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멧 데이먼의 <리플리>


우연히 상류층의 일원으로 보여진 '톰' 그는 특출난 재능으로 빠르게 상류층의 일원이 된다. 그렇지만 그건 분명 거짓된 삶이었으니... 그는 어떻게 될까? ⓒ미라맥스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과 소프라노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어느 파티석상. 연주가 끝나자 선박 회사를 운영하는 부호 그린리프 부부가 다가와 톰 리플리에게 칭찬을 건넨다. 그러곤 그가 프리스턴 재킷을 입은 걸 보고 자신의 아들 이야기로 넘어간다. 톰은 '디키, 잘 있죠?'하며 아는 척 하고 그린리프 부부의 환심을 산다. 


톰은 피아니스트도 아니고 프리스턴을 졸업하지도 않았다. 그는 피아노 선율사이자 호텔 보이일 뿐이다. 다만, 그때는 친구를 대신해 돈을 받고 프리스턴 대학교를 나온 피아니스트인 척했던 것이다. 그린리프는 톰에게 1000달러를 보장하며 이탈리아로 가서 디키를 설득해 들어오게끔 한다. 톰은 디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전혀 모르는 재즈를 공부하고는 이탈리아로 날아간다. 


상류층이 되고 싶은 '재능'의 거짓된 삶


톰이 동경해 마지 않는 상류층의 삶 그자체인 디키. 톰은 차원이 다른 그의 사고와 행동과 여유와 씀씀이를 따라할 수 있을까? ⓒ미라맥스



영화 <리플리>는 이런저런 부차적 설명을 과감히 생략하고 본론으로 넘어간다. 톰이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를 단 몇 장면으로 보여주고는 곧바로 새로운 거짓된 삶이 나오는 것이다. 영화가 이야기하려는 건 톰의 거짓된 삶에 있다. 비천한 삶이 상류층의 삶으로 둔갑하면서 톰은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졌다. 숨어서 동경해왔던, 언제든 준비가 된, 그러나 거짓되었다는, 그래서 불안하기 짝이 없는 삶. 


재능이 출중하지 않다면 일련의 일을 벌이지 못했을 거다. 그렇다. 톰은 상류층이 되기에 충분한 '재능'이 있었다. 뭐든 금방 따라해서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재능 말이다. 물론 뿌리 깊은 상류층의 의식과 행동과는 근본적으로 이질감이 느껴지긴 하겠지만. 


그렇지만 그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게 있었다. 출신 성분이라고 해야 할까. 머나먼 윗세대부터 내려오는 뿌리 깊은 가문의 성분 말이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가문, 학력, 돈, 명예, 지위 등. 디키는 선박 부호를 아버지로 두었고 돈은 엄청나게 많으며 프리스턴 대학교 출신이었다. 여기에 상류층다운 여유와 씀씀이, 차원이 다른 스케일을 소유하고 있다. 톰이 이런 것들까지 따라할 수 있을까?


시대가 낳은 괴물이자 피해자일까, 사이코패스이자 미친놈일까


'초라한 현실보단 멋진 거짓이 낫다'는 생각으로 끔찍한 짓을 하고 끔찍한 현실을 버티는 톰. 그는 시대가 낳은 괴물이자 피해자일까, 사이코패스이자 미친놈일까. ⓒ미라맥스



톰(멧 데이먼 분)은 디키(주드 로 분), 디키의 연인 마지(기네스 팰트로 분)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디키와 마지가 톰을 잘 대해주고 톰은 그들을 동경하며 잘 따랐다. 무엇보다 톰에게는 평생 다시 없을 상류층의 삶을 맛보는 나날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마치 자신이 진짜 상류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졌을 것이다. 


