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


나오는 작품마다 끝없는 기대를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그에 충족하는 작품을 들고 나오는 몇 안 되는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덩케르크>. ⓒ워너브라더스코리아



크리스토퍼 놀란은 작가주의 감독이 아니다. 분명 그의 영화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보여주고자 하는 바가 명명백백하게 담겨 있지만, 많은 부분들이 영화를 만드는 이와 영화를 보는 이에게 맞춰져 있는 듯하다. 영화 산업에 종사하는 이 중 하나로서, 놀란은 굉장히 사려 깊은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그의 영화들에는, 특히 그가 단독으로 각본을 맡은 영화들은 사실 이야기를 이야기답게 즐길 수 있는 요소가 많지 않다. 대신 그 빈자리를 제대로 된 영화적 감각으로 채워 모자람이 없게 한다. 배경, 촬영, 음악, 음향, 편집, 캐릭터, 상황 등 영화에는 수많은 요소들이 있지 않은가. 놀란은 누구보다 잘 활용할 줄 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반드시 무엇 하나를 던진다. 절대 장황하지 않게, 아주 짧은 한 문장 정도의 물음이나 명제를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게 영화 내적일 때가 더 많기에, 우린 정확히 놀란의 '이야기'보다 '영화'에 열광한다. 그의 영화를 소비하고 향유하다 보면, 자연스레 이야기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형태다. 


역사에 길이 남을 '덩케르크 철수 작전'


전쟁에서 '철수'는 곧 '패퇴'다. 불명예로 남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덩케르크 철수 작전'은 그 과정과 그 이후를 생각했을 때 정녕 위대한 철수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덩케르크>는 그의 19년 경력 동안 불과 10번째 작품이다. 동시에 <미행>과 <인셉션>에 이은 3번째 단독 각본 작품이다. 그의 필모를 살펴보면 알겠지만, 그의 1번째 실화 바탕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 그의 전작들에서 어떤 작품에서도 비슷한 결을 찾을 수 없지만, 그나마 <인셉션>과 <인터스텔라>가 비슷하다 하겠다. 인간 존재를 훨씬 초월하는 상황에서의 인간을 그렸다는 점에서 말이다. 


한국에서라면 알 만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지만, 영국에서라면 모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덩케르크 철수 작전'. <덩케르크>는 이 작전을 기반으로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독일군과 영프 연합군은 꽤 오래 대치만 한다. 그러던 1940년 5월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된다. 연합군은 독일군의 기만에 속아 프랑스 북동부 해안에 갇혀 포위당하고 전멸될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다른 항구들은 모두 독일군이 점령, 덩케르크만 남은 상황이 된다. 


영화는 덩케르크만 남은 상황에서 처절한 철수작전이 시작되고 있던 시점에서 시작된다. 덩케르크에는 자그마치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자그마치 34여 만 명이 남은 상황, 어떻게 해서든 영국으로 철수해야 한다. 이제 곧 독일군의 총공세가 시작될 상황이었다. 남아 있는 이들만으로는 절대 철수가 불가능한대, 어떻게 철수할 것인가?


윈스턴 처칠 수상은 그 유명한 연설, “우리는 자신감과 힘을 길러내어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국을 지켜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상륙지점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에서, 또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를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성공한 직후 했다고 한다. 


놀란은 이 작전에서 영화의 모티브를 얻었을 게 분명하지만, 다름 아닌 이 연설에서 영화의 얼개를 얻었을 게 분명하다. 영프 연합군 보병들의 생존 투쟁을 그린 육지 해안에서의 일주일, 영국 어부들의 목숨 건 연합군 철수 도움을 그린 바다에서의 하루, 영국 공군의 독일 공군과의 필사적인 전투를 그린 하늘에서의 한 시간. 영화가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바라본 시간과 공간과 사람들이다. 여기에 이 영화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전쟁과 재난의 상관 관계


<덩케르크>는 전쟁영화의 꼴을 한 재난영화다. 전쟁 자체가 재난이라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재난은 전쟁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한 역수단이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덩케르크>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마디씩 했음직한, '이 영화는 전쟁영화가 아니다. 재난영화다'. 누구보다 전쟁영화를 많이 봤다고 자부할 수 있는 필자의 눈에도 완벽한 재난생존영화 그 자체였다. 대부분의 전쟁영화는 '전쟁'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실제해 눈에 보이고 예상이 가능한 위협을 주는 상황 하에 놓인 여러 인간 군상을 말하고자 한다. 아니면 부조리하고 무의미한 '전쟁' 그 자체를 논하거나. 


반면 이 영화는 도무지 예측불가능하고 예외없이 무차별적이며 상황은 미시적으로 보여주지만 상황에 처한 인간들은 거시적으로 보여주는 등 전형적이고 실제적인 재난재해의 무서움을 역설한다. 보병들의 육지 해안에서의 생존 투쟁이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데, 오히려 결국 말하고자 하는 건 재난재해가 아닌 전쟁이 아닌가 싶다. 전쟁을 수단으로 재난을 보여주고, 다시 재난을 역수단으로 전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에 처한 말단 병사들의 생각(집에 가고 싶다)과 행동(그저 살고 싶을 뿐)이 재난재해에 처한 사람과 똑같다고 말함으로써, 전쟁의 비인간적이고 무차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영국의 일반인 어부가 목숨을 걸어가면서 지옥이 펼쳐지는 덩케르크로 향하여 '아이들'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쟁의 비인간성을 폭로하는 데 크게 작용하고 있다. 


너무나도 휴머니즘적인 요소들의 향연, 자칫 감상적인 전쟁으로서의 역주행 가능성을 놀란은 한스 짐머의 음악으로 완전히 급반전 시킨다. 신디사이저를 이용해 귀는 물론 가슴을 꾸준히 묵직하게 짓누르는 음악으로 생존 투쟁과 죽음의 한복판의 전장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는 전쟁의 한 가운데다'라는 걸 깊이 새길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음악들, 이 영화의 태반을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인간적인 전쟁을 이기는 건 인간적인 숭고함


결국 '인간'이다. 가장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폭력인 전쟁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숭고함을 더하는 인간이란... <덩케르크>를 보면 알 수 있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전쟁의 비인간성을 폭로함과 동시에 인간 존재를 부각시키고자 한 게 <덩케르크>의 목표인 듯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철수만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이름 없는 연합군 병사들의 겉모습과 툭툭 던지는 말엔 한없는 자기혐오의 그림자가 어려 있다. 그들은 자타공인 패전병이기 때문이다. 


