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한공주>


압도적일 게 없을 것 같은 연출로 그 어느 영화보다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었다. 영화가 갖는 소재도 소재이지만, 그 소재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무비꼴라주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어른들에게 둘러싸인 한 소녀, 꾹꾹 눌러왔던 말 한마디를 애써 웃음 띤 얼굴로 내뱉는다. 그런데 이내 그녀는 선생님과 전학 수속을 밟으러 다른 학교를 찾는다. 잘못한 게 없다는 그녀가 떠나는 것이다. 명백한 모순이 아닌가, 이 상황은. 무서워서 피하는 건가, 더러워서 피하는 건가. 아직까진 알 수 없다. 그녀의 앞날을 지켜보는 수밖에. 


그녀의 이름은 '한공주', 하필 공주다. 그녀의 시련은 전 인생에 걸쳐 있다. 부모님은 이혼해서 엄마는 다른 이와 살림을 차렸고 아빠는 일 때문에 몇 달에 한 번 볼까 말까이다. 그래도 알바와 학업을 병행하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그녀, 편의점 사장 아들, 딸과 친하게 지내며 의지도 되어준다.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의 시련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전학을 가게 된 공주, 분위기가 전과는 완연히 다르다. 뭔가 얼이 빠진 느낌이랄까.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음악뿐인 듯하다. 음악 덕분에 친구도 생긴다 또 수영을 배우는 그녀, 이유가 살고 싶어질 때를 대비해서란다. 뭔가 그 사이에 크나큰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전 학교 담임 선생님 집에서 선생님의 엄마와 지내게 된 공주, 운영하는 마트 일도 도와주며 호감을 얻는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실날 같은 희망을 자신도 모르게 품게 된 공주, 하지만 학교로 찾아온 어른들로부터 도망치는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왜 도망쳐야 할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피해자가 도망치는 현실, 이게 현실이다


왜 공주가 도망쳐야 할까, 왜 피해자인 공주가 도망쳐야 하는 것일까, 왜 급기야 공주가 가해자처럼 되어버린 것일까.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무비꼴라주


지난 2014년 4월 17일, 세월호가 침몰된 지 하루 뒤에 개봉한 영화 <한공주>는 국민적인 공분을 사며 뛰어난 연출과 연기에 힘입어 흥행과 비평에 성공했다. 독립영화의 영역을 뛰어넘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당시 보지 못한 건, 대략의 내용을 알고서 도저히 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탓이었다. 또한 그동안 생각해왔던 가해자와 피해자의 뒤바뀐 양상을 또 다른 시각으로 완벽하게 보여준 탓이겠다. 


영화는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피해자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보여주었던 기존의 독립영화론에 일종의 반기를 든다. 그동안 피해자는 세상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개인으로부터 받은 끔찍한 피해를 '가해자'가 되어 되돌려주려 했다. 아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는,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폭력의 뫼비우스 띠. 


이 영화는 어떤가. 공주가 당한 건 끔찍하다 못해 악마적인 행위. 입으로도 손으로도 언급하기 역겨운 43명에 의한 집단 성폭행. 피해자 공주는 어떤가. 홀로 강하게 큰 그녀이지만, 한없이 약한 그녀이기도 하다. 그녀는 가해자가 되기는커녕 도망 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또 다른 가해자들인 가해자들의 부모, 자기 아들 삶을 망가뜨리지 말라는 협박과 호소와 부탁 때문이다. 차라리 공주가 가해자가 되어 그 악마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무엇을 남길 수 있다면, 그러면 내 마음이 덜 아플 것 같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건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 현실은 이렇다. 


끔찍한 와중에 다가오는 포근하고 아련한 감성


그 와중에 포근하고 아련한 감성을 선보인다는 건 거의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아... 공주가 가엽다. 공주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진다. ⓒ무비꼴라주


이 영화가 대단한 이유는 비단 이것 뿐이 아니다. 마음이 뒤틀리는 공주의 상황을 알게 됨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지극히 감성적으로 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건 공주가 진정 하고 싶었지만 이제 다시는 할 수 없는 '음악'에서 기인된다. 공주가 음악과 함께 일 때 느껴지는 감성은 한없이 포근하고 아련하다. 


