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제89회 아카데미 작품상 <문라이트>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의 쾌거를 올렸다. 더욱이 사상 최초로 남여조연상을 흑인이 휩쓸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문라이트>의 메허샬레하쉬바즈 엘리다. ⓒ오드(AUD)



지상 최대 영화 '축제'인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지난 2월 26일 미국 LA에서 열렸다. 언제나처럼 쟁쟁한 후보들을 앞세운 사전 마케팅이 활개를 쳤는데, 이번엔 싱겁게 끝나버린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다름 아닌 <라라랜드> 때문인데, 일찍이 골든글러브 6관왕으로 역대 최다 수상을 하였고 아카데미에도 14개 노미네이트로 역대 최다를 기록한 바 싹쓸이가 예상되었었다. 제목 'la la land'도 아카데미의 성지 LA를 그대로 차용하지 않았는가. 그야말로 아카데미를 위한 영화였으니. 하지만 고작(?) 6관왕에 그치고 말았다. 그것도 메인 상 중 감독상과 여우주연상만 탔다. 


한편 8개 노미네이트 <문라이트>와 <컨택트>가 뒤를 따랐는데, 둘 중에는 <문라이트>가 압승을 거두었다. 수상 개수를 떠나, <문라이트>가 작품상을 탔기 때문이다. 일찍이 전 세계 영화제에서 <라라랜드>를 저멀리 따돌리는 수의 상을 탔는데, 한때 158관왕으로 많은 언론에 오르락내리락 했다. 급기야 아카데미 3관왕으로 175관왕을 넘어섰다고 한다. 사실상 <라라랜드>와 <문라이트>의 각축전이었던 거다. 


여기엔 '흑과 백'이라는,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요소가 도사리고 있다. <라라랜드>가 백인의 꿈을 티끌없이 아름답게 그려냈다면, <문라이트>는 흑인 소수자의 성장을 어둡고 아픈 아름다움으로 그려냈다. 둘 다 치명적이게 아름답다. 다만 그 방식이 완연히 다른 바, 머리는 <라라랜드>를 보고 싶어 하지만 가슴은 <문라이트>를 보고 싶어 한다. 나는 가슴이 시키는 말을 듣고 <문라이트>를 보았다.


짧은 시간에 한 인간의 성장을 담다


평균 이하의 짧은 러닝타임에 한 인간의 성장을 오롯이 담았다. 한 시기의 순간순간을 담았을 뿐인데 오롯이 담았다고 느껴진 이유는, 그 순간에 담긴 모습이 완벽히 그 시기를 담아냈다는 것일 테다. ⓒ오드(AUD)



배경은 미국 마이애미 흑인 지구의 마약 소굴, 미국이 결코 좋아할 만한 내용은 아니다. 영화는 '리틀', '샤이론', '블랙'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샤이론의 유년, 소년, 청년 시절을 상징하는 별명들이다. '호모새끼'라고 놀림을 받는 한 작고 힘 없는 흑인 아이, 리틀. 여전히 놀림 받는 힘 없는 소년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샤이론. 과거를 청산하고 빈민가 출신 흑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블랙. 


우리는 짧은 시간에 한 인간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다. 물론 모든 면을 볼 순 없다. 그건 영화 사상 성장의 시간을 가장 완벽히 담아 냈던 <보이 후드>도 해낼 수 없었다. 무수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만들고, 깨닫고, 변화하는 장면들만 볼 뿐이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 이 영화라서 충분하지 않았을까. 


마약쟁이 엄마와 함께 살아가는 '리틀', 오직 케빈이라는 친구만 있을 뿐이다. 한없이 작고 힘 없는 아이는 호모라고 놀림 받는다. 도망가다가 마약 소굴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우연히 후안이 발견한다. 그는 일대를 주름잡는 마약상. 기댈 곳 없는 리틀은 엄마 대신 후안과 후안의 여자친구 테레사와 급격히 가까워진다. 이후 리틀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후안. 빈민가 흑인이 지녀야 할 생각과 마음가짐, 행동을 일깨운다. 


'언젠가는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넌 지금 세상 한 가운데 있어' '달빛 속에선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보이지' '나도 엄마가 싫었지. 하지만 지금은 미칠듯이 그리워' 등 주옥같은 명대사를 리틀에게 전하는 후안. 상당히 도식적인 전개와 장면이지만, 꾸밈없이 다가오니 그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어두워야 빛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러면 그들은 한 몸이 아니지 않은가. 어둠을 뚫고 빛이 나오는 게 아닐까. 어둠과 빛은 한 몸인 것이다. 후안도, 리틀도 어둠이자 빛이다.


가장 들추기 싫은 모습, 하지만 너무나도 아름답다


희망도, 슬픔도 없는 공허로운 눈의 샤이론. 꿈과 희망의 나라 미국이 가장 덮고 싶어 하는 모습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감독은 이를 너무나도 아름답게 그려냈다. 이를 어찌하나. ⓒ오드(AUD)



리틀에게 희망이라는 게 있는 걸까. 그에겐 단순히 '소외된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주기가 민망하다. 소외라는 단어에 함축된 엄청난 무게를 감안하고라도 말이다. 사회로부터의 단절과 고립과 격리, 스스로에 대한 포기 등이 소외를 뜻하는 거라 한다면, 그는 소외의 모든 걸 지니고 있다 하겠다. 집안은 가난과 폭력이 난무하고, 무력감과 공허함과 혼란과 무의미가 몸을 휘감으며, 모두가 나를 업신여기고 놀리고 못살게 구는 것 같아 어디에도 눈을 둘 수 없다. 허공을 바라볼 뿐이다. 거기엔 슬픔도 없다. 


'희망'과 '꿈'의 나라 미국에서 가장 들추기 싫은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영화는 너무나도 아름답다.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순간이 다가오고, 순간이 영원같을 때가 있다. 리틀이 비로소 샤이론이 되는 순간, 샤이론은 인생의 지침이 된 후안의 '달빛 아래선 흑인도 파랗게 보이는' 체험을 한다. 그저 순간에 자신을 맡기는, 그때만큼은 난 껍데기의 내가 아닌 본질적 내가 된다. 


그러나 인생이 순탄치만은 않다. 샤이론은 본질이 파괴되는 수모를 겪고 또 다른 껍데기를 입을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한다. 이제 '샤이론'이라는 샤이론의 본모습은 아주 단단한 껍데기에 몇 겹이고 둘러싸여 절대 밖으로 내보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블랙'으로 살아간다. 그가 아는 가장 단단한 껍데기 후안의 모습을 하고서. 


