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쓰쓰이 아스타카의 <모나드의 영역>


소설 <모나드의 영역> 표지 ⓒ은행나무



독자가 책을 접할 때 출판사의 홍보 마케팅 전략 바깥에 있기는 결코 쉽지 않다. 어떤 상품이 그러지 않겠냐마는 책은 다르다. '책'이라는 단일 상품군 안에 샐 수 없이 많은 상품이 존재하는 것이다. 특별한 상품이자 특별한 사업 생태계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거기엔 정녕 수많은 '최고'들이 존재한다. 


'책', 그 중에서도 '소설'은 최근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읽을 거리와 각종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정보는 주지 못하고 읽는 데에 방점을 둔 '소설'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그 와중에 우리나라에서 '일본 소설'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북유럽 소설의 인기가 수직 상승 중이지만 한계가 분명한 반면, 일본 소설은 꾸준히 인기가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등은 그들의 거의 모든 소설이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로 사랑받고 있다. 일본 소설만이 갖는 정서가 작금의 한국 독자에게 잘 들어맞는 것 같다. 일본 SF 거장 '쓰쓰이 야스타카'의 소설도 그 성격에 비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SF적 상상력에 기반한 블랙유머와 넌센스는 얼핏 난해하지만, 인간사회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 내포되어 있다. 


쓰쓰이 야스타카는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유명한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파프리카>의 원작자로 유명한데, 80세가 훌쩍 넘은 고령임에도 장편소설을 써냈다. 제목도 다분히 쓰쓰이스러운 <모나드의 영역>(은행나무). 마지막 장편소설이라고 하는데, '쓰쓰이 야스타카의 50년 작품 세계의 집대성'이라는 홍보문구가 눈에 띈다. 


쓰쓰이 야스타카만의 진지하지만 기상천외한 상상력


개인적으로 쓰쓰이의 작품을 매우 오랜만에 접하는 바, 이번에도 그 특유의 진지하지만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발휘했을지 기대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숙하게 발휘했다고 할 수 있겠다. 미스터리와 SF의 결합, 그리고 인간 세계를 재조명하는 각종 지식들의 총집합이 자못 흥미롭게 진행된다. 


어느 날 강변 둔치에서 발견된 여성의 한쪽 팔, 수사를 맡은 꽃미남 형사 신이치는 '아주 커다란 어떤 사태의 시작처럼 느껴진다는' 상사의 말에 조심히 수사를 한다. 한편 역 앞 로터리 상가에 위치한 빵집 두 곳 중 하나 '아트베이커리', 미대생 알바를 둔 덕분에 평소 동물 모양의 빵을 팔고 있다. 갑자기 휴가를 신청하는 알바 둘, 자기들보다 실력이 더 좋은 친구를 알아봐뒀다고 호언장담한다. 


실력이 더 좋다는 친구 구리모토, 어딘지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과연 실력은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여성의 한쪽 팔과 똑같은 모양의 빵을 만든 게 아닌가? 자기도 모르게 만들었다는 그, 그 와중에 단골 손님인 미대 유이노 교수가 그 빵을 본다. 그 정교함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는 칼럼에 개재한다. 곧 팔 모양 빵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하고 방송도 탄다. 


구리모토 때문에 잘리게 된 알바 둘과 망하게 생긴 맞은 편 빵집 주인은 이 상황을 보고, 그 빵 모양이 강변 둔치에서 발견된 여성의 한쪽 팔과 완전히 똑같다고 경찰에 신고를 한다. 신이치는 빵집으로 향하지만, 구리모토는 찾을 수 없고 어딘지 이상한 미대 유이노 교수를 만나게 된다. 곧 유이노 교수는 공원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을 거듭하는데...


'신'의 말을 빌려 해명하는 쓰쓰이의 50년 기행적 소설 쓰기


소설은 여느 추리소설처럼 흥미롭게 시작된다. 여성의 한쪽 팔에 이어 한쪽 다리까지 발견된 상황, 그런데 그와 똑같이 생긴 빵을 만드는 빵집이 있다? 그 와중에 기이한 행동으로 의심을 받고 또 사람들의 이목도 끄는 미대 학생 구리모토와 미대 교수 유이노까지. 다 갖춰진 느낌이다. 그런데 사건은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지점에서 쓰쓰이 야스타카만의 상상력이 빛을 발한다. 진지하지만 기상천외한, 즉 일상생활을 파괴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 아니 일상생활은 그대로 둔 채 그를 둘러싸고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지극히 마니아적이라고 하겠는데, 그만의 세계가 하나뿐이 아니고 참으로 다채로워 그 층위가 높고 넓다. 