이 감성은 <파수꾼>에서 기태가 함께이고 싶었지만 다시는 그럴 수 없는 친구들과의 즐거운 시간, <해에게서 소년에게>에서 시완이 계속되길 원했지만 다시는 그럴 수 없게 된 가족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수남이 열심히 일해서 장만하고 싶었지만 결국 빛으로 사게 된 집과 궤를 같이 한다. 


그렇지만 <한공주>에서 공주가 보여주는 감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바, 그녀가 당한 짓이 그만큼 강렬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극은 극으로밖에 해결하지 못한다는 걸 말하고자 하는 걸까.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엔 아이러니 하게도 공주의 괴로운 모습이 아니라 즐거운 모습이 뇌리에 남는다. 


우린 공주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공주의 괴로움을 뒤로 하고 즐거움을 취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수롭지도 않게. 그러면서 그녀 안에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괴로움을 조금씩 치료해주면서 말이다. 아마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공주가 전학 간 학교에서 큰 관심을 보이는 은희도 결국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지 않았는가. 이게 현실이라는 말을 다시금 하게 된다. 


'혼자'라는 사실보다 더 잔혹하고 가혹한 게 있을까


공주의 모든 걸 알고 온전히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영화에선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그 아픔이 너무도 큰 탓에 나도 휩쓸릴 것 같기 때문일 테다. 그렇지만 현실은... 현실도 마찬가지일 터. 과연 나는? ⓒ무비꼴라주


이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은, 생각해보고 들여다보면 너무나도 잔혹하고 가혹하다. 백도 없고 집도 없고 부모님도 없고 친구도 없는 어린 여고생이 할 수 있는 게 무언가. 뭐라도 해서 희망의 불씨가 있다는 걸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나, 싶은 게 개인적인 바람이다. 하지만 그건 공염불에 불과하지 않나. 실상은 이런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그녀에게는 그녀의 아픔을 가슴 절절히 공감하고 외치고 기억해줄 이가 아무도 없다. 누군가는 다수의 가해자가 한 목소리로 외치는 '개소리'를 듣고 가해자를 옹호하고, 누군가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며, 누군가는 한순간의 망설임으로 그녀를 떠나보낸다. 그녀는 혼자다. 


많고 많은 사람이 사는 이 크나는 세상에 '혼자'라는 사실보다 더 잔혹하고 가혹한 게 있을까. 더욱이 잘못한 게 없는데, 오히려 피해를 당했는데, 누군가에게는 가해자로 인식되기까지 하다니. 숨이 턱턱 막히고 알 수 없는 소름이 덮친다. 가만히 있기가 힘들다. 세상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도 귀찮다. 그저 사라지고 싶다.


그런데, 공주는 수영을 배운다. 다시 살고 싶을까봐, 다시 시작하고 싶을까봐. 그러면 너무 억울하니까.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마지막을 선택하게 될 거라는 걸. 그때를 대비해 수영을 배운 것이다. 이건 치를 떨지 않을 수 없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무너져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를 보고 결심한 게 있다. 받아들이겠다고 말이다. 타의에 의해 세상으로부터 버려져 혼자가 된 이들을 받아들일 것이다. 정녕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한다. 다름 아닌 내가 하고 싶다. 이 영화 <한공주>를 보고 난 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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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예민해도 괜찮아>

<예민해도 괜찮아> 표지 ⓒ북스코프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로 삼성을 상대로 싸워 이긴 후 로스쿨에 진학해 변호사로 돌아온 이은의 변호사가 쓴 책 <예민해도 괜찮다>(북스코프), 삼성과 로스쿨 시절에 겪었던 이야기와 변호사로 살아가며 보고 듣고 경험한 이야기들을 책으로 엮어냈구나 하는 짐작이 가능하다. 이 짐작이 맞긴 맞되, 본질은 완전히 다르다. 단순히 여성의 성희롱과 성폭행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 변호사 일을 하고 있다. 그 전에는 37살 늦은 나이에 전남대학교 로스쿨에 들어갔다. 이전에는 몇 안 되는 대졸 여사원으로 대기업 삼성에 들어가 제법 잘나가는 해외영업 사원으로 일했다. 그녀의 경력을 보면 일명 '엄친딸'이라고 할 만하다. 능력 있고 운도 좋고 자신감과 자존감까지 갖춘 완벽한 여자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그녀가 어째서 이런 책을 썼을까?