그렇지만 머지 않아 그의 본질이 다시금 도전을 받을 위기에 직면한다. 그의 본질을 일깨워준 순간과의 조우, 그의 얼굴엔 '블랙'이 아닌 '샤이론'이 비추고 자신감 없고 움츠러든 표정과 말 본새가 드러나며 슬픔조차 찾기 힘든 공허하기 짝이 없는 두 눈이 영화를 지배한다. 그는, 다시금 달빛 아래서 파랗게 보이는 체험을 할 수 있을까. 


이보다 더 아름다운 영화는 없다


이 '아름다운' 위대한 영화, 또는 아름다운 '위대한' 영화. 나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이런 류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표현해낼 영화가 있을까? ⓒ오드(AUD)



영화는 상당 부분 헤르만 헤세의 세기의 베스트셀러이자 현대 성장 소설의 시초와도 같은 작품 <데미안>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지만 단언컨대 그보다 더 위대한 성장을 다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한 아이의 성장이 뚫고 가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지독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첩첩산중, 다 말하기도 힘들거니와 늘어놓는다해도 완전히 드러낼 수 없을 거다. 그럼에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그 위대함을 말해준다. 


절대 잊히지 않을 한 가지가 있다. 리틀과 샤이론과 블랙의 그 '두 눈'. 얼마나 캐스팅에 공을 들였을지 느껴질 만한 세 사람의 놀라운 싱크로율은 뒤로 하고서라도, 세 사람의 시기에 따른 두 눈의 공허함은 가히 치명적이다. 아무런 감정을 찾을 수 없는 두 눈은 모든 걸 말해준다. 이건 '경지'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런 연기는 처음 본다. 


순간을 이끄는 색감과 OST는 영화의 품격을 한껏 높이는 데 일조했다. 특히 색감은 이 영화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데에 절대적 공헌을 했다. 블랙톤에 가까운 파스텔 톤의 색들이 영화의 중요한 순간 순간을 수놓는다. 블랙을 돋보이게도, 그렇다고 블랙을 묻히게도 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우린 이 영화의 포스터부터 눈길을 떼지 못한다. 일정한 톤의 OST도 역시 중요한 순간을 일깨우는데, 안정감보단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일종의 영화적 장치, 단조로울 수 있는 영화에 색깔을 입혔다. 


<와호장룡>은 '무협영화'에게 갖는 선입관에 철퇴를 내렸었다. 이토록 아름답고 철학적인 무협이 있다니. 무협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부끄럽지만 <문라이트>는 '흑인영화'에게 갖는 선입관에 징벌을 내린 것 같은 충격을 내게 주었다. 누구나 편견 어린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는 데 말이다. 이보다 아름다운 영화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찾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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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장기왕: 가락시장 레볼루션>


<족구왕>의 히트로 <걷기왕>이 개봉했는데, 이젠 <장기왕>까지 나왔다. 독립영화계의 한 지류를 담당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과연? ⓒ하준사


2014년 <족구왕>의 성공으로 2016년 <걷기왕>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개봉했다. 그리고 2017년 초 급기야 <장기왕: 가락시장 레볼루션>(이상 '장기왕')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개봉했는데, 독립영화계의 한 축을 이루는 듯하다. 비단 제목뿐만 아니라, 제목에서 풍겨져 나오는 코미디 요소를 듬뿍 품은 공통점이 있다. 또한 이들은 우중충하고 직설적으로 사회 고발을 하는 기존의 독립 영화와 다른 면모를 선보인다. 귀엽고 아기자기하게.


'장기'와 '가락시장'과 '레볼루션'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나열이 이 영화의 제목을 이루는데, 아마 그대로 영화를 구성할 듯하다. 아마 주인공은 장기를 엄청나게 잘 둘 것이고, 배경은 가락시장일 것이며, 일상의 소소한 혁명을 이루며 끝날 것이다. 궁금증을 유발하는 데엔 일단 성공, 끝까지 잘 이어나갈 수 있을까?


잘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좋은 영화인듯


가락시장에서 장기왕을 꿈꾸는 한 젊은이로부터 시작해 여러 파편화된 이야기들이 나열된다. 각자의 피곤한 이야기들이 있다. 잘 만든 것 같진 않다. 그래도 좋은 영화인듯? ⓒ하준사



내년이면 서른인 두수는 가락시장에서 일한다. 밤 12시에 출근해 다음날 아침 10시에 출근하는 고된 일이지만, 이 시대에 일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어디냐 하는 고마움과 왠만한 중소기업보다 많은 급여를 받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또한 체 게바라의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라는 명언을 간직하고 있다. 


두수가 일하는 청과물 가게의 사장이 어느 날 가게에서 내기 장기를 두고 있었다. 훈수를 두는 두수, 이를 고깝게 본 사장은 두수와 장기 한 판을 둔다. 손쉽게 사장을 이겨버린 두수, 이때부터 두수의 장기왕 레이스가 시작된다. 가락동 일대를 제압, 탑골공원에 진출한다. 그는 불가능한 꿈을 장기로 이룰 수 있을까.


한편 그에겐 누나가 한 명 있다. 힘들게 일하고 매일 같이 성추행을 당하지만 이도저도 할 수 없는... 그에겐 친한 친구도 한 명 있다. 배우지망생으로 열심히 데뷔를 준비하지만 여의치 않아 중국집 배달을 하고 있는... 그에겐 짝사랑하던 첫사랑 친구도 있다. 캐나다로 이민을 갔지만 휴가로 한국에 와서 노숙자들을 돕고 있다는... 이 불완전한 청춘들은 한데 뭉쳐 꿈을 이루려 한다. 


두서가 없는듯 이야기들이 파편화되어 여기저기 흩어진듯, 그렇지만 '장기'라는 소재를 끝까지 밀고나가며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들추려는 노력이 예쁘다. 엄밀히 말해서 '잘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좋은' 영화인 것 맞다. 잘 만들지도 그렇다고 좋지도 않은 영화가 많은데,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매력적이다. 


흩어져 있는 작은 힘들이 모여 소소한 혁명을 일으킨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티끌 모아 태산?' 다만, 극을 잘 이끌어나가지 못하는 것뿐. 그래도 가능성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하준사



'장기'는 바둑이나 체스, 하다 못해 오목보다도 더 비주류의 보드게임이다. 당연히 더 비활성화가 되어 있고, 손쉽게 다가가기도 힘들며, 주위에서 흔히 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장기'를 주요 소재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한창 잘 나가는 바둑을 소재로 차용해 '바둑왕'이라 했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을 텐데 말이다. 


장기가 가진 비주류적이고 소외된 이미지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가락시장이라는, 젊은이라면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을 곳에서 일하는 주인공 두수. 회사에서의 상사에 의한 추행이라는, 어디 가서 말을 꺼낼 수조차 없는 짓을 당하지만 회사를 다닌다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주인공의 누나 두희. 언젠가 반드시 영화에 출현해 배우로 성공하고자 하지만, 현실은 중국집 배달원인 주인공의 친구 낙훈. 소외당하고 보호받지도 못할 노숙자들을 데리고 연극을 준비하려는 주인공의 여자친구 민주. 그리고 그들이 모여 한마음 한뜻으로 돕고자 하는 노숙자들까지. 