단도직입적으로 소설은 '신의 강림'이라는 소재를 주요 위치에 두었다. 신은 세상의 비밀을 무참히 폭로한다. 그 방법은 다분히 인간적인데, 마지막 장편 소설까지 참 쓰쓰이답다. 상해죄라는 죄목으로 법정에 끌려나온 'GOD', 신은 인간의 말을 빌려 신과 인간세계를 말하고, 그 말들은 조목조목 쓰쓰이가 지난 50년 동안 계속 해온 기행적인(?) 소설 쓰기의 변명 또는 해명처럼 들린다. 그 중심에는 '다중우주'가 있다. 


말인즉슨,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전부는 아니라는 것. 수많은 '가능세계'가 존재하고, 그 각각이 각각의 세계로 존재하며, 신은 이 세계의 근본 원리인 '모나드'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신은 모든 것들을 '사랑'함으로. 신은 쓰쓰이 야스타카의 현현이다. 쓰쓰이가 만든 확고한 세계, 참으로 다양한 그 확고한 세계. 그는 '다중우주' 또는 '다중세계'를 문학 세계 전체에 걸쳐 만들어냈지만, 작품마다 소재로 종종 써 왔다. 그는 '작품의 조물주가 신'이라는 명제를 가장 잘 구현해냈다. 


소설의 '읽는 재미'를 완벽하게 느낄 수 있는 소설


이 소설을 진정 '집대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이 점에 있다. 작가가 신이라는 개체의 목소리를 빌려 자신의 문학 세계를 돌아보고 또 인간 세계를 다시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굳이 '소설'이라는 장르를 빌리지 않고 훨씬 더 잘 표현해낼 수 있었겠지만, 그가 굳이 소설을 이용한 건 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쓰쓰이 야스타카이기 때문이다. 


초를 치는 것 같지만 말해두지 않을 수 있다. 흥미를 끄는 초반의 사건, 그러곤 갑자기 신이 강림하는 그 연계점이 상당히 부실해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후반부에서 이를 신다운 명철함으로 훌륭히 봉합하지만, 그때까지 꺼림칙함을 벗어버릴 수 없을 거다. 이 또한 그의 대단함으로 치환할 수 있는 바, 이밖에도 여러 점들이 눈에 띄어 상당히 괴롭히지만 우리는 그가 가리키는 달을 보고 있지 달을 가리키는 손을 보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 알면서도 여유작작하게 그것을 해낼 수 있는 작가다. 


'이 소설을 보고 쓰쓰이의 전작들에 눈길이 갈까?' 하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는데, 그리 가능성이 높진 않은 것 같다. 적어도 이 소설 자체로만 본다면 말이다.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특별하게 다가올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실망으로 다가올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물론 열광할 부분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우린 이 얇은 소설에서 천재적인 상상력이 선사하는 인류적 반전을 맛볼 수 있을 테고,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선사했던 따뜻함의 업그레이드 버젼을 받을 수 있을 테며, 일본 소설의 한 축을 단 번에 흡수하는 황홀감을 얻을 수 있을 테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무너져 가는 '소설'의 자존심인 '읽는 재미'를 완벽하게 느낄 수 있을 게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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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나는 기억한다>


<나는 기억한다> 표지 ⓒ모멘토



글이란 게 시작과 끝이 가장 어렵고 그만큼 중요하다. 일단 어떻게든 시작하면 만들어지는 게 글이고, 어떻게든 끝을 맺으면 일단은 자리를 털 수 있는 게 글이다. 그 중에서도 더욱 어렵고 중요한 게 시작이다. 시작을 해야 끝을 맺을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래서 수많은 글쓰기 교본들에서 글쓰기 시작 비결을 전한다. 


글쓰기 책을 많이 접하지 않았거니와 글쓰기 시작 비결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데, 최근 읽은 책에서 괜찮은 비결을 얻었다. 이남희 소설가가 내놓은 <나의 첫 번째 글쓰기 시간>(아시아)에서 글쓰기를 아주 쉽게 시작하는 방법 중 하나로 '나는 기억한다'를 제시했다. 


"'나는 기억한다'고 쓴 다음 마침표를 찍지 말고 잠시 기다려본다. 다음 말이 나오지 않으면 소리 내어 몇 번이고 중얼거린다. 아마도 뒤따라 이어지는 말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글자로 옮기면 된다. 쓰다가 막히면 다시 '나는 기억한다'고 중얼거린다. 그리고 뒤따라 나오는 말을 기다려 무조건 쓴다. 이렇게 몇 번 되풀이하다 보면 어느덧 회상기 같은 글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나의 첫 번째 글쓰기 시간' 26~27쪽 중에서)


글이 시작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런 식이라면 글이 시작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내가 기억하는 건 무수히 많으니까.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쓰면 된다. 반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걸 써도 좋을 것 같다. 무엇을 쓰든 글쓰기 자체로는 더할 나위 없는 방법이다. 아마도 이남희 소설가는 40년 전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을 참고하지 않았을까, 싶다. 화가이자 그래픽 디자이너로 유명한 조 브레이너드의 <나는 기억한다>(모멘토)이다. 


