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래빗 홀>


영화 <래빗 홀> 포스터. ⓒ프리비전 엔터테인먼트



조용하고 한적한 교외의 큰 집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베카(니콜 키드먼 분)와 하위(아론 에크하트 분). 하지만 그들에겐 불과 8개월 전 크나큰 일이 있었다. 네 살 된 아들 대니가 달려가는 개를 따라가다가 차에 치여 세상을 등진 것이다. 그들은 애써 밝은 척 괜찮은 척 하고 비슷한 일을 당한 부부들 모임에 나가 위안을 받으려 한다. 


쉽지 않다. 아니, 너무 어렵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베카는 대니에 대한 흔적을 지워나가며 과거를 뒤로 한 채 나아가려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하위는 매일같이 대니의 살아생전 동영상을 보며 과거에서 위안을 찾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차이 때문인지 그들 사이는 알게 모르게 점점 벌어진다. 


문제만 일으키던 베카의 여동생이 임신을 해 남자친구와 함께 엄마 집에 머무르게 된다. 한편, 베카 하위 부부와 절친했던 데키 릭 부부, 하위와 릭은 여전히 잘 만나고 대니를 포함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지만 베카와 데키는 연락이 끊긴 상태다. 


베카는 다른 사람이 아닌 대니를 치인 장본인 제이슨을 만나 위안 아닌 위안을 받고자 하는데, 아들을 잃었던 엄마와 아이를 갖게된 여동생과는 계속 부딪힌다. 하위는 모임에서 알게된 개비를 만나 동질감에서 오는 위안을 받고자 한다. 여기서 방식의 옳고 그름은 의미가 없다. 그들은 서로 각자만의 방식으로 위안을 찾아야만 하는 것일까?


죽음이라는 아픔


영화 <래빗 홀>의 한 장면. ⓒ프리비전 엔터테인먼트



영화 <헤드윅>과 <숏버스>를 통해 자못 파격적인, 그만의 언어로 고민을 드러내고 편견을 부수고자 했던 존 카메론 미첼이 <래빗 홀>을 통해서 '아픔'을 말했다. 아픔을 대하고 견디고 이겨내는 방식을 고민하고 또한 편견을 부수고자 한다. 지루하다 할 만큼 정적인 대응일지 모르지만, 죽음이라는 아픔을 대하는 방식으론 파격적이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 가족을 잃는다는 것, 살아갈 날이 창창한 나의 자식을 잃는다는 것. 죽음에 차등이 있일 수 있겠냐마는, 남겨진 이가 가장 아픈 건 아마도 자식 잃은 부모의 사례가 아닐까. 영화는 죽음에 관한 최고 수위의 아픔을 받고 견뎌내야 하는 한 부부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누구나 누군가를 잃지만 이런 류의 끔찍한 상실을 겪어본 이는 많지 않다는 것과 그로 인해 이 영화를 완전한 몰입 하에서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것과 그럼에도 상실의 아픔을 공유하고 그 이상의 위로와 위안 없이도 그 자체로 더할나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을 미리 말해둔다. 


자식 잃은 아픔에 대항하는 방식


영화 <래빗 홀>의 한 장면. ⓒ프리비전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자식 잃은 아픔에 대항하는 두 부부의 방식 차이를 우리에게 내보인다. 베카가 미래지향적이고 하위가 과거지향적이어서, 베카는 대니의 흔적을 지우려 하고 하위는 지니려고 하는 것일 수 있다. 베카가 과거의 인연을 끊으려 하면서 자신 안으로 천착해 들어가려고 하는 반면 하위는 과거의 인연을 계속 이어나가며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동질감 어린 위안을 받고자 한다. 


한편, 현재 대니는 떠나고 없다. 베카는 대니의 흔적을 지움으로써 도망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이슨이라는 아픔의 가장 큰 축을 대면하는 용기도 보인다.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아주 잘 알지만, 그걸 인정하는 것과 그를 만나서 대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차원이 다른 차이가 있다. 그녀의 행동은 정녕 위대하다.