공통적으로 '소외'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있는 이들끼리 뭉쳐 나아가고자 하는 길을 주인공이 '장기'로 여는 것이다. 이 영화의 핵심적 메타포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사실 적절하게 쓰인 것 같진 않다. 영화 초반에 흥미로운 소재로 등장해 시선을 끄는 데 성공한 장기는, 후반부엔 그 빛을 급격히 잃는다. 대신 주인공의 여자친구 민주의 급작스러운 등장과 함께, 역시 급작스러운 등장인물들의 결합이 장기를 대신해 '레볼루션'을 향해 간다. 장기보단 연극이 더 좋았을 것 같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확실해 보인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작은 힘들이 모여 소소한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고자 한 것이다. 그 구심점이자 소재로 장기를 택한 것이고. 하지만 그 연결고리가 그리 매끄럽지는 않았다. 영화 <족구왕>이 준 스토리적 감동을 주기엔 턱없이 부족했다는 말이다. 러닝타임이 90분이 채 되지 않는데, 연결고리에 시간을 더 할애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니면 등장인물들의 흩어진 이야기들을 조금 더 빨리 주워담았으면 어땠을까. 


감동 대신 재미, 감동 대신 씁쓸함


분명 감동을 추구했을 텐데, 감동이 없다. 아니 애초에 감동이 없을 수도 있었겠다. 대신 재미가 있고, 씁쓸함이 있다. 매력도 있고. ⓒ하준사



감동을 받을 만한 주제임에도 감동을 받을 만한 여지가 별로 없었다. 이젠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군상들의 이야기를 흩뿌려 놓았을 뿐이기 때문인데, 대신 적정 이상의 재미를 느낄 순 있었다. 그건 순수하게 연기에서 비롯된 바, 특히 주인공 두수와 주인공의 친구 낙훈의 천연덕스러움은 발군이었다. 이 시대가 낳은 불행한 청춘들의 상징과도 같은 그들이지만, 주눅들지 않고 한껏 유쾌함을 발산하는 모습에 슬픈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애드리브가 상당했을 것 같다. 


얼핏 어설퍼 보이지만 능력껏 발휘한 영화적 스킬도 재미의 한 요소였다. 기본적으로 장기두는 모습이 상당히 나오기 때문에 그 모습에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데, 만화 <고스트 바둑왕>의 장면들이 연상케 했다. 오마주이자 패러디인듯, 귀엽게까지 느껴져 영화를 매력있게 보이는 데 한몫했다. 


어쩌면 애초에 감동을 느낄 수 없는 영화였을지 모른다. 그들의 소소한 혁명이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바꾸기는커녕 현실의 높은 벽에 가로막혀 처절한 좌절을 겪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그래서, 두수는 가락시장을 벗어났을까? 두희는 회사를 잘 다니고 있을까? 낙훈은 영화배우가 되었을까? 민주와 노숙자들은?


과연 바뀐 게 있을지? 그들의 소소한 혁명은 어떤 모습으로 발현되었을지? 물론 최소한의 변화는 있을 것이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변화에서 감동을 받는다. 내 인생에서 결코 오지 않을 크나큰 변화를 말이다. 이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소소한 변화조차 꿈꾸기 힘든 세상이라고, 그 정도로도 위대한 진척이라고. 그들의 코믹한 모습을 보니 왠지 더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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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민음사



1960년대,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직장 파티에서 한 눈에 서로를 알아본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수적이고 답답하며 까다롭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곧 결혼한 그들은 천생연분이었고, 함께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나가길 원했다. 굉장히 전통적인 형태의 가정을. 


많은 자식을 낳아 키우며 주기적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가족들을 불러 함께하길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반대를 무릅쓰고 분수에 맞지 않는 큰 집을 산다. 큰 집을 사는 것도 사는 거지만, 무엇보다 많은 자식을 낳는 것에 반대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너무 서두른, 그래서 모든 걸 다 움켜쥐려 한다는 인상. 기어코 그들은 많은 자식을 낳는다. 막상 그들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그 모습에 심취한다. 


허위에 가득 차 있는 '칭찬받아 마땅한 생각과 행동'


영국을 대표하는 거장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도리스 레싱의 1988년작 <다섯째 아이>는 평범하고 지루하기까지 한 인상을 주는 초입부를 내보인다. 보수적이고 답답하고 까다로운 젊은 부부의 고집이 많은 이들의 질타를 뚫고 나아간다. 거기엔 왠지 모를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작가가 의도한 바이겠는데, 작가가 보기엔 그들의 '칭찬받아 마땅한 생각과 행동'이 허위에 가득 차있는 것이다. 


1960년이라면 그야말로 세상이 요동치고 있는 시기다. '혁명의 시대', 그런 시대에 이토록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고집을 꺾지 않는 젊은이들이라니. 그들의 고집은 혁명이 야기한 혼돈을 수습하는 훌륭하고 위대하기까지 한 생각이라고 볼 요지가 충분했다. 실제로 그들은 훌륭하게 이어간다. 


지극한 모성애와 책임감 넘치는 가장의식으로 무장한 채 많은 아이들을 낳아 넓은 집에서 키우며 흩어진 가족들을 불러 어디에도 없을 돈독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옛날식의 행복', 어찌되었든 행복은 행복이었다. 하지만 위기는 밖에서 닥쳤다. 좋은 시절이 간 것이다. 데이비드의 회사도 일격을 받고 승진은 없었다. 


아이는 계속 태어났다. 첫째, 둘째, 셋째, 넷째까지 숨쉴 틈 없이 계속.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지쳐갔지만, 그래도 그들이 상정한 행복의 기준은 그대로였다. 사촌 브리짓은 그들을 자신의 롤모델로 여긴 참이었다.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저도 결혼하면 이렇게 할 거예요. 난 데이비드와 해리엇 같이 될 거예요. 커다란 집을 갖고 애를 많이 낳고... 그러면 모두들 오셔야 해요."


그들이 택한 '행복'의 길, 질문을 계속 던지게 만든다


다섯째 아이 벤은 누가봐도 비정상적인 아이다. 뱃 속에 있을 때부터 엄청난 힘으로 엄마 해리엇을 괴롭혔다. 벤은 태어나기도 전에 '원수'가 되었고, 해리엇을 '미친 여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그 '사건'은 해리엇으로 하여금 평생을 '죄인'처럼 생각하게 한 원인이었다. 다섯째 아이 벤은 태어나서는 안 될 아이였다. 그의 존재는 그를 포함해 다른 모든 이를 불행으로 몰아넣었고, 그 집단을 파괴했다. 