이 책의 모든 문장은 '나는 기억한다'로 시작한다. 대부분이 한 문장으로 끝나고, 아무리 길어도 한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다. 우리의 기억은 시간순서로 되어 있지도 않고 정확하지도 않고 장황하지도 않다. 대부분이 순간순간이다. 그래서 그 성의 없는 것 같은 한 문장이 가장 정확하고 알맞은 것 같다. 사실 그 한 문장 한 단어 안에 무수히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작가가 이런 문장을 썼다. '나는 기억한다, 메릴린 먼로가 죽던 날을'. 이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 게 무수히 많다. 메릴린 먼로의 죽음에 관한 수많은 추측이 존재하지만, 1962년 8월 5일에 신경안정제 과다복용으로 죽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작년에는 전 CIA 요원이 조국을 위해 먼로를 살해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뿐만 아니라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도 내연 관계에 있었던 먼로가 국가 기밀을 누설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단편의 기억, 순간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아무것도 아닌 듯한 한 문장이 가지는 위력이 이 정도이다. 고스란히 '나는 기억한다'라는 문구가 가진 힘으로 옮겨간다. 반면, 이런 문장도 그 위력이 충분하다. 아니, 오히려 위력은 훨씬 강력할 것이다. '나는 기억한다, 창밖으로 보이던 비오는 날들을' 이 문장은 위의 문장처럼 누군가는 기억하고 누군가는 기억할 수 없는 종류가 아니다. 모든 이들을 위한 기억이자 문장이다.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보편적이다. 


창밖으로 보이던 보이는 날들이 누군가에는 애절하게 누군가에는 짜증나게 누군가에는 기분좋게 누군가에는 섬뜩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지 왠지 쓸쓸해지기도 하고, 출퇴근하면서 비에 젖은 우산에 이리저리 치일 생각을 하니 짜증나기도 하며,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쩍쩍 갈라지는 땅을 보며 시름시름 앓았을 농부들에겐 기분좋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홍수로 큰 피해를 봤던 누구는 비오는 것만 봐도 모골이 송연해지지 않았을까. 


'나는 기억한다'가 곧 신이다


'나는 기억한다'는 그 뒤에 무엇이 따라오든,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종류의 글이다. 기억하는 사람이 다르고, 장소와 시간이 다르고, 느낌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토록 탁월할 수가 있을까, 싶다. 지난 수십 년간 미국 전역의 글쓰기 교실에서 수많은 문인과 교사들이 활용해온 형식이 바로 이 '나는 기억한다'라는 게 당연하게 느껴진다. 내가 쓰기도 쉽거니와 가르치기도 쉬울 것 같다. 


이 형식은 결코 글쓰기를 쉽게 시작하는 방법이 아니다. 글쓰기를 시작해서 끝내는 것까지, 글쓰기의 모든 걸 가능하게 해준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기억한다'를 쓰는 순간 이미 글쓰기는 시작되었고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마치 주문같다. 주문만 외우면 '뿅'하고 원하는 것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처럼, '나는 기억한다'만 쓰면 눈앞에 완성된 글이 '뿅'하고 나타날 것이다. 


이 책은 이 문구 하나만 알아도, 그 위력을 조금이라도 실감할 수 있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그 자체로 완벽하다. 많은 생각하지 말고 읽어보시라. 그리고는 한 번 '나는 기억한다'라고 써 보시라. '내가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니라 마치 나로 인해 글이 써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언제나 신이 어깨에 내려 앉길 기다리고 있을 필요가 없다. '나는 기억한다'가 곧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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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네메시스>



<네메시스> ⓒ문학동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4년 미국 뉴저지의 뉴어크 지역, 폴리오 바이러스가 발병한다. 이 치명적인 전염병은 주로 열여섯 이하의 아이들에게 걸리며, 마비로 인해 기형적인 불구자가 되거나 죽음에 이르게 했다. 백신이 없는 상태였기에 발병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감염된 사람에게 가까이 있기만 해도 옮을 수 있었기에 쉽지 않았다. 동네는 불안에 사로잡혔고 평화는 깨졌다. 아이를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은 도시를 벗어나 산이나 시골의 여름 캠프에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메르스 사태와 흡사한 라인을 가진 이 이야기는 필립 로스의 마지막 소설이라 일컬어지는 <네메시스>의 초반부이다. '네메시스'라 하면 '보복'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보복의 여신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바이러스와 복수에 얽힌 이야기를 할 것인가? 일단 제목의 뜻풀이와 소설 배경의 조화가 합격점. 문제는 필립 로스가 마지막으로 던지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인가 이다. 