그녀의 경력을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녀는 '피해자 편에 서서' 변호사 일을 하고 있고, 늦은 나이에 법학을 전공하지 않은 채 로스쿨에 들어가 많은 '서러움과 차별'을 받았으며, 12년 넘게 일한 대기업 삼성에서는 '4년 넘게 회사와 전쟁을 했기 때문에' 그 생활이 평탄하지 않았고 나아가 불행하기까지 했다. 이를 관통하는 게 여성으로서 받게 되는 성차별과 성피해다. 

그런데 저자는 그런 것들이 단순히 성 문제가 아니라  갑을 관계, 즉 권력 관계의 문제라고 말한다. 남성과 여성의 성 문제가 아니다. 인간 대 인간의 문제이고 가해자든 피해자든 주변인이든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목 '예민해도 괜찮아'에서 예민해야 할 주체는 오로지 여성 만이 아니고, 대상은 오로지 남성이 아니다. 여성이 그 주체가 되기 쉬우며 대상이 남성이 되는 경우가 많을 뿐이다. 주체는 인간이며, 대상은 권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생상한 체험을 바탕으로 성 문제를 다루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저자가 천착하는 건, 천착할 수밖에 없는 건 여성을 대상으로 한 남성의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 등의 성 문제이다. 저자는 자신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자신을 찾아온 수많은 성범죄 피해자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들에서 핵심을 뽑아 정보를 전하고 교훈을 전하고 담론도 생성한다. 

성범죄 사건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주변인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 대부분은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닌 주변인이 될 확률이 높은데, 성범죄 사건에서 '처리가 어떻게 되느냐'는 실상 주변인들의 시선과 태도에 달려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가해자의 시선에 동일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주변인이 존중과 배려, 그리고 피해자의 시선에 동일시하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데이트폭력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흥미롭다. 아니, 엄밀히 새로운 해석은 아니다. '재인지'라고 하는 게 맞겠다. 저자는 데이트폭력을 '폭력'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데이트는 그저 폭력을 행사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데이트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데이트+폭력'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폭력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인지해야 발생 초기에 관계를 차단하거나 신고 절차를 밟을 수 있다. 폭력 앞에 사랑 없고, 폭력 뒤에도 사랑은 있을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차별과 피해자들의 용기

저자는 '여자들이 살기 편해진 세상'이라며 여성 차별이 존재하지 않게 된 것처럼 되어 버린 세상이라, 오히려 더 무섭다고 한다. 바로 잘 보이지 않는 차별 때문이다. 여전히 기업에서 채용한 인재의 남녀의 성비는 평등과는 거리가 멀고, 상위 직급으로 갈수록 여성이 희소 해지는 게 사실이다. 젊음이 소진된 여성 인력은 교체해야 하는 대상인 양 생각하기 일쑤다. 

"여성들에게 유리해진 부분은 여성이란 존재에 대한 우리 사회의 존중 의식이 높아져서가 아니다. 우선은 IMF 이후 가족의 부양의무를 가장에게만 떠안기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 인력을 필요로 하는 수요 역시 늘어나면서 맞벌이를 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입맛에 더 맞았기 때문이다." (136쪽)

한편 저자는 피해자들이야말로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하며 용기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100% 동의하기 힘들다. 용기를 내라고 강요할 수 만은 없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물론 용기를 내어 세상이 바뀌는 큰 결과를 얻어냈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은 더할 나위 없이 힘들었을 게 아닌가. 이런 사건의 경우, 각자의 판단에 맞기는 게 맞지 않은가 생각한다. 오히려 당사자들이 아닌 주변인들이 조심스럽게 나마 나서야 할 것이다. 피해자들 만의 연대가 아닌 피해자와 주변인의 연대가 필요하다. 

