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윈드 리버>


영원한 설원의 그곳 '윈드 리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유로픽쳐스



2015년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2016년 <로스트 인 더스트>로 칸을 사로잡으며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테일리 쉐리던. 그는 이 두 편의 웰메이드 영화 각본을 책임졌다. 아무래도 영화 스텝 중에선 연출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클 텐데, 각본이 각광받는 영화가 종종 있다. 이야기가 주는 힘이 어마어마한 경우가 그렇다. 


테일리 쉐리던이 다시 1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영화로 찾아왔다. 이번엔 각본에 더해 연출까지 책임진 <윈드 리버>다. 미국 서부 와이오밍주에 위치한 '윈드 리버'라는 곳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꾸려지는데, 그곳은 인디언 보호구역이거니와 끝없는 설원이 펼쳐져 있다. 8월까지 눈이 내려 쌓인다. 


아무래도 사건이 단순히 사건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할듯, 상징과 비유가 보는 이의 머리와 가슴을 뒤흔들고 후벼팔 것이다. 대략의 분위기만 훑어보아도 전작 두 편의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우린 이 영화에서 미국의 속살을 보게될 여지가 크다. 그리고 거기에서 거대한 두려움이나 불안, 희망의 작은 불씨를 느낄 것이다. 


아픔과 슬픔, 그리고 희망


설원에 파묻힌 아픔과 슬픔들, 그럼에도 희망의 불씨는 살아 있다. ⓒ유로픽쳐스



끝없이 펼쳐진 설원의 한밤중, 피투성이 얼굴의 한 여인이 맨발로 달린다. 무엇인가로부터,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는 듯하다. 그녀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곳은 일개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없는 윈드 리버 아닌가. 한편 야생동물 사냥꾼 코리(제레미 레너 분)는 옛 장인어른 농장에서 소가 피습당했다는 속보를 접하고 윈드 리버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향한다. 그 원인을 찾아 근처를 수색하던 도중 여인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 여인은 인디언 나탈리, 코리도 잘 안다. 다름 아닌 3년 전 잃은 딸의 절친이었다. 그런데 나탈리는 성폭행을 당한 뒤 설원의 한복판에서 죽어 있다. FBI의 허가가 필요한 일이다. 가장 근처에 있는 FBI 요원 제인(엘리자베스 올슨 분)이 달려온다. 하지만 그녀는 신참이거니와 윈드 리버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코리가 앞장서 그녀를 이끈다. 코리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는 만큼, 나탈리의 아빠와 약속한다. 반드시 그 놈을 잡겠다고, 잡아서 죽여버리겠다고, 아주 고통스럽게, '윈드 리버'만의 방법으로. 제인과 코리, 코리와 제인의 공조 수사가 시작된다. 그 끝에서 형용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이 반길 준비를 마쳤다. 


그럼에도 희망을 언급할 수 있는 건, 아픔과 슬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래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덕분이다. 또한 그런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이해하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들 덕분이다. 영화는 사회에 만연한 '잔인'에 창끝을 겨누는 것에 초첨을 맞추면서도, 잔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조용한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설원과 미국


이 설원은 미국 그 자체다. 단적으로, 변화를 기대할 수 없지 않은가. ⓒ유로픽쳐스



설원은 자연이 줄 수 있는 최악의 조건 중 하나다. 바다에서 생존하는 것, 사막에서 생존하는 것 모두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설원은 이것들과는 또다른 차원이다. 설원에 오아시스 따위가 있겠는가. 맹렬한 추위의 설원에서 춥지 않을 방법을 찾을 수 있겠는가. 시시각각 변하는 사막과 바다와 달리, 변함없는 설원 아래 무엇이 있는지 알 방도가 있겠는가. 눈이 와서 더 쌓이면 쌓였지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설원이 상징하는 건, 이제까지 테일리 쉐리던이 취한 스텐스를 볼 때 '미국'이다. 더이상 변화를, 발전적이고 건설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미국의 축소판이다. 그렇다면 왜 와이오밍주 윈드 리버일까. 인디언 보호구역말이다. 영화는 미국에 남은 유일한 희망이 거기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코리는 비록 인디언이 아닌 백인이지만 100년 전에 선조가 건너와 거의 인디언이나 다름 없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고 그들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몇몇 인디언들은 그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편 코리와 달리 그곳에 일을 하러 온 백인들이 있다. 그들은 인디언들을 이해하기는커녕 그곳의 자연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불이해는 백인과 인디언만의 문제 따위가 아니다. 이는 일종의 상징이고, 미국에서 이런 모습은 전 세대와 전 인종과 전 계급 간에서 볼 수 있다. 그러하기에 영화에서 FBI 신참요원 제인의 행동이 중요하다. 그녀는 단순히 여러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어리바리 신참의 클리셰가 아닌 것이다. 그녀야말로 '희망'이다. 그녀가 얼마나 이 자연을 이해하고 인디언들을 존중하고 그 모든 것에 공감을 할 수 있는지. 


이해와 공감의 부재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다름 아닌 '이해와 공감의 부재'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유로픽쳐스



설원에서 사람 죽이는 일은 아주 간단하다.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할 필요가 없다. 기절시키고는 제대로 된 장비 하나 없이 설원 한가운데에 버려두면 된다. 멀리 못가 죽고 말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그런 곳이 비단 설원뿐이겠는가. 어느 사회에서라도 가능한 일이다. 우린 그런 사회에서, 그런 나라에서 살고 있다. 미국만의 얘기가 아니다. 세계는 긍정적인 방향으로든 부정적인 방향으로든 서로를 따라간다. 


모든 건 이해와 공감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수없이 오랫동안 그곳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부재는, 아무 준비와 생각 없이 현장에 온 제인의 모습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또한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부재는, 영화의 내용과 메시지 특성상 나와 있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과연 친히 나서서 악을 처단하려는 코리의 행동은 옳은 것일까. 물론 그가 행하는 처단 방법은 인간에게 절대적 최악의 조건인 '설원'이라는 자연에 맡기는 것일 테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 자체가 괜찮은 걸까. 영화가 그를 희망에의 연결고리로 포지셔닝해도 좋은 것일까. 판단하기 힘들지만, 그만큼 세상이 절망적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거 하나만 기억해도 충분하다. 그 설원에서 죽어간 그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까. 그 아픔에 공감하고 기억하고, 그 아픔에 슬퍼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 희망의 작은 불씨일지 모르지만, 결코 꺼지지 않을 불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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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몬스터 콜>


삶의 진리와 사랑으로 귀결되는, 인생에 대한 다양한 은유의 결정체 <몬스터 콜>. ⓒ롯데엔터테인먼트



2년 전 개봉해 찬사를 받은 명품 애니메이션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무스타파라는 현자가 말하는 삶의 진리와 사랑 이야기를 9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해 최대한의 시너지로 풀어내었다. 직설적으로 전달되는 진리의 향연이 90여 분이라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내내 계속되기에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다. 


애니메이션은 아니지만, 현자 같은 이(몬스터)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는 애니메이션화되어 이해를 도우며 결국 삶의 진리와 사랑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가 생각나게 하는 <몬스터 콜>은 다양한 은유의 결정체다. 현재를 기반으로 하되 다분히 판타지, 그것도 다크 판타지적인 세계관이 이를 가능케 한다. 


'성장'과 '가족'을 주요 키워드로, 인생과 작별과 마음 등의 키워드가 뒤를 받힌다. 데인 드한이 생각나게 하는 연기를 펼친 루이스 맥더겔이 주인공 코너를, 익숙한 이름들인 펠리시티 존스와 시고니 위버가 코너의 엄마, 할머니 역을 맡아 영화의 품격을 높혔다. 무엇보다 목소리만으로 극의 중심을 잡은 리암 니슨은 CG로만 이루어지지 않은 몬스터에 확실한 활기를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진실 뒤에 찾아오는 거대한 슬픔과 깨달음


어린 나이, 하지만 너무도 힘든 삶의 코너. 그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 그것이 성장통이자 통과의례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집에선 암에 걸려 죽어가는 엄마가 있고, 학교에는 사정없이 괴롭히는 놈들이 있다. 그 때문인지 코너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 같다. 또래와는 뭔가 다른 표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 집에서 멀리 보이는, 공동 묘지 한가운데의 큰 나무가 몬스터로 변해 집으로 들이닥친다. 그러곤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다 듣고 나서는 코너보고는 진실된 네 번째 이야기를 해야 한단다. 


코너에게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외할머니가 있다. 할머니는 코너를 데려가고자 한다. 아무래도 딸에게 큰 가망이 있는 것 같진 않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코너는 그게 너무나 싫다. 엄마가 죽는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은 거다. 아니 그는 엄마가 금방 나을 거라는 굳은 믿음을 갖고 있다. 


밤 12시 7분이면 찾아오는 몬스터가 들려주는 세 가지 이야기는 코너의 일상과 묘한 병렬을 이룬다. 코너에게 깨달음을 주려는 걸까. 몬스터는 진짜일까 그저 꿈 속의 환상일까. 코너 안에 내재된 또 하나의 코너일까. 그런 와중에 엄마의 병은 악화되고 코너는 점점 엇나간다. 할머니는 물론 이혼한 아빠와도 멀어지는 느낌이다. 


