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책 다시 읽기]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민음사



1960년대,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직장 파티에서 한 눈에 서로를 알아본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수적이고 답답하며 까다롭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곧 결혼한 그들은 천생연분이었고, 함께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나가길 원했다. 굉장히 전통적인 형태의 가정을. 


많은 자식을 낳아 키우며 주기적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가족들을 불러 함께하길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반대를 무릅쓰고 분수에 맞지 않는 큰 집을 산다. 큰 집을 사는 것도 사는 거지만, 무엇보다 많은 자식을 낳는 것에 반대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너무 서두른, 그래서 모든 걸 다 움켜쥐려 한다는 인상. 기어코 그들은 많은 자식을 낳는다. 막상 그들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그 모습에 심취한다. 


허위에 가득 차 있는 '칭찬받아 마땅한 생각과 행동'


영국을 대표하는 거장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도리스 레싱의 1988년작 <다섯째 아이>는 평범하고 지루하기까지 한 인상을 주는 초입부를 내보인다. 보수적이고 답답하고 까다로운 젊은 부부의 고집이 많은 이들의 질타를 뚫고 나아간다. 거기엔 왠지 모를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작가가 의도한 바이겠는데, 작가가 보기엔 그들의 '칭찬받아 마땅한 생각과 행동'이 허위에 가득 차있는 것이다. 


1960년이라면 그야말로 세상이 요동치고 있는 시기다. '혁명의 시대', 그런 시대에 이토록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고집을 꺾지 않는 젊은이들이라니. 그들의 고집은 혁명이 야기한 혼돈을 수습하는 훌륭하고 위대하기까지 한 생각이라고 볼 요지가 충분했다. 실제로 그들은 훌륭하게 이어간다. 


지극한 모성애와 책임감 넘치는 가장의식으로 무장한 채 많은 아이들을 낳아 넓은 집에서 키우며 흩어진 가족들을 불러 어디에도 없을 돈독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옛날식의 행복', 어찌되었든 행복은 행복이었다. 하지만 위기는 밖에서 닥쳤다. 좋은 시절이 간 것이다. 데이비드의 회사도 일격을 받고 승진은 없었다. 


아이는 계속 태어났다. 첫째, 둘째, 셋째, 넷째까지 숨쉴 틈 없이 계속.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지쳐갔지만, 그래도 그들이 상정한 행복의 기준은 그대로였다. 사촌 브리짓은 그들을 자신의 롤모델로 여긴 참이었다.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저도 결혼하면 이렇게 할 거예요. 난 데이비드와 해리엇 같이 될 거예요. 커다란 집을 갖고 애를 많이 낳고... 그러면 모두들 오셔야 해요."


그들이 택한 '행복'의 길, 질문을 계속 던지게 만든다


다섯째 아이 벤은 누가봐도 비정상적인 아이다. 뱃 속에 있을 때부터 엄청난 힘으로 엄마 해리엇을 괴롭혔다. 벤은 태어나기도 전에 '원수'가 되었고, 해리엇을 '미친 여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그 '사건'은 해리엇으로 하여금 평생을 '죄인'처럼 생각하게 한 원인이었다. 다섯째 아이 벤은 태어나서는 안 될 아이였다. 그의 존재는 그를 포함해 다른 모든 이를 불행으로 몰아넣었고, 그 집단을 파괴했다. 


소설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에서 시작해 끝모를 불행으로 나아간다. 모든 '불행'의 씨앗은 물론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선택. 모든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력하게 밀어붙인, 시대정신까지 역행하면서도 밀어붙인, '행복'으로의 길이다. 아이러니하기 그지 없다. 소설은, 작가는, 계속 질문을 던진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시대정신을 역행한 그들은 보수적인가 진보적인가? 다섯째 아이 벤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벤은 파괴자인가, 소외자인가? 당신이라면 벤을 어찌하겠는가? 벤을 제외한 모든 이를 위해서 벤을 삭제하겠는가, 그럼에도 벤을 버리지 않고 다른 모든 이들이 희생하겠는가? 과연 벤을 동정할 수 있겠는가? 


나라면, 벤을 마냥 동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벤을 삭제해버리는 당사자가 될 수도 없을 것 같다. 함께 있되 그저 방관, 관찰만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간이 할 가장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는 '무관심'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희생하는 '착한 사람'도 죄책감에 시달릴 '나쁜 사람'도 되기 싫은데. 누구도 그러지 않을까 싶다.  

'소외'에 대처하는 방법, '친화적 구별짓기'

 

소설은 그러나, 이런 류의 윤리적·도덕적 가치관의 재고만을 질문하지 않는다.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벤이 소설의 중심에 서게 되는데, '소외'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를 일종의 돌연변이라고 했을 때, 그가 갈 곳은 어디인가. 그가 해야하는 행동은 무엇인가. 부모들은 그를 일반 학교에 보내 보통 아이들처럼 만들고자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는 '틀린' 인간이 아닌 '다른' 인간인데 말이다. 


영화 <엑스맨> 시리즈는 돌연변이가 틀린 게 아니라 다만 다르다는 걸 훌륭한 비쥬얼과 올바른 메시지로 보여주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그들은 절대 '보통' 사람들과 조화롭게 어울릴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이 그들을 적대적으로 구별짓는 한. 오직 방법은 그들을 오직 그들로 받아들여야 하는 바, 하지만 그건 결코 쉽지 않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의 적개심과 공포심으로 '소외 당하고 보호 받지도 못한' 채 죽어갈 것이다. 방법이 있을까. 어쩔 수 없이 구별 짓기가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구별 짓기에 내재된 적대감을 절대적으로 멀리해야 한다. '친화적 구별 짓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가능하다면 말이다. 


