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바링허우,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자본주의를 살아가다>


<바링허우,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자본주의를 살아가다> 표지 ⓒ미래의창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세대를 규정짓는 움직임이 있다. 우리나라는 '58년 개띠' '386 세대'를 지나 '88만원 세대'와 'N포 세대'에 이르렀다. 일본도 마찬가지, '단카이 세대'를 지나 '사토리 세대'가 있다. 이에 비해 중국은 생소할 수 있다. 중국은 '링허우'라는 말로 50년대부터 최근 90년대까지 10년 단위로 세대를 구분한다. 


그중에서도 중국의 80년대생을 일컫는 '바링허우'는 특별한 함의를 지닌다. 1980년대 직전, 1978년 10월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을 상징하는 문화대혁명을 부정하고 중국 사회주의의 현대화와 개혁개방정책 노선을 결정한다. 중국사회는 완전한 전환기를 맞이한 것이다. 이후 1가구 1자녀 정책 아래 태어난 바링허우들은 '소황제'라 불리며, 나라와 가정의 전과 비교할 수 없는 풍요를 누리며 성장한다. 


한편으론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체제와 사회의 전면적 변화를 온몸으로 체험한다. 50년대 이래 수많은 변화들이 거대한 틀 안에서 행해진 것이었다면, 80년대의 변화는 세상을 뒤엎는 경천동지격의 변화였다. 단도직입적으로 그들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났지만 엄연히 자본주의를 살아간다. 하지만, 여전히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기에 그들은 때론 갈팡질팡하며 헤매고 때론 탄력적 선택을 행한다. 


1980년에 태어난 바링허우의 대표적 지식인 중 하나인 양칭샹이 그의 저서 <바링허우,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자본주의를 살아가다>(미래의창)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바링허우 세대의 현실이다. 그들은 대부분 실패의 연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고단하게 살아가는데, 저자는 그런 한 세대 전체의 실패를 결코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순 없다고 주장한다. 그건 사회의 문제라는 것이다. 


근본적인 변화 속 바링허우 세대


'슈퍼차이나' 시대가 도래한 지 이미 꽤 되었다. 2020년이면 세계 경제대국 1위에 오를 것이라는 전망 또한 이미 오래다. 엄청난 고속성장 시대가 지나고 성장 연착륙이 시작되었다지만 여전히 중국의 성장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가파르다. 중국은 연일 환호하고 전 세계는 중국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앞서 말했듯 그 엄청난 성장의 이면엔 근본부터 뒤바뀌는 변화가 있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한 가운데에 다름 아닌 바링허우가 있는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시대를 이끌고 시대를 주름잡는 이들이 있다. 극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이다. 저자가 바라보는 건 '소수'의 그들이 아니다. 소수라고 소외받는 이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이 책이 바라보려 하는 건 '다수'의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다. 변화한 시대를, 변화하고 있는 시대를, 결국 혼란스런 시대를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이다. 책의 본문은 굉장히 짧은 편인데, 저자는 인문학자답게 사회인문역사적 비평론을 내세워 바링허우 세대를 조명한다. 


우선 자신 또한 바링허우 세대라 규정하고 자신의 피폐하고 어려운 일상을 풀어낸다. 무슨 짓을 하던 절대 살 수 없는 집, 이건 절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과거로 시선을 돌려 바링허우 세대가 역사 허무주의에 빠졌다고 규정한다. 그들에게 역사는 무거운 게 아니라 가벼운 것이다. 


현재로 돌아와 바링허우 작가의 대표주자이자 중국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한한'을 주목한다. 그는 저항의 상징이기도 한데, 저자가 보기에 진정한 자아의식과 힘 있는 정치적 신조의 결핍 때문에 영혼을 뒤흔들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반면 바링허우 세대의 대부분은 '침묵'한다.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현실은 피폐하고, 쉼없는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고, 저항하지 못하고 침묵할 뿐이며, 역사 허무주의에 빠져 있는 바링허우 세대를 말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중국의 현재와 미래를 짊어져야 할 세대가 아닌가. 문제도 이런 문제가 없다. 저자의 주장을 들어보자. 


"개인의 실패감과 역사 허무주의, 거짓과 허장성세가 사회와 역사로부터의 일탈의 구실이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실패감을 초월하고 다시금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강의와 서술, 글쓰기로 그칠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이런 행위들을 현실적인 사회 실천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본문 137~138쪽 중에서)


굉장히 두루뭉술하고 추상적인 주장인듯, 정확히 핵심만 짚어 해야하는 것들을 말한듯, 모호한 결말이긴 하다. 내가 받아들이기엔 이렇다. 규정된 세대론에 갇히지 말고 직접 자신의 세대를 규정하라, 침묵하지 말고 저항하라,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옮겨라. 조금은 더 명확해지지 않았나 싶다. 