그런 코너를 이끄는 건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선생님도 친구도 아닌 몬스터다. 코너도 그걸 느꼈는지 몬스터를 만날 12시 7분을 기다리는 것도 모자라 시계를 돌려 몬스터를 억지로 불러낸다. 그리고 코너는 결국 네 번째 이야기를 꺼낼 수 밖에 없게 되는데... 거기엔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그 후에 찾아오는 깊은 깨달음이 있다. 


불행이 우리를 덮칠 때


어마어마한 불행이 덮치려 한다. 헤어나올 수 없다. 마주볼 수 있을까? 마주보아야 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불행이 우리를 덮칠 때, 불행은 다른 무엇도 아닌 불행 자체로 나타난다. 우린 대부분 저항할 생각도 못한 채 넋 놓고 불행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곤 곧 불행을 덮어둔 채 시선은 불행이 덮친 나를 향한다. 하지만 그건 이미 내가 아니다. 불행한 나일 뿐이다. 애초에 잘못된 것이다. 


불행이 우리를 덮칠 때 우선 불행을 마주보아야 한다. 나중에야 이미 불행한 나로 시선을 향하기 전에 말이다. 하지만 쉽지 않다. 아니, 일단 불행이 덮치면 모든 게 달라지므로 불가능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 훈련이라도 하란 말인가. 그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영화는 말한다. 자신과 대화하며 자신을 들여다보고, 다른 누군가와 대화하며 공유해야 한다고 말이다. 즉, 기쁨은 함께 하고 슬픔은 나누라는 말일 테다. 어렵기는커녕 지극히 쉬운 이 명제를 영화는 소년의 눈높이에 맞게, 그렇지만 유치하지 않게 그려낸다. 코너가 대화해야 하고 대화하게 되는, 슬픔을 나누어야 하는 대상들이 어른들이기 때문에 그 어른들 또한 나름의 성장을 하는 것이다. 


코너가 말해야 하는 네 번째 이야기는 영화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한다. 뭔가 크나큰 비밀이 있는 것일까. 절대 말할 수 없는 잔인하고 기가 막힌 비밀일까. 불행과 슬픔, 모순적 마음, 성장에 관련된 마음 속 깊숙히 숨겨놓은 코너만의 비밀이라고만 말해둔다. 당연히 죽어가는 엄마와 항상 불안에 떨고 불편하고 불만에 차 있는 코너의 표정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살아가리라


불행은 곧 작별이다. 작별 뒤엔 무엇이 있을까. 그래도 저래도 '삶'이 있다.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코너의 엄마는 죽어 간다. 죽는 게 확실하다. 그 자신도 알고 코너의 할머니도 알고 코너도 안다. 즉, (죽음에 의한) 영원한 작별이 멀지 않다는 걸 다들 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작별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미 누군가와의 작별을 해봤을 게 분명한 어른들도, 누군가와의 작별이 무슨 의미인지조차 잘 모르는 아이도, 마찬가지다. 


인생에서 반드시 당면하게 될 건 다름 아닌 '작별'이다. 분신과도 같은 사람과의 작별이라도 그건 명백한 진실, 하지만 맞닥뜨리면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은 진실이기도 하다. 몬스터는 그 모든 게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인간적인 마음에서 파생된 자연스러운 진실이라고 말한다. 


우린 사실 이 영화의 처음과 끝, 그리고 과정까지도 모두 꿰뚫을 수 있다. 아니, 이미 꿰뚫고 있을 것이다. 다양한 삶의 요소들이 변주되고 은유로 표현되는 장면 장면들은 이 영화의 것만도 코너의 것만도 아니다. 그럼에도 영화가 잔잔하게 그러나 묵직하게 그리고 새롭게 다가오는 건, 영화를 보는 우리들 현재 삶의 결이 영화 주인공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 잊지 않고 좋은 일 슬픈 일 모든 걸 기억해야 한다. 또한 그 기억을 공유해야 한다. 우린 혼자가 아니다. 그 기억을 공유하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에 소홀히 해선 안 된다. 그곳엔 나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나'라는 우주를 구성하는 핵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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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


만화 <몬스터> 표지 ⓒ서울문화사



뇌리에 박혀 한 장면, 어쩌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지 모르는 한 장면, 누구에게나 그런 한 장면이 있을 테다. 나에게도 여러 장면이 있는데, 그 중 한 장면이 만화책에 관한 것이다. 여전히 만화책은(만화가 아닌 만화책이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바, 그 장면이 종종 생각난다. 


막 중학생이 되었을 때 쯤이었나, 그때는 아직 동네에 도서대여점이 성행 중이었다. 반경 500미터 안에만 족히 5개는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당시 내가 주로 보는 장르는 학원물, 스포츠물, 판타지물 등이었다. 그야말로 그 나이에 걸맞는 장르가 아닌가. 그런데 한두 살 정도나 많은 형이, 당시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전혀 보고 싶지도 않은 장르의 만화책을 빌려가는 게 아닌가.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였다. 


한두 번이었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우연히 계속 보게 되었다. 한두 권이 아니라 18권이나 되었으니까. 뭔가 어려워 보이고, 뭔가 수준 높아 보이는 그런 만화책. 왠지 내가 좀 수준 낮아 보여 그 형이 <몬스터>를 빌려갈 때면 난 기다렸다가 한참 뒤에 빌려가곤 했다. 내가 <몬스터>를 보게 된 건 스무 살이 넘어 어른이 되었을 때다. 


우라사와 나오키 만화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 <몬스터>


시간이 흘러 이제는 내가 접한 모든 콘텐츠 중에서 가장 상위권에 위치해 있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내가 읽는 그의 작품은 <파인애플 아미> <마스터 키튼> <몬스터> <20세기 소년> <플루토> <빌리 배트>, 즉 국내에 나온 그의 작품 대부분을 접한 것이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마스터 키튼>,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몬스터>.


내용은 굉장히 미드스럽다. 안 그래도 미드로 제작 중에 있다고 하는데, 언제 나올지는 미지수다. 일본 국적의 독일의료계 신성 텐마는 천재뇌외과의사로 명성이 자자하다. 병원장 딸과 연애도 하고 있는 바, 차기 병원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는 병원 정치에 발을 내딛고 있기에 온갖 술수에 희생양이자 앞장이가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논문을 병원장 이름으로 내고, 터키인보다 오페라 가수를 살리는 게 우선이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던 찰나 사건이 터진다. 망명 온 동독의 고문 가족이 피살당한다. 부모는 죽고 쌍둥이 아이들은 살았지만 남자 아이가 머리에 총상을 입어 중태에 빠진 것. 텐마는 이 아이의 담당으로 배정되지만, 뒤이어 실려온 시장의 담당으로 다시 배정된다. 고민하는 텐마, 결국 그는 병원장의 명령을 어기고 아이를 살려낸다. 반면 중요한 인물이었던 시자은 죽고 만다. 텐마는 곧바로 치프 자리를 빼앗긴다. 


살려놓은 아이 '요한' 앞에서 병원장과 끄나풀들의 죽음을 간절히 바란 텐마, 며칠 뒤 거짓말처럼 병원 고위층이 한 자리에서 독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고는 감쪽같이 사라진 요한과 여동생 안나. 새로 부임한 병원장은 텐마를 외과과장에 앉히고, 그렇게 10년이 흘러간다. 어느 날, 우연한 사건으로 텐마는 자신이 살려낸 요한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일삼는 괴물임을 알고 그를 죽이기 위해 모든 걸 내려놓고는 길을 나선다. 아울러 그는 연쇄살인사건의 중요참고인 혹은 용의자로 수배된다. 


이 만화의 무궁무진한 포인트와 등장인물들


이 만화의 포인트는 무궁무진하다.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쫓기는 천재외과의사, 그는 나락으로 떨어진 인생은 둘째치고 자신이 살려낸 괴물을 죽이고자 외로운 길을 떠난다. 그가 쫓는 괴물 요한의 정체는? 그의 쌍둥이 여동생 니나와의 접점은? 이 괴물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또 하나의 인격인가,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괴물, 즉 피해자인가. 그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 


까도 까도 끝없이 까지는 양파처럼 이 만화에는 수많은 포인트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하나하나가 인간 군상의 개개인을 상징하고 있는 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캐릭터가 없다. 결국 모든 게 괴물 요한이라는 포인트로 수렴되지만 모두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어 공감이 간다. 


요한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괴물, 그뿐이랴? 그는 궁극의 혼란, 궁극의 파괴, 궁극의 고독을 원한다. 그런데 그에게 가까이 갈수록 슬픔을 느낀다. 그것이 과연 그가 원하는 것일까. 그가 원하도록 만들어진 게 아닐까. 그 부분이 이 이야기가 가지는 매력이자 힘이다. 


'의사' 텐마가 요한을 죽이려는 건 결국 그를 '치료'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또한, 그를 찾아내어 처치하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모험인데, 도중에 만나는 사람들도 치료한다. '네가 태어난 의미는 반드시 있어. 네가 살아갈 의미도 있어. 포기하지마. 희망을 가져.' 많은 이들이 요한으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끼치고 삶을 포기하려 하는데, 텐마는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희망을 불어넣는다. 