하위가 보이는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또한 지극히 일반적이고 인간적이다. 누구라도 자식을 상실하면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도망치고 싶다. 아니, 도망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상실의 때 이전으로 돌아가버리고 마는 것이다. 제이슨과 마주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두려움이다. 그의 모습에서 또 다른 내가, 또 다른 우리가 보인다. 


영화는 말한다. 그럼에도 베카와 하위는 모두 힘들다고 말이다. 위대한 베카와 일반적인 하위 모두 이 속절없는 상실과 아픔과 슬픔 앞에서 한없이 힘들다고 말이다. 과연 이 앞에 '어떻게'를 붙일 수 있을까. '어떻게 이 아픔을 이겨내야 하는가' 따위의 물음이 존재할 수 있을까, 존재하는 게 맞긴 할까. 


영화가 건네는 답


영화 <래빗 홀>의 한 장면. ⓒ프리비전 엔터테인먼트



답을 주진 않지만, 아니 답을 줄 수 없지만, 답을 찾아보자. 제목에서 찾을 수 있고, 뜻밖에 베카 엄마의 경험에서 묻어나오는 무심한듯 진정어린 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영화 내내 스치듯 지나가는, 제이슨이 그리는 만화책 '래빗 홀'.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래빗 홀을 통해 가게 된 그곳에 나의 다른 버전이 존재한다는 내용이다. 


고통은 베카와 하위 부부를 단 한 순간도 놔두지 않을 것이다. 출구는커녕 작은 빛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그들은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이 영화를 통해서만이 아니더라도 단언할 수 있지만, '래빗 홀'에 대한 상상이 순간이나마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건 분명하다. 영화가 건네는 답 아닌 답이다. 


베카 엄마에겐 아들이 있었다. 서른 살에 헤로인 과용으로 죽은 아들이. 베카에게 '아들의 죽음'이라는 동질감으로 비교하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려 하지만 반감만 살 뿐이다. 그럼에도 '아들의 죽음'이 주는 치명적 아픔은 같은 것, 베카는 엄마에게서 위안을 받는다. 그녀의 말이 영화가 건네는 또 다른 답이 되지 않을까. 


"언제부터인가 견딜 만해져. 결국은 밖으로 나와 주머니에 넣고 다닐 작은 조약돌만 하게 되지. 때로는 잊어버리기도 해. 그러다 또 문득 생각나서 보면 거기 있는 거야. 그래, 그런 거야. 끔찍할 수도 있지. 하지만 늘 그런 건 아니야. 그건 뭐랄까, 아들 대신 너에게 주어진 무엇, 그냥 평생 가슴에 품고 가야 할 것,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그렇지만... 사실,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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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윈드 리버>


영원한 설원의 그곳 '윈드 리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유로픽쳐스



2015년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2016년 <로스트 인 더스트>로 칸을 사로잡으며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테일리 쉐리던. 그는 이 두 편의 웰메이드 영화 각본을 책임졌다. 아무래도 영화 스텝 중에선 연출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클 텐데, 각본이 각광받는 영화가 종종 있다. 이야기가 주는 힘이 어마어마한 경우가 그렇다. 


테일리 쉐리던이 다시 1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영화로 찾아왔다. 이번엔 각본에 더해 연출까지 책임진 <윈드 리버>다. 미국 서부 와이오밍주에 위치한 '윈드 리버'라는 곳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꾸려지는데, 그곳은 인디언 보호구역이거니와 끝없는 설원이 펼쳐져 있다. 8월까지 눈이 내려 쌓인다. 


아무래도 사건이 단순히 사건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할듯, 상징과 비유가 보는 이의 머리와 가슴을 뒤흔들고 후벼팔 것이다. 대략의 분위기만 훑어보아도 전작 두 편의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우린 이 영화에서 미국의 속살을 보게될 여지가 크다. 그리고 거기에서 거대한 두려움이나 불안, 희망의 작은 불씨를 느낄 것이다. 