모두에게 칭찬받아 마땅한 삶을 추구한 데이비드와 해리엇에게 벤은 필요 없는 존재다. 절대 있어선 안 될 존재. 하지만 그들은 우리 삶에, 우리 가정에, 우리 사회에, 우리 나라에, 우리 세상에 반드시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가? 그들은 우리에게 '불행'만을 가져다주는가? 우리는 행복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행복의 허상, 그리고 소외의 이면, 다른 것의 정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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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부산행>


여러모로 '적절한' 영화다. 연상호 감독의 작가주의적 집요함이 블록버스터에 잘 녹아들었고, 이 영화로 할 얘기가 무궁무진하게 만들어놨다. 영화 <부산행> 포스터. ⓒNEW



지난 5월에 <곡성>을 보고는 곡성군은 고사하고 곡성 비슷한 곳도 생각하기 힘들었다. 영상의 힘이 대단하구나, 싶었다. 3개월도 안 되어 그 힘을 또다시 느꼈다. 공교롭게도 수원에서 <부산행>을 보고 바로 부산행기차를 타야 했는데 도무지 발 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목적지는 대전, 영화에서 중요 키포인트가 되는 지점이다. 결국 한 시간 정도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래도 나름 리뷰에 힘을 싣고자 기차 안에서 글을 쓴다.


좀비의 출현에 맞서는 사람들의 사투

 

영화는 좀비의 출현에 맞서는 사람들의 사투를 그린다.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주인공은 왜 부산행 열차를 탔어야 했는가, 적절한 사연이 필요하다. 주인공과 함께 사투를 벌일 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 모두 사연을 붙여 각각의 캐릭터를 부각시켜야 하나 큰 덩어리에 속해 있으면서 상황에 따라 변하는 인간 본성의 매개체로 작동하게 해야 하나. 사태의 원인 규명에 시간을 나눌 것인가, 사태 자체에 최대한 시간을 할애할 것인가. 제목이 그러하니 부산에 도착할 건데, 그때까지 누구를 어떻게 죽일 것인가. 부산에 도착한 이후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장르 특성 상 후속편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영화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이기에 심사숙고해야 한다.


<부산행>을 연출한 연상호 감독은 그동안 애니메이션만을 연출해왔다. 그의 작품 <돼지의 왕> <> <사이비>를 모두 보았는데, 특유의 집요함을 엿볼 수 있었다. 인간 내면을 밑바닥까지 핥고 사회 문제를 처절하게 드러냈다. 비현실적인 요소들로 현실을 너무도 리얼하게 그려냈다. 그런 그가 모든 면에서 블록버스터임을 감추지 않는 실사 영화를 들고 나온 건 의외였다.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집요함을 이 큰 영화에 잘 녹여낼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좀비의 출현이나 그에 따른 대응, 부산으로 가는 길이 아닌 기차라는 공간에 포커스를 맞춘다.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다. 특히 좀비에, 별의별 이유로 출현한 좀비에 포커스를 맞추는 영화는 너무 많이 나왔다.


우리는 내부에서 좀비가 탄생하고 그들과 싸우다가 급기야 우리끼리 싸운다. 진짜 공포는 무엇인가. 영화 <부산행>의 한 장면. ⓒNEW


 

좀비는 미국의 베트남전쟁 패전에 대한 공포로 태어났다.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공격하는 게릴라들의 모습이 흡사 좀비와 닮아 있다. 아니, 연상시킨다. 애초에 연상할 수 있게 만들어졌을 테다. 바야흐로 작금 세계는 테러의 시대, 한국은 지옥의 시대이다. 끝없이 테러를 자행하는 이들을 좀비로 볼 수 있을까? 아마 그럴 거다. 차라리 속이 시원하겠다. 당면한 적이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한국은? 북한인가, 일본인가, 중국인가, 미국인가, 러시아인가. 유럽의 대 테러 집단을 향한 시선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내부에서 좀비가 탄생하고 그들과 싸우다가 급기야 우리끼리 싸운다.

 

영화가 시작하고 예상보다 일찍 좀비가 출현한다. 이미 조짐은 한참 전에 보인 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 중 하나인 서울역에도 나타났고 그 중 단 하나가 부산행 열차에 탔을 뿐이다. 아직 제정신일 때 열차에 탄 그녀는 곧 좀비로 변하고 순식간에 열차 전체를 덮친다. 기차 밖 세계에서는 좀비의 출현을 폭동이라 치부해 열차 내 생존자들을 혼란으로 밀어 넣는다. 오히려 연유를 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덮쳐오는 위협을 피해 도망가야 하기에 혼란스럽지 않을 수도 있겠다. 이성은 작동을 멈추고 본능만이 살아 움직인다.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 유전자의 격렬한 충돌

 

본능은 여러 층으로 갈라져 나와 격렬히 부딪힌다. 살고자 도망친다. 나 혼자 또는 나를 비롯한 이쪽만 살고자 한다. 자칫 이쪽을 위험에 빠뜨릴 행동은 가급적 삼간다. 그러다가 누군가는 또 다른 본능에 눈을 뜬다.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위험을 무릎 쓰고 구하려는 마음 말이다. 그 마음들이 모여 강한 힘을 발휘한다. 혼자라면, 서로를 생각하지 않은 여럿이라면 절대 하지 못할 과감하고 강력한 행동을 실행에 옮긴다. 성공한다.

 

하지만 이기적 유전자는 여전히 강력하다. 이번엔 이기적 유전자들이 뭉친다. 이타적 유전자들이 뭉친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 이기적 유전자의 조직이 이타적 유전자의 조직을 완전히 밀어낸다. 자신만 살겠다는 강력한 힘이 발휘한 것이다. 거기엔 맹점이 있다. 이기적 유전자는 결국엔 자기 자신만 빼고 모두를 절벽으로 밀어 넣을 거라는 사실 말이다.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같이 빠져나온 사이일지라도.