우리가 고전 서사를 즐기는 이유, <몬스터>를 즐기는 이유


우리는 여전히 고전 서사를 즐긴다. 거기엔 인간의 전형이 있기 때문이다. 고전 서사를 변형한 콘텐츠도 부지기수인데, <몬스터> 또한 고전 서사의 변형으로도 볼 수 있다. 모든 걸 원상태로 되돌려 놓기 위한 한 인간의 사투, 자신이 되살려 놓은 악을 섬멸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진 채 떠나는 한 인간의 모험, 악의 근원은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가고 선의 근원은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 내려가는 순환. 


이처럼 <몬스터>는 서사가 가지는 힘을 잘 알고 그를 극대화시켜 내보낼 줄 아는 작가의 능력이 극대화된 콘텐츠라 하겠다. 거기에 오그라들 만하지만 빠져들 수밖에 없는 장치들을 곳곳에 배치해놓았다. 노소를 불문하고 말이다. 캐릭터들의 생각이나 행동은 소년에게, 당대 정세나 상황 설정은 장년에게 먹힐 만하다. 


이 세상에 나홀로 남게 되었을 때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무얼까. 아무도 나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거라고 만화는 말한다. 그건 비단 진정 이 세상에 아무도 없지 않아도 가능하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나를 아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는 바, 나를 아는 사람이 모두 죽으면 나는 자연스레 존재하지 않는 게 되지 않을까. 요한이 본 '종말'이 바로 그런 모습, 그가 모든 이에게 선사하고 싶은 바도 그런 모습. 


'세상이 만들어낸 슬픈 몬스터', 요한에게도 통용되는 말일까. 그가 가진 몬스터의 요소 중 하나일뿐, 온전히 설명하는 요소는 아닌 것 같다. 우린 이 만화에서 '몬스터'보다 '인간'에게 눈길이 갈 것이다. 몬스터의 슬픔보다 인간의 희망에 기대를 걸게 될 것이다. '포기하지마'라는 전언이 깊이 새겨질 것이다. 그 전언이 몬스터도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는 큰 배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린 그런 배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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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젖은 모래 위의 두 발>



<젖은 모래 위의 두 발> 표지 ⓒ열린책들



책을 읽는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나와 다른 삶을 구경하고 싶은 욕망에서 기인한다. 나보다 못한 삶 또는 나보다 나은 삶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이다. 아무래도 나보다 나은 삶보다는 못한 삶을 들여다보는 게 편할 것이다. 그래서 나은 삶은 거의 자기계발 영역으로 빠졌다. 반면 못한 삶은 소설이나 에세이, 자기계발에서 예전 삶으로 다방면으로 가능하다. 


<젖은 모래 위의 두 발>은 자전적 에세이이다. 그것도 치명적인 비극과 불행을 그리고 있다. 못한 삶의 정도가 한계를 넘어선 듯 보인다. 그럼에도 끝까지 책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저자의 필력뿐 아니라 치명적인 비극과 불행에 의한 압도적인 슬픔보다 그보다 더한 사랑과 용기 덕분이다. 이제까지 봐왔던 최루성 콘텐츠와는 결을 달리한다. 


서서히 죽어가는 두 아이와 함께 하게 될 가족


엄마 쥘리앙과 아빠 로이크는 영영 빼도 박도 못할, 일상에 아로새겨질 시련에 맞닥뜨린다. 그들의 두 살 된 여자 아이 타이스가 돌이킬 수 없는 병에 걸렸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염성 백질 이영양증'. 심각한 유전병으로, 오래 살지 못하는 퇴행성 질환이다. 서서히 움직이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하고, 눈이 멀고, 결국에는 생명 기능까지 정지해 버리고 만다. 그리고 환아의 동생이 태어날 경우 네 명 중 한 명 꼴의 발병 위험성이 있다. 엄마와 아빠의 나쁜 유전자들이 만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생기발랄하고 부산스럽고 자기 주도적이고 고집도 센 아이 타이스는 서서히 죽어간다. 죽어가는 타이스를 보며 쥘리앙과 로이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의학의 힘을 빌리고 24시간 곁에서 지켜보며 고통을 줄여줄 수 있는 조치를 취하는 것밖에. 이토록 치명적인 병은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다. 


그들에게는 여러 길이 있다. 형용할 수 없는 슬픔에 압도되어 타이스의 남은 생을 눈물 바다로 보낼 것인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고통에 몸부림치는 타이스를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슬픔과 고통과 불 보듯 뻔한 비극과 불행을 딛고 타이스의 예견된 삶을 행복과 사랑으로 채워줄 것인지. 마지막의 삶이 그들이 가야 할 길이라는 건 명백하다. 하지만 그 삶은 너무나 어렵고 가기 힘든 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길을 택한다. 무엇보다 타이스를 위해...


"네가 이제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움직일 수도 없게 된대. 엄마 아빠는 어떡하지. 그래도 우리 딸, 엄마 아빠는 너를 언제까지나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 네가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뭐라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우리 예쁜 아기, 엄마가 약속할게. 너는 아주 예쁘게 살다 갈 거야. 다른 아이들이나 가스파르 오빠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네가 뿌듯해 할 만한 삶일 거야. 그 삶에 사랑만큼은 모자라지 않을 거야." (본문 중에서)


그들은 처참하고 지옥 같다, 그런데 행복하다고 한다


쥘리앙과 로이크는 셋째 아이를 낳는다. 언니와 같은 병에 걸릴 확률이 25%에 달하는 아이. 25%의 확률은 100%가 되어 그들의 심장을 겨냥했다. 셋째 아이 아질리스도 이염성 백질 이영양증이란다. 소름이 끼치고 억장이 무너지고 눈물이 비 오듯 내린다. 심장이 너덜너덜해진다.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 타이스를 잘 보내고... 아질리스를 잘 살려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이 모순 속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가려니 너무 힘들다. 그들은 도움을 청한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그들을 돕는다. 숨통이 트이고 눈물이 흐른다. 기쁨의 눈물인가, 안도의 눈물인가, 체념의 눈물인가. 


그들의 이야기는 처참하다. 그들의 삶을 보고 있으면 매일매일 순간 순간이 지옥처럼 느껴진다. 내 삶은 반대로 화창하게 느껴져야 하는데, 그들의 처참한 삶에 압도되어 감히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그들은 행복하다고 말하고 그 어느 때보다 그 누구보다 사랑으로 충만하다고 말한다. 아무리 그런 길을 걷기로 결연하게 맹세했기로서니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가능한가? 


다름 아닌 죽어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타이스 덕분이다. 타이스는 모든 것을 빼앗겼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노래하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그러나 아이는 사랑한다. 그저 사랑밖에 할 수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타이스한테 '사랑'은 남을 것이다. 타이스가 준 사랑, 타이스에게 준 사랑. 


비극과 고통의 극단에서 행복과 사랑의 극단을 끄집어내다


흔히 비극과 고통을 억지로 이겨내려는 사랑을 보고 '오그라든다'는 말을 쓴다. 그럴 때 고통의 눈물과 사랑의 환희는 멀리 날아가 버리고 남는 건 아무것도 없게 된다. 잘못된 선택이자 방법이다. 반면 이 이야기는 어떤가. 비극과 고통의 극단에서 행복과 사랑의 극단을 끄집어냈다. 극단으로 치닫는 건 좋지 못하고 극단과 극단은 서로 통한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에서는 전자는 틀리고 후자는 맞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극단에는 극단만이 대항할 수 있는 것이다. 


"귀여운 우리 딸, 엄마가 애원하잖니, 조금만 더 싸워 줘. 제발 버텨 줘. 네가 없으면 엄마는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나의 태양이고, 나의 세상이고, 나의 마음, 나의 힘, 나의 급소란다. 네가 나의 반석이고, 나의 심연이야. 사랑한다, 내 딸아. 지금 가면 안 돼. 오늘은 여기 있어 줘.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본문 중에서)


이 짧은 소개로는 그들의 고통을 1%도 전해줄 수 없다.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접한다고 해서 그들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고 전해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 또한 각자의 아픔이 있을 뿐이다. 온전히 그 아픔을 서로 나눌 수 없다. 


그런데 신기한 게 '사랑'은 그렇지 않다. 사랑 만은 이 짧은 소개로도 충분히 전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접하면 그들의 사랑을 더욱 이해하고 전해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 또한 사랑을 힘껏 공유하고 있다. 온전히 사랑을 서로 나눌 수 있고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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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마돈나>



영화 <마돈나> 포스터 ⓒ리틀빅픽처스



2002년 <해안선>으로 나의 독립 영화 사랑이 시작되었다. 2005년엔 <용서 받지 못한 자>이,  2008년엔 <똥파리>가, 2011년엔 <파수꾼>이, 2013년엔 <가시꽃> <명왕성>이, 2014년엔 <셔틀콕> <거인>이 즐거움을 주었다. 지극히 상업적인 '영화'라는 채널을 이용함에도,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려는 감독들이 있어 매년이 행복했다. 


2015년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마돈나>라는 작품이다. 기존에 보았던 독립 영화들과 결을 같이 하는, 잘 된 작품들의 전철을 따라가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강렬한 작품이다. 단단한 내공이 엿보인다. 독립 영화를 거론할 때 빠짐 없이 리스트에 오를 영화이다. 