어느 날 상류층 친구 프레디가 찾아온다. 그는 디키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빌붙어 사는 게 좋냐고 톰을 놀려댄다. 톰은 적의에 불탔지만 이내 좌절하고 프레디는 그런 톰을 계속 놀려대고 디키는 톰을 조금 멀리하고 마지는 그런 톰을 위로한다. 그린리프 씨와의 계약 만료가 다가오고 디키와 톰은 함께 여행을 떠난다. 바다 한 가운데에서 디키는 톰에게 강력하게 전달한다. 따분하고 싫증났다고, 가난뱅이 빈대에 찰거머리라고, 계집애 같다고. 다툼 끝에 톰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만다...


영화의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이 모든 게 시작되었을 때처럼 우연치 않게 디키로 오해받은 톰은 아예 디키 행세를 한다. 그렇게 그는 디키가 되어 '진짜' 상류층이 된다. 영화는 더욱 긴박하게 돌아간다. 몇몇 장면은 심장을 쫄깃하게 만든다. 톰이 누군가에겐 톰이고 누군가에겐 디키이기 때문인데, 그 누군가들이 전부 상류층으로 서로 잘 알고 있다. 톰이 원하는 건 뭘까. 


톰은 '초라한 현실보단 멋진 거짓이 낫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 왔고 멋진 거짓을 현실로 옮겼으며 끔찍하지만 멋진 현실을 버텨 왔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를 생각나게 하는 이 생각은, 그러나 결국 진짜 상류층, 그가 바라는 멋진 삶을 주진 못한 것 같다. 그는 시대가 낳은 괴물이자 피해자일까. 흔히 있는 사이코패스이자 미친놈일까.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사회라면...


상류층만이 상류층을 인정하는, 참으로 슬픈 풍토다. 영화에서 그들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상류층만이 상류층을 이해할 수 있고, 말이 통한다고. 이같은 풍토를 바꿀 순 없을까? ⓒ미라맥스



"과거를 창고에 꼭꼭 숨겨 두고 자물쇠를 채우고픈... 그 안은 어둡고 더러워. 그 추잡함을 들키면..." 


누구나 거짓된 삶을 사는 건 아니겠지만, 많은 거짓과 비밀을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산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알려주고 싶지만, 그 더럽고 추잡한 사실을 들키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렇게 평생을 사는 것이다. 톰 리플리, 그는 우리 모두의 또 다른 모습이다. 너도 될 수 있고 나도 될 수 있고 어느 누구라도 될 수 있다. 미친놈이라기보단 괴물에 가깝지 않을까. 


때는 1950년대 미국, 위기와 전쟁을 지나 자본주의 최대 호황의 시대를 맞이했다. 빈부격차가 심화되며 상류층의 삶의 양식이 정착되었다. 비천한 이가 감히 상상하기 힘들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다하기 쉽지 않을 거다. 누가 그에게 돈을 던질 수 있을까? 상류층이라면 돈을 던질 수 있을까.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이 영화가 원작으로 삼은 <재능 있는 리플리씨>에서 나온 '리플리 증후군'은 톰이 잘 보여준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일종인데, 참으로 애잔하고 슬프기까지 하다. 만약 현실이 비참하지 않다면? 자신이 비참하다고 느끼는 건 누군가와 차별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건데, 그런 차별이 없는 사회라면? 영화에서처럼 상류층만 상류층을 인정하는 풍토가 없다면? 리플리 증후군 따위는 없을 거다. 


자만심으로 풍만한 상류층과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하류층의 더럽고 슬픈 합작품. 누구나 그것에 노출되어 있고 빠지기 쉽다는 게 안타깝고 두려울 뿐이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고 아마 지금도 그런 삶을 살고 있을 거다. 내가 의도했거나, 나도 모르게. 


사회를 바꿔가는 수밖에 없다. '나'라는 중심을 확고히 세우고 '나'를 사랑하고 '나'만의 길을 걸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하겠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만 노력한다고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을 갖는 게 필요하다. 자칫 서로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역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에겐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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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


작년에 나온 많은 범죄 영화 중 일명 '사이다' 범죄 장르가 있었는데, <베테랑> <탐정: 더 비기닝> <성난 변호사>가 그것이다. 이 영화는 그 계보를 이었다. 영화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 포스터. ⓒNEW



지난 2015년 한 해 유독 범죄 영화가 많았다. 생각나는 건만 해도 <나의 절친 악당들> <악의 연대기> <극비수사> <베테랑> <탐정: 더 비기닝> <성난 변호사> <내부자들>까지, 대부분 괜찮은 관심과 인기를 받았다. 스타일에서 정반대에 위치한 <베테랑>이나 <내부자들>은 한 해 동안 영화계뿐만 아니라 한국을 뒤흔들기도 했다. 