반면 독일군은 총소리, 대포소리, 폭탄소리로만 대변될 뿐 그 모습조차 잘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재난재해에 빗댈 정도의 비인간적이고 무차별적인 전쟁의 면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처참할 정도로 힘없는 연합군에 반해 당시 최강최악의 힘을 자랑하는 독일군의 대단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하에서 철수하는 자의 비참함과 살고 싶어하는 자의 비애감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 극대화된 모순의 자장 안에서 '철수'가 '패퇴' 아닌 '생존'으로 이어진다. 곧 '감성'이 '이성'으로 '감성적인 승화'를 이룩하는 순간이다.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건, 생존 투쟁을 한 이들이 아닌 덩케르크에서는 볼 수도 없는 이들이다. 그런 사실상의 사면초가 상황에서 살아 돌아온 건 위대한 승리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면면들까지도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친절하다면 친절하게 보여준다. 비인간적인 전쟁을 이기는 건, 더욱 비인간적인 무기와 역시 철두철미하게 비인간적인 작전이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숭고함이 아닌가. 영화는 그런 인간성들을 곳곳에 뿌리째 박아 놓는다. 절대 흔들리지 않는 그 뿌리들은 육지에서, 바다에서, 하늘에서 수많은 이들을 생존으로 이끈다. 영화를 보고난 후 한동안 우리의 오감은 오롯이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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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고지전>


<의형제>의 장훈 감독과 <공동경비구역 JSA>의 박상연 작가가 의기투합했다. 그들의 전 작과 이어지는 감정선이 자못 예사롭지 않다. ⓒ쇼박스




1953년 2월, 6·25전쟁은 여전히 휴전 협정 중에 있다. 하지만 매일 같이 뺏고 뺏기는 고지 때문에 제대로 선을 긋고 휴전을 할 수가 없다. 방첩대 소속 강은표 중위(신하균 분)는 해서는 안 될 불순할 말을 내뱉어 영창에 갈 위기에 처하지만, 상사의 선처로 동부전선에 배치되어 사건 하나를 조사하게 된다. 최전방 애록고지의 악어 중대에서 죽은 중대장 시신에 아군 총알이 발견된 것. 


애록고지에서 은표는 죽은 줄만 알았던 친구 김수혁(고수 분)을 만난다. 이등병이었던 그는 2년 만에 중위가 되어 있었다. 한편 이제 갓 약관의 나이가 된 듯한 청년 신일영(이제훈 분)이 임시중대장으로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 걸 보고 기시감을 느낀다. 그는 모르핀 중독 상태였다. 이후 은표는 악어 중대의 비밀을 하나 둘씩 알아간다. 


겁쟁이 수혁이가 어떻게 이리도 매섭고 대범하게 변했는가, 약관의 청년은 어떻게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고 또 왜 모르핀 중독 상태가 되었는가, 죽은 중대장 시신에서 아군 총알이 발견된 사유는 무엇인가, 전쟁통에 술은 어떻게 구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이들이 쉬쉬 하는 그 예전 '포항 철수 작전' 때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전쟁이 주는 참혹함,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참혹함


이 영화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기 위해선 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참혹함이 아닌, 진짜 참혹함을. 그들은 '왜' 서로 죽이고 죽였어야 했나? ⓒ쇼박스



영화 <고지전>은 <태극기 휘날리며>와 <웰컴 투 동막골> 이후 오랫동안 맥이 끊겼던 6·25 전쟁 배경의 전쟁영화이다. 이 영화는 내적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지만 외적으로 많은 논란이 일며 흥행에 실패했고,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6·25 전쟁영화는 나오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전과 이후에  <포화 속으로>와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영화가 있었지만, 이 영화들이 맥을 잇는 건 어불성설이다. 공교롭게도 감독이 같다. 비극이다. 


지금에 와서 60년도 더 된 전쟁 이야기를 꺼내 무엇하랴 싶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전쟁을 그저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전쟁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한다. 대표적으로 양대 산맥이 있을 텐데, '애국'과 '반전'이 그것이다.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쟁을 그린 것, 전쟁을 반대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쟁을 그린 것. 


<고지전>은 '반전'에 속한다 하겠다. 그렇지만 그런 영화는 액션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감동도 약한 반면 참혹함이 상대적으로 강하고 생각할 거리가 많으며 전쟁의 당사자들에게 일면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요소들이 많아, 논란이 일기 쉽고 외면 받기 쉽다. 어찌하여 모든 걸 파괴하는 '전쟁'에 액션과 감동이 주가 될 수 있을까마는, 그게 그렇지 않은가 보구나 싶다. 


이 영화는 전쟁이 주는 눈에 보이는 참혹함보다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참혹함을 전하려 한다. 6·25전쟁의 특수성이 기인한 것일 수 있다. 사실 이 전쟁은 1951년에 끝났다. 하지만 이후 2년 6개월 동안 휴전 협정이 계속되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되풀이 되는 '고지전쟁'으로 5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다. 그들은 전쟁을 해야 하는 이유도 모른 채 동포를 죽이고 자신 또한 죽어갔다. 


'이' 전쟁은 생존의 숙제일 뿐, 애국이 낄 자리는 없다


'이' 전쟁, 6.25는 특수성을 진하게 띠는 전쟁이다. '동포'끼리 '애국'을 걸고 싸우는 모양새. 하지만 이 영화는 '생존'일 뿐이라고 말한다. 단지 내가 죽기 싫어 상대방을 죽이는... ⓒ쇼박스



영화는 사건을 통해서, 캐릭터를 통해서, 대사를 통해서 시종일관 반전 메시지를 드러낸다. 정확히는 '6·25 반전'. 북한군 저격수 '2초'를 잡기 위해 10명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길을 나선 수혁, 17살 막내가 2초에게 당한다. 아무도 그를 구하러 가지 않고 오직 2초를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다. 은표의 분노에 수혁이 날리는 한마디, '네가 전쟁을 알아? 네가 지옥을 알아? 난 아주 잘 알아. 매일 같이 수많은 남상식이 죽어간다고.'


엄청난 수의 중공군이 밀려 오는 상황에서 새로 부임한 대위 유재하 중대장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끝까지 항전할 것을 명한다. 이에 유재하를 쏴죽이고 중대장이 된 수혁은 즉각 퇴각 명령을 내린다. 이 상황을 그냥 넘길 수 없는 은표에게 수혁이 날리는 한마디, '나를 죽이면 네가 중대장이 된다. 그러면 부대를 지휘하게 될 텐데, 네가 우리 부대원들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아? 자신 있으면 어서 쏴. 시간이 없어.'


허무하고 어처구니 없는 죽음, 그 죽음을 방조하고 실행하는 이들, 그런 그들도 누군가에게 죽고, 그들을 죽인 이들 또한 누군가에게 죽는다. 전쟁에서 죽음은 일상일 테지만 인간이라면 절대 죽음을 일상처럼 받아들일 수 없을 터, 하지만 그들은. 그들은 죽음을 방조하고 죽음을 당연시하고 죽음을 자초한다. 그렇다고 죽음이 친근하지도 죽음을 환영하지도 죽음과 대면하지도 못한다. 죽음의 지옥에서 허우적댈 뿐이다.