위에서 거론한 영화들에는 공통점이 몇 가지 있다. 좋은 독립 영화들만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공통점들은 스포일러라고 할 수 없다. 끝까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예견되어 있다. 먼저 주인공이 죽는다는 것. 위의 모든 영화가 그렇진 않겠지만, 대부분의 영화에서 주인공 또는 주인공 중 한 명이 죽는다. 그러면 당연히 세드 엔딩이다. 해피 엔딩일 수가 없다. 


그리고 내가 오랫동안 독립 영화를 보며 알아낸 것인데, 주인공을 비롯해 등장 인물들 대부분이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다. 우리 모두가 이 딜레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거나 헤어 나오고자 발버둥 치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 한다. 아마 영원히 계속 될 것이다. 가해자이자 피해자라는 굴레는.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영화 제목이 세 글자이다. 영화계의 징스크인지, 아니면 세 글자가 풍기는 서늘한 이미지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명백한 공통점인 건 확실하다. 


병원 VIP실에서 벌어지는 구역질나는 계략, 그러나...


이렇게 구구절절 독립 영화에 대해 말한 건 또 하나의 좋은 독립 영화 <마돈나>를 소개하기 위해서 이다. 선배 독립 영화의 기를 받아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까지 있다. 민주주의가 별 게 아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수용할 수 있으면 가능하다. 그렇다고 독립 영화가 진리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독립 영화'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다. 



영화 <마돈나>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영화는 병원 내 VIP실에 해림(서영희 분)이 간호조무사로 일을 하게 되면서 시작한다. 그곳엔 재벌 회장이 뇌사 상태로 10년 째 누워 있다. 그 옆에는 아들 상우가 10년 째 지키고 있다. 꼬락서니를 보면 효자 같지는 않은데,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돈 때문이라 추측할 수 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담당 간호사로부터 들려온 이야기는 충격적이다. 


누워 있는 재벌 회장 앞으로 한 달에 10억이 들어온다는 것. 하지만 자신의 모든 돈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유언을 남겼기에 아들이 한사코 그의 죽음을 연기하려 한다는 것이다. 어쩌다가 혹은 자연스럽게 해림은 이 치졸하고 구역질 나는 계략에 말려 들어간다. 


어느 날, 뇌사 상태에 빠진 환자 미나(권소현 분)가 실려온다. 상우는 그 환자를 이용해 아버지를 살리려 한다. 그는 해림에게 시켜 그 환자의 장기 기증 동의서를 받아오게 한다. 병원의 실소유자 상우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해림은 받아오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 환자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영화는 해림이 환자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녀의 뒷이야기를 파헤치기 시작하면서 요동친다. 그 전까지는 모든 등장 인물들이 일정 정도의 톤을 유지한다. 병원이라는, 그것도 VIP실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유난히 조용하다. 다들 삶에 대한 특별한 목적이 없거나, 이미 충격적인 일을 겪어 미련이 없는 듯한 느낌이다. 해림도 상우도 마찬가지이고, 병원의 간부도, 이제 막 레지던트를 끝낸 담당 의사도, 상우에게 잘 보여 한 몫 챙길 속셈밖에 없는 담당 간호사도 마찬가지다. 재벌 회장의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그의 죽음을 한사코 막으려는 그 알 수 없는 싸움이 내부에서만 요동치는 것 같다. 


그러다가 재벌 회장에게 또 한 차례 심장 정지가 찾아 오고 다시 한 번 장기를 교체해야 하는 시점이 오면서 영화는 요동친다. 이어 정체 모를 뇌사 상태 환자가 들어오고 그 환자가 임신 상태에 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점점 더 심해진다. 고요했던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웃던 낯짝이 일그러지고, 항상 저음을 유지하던 톤은 한없이 높아 간다. 그래도 해림은 끄덕 없이 그 정체 모를 환자, '마돈나'라 불렸던 이의 뒤를 추적한다.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기필코 찾아야 했다. 그러면 상우의 계략을 어느 정도 무마 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이보다 불편한 영화를 찾기 힘들다, 그러나 완벽하다


영화는 뒤로 갈수록 충격에 충격을 더한다. 특히 마돈나의 뒷이야기는 분노와 슬픔, 안타까움과 공감이 이상하게 뒤틀린 카오스적 충격의 연속이다. 그녀가 겪었던 수많은 이야기는 누군가는 반드시 겪었을 것이기 때문에 공감이 되면서도, 터무니 없는 분노와 슬픔이 있기 때문에 일그러지는 얼굴을 펼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러곤 해림의 숨겨진 이야기가 정점을 찍는다. 기묘하게 카타르시스까지 일게 하는 너무나 엄청난 충격이다. 영화적으로만 말하자면, 완벽한 시나리오의 승리다. 



영화 <마돈나>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손이 떨려올 정도의 연속되는 충격은 급격히 끝을 맺는다. 슬픈 해피 엔딩을 맞이한다. 영화 전체적으로 보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크레센도'만 계속된다. 아주 정교하게 설정되었기에 장면의 전환에 이질감이 없어 편안하게 볼 수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편안함은 시나리오의, 이야기의 흐름이고 내용으로는 이보다 불편한 영화를 찾기 힘들었다. 


이 영화에도 어김 없이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심지어 아무런 잘못도 없이 오직 피해만 당했던 이도 결국에는 가해를 저지르고 만다. 정말 잘못한 게 없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계속되는 충격 속에 숙연함과 함께 미안함이 들게 하는 인물이다. 이 국가는, 이 사회는 그들을 구제할 능력이 없는 것인가? 왜 누구를 위해 누가 희생되어야 하는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한편 그들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힘이 없어 피해를 보는 걸 구제할 수 없다면, 최소한 가해자가 되지는 않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가해자가 된다면 구제를 해주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리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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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5일의 마중>



영화 <5일의 마중> 포스터 ⓒ찬란



공리의 데뷔작이기도 한 1988년 <붉은 수수밭>으로 데뷔한 장예모 감독. 그는 이후 중국 영화사에서 5세대라 칭하는 감독군의 중심에 서게 된다. 5세대는 기본적으로 사회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였지만, 엄격한 검열 때문에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하곤 했다. 한편 중국 전통의 '민족의식'을 신비롭게 포장하여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국적인 정서를 풍부하게 느낄 수 있게 하였다. 


그는 이후 1990년대를 완전히 석권한다. 1991년에 나온 <홍등>을 시작으로, 5개의 작품이 세계 3대 영화제인 칸, 베를린,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을 탄 것이다. 이미 1988년 데뷔작 <붉은 수수밭>으로 베를린 영화제를 제패했던 그다. 거장은 2000년대 들어서 중국형 블록버스터로 눈을 돌린다. 


2002년의 <영웅>, 2004년의 <연인>, 2006년의 <황후화>까지. 2년을 텀으로, 점점 화려해지고 점점 돈은 많이 투입되었으며, 점점 영화는 안 좋아졌다. 물론 그만큼 자본적으로 대성공을 기록했지만 욕을 있는 대로 먹었다. 언론은 '거장의 추락'을 서슴없이 보도했다. 20세기 중국 영화의 거장은 그렇게 2000년대를 넘지 못하는 듯 보였다. 


페르소나 '공리'와 함께 돌아온 '장예모' 감독의 신작


그런 그가 2014년에 그의 페르소나 '공리'와 함께 돌아왔다. 장예모의 20번째 영화이자, 공리와 함께한 9번째 영화 <5일의 마중>이다. 그들은 80, 9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았지만 <황후화> 이후 오랫동안 같이 작업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8년 만에 의기투합한 것이다. 그것도 과거에 2000년대가 아닌 1990년대의 그 느낌으로 말이다. 따뜻하고 감성적인 장예모의 연출이 완벽하게 부활했다. 


영화는 정치적인 느낌에서 시작해 지극히 감성적이고 인간적인 느낌으로 끝난다. 문화대혁명이 한창일 당시 펑안위(공리 분)와 그녀의 딸 단단(장혜문 분)은 루옌스(진도명 분)이 투옥 중 탈출했다는 비보를 듣는다. 루옌스는 교수직에 있었지만 반동분자로 내몰려 투옥 중이었다. 탈출해서 갈 곳이라고는 가족 밖에 없으니, 당에서는 펑안위와 단단에게 경고를 내린다. 우물쭈물하는 펑안위와는 달리 신속 명확하게 반동분자 신고를 할 것임을 맹세하는 단단. 그녀에게 루옌스는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다. 



영화 <5일의 마중>의 한 장면. ⓒ찬란



어김없이 가족들을 찾아온 루옌스. 하지만 그는 아내 펑안위는 만나지 못한 채 딸 단단만 만나고, 다음 날 기차역에서 볼 것을 전한 채 돌아선다. 사방에 감시의 눈이 번뜩이고 있음에도 펑안위는 루옌스를 만나러 가고 그 사이 단단은 아버지 루옌스를 신고하기에 이른다. 결국 펑안위와 루옌스는 바로 눈앞에서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채 헤어지고 만다. 그리고 3년이 흐른 뒤, 문화대혁명은 막을 내리고 루옌스는 공식적으로 감옥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다. 힘들었지만 잘 된 것 같다. 