아픔과 슬픔, 그리고 희망


설원에 파묻힌 아픔과 슬픔들, 그럼에도 희망의 불씨는 살아 있다. ⓒ유로픽쳐스



끝없이 펼쳐진 설원의 한밤중, 피투성이 얼굴의 한 여인이 맨발로 달린다. 무엇인가로부터,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는 듯하다. 그녀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곳은 일개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없는 윈드 리버 아닌가. 한편 야생동물 사냥꾼 코리(제레미 레너 분)는 옛 장인어른 농장에서 소가 피습당했다는 속보를 접하고 윈드 리버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향한다. 그 원인을 찾아 근처를 수색하던 도중 여인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 여인은 인디언 나탈리, 코리도 잘 안다. 다름 아닌 3년 전 잃은 딸의 절친이었다. 그런데 나탈리는 성폭행을 당한 뒤 설원의 한복판에서 죽어 있다. FBI의 허가가 필요한 일이다. 가장 근처에 있는 FBI 요원 제인(엘리자베스 올슨 분)이 달려온다. 하지만 그녀는 신참이거니와 윈드 리버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코리가 앞장서 그녀를 이끈다. 코리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는 만큼, 나탈리의 아빠와 약속한다. 반드시 그 놈을 잡겠다고, 잡아서 죽여버리겠다고, 아주 고통스럽게, '윈드 리버'만의 방법으로. 제인과 코리, 코리와 제인의 공조 수사가 시작된다. 그 끝에서 형용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이 반길 준비를 마쳤다. 


그럼에도 희망을 언급할 수 있는 건, 아픔과 슬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래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덕분이다. 또한 그런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이해하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들 덕분이다. 영화는 사회에 만연한 '잔인'에 창끝을 겨누는 것에 초첨을 맞추면서도, 잔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조용한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설원과 미국


이 설원은 미국 그 자체다. 단적으로, 변화를 기대할 수 없지 않은가. ⓒ유로픽쳐스



설원은 자연이 줄 수 있는 최악의 조건 중 하나다. 바다에서 생존하는 것, 사막에서 생존하는 것 모두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설원은 이것들과는 또다른 차원이다. 설원에 오아시스 따위가 있겠는가. 맹렬한 추위의 설원에서 춥지 않을 방법을 찾을 수 있겠는가. 시시각각 변하는 사막과 바다와 달리, 변함없는 설원 아래 무엇이 있는지 알 방도가 있겠는가. 눈이 와서 더 쌓이면 쌓였지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설원이 상징하는 건, 이제까지 테일리 쉐리던이 취한 스텐스를 볼 때 '미국'이다. 더이상 변화를, 발전적이고 건설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미국의 축소판이다. 그렇다면 왜 와이오밍주 윈드 리버일까. 인디언 보호구역말이다. 영화는 미국에 남은 유일한 희망이 거기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코리는 비록 인디언이 아닌 백인이지만 100년 전에 선조가 건너와 거의 인디언이나 다름 없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고 그들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몇몇 인디언들은 그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편 코리와 달리 그곳에 일을 하러 온 백인들이 있다. 그들은 인디언들을 이해하기는커녕 그곳의 자연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불이해는 백인과 인디언만의 문제 따위가 아니다. 이는 일종의 상징이고, 미국에서 이런 모습은 전 세대와 전 인종과 전 계급 간에서 볼 수 있다. 그러하기에 영화에서 FBI 신참요원 제인의 행동이 중요하다. 그녀는 단순히 여러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어리바리 신참의 클리셰가 아닌 것이다. 그녀야말로 '희망'이다. 그녀가 얼마나 이 자연을 이해하고 인디언들을 존중하고 그 모든 것에 공감을 할 수 있는지. 