이중에, '사이다' 범죄 영화가 몇몇 있다. <베테랑> <탐정: 더 비기닝> <성난 변호사> 등이 그것인데, 범죄를 다루고 있으니 웬만큼 잔인하지만 코믹 요소가 다분하고 마지막엔 속 시원히 문제를 해결한다. 치가 떨리는 '나쁜 놈'이 나오기도 한다. 올해 초 <검사외전>까지 대히트를 치면서 트렌드를 넘어 하나의 장르로 굳어진 느낌이다. 


코믹 사이다 범죄 영화의 계보를 잇다


영화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는 그 계보를 이었다. <성난 변호사>와 정말 비슷하다. 심지어 관객수까지. 영화가 기획되어 개봉하기까지의 시간이 비슷비슷하다고 가정하면, 이들 영화는 비슷한 때에 제작되었을 테고 지금은 더 하겠지만 그때 사회가 전에 없이 요동치기 시작했을 거라 유추해볼 수 있다. 


영화는 주인공 최필재 사무장의 활극 액션으로 진행된다. 기존 '사이다' 범죄 영화들과 비슷하다. 아마도 비슷한 시기에 제작이 시작되었을 것 같은데, 한 발 늦게 지금에야 개봉했다. 여기저기 삐거덕거리는데, 겨우겨우 봉합해 나온 것 같다. 영화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의 한 장면. ⓒNEW



과거 모범 경찰이었지만 지금은 변호사 사무장으로 있는 최필재(김명민 분)는,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양형사를 상대하던 와중에 편지를 하나 받는다. 인천의 대재벌인 대해제철의 며느리를 죽여 사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인 권순태에게서 온 편지였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절절하게 전한다. 필재는 이 사건이 양형사와 관련이 있다고 직감하고는 뒤를 캐기 시작한다. 양형사의 인생을 거덜나게 하기 위해서. 


당연히 쉽지 않다. 자신이 모시는 변호사 김판수는 반대하고, 경찰도 검사도 아니니 지나간 사건을 파헤치기도 힘들거니와, 대해제철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 모든 난관들을 필재는 '맨몸'으로 헤쳐나간다. 그는 본래 지극히 속물적인 인간이었는데 나름 '특별수사'를 하는 와중에 바뀌게 되니, 사형수 권순태의 딸 권동현 때문이다. 


여기저기 삐거덕거리는 아쉬움


영화는 여기서부터 조금 삐거덕거리기 시작한다. 필재의 과거가 나오면서 말이다. 그는 과거에 모범 경찰이었다. 그리고 그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는 살인만 빼고는 나쁜 짓 안 해본 게 없는 범죄자였는데, 그 때문에 그는 '범죄자의 아들'로 살아왔고 경찰인 그의 할아버지는 평생 말단으로 지냈다. 필재가 변화하는 이유가 권동현이고, 권동현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이 부분을 상당히 대충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는 점이다. 그 고리를 순태와 동현의 감동적인 눈물로 강하게 연결해보려 하는데 필재까지 이어지지 않은 것 같다. 필재가 이 사건에 목숨을 걸고 뛰어들 수밖에 없는 확실한 이유를 제시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사이다' 범죄 영화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부분인 지독한 악역이, 이 영화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악역이 악역다웠다면, 영화가 훨씬 살았을 것이다. 주인공만 쓸데없이 너무 고생한 느낌이다. 영화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의 한 장면. ⓒNEW