 

이타적 유전자들에게도 맹점은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위험이 닥쳤을 때 자신의 차례가 온 걸 알아챈 듯 이 한 몸을 장렬히 던진다. 나머지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죽음의 행렬로 조직은 약해질 뿐이다. 결국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한 사람이 나서서 희생하기 전에 모두가 달려들어 위기를 타파할 순 없을까. 답답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본능은 여러 층으로 갈라져 나와 격렬히 부딪힌다. 나 혼자 또는 나를 비롯한 ‘이쪽’만 살고자 한다. 그러다가 누군가는 또 다른 본능에 눈을 뜬다.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위험을 무릎 쓰고 구하려는 마음 말이다. 영화 <부산행>의 한 장면. ⓒNEW


 

결국 어떤 종류의 인간이든 당면한 거대 위협을 피하기 힘들다. 속절없이 죽어가거나 힘겨운 사투 끝에 죽어가거나 겨우겨우 살아남아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한다. 여느 영화에서는 살아남는 이가 겁쟁이, 아이, 엄마, 노인 등인데 <부산행>에서는 어떨까.

 

이런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 영화의 좀비는 여타 미국 영화의 자기 위안적 좀비와 비할 바가 아니다. 비현실적인 요소들로 가장 리얼한 현실을 보여주는 연상호 감독답게, 그가 만들어낸 좀비는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눈에 보이지만 실체를 모른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생겨나 나를 위협하는지 모른다. 설령 알게 되더라도 다름 아닌 또는 우리때문에 생겨난 거란다. 기막힐 노릇이다. 달아날 구멍이 없다.

 

피할 수 없는 신파와 입체적이지 못한 캐릭터


영화는 깜짝 놀라게 하는 장면은 많지 않다. 시종일관 심장을 쥐고 놓지 않을 뿐이다. 기차라는 폐쇄된 공간에서만 이뤄지는 인간과 좀비와의 격렬한 맨손 액션은 <에일리언> 시리즈 류의 괴수 영화를 생각나게 한다. 캐릭터성이 전혀 부과되지 않은 채 한 덩어리가 되어 달려드는 좀비들의 모습은 <월드워 Z>를 생각나게 한다. 좁고 한정된 공간에서 많지 않은 인간들만 있음에도 첨예하게 갈라지는 한심하지만 다름 아닌 우리들의 모습은 <설국열차>가 생각나게 한다. ‘작가주의감독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블록버스터로서의 모습을 피하지 않는다.


영화는 깜짝 놀라게 하는 장면은 많지 않다. 시종일관 심장을 쥐고 놓지 않을 뿐이다. 영화 <부산행>의 한 장면. ⓒNEW


 

재난 SF 영화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게 바로 신파인데, 이 영화도 장르가 지향하는 걸 피할 수 없는바 신파적인 요소가 곳곳에 나온다. 다름 아닌 이타적 유전자들의 희생 장면에서.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이 있듯이, ‘신파를 피할 수 없으면 눈물바다로 만들어라가 정답일 것이다. 죽음의 행렬을 다루는 영화에서 이타적 유전자들의 희생은 불가피한바, <부산행>은 완벽에 가깝게 그 고난의 임무를 완료한다. 그 중심에는 아이가 있고, 아이의 마음을 가진 어른과 아이의 마음을 가지게 된 어른이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상황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입체적인 캐릭터가 없다는 점이다. 이문열의 소설 <필론의 돼지>에 나오는, 격렬한 대립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주인공 같은 인물 말이다. 그나마 가장 입체적인 인물은 영화에서 이기적 유전자의 화신 같은 삼천리 고속 상무라는 자였다. 그렇지만 그는 인간 본능의 한 측면을 충실히 구현했을 뿐, 3의 모습을 보여주진 않는다.

 

작금의 한국 사회를 보여주다


<부산행>에는 격렬히 부딪히는 덩어리들이 있을 뿐이다. 혹자는 이들을 인간군상이라 말할지 모르겠는데, 필자가 보기엔 인간군상이라기보다 세력군상 같았다. 그렇게 보니, 이타적 유전자 조직도 완전한 이타를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도 이기적 유전자 조직까지 품에 안기는 힘들지 않는가.

 

그래서 영화는 작금의 한국 사회를 칼로 베어 보여주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입체적인 인물이나 생각은 사라지고 오로지 너(너희)와 나(우리)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는 사회, 그 사이 어딘가 위치한 이들은 아예 대상화조차 되지 않는 사회, ‘회색분자라는 말이 나올 기반조차 없는 사회 말이다. 좀비 대 인간이고, 인간 대 인간이고, 이기적 대 이타적이다.


유일한 희망은 ‘아이’다. 아이처럼 맑은 영혼의 소유자다. 그들은 누가 뭐라 해도, 어떤 상황에서도 소신과 신념을 굽히지 않는 강인한 영혼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들이 만든 세상이어야만 한다. 영화 <부산행>의 한 장면. ⓒNEW


 

유일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희망은 아이. 아이처럼 맑은 영혼의 소유자다. 그들은 누가 뭐라 해도, 어떤 상황에서도 소신과 신념을 굽히지 않는 강인한 영혼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들이 만든 세상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바엔 영화에서처럼 다 쓸어버리고 그들만 남겨져야 한다, 라고 말하고 싶다. 과연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올바르고 선하게 자라난 본성이 아직 현실의 벽에 부딪히기 전, 보호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지키며 현실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혹은 그들이 무너뜨릴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줘야 한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그 어느 때보다 빨리 갈 수 있는 시대에 도달했지만, 그만큼 시야는 좁아지고 살 길 또한 좁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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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룸>



영화 <룸> 포스터 ⓒA24 필름스


영화가 시작되고 엄마와 아이는 잠에서 깨어 눈을 뜬다. 아이의 다섯 번째 생일, 같이 케이크를 만들어 먹는다. 초도 없이. 아이는 초를 달라고 떼쓰지만 안타깝게도 엄마는 초를 줄 수 없다. 초라니 언감생심이다. 초는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게 아니니까. 좁디 좁은 방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초 따위는 필요 없다. 엄마는 미안하다며 아이를 달랜다. 