이 시대에 충분한 울림을 주다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힘희롱'이다. 이 힘희롱 안에 성 문제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즉, 보다 근원적인 문제인 것이다. 이 프레임이 반드시 옳다고 말할 수 없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시선으로 바라 보아야만 근본적으로 다가갈 수 있고, 근본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 성 문제를 성의 프레임으로만 바라보고 접근한다면 대다수를 차지하는 주변인들에게 큰 울림과 변화를 줄 수 없다. 

이 책은 어떻게 보든 상당히 여성 중심적이다. 그래서 필자 같은 남성이 보기엔 조금 거북할 수 있다. 아무리 남녀 문제나 남녀 간의 성 문제가 아니라 소수자 문제이자 권력 관계 문제라고 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저자는 여자들끼리 손잡고 여성 피해자들이 뭉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를 떠나, 개인적으로는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남자와 여자의 완전한 평등을 지향하고, 평등을 전제로 사고를 펼치는 것. 그러기 위해선 남자 뿐만 아니라 여자의 생각과 행동도 변해야 한다는 것. 똑 소리 나는 현실 판단과 과감한 비판, 믿음직하고 의지가 되는 이론의 정립과 방향 제시. 저자의 존경할 만한 생각의 지도는 이 시대에 충분한 울림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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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방황하는 칼날>



<방황하는 칼날> ⓒCJ 엔터테인먼트



2013년 최고의 독립 영화라 할 만했던 <가시꽃>(이돈구 감독).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주인공의 독한 속죄가 주된 내용이다. 주인공은 고등학생 때 친구들의 강요에 따라(피해자) 집단 성폭행 범죄의 일원으로 참여하게(가해자) 되었고, 10년의 시간이 지나 우연한 계기로 성폭행 당한 당사자와 친해지게 되었다. 어느 날 그녀의 아픔을 알게 되었고, 그 아픔에 자신의 과거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과거를 속죄하기 위해 친구들을 찾아가 단죄를 내리는 것이다. 


영화 <방황하는 칼날>(이정호 감독)은 <가시꽃>과 같은 내용의 뿌리를 가지지만 다른 줄기를 보여준다. 고등학생들의 집단 성폭행, 그 와중에 친구들의 강요에 따라 참여하게 된 약한 이. 다만 이 영화에서는 성폭행을 당한 이가 죽게 되었고, 이를 그녀의 아버지가 알 게 된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딸을 성폭행한 범죄자들을 찾아가 단죄를 내린다. 


자, 여기서 출현하는 이가 경찰이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공공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의 합법적 명령을 직접 실행에 옮기는 이들이다. 그들은 개인의 판단은 뒤로 하고 범죄자를 잡아야 할 의무가 있다. 딸을 성폭행한 범죄자들을 찾아가 단죄를 내리는 아버지는, 그들의 눈에는 범죄자일 뿐이다. 그것도 개인적 원한으로 살인을 자행한 파렴치한 살인자. 


물론 성폭행범들도 범죄자이지만 우리나라 법 체계 상 살인이 더 우위에 있다. 위에서 성폭행 도중에 피해자가 목숨을 잃었다고 하였는데, 성폭행이 죽음의 직접적 원인이 아니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극 중의 대사를 빌리자면, "또 그냥 이렇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방황하는 칼날>의 한 장면. ⓒCJ 엔터테인먼트



"범죄에 애 어른이 어디 있어, 다 같은 범죄자지."


누군가는 그 어떠한 잘못을 해도 살인은 용서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들은 이런 논리를 국가의 사형 제도에 들이대, 인간이라 할 수 없는 것들에 행하는 사형도 반대하곤 한다. 그렇다면 한 여자를 두고 집단으로 성폭행을 자행해 죽음에 이르게 한 행위는 어떠한가? 아니,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 


과연, 그 행위가 살인보다 하위의 개념인가? 살인보다 죄질이 떨어지는가? 정녕 그렇게 말하며 지나칠 수 있는가? 살인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더 크게 해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최소한 이 두 죄 간의 비교를 말도 되지 않는다고 치부해 버리지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참으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영화이다.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너무나 뚜렷하다. 영화 자체가 한 가지의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딸을 성폭행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소년 vs 그 소년을 죽인 딸의 아버지. 과연 이들 중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처벌의 수위를 정할 때 이들 중 누가 죄질이 더 악랄한가? 그리고 과연 당신이 딸의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이 이들을 쫓는 경찰이라면? 당신이 이들의 판결하는 판사라면?