이해와 공감의 부재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다름 아닌 '이해와 공감의 부재'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유로픽쳐스



설원에서 사람 죽이는 일은 아주 간단하다.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할 필요가 없다. 기절시키고는 제대로 된 장비 하나 없이 설원 한가운데에 버려두면 된다. 멀리 못가 죽고 말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그런 곳이 비단 설원뿐이겠는가. 어느 사회에서라도 가능한 일이다. 우린 그런 사회에서, 그런 나라에서 살고 있다. 미국만의 얘기가 아니다. 세계는 긍정적인 방향으로든 부정적인 방향으로든 서로를 따라간다. 


모든 건 이해와 공감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수없이 오랫동안 그곳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부재는, 아무 준비와 생각 없이 현장에 온 제인의 모습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또한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부재는, 영화의 내용과 메시지 특성상 나와 있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과연 친히 나서서 악을 처단하려는 코리의 행동은 옳은 것일까. 물론 그가 행하는 처단 방법은 인간에게 절대적 최악의 조건인 '설원'이라는 자연에 맡기는 것일 테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 자체가 괜찮은 걸까. 영화가 그를 희망에의 연결고리로 포지셔닝해도 좋은 것일까. 판단하기 힘들지만, 그만큼 세상이 절망적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거 하나만 기억해도 충분하다. 그 설원에서 죽어간 그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까. 그 아픔에 공감하고 기억하고, 그 아픔에 슬퍼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 희망의 작은 불씨일지 모르지만, 결코 꺼지지 않을 불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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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소설 읽기] 한강의 <회복하는 인간>


<회복하는 인간> 표지 ⓒ아시아



한 자매가 있다. 그들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언니는 화려한 외모에, 건실하고 잘생긴 형부와 결혼해 누구라도 부러워할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반면 동생은 평범한 외모에, 고지식하고 고집이 세고, 신통찮은 전공을 택해 불안정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동생이 언니를 질투하고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언니가 동생을 질투하고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자매 사이는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지고 죽을 때까지 좁혀지지 않는다. 조만간 언니에게 죽음이 찾아온 것이다. 동생은 그렇게 언니를 보내고 고통 속에 살아간다. 아니, 일부러 고통 속으로 걸어들어가 나오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 마치 그것이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자 방식이라는 듯이. 


'고통'과 '아픔'이라는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소설가 한강의 <회복하는 인간>은, 역시 고통과 아픔이 소설을 관통한다. 주인공인 동생은 아프고 고통스럽고 동생의 언니도 아팠고 고통스러웠으며 그들의 가족 또한 그랬다.


초월적 아픔과 고통 앞에선, 그 어떤 아픔과 고통도 없다


동생이 현재 아픈 이유는 화상에 의한 괴사 때문이다. 괴사로 구멍이 난 그곳은 복숭아뼈 아래쪽인데, 닷새 전 왼쪽 발목을 접지른 후 찾아간 한의원에서 처방해준 직접구 때문이었다. 살갗이 탈 때까지 불붙은 쑥덩이를 얹어 두는 뜸인 직접구로 동생의 아픔과 고통이 시작된다. 


그렇지만 실제적 아픔과 고통은 따로 있다. 다름 아닌 언니라는 존재,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지만 언젠가부터 다시는 가까워질 수 없었던 존재, 동생에게만 불치병의 사실을 알리곤 동생과는 멀어진 채 고통과 아픔 속에서 속절없이 떠난 존재 때문이었다. 그 존재 때문에 동생은 아파도 아픈 게 아니었고, 고통도 고통이 아니었다. 그 모든 걸 '이따위'로 치부해야 했다. 