그렇다. 엄마 조이와 아이 잭은 좁은 방에 갇혀 있다. 엄마가 아이에게 사실을 말해준다. 7년 전 누군지 알 수 없는 이에게 납치 당해 이곳, 헛간으로 끌려 왔고 2년 뒤에 아이를 낳아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고. 정황 상 아이는 납치범 닉의 아이로 보인다. 


잭은 계속 조이에게 묻는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천장으로 보이는 하늘로 미루어 보아 이곳과는 다른 곳이 존재할 텐데, 그곳은 어떤지. 그렇지만 잭은 그 좁은 방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이다. 그곳에서 태어나 다른 어느 곳에도 가지 못한 채 5년을 지냈으니, 그곳이 곧 세상의 전부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게 당연하다. 


조이는 잭에게 벽 너머의 또 다른 세상을 말한다. 납치 당하기 전, 자신이 속했던 세상을 말한다. 그렇게 탈출 시도가 시작된다. 함께 탈출할 수 없으니 잭을 탈출하게끔 하려는 것이다. 처음에는 잭이 아프다는 구실로, 마지막으로는 잭이 죽었다는 구실로. 우여곡절 끝에 결국 잭은 탈출에 성공하고, 조이도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영화 <룸>의 한 장면 ⓒA24 필름스



7년 만에 방에서 탈출, 형벌과도 같은 바깥 생활


영화 <룸>의 초중반부 스토리이다. 이게 초중반부라고? 방에서 탈출하는 이야기가 주된 것이 아니었던가? 영화를 보기 전엔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7년 동안의 감금을 현실적이고 강렬하게 그리면서, 안에서의 성찰과 깨달음, 그리고 극적인 탈출을 보여줄 거라고 말이다. 그 이후에는 행복한 삶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전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영화 <캐스트 어웨이>가 무인도에 불시착하는 과정과 무인도에서의 삶과 성찰, 그리고 탈출의 경위를 아주 자세히 보여주고 난 후 돌아와서의 삶은 상대적으로 짧게 처리하는 것과는 다르다. 척 놀랜드(톰 행크스 분)가 십자가 모양의 사거리의 한복판에 서 있는 모습으로 처리했다. 굉장히 의미 있고 함축적인 장면이다. 


반면 <룸>은 어떤가. 초중반부에서 이미 탈출에 성공한 모자(母子)는 어찌 보면 훨씬 더 큰 어려움에 봉착한다.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 미디어의 과도한 액션, 잭을 둘러싼 조이와 부모님들 간의 갈등. 그들은 다시금 방에 갇힐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적어도 전의 그 방에선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고, 엄마와 아이와의 갈등 이외엔 어느 갈등도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조이는 닉과의 갈등이 있었지만, 닉은 조이와 잭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과연 어떤 '방'이 더 좋을까. 잭은 할머니와의 대화에서 다음의 한마디를 건넨다. 할머니의 가슴을 후벼 파는 한마디이면서, 보는 이의 가슴도 한껏 때리는 한마디이다. 


"가끔 그 방이 그리워요."



영화 <룸>의 한 장면 ⓒA24 필름스


얼마나 바깥 세상이 불편하고 싫었으면, 5년이나 한 발자국조차 내딛지 못했던 그 작은 방이 그리워질까. 한편으론 오직 엄마와의 오붓한 시간을 보냈던 그곳이 그립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그곳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잭은 더 이상 엄마하고만 지낼 수 없게 되었다. 혼자서, 엄마 아닌 다른 누군가와, 엄마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지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건 잭에게 있어 최악의 형벌과 다름없었다. 


극악무도한 사건 대신 한 아이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다


영화의 배경은 분명 극악무도한 사건이다. 누구라도 그 사건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영화 안에서 모자를 보는 이들이나, 영화 밖에서 모자를 보이는 이들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 자체는 그 사건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려 한다. 그 대신 잭의 시선과 심리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작은 방 안에서의 세상에 대한 생각과 상상, 세상으로 나왔을 때 비춰지는 다양한 사람들과 그 밖의 모든 것들에 대한 심정을 곳곳에 독백으로 처리했다. 그렇게 하니 사건은 가려지고 대신 한 아이의 성장이 자리 잡았다. 


문제는 어쩌면 바로 그 부분에 있다 하겠다. 시종일관 아이의 시선에 초점을 맞추려 한 건 잘한 것 같지만, 사건도 사건이거니와 이 영화를 끌고 나가는 이가 아이만 있지 않다는 걸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아이만큼 중요한 이가 엄마 조이다. 그리고 조이의 부모님. 초점은 아이지만, 다양한 이야기들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에 모자가 세상에 나온 뒤에는 영화가 조금은 어수선해진다.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고, 조이와 부모님이 갈등을 빚는 요소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아 답답했다. 