<방황하는 칼날>의 한 장면. ⓒCJ 엔터테인먼트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남은 인생이란 없습니다."


꼬리를 무는 질문 공세를 받다 보니, 영화에 대한 관심은 후반으로 갈수록 줄어든다. 어쩌다 보니 극 중 딸의 아버지처럼 분노에 치를 떨고 있고, 난감해 하는 경찰의 모습에 답답해 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그 마음을 한편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최고 명장면은 바로 이렇다. 딸을 성폭행해 죽음에 이르게 한 소년을 찾아가 죽인 아버지를 빨리 잡아 처벌해 주라면서 경찰을 찾아와 오열 하는 성폭행범의 부모님들. 그들은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 하나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편 이해가 되면서도 그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적개심에 치를 떨게 된다. 그럼에도 그들에겐 세상에 둘도 없는 아들일 테니까...


"자식을 잃었으면서도 그냥 이렇게 멍하니 앉아 있는 게... 정말 최선의 방법이에요?"


영화는 중반을 넘기면서 방황하기 시작한다. 경찰도 국가 기관이기에 앞서 사람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가치 판단으로 인해 살인자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계속된다. 그 예리한 칼날이 무뎌지고 방황하는 것이다. 도무지 가치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그런데 이건 내용적 측면이고, 영화 자체로도 방황이 계속된다. 너무나 명확한 메시지를 던져 놓으니 더 이상 전개할 스토리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그것을 중후반의 숨막히는 추격전, 그리고 끝에서 보여주는 전에 없을 딜레마 상황으로 대체해보려 한다. 하지만 추격전은 전혀 스릴이 없었고, 딜레마 상황은 지루했다. 차라리 추격전 와중에 딜레마 상황을 넣고, 화끈하게 결말을 짓는 것이 좋았지 않았을까 싶다. 


점점 비인간적인 사회가 되어가는 와중에 '방황하는' 생각이 있어서 '방황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다. 어느 쪽을 택해도 비인간적일 수밖에 없는 이런 딜레마의 상황에서는 방황하는 것이 인간적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이런 일을 일으킨 당사자들을 심도 깊게 들여다보는 게 필요하다. 저질러진 사태를 놓고 논쟁을 하기에 앞서 그 태초의 원인부터 살펴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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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꽃> ⓒDK FILM


[리뷰] 독립영화 <가시꽃>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집단 성폭행에 가담했던 성공(남연우 분). 그는 고등학생 때에도,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후에도 여전히 어리숙하고 찌질하기까지 하다. 정황상 그는 주동자들의 폭력에 의해 집단 성폭행에 어쩔 수 없이 가담했지만, 실제 행동에 옮겼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그러지 않았을 거라 추측된다. 주인공인 성공이 분명 가해자이지만, 한편으로 피해자라는 걸 명확히 보여주는 첫 장면이다. 이 영화 <가시꽃>의 주제와도 이어진다.

 

<가시꽃>의 한 장면. ⓒDK FILM


사건 이후 10년의 시간이 흘러, 성공은 의류공장에서 착실히 일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어리숙한 성격 때문에, 여러 가지 피해를 보곤 한다. 10년 전 성폭행 주동자 중 한 명인 친구와는 여전히 친하게 지내고 있다. 결정적으로 10년 전 사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매일 같이 악몽을 꾸며 스스로 죗값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왜 성공은 악몽을 꾸고 그 사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그는 분명 성폭행에 해당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또한 그와 같이 어리숙하고 착해 보이는 이가 그런 행동을 할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주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실제 행동으로 옮겼다는 말인가? 이 부분이 중요한지, 영화가 계속되어도 좀처럼 사실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던 중, 성공은 교회에 나가게 된다. 교회에 나가서 진실로 하느님을 믿으면 자신이 지은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나가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인 장미(양조아 분)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바로 10년 전 성공을 비롯한 4명의 고등학생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었다.