그런데 여기서 사실상 가장 중요한 인물이 빠지지 않았나 싶다. 살인범 권순태가 누명을 썼다는 건 영화 초반에 다 밝혀지니만큼, 진짜 살인범이자 진짜 '나쁜놈'이 어디 있냐, 하는 거 말이다. 다름 아닌 인천의 대재벌인 대해제철일 게 뻔한데, 그닥 존재감이 없어 보인다. 영화 초반부가 지나갈 즈음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베테랑>의 조태오나 <내부자들>의 이강희는 말할 것도 없이 <성난 변호사>의 문지훈에도 못 미치는 존재감이었다. 그 바로 아래에서 실질적으로 진두지휘하는 이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뻔한 움직임과 반응들, 2년 만 일찍 개봉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살짝 든다.


모르긴 몰라도, 주인공 필재의 직업은 중간에 바뀌었을 것 같다. 극 중에서 필재는 사무장으로 나오는데, 제목이 <특별수사>인 걸 보면 그렇게 유추할 수 있다. 그러지 않고서는 제목이 내용이나 캐릭터와 너무 맞지 않다. <성난 변호사>가 변호사가 주축이 되어 사무장, 예전 동료 검사와 함께 사건을 풀어가는 것과 비슷한듯 다른듯 <특별수사>는 사무장이 주축이 되어 변호사, 예전 동료 경찰과 함께 사건을 풀어가지 않는가. 비슷해도 너무 비슷하다. 일명 '사이다' 범죄 영화가 한창일 작년 후반기에 개봉하지 않고 지금에 와서야 개봉한 이유로 설명이 되지 않을까.


사회를 무너지지 않게 하는 가장 큰 힘 '관심'


다만, 영화의 모티브가 2002년 '영남제분 여대생 살인사건'이라는 점이 와 닿는다. 2002년 3월 여대생 하지혜 양을 영남제분 회장 부인이 청부살인한 사건으로, 사위와의 관계를 의심해서 그와 같은 짓을 저질렀다. 이후 무기징역을 받은 그녀는 건강 상의 이유를 들어 계속 형집행을 정지했고 병원에서 초호화 생활을 했다고 한다. 영화 스토리를 봤을 때 큰 유사점을 느끼진 못했지만, 사건을 재조명하게 되는 계기는 마련해 주었다. 


김명민과 성동일의 조합이 나쁘지 않았다. 진중한 캐릭터보다 조금 가벼운 캐릭터가 잘 어울리는 김명민, 연기 스팩트럼이 가장 넓은 배우 중 한 명인 성동일. 이 둘을 보는 재미로도 충분하다. 영화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의 한 장면. ⓒNEW



여기에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배우 김명민과 성동일의 조합이 나쁘지 않았다. 진중한 캐릭터보다 <간첩>이나 <조선명탐정>의 분야에서 출중한 실력을 자랑하지만 조금 가벼운 캐릭터가 더 잘 어울리고 매력 있는 듯하다. 연기 스팩트럼이 워낙 넓은 성동일은 따로 말할 것도 없겠다. 누구와 붙여 놓고 어디에 놔둬도 제 몫을 하는 그이기에, 여기서도 빛을 발하며 옆사람도 빛나게 한다. 


식상함을 떠나서 이런 류의 영화가 계속 나와주기를 바란다. 사회를 깊숙이 들여다보진 못하지만, 최소한 문제의 심각성을 불러일으키며 잊지 않게 해주진 않는가 싶어서다. 거기에 영화적 재미도 풍부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한 번쯤 관심가져 줄만은 하겠다. 사회를 무너지지 않게 하는 가장 큰 게 바로 '관심'이 아닐까. 영화에서 필재가 어떤 이유로든 순태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들 부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관심이 사람을 살리고 가족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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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어쩌다 대가족, 오늘만은 무사히>


<어쩌다 대가족, 오늘만은 무사히> 표지 ⓒ예담



결혼한 지 어언 3개월이 지나간다. 이렇게 지낼 줄은 나도 몰랐다. 결혼하면서 처갓댁에 들어가 살게 되었는데, 여차저차 이유를 댔지만 사실 집을 얻어 사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대출 안 받고 신혼을 시작하는 이가 어디 있겠냐마는, 우리 딴에는 돈을 조금이라도 더 모아볼 요량이었던 것이다. 