그런 때가 있다. 초월적 아픔과 고통 앞에선, 그 어떤 아픔과 고통도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말이다. 그럴 때면 초월적 아픔과 고통이 아닌 '일반적' 아픔과 고통에서 오히려 위로를 받곤 한다. 거기에서 위안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오로지 그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건 강해지는 것일까, 약해지는 것일까. 초월적 아픔과 고통에서 회복된다고 봐야 할까, 일반적 아픔과 고통이 가중된다고 봐야 할까. <회복하는 인간>은 그 무엇도 아니라고, 그러며 모두 맞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건 아픔과 고통 그 자체로 수렴된다. 


아픔과 고통을 짊어지고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이다


소설은 아픔과 고통으로 시작해 또 다른 아픔과 고통으로 끝난다. 초월적 아픔과 고통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다른 아픔과 고통으로 버텨내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며 조금씩 회복되어 가는 기미가 보인다. 아주 조금씩. 그러나 또 다른 아픔과 고통이 시작된다. 이제는 거기서 벗어나기가 싫어진다. 더 이상 생을 살아가기 싫다는 암시일까?


하지만 초월적 아픔과 고통에도 생을 마감하지 않은 걸 보면, 그런 암시로 보이진 않는다. 결국 계속 버티고 살아갈 거라 생각된다. 다만, 온갖 아픔과 고통을 짊어지고서. <회복하는 인간>은 그것만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회복은 원래의 상태로 돌이키거나 원래의 상태를 되찾는 것이 아니라, 현 상태를 유지하는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치유는 병을 낫게 하는 게 아니라, 병을 짊어진 채 버티며 살아가는 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한강 작가의 글쓰기와 일맥상통한다. 짧은 소설이기에 집대성했다고 보는 건 힘들지만, 한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줬다고 하겠다. 이야기를 읽는 재미를 추구하는 분들에게는 지루하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끼기까지 할 수 있겠지만, 보다 고민과 통찰을 원하는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소설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소설에는, <회복하는 인간>에는 '인간'이 보인다. 



아시아 출판사가 후원하는 '한국 대표 소설 읽기'의 일환입니다.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과 함께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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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그해 여름>



<그해 여름> 표지 ⓒ이숲



일 년 동안 지치고 힘들었던 심신을 편히 쉬게 하기 위해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 매년 새로운 곳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익숙한 곳으로 가는 사람들도 많다. 익숙한 곳이란 다름 없는 '고향'. 하늘 맑고 물 좋은 그곳으로 가는 건 심신을 쉬게 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 


나 또한 어릴 때면 온 가족이 모여 그곳으로 향했다. 아버지의 고향이자 할아버지·할머니, 증조할아버지·증조할머니의 산소가 있는 강원도 평창으로. 언제나 먼저 할아버지 내외, 증조할아버지 내외 분께 인사를 드리고 휴가를 즐겼다. 나에게 그때 그 시절들은 완벽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한없이 편안한 공간, 그곳에서의 여름


<그해 여름>(이숲)은 그 시절의 완벽한 기억을 되살리기에 충분했다. 로즈는 가족과 함께 매년 여름 아와고 비치(미국 온타리오 주에 있는 해변 휴양지 와사가 비치)를 찾는다. 그곳은 로즈가 태어난 곳 근처다. 로즈의 아빠는 이와고가 나무에서 맥주가 주렁주렁 열리고 사람들이 대낮까지 실컷 자는 동네라고 하고, 엄마는 이와고에 오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랑 함께 살던 오두막집이 생각난다고 한다. 그곳은 그런 공간이다. 한없이 편안한 공간. 


로즈에게는 매년 여름마다 만나는 친구 윈디가 있다. 로즈가 다섯 살 때부터 매년 여름이면 만나는 오두막집 친구로, 로즈보다 한 살 정도 어리다. 그들은 십 년 동안 그곳에서 여름 휴가를 즐기며 좋은 추억들을 쌓아 왔다. 그 좋은 추억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곤 했다. 그러다가 그해 여름이 왔다. 어김없이 찾아온, 매년 여름과 다를 바 없는 여름이었지만 그해 만큼은 달랐다. 