문제는 이 전쟁의 근원에 있다. 사실상 끝난 이 전쟁을 '왜' 지속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전쟁터에 있는 이상 '전쟁 자체'에 대한 의문은 치우고서라도, 다름 아닌 '이 전쟁'에 대한 의문은 풀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최소한으로 내가 죽기 싫고 내 부대원들을 죽게 만들기 싫어 상대방을 죽인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들에게 이 전쟁은 생존의 숙제일 뿐이다. 거기에 애국은 낄 자리가 없다. 


더 이상의 전쟁영화는 안 된다, 하지만 <고지전>은 되새겨야 한다


수많은 전쟁영화를 봐왔다. 이제 더 이상 전쟁영화는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외친다. 하지만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바, 그렇다면 차라리 <고지전> 같은 영화가 만들어져야 한다. ⓒ쇼박스



전쟁영화는 더 이상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어떤 이유로든 전쟁영화는 그 자체로 '전쟁'에 대한 미화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업영화라는 틀로 전쟁을 대하는 이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지금은 평화의 시대, 전쟁은 우리와는 먼 얘기, 아무리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내장이 튀어나와도 그게 바로 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내가 그곳에 있다면 상대방이 그렇게 될 거라는 무의식, 애초에 나는 그곳에 없기에 그곳을 향해 갖게 되는 동경,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이 갖는 초유의 액션. 


반전을 지향하는 전쟁영화라고 해도 이 정도인데,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전쟁영화는 어떻겠는가. 전쟁 승리를 상정해놓고는, 어떻게 상대방을 몰살시켜 버릴까 고심하는 전쟁영웅, 거기에 여지 없이 중심축을 이루는 극단의 이데올로기. 우리는 여기서 이데올로기에 따른 애국심이 고취됨과 상관 없이, 전쟁 자체에 대한 동경을 전에 없이 끌어올리게 된다. 이 얼마나 멋진가, 이 얼마나 필수불가결한 전쟁인가. 


지난 이야기지만, <고지전>의 흥행 실패가 주는 씁쓸함과 <인천상륙작전>의 흥행 성공이 주는 참혹함은 앞날을 걱정케 한다. 영화의 만듦새와 극단의 이데올로기를 부추기는 요소들의 향연을 뒤로 한채, 전쟁을 미화하는 본새가 그렇다. 앞으로 전쟁영화는 반드시 또 나올 텐데, 모르긴 몰라도 아마 <고지전>이 아닌 <인천상륙작전>류일 가능성이 크다. 정녕 또 한 번 전쟁을 치르고 싶은 것인가?


영화에 많은 논란이 있음에도, 나아가 전쟁영화가 만들어지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고지전>을 되새겨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린 진실을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 거기에 지옥이 있을지라도, 아니 아마 지옥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할 텐데 그럼에도 우린 바로 그곳을 주시해야 한다. 지금도 어딘가에선 지옥과도 같은 '고지전쟁'이 펼쳐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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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알바생 자르기>



<알바생 자르기> 표지 ⓒ아시아


요즘 시국이 뒤숭숭합니다. 20여년 전의 노동법 날치기 사건에 비유하고 있는 2015년의 '노동개혁' 논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수작이라는 '국정 역사 교과서' 논란. 거기에 반 년 앞으로 다가온 20대 총선을 겨냥한 수많은 정치적 이슈들까지. 태풍처럼 모든 걸 집어 삼키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앞으로 무엇이 또 튀어나올지 기대(?)되기까지 하네요. 


그런 와중에 불과 한 달 전에 화려하게 불타올랐던 노동개혁 논란은 상당히 수그러들었습니다. 2000만 노동자의 생사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말이죠. 이번 노동개혁 중에 최대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 중 하나가 '쉬운 해고'예요. 기존의 일반 해도에 업무성과가 낮은 근로자도 해고할 수 있도록 하자는 내용을 추가하자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죠. 노동자에게는 정말 무시무시한 '개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존을 위해 생업에 뛰어 들었기로서니, 그곳에서 다시금 피가 튀기는 생존 게임을 하게 되었네요. 


생존과 생계를 위해 일을 하는 알바생


아르바이트라고 하면, 고용주나 피고용주나 편안하게 생각하기 쉽지요.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하는 식으로 전전하는 게 하등 이상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해고에 대해서 큰 이질감이 없죠. 아니, 서로 간에 해고를 하고 해고를 당하고 하는 모습을 보기 쉽지 않아요. 대부분 알바생이 자발적으로 그만두거나, 해고를 하게 되는 경우에도 서로 쿨하게 받아들이곤 하거든요. 


하지만 시대가 많이 바뀐 지금, 많은 알바생이 생존을 위해 생계를 위해 일을 해요. 예전에는 용돈이나 벌어볼 요량으로 했다지만, 지금은 제대로 된 일자리를 잡지 못한 젊은이들이 대거 알바 자리에 진출했기 때문이죠. <알바생 자르기>(아시아)는 생존을 위해 알바를 하는 이와 알바를 그저 알바처럼 생각하고 쉬운 해고를 행하려는 이의 줄다리기를 그렸어요. 과연 그 제목에서 풍기는 느낌대로, 거악 고용주에 맞선 약자이자 피해자 알바생의 투쟁이 펼쳐질까요?


천만예요. 이 소설을 보면 누가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먼저 제목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고용주의 입장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을 거예요. '나는 회사에서 잘렸다'가 아니라 '나는 알바를 자른다'이지요. 작가는 정녕 특이하게 적어도 겉으로는 알바생을 자르려는 고용주 또는 고용주급의 어려움을 그립니다. 더 이상 쉽게 해고할 수 있는 알바가 아닌 거예요. 알바생의 행동 거지를 한 번 봐요.


알바생 혜미는 하는 일이 별로 없어 보여요. 손님이나 높으신 분이 와도 차를 내지도 않고요. 항상 차갑고 뚱한 표정으로, 그렇지만 탤런트 이다해 뺨치는 외모로 이목을 끌어요. 고용주 입장에서는 정말 꼴보기 싫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겠어요. 알바니까 별 생각 없이 자르라는 말이 나오겠지요. 그런데 중간관리자 은영이 생각하기에는 가혹한 것 같아요. 그녀는 혜미를 위해 나서죠. 


혜미를 보호하기 위해서 은영은 혜미에게 잔소리를 시작해요. 하지만 혜미는 바뀌지 않죠. 오히려 그동안 몰랐던 혜미의 '깜찍한' 행동에 치를 떨어요. 결국 그녀도 알바생 혜미를 자르자는 사장의 의견에 동조하게 되죠. 문제는 그 다음부터예요. 알바생 하나 자르는 게 너무 힘들어요. 혜미보다 은영 자신이, 잘리는 게 거의 기정사실화 되어 있는 혜미보다 자르는 입장의 은영 자신이 더 힘든 거예요. 