본문이 끝난 뒤 저자가 직접 바링허우 세대 5명과 각각 시행한 인터뷰가 실려 있다. 책 자체로 보면 다분히 끼워 맞춘 듯한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는데, 사실 본문보다 이 인터뷰들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는, 같은 듯 조금씩 다른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 같고 친구의 이야기 같고 우리의 이야기 같다. 


그들은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그들의 입을 빌려 말한다. 바링허우 세대에게는 진정한 청춘이 없고, 악세집단이며, 차별의 한 가운데 있으며, 희망이 없으며, 꿈을 꿀 수 없다고 말이다. 와중에 눈에 띄는 건, 잘 나가는 한 바링허우가 자신이 속한 세대가 그 어느 세대보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인터뷰였다. 


이것이 현실이다. 대다수가 실패했다고 느끼고 희망이 없다고 느끼는 현상, 세대와 세대가 쪼개지는 건 물론이거니와 세대 내에서도 쪼개지고 양극화되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될 것이다. 이미 여기까지 와버렸다. 어찌할 것인가? 돌고 돌아 저자의 주장이 허무하게만 들리고, 앞은 깜깜하다. 역설적으로, 어떻게든 나 혼자라도 잘 헤쳐나가야겠다는 생각만 더 굴뚝같아 진다. 암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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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살바도르 아옌데>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 ⓒ서해문집



20세기 초중반, 세계는 요동쳤다. 어느 나라는 역사적으로 다시 없을 전성기를 누렸고, 어느 나라는 역사적으로 다시 없을 악화일로를 걸었다. 누군가는 차후 100년을 이어질 권력과 부를 손에 쥐었고, 누군가는 차후 100년은 더 이어질 가난과 설움을 견뎌내야 했다. 특히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그 격차가 심했다. 그 중심엔 오랜 시간 계속된 외세의 침략과 그에 따른 혼란과 부침이 있었다. 


체 게바라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의 중심으로,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가 이룩한 혁명과 이른 죽음은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쿠바가 아닌 아르헨티나 출신의 중산층 출신으로 장차 의사가 되고자 했던 사람이다. 평범한 그가 여행을 하며 라틴 아메리카 민중의 참혹한 가난과 고통을 직시하고, 쿠바의 반정부 혁명군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혁명에 성공한 후 다른 나라의 혁명에 참가, 결국 전사하고 만다. 그는 혁명가였다. 


여기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인이 한 명 있다. 그는 칠레 명망가 출신으로 장차 의사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일자리가 없어 겨우 들어간 병원 주검 안치소에서 노동자들의 참혹한 민낯을 목격한다. 이후 군대, 감옥에서 경험한 것도 다를 바 없었다. 어딜 가든 노동자들의 신음 소리뿐이었다. 그는 노동자들을 위해 사회주의의 길로 간다. 제32대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다.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서해문집)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하지만 라틴 아메리카 (사회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살바도르 아옌데에 대해 최초로 소개하는 전기다.


살바도르 아옌데에 대한 모든 것


체 게바라를 말할 때 쿠바혁명과 죽음을 말하는 것처럼, 아옌데를 말할 때 반드시 말하는 것이 있다.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권을 세웠다는 점과 죽음이다. 그는 당연한 수순처럼 미국의 사주를 받은 군부의 쿠데타로 대통령 궁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2008년 세계를 강타한 금융 위기로 자본주의 체제가 흔들리고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좌파 돌풍이 불고 있는 이 시대에, 아옌데가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라 생각한다. 


1930년대 미국은 볼셰비즘을 막는다는 명분 하에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군부 독재를 지원한다. 그 와중에 1937년 아옌데는 사회당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 인생을 시작한다. 그의 나이 불과 30세였다. 15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51년 아옌데는 사회당과 공산당의 연대조직인 '인민전선'의 대선 후보로 첫 대선을 치른다. 결과는 5.6%, 참담한 실패에 가까운 수치였지만 그는 전국구가 되었다. 