모든 것을 바꿔버린 '문화대혁명'


여기까지가 정치적인 부분이다. 너무 정확하다 싶을 정도로 딱 잘린다. 이후의 자잘한 사건들의 복선이 전부 여기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후 다시 만날 이들의 행복한 모습을 위해 극도의 불행하고 안타까운 장면을 넣어 놓았다. 너무나도 영화적인 스토리이지만 그 시대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문화대혁명은 1966년부터 10년 간 당시 중국 최고지도자 마오쩌둥에 의해 주도 된 극좌적 사회운동이다. 일종의 권력투쟁인데, 중국 공산당 내부의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1950년대 대약진운동의 대실패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자본주의 정책의 일부를 차용한 정책을 내세워 실효를 거두면서 권력의 실세로 떠오른다. 이에 권력의 위기를 느낀 마오쩌둥이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부르주아 세력 타파'와 '자본주의 타도'를 외치면서 전국을 휩쓸어 버린다. 이 격동은 모든 것을 바꿔버린다. 


마오쩌둥의 말 한마디가 곧 법이었고, 그 법을 지키지 않으면 부모와 자식 간이라도 꼭 신고를 해야 했다. 그렇게 파괴된 개인과 가정이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장예모 감독 또한 이 비극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고 하는데, 영화를 통해 고스란히 녹아 들어 있다. 루옌스와 펑안위 그리고 그들의 딸 단단. 


루옌스와 펑안위 그리고 딸 단단의 미래는?


20년 만에 돌아와 같이 살게 된 그들. 루옌스와 단단은 용서 없는 화해, 즉 가족 간의 용서가 필요 없는 화해를 하게 된다. 하지만 루옌스와 펑안위는 그러지 못한다. 3년 전 루옌스와 비극적으로 헤어지고 난 후 심리적 기억상실로 많은 기억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하필 이면 루옌스의 얼굴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이제나 저제나 루옌스가 돌아올 것을 믿고 있는 펑안위. 그 앞에 이미 와 있는 루옌스. 하지만 펑안위는 루옌스를 알아보지 못한다. 


루옌스와 단단은 온갖 방법을 이용해 펑안위의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한다. 당에서 내려와 루옌스의 신분을 확신 시켜 주고, 루옌스의 옛날 사진을 찾아와 펑안위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펑안위와 루옌스 만이 알고 있는 피아노 선율로 펑안위의 기억을 불러오려 한다. 펑안위에게 5일에 돌아올 거라는 편지를 보내고 루옌스가 기차에서 내려와 극적 상봉을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펑안위는 그 어떤 것으로도 루옌스의 얼굴을 기억해내지 못하고, 다만 매달 5일이면 기차역으로 나가 루옌스가 오기 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영화 <5일의 마중>의 한 장면. ⓒ찬란



결국 루옌스는 그동안 그녀에게 쓴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져와 읽어주고 최신 편지라며 가지고 와 읽어주기도 했다. 펑안위는 그렇게 얼굴 모를 그와 친해졌는데, 아픈 그녀 곁을 지키기 위한 루옌스의 가슴 아픈 결정이었다. 그는 그 결정을 평생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까? 펑안위의 기억은 돌아올 수 있을까?


영화는 정치적인 부분이 지나간 다음 완전히 다른 장르가 된다. 가슴 아프지만 너무 아름다운 멜로. 기억을 잃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내를 위한 희생과 헌신. 시나리오는 얼핏 <내 머리 속의 지우개>나 <노트북>, 심지어는 <첫 키스만 50번째>가 생각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영화가 이들 영화와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바로 앞 부분이다. 


차원이 다른 슬픔과 '멜로' 장르 본연의 맛


다른 영화들이 굉장히 우연적으로 또는 영화적 기법으로 기억을 잃은 것과 달리, 이 영화에서 아내가 기억을 잃은 이유는 명백하다. 그녀가 병에 걸린 직접적인 원인이 나에게 있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이유 없이 병에 걸려 기억을 잃은 게 아니고 말이다. 슬픔의 강도가 차원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 <5일의 마중>의 한 장면. ⓒ찬란



공리와 진도명이라면 연기가 넘치고 흘러야 마땅한데, 이 영화에서는 그렇지 않다. 더할 나위 없었다고 표현하면 알맞을 그런 연기를 펼쳤다. 연출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런 시나리오라면 눈물샘을 자극하기 위해 과도한 연출을 행할 만 한데, 잔잔하게 진행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영화가 끝나고도 여운이 가시지 않을 것 같다. 눈물샘을 쏙 빼놓고는 다시 보기 힘들게 하는 여타 영화와 다르다. 


장예모 감독의 귀환이 반갑다. 현재가 아닌 옛날 얘기이지만 장예모이기에 괜찮다. 과거를 다시금 되새기는 건 자칫 과거 미화, 그것도 현재와 미래를 애써 부정하고 나서의 과거 미화가 되기 십상이다. 반면 과거를 거울 삼아 현재와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하려는 의도는 그 자체로 훌륭하다. <5일의 마중>은 그것을 나름 훌륭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멜로' 장르 본연의 맛을 완벽히 살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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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허삼관 매혈기>


<허삼관매혈기> 표지 ⓒ 푸른숲

몇 년 전, 일명 '현대판 라푼젤' 브라질 소녀가 10년 동안 길었던 머리카락을 600만 원 가량에 판매해 소형 주택을 장만했다는 기사가 난 적이 있다. 얼마후엔 영국 여성들이 돈이 필요해 머리카락을 팔았다는 기사도 났었다. 몸의 한 부분을 팔아서 돈을 장만하는 것만큼 절실한 건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부모님께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신조가 널리퍼진 나라에서는 더욱 말이다. 그럼에도 불과 몇 십년전, 국가 전체가 가난에 찌들었을 당시에는 머리카락을 팔아 간간히 연명하는 집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 옛날 일도, 그리 먼 일도 아닌 것이다. 


요즘은 여간해서 한 가지 일만 해서 먹고 살기가 힘든 것 같다. 그래서 '투잡 시대'라고 하는가 보다. 불황의 그림자는 정말 깊고 넓게 드리우고 있다. 소설 <허삼관 매혈기>(푸른숲)에서 주인공 허삼관은 피를 팔아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각종 사건을 해결한다. 


사실 그는 본 직업이 있다. '하얗고 보드라운 누에고치로 가득 찬 수레를 미는 작업'(37쪽)을 한다. 하지만 그걸로 인생을 온전히 살아가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허삼관은 근룡이와 방씨를 알게 되어 본격적인 '매혈'로 접어든다. 허삼관이 왜 피를 파냐고 묻자, 근룡이가 말한다.


"우리는 여자를 얻고 집을 짓고 하는 돈은 전부 피를 팔아 벌어요. 땅 파서 버는 돈이야 겨우 굶어 죽지 않을 정도니까요."


'매혈'을 해야 한번에 목돈을 쥘 수 있는 것이다. 복권보다는 장기매매에 가까운, 비합리적이지만 누구나 생각해 봄직한 행위이다. 처음 해보는 매혈은 그에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허삼관은 이렇게 피를 판돈으로 이쁜 여자 허옥란을 낚아챈다(?). 피는 곧 돈이고, 돈은 곧 힘인 것이다. 이미 '그'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누구나 살면서 반드시 '매혈'을 해야 할 때가 올 것이기에. 한번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


허삼관은 3형제(일락, 이락, 삼락)를 낳아 잘 살아간다. 그러던 중 첫째 일락이가 점점 허옥란의 전 남자친구 하소용을 닮아가는 것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이를 두고 허삼관에게 중국 최악의 욕인 '자라 대가리'라며 놀려 댄다.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른 가정은 사상누각에 있다. 어느 날 일락이가 대형 사고를 친다. 대장장이 방씨의 아들을 돌로 찍어 위태로운 상태에 빠지게 하고, 허삼관에게 치료비를 청구하지만 자기 아들도 아닌 일락이 때문에 돈을 물어 줄리 만무한 허삼관이었다. 방씨는 허삼관네 가산을 차압해 간다. 


결국 허삼관은 옛날을 생각하며 피를 팔아 방씨로부터 다시 가산을 되찾는다. 이후 어쩌다가 다쳤다는 하소용 아내의 병문안을 가 그녀와 관계를 맺는다. 허옥란은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이에 허삼관은 너도 했으니 나도 했다는 식으로 넘어간다. 


문화대혁명 시기, 전래 없는 대가뭄으로 모두가 허기에 시달린다. 역시 허삼관은 세 번째로 피를 팔아 가족을 살린다. 애잔하게 마음을 울리는 허옥란의 푸념을 들어본다.