영화 <룸>의 한 장면 ⓒA24 필름스



이 모든 걸 커버하는 요소가 있는데, 배우들의 연기다. 이 영화로 2016년 무수히 많은 유수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휩쓴 조이 역의 브리 라슨, 더불어 생애 두 번째 영화임에도 만만치 않은 영화제에서 수상한 잭 역의 제이콥 트렘블레이, 그리고 조이의 엄마 역의 조안 알렌. 이들은 각자 역할 그 자체였다. 특히 특별한 배경의 캐릭터가 영화 내내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준 데에는 여지없이 찬사를 보내고 싶다. 영화는 안 보고 이들만 봤다는 느낌이 든다. 실제로도 그랬고. 배우는 살고 영화는 죽은 그런 사례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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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가족 쇼크> 저자 김광호 PD


2014년 말에 아홉 차례에 걸쳐 방영되며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는 <EBS 다큐프라임-가족쇼크>. 지금의 사회에서 가져야 할 가족의 의미를 긍정적 방향으로 재해석하고 가족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한 가족의 모습을 고찰했다. 우리에게 가족이란 어떤 의미이며, 가족이 주는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지 물었다. 이 다큐멘터리로 '제27회 한국피디대상-교양정보부분 작품상', '2015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사회문화부분 우수상' '제42회 방송대상-사회공익부문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이 이야기가 책으로 출간되었다. 다큐를 접하지 못한 분들을 위한 수단일 터. 책 <가족 쇼크>의 대표 저자이자, <EBS 다큐프라임-가족쇼크>의 책임 프로듀서인 김광호 PD를 인터뷰했다. 1995년에 입사해 20년 째 EBS에 몸을 담고 있는 베테랑 PD. 장학 퀴즈, 어린이 프로그램을 거쳐 2005<60분 부모>를 시작으로 부모와 아이, 가족에 천착했다. 자타공인 부모교육 전문가다. 그와의 인터뷰는 마치 강연을 듣는 듯했다. 확고한 신념이 곳곳에 묻어 났다. 


많은 콘텐츠 중에서 '가족'에 천착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요?

큰아이가 2001년에 태어났어요. 아이는 당연히 엄마가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죠. 우리 윗세대가 그랬으니까요. 그냥 돈 열심히 버는 게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이가 나를 찾지 않는 거예요. 나는 아이와 친해지고 싶었는데... 그때 <60분 부모>를 하게 되었어요. 2005년이었죠. 아이도 발달을 하고 아이에게도 속마음이 있고 아이의 마음을 읽어줘야 아이가 행복하게 자라난다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행복에 대한 실제적인 부분을 알게 된 거예요. 좋은 아빠가 되는 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자연히 가족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었죠. <60분 부모>를 하는 와중에 부모들이 흔히 겪는 오류를 발견했어요. 요즘 부모는 how를 먼저 배워요. 말투를 어떻게 해야지, 아이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지. 저 역시도 <60분 부모> 당시 how에 포커스를 두었지요. 덕분에 아이와는 친해졌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작용이 생기더라고요. 관계는 금방 좋아졌는데 훈육이 되지 않아요. 이런 나도 이러는데 일반 부모들은 어떨까. 안 되겠다. 이런 것들을 더 널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때 마침 다큐 프라임이 생겼어요. 2007년 즈음이에요. 풍속화로 시작했는데, 아이의 심리에 대한 다큐를 하게 되었어요. 문제는 아이가 아니더라고요. 부모가 훨씬 중요한 키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이후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렇게 아이와 부모, 가족으로 넘어갔죠



다른 가족 콘텐츠에 반해 <가족 쇼크>가 갖는 차별점은?

처음에는 가족 내부에서 부모를 말하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가족을 바라보는 지표가, 우리 사회의 지표가, 우리나라의 수준을 집어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족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여러 가지를 생각해야 하는 단어잖아요. 가족이라는 단어로 대한민국을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우리 사회는 가족을 어떻게 존중하고 있지, 어떻게 바라보고 있지, 외국인 노동자 가족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 생각했어요. 가족이라는 단어로 한정되어 있지만, 거기에는 우리가 사람을 대하고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까지 포함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가족 내부에 대한 이야기 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서 외부의 시선까지 담아내려 했어요. 그것이 바로 <가족 쇼크>의 가장 커다란 차별점이자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기존의 다른 가족 콘텐츠는 내부로만 천착해 있잖아요.


가족 전문가라고 할 수 있겠는데, PD님의 가족은 어떻게 진단하고 계신지요?

저희도 똑같이 싸우고 고민하고 넘어지고 해요. 그런데 중요한 건 저희는 고민이 생기거나 넘어졌을 때 조금은 자유롭고 여유 있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에요. 100점이 아니라 80점인데, 80점으로도 만족하는 그런 여유죠. 아이들은 한 번 문제를 해결했다고 해서 다음 문제를 주지 않는 존재가 아니에요. 계속해서 아이들의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게 부모들의 입장이지요. 그런 문제들이 생겼을 때 예전 같으면 아노미에 빠졌죠. 그런데 지금은, 물론 저도 화가 날 때도 있고 허둥지둥 할 때도 있지만 예전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거죠. 그리고 그 문제를 풀 때 100점을 맞아야지 하는 게 아니라, 80점이라도 아이가 행복해지는 데 그 정도면 훌륭하지 하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어머니께서 예전에 가족은 천륜이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는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보면 가족에 있어서 '관계'를 우선하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관계예요. 10여 년 동안 가족 관련 프로그램을 하면서 느낀 게 뭐냐 하면요. 가족이 천륜이다’ ‘혈연이다라고 믿게 되면 가족 관계에 본능되물림이 들어와요. 그러면 상대방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나를 돌아보는 노력과 의식을 하지 않게 돼죠. 그 관계를 본능이 지배하게 됩니다. ‘내가 아이를 낳았으니, 내가 아이를 보호해야 돼라고 천륜, 혈연으로 생각하는 게 바로 본능이거든요. 그런데 이 아이에게도 삶이 있어요. 아이의 삶이 한 발 발전하기 위해선 부모가 한 발 물러나는 게 역할이야, 우리가 관계를 전제로 했을 땐 이런 것들을 학습하고 배우는데, 천륜, 혈연이 지배하면 생각할 수 없어요. 관계라는 키워드를 인식하게 되면 노력하고 학습하게 돼요. 반면 천륜과 혈연으로 인식하면 노력과 학습이 아니라 의무와 책임만 있을 뿐이에요. 그러면 불행해지기 쉬워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어요.