훌륭한 만큼 죄책감에 시달린 청년


소설은 놀이터 감독인 이십삼 세 청년 버키 캔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버키는 키는 작지만 단단한 몸에 운동선수로서 능력이 출중하고 강인한 의지로 가득 차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전쟁터에 싸우러 나가지 않은 극소수의 청년 중 하나였는데, 치명적으로 시력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버키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두고 하염없이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런 자신을 용납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법이 놀이터 감독으로서 아이들을 폴리오에게서 방어하는 것이었다. 폴리오 방어를 제2차 세계대전과 버금가는 전쟁으로 생각하고서 말이다. 버키는 자신이 있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한테서 받은 따뜻하고 다감하며 강인하고 건전한 몸과 마음의 균형이 그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형편없는 시력이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듯이, 폴리오가 아이들을 위협하는 것도 그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관리하는 놀이터에 폴리오가 침투하기 시작한다. 


어떤 일을 수행함에 있어 완벽함을 추구하며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완벽하게 일을 수행하지 못했을 때 받게 되는 죄책감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충분히 할 수 있는 건데 하지 못했고, 나 때문에 일을 수행하지 못했다. 나는 정말 못난 사람이고,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이런 경우 파국으로 치닫기 쉽다. 그렇지만 그는 누가 봐도 강인하고 훌륭한 사람이다. 


계속되는 죄책감 퍼레이드, 그리고 최악의 결과


훌륭한 젊은이 버키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그 훌륭함에 버금가는 죄책감을 지니고 있다. 폴리오에게서 아이들을 지켜내지 못했을 때 그가 괴로워하며 죄책감을 느낀 이유는 그가 그만큼 훌륭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그의 죄책감 퍼레이드는 놀이터를 떠나 파라다이스에서도 계속된다. 그는 폭염의 뉴어크를 떠나 약혼녀가 있는 인디언 힐 여름 캠프로 간다. 그곳의 물놀이 감독이 징집 되어 그 자리를 이어받기 위해서 였다. 약혼녀 마샤의 입김이 많이 작용했는데, 그녀는 버키가 폴리오 때문에 위험한 뉴어크를 떠나 안전한 인디언 힐로 왔으면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최악의 결과를 낳고 만다.


폴리오는 인디언 힐도 덮친 것이다. 문제는 이번에도 버키의 죄책감이었다. 버키는 인디언 힐에 폴리오를 옮긴 사람이 자신이라는 판단을 스스로 해버렸고, 나아가 뉴어크 놀이터에 폴리오를 옮기게 한 사람도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놀이터에 이탈리아인이 찾아왔을 때 제대로 대응을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도 그들의 행패에 잘 대응했었다. 버키는 그런 사람이었다. 


의무와 죄책감과 의지 그리고 두려움


소설은 뒷부분에 반전을 숨겨두고 있다. 그 반전으로 소설은 훌륭하게 균형을 잡으며 끝을 맺는다. '그런 사람'인 버키는 아마도 쉬운 길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이해할 수 없는 생각과 행동을 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올바른 삶은 산 것일까? 올바르지만 멍청한 삶을 산 것일까?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것일까? 


소설은 사망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전염병인 폴리오를 주요 소재로 그리고 있다.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지며 오싹함과 두려움을 감추기 힘들다. 메르스에 공포가 확산일로에 있는 현재, 폴리오에 대한 감정이입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죽지는 않을 지라도 평생 불구로 살아가게 될 거라는 무시무시한 전언은 덤이다. 하지만 버키에게 그보다 더 두려웠던 건 다른 데 있었다. 


버키의 심경은 다음과 같이 변해 간다.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 아이들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 신을 향해 포효하며 현실에 대해 분개하는 의지, 자신에게 들이닥칠지 모르는 알 수 없는 병에 대한 두려움. 버키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걸 두려워했다.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 없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의무와 죄책감 그리고 분노만 쌓여갔다. 두려워하면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지 못했고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렇지만 버키가 보여준 일련의 심경은 국민을 지켜야 하는 수장의 그것과 동일하다. 아니, 수장이 버키의 심경과 동일해야 한다. 그 자신을 파국으로 몰고 가라는 게 아니라, 그때까지 심경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의무와 죄책감과 분노 그리고 의지를 보여줘야 하는 게 수장이 아닐까. 버키가 뉴어크에서 인디언 힐로 갈 때 놀이터의 관리자가 버키에게 한 치명적인 말을 옮겨 본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응? 당연히 선택할 수 있지. 자네가 지금 하고 있는 걸 바로 선택하는 거라고 해. 자네는 지금 폴리오한테서 도망치는 거야. 일을 하겠다고 계약을 했는데 폴리오가 발생하니까 일 같은 건 난 모르겠다, 약속 같은 건 난 모르겠다, 하고 있는 힘을 다해 미친듯이 달아나는 거야. 자네가 하는 건 그저 달아나는 것일 뿐이라고." (본문 중에서)


네메시스 - 8점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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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아마데우스>



<아마데우스> ⓒ워너브라더스



중학교 음악 수업. 음악 선생님께서 뜬금없이 영화를 보여주신다. 음악 수업 시간에 영화를 보여주는 건 절대적으로 어떤 이유가 있을듯. 아마도 음악 관련된 다큐멘터리 정도가 아닐까? 수업 시간이 한 시간 정도이니 이번 시간과 다음 시간, 그리고 더 시간을 들여 영화가 끝날 때까지 보여준다고 하신다. 도대체 어떤 영화기에?