저도 소싯적에 알바를 해보았어요. 이것 저것 다 합치면 10번 정도는 해봤을 거예요. 그 중에서 굴찍한 게 3~4번 정도.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는 일반 직원 그 이상으로 헌신했던 것 같아요.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혜미는 왜 그럴까요? 그녀도 '생존'과 '생계'를 위해 알바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말이에요. 


사실 이 지점에서 저도 어떤 생각과 행동과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소설 속 혜미는 분명 알바생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아요. 해고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움이나 자괴감 따위가 들지 않지요. 그런데 사실 그녀는 자신의 일을 하고 있거든요. 


결국 희생당하는 건 알바생이다


엄연히 말해서 상사에게 싹싹하게 잘 보이고, 점심 시간에 동료들과 같이 밥을 먹고, 일할 시간에 할 일이 없어도 찾아서 일을 하는 것 등이 그녀가 할 일은 아니지요. 그런 것들이 일이라는 큰 틀에 자연스럽게 파고들어가 있기에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죠. 또 그녀가 해고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싹싹함, 즉 위로금을 받아내고 4대 보험비를 챙기는 행위가 누군가의 눈에는 아니꼽게 보이겠지만 사실 정정당당히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거잖아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저조차도 어떤 확신이 들지 않네요. 


저자는 여기에서 한 번을 더 꼬고 또다시 꼬면서 읽는 이로 하여금 갈팡질팡 도무지 중심을 잡지 못하게 만들어요. 정말 교묘하다고 할까요. 무슨 말인고 하면, 그녀가 크게 티나지 않는 지각을 자주 하고 점심 시간이 약간 지날 때까지 병원을 다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유가, 그녀의 집이 회사에서 너무 멀어서이고 그때문에 언젠가 다리를 다쳤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왜 그렇게 멀리까지 회사를 다니냐, 가까운 데로 회사를 옮기면 되지 않느냐 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이처럼 이들은 도무지 누가 정답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어요. 그건 우리 모두 마찬가지겠죠. 그래도 책의 마지막이 이런 말이라서 다행이에요. 저자가 그래도 마지막엔 무게 중심을 알바생 쪽으로 기울인 것 같은 인상을 주네요. 한편, 서글프기 그지 없네요. 결국 뭔 짓을 해도 알바생이 을이잖아요. 고용주를, 관리자를 아무리 귀찮게 하고 난감하게 해도 해고 당하는 건 알바생이고 생계와 생존을 위협받는 건 알바생이잖아요. 그 사실을 절대로 잊으면 안 되지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여자아이는 가방에 손을 넣어 봉투를 확인했다. 봉투를 땅에 떨어뜨리고 돈을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겁이 났다.(이렇게 주지 말고 계좌로 부쳐줬으면 좋을 텐데.) 건물을 나서자마자 은행을 찾아갈 참이었다. 학자금 대출을 제때 갚지 못해 독촉을 받고 있었다. 여전히 발목이 아팠다. 인대 수술을 받느라 퇴직금을 다 썼지만 별로 나아진 게 없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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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거인>





독립영화란 상업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창작자 본인의 의도에 따라 제작한 영화를 뜻한다. 개 중에는 의도적으로 상업 자본을 배척한 경우도 있지만, 소재나 주제 때문에 상업 자본으로부터 배척 당한 경우도 있다. 상업 자본이 꺼려 하는 소재나 주제는 무엇일까? 대중이 받아들이기엔 힘든 기상천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주제와 소재를 채택한 영화도 있고, 대중으로 하여금 눈을 번쩍 뜨이게 할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도 있다. 


여기서 대중으로 하여금 눈을 번쩍 뜨이게 할 메시지는, 여지없이 대중을 불편하게 한다. '불편한 진실'을 파헤치고 들춰내는 이런 영화는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기엔 힘들고 자연스레 상업 자본으로부터 배척을 당하는 것이다. 그 사회의 성숙도를 이런 영화들이 대중으로부터 얼마나 사랑을 받는 가로 측정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기준을 1만 명으로 삼고 있는 것 같다. 


2014년 최고의 발견이라 칭할만한 영화 <거인>은 2만 명을 돌파했다. 독립영화임에도 대중으로부터 평균 이상의 사랑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여지없이 대중을 불편하게 하는 '불편한 진실'을 보여주고 있는 이 영화의 어떤 점이 대중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을까? 스토리? 메시지? 연기? 미리 말하자면 모든 점이다. 


도둑질 하며 신부의 꿈을 키워가고 있는 아이


영화의 주인공은 18세 영재(최우식 분)이다. 그는 집을 나와 '이삭의 집'이라는 그룹홈 보호시설에서 지내면서 신부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싹싹하고 착하고 말 잘 듣는 그런 아이다. 반면 남몰래 후원물품인 신발을 훔쳐 학교에 파는 비도덕적인 모습도 있다. 그럴 때면 그야말로 장사꾼 기질 아니, 사기꾼 기질이 농후하다. 영재는 과연 누구인가? 그의 본 모습은? 


18살이 되는 영재에게는 단 하나의 고민이 있다. 그 고민에서 모든 것들이 파생되는 것이다. 나이가 찼기 때문에 그룹홈 보호시설에서 나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집으로 돌아가기 싫다. 돈은 벌어오지 않고 동생 민재를 떠 넘기려고 하는 아버지, 일을 하다가 허리를 다쳐 이모집에 가서 요양을 하고 있는 어머니(어머니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동생 민재를 '이삭의 집'에 떠넘겨 사실상 영재에게 책임을 지게 하려는 속셈을 갖고 있다.), 그리고 철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 민재. 영재는 이런 집에서는 하루도 살 수 없다. 정말 '미치겠고' '죽겠다'. 





그렇지만 '이삭의 집' 원장은 계속해서 영재를 압박한다. 어서 이 집을 나가 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영재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방법은 딱 하나, 성당 측에서 말을 잘해 주는 것 뿐이다. 영재가 실업계를 다니고 성적도 그리 좋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신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부각 시켜 주어야 한다. 그래야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신부의 꿈을 키우며 계속 지낼 수 있다. 영재에게 이건 실존과 연결된 문제이다. 


'집도 있고 부모님도 있는 아이가 뭐가 부족하다고 집을 나와서 그 고생을 자처해서 하고 있나?'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 영재에게는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부모님이 있다. 작지 않은 집도 있다. 그런데 무능력하고 못난 부모님이 있다. 그 부모님은 장남 영재로 하여금 집을 나갈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말 그래도 집에서는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차남 민재도 영재에게로 보내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영재와 민재가 '이삭의 집'을 나갈 때 갈 곳이 없어질 것이다. 거리로 내몰리는 아이들, 그 원인에는 어른들의 '무책임'도 있다. 


참을 수 없는 분노로 폭발하는 아이, 그 끝은?