대가족이라 하기에는 뭣하지만, 엄연히 두 가정이 모여 사는 것이니 중가족 정도는 될 거다. 중가족 정도라도, 장인 장모 부부나 우리 부부나 방에 꼭 박혀 생활하는 걸 워낙 좋아한다고 해도, 은근히 부딪히는 것들이 많다. 속으로만 삭히고 있는 것들도 많을 거다. 그래도 이정도면 남들이 걱정하는 것보다는 훌륭한 편이다. 나름 괜찮다. 


다만, 장인 장모의 진짜 마음을 알 길이 없다는 게 조금 걸린다. 우리와 같이 사는 게 불편하시진 않을지. 편할 리는 없을 테지만, 너무 불편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그럭저럭 괜찮다. 이제 나가서 살면 또 다른 신혼 생활이 시작될 거라 가슴 벅찬다. 다른 가족들은 어떨까? 대가족이 북적북적이면 불편하기도 재밌기도 할 것 같다. '오늘만은 무사히'를 외치는 <어쩌다 대가족, 오늘만은 무사히>(예담)의 류타로, 하루코 부부의 대가족을 들여다보자. 


다시 대가족화, 사회에서 도태된 이들이 가족의 품으로


72세의 류타로, 66세의 하루코 부부는 알츠하이머병(치매)에 걸린 92세 장모님 다케를 모시며, 30세 히키코모리 장남 가쓰로와 함께 살고 있다. 치매에 걸린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건 흔하다면 흔하다지만, 히키코모리 아들은 좀 그렇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괜찮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존재감이 없던 아이니까. 신경이 쓰이지만 속 썩을 정도는 아니다. 이 정도면 나름 괜찮은 노후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순식간에 집안의 인원이 두 배로 늘어났다. 첫째 딸 가족과 둘째 딸이 들어오게 된 거다. 자신이 운영하던 치과 의원을 물려줄 사위를 바랐던 류타로의 기대와 다르게 증권맨과 결혼한 첫째 딸 이쓰코. 사업을 시작해 잘 나간다 싶더니, 급기야 빌려간 돈까지 다 말아먹고 사업이 망하고는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까지 대동한 채 집에 들어와 살겠다는 게 아닌가. 


둘째 딸 도모에는 더욱 가관이다. 잘 사는 줄 알았더니, 이혼한 것도 모자라 임신까지 해서 나타나 집에 들어오겠다고 한다. 똑 부러지는 성격이라 걱정 없었는데,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다. 거기에 아이 아빠가 전남편이 아니라 열네 살 연하의 미래가 불투명한 신인 개그맨이라니. 뒷목 잡고 쓰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다. 


막장 드라마의 시초 같은 이 스토리는, 그러나 이 시대에서 아주 아주 흔하다. 어쩌다 그렇게 되어버렸다. 드라마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전원일기>나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등의 30여 년 전 드라마에서도 알 수 있듯 예전에는 당연히 3대, 4대가 모여 살았다. 이후 급격히 햇가족화 되었고 사회 문제로까지 발전했었다. 그러던 것이 다시 대가족화 되어가고 있다. 전통으로의 회기? 전혀 아니다. 더 심각한 사회 문제다. 


극심한 경쟁에서 도태되어서, 사회병리에 희생되어서, 경제심리사회 문제의 당사자가 되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사회가 이들을 지켜줄 수 없으니 비빌 언덕이 그나마 가족인 것이다. 자기 앞가름하기도 빠듯한 대부분의 가족들에게는 그조차도 불가능하다. 사회에서 도태되면 곧 나락이다.