일단 다큐멘터리는 아니고 그냥 영화이다. 분위기는 우중충하고 배경은 중세 이후의 서양 같아 보인다. 다 죽어가는 할아버지가 나오고 신부가 그를 면회한다. 그는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듯 옛일을 회상한다. 그러기 전에! 그는 능숙한 솜씨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신부에게 물어본다. 이 멜로디를 아시는가? 모릅니다. 그럼 이건? 흠... 몰라요. 그래요? 그렇다면 이건! 아...아... 이건 알아요! 앞의 두 개는 내가 작곡한 거라오. 그리고 당신이 아는 그건 이제부터 내가 얘기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가 작곡한 것이라오. 



영화 <아마데우스>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영화 <아마데우스>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84년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이후 지금까지 나온 수많은 음악 관련 영화 중에서 최고로 남아 있다. 15년 전 중학교 음악 수업 시간 때 아무런 사전 정보나 기대 없이 보게 된 이 영화는 나에게는 최고의 영화로 남아 있다. 음악 장르 영화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정말로 좋은 영화이며 완벽한 영화이다. 스토리, 캐릭터, 배경. 그리고 음악까지. 


영화를 이끌어 가는 화자이자 초반의 다 죽어가는 할아버지는 살리에르(머레이 에이브러햄 분)이다. 그는 음악에 대한 사랑과 자질, 성공에 대한 열망으로 그 누구보다 노력해 궁중음악장의 위치까지 오른다. 천재는 아니지만 노력 하나로 그 자리에까지 오른 그의 모습은 인간적으로 끌린다. 하지만 어김없이 그에게 찾아오는 위기. 인간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는, 신의 대리인 천재 작곡가 모짜르트(톰 헐스 분)의 출현이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전 인류적 천재. 지금까지 인류사에 수많은 방면에서 수많은 천재가 출현했지만 그만큼 유명하며 압도적인 천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모짜르트의 출현으로 살리에르의 위치는 흔들리며 결정적으로 왕의 관심이 그에게로 쏠린다. 요즘 말로 모짜르트는 살리에르에게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라고나 할까. 



영화 <아마데우스>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그런데 살리에르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건, 모짜르트가 음악 외적으로는 굉장히 자유분방하고 순수하다는 점 때문이다. 가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세상물정을 모르며 음악적 재능을 음악 외적으로 끌어오지 못하는 것이었다. 살리에르가 보기엔 그런 모짜르트가 굉장히 오만방자해 보이고, 오히려 가식적으로 보였다. 살리에르는 모짜르트를 증오하고, 신을 증오한다. 


"나는 그때부터 신을 믿지 않았소. 당신의 도구로 그런 오만방자한 녀석을 선택하시고선 나에겐 그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능력만 줬기 때문입니다. 그건 부당하며 매정해. 맹세코 당신(신)을 매장시키겠소." 


이 영화가 갖는 가장 큰 매력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음악 영화다운 출중한 음악이다. 이 영화의 OST는 유명한 지휘자인 '네빌 마리너'의 지휘로 완성되었는데,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명반으로 뽑힐 정도이다. 모짜르트에 대한 가장 적확한 해석과 연주를 영화에서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없을 것이다. 


모짜르트와 살리에르의 캐릭터 충돌은 이 영화가 갖는 가장 큰 매력 두 번째 요소이다. 신의 대리인이자 신이 낳은 최고의 천재 모짜르트.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재능을 가졌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알 수가 없다. 반면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재능 살리에르. 그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짜르트를 이길 수 없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괴롭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던가. 살리에르에게 모짜르트는 그 반대이다. 살리에르는 모짜르트는 미워하되 그의 음악을 미워할 수 없었다. 살리에르는 모짜르트의 음악을 사랑했다. 그의 음악을 갖고 싶었고 계획을 짠다. 그는 어떻게 모짜르트의 음악을 뺏을 것인가? 그의 재능과 반비례하는 가난을 이용하면 될 터였다. 평범한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것 뿐이었다. 


"난 평범한 이들의 대변인이라오."