이후 아옌데는 1954년에 상원 부의장에 당선되고, 1958년과 1964년에는 사회당과 공산당 등의 좌파 연합 연대조직인 '인민연합전선'을 대표해 대선주자로 나선다. 결과는 모두 실패였다. 더구나 1959년에 라틴 아메리카를 넘어 전 세계를 강타한 '쿠바혁명'으로 사회주의는 더할 수 없는 호황이었다. 하지만 그건 미국이라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결과를 나았고,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관심과 압력은 수위가 전에 없이 높아졌다. 칠레도 예외는 아니었다. 


책은 아옌데를 상당히 주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고 있지만, 옹호하는 느낌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아니, 그동안에는 아옌데의 생에 대해 제대로 된 책이 나온 적이 없으니 오히려 객관적이라고 봐야 하겠다. 이후에 나올 거라 기대되는 아옌데에 대한 책의 시선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아옌데는 4수 끝에 결국 대통령이 된다. '사회주의 혁명'이라 부를 만한 사건이었다. 사회당과 공산당, 급진당, 독립진보연합, 그리고 당시 여당이었던 기독민주당의 탈당파까지 모인 '인민연합'을 대표한 것이었다. 완벽한 승리라고 보기 힘들었거니와,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수없는 압력을 이겨내고 '칠레식 사회주의'를 앞세워 수많은 개혁을 추진해나간다. 그리고 역사적인 '구리 산업 국유화'를 일궈낸다. 지금까지도 칠레를 먹여 살리는 주요한 구리 산업 국유화이다. 이는 곧 그의 죽음과 다름 아니었다. 미국의 사주를 받은 군부의 그 유명한 피노체트 장군에 의해서 쿠데타가 일어나고, 그는 죽음을 맏이한다. 이후 피노체트에 의한 독재가 20년 가까이 지속된다. 


분명 성공했지만 처참히 실패도 했던 아옌데가 남긴 것은?


그는 절대적으로 폭력을 배재한 혁명을 원했다. 폭력으로 이뤄낸 정권은 허무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걸, 이전의 사회주의 정권과 공산주의자들의 분열로 무너진 모습에서 처절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폭력은 고스란히 민중들에게 돌아갈 것이 분명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폭력을 배재한 채 선거로 혁명을 이뤄냈고,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폭력 없이 이끌어 나갔다.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도 폭력이 들끓는 라틴 아메리카 한복판에서 말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그의 패착이었을까? 그의 뒤를 이은 이가 최악의 피의 통치를 했으니.


또한 그는 비폭력의 연장선상에서 좌우를 가리지 않은 통합을 원했다. 그래서 우파 정당의 협조를 원했고 내부의 반대를 무릎쓰고 끊임없이 협상했다. 문제는 오히려 내부에서 터졌는데, 우파 정당과의 연대가 거의 성공했음에도 내부의 반대로 무산되자 우파 정당의 좌익 세력이 떨어져 아옌데 쪽으로 왔고 그들의 목소리가 높아져 우파 정당과의 협력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이후 결국 우파 정당의 우익 목소리가 커졌고 의회 내에서의 세력 또한 커지며 좌파와의 균열이 확실해졌다. 결국 아옌데의 시도가 균열을 더 부추긴 꼴이 된 것일까? 


이처럼 아옌데의 이상적이리만치 온건적인 노선은 빛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깊은 상흔을 남겼다. 그럼에도 그를 칠레 역사상 최고의 위인으로 뽑고, 지금에 와서 또다시 주목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특히 그의 인생 역전, 곧 칠레의 현대사는 우리 나라 현대사와 많은 부분 겹친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나라를 쥐락펴락하며 대부분의 부를 소유하고 있고, 군부 쿠데타로 민주 정권이 무너진 경험이 있다. 또한 아옌데를 '좌파 악마'로 만드는 등 평생 괴롭혔던 보수 언론의 극악무도한 행태도 존재한다. 지금은? 지금도 물론 이 모든 게 존재하고 계속 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될 거라 생각한다. 


그는 분명 성공했지만 처참히 실패했다. 이상을 실현했지만 그 뒤에 따라온 건 더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이상을 실현하지도 못하고 더 없는 고통만 받은 것도 부지기수다. 그래서 그를 성공과 실패로 재단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다만 우리는 그에게서 분명한 메시지를 얻을 수 있고 얻어야 한다. 


그의 이상을 실현시킨 가장 대표적인 사례인 '선거를 통한 평화적인 혁명' 말이다. 시작도 하지 못한 혁명의 뒷 이야기를 논하고 걱정하며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것인지를 논하기 전에 시작부터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선 아옌데가 전하는 메시지를 분명히 들어야 한다. 그의 삶 자체가 메시지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를 반면교사 삼아 평화적인 혁명과 그 후의 민주주의의 지속을 논해야 하겠다. 