그들은 열다섯 인만큼 성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섹스에 대해서도 조금은 안다. 관심도 있고. 다만 두렵다. 그렇지만 누굴 좋아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로즈는 이와고에서 먹거리를 살 수 있는 유일한 가게인 브루스터 종업원 던크를 좋아하게 된다. 던크가 로즈에게 던진 한 마디 '어, 거기 금발도 또 보자'. 얼굴이 빨개지는 로즈. 


한편 로즈의 아빠와 엄마 사이가 심상치 않다. 편안하게 지내려고 온 휴가에서도 그들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2년 전 엄마는 둘째를 낳고 싶어 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 일로 냉전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단순히 그 일로 만이라고 보기엔 뭔가 이상하다. 엄마는 아빠의 스킨십에도 너무 심하게 긴장을 하는 듯 보이고, 아빠는 엄마의 한 마디로 갑자기 화가 나곤 했다. 그리고 툭하면 이혼 얘기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보고 느끼고 있는 로즈는 조용히 자리를 피하곤 하지만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막연한 두려움과 함께 실제로 다가오는 압박이. 그럴 때면 엄마는 잔소리만 할 뿐이고, 아빠는 과장된 유쾌함으로 로즈를 불러내 해명 비슷한 말로 안심 시키려 한다. 하지만 로즈는 다 알고 있다. 


로즈가 좋아하는 던크, 로즈의 가족인 엄마와 아빠, 그들은 모두 그해 여름 로즈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모든 걸 함께한 친구 윈디 만이 그녀에게 힘이 되어줄 뿐이었다. 과연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던크에겐 여자가 있었고, 엄마와 아빠에겐 그들만이 간직한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작품


로즈의 사랑이, 로즈의 갈등이, 로즈의 우정이 곧 나의 사랑과 갈등과 우정인 것 처럼 느껴진다. 그녀의 아픈 사랑은 오롯이 친구 윈디하고만 견뎌내야만 했다. 아니, 정확히는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어느 누구도 내 사랑을 대신 해주지 못한다. 가장 친한 친구가 그 사랑에 질투를 느끼지 않고 방해를 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그녀의 가족과의 갈등은 그녀가 당할 수 있는 최악의 아픔이다. 열다섯에 불과한 그녀에게 닥친 최대의 시련이다. 단순한 다툼을 넘어 큰 소리로 서로를 물고 할퀴는 그들의 모습에 로즈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그냥 바라고 바랄 뿐이다. 그들이 돌아오기를. 분명한 건 그들이 돌아오려면 어떤 크나큰 계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녀가 윈디와 나누는 우정은 그녀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이다. 그녀의 아픈 사랑과 아픈 갈등을 언제나 함께 하며 그 아픔을 최소한 반은 가지고 가준다. 윈디와 함께 있는 것 만으로도 충분할 정도이다. 그해 여름이 달랐던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윈디와의 잊을 수 없는 우정 확인이었을 것이다. 아픔만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잃은 것이 있다면 얻은 것도 있다는 인생의 진리를 배울 수 있었다. 


이 작품은 만화로 나왔다. 그림으로만 느낄 수 있는 상황들을 잘 표현해 놓아서 작품을 이해하는 데 수월했다. 그 수월함은 작품의 그 이면을 살피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건 곧 로즈의 사랑과 갈등과 우정 그 이면이었다. 그림 자체는 내 스타일이 아닌 관계로 예쁘다고 할 순 없었다. 등장 인물들이 하나 같이 못생겼다. 하지만 '아름답다'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덜 성숙한 그들의 모습이 다름 아닌 우리라는 걸 느낄 수 있다는 아름답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극화적으로 꾸미지 않은 스토리는 더욱 오감을 사로잡는다. <그해 여름>은 분명 아픈 이야기이지만, 여름 휴가처럼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오감을 사로잡는다는 건 그 잔잔함 속에 묻어 나는 잔인함 때문일 것인데, 그 잔인함마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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