가족을 그림으로써 맞는 소설적 재미, 그리고 문제점


류타로, 하루코 부부는 괜찮게 사는 편이다. 그래서 돌아온 탕아들을 포용할 수 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소설이 전체적으로 유머러스할 수 있었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감동을 자아낼 수 있었다. 가난에 찌든 가족이었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아쉬운 부분도 바로 그것인데, 사회에서 도태되어 돌아오려는 이들의 상황은 보편적인 게 되어가고 있다고 해도 돌아오려는 이들을 경제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과연 보편적이냐, 하는 점이다. 절대 그렇지 않을 거다. 


약간의 아쉬운 부분을 뒤로 하고, 소설은 재미와 감동을 거의 완벽하게 잡아냈다. 그 힘의 대부분은 작가 특유의 문체에서 비롯되었는데, 스토리나 그 안의 사건 사고들은 사실 크게 별 다를 게 없어 더욱 그러했다. 그러며 여러 생각 거리들을 던져 놓으니 대단하다고 아니 말할 수 없겠다. 


편편이 가족들 각자의 시선에서 이루어졌는데, 확실한 결말을 내지 않고 마지막에서 대단원으로 정리한 것도 상당히 괜찮았다. 그럼으로써 가족의 의미를 더욱 고찰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사회가 할 일을 가족에게 떠 맡기고 있는 이 웃지 못할 상황을, 가족의 의미를 드높이며 무마시키는 게 과연 옳은 건지. 더욱 사회를 비판하며 오히려 가족에겐 힘이 없다는 점을 부각시켜야 하는 게 맞지 않은지 말이다. 여하튼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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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상류의 탄생>


<상류의 탄생> 표지 ⓒ비아북



'1% 상류층'이라는 말을 많이 접해봤을 것이다. 그 1%를 재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단연 재산이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후 더욱 더 심화된 빈부격차로 전 세계 상위 1% 부자의 재산이 나머지 99%의 재산보다 많아졌다. 돈이 돈을 부르기에 그 차이는 심화될 것이 확실하다. '우리는 99%이다'라는 구호로 전 세계적인 충격을 준 '월가 시위'가 있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여러가지다. 이 사회를 이끄는 이는 상류인가? 상류는 누구인가? 상류는 어떠해야 하는가? <상류의 탄생>(비아북)은 여러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세계 최강대국의 저력을 잃지 않는 '미국'을 중심으로, 상류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간다. 시종일관 계속되는 한국 비판과 미국 옹호, 상류와 나머지의 구분 짓기, 반복되는 몇몇 사례와 주장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책장을 빠르게 넘기게 하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는 명징한 어조가 사이다처럼 시원하다. 


이 사회를 이끄는 이는 누구인가


먼저 이 사회를 이끄는 이가 누구인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상류인가, 대다수 민중인가. 저자는 사회를 이끄는 이는 상류라고 확실하게 못을 박고는 그 부분에 대해선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게 성립되지 않으면 이 책은 쓰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사회가 이처럼 살기 어렵고 혼란스럽고 '지옥'처럼 된 책임이 다른 누가 아닌 상류에게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골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감히 그 부분은 삭제하고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게 아닌가 싶다. 


생각해보니 틀린 말도 아니지만 맞는 말도 아닌 것 같다. 책을 읽는 내내 그 부분이 걸려 불편했는데, 한번 다르게 생각해보았다. 분명 이 사회의 '주인'은 대다수 민중이다. 아니, 대다수가 아닌 모두라고 해야 맞겠다. 그럼 '이끄는 이'도 대다수 민중을 포함한 우리 모두일까, 아니면 소수의 사람들일까. 아마도 소수의 사람들일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 모두가 인정할 만한 능력이 있어야 하고, 그에 맞는 책임의식이 수반되어야 한다. 저자는 그런 이들을 상류라고 말한 것이리라. 


모두가 평등한 이 시대에 어떻게 계급적인 느낌이 다분한 '상(上)류'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상류가 있으면 하류도 있다는 건데,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책을 보면 그런 계급적 상류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보기 불편할 때도 있는데, 책을 끝까지 읽어나가면 어느 정도 상쇄된다. 저자의 상류에 대한 묘사와 주장이 오락가락할 때가 있는 것 같은데 감안하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진짜 하고 싶은 말만 이해하면 되겠다. 