한 사람의 인생은 곧 한 나라, 그 역사를 대변하기도 한다. 아옌데도 그 대표적 예라 하겠다. 하지만 그 (비)극적이고 미스터리한 죽음으로 삶은 많이 가려져 있었다. 이 책 덕분에 어느 정도나마 장막을 거두고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걸 배제한 채 한 인물의 일생을 올곶이 들여다보는 건 참 지난한 일인데, 그걸 간결하고 시원시원하게 해준 것 같다. 이 책은 매력적이고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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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러시아가 낳은 인류 최고의 문학 거장 '표도르 미할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그가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가장 깊숙한 곳을 꿰뚫어보는 통찰에 있다 하겠다. 누구보다도 인간에 대해 잘 알았던, 휴머니티(humanity)의 극(極)에 다다른 작가였다. 


그런데 그가 이토록 인간을 잘 알았던 이유가 있었다. 그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며 아버지마저 그 폭력성 때문에 살해당하는 비극을 맛보았다. 그리하여 어릴 때부터 밑바닥 생활을 하였는데, 그런 경험이 그의 소설의 기본을 이룬다. 그리고 겪게 되는 특별한 경험. 이 경험이 100%를 차지하진 않더라도 이후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건 분명하다. 그는 사형을 언도받아 사형 직전에 기적적으로 풀려났었던 것이다. 



바실리 페로프가 그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초상화. 1872년작.



급진적 정치 모임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에 태어나 1846년 25세의 어린 나이에 <가난한 사람들>로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한다. 그때까지 그의 생활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나오는 <백야>, <문신> 등은 혹평을 면치 못하고, 그는 정치적 외도를 한다. 


때는 19세기, 세상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세계적으로 봉건주의는 빠르게 타파되고 있었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봉건주의 사회였다. 자연스레 급직전인 세력들이 등장했고,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는 급진적이고 공상적인 사회주의의 선봉격이었다. 그의 이념은 젊은 지식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급기야 정치 모임으로 확대되었다. 젋은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모임에 참가하기에 이른다. 


당시 러시아 차르(황제) 니콜라이 1세는 첩자를 보내 이 모임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1849년 4월 15일 도스토예프스키가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던 것이다. 이 편지는 왕정을 신봉했던 고골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읽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었다. 결국 첩자의 밀고로 8일 후인 4월 23일 도스토예프스키는 모임 회원들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감옥에 갇혀 8개월을 보냈고, 그 사이 2개월여 동안 진행된 군사재판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군사재판에서 군사법원은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린다. 


"퇴역 육군 중위 도스토예프스키는 범죄 음모에 가담하여, 정교회와 최고 권력을 거스르는 불온한 표현들로 가득 한 벨린스키의 편지를 유포시켰으며 다른 용의자들과 함께 사설 인쇄소를 통해 정부에 반대하는 문서를 보급했으므로 모든 권리를 박탈함과 동시에 8년간의 요새 유형에 처한다."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여기에 "4년 간의 징역 이후 사병 복무"를 추가했다. 하지만 황제는 예정에 없던 명령을 내린다.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이었다. 사실 황제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사형을 선고한 후 사형 직전에 황제의 특별 사면을 통해 집행 유예로 풀어주게 하여, 자신의 위신을 높이고 그들에게 확실한 경고를 할 요량이었던 것이다. 사형 집행에 관련된 모든 사항을 극비에 부치고 황제가 세부사항까지 직접 관여하였다. 


죽음을 맛보고 돌아오다


1849년 12월 22일, 세묘노프스키 연병장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포함한 페트라셰프스키 모임의 회원 20명의 사형 집행이 거행된다. 영하 20도(50도라는 설도 있음)의 극한 추위 속에서 단두대 위의 말뚝에 두 손이 묶이게 되고, 곧 이어 집행관이 선고문을 읽는다. 그리고 총을 겨누어지고 발사되기 직전! 사형 집행 정지 휘슬이 울린다. 광장 저쪽 끝에서 말을 한 황제의 특사가 흰 손수건을 흔들며 달려왔던 것이다. 사형이 중지되고 대신 시베리아 유형으로 감형되었다. 이로 인해 몇몇 사람은 백발이 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세묘노프스키 연병장에서 연출된 사형집행극 장면Ⓒhttp://ch.yes24.com/Article/View/19364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때의 심정을 다양한 방편으로 표출하고 있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20년 후인 1869년에 나온 <백치>에서 그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조금 길지만 그대로 옮겨본다.