소설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에서 시작해 끝모를 불행으로 나아간다. 모든 '불행'의 씨앗은 물론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선택. 모든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력하게 밀어붙인, 시대정신까지 역행하면서도 밀어붙인, '행복'으로의 길이다. 아이러니하기 그지 없다. 소설은, 작가는, 계속 질문을 던진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시대정신을 역행한 그들은 보수적인가 진보적인가? 다섯째 아이 벤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벤은 파괴자인가, 소외자인가? 당신이라면 벤을 어찌하겠는가? 벤을 제외한 모든 이를 위해서 벤을 삭제하겠는가, 그럼에도 벤을 버리지 않고 다른 모든 이들이 희생하겠는가? 과연 벤을 동정할 수 있겠는가? 


나라면, 벤을 마냥 동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벤을 삭제해버리는 당사자가 될 수도 없을 것 같다. 함께 있되 그저 방관, 관찰만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간이 할 가장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는 '무관심'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희생하는 '착한 사람'도 죄책감에 시달릴 '나쁜 사람'도 되기 싫은데. 누구도 그러지 않을까 싶다.  

'소외'에 대처하는 방법, '친화적 구별짓기'

 

소설은 그러나, 이런 류의 윤리적·도덕적 가치관의 재고만을 질문하지 않는다.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벤이 소설의 중심에 서게 되는데, '소외'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를 일종의 돌연변이라고 했을 때, 그가 갈 곳은 어디인가. 그가 해야하는 행동은 무엇인가. 부모들은 그를 일반 학교에 보내 보통 아이들처럼 만들고자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는 '틀린' 인간이 아닌 '다른' 인간인데 말이다. 


영화 <엑스맨> 시리즈는 돌연변이가 틀린 게 아니라 다만 다르다는 걸 훌륭한 비쥬얼과 올바른 메시지로 보여주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그들은 절대 '보통' 사람들과 조화롭게 어울릴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이 그들을 적대적으로 구별짓는 한. 오직 방법은 그들을 오직 그들로 받아들여야 하는 바, 하지만 그건 결코 쉽지 않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의 적개심과 공포심으로 '소외 당하고 보호 받지도 못한' 채 죽어갈 것이다. 방법이 있을까. 어쩔 수 없이 구별 짓기가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구별 짓기에 내재된 적대감을 절대적으로 멀리해야 한다. '친화적 구별 짓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가능하다면 말이다. 


모두에게 칭찬받아 마땅한 삶을 추구한 데이비드와 해리엇에게 벤은 필요 없는 존재다. 절대 있어선 안 될 존재. 하지만 그들은 우리 삶에, 우리 가정에, 우리 사회에, 우리 나라에, 우리 세상에 반드시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가? 그들은 우리에게 '불행'만을 가져다주는가? 우리는 행복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행복의 허상, 그리고 소외의 이면, 다른 것의 정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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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초록물고기>


'거장' 이창동 감독의 시작 <초록물고기>. 우리는 이 영화에서 지금으로선 기가 막힌 한석규, 송강호의 동반 출현을 볼 수 있다. ⓒ시네마 서비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년 전, 1997년 2월 초에 영화 한 편이 개봉한다. 한 영화감독의 데뷔작, 심상치 않다. 이런 영화가 이전에 있어나 싶다. 흥행 미풍, 호평 일색이다. 제목은 <초록물고기>, 감독은 이창동. 거장의 출현을 알린다. 당시 그는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 1983년에 데뷔한 중견 소설가였다. 이 작품 이전에 <그 섬에 가고 싶다> 각본과 조연출을 성공리에 마치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각본으로 이름을 떨친다.


그러니 초짜가 아닌 중고 신인의 데뷔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이 작품은 한국 영화계의 사건 중 하나였다. 물론 그 중심엔 이창동 감독이 있다. 그는 이후 20년 동안 단 5편의 연출작을 남기는데,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다. <초록물고기>부터 시작해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시>까지, 앞의 세 편으로 이미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라섰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가 <박하사탕>인데, 때문에 가장 좋아하는 영화배우가 설경구일 때가 있었다. 거장의 눈썰미는 시나리오와 더불어 배우에게도 가 닿아 있는 것 같다. 설경구를 비롯해 송강호, 문소리, 정진영 등은 오로지 그의 눈썰미에 의해 뽑혀 함께 한 배우들이고 하나 같이 대배우가 되었다. 우린 <초록물고기>에서 한석규와 송강호와 문성근이 함께 하는 마법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외형은 느와르, 내형은 누구나의 이야기


소시민적 이야기에서, 느와르로, 누구나의 이야기로 흘러가는 리얼리즘 진한 작품. 소설 한 편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시네마 서비스



시작은 제대 귀향 기차. 막동(한석규 분)은 우연히 아리따운 묘령의 여인 미애(심혜진 분)을 만난다. 첫눈에 반한듯, 하지만 그녀의 스카프만 얻었을 뿐 더 이상 인연을 이어가지 못한다. 신도시 개발이 한창인 일산의 옛날 집으로 돌아온 막동, 뭐라도 해보려 하지만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기술도 없다. 큰형, 작은형, 막내여동생을 찾아 다니며 회포나 풀 뿐이다. 계란장사를 하는 작은형과의 한바탕은 그에게 참으로 귀한 재산이다.


와중에 걸려온 여인의 전화, 수소문해보니 귀향 기차에서 만난 미애다. 알고 보니 그녀는 나이트클럽 전속 가수이자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는 보스 배태곤(문성근 분)의 여인이다. 배태곤의 눈에 띈 막동, 곧 그의 아래로 들어가 승승장구한다. 보스 몰래 하는 미애와의 사랑도 꽃피운다. 


그런데, 소싯적 배태곤의 보스였던 김양길이 갑자기 나타나면서 사태는 일변한다. 일대를 주름잡던 배태곤의 세력이 급격히 쪼그라든 것. 급기야 배태곤은 김양길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지만 이대로 있을 배태곤이 아니다. 그는 막동에게 극비리에 중요한 임무를 떠앉기는데... 막동의 앞날은 어떨까. 


리얼리즘의 대가 이창동, 그는 소시민을 잘 그려내기로 정평이 나 있다. 현대사회에서 소외된 또는 중심에 서지 못한 이를 내세워, 그로 하여금 대표성을 띨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초록물고기>는 외형은 느와르이지만, 들여다보면 누구나의 이야기, 드라마이다. 막둥이가 살아가는 동향, 그의 가족들 모습, 그를 둘러싼 환경들이 모두 그렇다. 