영화는 영재로 하여금 '이삭의 집'을 나가 집으로 돌아가게끔 이야기를 치밀하게 펼쳐나간다. 18세가 되었으니 집을 나가라고 하는 원장, 영재가 후원물품을 훔치는 모습을 보고 협박하는 전 룸메이트 범태, 민재를 '이삭의 집'으로 데리고 가 같이 지내라고 끊임없이 말하는 아빠(만약 민재를 데리고 가면 영재의 활동 범위는 굉장히 축소될 것이고, 자리를 보존하기가 더 힘들 것이다.)까지. 


어느 날 급기야 영재의 아빠는 민재를 데리고 직접 '이삭의 집'을 방문하기에 이른다. 영재를 통해서 민재를 보내기 힘들다고 판단해 직접 원장에게 말하려고 온 것이다. 이를 알게 된 영재는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분출하고 결국 폭발하고 만다. 눈이 뒤집힌 채로 부엌에 가 칼을 가져온 것이다.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할 것인가? 어찌 되었든 영재의 거취는 불분명해질 것이 분명하다. 





이 시대의 한 단면을 고스란히 투영한다


영화의 또 다른 키워드는 '연기'이다. 주인공 영재를 연기한 최우식의 연기. 그는 주로 TV 드라마에서 주조연으로 활동하다 영화 연기를 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그것도 <거인>처럼 단독 주연은 처음인 듯하다. 그는 이 영화에서 신부의 꿈을 꾸는 착한 아이와 남몰래 후원물품을 훔쳐 파는 나쁜 아이의 이중 생활 그 이상의 삼중, 사중 연기를 펼친다. 그를 생각해주고 그를 옭매이는 그와 관련된 사람 모두와의 관계에서 각각 다른 표정과 목소리톤,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25살이 보여주는 연기라고 믿을 수 없는 연기의 스펙트럼이 크다. 


그렇다는 건 영화 속 영재가 그만큼 힘든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오로지 '생존'을 위함이다. 아무도 자신을 책임져주지 않는 다는 걸 알고 그야말로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평소 원장 부부나 신부에게 잘 보여온 영재. 하지만 그는 나이가 꽉 차서 집을 나가야 하는 상태이다. 죽어도 나갈 수 없는 영재는, 신부에게 신부가 꿈이라는 걸 강하게 어필한다. 신부는 영재의 강렬한 부탁을 듣고 공부 잘하는 대학생 누나를 데려와 영재에게 공부를 시킨다. 친자매처럼 지내는 이들, 하지만 영재는 그런 누나조차도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이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비싼 장갑을 사서 누나에게 선물하는 영재의 모습이, 순수한 의미의 고마움이나 호의가 아닌 뇌물로 비춰지는 것이다. 


어떤 파괴적인 메시지나 장면을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온 한숨이 나오고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그러면서 동시에 한없는 연민의 눈길을 보내게 된다. 거인이 되고 싶어 되는 게 아닌, 살기 위해 살다 보니 어느 순간 거인이 되어 버린 영재. 그에게서 이 시대의 한 단면을 고스란히 투영해본다. 드러나지 않는 거대한 문제의 단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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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닭털 같은 나날>


<닭털 같은 나날> ⓒ밀리언하우스

다들 그렇게 사는데 나는 그렇게 살지 않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곤 한다. 매일 지근거리에서 보게 되는 부모님의 삶을 보면서, 절대 부모님처럼 살지 않을 거라고 설마 그렇게 살게 될까 하며 지나가 버리곤 하는 것이다. 그들의 삶은 너무나 재미없고 단순하며 천편일률적이고 희망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과 나을 거 없는 다를 거 없는 삶이란 말이다. 


반면 부모님 세대의 다음 세대는 상당히 많은 이들이 대학을 나왔고 지식의 함량이 출중하다. 생각하는 것도 웅대하진 않아도 소시민적이지는 않다. 적어도 부모님 세대와는 다른 삶을 그리고 더 나은 삶을 당연하게 기대한다. 이는 부모님 세대도 마찬가지이다. 자녀 세대가 그런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고 자부하는 당신들이다. 


그런데 바뀐 게 없는 것 같다. 대학을 나와도 지식 함량이 커져도 경쟁력이 월등해져도 살아가는 건 여전히 지리멸렬하다. 굳이 부모님 세대와 비교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 보이는 나날들이 같고 생각이 같고 인생이 같다. 중국 작가 류전윈의 <닭털 같은 나날>은 베이징에 사는 한 부부의 일상을 통해 이런 현실을 보여준다. 


두 사람 모두 대학을 나왔고, 성취욕 또한 강했다. 열심히 학업에 매진했고, 웅대한 이상도 품고 있었다. 관공서의 처장이나 국장, 사회의 크고 작은 기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몇 년 후, 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천편일률적인 삶을 살게 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본문 중에서)


남편 린은 새벽부터 국영 상점에 줄을 서서 두부를 사곤 한다. 언제 한 번은 밤에 계량기가 돌지 않을 정도로 살짝 수도꼭지를 열어 양동이에 몰래 물을 받은 적도 있다. 또한 몇 년 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집에 살다가 빈민촌으로, 임시 가옥으로, 옮겼다가 결국 지금의 방 하나 있는 집을 얻었다. 그렇다. 그는 가난한 소시민 가정의 가장이다. 


아내 리는 출퇴근 시간만 4시간 이상이 걸리는 직장을 다니고 있다. 일 자체는 편하기 그지 없지만 출퇴근이 너무 힘들다. 남편 린은 이를 해결해 주기 위해 수를 쓴다. 회사의 부국장에게 부탁해 그의 동창생이 인사 책임자로 있는 회사에 아내를 소개 시키려고 계획이다. 그런데 린은 불안감을 참지 못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그는 다시 한 번 부탁하러 가면서 '코카콜라' 한 박스라는 웃지 못할 선물을 들고 가기도 한다. 


소설은 에피소드가 끊이지 않고 계속 되며 빠르게 전개 된다. 우리네 일상이 지리멸렬함 속에서도 끝없이 이어지는 사건 사고들의 연속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순간 순간 다가오는 소소한 문제들을 생각하고 처리하다 보면, 미래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과거는 이상(理想)만이 판치는 비현실적인 세계일 뿐이다. 현재는 오직 생존만이 있을 뿐이다. 살아가기 위해 뭐든 해야 하지 않는가?


모든 것에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 도리어 참을 수 없는 것은 '두부가 상하는 것' 같은 일상의 소소한 일들이다. 과거에는 처자식에게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을 농민의식이라고 비판했지만, 사실 처자식을 돌보지 않으면 누구를 돌보겠는가? 그리고 처자식에게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해주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누가 날마다 따뜻한 잠자리를 보장할 수 있겠는가? 아내와 아이에게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과거에는 웅대한 이상을 품어도 양해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유치하고 성숙하지 않아, 사물의 발전 법칙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그렇지만 사람이 어떻게 살기 위해 먹기만 하겠는가. 먹기 위해 사는 때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쇼핑도 하고 소풍도 즐기며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어떻게 매번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과정은 어떻든 간에 결과가 좋으면 되는 거라는 생각만 하며 살아 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소설 속에서 이런 생각은 현실의 장벽 앞에 슬며시 사라지고 만다. 