"일락이가 대장장이 방씨네 아들 머리를 박살 냈을 때 피를 팔러 갔었지. 그 임 뚱땡이 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피를 팔았고. 그런 뚱뚱한 여자를 위해서도 혼쾌히 피를 팔다니 피가 땀처럼 덥다고 솟아나는 것도 아닌데...... 식구들이 오심칠 일간 죽만 마셨다고 또 피를 팔았고, 앞으로 또 팔겠다는데......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고생을 어떻게 견디나...... 이 고생은 언제야 끝이 나려나.(171쪽)


끝없이 이어지는 가난과 역경 속에서, 언제 끝날지 모를 고생을 하는 이 시대의 부모님들이 생각나는 구절이다. 피를 팔아서는 안 되지만 팔지 않으면 '이 고생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아이러니. 슬픈 일이 있으면 기쁜 일도 있고, 울 때도 있으면 웃을 때도 있는 법. 이 소설은 무겁고 암울하지 만은 않다. 익살과 해학으로 때론 비극도 희극으로 승화 시키고 있다. 


익살과 해학에 가려지는 슬픔과 비극


피를 팔기 전에 물을 몇 사발 먹어 피를 물게 해야 많이 팔 수 있다고 해서 오줌보가 터지기 직전까지 물을 마시고 어기적 어기적 걸어가는 모습이라든지, 허옥란이 아들 셋을 날 때 허삼관은 밖에서 한번, 두번, 세번 웃어서 이름들이 일락, 이락, 삼락으로 지었다는 내용은 잔잔한 웃음을 머금게 한다. 


일락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라 하소용과 허삼관 사이를 왔다갔다 하다가 결국 가출을 시도한다. 허삼관은 걱정된 나머지 일락이를 찾아 나서는데, 집에서 몇 발자국도 옮기기 전에 일락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대거리 끝에 허삼관은 일락이를 업고 어딘가로 향한다. 


"이 쪼그만 자식, 개 같은 자식, 밥통 같은 자식......오늘 완전히 날 미쳐 죽게 만들어놓고.....가고 싶으면 가, 이 자식아.(중략) 나중에는 네가 내 계부 노릇 좀 해라. 너 꼭 기다려라. 내세에는 내가 널 죽을 때까지 고생시킬 테니....."

"아버지, 우리 지금 국수 먹으러 가는 거예요?"

"그래."


온화한 미소로 대답해주는 허삼관의 표정이 눈앞에 떠오르는 듯하다. 이후 하소용이 죽으려 할 때 일락이를 필요로 한다. 허삼관은 알량한 마음일랑 접어두고 사람 목숨을 소중히 하는 마음으로 일락이더러 해주라고 한다. 일락이는 마지못해 이를 따르지만, 결국 하소용은 죽고 만다. 진짜 아버지 하소용이 주고 가짜 아버지 허삼관이 진짜 아버지가 되는 순간이다. 


그래도 가족이다


어느 날,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허옥란이 비판 대상자가 된다. 하소용과의 불미스러운 과거가 원인이 된 것이었다. 결국 가족 비판 대회까지 열어 허옥란을 비판하게 된다. 여기서 허삼관은 자신의 입으로 아들들이 보는 앞에서 임분방과의 일을 말한다. 허옥란으로 향하는 비판의 화살을 자신에게로 돌리기 위해서 였다. 그는 양심 있고 정 많은 그런 사람이다. 


시간이 흘러 일락이와 이락이가 농촌 생산대로 떠난다. 일락이가 쇠약한 몸이 되어 집에 왔을 때 그를 다시 보내기 위해 피를 팔고, 또 이락이의 생산 대장이 방문할 때 대접하기 위해 피를 판다. 한번 피를 팔면 세 달은 쉬어야 하는데, 한 달에 두번이라니. 가족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피땀' 흘리며 일하는 아버지의 자화상이다. 그런데... 이렇게 피땀 흘려 일해도 남 부끄럽지 않게 돈을 벌 수 있는 현실인가? 반문하게 된다. 


일락이의 가족에게 큰 위기가 닥친다. 옛날 피를 처음으로 팔게 되었을 때 알게 된 방씨가 오줌보가 터져 몸이 망가지고, 피를 팔고 나선 근룡이가 쓰러져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허삼관은 일락이가 간염에 걸려 위독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허옥란과 함께 상하이에 보내 먼저 치료를 하게 하고 자신은 가는 길에 계속 피를 팔며 돈을 마련하기로 한다. 계속되는 고난한 여정으로 허삼관의 생명이 단축되어 가는 걸 느끼지만, 계속 가야만 한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눈물의 여정은 계속되지만 쉽지 않다. 그래도 결국 일락이는 건강을 되찾는다. 


이제는 당신들을 위해 사세요


시간을 훌쩍 흘러 허삼관의 나이 예순. 허삼관은 어느 날 승리반점 앞을 지나다가 옛날 피를 팔고 항상 들려 먹었던 돼지간볶음 한 접시와 황주 한 잔이 먹고 싶어진다. 그래서 그는 생전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피를 팔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젊은 혈두에게 치욕스럽게 거절 당하고 만다. 사십 년 만에 처음으로 피를 팔지 못한 것이다. 그러며 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해야 하는지 걱정하며 눈물 짓는다. 이에 아들 셋은 동네 창피하다고 울지 말라고 허삼관을 나무란다. 허옥란은 아들들을 욕하며 허삼관과 함께 승리반점에 가 한없이 돼지간볶음과 황주를 먹는다. 자기 자신을 위해. 


가끔 가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제는 부모님이 그만 고생하셨으면 좋겠다고. 더 이상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지 마시고, 당신들을 위해 돈을 벌고 돈을 쓰고 인생을 보내셨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피땀 흘려 돈을 벌어도 가족들 먹여 살리기 힘든 이 세상에 말이다. 그래도 부모님께 한마디 건네고 싶다. 


'이제는 당신들을 위해 사세요. 저희들은 부모님 덕분에 잘 컸으니까요. 알아서 살아갈 수 있어요. 이제는 저희가 잘 보살펴 드릴게요. 건강하세요.'


예전에 이 소설을 누군가에게 추천해준 적이 있다. 그때 들었던 말이, "펄 벅의 <대지>랑 비슷하네. 그 책 먼저 봐봐." 하지만 나는 엄연히 다른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이 소설이 더 마음에 와 닿기도 했다. 적어도 계속 보고 싶어지는 소설이라는 점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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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나간 책 다시읽기] <전쟁의 슬픔>


<전쟁의 슬픔> ⓒ아시아

전후 세대에게 전쟁은 고통, 슬픔, 분노, 아픔 등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아마도 전쟁마저도 상품으로 팔아 먹으려는 자본주의의 첨병들 때문이다. 그들은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듯, 전쟁을 게임, 영화, 드라마, 소설 등의 각종 콘텐츠부터 레크레이션이나 일일 체험으로까지 발전시켰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여 실제와 거의 흡사한 체험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이로 하여금 전쟁의 진면목을 겪게 할 수는 없다. 이는 오히려 전쟁을 이용하려는 자들에게는 잘된 바, 전장에서의 긴장감은 스릴로, 죽고 죽이는 고통은 쾌감으로, 전쟁의 시작과 끝에서 겪는 아픔과 허무함은 각각 설렘과 영웅적 자부심으로 바뀌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전쟁의 고통, 슬픔, 분노, 아픔 등이 

더욱 될수록 간접 경험을 하는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재미'있게 다가 오게 된다. 


또한 전쟁의 시작에는 정치적 입김이 다분히 작용하는 바, 전쟁을 일으킨 정치 권력자들은 이념 또는 정치의 방향을 선전하는 도구로 전쟁을 이용한다. 자연스레 전쟁 자체에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전쟁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모자라 전쟁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게끔 한다. 그 때문에 무고하게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필자 또한 비교적 어릴 때부터 전쟁에 대한 수많은 콘텐츠들을 접하며, 어느새 전쟁을 '동경'하기까지 했다.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그들이 숭고하고 멋있고 닮고 싶으며 나도 전쟁에 참여해 영웅이 되고 싶기까지 하였다. 특히 남자라면 상당 부분 동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겪은' 전쟁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영화 <지옥의 묵시록>이 '반전(反戰)'이라는 메시지를 남기려고 할 때, 왜 그렇게 화끈한 전투 장면이 계속되지 않는지 불만만 늘어 놓곤 했다. 


알 수 없는 그러나 매우 명백한 슬픔과 공존하다


그렇게 '전쟁광'적인 측면에 매몰되어 가고 있을 때 <전쟁의 슬픔>(아시아)이라는 작품을 접하였다. 전쟁에 당연히 슬픔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고 그런 반전 소설이겠거니 생각하며, 정치적이며 화끈하지 않은 원론적인 이야기를 예상했다. 다만 작가 바오 닌이 실제로 베트남 전쟁에 출전한 경력이 있으며, 자그마치 6년 동안 최전선에서 싸웠다는 사실이 전투 장면들의 실제적인 묘사를 기대하게 했을 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상했던 것과 소설 간의 괴리는 너무나 컸다. 소설 내적(내용)으로, 기대했던 실제적인 묘사는 기대 이상이었고 원론적인 이야기가 아닌 실제적인 이야기로 반전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예상 외로 이 반전으로의 주장을 함에 있어 '사랑'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 지독한 전쟁 뿐만 아니라 지독한 사랑도 이 소설에서의 슬픔에 크게 작용했다. 