1인 가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의미가 바뀌거나, '가족'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요? '가족'에는 엄연히 집단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요.

정확한 답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관계에 대한 욕구가 있는 존재예요. 비록 1인 가구 형태가 되었더라도 그들은 어떤 집단에 소속하고자 하고 관계를 맺으려는 욕망이 틀림없이 있다고 봐요. 그러면 1인 시대와 관계에 대한 욕구가 어떻게 접점을 찾느냐, 그런 의미에서 가족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가 확대되면 충분히 그걸 담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1인 가족이라고 했을 때 단순히 한 사람 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관계에 대한 욕구까지도 담는 단어일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요즘 3포 세대니 5포 세대니 청춘들의 아픔이 극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취직을 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다고 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가족의 의미가 퇴색할까요?

저의 경우, 스스로를 돌아보는 데 아이가 정말 커다란 역할을 했어요. 백지에 가까운 아이 눈에 내가 어떻게 비쳐질지 생각하면 말이죠. 그런 면에서 아이가 없다면 그런 계기를 갖지 못하니 아쉬움이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가 없으면 가족으로서 온전하지 않거나 행복하지 않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1인 가족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과 비슷한 맥락이에요. 다만 저한테 아이를 낳는 것과 낳지 않는 것 중 추천을 하라고 하면 한 명이라고 낳아서 기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런데 그건 선택이죠.





결국 공동체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데요. 공동체에 대해 말씀 부탁 드립니다.

1인 가족 형태는 생길 수밖에 없고 증가할 수밖에 없어요. 이미 가족 형태 중에 1인 가족이 가장 많은 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죠. 그럼 1인 가족들을 어떻게 해야겠어요? 어떻게 관계를 구축해주고 어떻게 연대해야 할지, 이런 부분들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제시하고 실험해야 해요. 그런데 지금은 그냥 에게만 빠져 있는 것 같아요. 옆을 돌아보지 않아요. 1인 가족들의 행복은 더 요원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럼에도 대비를 하지 않죠. 1인 가족들이 된 건 그분들의 잘못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거죠. 그렇다면 구조적 문제를 탓하며 그냥 손 놓고 있어야 하나요? 우린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데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공동체키워드를 통해 제시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모든 걸 묶을 수 있는 게 바로 관계라고 생각해요.


육아 인터넷 카페 보면, 어마어마하게 활성화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도 일종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공동체로서 충분히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공동체냐 아니냐가 아니라 폐해가 훨씬 크다는 점이에요.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을 경험이 아닌 지식으로 키우는데, 육아 인터넷 카페가 바로 지식으로 아이들을 키우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봐요. 다른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를 키우는 정보를, 그대로 나의 아이에게 접목 시키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정보들이 나와 아이 관계를 100% 규정할 수 없거든요. 아무리 좋은 정보라도 나와 아이 관계에 맞지 않으면 그건 아닌 거예요. 육아 인터넷 카페가 그런 종류의 폐해를, 경험으로 나와 아이 관계를 이어나가는 데 일정 정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봐요. 그리고 무엇보다 육아 인터넷 카페는 불안을 자극해요. 최대 문제점이라고 생각하는 데요. 서로 정보를 교류하며 그 중에 나에게 맞을 것 같은 정보를 취하게 되면 기대치가 생겨요. 내가 이 정보로 100% 아이를 보살펴줄 수 있다는 기대치요. 그런데 실제로 그 아이에게는 다른 조건이 있을 거예요. 그 조건을 무시한 채 한 부분만 취해서 나의 아이에게 적용해보면 맞지 않는 거예요. 맞지 않으면 좌절해요. 좌절하면 불안해지죠. ‘나는 좋은 부모가 아닌가봐라면서카페는 하되 내 아이에 맞는 방식을, 정보들을, 선별하라는 거예요. 거기에 휘둘리지 말고요. 아이들은 정보나 지식으로 키우는 게 아니라 경험으로 키우는 거예요.


비 중인 다음 작품이 있는지요? '가족' 나아가 관계행복에 대한 콘텐츠인가요?

이번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어요. 정확히는 감정인데요. ‘왜 불안하지?’의 해답을 찾아보려 해요. 가족으로 대한민국을 들여다봤다면, 이번엔 감정으로 대한민국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거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관련 자료가 많지 않더라고요. 올 연말 즈음에 방송으로 나갈 것 같아요. 머리가 복잡합니다. 큰 틀 안에서는 관계와 행복이라는 키워드를 벗어나지 않을 것 같아요. 제가 그것에 대한 관심과 고민이 크기 때문에 계속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다만 관점을 다르게 하는 것 뿐이에요.


마지막으로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이 있다면 말씀 부탁 드립니다.