('열린책들' <백치>(상) 96~98쪽)


"그 사람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사형대 위로 끌려가서 정치범으로 총살형을 받는다는 선고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20분쯤 후에 사면령이 내려져 그보다 감형된 형량을 선고받게 되었지요. 그러나 그 사람은 이 두 개의 선고 사이에, 즉 20분 아니면 적어도 15분 동안 '나는 몇 분 후면 죽을 것이다'라는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에 사로잡혀 있었던 거지요. 그가 가끔 가다 그 당시의 인상을 떠올리곤 했는데 그 얘기를 난 무척이나 듣고 싶었어요. 그래서 나는 몇 번씩 그에게 꼬치꼬치 되묻곤 했어요. 그는 마치 어제 일처럼 모든 걸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몇 분 동안의 어느 한 순간도 결코 잊을 수가 없다고 했어요. 세 개의 기둥이 구경꾼들과 병사들 곁에 있는 처형대에서 스무 발자국쯤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죄수들이 여러명 되어서였지요. 처음엔 세 명의 죄수를 그 기둥으로 끌고 가서 거기다 묶었습니다. 그리고 옷자락이 긴 흰 가운 같은 사형복을 입히고, 총이 보이지 않도록 흰 벙거지를 눈 위까지 눌러씌웠지요. 그러고 나서 각 기둥의 정면에 서너 명의 병사가 한 조를 이루어 정렬을 했습니다. 내가 아는 그 죄수는 앞에서 여덟 번째로 서 있었고, 세 번째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신부가 십자가를 들고 모든 죄수들 앞을 돌아다녔습니다. 그에게 목숨이 붙어 있을 시간은 5분 정도밖에 없었던 거지요. 이 5분이 그에게 있어서는 무한대의 시간이고 엄청난 재산처럼 여겨졌다고 그는 술회했어요. 그는 이 5분 동안 많은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게 마지막 순간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남아 있는 5분 동안에 해야 될 일들을 정리했던 거지요. 


우선 동료들과의 작별에 2분을 할당하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을 성찰해 보는 데 2분,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마지막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데 할당했습니다. 그는 이 세 가지 결정을 시간에 맞춰 그대로 실행에 옮겼던 일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는 스물일곱 살이란 건강하고 혈기 왕성한 나이에 죽어 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는 동료들과 작별을 고하며 그 중 한 사람에게 아주 엉뚱한 질문을 던지고 어떤 대답이 나올까 매우 궁금해 하기까지 했다고 말했습니다. 동료들과 작별을 고한 뒤,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는 2분이 찾아왔지요. 그는 이미 자신이 무엇을 생각할 지 알고 있었답니다. 그는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선명하게 그려 보고 싶었던 겁니다. 나는 지금 존재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3분 후면 무언가 다른 존재로 변할 것이다. 그 존재가 생명체인지 비생명체인지는 모른다. 생명체라면 도대체 어떤 존재가 될까? 그리고 어디에서 살게 될까? 그는 이 모든 것을 2분 동안에 다 생각해 보려 했던 것입니다! 


멀지 않은 곳에 교회가 있었고, 그 교회의 황금빛 용마루는 태양빛에 이글거렸습니다. 그는 눈부시게 이글거리는 그 교회 꼭대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빛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지요. 그는 '저 빛이야말로 나의 새로운 자연이다. 3분 후에 나는 저 빛과 융합될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것에 대한 혐오감과 불투명성은 실로 무섭기 짝이 없었던 게지요. 그렇지만 이 순간 그에게 가장 괴로웠던 것은 '만약에 이대로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나?'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내가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생명을 다시 찾는다면, 그것이 영원이 아닐까! 그럼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다! 그때 나는 매 순간을 1세기로 연장시켜 아무것도 잃지 않고, 1분 1초라도 정확히 계산해 두어 결코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리라!' 결국 그의 이러한 상념은 독한 마음으로 변하여, 차라리 한순간이라도 빨리 총살을 시켜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겨났다고 술회했습니다."



과거 세묘노프스키 연병장이었던 피오네르스까야 광장Ⓒhttp://ch.yes24.com/Article/View/19364



생의 마지막 5분.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5분 동안 수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이야말로 진정 '살고 있구나' 하는 기분을 느끼기도 하였다. 죽음이 코 앞에 다가온 극한의 순간에, 생(生)으로의 감각이 극한으로 끌어올려졌던 것이다. 너무나도 소중한 1분 1초. 만약에 살게 된다면 매 순간을 100년처럼 생각하고 결코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독한 마음의 발로. 그는 기적적으로 삶을 되찾고 그때의 마음가짐을 실제로 옮긴다. 그리고 이후 그의 모토는 "삶은 그 자체로 기쁨"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의 소설에서는 매순간을 감사하게 살아가며 기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모토를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곤 한다. 