이 영화는 처음 볼 때 영화를 보고, 두 번째는 음악을 듣고, 세 번째는 살리에르의 입장에서 봐야 한다. 그 이후에는? 계속 곱씹어 보며 우리네 인생을 되돌아 봄이 좋을 것이다. 영화도 인생이라 말하며 음악도 인생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인생은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평범하기 그지 없는 우리 인생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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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어느 날 이름도 성도 신이라는 그가 나타났다 <신신>


<신신> ⓒ휴머니스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들이 자본으로 수렴된다. 예를 들어 보자면 이렇다. 불과 30여년 전까지 못 잡아먹어서 안달했던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상의 정점에 서 있는 것들, 1960년대 전 세계적인 반 사회적 열풍이었던 히피 문화, 그리고 언제나 인류를 공포에 떨게 하는 전쟁과 테러까지. 이런 것들은 물론이거니와 반 자본주의 문화라 할 수 있는 것까지 자본주의는 끌어안아서, 콘텐츠화 시킨다. 그리고 돈을 받고 판매한다. 무엇이든 돈이 된다고 생각하면 파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자. 쿠바 혁명의 상징이자, 반미·반자본주의의 상징인 체 게바라는 세상 무엇보다 브랜드 가치가 높은 '상품'이다. 걸프전 당시 3류 방송이었던 CNN은 전쟁을 여과없이 생중계로 방영해 단번에 세계적인 방송국으로 올라섰다. 이와 연장선상으로, 인류 역사상 주요 전투·전쟁들은 영화, 소설을 비롯한 문화 콘텐츠로 제작되어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또한 작년에 개봉해서 국가적 신드롬을 낳았던 영화 <설국열차>, <변호인>은 계급혁명과 반국가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런 현상을 극단적으로 끌어 올려 보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결국 모든 것의 궁극점에 위치해 있는 '신(GOD)'까지 도달할 것이다. 과연 '신'까지 '상품'으로 만들 수 있을까? 답은 두말 않고 그렇다이다. 일례로,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 <만들어진 신>이나 멜 깁슨 감독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등은 신과 관련된 상품들로, 공전의 히트를 쳤다. 한편 엄청난 논란을 낳기도 하였다. 


자본주의는 '신'조차 상품으로 팔아먹는가?


마르크 앙투안 마티외의 그래픽 노블 <신신>(휴머니스트)은, 자본주의의 신에 대한 노골적인 소비성 시각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어느 날 갑자기 인간 세계에 출현한 '신'. 그는 성도 이름도 신이었다. 그리고 역시 신답게 전지전능하다. 이에 전 세계가 들썩인다. 정말 말도 되지 않는 능력을 즉, 신다운 능력을 보여주는 이 '신신'에 대한 관심이 폭발한다. 그런데 그에 대한 관심이 생각지도 못한 곳을 흘러간다. 진짜 신으로 설정된 순간 더 이상 신이 있다 없다의 논쟁은 필요가 없어지고, 신이 창조한 이 세계에 대한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며 동시에 신이라는 브랜드를 앞세워 수많은 콘텐츠와 상품들이 부지기수로 나오기에 이른다. 


논쟁은 신에 대한 재판으로까지 진행된다. 이 재판은 신의 역할에 대한 것이다. 과연 신의 역할은 어디까지 일까? 신은 세계와 인간을 창조했다. 그런데 인간 세계에는 수많은 부정적인 것들이 판치고 있다. 왜 신은 이 세계를 구하지 않는 걸까? 왜 능력이 있으면서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지 않는 걸까? 이 재판은 신의 역할, 그리고 신의 능력(과연 신은 전지전능한가?)까지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신을 이용해 상품을 만들고 있는 현상이다. 부조리와 부정적인 것들이 판치는 몹쓸 이 세상(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이 세상)에 출현한 신의 존재는 그 자체로 확고부동하고 완벽한 브랜드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세계가 이를 놓칠 리는 만무하다. 출판, 전시회, 미디어, 테마파크까지. 심지어 재판조차도 신이라는 브랜드를 갖고 돈을 벌려는 일종의 쇼에 불과하다. 과연 이 거대한 쇼는 어떻게 끝을 맺을까? 


예상했겠지만, 쇼의 마지막은 가짜 신을 이용한 'I-신 이어폰'의 상품 프로모션이었다. 이 가짜 신이 전지전능한 신처럼 행동할 수 있었던 건 다 이 상품 덕분이었던 것이다. 각계각층의 전문가들로부터 해당 지식을 바로바로 전해 들었던 '신신'은 모르는 게 없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진짜 신이 내려와 인간의 궁금증을 풀어주려 했다면 인간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무엇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신'조차 상품으로 기획하여 팔아 먹는 이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책을 덮고 나면 어안이 벙벙하다. 


'신'의 출현에 미디어가 대응하는 법


하지만 이 거대한 쇼를 기획한 이는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미디어(언론)'. 자본주의 사회는 단지 충실하게 소비했을 따름이다. 미디어는 신이 출현하자 기민하게 대처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인 것이다. 


"처음에는 '놀라운' 것으로 여겨진 신신의 증거들은 '몹시 놀라운' 것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완전 놀라운' 다음에는 '놀라 자빠질 만한'... 그리고 마침내 '신신'은 신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여기서 되짚어 봐야 할 사항이 출현한다. 미디어라고 하는 심지어 '신'까지도 조작할 수 있는 존재가 우리네 삶을 지배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우리의 삶을 온전히 살고 있는 것일까? 매일같이 접하게 되는 미디어가 작정하고 일을 벌인다면, 그것을 믿지 않을 수가 있는가?