조폭 영화?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명작


흔한 조폭 영화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삶의 지독한 아이러니를 리얼하게 보여주는 명작이다. 소시민과 재개발과 조폭. ⓒ시네마 서비스



벌써 20년이 되었으니 기억이 가물가물할 만도 하다. 기억 속 <초록물고기>는 같은 해 개봉해 숱한 화제를 뿌린 문제작 <넘버 3>와 비슷하다. 한석규와 송강호가 나오는 조폭 영화라서 그런지, <넘버 3>가 뇌리에 더 많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초록물고기>를 보기 전에, 현재 한국 배우 빅3인 한석규, 송강호, 최민식을 한 영화에서 볼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건 <넘버 3>인데. 


그런 기대, 조폭 영화를 볼 때면 으레 가지게 되는 그런 기대를 가지고 영화를 보면 이게 무슨 <전원일기>냐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영화 초반에서 우리는 그야말로 날것의 소시민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막동이와 작은 형이 함께 계란차를 타고 경찰차와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은 압권이다. 


한창훈 소설가의 <오늘의 운세> 한 장면을 그대로 차용한 것 같은데, 장면으로 보니 정말 많이 웃겼다. 한편 한창훈 소설가가 천착하고 있는 것도 아무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이들의 '소외'이니 만큼, 그의 소설에 대한 오마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회사 사정 상 파주와 일산 쪽을 자주 가는데, 오래전에 신도시가 들어선 그곳이지만 아직도 허허벌판이 눈에 많이 띈다. 2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에 나오는 배경과 완연한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개발이 한창인 당시, 배태곤이 추진하는 게 다름 아닌 재개발 관련 사업. 신도시 개발과는 거리가 먼, 아니 피해를 볼 여지가 있는 소시민인 막둥이가 배태곤을 도와 신도 개발 사업을 하려는 모습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아이러니한 삶이 아닌, 삶이란 아이러니하다 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좋은 영화를 다시 보는 의미


'좋은 영화' 접하기가 쉽지 않다. <초록물고기>는 단연코 좋은 영화인 바, 이 기회에 한 번 보심이 어떨지. 당당하게 추천한다. ⓒ시네마 서비스



재개발과 소시민, 그리고 소외를 다루는 한편 정통적인 느와르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 또한 이 영화가 갖는 위대함이라 하겠다. 잘 빠진 느와를 한 편을 보는 것도 힘든데, 그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인생 드라마를 엿볼 수 있다니 말이다. 와중에 제대로 된 한국형 느와르인 <달콤한 인생>이나 <비열한 거리>의 만들어진 듯한, 적어도 '내'게 피부로 와닿는 공감은 선사하지 못하는 부분을 <초록물고기>는 채워준다. 


그 중심엔 막동이라는 캐릭터가 있겠다. 배태곤이 그에게 꿈을 묻는다. 그는 가족들이 한데 모여 작은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싶단다. 소박하다면 소박하지만, 가족들이 한데 모여야 한다는 점에선 요원할 수도 있겠다. 그 꿈이 소박할수록 그가 가고 있는 길은 험난해진다. 그리고 비극은 점점 다가온다. 


영화는 말한다. 사람이 허무하게 죽어 나자빠지는 느와르, 절절한 배신이 난무하는 느와르와 소박하기 그지 없는 꿈을 꾸는 소시민의 생각, 행동, 모습이 다르지 않다고 말이다. 느와르는 하나의 장르가 아닌, 먹고 사는 삶에서 파생된 여러 모습 중 하나라는 것이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부분을 이 영화가 말끔히 해소해주었다. 


이 영화는 좋은 영화를 다시 보는 의미를 다시금 일깨워 주기도 한다. 당대의 생생한 모습을 우린 스크린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런 리얼리즘 작품에서 절절히 확인할 수 있는 바,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반추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데 크나큰 도움이 된다. 우린 알 수 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이고, 앞으로도 변치 않을 거라는 걸. 그 모습을 어떻게 보여주고, 우린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고민, 또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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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비참한 대학생활>


<비참한 대학 생활> 표지 ⓒ책세상



매주 토요일 촛불집회는 이제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그동안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이들만 해도 수백만 명에 이르니 사실상 박근혜 대통령 하야 운동은 전국민이 바라는 일이다. 비단 대통령 하야뿐만이 아니다. 최순실 게이트 규명, 세월호 사건의 진상 밝히기, 사드 배치 반대, 백남기 농민 문제 해결 등 모든 현안들에서 반정부 비판의 목소리가 함께 하는 것이다. 


그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게 대학생들이다. 지난 10월 26일,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입학 및 학사관리 특혜 의혹 등으로 시끄러웠던 이화여대에서 최초로 시국선언을 한 후 전국적으로 수십 여개의 대학교에서 연이어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는 시대를 이끄는 지식인으로서의 대학생, 그런 이들의 시국선언으로 봐야 하겠다.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시국에서 대학생은 여지 없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한가운데에서 그야말로 시국을 이끌고 나아가며 '4.19 혁명'의 시작이 그랬고 '5.18 민주화운동'과 '6.10 민주항쟁'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그 유명한 '68 혁명'도 파리의 몇몇 대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시작되었다. 내년이면 30주년이 되는 6.10 민주항쟁, 내후년이면 50주년이 되는 68 혁명, 지금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준다.


68 혁명의 신호탄이라 불리는 책의 통렬하고 강렬한 메시지


68 혁명은 잘 알려져 있지만 생소하다.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이라는 '시간적', 유럽이라는 '위치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군사 정권의 서슬퍼런 통치 아래에서 전 세계적으로 퍼진 혁명의 기운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68 혁명의 신호탄이라 불리는 책이 출간 50주년을 기념해 출간되었다. 1966년 작 <비참한 대학 생활>(책세상)이다. 2016년 작품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 통렬하고 강렬한 메시지를 들어보자. 


68 혁명 이전에 프랑스에는 다양한 전위 집단 좌파주의자들이 존재했는데, 그 중 하나가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이다. 그들은 현재 자본주의 상품 물신성이 일상의 모든 영역을 스펙터클로 환원해 노동과 삶을 소외시킨다며, 소외의 극복을 위한 일상의 혁명을 추구했다. 이 조직과 스트라스부르대학 총학생회 간부들이 함께 제작하고 인쇄해 1966년 11월에 배포한 소책자가 <비참한 대학 생활>이다. 


책은 총 3장으로 이루어진, 채 70쪽이 되지 않는 소책자이다. 첫 장이 대학생에게 던지는 실질적인 메시지다. 프랑스에서 성직자와 경찰 다음으로 멸시받는 존재가 대학생이라며, 비참한 대학 생활을 철저하게 고발하며 비판하고 주장한다. 전후 호황이 낳은 소비 자본주의 하에서 대학생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대학생이 '연장된 미성년 시기'에 머물러 있고, 자본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비판하지도 못한다고 말한다. 또한 총체적인 시각을 갖지 못하고 자신만 힘들다고 칭얼댄다는 것. 