가족 내부로 보면 좋은 가족이란 뭐지, 내가 지금 같이 생활하는 가족들의 관계는 어떻지, 앞으로 어떤 부분들을 가족 내부 관계 속에서 고민해야 하지, 이런 관점들을 생각하면서 책을 보면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얻어 가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또 하나 있다면, 가족 외부의 시선, 가족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수준을 아울러 생각하면 좋겠어요. 나를 포함해 우리 가족은 다른 가족을 어떻게 보고 있지,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지, 이런 관점까지 같이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나를 포함해 우리 구성원들이 이렇게 바라보고 있구나, 이런 걸 정리하고 나면 이제 앞으로 어떤 걸 고민해야 할지 보일 것 같아요. 가족 내부와 외부를 같이 고민하면서 이 책을 보면 좋겠어요. 그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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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딸바보가 그렸어>


<딸바보가 그렸어> ⓒ소담출판사

아이들로 돈벌이가 쏠쏠하다고 판단했는지, 육아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 본격적으로 생겨나기 전에는 <붕어빵>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아이들의 귀염성을 적극적으로 표출했다. 당시에는 아이들을 이용해 돈벌이를 한다, 인기가 없는 자신을 대신에 아이를 앞세운다 등의 비난들이 속출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귀여운 건 사실이었고 국민들은 이 귀여운 아이들에게 열광했으며 이 아이들로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만들기에 이른다. 이제는 케이블을 포함해 거의 모든 방송사에 하나는 포진해 있는 효자 상품이 되었다. 취업도, 결혼도, 아이도 포기하기에 이른 젊은이들의 욕구를 대신해서 채워주며 이른바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아이를 원하는 국가의 바람과 일치해서 일 수도 있겠고. 


이런 기조 하에서 볼 때, 이런 프로그램을 과연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님들이 보기나 할까 궁금해진다. 이 프로그램들은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거나, 가지고 싶어도 여건이 안 되는 사람들 또는 손자 손녀를 볼 정도로 나이가 드신 중년 어른들이 볼 거라는 생각이다. 


거짓 없는 있는 그대로의 육아 일기


그런데 이런 논조가 마냥 맞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 나왔다. <딸바보가 그렸어>(소담출판사)라는 책이 그런데,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님들에게도 충분히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도움도 되는 책이기 때문이다. 제목처럼 '딸바보'인 한 아이의 아빠가 손으로 직접 그린 4년 간의 육아 일기 만화이다. 예비 아빠에서 아빠가 되고 한 살, 두 살, 세 살, 네 살까지 유머러스한 글과 그림과 함께 실로 거짓 없는 있는 그대로의 육아 일기를 보여준다. 


책은 4컷 만화를 볼 때처럼 빨리 읽어 내려 갈 수 있다. 짤막한 에피소드 중심으로, 모든 컷이 아이와 함께 한다. 임신 중이라 많이 힘든 아내와 함께 하는 예비 아빠의 힘들지만 행복한 나날들, '진통 교향곡'이라 명명한 아내와 아이의 일생 최고의 힘든 하루. 저자는 이 날을 아이도 태어난 날이지만 엄마와 아빠로 태어난 날이라 말한다. 가슴 찡한 아이의 세상 나들이다. 


그렇게 잠 못 이루는 첫날 밤이 시작되고, 이후 잠 못 이루는 밤은 매일같이 이어진다. 아이는 얼굴이 무겁기 때문에 항상 목을 조심해야 하고, 아이에게 고유의 울음소리가 있으며, 뭘 먹고 나면 꼭 트림을 시켜줘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엄마의 손목이 나가고, 엄마는 모유 때문에 먹고 싶은 걸 먹지 못하고, 엄마는 아이와 24시간 붙어 있어야 하기에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다. 


이들 부부는 오랜만에 둘만의 데이트를 가서도 아이가 밥은 잘 먹고 있는지, 잘 놀고 있는지, 다친 데는 없는지 걱정이 앞서 제대로 놀지 못하는 자신들을 발견한다. 가끔은 아이가 얄밉고 속상하고 때려주고 싶기 까지 하지만, 아빠 아빠 하고 부르고 엄마 엄마 하고 부르면 그런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게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고 가족이 되며 함께 성장해 나간다. 


'육아는 육아다'라는 멋진 명제


이 책이 육아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다른 점은 진정한 리얼리티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육아 프로그램들을 잘 보면, 모든 아이들이 예쁘고 모든 아이들이 참 울지도 않고 잘 논다. 육아에 따른 진짜 어려운 점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낮에 자고 밤새도록 깨서 우는 아이들을 비몽사몽 간에 어르고 달래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가? 애써 아이를 뿌리치고 아침마다 회사로 출근하는 엄마의 눈물을 보여주는가? 부부가 끝 간 데 없이 싸우다가 아이가 보자 멈추게 될 수 밖에 없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많겠지만, 이런 프로그램을 보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거에 로망을 갖게 되었다면 큰 오산이 아닐 수 없다. 반면 이 책 <딸바보가 그렸어>는 겉으로는 비슷한 포맷을 추구하고 있지만, 그 안의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엄마 아빠의 속마음까지 솔직히 그리고 있다. 하다 못해 이런 말로도 에둘러서 표현해 놓고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우리 딸! (근데 사실 눈에 넣으면 진짜 아파)' 얼핏 유머러스해 보이지만 그만큼 육아가 힘들다는 반증이다. 