한편 소설 외적(기법)으로, 문체에 슬픔이 뚝뚝 묻어 났다. 경험해본 자만이 쓸 수 있는 지독한 슬픔의 글이었다. 또한 그 슬픔을 가장 잘 표현해 내는 구성이었다. 시간과 공간을 어지럽게 오가는 구성은 그 자체로 주인공이 느끼는 슬픔이 독자에게도 느끼게끔 하였다. 책을 읽는 내내 알 수 없는 그러나 매우 명백하게 느낄 수 있는 슬픔과 공존했다. 


"그를 괴롭히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주요한 상념들이 희미해질 만큼 모든 생각이 뒤죽박죽되고, 어떤 맥락도 없이, 모든 감정과 사고가 뒤섞이는 듯했다. 물론 그는 알고 있었다. 끊긴 생각, 두서없는 이야기, 보이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의 한계에 고통스러워하는 영혼을 해방시켜 주는 것들이었다." (본문 중에서)


결국 아무것도 잊을 수 없다


주인공 끼엔은 17살의 어린 나이에 평생을 함께할 여인과 불미스러운 일로 헤어지며 입대한다. 그렇게 전쟁의 시작에서 끝까지 함께 하며 10년을 전쟁터에서 보낸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지독한 운으로 생존한 그는 10년 전 헤어진 연인 프엉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듯, 이미 그녀와의 관계는 파탄이 난 상태였다. 


이번에는 거꾸로 프엉이 끼엔을 떠나게 된다. 이후 끼엔은 그 슬픔과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술로 지탱하며 소설을 씀으로써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순화 시킨다. 그가 쓰는 소설은 그가 겪었던 전쟁의 슬픔, 시대의 슬픔, 사랑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그의 마음은 이미 갈가리 찢겨 봉합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지만, 과거의 그 슬픔들을 다 끄집어 내서 다시금 자신의 마음을 찢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운명이, 시대가, 국가가, 사회가, 그리고 이 전쟁이, 이 사랑이 슬픔의 원인이라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그는 어쩌면 영원히 고통스러울 것이었다. 늘 어둡고, 고통스러운 가운데 악몽과 현실 사이에서 남은 인생을 높고 가파른 절벽 위를 오가듯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10년 전에도, 지금도,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계속 살아가야 할 것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잊을 수 없다. 슬픔과 고통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어 전쟁을 거치고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하나로 커다랗게 뭉쳐진 응어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통을 받아들여야 세상에 태어날 수 있듯이, 또한 삶을 다하는 날까지 고통 때문에 살아야 하며 행복을 추구하고 사랑을 하고 예술을 하고 즐기고 견뎌야 하리라." (본문 중에서)


전쟁의 슬픔에 사랑을 녹여낸 탁월한 선택


이 소설의 미덕은 이렇게 모든 슬픔을 있는 그대로 끄집어냄으로써, 어떠한 과장도 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특히 전쟁에 관해서는 개인이 간직해 왔던, 결코 꺼낼 수 없었던 치욕적인 부분을 내보이고 이는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살기 위해 눈 앞에서 동료가 처참하게 강간을 당하고 결국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숨죽인 채 지켜보는 장면. 그리고 전쟁에서의 승리로 인해 영웅적일 것만 같은 참전 용사들의 추잡하기 그지 없는 모습(술로 삶을 지탱하고, 죽은 자들이 나오는 악몽을 꾸며, 망가진 몸과 마음으로 망가진 인생을 살아가는)까지. 


한편 망가진 인생을 표현함에 있어 망가진(정연하지 못한) 구성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표현 방식이지만, 이런 뒤죽박죽의 느낌은 자칫 작가의 능력을 잘못 파악하게 만들 수 있다. 오롯이 서사를 따라 진행되었다면, 이 슬픔을 더욱더 깊이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랑과 우정, 그리고 전쟁의 슬픔, 전후의 아픔까지 그린 전쟁 대서사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통속적인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를 범했을 지도 모르기에 단언할 수는 없을 듯하다. 


마지막 부분의 반전(反轉)에 이르러서야 절실히 깨닫고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깨닫지만, 전쟁의 슬픔에 사랑의 절절함을 녹여 낸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쟁의 슬픔이 단순히 전쟁에 따른 슬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슬픔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로 슬픔, 고통, 아픔의 3중주를 가뿐히 넘어서는 사랑의 힘이다. 하지만 전쟁의 포화는 사랑마저 휩쓸어 버렸다. 사랑은 전쟁이 잉태한 부정을 이길 수 있었지만, 전쟁 자체를 이길 수 없었다. 


"정의가 승리했고, 인간애가 승리했다. 그러나 악과 죽음과 비인간적인 폭력도 승리했다. 들여다보고 성찰해보면 사실이 그렇다. 손실된 것, 잃은 것은 보상할 수 있고, 상처는 아물고, 고통은 누그러든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슬픔은 나날이 깊어지고, 절대로 나아지지 않는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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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가짜 우울>


<가짜 우울> ⓒ마음산책

10년 전 쯤, '우울증'이라는 용어를 처음 들어 보았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없이 활발한 편이었던 지인이 어느 날 말하기를, "사실 나 우울증에 걸렸다."라고 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거 자살까지 하게 만드는 심각한 '병'이 아니냐고, 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겠냐고 말을 건넸더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였다. 알고보니 자가진단으로 우울증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 당시는 우울증이 시대의 화두였다. 많은 사람들이 힘들고 외롭고 슬픈 감정을 우울증이라고 생각하며, 마치 자랑거리인 양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녔다. 그 지인의 우울증 이유는 '힘듦'이라고 했다.


3년여가 지나, 나에게도 '우울증'이 찾아왔다. 당시 1년여 동안 외국생활을 했는데, 너무 외롭고 고독했다. 그 감정들을 추수리기가 너무 힘들었고, 결국 스스로 우울증이라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며 누군가가 나를 위로해 주기를 바랐다. 당시 나의 우울증 이유는 '외로움'이었다.


얼마 전, 또 다른 지인이 '우울증'이라고 하며 위로받길 원하는 듯한 느낌을 풍겨왔다. 하는 일이 잘 안되고, 계속 자신을 탓하다 보니 너무 우울해졌다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니 너무 슬프다고 하며. 심리 치료도 몇 번 받아보았다고 했다. 그 지인의 우울증 이유는 '슬픔'이었다. 살면서 우울증에 안 걸려본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하는 사연들이다.


우울증은 병이 아니다?


전 세계적인 경제 불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지금.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상당히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스타들의 과거 고백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가 '우울증'이고, '우울증'으로 자살을 했다는 소식도 끊이지 않는다. 우울증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길래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되었을까?


미국의 심리치료사이자 창의력 전문가인 에릭 메이젤 박사는 그의 저서 <가짜 우울>(마음산책)을 통해 "우울증은 병이나 정신장애가 아니며, 단지 깊은 슬픔에 잘못 붙여진 꼬리표일 뿐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며 "슬픔은 현실이고 또한 고통스럽지만...그런 것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들어서 '우울증 증상'을 완화하려고... 화학물질을 택하는 것이 슬픔에 대한 해답이 될 수는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책에서는 그에 대한 진정한 해답을 찾기 위한 실존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무슨 근거로 우울증은 병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너가 겪고 있는 슬픔이나 아픔은 누구나 겪는 거니까, 그냥 기운내고 열심히 살아'하고 시크하게 한 마디 던지고 싶은 것인가. 저자의 말을 한번 들어볼 필요가 있겠다.


"사실상 우울증이라는 단어는 우리 내면의 어휘 체계에서 불행을 실질적으로 대신하고 있다. 우리는 슬픔을 느끼면서도 우울증에 걸렸다고 말한다.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언어를 교체한 뒤 도움을 구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우울증 전문가를 찾는다. 알약에, 치료사에게, 사회복지사에게, 목회 상담가에게 의지한다. 설령 우울한 이유가 각종 청구서 대금을 내는 일이 힘에 부치거나, 하는 일이 제대로 안 풀리거나, 인간관계가 위기에 처해서일지라도" -1장에서


위에서 소개한 사연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힘듦, 외로움, 슬픔 등의 감정을 '우울증'이라는 단어로 대체하고 있다는 사실. '우울증'이라고 명명된 그 알 수 없는 증세는 점점 '병'이자 '장애'가 된다. 그렇게 우울증에 관한 전문가를 찾아 도움을 청한다. 저자는 그 접점에대중매체, 제약회사, 상담사, 심지어 문화업계까지 얽혀서 "모든 종류의 불행이, 이따금씩 나타나는 것이든 만성적인 것이든 모조리 정신건강 산업의 먹잇감이 되었고 장애로 둔갑하고 말았다"고 말하고 있다. 즉, 우울증은 만들어진 정신장애이자 문화적 최면일 뿐이라는 것이다.


불행은 인간의 정상적인 특징이다. 그 실체를 알고 이겨내자.


저자는 우울증이라는 하는 병이나 장애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삶에서 지워버리라고 주문하고 있다. 그러며 삶에서 수반되는 불행이나 고통은 지극히 정상적인 특징이며 그것이 장애가 될 순 없다고 말하고 있다.