 

처음에 성공은 이를 알고 혼란에 빠지지만, 점차 그녀를 향해 마음을 열고 그녀를 좋아하게 되고 그녀를 지켜주려는 생각을 굳게 다짐한다. 그녀를 향한 속죄의 표시였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큰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된 원인(성공), 원인의 결과를 보살펴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매개체가 바로 교회이고 하느님()이다.


<가시꽃>의 한 장면 ⓒDK FILM


하느님을 믿으면 천국을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한다. 또한 하느님을 믿으면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다고 한다.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이 감옥에 들어가서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새롭게 태어났다는 소식이 많이 들려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이는 민감하기 짝이 없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평생 죄를 짓지 않고 산 사람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경우와,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게 된 경우. 이 딜레마를 과연 누가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 영화는 이 부분도 살짝 건드리고 있는 것 같다.

 

성공은 친구를 찾아가 교회를 다니라고 말한다. 그래야 죄를 씻을 수 있다고. 그의 말과 행동은 지극한 순수함에서 나온다. 그것이 굉장히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발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도 못한 채 말이다.

 

더욱이 성공의 친구이자 10년 전 집단 성폭행의 주동자 중 한 명은 그래서 이제 와서 어쩌라고?”라며 오히려 성공을 타박하기까지 한다. 성공의 말과 행동은 이기적이지만, 친구의 말과 행동은 파렴치하기 짝이 없다. 성공은 이 간극에서 이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 혼자만 죄를 씻으면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성공은 교회에서 청년부에 발을 들여놓고 장미와 점점 가까워진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바닷가로 MT를 가게 된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진실게임 시간. 평소엔 아무것도 아닌 단순히 재미 위주의 시간이지만, 이번에는 뭔가 다르다.


<가시꽃>의 한 장면 ⓒDK FILM


같이 가게 된 교회 친구 중 한명이 과거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자, 장미도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사실을 털어놓으려 한다. 10년 전 성폭행을 당한 후 자살을 하려 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차마 성폭행을 당한 사실은 털어놓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실을 털어놓으며 극도의 분노를 표출한다. ‘그 자식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싶다는 강력한 의사 표현이었다. 그 극도의 분노는 성공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긴다. 그리고 성공은 그 즉시 자리에서 빠져 나와, 단죄를 하기 위해 주동자들을 하나하나 찾아가기에 이른다.

 

성공이 주동자들에게 묻는 말은 단순하다. “네가 한 짓을 알지? 미안해, 안 미안해?” 3명 모두 미안하지 않으며, 이제 와서 어쩌라는 투의 말을 건넨다. 이에 성공은 참지 못하고, 그들을 죽인다. 그리고 결국 자신도 죽인다. 어느새 성공을 좋아하게 된 장미는 갑자기 사라진 성공을 기다리며 아무것도 모른 채 일상으로 돌아간다.

 

장미가 다시 혼자가 되는 마지막 부분은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뒤의 축축하고 서늘한 땅을 느끼게 한다. 또한 그녀의 모습은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성공의 단죄에만 시선이 쏠려 있다가 그녀에게로 시선이 옮겨가게끔 했다. 그 한 장면으로 균형을 잡기에 충분했다.

 

이 영화는 300만원의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웬만한 독립 영화라도 억 단위를 넘어가는 영화판에서, 이 정도의 예산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액수이다. 그래서 꽉 짜인 스토리와 탄탄한 연기가 더욱 빛을 발한다. 다만 초반에 밀도 있게 짜인 스토리가 후반에 가서 폭발함과 동시에 느슨해진다는 느낌이 난다.

 

연기 부분에서는 나무랄 때가 없다. 특히 주인공 성공의 어리숙한 연기는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여주인공 장미 또한 잔잔함을 유지한 채, 일상 속 고통스러운 순간과 분노가 폭발하는 순간을 실감나게 연기했다.

 

<용서받지 못한 자><파수꾼> 그리고 <명왕성>에 이어,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주인공의 선택이 자살로 귀결되는 부분이 안타까운 동시에 독립영화에서 하나의 트렌드가 된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남은 사람의 슬픔 또는 공허함이 눈에 띈다. 아직까지는 이런 결말이 아쉬움으로 다가오진 않지만, 계속된다면 조금 식상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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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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