책은 '육아는 육아다'라는 멋진 명제를 시종일관 강조한다. 무슨 말인고 하면, 아이를 키우는 게 곧 나(엄마 아빠)를 키우는 거라는 것이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나(엄마 아빠)도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가짐이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육아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책은 딸의 성장기이자, 동시에 부모로서의 나의 성장기다... (중략) 육아의 중심에서, 또 생활의 중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엄마 아빠 들에게 이 책이 조그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앞으로 육아를 겪을 예비 부모들이 간접적으로나마 이 책으로 육아를 체험해보면 좋겠다는 바람도 든다." (프롤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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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칠드런 오브 맨>


<칠드런 오브 맨> ⓒUPI


전장에 울려 퍼지는 아이의 울음 소리는 전쟁의 폐해이자 전쟁으로 인한 절망을 상징한다.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할 수 있는 게 우는 것 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물론 어른에게도 통용되는 말이다. 그런데 영화 <칠드런 오브 맨>에서의 전장에 울려 퍼지는 아이의 울음 소리는, 이와는 완연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희망'.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듣는 순간, 피 튀기는 전장의 모든 소음이 일순간 멈추는 기적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칠드런 오브 맨>은 어떤 특정한 서사적 줄거리를 갖추지 않은 채 오직 마지막 남은 '희망'인 아이의 구제를 위한 방향으로 따라가기만 한다. 주인공을 포함한 모든 인물들과 영화의 스토리와 심지어 카메라 워킹까지 그 아이에게 시선을 두는 것이다. 이는 감독의 철저한 연출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의 감독은 '알폰소 쿠아론'이다. <그래비티>로 2014년 아카데미에서 감독상을 포함해 7관왕을 수상한 바 있다. 그가 <그래비티>에서 보여준 연출은 상당 부분 <칠드런 오브 맨>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암울한 상황 설정, 스토리보다 캐릭터에게 초점을 맞추는 설정, 비록 영화는 전체적으로 정적이지만 순간적으로 굉장한 동적 연출을 시행하는 설정, 그리고 '희망'에 모든 것을 거는 설정까지. 그래서 <칠드런 오브 맨>은 알폰소 쿠아론에게도 터닝포인트이자 하나의 희망이기도 했을 것이다. 


<칠드런 오브 맨>의 한 장면. 전장에 울려 퍼지는 희망의 울음 소리. ⓒUPI



특히 감독의 연출력이 빛났던 장면이 있다. 영화 후반부 주인공들이 전투에 말려 들어간 장면이다. 이 씬에서 카메라는 주인공 테오를 따라가면서 '핸드헬드 촬영 기법'(카메라가 기계적 안전 장치에 부착되지 않아 불안정한 상태를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음)을 이용해 찍고 있다. 전투의 한 가운데에 있어 두렵지만 반드시 행해야 하는 바가 있는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다가 아이가 울자 모든 전투가 멈추고 소음이 멎으며 한 마음으로 아이의 안녕을 바랄 때는 카메라의 워킹이 안정을 찾는 것이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집약적으로 보여줌과 동시에, 감독의 연출력이 빛났던 장면이다. 


영화의 배경은 2027년 영국 런던이다. 이 세계에는 '희망'이 없다. 인류는 더 이상 아기를 가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남아 있던 18세의 소년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망은 인류를 재앙과 자멸의 시대로 인도했다. 곳곳에서 테러가 발발하고, 무정부주의자들은 폭력으로 국가를 질책하며, 도처에 불법 이민자들이 넘처난다. 사람들은 평온한 죽음을 맞이 하기 위해 자살약을 섭취하곤 한다. 


<칠드런 오브 맨>의 한 장면. 곳곳에서 테러가 발발하는 재앙과 자멸의 시대. ⓒUPI



이런 와중에 테오(클라이브 오웬 분)는 관료주의자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찾아온 옛 여인 줄리엔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줄리엔은 과격한 무정부주의자로, 런던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녀가 테오를 찾아온 이유는, 테오의 고위직 사촌의 힘을 이용해 한 소녀의 여행증을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테오는 여행증을 구해주었는데,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소녀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테오는 이 사실을 알고 '희망'의 안전한 운반을 위해 목숨을 거는 선택을 한다. 그녀가 흑인이든, 불법이민자든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사항이었다. 과 자신과 줄리엔의 아이가 죽어갔던 전력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사회운동가 출신이기 때문일까. 둘 다 아닐 것이다. 영화는 테오의 선택이 모든 이들의 바람이자 선택이었다는 걸 보여준다. 


코맥 매카시의 소설 <로드>를 영화화한 존 힐코트 감독의 <더 로드>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한다. "우리는 불을 운반하는 사람들이야" 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해버린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남을 것이라 생각되는) 이들은 마지막 남은 '희망'을 운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아버지는 죽고 아들이 살아남아 '희망'의 운반은 성공한다. <칠드런 오브 맨>은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제우스가 판도라에게 상자를 선물하며 절대로 열어 보지 말라고 말한다. 이에 판도라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상자를 열고 만다. 그곳에서 나온 수많은 끔찍한 재앙들. 그녀는 황급히 상자를 닫는다. 그 때문에 빠져 나오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희망'이었다. 


혹자는 희망이 있어 절망 속에서도 살아간다고 하고, 혹자는 희망때문에 헛된 기대를 품고 결국 실망으로 귀결된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전자에 해당된다. 후자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 희망이 나중에 어떻게 발현되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영화는 단지 그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이 지독하게 절망적인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희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부정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영화에서 비춰지는 마지막 희망이 가지는 의미가 너무나도 뚜렷하고 어마어마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영화의 제목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아이'. 


<칠드런 오브 맨>의 한 장면.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잉태하다. ⓒUPI



"아이를 지켜. 무슨 일이 있던 남들이 뭐라 하던, 아이를 지켜"


한편, 이 영화는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2027년이라는 멀지 않은 미래를 그린 것도 그렇지만, 영화의 세계에서 보여지는 면면들은 지금 이미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테러, 폭력, 불법, 전쟁, 기아, 바이러스 등. 그리고 무엇보다 출산율 저하는 3포 세대(취업, 결혼, 출산 포기)로 일컬어지는 현재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가다보면 2027년쯤 영화 속 세계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아니,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걸 누구나 직감하고 있지 않은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 그리고 아마 여러 정답 중 하나는, 공존공생의 길이 아닐까 싶다. 그 방법론까지 논할 수는 없지만, 아이가 그 공존공생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영화의 메시지는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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