상류는 누구인가, 누구여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상류는 누구인지, 누구여야만 하는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상류란 누구인지 생각해보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부류가 있다. 고위관료, 재벌, 사(士)자 직업을 가진 이들, 저명인사 등이 그들이다. 돈이 많거나, 능력이 출중하거나, 유명하다. 그들은 상류층일까? 


저자는 그들이 이 사회의 상류층에 위치해 있는 건 맞다고 말한다. 당연히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들이 올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사회가 잘 굴러간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뭔가 허전하고 허술하다. 단순히 돈 많고 능력이 출중하고 유명하다고 이 사회를 이끌 자격이 있고 또 이끌 자격을 준다는 건, 어딘지 불편하다. 상류에 대한 다른 개념이 필요하다. 


책의 끄트머리에 가서 상류의 진정한 개념을 전한다. 진정한 상류란 사회가 만들어놓은 계급 체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라며, '내면의 계급'을 강조한다. 내면의 품계가 높은 사람은 깊이를 추구하고 유행을 멀리하며, 다양성과 장기, 영구와 지성, 내면과 사회, 지구와 우주를 지향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행동이 타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는 책임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놀드와 퍼셀, E. M. 포스터의 책과 말을 인용하며, 그런 사람을 X 부류라 칭하며 '부자가 아닌 귀족 계급의 일종'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해가 가는가?


이해를 떠나, 흙수저와 금수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흙수저가 진정한 상류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귀족 계급의 일종'이얄로 일확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게 아닌가. 태어나면서 정해진 게 아닌가. 그러면서 흙수저라도 내면의 품격이 있다면 상류라고 말하고 있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할지 난감하다. 


상류는 어떠해야 하는가


자연스레 '상류는 어떠해야 하는지'로 이어진다. 저자는 퍼셀이 정한 X 부류의 특징을 열거하며 진정한 상류가 지향해야 할 바를 말한다. 독립적인 사고를 지녀야 하고, 자신이 하는 일을 즐겨야 하며, 대체로 자신만을 위해 옷을 입어야 한다. 사회적 입지나 지위를 과시하는 신분의 징표를 경멸해야 하고,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을 가지며 탐지억이되 유행과 대중문화는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류가 진정한 상류로 거듭날 때, 애초에 진정한 상류가 아닌 부류는 상류가 아니어야 할 때, 그런 상류가 이끄는 사회는 비로소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다. 저자는 '헬조선' 대한민국의 문제 진단을 '상류'라는 부류를 통해 한 것이고, 지향할 바가 미국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자신이 비록 한국 사람이지만 미국에서 40년 간 있으면서 양국을 잘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막힘없이 잘 읽히는 어조와 문장 실력으로, 속이 뻥 뚫리는 비판을 가차없이 가하는 저자의 모습이 눈에 훤하게 그려진다. 다만 전체를 관통하는 큰 줄기가 그만큼 튼튼하지 않은 것 같아서 아쉽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부분과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심하게 갈리는 보니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전문적으로 접근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문장력과 어조가 별로였다면 끝까지 읽었을지 의문이다.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책을 읽었음에 이 사회의 책임을 온전히 상류로만 돌리지 않게 된 것 같다. 상류를 향해 가차없는 비판을 가하면서도, 진정한 상류를 향해 찬양에 가까운 칭찬을 건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름 아닌 그 부분에서 아쉬움을 느꼈는데, 그 부분이 이 책의 균형추 역할을 해주었다. 또한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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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한국 대표 소설 읽기] <필론의 돼지>


<필론의 돼지> 표지 ⓒ아시아



"필론이 한번은 배를 타고 여행을 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큰 폭풍우를 만나자 사람들은 우왕좌왕 배 안은 곧 수라장이 됐다. 울부짖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뗏목을 엮는 사람… 필론은 현자인 자기가 거기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도무지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배 선창에는 돼지 한 마리가 사람들의 소동에는 아랑곳없이 편안하게 잠자고 있었다. 결국 필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돼지의 흉내를 내는 것 뿐이었다." (본문 58~59쪽 중에서)