마지막으로 '슈테판 츠바이크'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서 "죽음에서 건져올린 삶"의 한 부분을 옮겨 본다. 조금 더 시적이고 극적인 표현으로 당시 죽음을 목격하고 살아난 도스토예프스키의 심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아까의 그 황금빛 교회 지붕을 본다. 그것은 이제 떠오르는 아침의 붉은 빛 속에 신비롭게 불타고 있다.

 

성숙한 장미 같은 아침빛이 경건한 기도로 감싸듯 그 지붕을 감싸고 반짝이는 기둥머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손으로 성스러운 칼을 가리킨다. 높이 기쁨으로 붉게 물든 구름의 가장자리까지. 그리고 거기서 아침 광채 속으로 소리내며 신의 교회는 교회를 넘어 자란다.

 

빛의 흐름 하나가 빛나는 파도를 종소리 울리는 하늘로 던져 올린다.


(중략)


신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심판하지 않으신다. 무한한 동정심이 영원한 빛으로 신의 회당을 불태운다. 묵시록의 기사들이 흩어져 나간다. 죽음 속에서 삶을 겪은 자에게 고통은 기쁨이 되고 행복은 괴로움이 된다. 벌써 불 붙은 천사 하나가 땅바닥에서 일어서서 고통 속에서 태어나는 성스러운 사랑의 빛으로 깊고도 빛나는 모습으로 그의 두려워하는 가슴 속으로 밀려들어온다. 


그러자 그는 쓰러지듯 무릎꿇는다. 갑자기 그는 진정으로 무한한 고통 속에 있는 세상 전체를 느낀다. 그의 몸이 떨린다. 하얀 거품이 그의 이 사이로 뿜어 나오고 경련이 그의 모습을 일그러뜨린다. 그러나 눈물이 행복하게 그의 죽음의 복장을 적신다. 비로소 그의 가슴은 삶의 달콤함을 느낀다. 그의 혼은 고문과 상처를 향해 타오르고, 이제 분명하게 느껴진다. 이 1초 동안 그는 천 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서 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저 불타오르는 죽음의 키스를 받은 뒤로 그분처럼 자신도 오직 고통으로 인해 삶을 사랑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이제 분명히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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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나간 책 다시 읽기]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민음사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계속해서 진화 또는 변화해왔다. 인격화된 동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교훈을 주기 때문에 이솝이야기처럼 '우화'로 읽히며 어린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로 읽혔고, 누가 보더라도 정치적 현실과 세상에 대한 비판적 또는 조소적인 이야기였기에 '풍자' 소설로 읽혔다. 


여기서 정치적 현실이라 함은 <동물농장>이 출판되었을 1945년 당시의 현실이라 하겠다. 그 중에서도 꼭 집어 말하자면 러시아의 스탈린 독재의 전체주의에 대한 통렬한 풍자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은 여기서 진화한다. 말하자면 재조명된 셈인데, 조지 오웰이 우크라이나 서문에서 밝혔듯이 "비록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러시아 혁명의 실제 역사에서 따온 것이지만" 단순히 당시의 정치적 현실 