미디어는 현실 속에서 국가 최고 기관인 대통령을 만들어 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2088년과 2012년 대선 당시 SNS(쇼셜네트워크서비스)의 대표 주자인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효과적으로 이용해 어렵지 않게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다. 오바마가 미디어를 이용한 건지 미디어가 오바마를 이용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든 미디어가 오바마를 당선 시킨 것과 마찬가지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미 미디어는 '신'과 다름 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옳고 그름은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 같다. 문제는 미디어가 가지는 힘이 폭주하게 될 때의 쏠림 현상인 것이다. 미디어라고 언제든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 다만 그 모든 것을 떠나 '조작'을 통해 명백히 잘못된 정보를 전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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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신 없는 우주>


<신 없는 우주> ⓒ바다출판사

고백하건대, 나는 과거 교회를 다녔었지만 지금은 무신론자이다. 하지만 신의 존재를 믿는 무신론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의 존재는 믿지만 어느 종교에 귀의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자주 신께 기도를 드린다. 추석쯤 되어 보름달이 뜨면 어김없이 소원을 빌기도 하고. 


앞으로 어찌될 지는 모르지만, 교회를 다니다가 말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하느님을 믿으면 천국을 가고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협박(?)하는 길거리 전도사들의 말 때문이다. 그들 딴에는 위한답시고 하는 말이겠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믿었던 신도 믿기 싫어질 판이다. 


반면 그리 듣기 싫지 않은 말도 한다. "신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와 같은 말이 그렇다. 사실 여부를 떠나 종종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낄 때가 있다. 물론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에게만 해당할 것이다. 신을 향한 믿음과 불신, 이것은 비단 이런 작은 상황에서 뿐만 아니라 거대한 논쟁이 되어 있었다.


창조론 vs 무신론


또 한 번 고백하건대, 나는 리처드 도킨스의 유명한 책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를 아직 읽지 않았다. 1993년 초판 발행 이후, 리처드 도킨스를 세계적인 명사 반열에 올림과 동시에 리처드 도킨스로 하여금 창조론과 무신론(진화론) 논쟁 최전선 투사로 자리매김하게 한 이 책을 아직 보지 않았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내가 무식한 건지 진짜 책이 없는 건지, 창조론에 대한 정통한 책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 쪽만 읽고 그것이 정답인 양 떠들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나름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던 내가 실수 아닌 실수를 저질렀다. "리처드 도킨스가 지구에서 신을 몰아냈다면, 빅터 스텐저의 이 책으로 우주에서 신을 몰아냈다."는 어마어마하게 도발적인 타이틀을 내세우며 출간된 <신 없는 우주>(바다출판사)를 읽게 된 것이다. 


막상 읽기 시작하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바둑으로 치자면 아마 18급이 프로에게 도전하는 느낌이랄까? 물론 이 책이 이전에 나왔던 무신론 책들보다 월등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만큼 나의 머릿속에 든 지식과 정보가 부족했다는 뜻이다. 여하튼,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신을 철저히 검증한다. 


신가설의 부재 논증


저자는 증거의 부재 논증을 이용해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먼저 신이 존재한다는 가설을 세우고 그 존재를 뒷받침하는 객관적 증거를 찾는다. 그런데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논증의 정확성을 위해서인지, 1장을 통째로 할애해 상당히 지루한 논증을 위한 논증을 설파한다. 자신이 얼마나 탄탄한 논리 위에서 논증을 진행하는지 보라는 식이다. 그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신의 문제에 대해 가설적인 모형을 세우고, 경험적 데이터와 대조하여 그 모형을 시험하는 과학적 과정을 적용해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논증을 하나 소개한다. 그것은 창조론파에서 신의 존재를 뒷받침할 때 쓰이는 가장 유명한 논증으로, 일명 '설계 논증'이라 한다. 우주, 특히 지구상의 생물은 상상할 수 있는 자연의 메커니즘으로 생겨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다는 것이다. 그러며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기에, 신앙인들은 그 설명이 신이라고 확신한다는 것이다. 이에 저자는 반박한다. 


"아무도 문제의 현상을 지금 당장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자연적으로 묘사할 수 없음을 보여 주지 못하는 한, 최소한 과학적 논증으로서는 그 자체로 실패작이다. 신은 과학이 자연적이거나 물질적인 과정들만을 근거로 해서는 현상을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 없어서 그가 꼭 필요하다는 것이 증명되어야만 나타날 수 있다"(본문 속에서)


불쾌한 마무리 


저자는 비과학적인 종교의 주장을 과학적 논증으로서는 실패라고 말한다. 이는 어불성설이 아닌가? 로마에 가서 한국의 법을 들이대면 그게 맞는 것인가? 의식했는지, 저자는 여기에 대해 살짝 언급하고 지나간다. '과학이 모든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주장이 과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하는 주장과 논증 방법이 '종교 활동'을 포함한 일상 생활에서 흔히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종교에서도 자신의 논증 방법과 유사한 과정을 거친다고 장광설을 펼친다. 저자의 논증 방법은 상대의 주장을 모조리 반박하면서, 또 자신의 방법이 과학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보는 내내 헷갈리게 하는 부분이었다. 


