬픔, 그리움을 견디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현대 의학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발전해 왔다고 한다. 생명 연장의 꿈! 그 꿈은 거의 현실이 되었다. 비록 엄청난 돈과 노력이 들겠지만, 무슨 수를 쓰던지 생명을 연장 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현대 의학이 오히려 죽음의 순간을 망가뜨린다


문제는 죽음을 적으로 인식하고 어떻게 하든 피하려고 만 할 뿐, 죽음을 자연스러운 이치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부키)는 여기서 시작한다. 죽음이 비록 우리의 적일지 모르지만, 자연스러운 이치이기도 하다는 점을 인지하면서 말이다. 이런 인식이 제대로 자리 잡지 않는 지금, 현대 의학은 오히려 죽음의 순간을 망가뜨리고 있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현대 의학이 해결하지 못할 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해결하지 못할 문제에 달려 들어 환자들의 죽음을 단지 의학적 경험으로 생각해 인위적인 생명 연장을 실행한다면? 분명 엄청난 고통을 초래하게 되고 말 것이다. 


저자는 이 문제를 다양한 사례와 함께 철학적으로 접근한다. 그는 먼저 자신을 포함한 의료계 종사자들에게 말한다. '건강과 생존'을 보장하는 것 그 이상의 일을 해내야 한다고. 그건 바로 환자의 '행복'을 보장해 부는 것이다. 그 방법론으로 '완화치료'가 떠올랐고, 저자는 이 방법으로 환자의 마지막을 보살펴준다면 분명 환자에게 놀라운 혜택을 가져다 줄 거라고 믿는다. 


그 믿음에는 수많은 실제 사례들이 뒷받침하고 있다. 그 사례들의 주인공인 환자들은 하나같이 생의 마지막을 고통스럽게 보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죽음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사람들과 함께, 온갖 의료 기기들에 둘러싸여 생명만 부지하며, 죽기 직전까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건 병원 뿐만 아니라 요양원도 마찬가지다. 앨리스 할머니는 "집이 아니라 병원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하기도 했다. 


요양원도 환자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문제는 여기에도 존재한다. 집에서 보살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노인 환자들의 경우, 병원이 아닌 요양원으로 보내지곤 한다. 치료 보다는 요양을 통해서 보살핌을 받고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요양원에서의 보살핌은 환자가 원하는 보살핌이 아니라고 말한다. 환자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 다는 것이다. 


"우리는 저물어 가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편안한 일상을 보낼 수 있게, 곁에 있는 누군가와 마음을 나눌 수 있게, 그리고 그저 수수한 목표를 성취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도 생의 마지막까지 '삶의 질'을 우선시한다는 것, 환자가 아닌 인간으로 대해주길 바란다는 것, 그리고 그저 안식을 원하고 누군가 옆에 있어 주길 바란다는 것. 하지만 이 문제를 기존의 병원이나 요양원이 완전히 이행할 수 없다는 것. 저자는 이를 위해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며 그 개념을 지지한다. 앞서 말한 '완화치료' 방법론을 실행에 옮긴 것이리라. 


1990년대 초, 미국 오리건주의 케런 브라운 윌슨은 '어시스티드 리빙'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집이라는 환경 안에 환자들이 원한 바를 도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 개념은 '보호시설에 감금됐다고 느끼지 않도록 하자'는 데 목표를 두었다. 환자는 없었고, 거주민 만 있을 뿐이었다. '집'과 다를 바 없는 시설에 반려동물을 키우는 걸 비롯해 거의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다만 단지 내에 항상 간호사가 대기해 언제든 도움을 청할 수 있게 하였다. 


삶의 질을 추구하기 위한 생의 마지막에 대한 구상


이 실험을 비롯한 '생의 마지막에 대한 구상'의 개념은 성공한 듯 보인다. 오히려 기대 수명이 늘어 났고, 무조건적인 생명 연장에 따른 의료 비용이 줄었기 때문에 종말기 의료 비용도 엄청나게 줄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의 질을 추구했기에 환자들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는 사망률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저자는 이 결과가 가장 중요하진 않다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들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제공했다는 것 그 자체다. 그들은 의미 있고 기쁘고 만족스러운 삶을 경험할 수 있었다. 물론 얼마나 더 오래 사는 지에 더 중점을 둘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것은 의학이 만들어낸 가면이 아닐까? 


"의료 전문가들은 마음과 영혼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신체적인 건강을 복구하는 데 집중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삶이 기울어 가는 마지막 단계에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할 권한을 의료 전문가들에게 맡겨버렸다." (본문 중에서)


시선은 호스피스로 옮겨간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부분 가톨릭계 병원에서 실시하고 있는데, 그래서 인지 호스피스 하면 종교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저자는 호스피스를 엄연한 의학의 한 부분으로,  지난 10년 동안의 '연명치료' 실험을 뒤로 하고 심각한 질병을 앓는 환자들을 대할 때 중요한 접근법이라고 말한다. 이 또한 앞서 언급했던 '완화치료' 개념의 실행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당하는 죽음에서 맞이하는 죽음으로


책은 '독립적인 삶'에서 시작해 '용기'로 끝난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서인 것 같은데, 반대로 해도 이상할 건 없어 보인다. 저자에 따르면 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은 우리는 삶의 주인으로서 자율성(자유)을 유지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핵심적 가치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독립적인 삶은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하지만 죽음 또한 피할 수 없는 자연현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유는 신봉하고 그 자유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면서도, 정작 죽음과는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는다. 그건 의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저자는 마지막에 '용기'를 말하는 것 같다. 죽음을 피하지 않고 대하는 용기 말이다. 


과연 나에게 마지막 순간이 오면 용기를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삶의 질을 우선하여 생명 연장을 위한 어떤 기술도 행하지 않겠다며, 그렇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혹여 치료를 해서 완치가 된다면? 완치는 안 되더라도 단 며칠, 몇 개월, 몇 년을 더 살 수 있다고 한다면? 물론 엄청난 고통이 뒤따르더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삶이 고통의 연속 아니던가? 


선택의 독자의 몫이고 우리의 몫이다. 이는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한 바, 삶에서 선택의 순간들이 자신들의 몫이었듯 죽음의 순간도 자신들의 몫이라는 걸 인지해야 한다. 미국은 2010년 이미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한 비율이 70%를 넘었다고 한다. 이는 의식을 회복할 수 없을 때 환자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으로, 연명치료를 포기한다는 문서이다. 


우리나라에도 '웰다잉(Well-dying)'이라는 개념으로 차츰 정착되고 있다. 지난 2009년 고 김수환 추기경이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존엄사를 몸소 실천한 바 있다. 죽음은 결코 친숙해지기 쉽지 않다. 죽음에는 '혼자'라는 개념이 깊숙이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외롭지 않은 죽음이라면 어떨까?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관심을 갖고 생각은 해봐야 할 것 같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 10점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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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