자본주의는 그런 대학생들을 '하급 관리자'가 되도록 만들며, 현재의 비참함을 상쇄시켜 줄 것 같은 미래를 보이지만 그것 역시 자본주의를 떠받드는 기둥 중 하나로 전락시키는 '비참함'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정녕 통렬한 비판인데, 그 어느 행동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비참한 대학생의 소외에 대한 저항은 오직 사회 전체에 대한 저항으로만 가능하다고 일갈하고 있다. 


둘째 장은 조금 어려울 수도 조금 지루할 수도 조금 의미 없을 수도 있다. 당시 1960년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던 청년들의 저항 운동의 성과, 한계, 그리고 여전한 비판을 담았다. 프랑스의 '블루종 누아르', 네덜란드의 '프로보', 미국의 '자유 언론 운동', 소련과 동유럽, 영국, 일본에서의 운동을 언급하며 "청춘만이 처음으로 생존을 위한 억제할 수 없는 분노를 내뱉으며, 일상적인 지겨움과 낡은 세계가 다양한 근대화 과정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발산한 죽은 시간에 대항해 자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총체적 비판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선 이론적 비판의 일관성을 갖추고 실천적 조직에 도달할 필요가 있다고 일갈하고 있다. 


마지막 장은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이 추구하는 '자본주의가 낳은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일상의 혁명'의 방법을 다루며 호소한다. 이 소책자가, 그리고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과 스트라스부르 총학생회가 말하고자 하는 진짜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하겠다. 역시 그 전제는 '세계의 총체적 전복을 위한 총체적인 비판'이다. 먼저 혁명운동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1871년 파리코뮌, 1917년 볼셰비키혁명, 그리고 관료주의적 노동조합과 전통적 좌파 정당, 트로츠키주의자, 아나키스트를 모두 비판한다. 단순히 비판하기 위한 비판이 아닌, 자본주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 오는 실질적 비판이라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러며 새로운 혁명운동의 주체로 노동자평의회와 그 목적으로 노동자 자주관리를 제시한다. 그들이 해야 하는 건 '상품 체계의 구체적인 초월'에 있다. 소책자의 마무리까지 날카로움과 자본주의가 낳은 소외, 그리고 총체적 비판의 깃발을 들고 있다. 다름 아닌 2년 후에 전 세계를 뒤흔들 혁명의 깃발이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삶을 바꾸자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에게는 하나이자 동일한 떼어놓을 수 없는 지침이며,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의 소멸, 궁핍함이 지배적인 현재 사회의 해체, 그리고 궁극적으로 가능한 자유의 통치에 도달할 때까지 함께할 지침이다. 급진적 비판과 소외된 현실이 부과한 모든 행동들과 가치들의 자유로운 재구성이 프롤레타리아의 최대 강령이고, 삶의 모든 순간과 사건들의 구성 속에서 해방된 창조성이 승인할 수 있는 유일한 '시', 모두에 의해 쓰인 시이며 혁명적 축제의 시작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오로지 '축제'일 뿐이다." (본문 중에서)


아이도 아닌, 어른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 대학생


50년 전에도 대학생은 아이도 아닌, 그렇다고 어른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였나 보다. 그 옛날 대학생은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가장 앞장서 시대를 움직인 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리도 통렬하게 비판받고 있었다니 말이다. 이 소책자를 본 대학생 치고 세상을 바꾸고자 전방위적인 비판 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겠다 싶다. 한편, 50년이 지난 지금의 대학생도 그때와 다르지 않은 바 자신의 불투명한 앞날을 걱정하는 데 그치고 총체적인 비판과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대학생 때 세상에 대한 비판은커녕 내 자신의 불투명한 앞날을 걱정하면서 투덜대는 활동 비슷한 것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열심히 수업 듣고 시험 공부 하고 친구랑 밥 먹고 차 마시고 술 마시고 집에 와서 열심히 놀았다. 딱히 취업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 취업 공부를 열심히 했었으면 그럼에도 취업하기가 너무너무 힘들었다면 세상에 대한 비판 의식이 한층 강했을 거라 생각한다. 이 소책자가 비판하는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인데, 나는 그런 의식조차 없었으니 책이 비판하고자 하는 대학생 군(群) 축에도 끼지 못한다. 지금까지, 앞으로도 한으로 남아 있을 줄 안다. 


그런데 이 소책자가 대학생에게 던지는 과감하고 통렬한 비판이 끝모를 데 없다고 느껴진다. 적어도 지금 같은 시국에서는 말이다. 반드시 세상을 향한 총체적인 비판을 해야 한다는 것, 그러지 않으면 '하급 관리자' 따위나 되어서 자본주의의 하수인 노릇을 하게 될 거라는 말이 아닌가. 그게 과연 '잘못'인지, 그것이 청춘만이 할 수 있는, 해야 할 '직무'를 저버리는 것인지 의문이다. 이는 생각해볼 문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오로지 축제다


소책자의 마지막 부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오로지 '축제'일 뿐이다'가 던지는 메시지는 지금 한국의 시국에 통렬함 대신 희망을 던져준다. '축제', '놀이'와 같은 혁명을 우리가 시연해내고 있는 게 아닌가. 세계 만방에 떨치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린 혁명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부디 이 혁명의 불꽃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한국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번져, 50년 동안 더욱 가속화된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일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자극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68 혁명 당시 시위가 3개월 동안 이어지자 염증을 느끼고 그 반발심리로 다시 보수주의자들이 정치권에 득세하는 현상이 벌어진 걸 교훈삼아야 하겠다. 거기에 이 <비참한 대학 생활>이 던진 총체적 전복과 비판, 놀이와 축제의 메시지가 한 몫 했을 진데,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고수하면서 받아들일 걸 받아들여야 하겠다. 어쨌든 현 시국에, 대학생들은 이 책을 읽어야 하겠다. 여전히 우리 마음을 후벼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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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소설 읽기] <원미동 시인>



<원미동 시인> ⓒ아시아



1990년대였던 거 같다. 고모할머니가 봉천동에서 슈퍼를 운영하셔서 자주 갔었다. 내가 사는 동네도 만만치 않은 달동네였기에 신기하거나 이상하다는 감정은 없었다. 20년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건, 달동네가 풍기는 꾀죄죄함과 정겨움. 너무 멀고 힘들다는 느낌 정도. 지금 가보면 이런 생각이 들겠지.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


1980년대는 경제적으로는 최고의 안정기, 정치적으로는 최악의 혼란기를 겪었다. 시대를 그리려는 소설가들에게는 최고의 시기였을까. 명작들이 소설들이 쏟아져 나온다. 역사를 통해 현재를 조명하려는 대하역사소설, 정치의 혼란기에서 꿋꿋이 재 몫을 하면서 또 노동자로서의 가치를 일으켜 세우려는 이들을 그린 노동소설, 경제 호황의 거대한 그림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그린 작품들, 특유의 현실 감각과 필치 그리고 감성을 그린 여성 작가들의 작품들까지. 