여기에 결정타로 상당히 불쾌한 마무리를 선사한다. 나는 이 책을 단지 창조론의 반대하는 무신론의 아주 객관적인 지표를 읽기 위해 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의 마무리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종교와 '아름다움'을 주는 과학이다. 


종교를 부정적으로 이용한 사람들이 나쁘다는 것인지, 종교 자체가 나쁘다는 것인지 모호하게 표현한다. 아무리봐도 전자의 사례를 주로 들고 있는데, 결론은 종교가 나쁘다고 하지 않는가? 이어서 굳이 건들지 않아도 될 듯한 부분까지 파고든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삶이 무의미하다'는 주장에 대한 논의. 내가 보기엔 이 주장에 대한 논의까지는 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한 과학이 선사하는 영감과 아름다움. 역시나 종교가 선사하는 영감과 아름다움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이어서 처절히 부정하고 있다. 만약 종교에 비해서 과학이 좋지 않은 부분이 나오면, 물귀신 작전을 쓰기도 한다. 객관적이고 타당한 과학적 논증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저명한 물리학자에게 말하기에는 심할지 모르겠지만, 극단적으로 말해서 길거리 전도사들이 말하는 바와 다른 게 무엇인지? 끝까지 과학이 자랑하는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호기롭게 시작해 빈약한 마무리를 보여준 책이다. 


신 없는 우주 - 6점
빅터 J. 스텐저 지음, 김미선 옮김/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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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스트

<아이스크림의 지구사>

2013년 8월, 304쪽, 16000원, 로라 B. 아이스 지음, 

김현희 옮김, 주영하 감수, 휴머니스트 펴냄 


한 여름, 차가운 아이스크림 한 입이면 입 안이 얼얼해 지면서 뒤통수까지 찡하다. 잠시나마 더위를 잊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아이스크림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비교적 최근에야 생겼을 거라고 어림 짐작해본다. 


그런데 아이스크림은 근대의 산물이 아니란다. 이미 3,000년전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은  신대륙, 즉 유럽에서 탄생한 게 아니라 구대륙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몇몇 아이스크림은 굉장히 고급스럽게 포장되면서 유럽 귀족풍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이스크림의 지구사>는 반전의 묘미가 있는 아이스크림의 역사를 들려준다. 휴머니스트의 '식탁 위의 글로벌 히스토리' 시리즈인데, 그동안 피자, 치즈, 초콜릿, 밀크, 커리의 지구사를 내놓았다. 상당히 흥미가 가는 먹을거리의 역사들이다. 



ⓒ바다출판사

<신 없는 우주>

2013년 9월, 384쪽, 14800원, 빅터 J. 스텐저 지음, 

김미선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여전히 생물의 기원설에 관해서 첨해한 논쟁이 한창이다. 잘은 모르지만, 과학과 종교의 논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는 과학 쪽에서 종교를 취급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가르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애초에 판을 만들어 놓지 않는 것이다. 


세계적인 석학 리처드 도킨스를 필두로 과학자이자 무신론자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바탕으로 생물학에서 신을 몰아내려 앞장서서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리처드 도킨스는 신이 생물학에서 쫓겨나 물리학으로 피신을 갔다고 했다. 그런데 이 책 <신 없는 우주>로 물리학에서조차 신은 궁색한 처지로 몰린다. 물리학에서도 신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진화론의 허점을 비판하고 파헤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창조론, 그리고 다시 그 창조론을 비판하고 파헤치기 위해 나선 무신론자들. 이들의 싸움은 어디까지 계속될까?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이런 주제들이 흥미 위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학자로써의 모든 걸 걸고 싸우고 있겠지만 말이다. 때로는 인기와 명성을 위해 이용해먹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마호

<세상을 여행하는 초심자를 위한 안내서>

2013년 8월, 368쪽, 12900원, 김현철 지음, 마호 펴냄 


요즘들어 '~ 안내서'가 종종 나온다. 그 유명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책세상)의 영향때문일 것이다. 이는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한길사)의 영향으로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이 부지기수로 쏟아진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책이라는 것도 상품화 되면서 겉모습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출판계에서 일명 따라하기 전략은 관행처럼 되어 있다. 


여하튼 이 책은 인생에 관한 에세이이다. 그 중에서도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한 심리 교양서이다. 그리고 조금 특이한 것이, 툭툭 던지는 투의 말투이다. 재치있다고 해야할까? 저자가 종종 방송을 타는지라 뭐가 재미있는지 알고 있는 것 같다. 기존의 심리상담서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니, 관심있으신 분께서는 이 점을 유의하시길. 하지만 색다른 재미는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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