어느 날 린의 집에 손님이 찾아온다. 그는 린의 은사로서 린에게 매우 잘 대해주던 분이셨다. 그런데 린에게는 선생님을 모실 돈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선생님은 물이나 얻어 마시고, 오히려 참기름 두 통을 린에게 선물로 준 뒤 나가야 했다. 또한 그들에게는 가정부가 하나 있었는데, 돈을 아끼는 방편으로 쫓아내기도 하였다. 


어느 날 갑자기 리의 출퇴근 문제가 해결되었다. 회사에서 통근 버스를 리의 집 근처까지 배정해준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이유가 리에 있지 않았고 사장 처제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리는 기분이 좋지 않았고 모욕을 받은 느낌까지 들었다. 결국 자존심이 밥 먹여주지는 않는 다는 자기 합리화로 어물쩡 넘어가고 만다. 


이어서 비슷한 느낌의 일이 터진다. 딸 아이가 A 회사에서 운영하는 좋은 유아원에 가길 원하는데, 그곳은 가기가 너무나 힘든 곳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사회적 급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포기하고 있던 찰나, 앞집에서 손을 써주어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앞집 아이가 잘 울어서 적응하지 못할까 봐 린과 리의 아이를 짝지어서 들여보낸 것이었다. 결국 이 또한 자존심이 밥 먹여주지는 않는 다는 자기 합리화, 좋은 게 좋은 거다 라는 생각으로 넘어가고 만다. 


"사실 세상일이란 게 참 간단한 거야. 하나의 이치를 깨닫고 그 이치에 따르면, 삶이 흐르는 물처럼 순탄하거든.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면 아주 편해. 세상이 편해지면 지구도 그에 따라 추웠다 더웠다 하는 거라고." (본문 중에서)


살아가기 위해 눈물 젖은 빵을 먹고 자존심을 버리고 꿈도 꾸지 않는 이들을 비웃을 사람을 없다. 그들을 나무라거나 손가락질 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한테도 있지 않다. 하지만 스스로에게는 그럴 권리도 있고 나아가 의무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조금 꺼려지는 이유는, 생존과 이상(꿈) 사이에서 고민하게 될 때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눈에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마도 생존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나 하나는 괜찮지만 최소한 나의 가족에게는 따뜻한 밥 한 끼와 따뜻한 잠자리를 주어야 하기에. 소설 제목처럼 닭을 잡은 뒤에 피와 털이 난무하는 비참한 현실이나 허섭쓰레기 같은 일상이 내 삶을 온전히 지배하게 된다고 해도 말이다. 


이상을 선택한 사람들은 정녕 '대단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위대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들은 현실의 토대 위에서 이상을 추구하는, 범인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은 분명 대단하다. 하지만 현실에 두 발을 붙이고 이상까지 떠 받들며 살아가는 이들은? 이들이야말로 위대한 이들이 아닐까?


퇴근길 버스 안에서 집에 쌓아둔 배추더미를 널어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하루 종일 그를 상심하게 했던 선생님의 일은 기억 저편으로 묻히고 말았다. 죽은 사람은 이미 죽었으니, 더 생각해봐야 소용이 없다! 살아 있는 사람은 역시 배추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는 또 생각했다. 배추를 다 정리하면 아내가 전자레인지로 닭을 구워줄 것이고 맥주를 내줄 것이다. 그것으로 그는 아무 불만이 없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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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더 볼>


<더 볼> ⓒ황소자리

20여 년 전 어릴 때 작성했던 일기를 들춰보고 있노라면, 참 다양한 놀이를 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금에야 놀이가 대부분 컴퓨터를 이용해 온라인에서 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당시는 몸을 이용해 오프라인에서 해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소꿉놀이, 인형놀이, 블루마블, 체스, 오목 등의 실내 놀이에서부터 술래잡기, 숨바꼭질, 달리기, 팽이치기 등의 실외놀이까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왜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마냥 재미있어서라고 할까?

 

그 중에서도 나는 공으로 하는 놀이가 가장 재미있었다. 수많은 공놀이가 있지만,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건 농구, 축구, 야구(발야구도), 피구. 그리고 테니스공을 이용한 캐치볼 정도. 동그란 공을 쫓아 이리저리 달리다 보면 하루해가 다 가곤 했다. 역시나 왜 했는지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공을 치고 던지고 상대방에게서 빼앗고 상대방의 골에 넣는 행위가 재밌었던 것 같다. 아니, 마냥 재밌는 것만은 아니었다.

 

어떤 공놀이를 하던지 간에, 경쟁이 뒤따랐기에 가슴 뛰는 긴장과 희열, 쾌감이 함께 했다. 내 것을 지키고, 상대방의 것을 빼앗아야만 하는 경쟁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완전히 깨닫게 된 순간부터 공놀이는 다르게 다가왔고, 더 이상 놀이의 개념이 아닌 게 되어버렸다.

 

인류는 왜 놀이를 하게 된 것일까?


그럼에도 공놀이는 끝없이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남들이 공놀이를 하는 것을 돈을 내면서까지 보고, 응원하고, 열광한다. 그러다보면 또 직접 하고 싶어진다. 자연스레 이기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공놀이에 이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인류학 박사가 쓴 <더 볼>(황소자리)은 인류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 분명한 이 궁금증을 풀어헤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내가 가졌던 공놀이에 대한 궁금증 해소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저자는 공놀이는 왜 하는가라는 사소하지만 심오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탐험을 시작한다. 인류학 박사 출신인 만큼 공놀이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를 접목시키려 한다. 먼저 놀이에 집중한다. 우리는 모두 놀이를 하며 모든 시대와 모든 문화권의 사람들이 놀이를 해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놀이가 창조성과 혁신의 핵심이자 우리가 느끼는 최상의 환희와 쾌락의 원천이며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란다. 너무 추상적이다. 저자는 돌고래를 연구하는 심리학자를 찾아가 자세한 얘기를 듣는다.

 

그에 따르면 놀이는 생명력을 소모하고 쓸데없이 부상을 당할 염려가 있는 행동이지만, 결코 무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비롯한 포유류의 인지 발달과 적응에 있어 중대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한다. 놀이는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럿이서 하는 습성이 있는데, 이는 고도의 사회적 협동 능력을 요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적응과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 다음으로 놀이를 좋아하는 돌고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도 충분히 통용될 수 있겠다.