"고통과 어려움이 아무리 극심하고 오래 지속된다 해도 '정신장애'나 '정신질환'의 증거가 될 순 없다. 극심한 치통은 신경치료를 받으라는 정확한 신호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극심한 슬픔은 그 어떤 아픔 못지않게 견디기 힘든 정신적 고통이라 해도 정신질환이나 정신장애의 징후는 아니다." -프롤로그에서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아무리 고통과 어려움, 슬픔과 외로움 등의 불행이 정상적인 감정이고 피할 수 없다 해도, 그것이 결코 좋을리는 없다. 그래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모든 감정의 실체를 알고 있지만서도, 기분 좋은 감정은 '정상적인 감정', 기분 나쁜 감정은 '비정상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일쑤이다. 하지만 저자는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모두 '정상적인 감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결코 피할 수 없는 그 존재를 인정하고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방법이 무엇일까?


저자는 '일상 의미화 전략'이라는 실존 프로그램 20단계를 제시한다. 자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1단계에서 부터 부여, 집중, 소통, 대처 등의 단계를 지나 실존적으로, 인지적으로, 행동적으로 자신을 돌봐야 한다는 마지막 단계까지.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삶에 주어진 불행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현실을 직시하고, 의미를 파악한다.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고 의미를 부여한다. 자긍심을 갖고 의미를 만들고, 욕구와 필요 그리고 가치를 고려해 선택한다. 삶의 목적이 담긴 문장을 만들고, 의미를 평가하는 지혜를 발휘한다. 의미에 집중하고, 문화적 최면에 저항한다. 다시 현실을 살피고, 의미와 소통한다. 의도를 지닌 문장을 외우고, 의미에 대해 훈련한다. 의미를 어디에 투자할지 협상하고, 의미를 구체화 시킨다. 의미가 길을 잃을 때 이에 대처하고, 자신을 돌본다.


다시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의미'를 만들라는 말이 되겠다. 불행을 없애는 건 불가능 하겠지만, 불행조차 삶의 일부분으로 포용할 수 있다면 성공적인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를 진정한 삶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불행조차 삶의 일부분으로 포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스스로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알고, 생각과 행동이 중요한 것에 맞춰져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진정한 삶'을 목적으로 삼아, '삶에서의 중요한 무엇'을 향해, '생각과 행동'을 지니고 가는 것이다.


우울증이라는 말은 언어의 부패다. 우리 사회가 우울증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그 말은 우리 모두를 점점 더 불행으로 몰아갈 것이다. 불행의 병리화는 불행을 만들어낸다. 우울증이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고, 그 대신 의미를 만들어라. -에필로그에서


'힐링'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무엇을 치유하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치유하고 있는 것일까? 이 책 <가짜우울>은 힐링의 방법론을 소개하고 있다. 여느 힐링 관련 책들 같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 힐링이 된다고 할 수는 없다. 대신 책을 읽다보면 '나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어떤 희망이 생길 것이다. 먼저 시작해보자. 우울증이라는 말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자신의 존재를 들여다보자. 인생의 의미를 만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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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욕망이 맞부딪히는 지금을 보여준 <더 테러 라이브>

영화 <더 테러 라이브>의 한 장면. "신고하지마. 이건 일생일대의 기회야!" ⓒ 씨네2000


"지금…, 한강 다리를 폭파하겠습니다."이 한 마디로 악몽 같은 시간이 시작된다. 어느 불만에 찬 시청자의 장난 전화이겠거니 생각하며 터뜨려보라고 맞받아쳤더니 진짜로 폭파해버렸다. 그것도 방송국 근처에 있는 마포대교를. 만약 그곳이 다른 어딘가였다면, 앵커 윤영화(하정우 분)는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테러범의 노림수였을까. 과거 '국민 앵커'라 불리면서 마감 뉴스만 5년 연속으로 진행했던 윤영화가 라디오로 밀려나 재기를 노린다는 것을 테러범이 알고 있었던 것일까. 윤영화는 이 테러를 기회라고 생각하고 생방송을 결심한다. 그러며 과거 그를 물 먹였던 차대은 국장(이경영 분)과 같이 시청률 대박을 노리고 테러범과의 전화 통화를 시도한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숨도 쉴 틈 없이 이야기를 진행시켜 10분 만에 본론으로 진입한다.

"신고하지마. 이건 일생일대의 기회야!"(윤영화 앵커)

테러는 이미 벌어졌으니 재난영화로써의 볼거리는 이미 다 보여준 셈이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게 세심한 배려를 한 것 같지는 않다. 대신 영화는 시선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 것을 택한다. 주연 배우 하정우의 상반신. 그곳에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믿고 보는 배우' 하정우에 대한 무한한 믿음과 자신감의 표출이랄까. 
영화가 묻는 언론의 본질 그리고 정부의 본질

영화 <더 테러 라이브>의 한 장면. "지금 시청률 78% 찍었는데, 끝나고 술 한 잔 하자!" ⓒ 씨네2000


영화는 윤영화의 이야기에서 테러범 박노규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박노규는 30년 전 마포대교 신축 공사에서 노동자로 일했고, 2년 전 마포대교 확대 공사에서도 노동자로 살았다. 그런데 2년 전 사고로 3명이 죽었을 때, 경찰이 국제 행사 때문에 오지 못했던 것이다. 

박노규는 이 사태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며 마포대교 폭파를 계속한다. 그러며 '믿을 수 있는 국민 앵커' 윤영화의 입을 통해 자신의 요구를 전달하려 한 것이었다. 그에게서 잘못 표출되는 욕망 덩어리를 볼 수 있다. 

영화는 이처럼 크게 두 가지 갈래 길로 나뉘어져 수평을 달리는 듯 보인다. 윤영화와 박노규, 박노규와 정부 간의 관계. 즉 억울한 한 '하층민' 시민이, 방송국(언론)의 국민 앵커라는 믿을 수 있는 통로를 통해 정부에게 요구를 하는 것이다. 영화는 테러범 박노규의 말을 통해서 묻는다. 언론(방송)의 본질이 무엇인가? 정부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로 하여금 테러를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든 이는 누구인가? 

이쯤에서 봤을 때 방송국은 이 사태에서 제3자의 입장일 뿐이다. 시청률 운운하는 것도 방송국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아직 무너지지 않은 마포대교 위에 인질 아닌 인질로 10여 명의 사람들이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영화는 또 다른 길로 들어선다. 제3자의 입장이었던 방송국이 끼어들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시청률 78% 찍었데. 끝나고 술 한잔 하자!"(차대은 국장)

그러나 거기엔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만 있을 뿐이다. 사람들의 목숨조차 시청률에 이용해 먹으려는 차대은 국장의 욕망. 그는 대통령이 사과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뒤 테러범으로 하여금 인질을 다 죽게 만들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인질극의 막을 내리며 시청률의 정점을 찍고, 해결은 윤영화 앵커가 한 것으로 말이다.

여기서 윤영화는 딜레마에 빠진다. 다만 인질에 대한 미안함이 100%가 아니다. 그의 옆에서 경찰총장이 이어폰 폭발로 죽었고, 그의 귀에도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가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 인질이 죽어서는 안 됐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 다음 차례는 자신이 될 테니. 그 또한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결국 윤영화는 차대은 국장의 말을 무시하고 곧 대통령의 사과가 있을 것이라며 테러범을 달랜다. 영화는 다시금 긴박하게 흘러간다. 차대은 국장의 제보로 윤영화 앵커의 비리가 밝혀지고 인질들이 있던 마포대교가 무너지면서 윤영화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하지만 그때 테러범이 잡혔다면서 <더 테러 라이브>는 갑작스레 막을 내리게 된다. 

재미와 긴장은 시작 부분에 쏠려 있다


영화 <더 테러 라이브> ⓒ 롯데엔터테인먼트

각자의 욕망들이 격렬히 부딪히는 이 자리에서, 누가 옳고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니, 원인을 제공한 자와 과정을 즐긴 자, 결과를 도출한 자들이 얽히고설켜 있기 때문에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쯤 되면 테러는 테러범 하나의 손이 아닌, 관련된 자 모두의 손으로 행해지게 된다. 


마지막 반전을 감안하고서라도 영화는 시작과 거의 동시에 긴장을 수반한 재미의 최고점을 찍고 뒤로 갈수록 내림세를 보인다. 중후반쯤에 보여주는 신파적 요소는 스릴러에서 재난 영화로의 급전환을 시도한 것처럼 보였다. 

그 이후였을까. 차마 화면을 볼 수 없게 만드는 긴장감 있던 음악의 효과가 반감되고, 격렬하게 춤추던 카메라가 멈추며, 윤영화와 테러범을 두고 옥신각신하던 관계자들이 모두 퇴장해 텅 빈 공간만 남는다. 대신 땀나게 꼭 쥐었던 손이 풀리고, 다가올 허무함을 느낄 준비를 한다. 

그런데 허무함보다 슬픔이 밀려온다. 당연한 보상과 사과 한 마디를 받고 싶어 절규하는 하층민의 모습을 보며, 시민들의 목숨을 시청률의 수단으로 삼는 방송국 국장의 모습을 보며, 지하 벙커에 숨어 결국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대통령을 생각하며, 대통령의 사과를 대신하는 윤영화의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그들은 왜 그래야만 했을까. 마지막에 가라앉는 건물에서 비치는 윤영화의 눈빛은 슬픔으로 가득 차있다.



"오마이뉴스" 2013.8.4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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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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