여성 특유의 감성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그리다


소설가 양귀자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로 특유의 감성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그렸다. 그러면서 경제와 정치에도 발을 걸치고 있다. 그 감성으로 복잡다단한 세계를 그리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원미동 사람들>이라는 연작소설집은 그 세계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히 구사해냈다. 그 중에서도 '원미동 시인'이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과연 원미동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80년대 원미동은 서울 외곽의 변두리를 대표하는 공간이다. 동시에 서울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패자들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이 속한 <원미동 사람들>의 시작이 '멀고 아름다운 동네'라는 소설인데, 그 소설에서 주인공은 서울에서 집을 갖지 못하고 희망을 갖기 위해 서울을 떠나 멀고 아름다운 동네인 원미동으로 향한다. 그들은 서울에서 살고 싶었지만 서울은 그들을 쫓아냈다. 


그런 동네인 원미동의 시인이라니 마냥 처량하게 느껴진다. 왠지 모르게 누군지 알 수 없는 그 시인의 시는, 패자들의 도시인 원미동을 닮아 있을 것 같다. 그런 원미동을 노래하고 있을 것 같다. 아무도 그의 시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시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7살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인간군상


'원미동 시인'은 7살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원미동 사람들의 인간군상을 그린다. 아이가 그리는 원미동 시인은 '몽달씨'인데, 항상 퀭한 두 눈에 부스스한 머리칼 그리고 물들인 군용점퍼와 낡은 청바지를 껴입고 있다. 약간 돌았다고 한다. 그에게 친구가 있다면 아마 7살 짜리 아이가 유일할 거라 한다. 그는 "너는 나더러 개새끼, 개새끼라고만 그러는구나"라며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곤 한다. 


그리고 아이에게는 또 하나의 총각 친구가 있는데, 형제슈퍼의 '김반장'이다. 그는 누구보다 씩씩하고 재미있다. 아이한테 굉장히 잘 대해주는데, 아주 예쁘다는 아이네 집 셋째 딸을 사모하고 있어서 일 것이다.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아이지만 아무래도 몽달씨보다는 김반장에게 호감이 가는 게 사실이다.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몽달씨는 김반장의 슈퍼 일을 거들어주곤 한다. 그럴 때면 김반장이 칭찬을 해준다. 다름 아닌 그의 '시'를. 언젠가 몽달씨의 시를 천천히 읽어봄을 다짐 시킨다. 그러면 몽달씨는 신이 나서 분주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아이는 김반장이 몽달씨의 시를 읽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몽달씨가 알 수 없는 사내들에게 복 날 개패듯 맞고 있었다. 몽달씨는 겨우 도망쳐 김반장의 형제슈퍼로 피했는데, 여지 없이 사내들이 쫓아왔다. 김반장은 어떻게 처신했을까? 평소 몽달씨와 친하게 지내기도 했거니와 몽달씨가 김반장의 슈퍼 일을 이것저것 도와주었으니, 그도 몽달씨를 도와주었을까? 김반장은 단 두 마디를 했을 뿐이다. 


"무, 무슨 소리요? 난 몰라요! 상관없는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으니까 나가서들 하시오."

"나가요! 어서들 나가요! 싸우든가 말든가 장사 망치지 말고 어서 나가요!"


몽달씨를 구해준 건 뜬금없는 지물포 주씨 아저씨였다. 그러자 사내들이 도망쳤는데, 잽싸게 나와 거드는 김반장이었다. 그의 말은 가히 가관이었다. 방금 전의 그 모습은 어디 가고?


"하여간 저놈들을 잡아 넘겼어야 하는 건데... 좀 어때? 대체 이게 무슨 꼴인가. 어서 집으로 가세. 내가 데려다줄게."


이후 누구보다 몽달씨에게 관심을 갖고 잘 보살피는 김반장. 그는 어느새 원미동의 '진국'이 되었다. 심지어 당사자인 몽달씨조차 그때의 일을 다 잊어버린 듯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의 진짜 모습을 본 아이는 도무지 김반장에게 정을 붙일 수 없었다. 그리고는 몽달씨에게 더 정이 가는 것이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때로 아이의 눈은 날카롭다. 그 순수함은 감춰지고 쉬쉬하는 구린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춰낸다. 깡패 같이 정치권력(알 수 없는 사내들)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소외된 소시민(몽달씨), 그 권력 앞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자신의 안전을 생각하는 소시민(김반장). 그리고 그 무서움을 몰라서 인지 아니면 용감한 건지 권력에 웅크리지 않은 이(지물포 주씨). 하지만 그는 바보인 듯하다. 김반장을 원미동의 진국으로 추켜세운 사람이 다름 아닌 지물포 주씨니까. 


정녕 완벽한 배경 설정과 구도이다. 그리고 시대를 관통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녹아 있다. 원미동으로 상징 되는 경제 호황의 어두운 그림자, 소설 내의 유일한 사건을 통해 알게 되는 국가적 정치 상황, 당하는 사람이나 그걸 모른 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나 도와준 사람이나 하나같이 소외된 사람이자 소시민이라는 점까지. 


30년이 지난 지금이라고 다를까? 달라졌을까? 몽달씨 같이 나잇살 먹어서도 재구실 못하는 사람이 지금은 없을까? 김반장 같이 위험이 닥치면 자기 안전만 생각하다가 기회를 봐서 갈아타는 사람이 지금은 없을까? 결정적으로 서울에서 집을 구하지 못하고 외곽으로 쫓겨나다시피 하는 사람이 지금은 없을까? 


백 번 양보해서 한국이 없어지는 그날까지 이런 사람이 당연히 존재한다고 치자. 문제는 줄어들지도 유지하지도 못하고, 지금보다 당연히 훨씬 못살았을 것 같은 30년 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많이 양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모두들 그 상황에 철저히 적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몽달씨와 김반장이라는 인간상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고 미래이다.


아시아 출판사에서 후원하는 '한국 대표 소설 읽기'의 일환입니다.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 시리즈와 함께 앞으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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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대학교 1학년 시절은 그리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쉽사리 적응할 수가 없었다. 온갖 열등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내성적인 성격과 변하지 않는 외모, 너무나 말랐던 몸 등. 결정적이었던 건, '나는 얘들과 달라. 이곳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야'라는 의식이었다(고백하건대, 모의고사 점수보다 수능점수가 상당히 많이 떨어져 원하지 않은 대학교를 갔다. 당시에는 많이 후회를 했고 오랜 시간 콤플렉스로 남아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이겨냈다). 절대적 열등감과 상대적 우월감이 아주 교묘하게 자리 잡아 나를 괴롭혔었다. 