 

그리고 보니 취미가 특기가 되고 특기가 직업으로 이어지며 직업이 살아가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모습을 자주 보곤 한다. 특수한 직업일수록 그럴 가능성이 커진다고 하겠다. 여기서 취미는 놀이로 치환이 가능하지 않을까? 더 와 닿는 예를 들어 보자면, 대부분의 스포츠 선수들이 어릴 때 취미로 해당 놀이를 자주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왜 공놀이를 하게 되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저자는 탐험을 계속한다.

 

인류는 왜 공놀이를 하게 된 것일까?


주인공은 계속해서 돌고래이다. 아무런 도구 없이 마냥 돌아다니기만 하던 돌고래들이 공을 보자 그 중심으로 모두 모여든다. 공에겐 어떤 특징이 있을까. 저자는 공이야말로 가장 생기 넘치는 무정물 중 하나일 것이며, 동역학적으로 흥미롭다는 특징이 있다고 말한다. 즉 공은 튀어 오르고, 구르고, 비교적 쉽게 다양한 속도로 치거나 던지거나 잡을 수 있는 물체로, 공기역학적이면서도 어느 방향으로 나갈지 예측 불가하다는 것이다. 또한 공은 사회적 도구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인간의 경우, 시대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공을 만들고 사용했다. 주로 동물 가죽, 동물 자체를 이용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런 공을 이용한 놀이는 아주 자주 행해졌다. 옛날 인류의 조상들은 여가 생활 없이 밤낮으로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해왔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충분한 여가 생활을 즐겼다. 하지만 그 여가 생활이라는 것이 몸을 이용한 놀이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생존에 필요한 신체적 기민성과 인지력, 시공간 파악능력이 길러졌다고 한다.

 

요즘 들어 그런 말들이 공공연히 돌지 않는가? 요즘 애들은 집 안에만 처박혀서 컴퓨터나 하느냐고 오히려 옛날 애들보다 몸이 많이 약하다고. 옛날에는 뭘 하든지 몸을 이용해야 했고 놀려고 해도 밖에서 뛰어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그렇다면 그 옛날 인류의 조상들 시절에는 오죽했으랴. 사실 놀이가 지금처럼 천대받고 하찮은 취급을 받은 적도 없을 것이다.

 

저자는 던지는 행위에 주목한다. 이번엔 진화생물학자의 연구를 가져왔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직립보행을 하게 되면서 한 손으로 힘껏 무엇을 던지는 행위가 가능해졌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에너지 소모를 줄이며 비교적 안전하게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고 또한 생존에서도 유리할 수 있었다. 이 행위는 좌뇌가 맡는데, 좌뇌는 언어나 도구 사용에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 공놀이의 한 축을 담당하는 던지기는 도구의 발명, 가공기술 향상, 불의 발견과 같은 행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즉 인류 진화에 말이다.

 

공놀이에는 몸과 마음을 자극하고 단련시키며 감각을 예리하게 단련해 인간 정신을 고양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공으로 하는 스포츠의 원류를 찾아서


저자는 이어 공으로 하는 유명한 스포츠의 원류를 찾아 나선다. 축구, 테니스, 울라마, 라크로스, 야구, 미식축구, 농구. 이 중에서 울라마와 라크로스는 고대 아메리카 대륙에서 행해졌던 공놀이의 일종이라고 한다. 울라마의 경우 부족의 전통 놀이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고, 라크로스는 세계선수권 대회까지 존재할 정도로 큰 스포츠가 되어 있다. 이 두 개는 이정도로 넘어가고자 한다.

 

축구와 테니스의 시작은 너무나도 달랐다. 저자에 따르면, 축구는 고대 스코틀랜드 오크니 제도의 커크월에서 행해진 라고 불리는 공놀이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오래 전 이곳은 어떤 폭군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한 젊은이가 그의 머리를 베어 가져왔다. 마을에 거의 다다랐는데, 탈진하고 말아서 힘껏 머리를 차서 마을로 보냈다. 이 모습에 분통이 터진 마을 군중들이 잘린 머리를 발로 차며 거리를 누볐다. 이것이 축구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테니스의 경우, 열린 들판과 중세 마을의 좁은 샛길에서 평민들이 하던 축구와 달리 중세 수도원의 회랑 안에서 시작되었다. , 중세 사회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했던 가톨릭교회의 귀족과도 같은 수도사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훗날 왕들의 스포츠혹은 귀족 스포츠로 불리는 테니스의 기원으로 알맞아 보인다.

 

야구는 그 기원이 영국에 있음이 분명하다. 영국 아이들의 모래밭 놀이들로부터. 또한 영국의 국기인 크리켓은 야구의 사촌뻘 되는 스포츠이다. 하지만 세계의 다양한 문화권에서 야구의 본산지임을 주장하곤 한다. 미국을 필두로, 폴란드, 루마니아, 덴마크, 리비아 등이다. 이 중 미국에서 야구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미국은 구세계(영국)이 물려준 것이 아닌 자신의 경기가 필요했다. , 야구가 필요했고 그것을 탄생시켰다.

 

미국 그 자체라고 불리는 미식축구는 다른 스포츠보다 훨씬 역사가 짧다. 남북전쟁 후 젊은 참전용사들이 운동 경기에 대한 새로운 열정을 대학 캠퍼스로 몰고 왔고, 야구와 미식축구 시합 등이 행해졌다. 한편 영국에서 어느 규정에 따라 축구를 할 것인지 논쟁이 불붙었다. 잡고 달리느냐 아니면 드리블하며 차느냐. 이 교착상태에서 미식축구(football)와 축구(soccer)로 나뉘었다. 하지만 미식축구는 미국인들만 사랑할 뿐이지 다른 모두는 열렬히 혐오하는 경기로 떠오르게 되었다.

 

농구는 19세기 말에 미국에서 어느 체육교사에 의해 발명되었다. 경쟁적이면서도 실내에서 할 수 있어야 하고, 기술과 스포츠맨십을 요하며 전신운동 효과를 제공하면서도 극도로 거칠지 않고 인체 또는 장비에 손상을 입히지 않는 경기! 치밀하고도 집요하게 공을 사용하는 각종 스포츠를 분해하고 조사해서 발명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공놀이를 하는 진짜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공놀이를 행하는 이유는 주지했듯이 재미이다. 솔직히 이 책에 나온 온갖 과학적, 역사적, 인류학적 이유로는 완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어느 누가 그런 생각(심신 수련, 정신 고양 등)을 하며 공놀이를 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놀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를 깨달았는지, 저자도 에필로그를 통해 공놀이의 진짜 본질에 대해 언급한다. 먼저 아들을 통해. 저자의 왜 공놀이를 하냐?”의 물음에 한마디로, 재미있으니까.”라고 대답한다. 다음으로는 에콰도르 정글에 찾아가 알게 된 원주민 아이에게서. 그는 축구공의 어떤 점에 그토록 빠졌는지 묻는 말에, 직접 동작을 취하며 축구의 재미를 열정적으로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저자 또한 말한다. “그래도 괜찮을 거였다. 재미있을 거였다.”