풍자를 넘어 '독재 일반'에 대한 풍자로 해석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그게 아니라면 러시아 전체주의의 망령이 사라진 지 오래인 지금까지도 <동물농장>이 사랑받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즉, <동물농장>은 당대 정치적 현실을 풍자함과 동시에, 인간 세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존재할 '독재 일반' 즉 권력으로의 욕망을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동물농장>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앞서 밝혔듯이 <동물농장>은 동물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우화의 성격상, 어릴 때부터 자주 접하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많이 읽혔을 것이다. 사실 이 소설은 당시 서방 국가와 소련과의 우호적인 관계 때문에, 출간되기까지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영국에서 네 군데, 미국에서 열 군데가 넘는 출판사로부터 퇴짜를 맞았다고 하니 누가 보아도 러시아, 그 중에서도 스탈린 독재 체제를 비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던 중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며 사실상 세계 2차 대전이 종결된다. 이미 그 전에 유럽전선은 4월 30일에는 히틀러가 자살함으로써 사실상 종결된 바 있다. <동물농장>은 공교롭게도 1945년 8월 17일에 출간된다. 이후 그 어느 나라보다도 빨리 한국에 번역 출판되는데, 이는 냉전시대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남한에 확실한 반공 사상을 심어주기 위해 미군정에 의해서 실현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조지 오웰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는 전혀 반공주의자, 반사회주의자가 아니었고 오히려 어느 누구보다도 사회주의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회주의 운동의 부활을 원한다면 소비에트 신화는 반드시 파괴해야 한다는 확신" 하에 <동물농장>을 썼던 것이다. 즉 그는 '사회주의자'였지만, "소련이 진정한 사회주의라고 부를 만한 쪽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확고한 계급 사회로 변모해 간다며 소련의 신화를 폭로하고자 이 소설을 썼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 반공 소설의 대표격으로 많이 읽혔던 것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조지 오웰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다(혹은 알면서도 이 소설이 갖는 교훈적 내용과 영향력을 이용하려고). 하지만 지금은 많은 시간이 흘렀고, <동물농장>을 다시금 읽으면서 작가의 의도에 더 가깝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 그것이 이 소설을 다시 읽어야 할 이유이며, 너무나 다른 의도로 이용 당해왔던 이 소설에 새로운 생명력을 주는 방법일 것이다.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다시 살펴보는 <동물농장>


<동물농장>이야말로 '지나간 책 다시 읽기'의 취지에 가장 알맞은 책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정확히 10년 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게 되었는데, 어떤 느낌을 받게 되었을까. 위에서도 언급했던 것과 같이 이 소설은 '우화', '풍자소설'-러시아 스탈린 독재 풍자, 독재 일반 풍자 등의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소설의 초점을 단순히 여기에 맞출 필요도 없다. 이를 배제하고서라도 소설의 중요 세 요소인 인물, 사건, 배경이 아주 잘 엮어져 있다. 


소설의 배경은 제목대로 동물농장이고, 사건은 자잘한 사건부터 큰 사건까지 쉬지 않고 일어난다. 특히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개성은 뚜렷하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폴레옹'이 차츰 차츰 변해가는 모습은 독자로 하여금 알면서도 당하는 그런 느낌이 들게 만들고, 그의 충실한 대변인 역할을 하는 '스퀼러'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히 그 현란한 말솜씨를 자랑한다. 여기에 일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워커홀릭 '복서'는 극 중에서 보여주는 말(馬)의 이미지, 옳고 그름의 판별 없이 주어진 일만 하는 현대인 그리고 당시 독재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가 토사구팽당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겠다. 


동물농장의 원래 주인은 인간 존즈씨이다. 농장 이름은 메이너 농장이었고, 존즈씨는 동물들을 학대하고 착취하였는데, 이를 두고 늙은 수퇘지 메이저는 혁명을 주창하며 죽어간다. 돼지 나폴레옹과 스노우볼을 위시한 동물들은 존즈씨를 비롯한 농장의 모든 인간들을 쫓아내고 동물농장으로 개명하며 동물들만의 세상을 꾸려나간다. 


그들은 7계명을 만드는 등 정신적인 개조를 실시하고, 풍차를 만드는 등 앞으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계획을 짠다. 그러던 중 나폴레옹과 스노우볼의 의견 차이가 생기고, 나폴레옹은 스노우볼을 축출한다. 사실상 독재 체제를 구축한 나폴레옹은 우매한 동물들을 서서히 개조시켜 나간다. 7계명을 조심씩 바꾸고, 교묘한 언사와 행동으로 스노우볼을 완전한 반동분자로 만들어 그 반등으로 자신의 지위를 높여만 간다. 또한 자신의 의견에 반대한 동물들을 체제에 반대한 반동분자로 만들어 처형시킨다.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는 동안 클로버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자기 생각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었다면 클로버는 여러 해 전 동물들이 인간을 뒤집어엎기로 했을 때 일이 이 지경이 되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오늘 있었던 공포와 살육의 장면들은 늙은 메이저가 그들에게 반란을 사주했던 그날 밤 그들이 꿈꾸고 기대했던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담긴 미래의 그림이 있었다면 그것은 굶주림과 회초리에서 벗어난 동물들의 사회, 모든 동물이 평등하고 모두가 자기 능력에 따라 일하는 사회, 메이저의 연설이 있던 그날 밤 그녀가 오리새끼들을 보호해 주었듯 강자가 약자를 보호해 주는 그런 사회였다."(본문 중에서)


역사 상 수많은 혁명이 있어왔고, 그 혁명을 완수한 당사자들이 항상 바라마지 않던 사회. 어김없이 그들이 울부짖었던 사회였을 것이다. "강자가 약자를 보호해 주는 그런 사회"


동물들이 그들이 피땀 흘려 세운 풍차는 폭풍에 휩쓸리고, 인간들에 의해서 폭파되는 등 할 일은 더더욱 많아졌지만 처지는 존즈씨 때보다 더욱더 피폐해져만 갔다. 