그렇다고 인간을 멀리하거나 왕따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친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종종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었다. 가식과 불신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도, 진정한 친구 운운하며 테두리 안에 있으려고 하는 모습들이. 

나는 그 테두리를 벗어나기에는 너무도 나약했기에, 아웃사이더를 부러워하면서도 행동을 해야 했다. 그 행동이 제대로 된 행동이 아니었기에, 이도저도 아닌 최악의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엄밀히 말해 물리적인 소외를 맛보진 않았지만, 정신적으로는 언제나 소외의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어떤지 몰라도 소외되어 있다고 느꼈다.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무엇을 했어도 당시의 나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을지도. 일본 전후(戰後)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다시 읽으며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났다. 

다자이 오사무의 불운한 삶

<인간실격>은 다자이 오사무가 자살하기 불과 3개월부터 2개월 동안 연재된 소설로, 그의 죽음 이후 1개월만인 1948년 7월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즉, <인간실격>은 그의 마지막 소설이다. 소설을 말하기에 앞서 다자이 오사무를 간략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다자이 오사무는 명망있는 집안의 아들(11남매 중 10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늘 바빴고 어머니는 유약해, 유모의 손에 키워졌다. 중학교 때까지는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수재였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좌익운동에도 참여했고 자살까지 시도하였다. 졸업할 때쯤에는 성적이 수직 낙하해 중하위권을 맴돌았다. 대학에 진학했지만 적응하지 못했고, 친가에서 부쳐주는 돈으로 방탕하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그에 대한 자기혐오는 깊어져만 갔다. 

이를 이겨 내보려고 더욱 문학에 매진했고, 마르크시즘에 심취하기도 했으며, 여성편력이 심해졌다. 시간이 갈수록 영향력이 커지는 그의 문학세계와는 달리 그는 불운한 또는 불운해 보이는 삶을 살았다. 그는 39년의 짧은 생애를 보내면서 총 5번의 자살시도를 했고, 결국 5번째 만에 성공(?)하여 세상을 떠났다. 그는 심히 유약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문학으로 훌륭히 승화시킨 걸 보면 그는 영락없는 예술가였다. 

'인간실격자' 다자이 오사무를 연상시키는 주인공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표지 ⓒ 민음사



공교롭게도 <인간실격>이 다자이 오사무의 자살 직전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라, 자전적인 면이 상당히 많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인간실격>의 주인공과 다자이 오사무의 삶과 사상이 매우 흡사하다. 소설은 주인공의 수기 형식으로 되어있는데, 마치 다자이 오사무의 수기인 것처럼 느껴진다. 주인공 요조는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이었고, 어머니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그 외로움과 소외감, 불안감 등은 요조의 삶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이 뿌리 깊게 형성된 것이다. 

그럼에도 요조는 인간을 놓칠 수 없었고 '익살'을 통해 웃음을 유발해 인간들과 친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진짜 모습이 아니었기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들킬까봐 전전긍긍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며 술과 마약, 비합법 운동(좌익 운동)으로 도피하게 되고, 복잡한 여성관계를 반복적으로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 또한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그런 중 자신을 진정 믿고 사랑해주는 여자 '요시코'를 만나게 된다. 그녀 덕분에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 그리고 외로움과 소외감 등이 치유됨을 느낀다.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주인공 홀든 콜필드가 세상의 위선과 가식에 극도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느껴 힘들어 할 때, 그의 죽은 여동생과 살아있는 여동생이 유일한 안식처라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다. 홀든 콜필드는 비오는 날 여동생이 회전목마를 타는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 세상은 살 만 하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는 치유는 안 됐을망정, 최소한 살아갈 힘은 얻었다. 

반면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는 마지막 희망과도 같은 '요시코'가 어떤 놈에게 겁탈을 당한 사실을 알게 된다. 마지막이자 유일한 희망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치유는커녕, 기존의 깊은 상처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더욱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견딜 수 없었던 요조는 자살을 기도했으나 살아남았고, '인간실격자'가 되었다. 마지막엔 정신병원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거악(巨惡)의 시대를 맞대면하다

이 소설은 전후 일본에서 젊은이들에게 신앙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젊은 시절 반드시 읽는 소설 중 하나가 되었다. 당시 일본 사회에 만연한 불신과 불안, 혼란과 퇴폐, 비(非)윤리를 맞대면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한 단계 성숙할 수 있게 만드는 가장 좋은 콘텐츠였다. 이 점이 그를 기성의 윤리와 도덕, 문학관에 반발한 작가를 뜻하는 '무뢰파(無賴波)' 작가로 칭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의 자기혐오는 일본에 대한 혐오, 나아가 인간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반면 전쟁이 끝난 시기는 아니지만 국가의 큰 위기가 10년을 주기로 연거푸 일어난 지금,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의 자기혐오는 말 그대로 자신을 향한 혐오에서 그친다. 종종 국가와 시대를 향해 자기혐오의 외연화를 행하려 하지만, 결론은 경쟁 사회에서 이기지 못한 자기 탓이다. 

물론 막무가내로 자기혐오의 외연화를 행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공허한 메아리로 끝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자기혐오의 침참은 더욱 가속화되어 이 사회는 더욱 빨리 끝장나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위험하기 짝이 없다. 자기혐오의 외연화가 자칫 자신의 문제를 남의 탓으로 돌려 사회에 만연한 불신과 불안을 더욱 가속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차치하고라도, 사회에 만연한 불신과 불안, 혼란과 퇴폐, 비(非)윤리는 도외시한 채 자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갔다가 너무 힘들거나, 어딘가에 부딪혔거나, 무서운 놈들을 만나 다시 애벌레가 되려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면서 자기혐오로 자신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 또한 그렇게 죽어갔다. 그의 본심은 알 수 없지만, 그의 삶과 시대적 맥락을 생각해 볼 때 그의 자기혐오는 그 자신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최소한 거악(巨惡)의 시대와 맞대면한 결과인 것이다. 다만 그는 나약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강했기에, 자신이 나약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최대한의 저항인 자기파괴를 이용해 부딪치고 부딪히고 또 부딪혔다. 

다자이 오사무의 자기파괴는 시대에 대항해 그가 행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지금은 수많은 대항무기들이 있다. 하지만 거대한 조직 뒤에 숨어서, 자신의 존재를 숨겨주는 익명의 숲에 숨어서 '대항하는 척' 하거나, 타인을 일방적으로 비난하여 오히려 자신을 숨기는 짓은 안 하느니 못하다.

그렇다고 '젊음'이란 것이 '저항'과 같은 말이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저항해야 한다고 느꼈을 때 저항은 못할망정 최소한 피하지는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알고 싶지 않은 진실과 맞대면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소름끼치게 힘든 일이다.



"오마이뉴스" 2013.6.3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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