 

허무한 결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평소 궁금해 마지않았던 놀이의 이유를 찾아 헤맸지만, 결론은 재미인 것이다. 그렇다. 놀이는 놀이이다. 놀이를 통해 무수히 많은 걸 하게 되었고, 할 수 있지만 그걸로 된 것이다. 놀이가 더 이상 백해무익하고 해로운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공과 공놀이를 통한 인류학적 탐험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현상을 보는 눈은 변했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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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아버지에게 있어서 음식이란]"그래, 밥은 먹었니?" 
"그래, 밥 먹어야지?"

ⓒ국제신문 DB

아버지의 인사말이자 딱히 할 말이 없을 때 하시는 말씀이다.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밥을 먹었어도, 조금 후 아버지가 식사를 하실 때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내가 밥을 먹었다는 걸 잊어버리신 건지. 아침에 일어나서 아버지가 언제나 하는 말이었다. 잠보다 밥이 우선인 건지.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언제나 하는 말이었다. 일의 피로를 밥으로 풀으라는 듯이.

군대에 있을 때, 대학교 기숙사에 있을 때, 해외에 거주했을 때 아버지께 전화를 걸면 언제나 하는 말이었다. 정말로 하실 말씀이 그것뿐이라는 듯이. 한때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듣기 싫은 말이었고, 급기야는 대꾸도 안 하게 되었다. 아버지와의 대화 단절은 어이없게도 이렇게 시작되었나 보다.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아버지에게 밥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리 살기 위해 밥을 먹고 밥을 먹기 위해 산다지만 대관절 밥이 얼마나 좋기에, 얼마나 중요하기에.

아버지 고향은 강원도 평창 인근 두메산골이다. 58년생이시기에, 60년대까지(그 이후에도 계속되었을 것이다) 존재했던 보릿고개를 어린 시절에 감당해야 했다. 형제들만 10명 가까이되는 대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생존을 위한 경쟁을 해야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서열이 중간 정도라서 위아래로 치였다. 어릴 때부터 자기 앞가림을 해야 했다. 나이가 많거나 나이가 적으면 더 챙겨주지만, 중간은 이도저도 아니지 않은가. 굶어죽을 정도는 아니었을망정, 항상 굶주림에 치를 떨었다. 그 시대에 안 그런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마는, 아버지는 밥에 대한 사랑이 유별난 데가 있다.

어렸을 적 아버지가 밥상머리에서 하셨던 일장연설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건 내 인생에서 하나의 신조가 되어버렸다. 신조라기보다는 강박관념이라고 해야 할까. 절대 밥을 남기지 말라고. 특히 쌀 '한 톨'도 남겨서는 안 된다고. 농부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는 쌀. 쌀에 농부의 피와 땀만 서려 있는 건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다. 

왜 물고기를 먹을 때 어부의 피와 땀은 거론하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흰 쌀밥이 아버지의 어린 시절 제삿날이나 명절에나 맛볼 수 있었던 거라는 사실을 듣고는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쌀 한 톨의 충격 아닌 충격은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 충격은 고스란히 습관으로 이어졌고 난 밥 안 남기기로 유명해졌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잘 먹기로도 유명해졌다.

사실 아버지도 먹는 걸 참 좋아하신다. 가끔 좀 과하다 싶을 만큼 말이다. 어릴 때 먹지 잘 먹지 못했던 한(恨)을 풀듯 거하게 드실 때는 두려움과 경외감마저 인다. 하지만 먹는 걸 좋아하시는 이유가 그것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어릴 땐 단지 없어서 못 먹었을 뿐이다.

아버지의 20대 시절 사진만 봐도 참으로 말랐다. 키가 175cm인데 몸무게는 60kg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런데 나이가 먹으면서 일이 조금씩 풀리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살이 찌기 시작하셨다. 한때 80kg을 넘었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70kg 정도의 적당한 체력을 유지하고 계신다. 이런 체력을 유지할 수 있는 건 꾸준한 운동때문이기도 하지만 편식없이, 불평불만없이, 이 세상에 맛없는 음식이 없듯 음식을 즐기는 아버지의 천성때문인 것 같다.

아버지에게 흰 쌀밥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매개체이지만 꿈에 그리던 음식이었고, 감자나 옥수수 그리고 꽁보리밥 등은 꼴도 보기 싫은 음식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감자는 지겹다고 잘 드시지 않는다. 당수치를 엄청나게 올려주는 흰 쌀밥을 많이 못 드셔서 이리도 건강하신 건지? 농담으로 웃어넘기기엔 너무나 슬픈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결코 미식가가 아니다. 그렇다고 식도락가도 아니다. 대식가라고나 할까?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대식가이자 미식가라 할 수 있는 소설가 고골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차라리 도스토예프스키의 소박한 식성에 가깝다. 양의 소박함이 아닌, 질의 소박함. 아버지의 식성은 어린 시절의 아픔에서 기인하지 않지만, 외형적으로는 기인한 듯 보인다. 아버지의 식성에서 화려함을 찾아볼 수 없다는 말이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아버지는 '맛'을 느낄 수 없으신 게 아닌가 싶다. 느낄 여유가 없이 살아오신 것이다. 정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도스토예프스키가 미식을 사치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기 위해 음식을 섭취하게 되었듯이. 아버지는 '맛있는' 음식을 드시는 게 아니라, 음식을 '맛있게' 드시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의 아픔에 기인한 절제, 맛의 대해 차등을 부여하려는 욕망을 절제한 것이다. 아버지의 음식론에서 아버지의 인생이 고스란히 보인다.

아버지에게도 분명 꿈이 있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공부를 곧잘 하셨다던 아버지, 기억력과 암기력이 뛰어나신 아버지, 손재주가 있어서 못 고치는 게 없는 아버지, 운동도 잘 하시고 체력도 좋으신 아버지. 아버지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지금 꿈꾸고 계신 건 무엇일까. 아버지는 생존을 위해 어린 시절 지겨운 음식들을 먹었듯이, 생존을 위해 수많은 일들을 해오셨다. 그게 아버지의 마음에 들든 마음에 들지 않든 상관없었다. 

아니, 상관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50대 중반이 넘으신 아버지. 아버지에게도 진정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실 테고, 꼭 찾으시길 빈다. 도와드릴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삶의 여유가 생길 테니, 아버지가 그리 좋아하시는 음식에도 호불호가 갈리길 바란다. 이왕이면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드시는 게 좋을 것 같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아버지의 인사말의 의미를. 아버지에게 밥을 먹는다는 건,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방법이었다. "밥 먹었니?"는 "잘 지내고 있니?", "고생많았구나" 하고 다정하게 물어오는 말이었다. 그리고 나의 존재를 끊임없이 묻고 걱정하고 배려하려는 이유에서였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같이, 식사 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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