어느 날, 상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동물농장의 제일가는 일꾼 복서가 쓰러진 것이다. 그런데 나폴레옹을 위시한 지도부는 복서를 도살자에게 팔아넘겨 버린다. 동물들은 당나귀 벤자민에 의해서 이 사실을 알지만, 나폴레옹은 스퀼러를 시켜 다시 정신 개조를 시킨다. 


글자를 알고 지식을 만지는 지도부에게 우매한 동물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충성을 다한다. 혁명을 일으켜 존즈씨를 쫓아내자마자 일어난 달걀 횡령 사건에서도 동물들은 아무런 의심이 없었고, 조금씩 변해가는 7계명과 각종의 부당한 대우 속에서도 동물들은 "예전 존즈 씨가 있었을 때는 노예였지만, 지금 나는 이 농장의 주인이야"라며 의심하지 않고 열심히 일만 한다. 많은 동물들이 처형당했을 때도, 복서가 도살장에 끌려갔을 때도 동물들은 의심을 하지 않았다. 알지 못해서 알려고 하지 않은 건지, 알려고 하지 않아서 알지 못했던 것인지.


급기야 지도자 돼지들은 동물농장의 핵심과도 같은 구호인 "두 다리로 걷는 것은 모두 적이다"의 불문율을 깨고 두 발로 걷더니, 두 다리로 걷는 인간과 거래를 하고, 그들과 흥청망청 파티를 열기까지 한다. 누가 돼지이고 누가 인간인지 분간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소설은 끝난다. 


<동물농장>의 동물들을 다시 생각한다


이 소설을 다시 완독하고 처음 든 생각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였다.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스 2세를 쫓아내고 혁명을 완수했던 만민의 평등을 구호로 내건 스탈린. 그는 당시 전 세계 무산 계급의 신화이자 영웅이자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권력의 심장에 칼을 꽂았던 그가 그보다 더한 철갑 속 권력의 심장이 될 줄이야.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다. 과연 권력이 부패하는 과정에서, 그 잘못을 모두 권력자에게 돌려야 하는가 라는 생각. 


조지 오웰은 여기에 초점을 맞춘 듯하다. 권력의 부패에 우매한 대중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동물농장>에서 권력부패의 주 범인은 나폴레옹을 위시한 권력자 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들인 것이다. 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맹목적인 충성만을 하였다. 생각 없이 우매하였던 것이다. 


나폴레옹을 광신적으로 따르며 동물들로 하여금 생각할 시간을 주지 못하게 구호를 꽥꽥 질렀던 양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나폴레옹에게 휘둘려 평생 열심히 일만 했던 말 복서, 글자를 읽을 줄 몰라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 조차 잘 모르는 말 클로버, 모든 사실들을 알면서도 아무 말 없이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던 당나귀 벤자민 등. 이들은 권력 부패의 공범이었던 것이다. 


조지 오웰은 이 소설로 신랄하게 정치적 현실을 풍자하면서 권력자만을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자신이 사회주의자이지만 소비에트 신화를 무너뜨려야 제대로 된 사회주의 실현이 가능해 과감히 비판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대부분의 우매한 사회주의자는 아무런 의심이나 비판 없이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비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적극적으로 비판적 수용을 하고 있는바, 무분별한 수용과 방종이 더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대부분 나폴레옹이 되지 못한다. 아마도 우매한 동물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렇다면 여기도 또 질문이 생긴다. 조지 오웰이 묻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벤자민과 같이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방종'하는 자가 더 잘못인가, 대부분의 우매한 동물들 같이 아무것도 모른 채 '무분별한 수용'을 하는 자가 더 잘못인가. 확실한 건 하나다. 기득권층은 아무래도 상관하지 않는다. 방종이건 무분별한 수용이건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건 지금 이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너는 네 것만 나는 내 것만(그리고 네 것도) 상관하는 것. 


지금은 아무나 떠들고 다니는 말이지만, 이미 60년 전 한편의 소설로 묵직하게 한 마디 하고 있는 것 같다. 


"늘 깨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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