많은 사람의 정곡을 찌를 우화이다. 굳이 내가 무엇을 하지 않아도, 세상은 돌아가게 마련이다. 관성의 법칙도 있지 않은가? 세상은 제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조급하게 나서서 뭐라도 해보려고 하니, 현자가 보기에는 딱할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필론이 현자가 아닌 거다. 


필론과 돼지의 우화로 사회를 바라보다


이문열의 <필론의 돼지>는 필론과 돼지의 우화를 바탕으로 사회를 바라보았다. 이 소설도 그의 스타일에 맞게, 어떤 특수한 상황을 설정하고 그곳에 여러 인간 군상을 배치시켰다. 곧 사회의 축소판이다. <필론의 돼지>의 특수한 상황은 이렇다. 1980년대 대학을 졸업한, 우쭐댈 만한 학력을 가진 주인공이 군대를 제대하고 군용열차에 올랐다. 그곳에서 멍청하기 짝이 없었던 훈련소 동기 '홍'을 만나고, 얼마쯤 지나 술 취한 '검은 각반 두른 현역' 즉, 특전사 현역이 난장을 피우며 돈을 빼앗는 장면을 목격한다. 백 명에 육박하는 육군 예비역들은 다섯에 불과한 특전사들에게 꼼짝도 못하거니와, 그 또한 아무것도 못하고 똑같이 돈을 빼앗길 뿐이다. 


그에게 특전사보다 앞 선 문제는 다름 아닌 홍이다. 본명이 홍덕동인 홍은 워낙 멍청했기에 '홍 똥덩이'라고 불렸는데, 그런 홍이 자꾸 자신과 맞먹으려 하는 게 아닌가. 그가 이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바를 홍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홍은 분노는 커녕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는 반면 그는 이 상황에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그도 결국은 홍처럼 행동하고 만다. 


그런 경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어느 모로 보아도 나보다 못한 사람과 섞이기 싫어할 때가, 그런데 생각은 다를지 몰라도 그나 나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걸 알게 될 때가, 그렇게 분노와 좌절과 자기혐오를 느낄 때가 말이다. 내가 그 반대로 못한 사람일 때는 움츠려들고 아무것도 못하곤 하는데, 하필 내가 잘난 사람인 것 같을 때는 그렇게 되곤 한다. <필론의 돼지>에서 그는 현자 필론이고, 홍은 돼지일 거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은 '말짱 황'이다. 


정작 중요한 건 '폭력'의 정당성 여부


술취한 특전사 현역 다섯 명이 육군 예비역 100여 명이 몸을 실고 기분 좋게 집으로 향하는 객실로 난입해, 되지도 않는 노래를 부르며 돈을 갈취한다. 대부분의 예비역들은 3년 간 '당했던' 뼛속 깊은 무력감으로 순순히 돈을 준다. 종종 저항의 불꽃이 일지만 더 이상 번지지 못하고 사그라든다. 그 또한 분노로 치를 떨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니,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중, 익명의 목소리가 들린다. 100명이 다섯 명을 이기지 못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말한다. 다같이 달려들면 당연히 이길 거라고 말한다. 이 선동에 맞춰 수많은 발길질이 특전사 현역 다섯이 아닌 한 명씩으로 향한다. 아무리 단련된 그들이라고 당해낼 도리가 없다. 무참히 쓰러져 얼마 전까지 그들이 행했던 바를 그들이 당한다. 소수 권력의 무참한 말로다. 


이 지점이 논란 거리가 될 수 있다. 이 소설은 주인공으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지식인이 행동하지 않을 때 돼지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역설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바는 '폭력'의 정당성 여부에 있다. 작가는 주인공의 생각을 빌어 폭력의 악순환을 비판하고자 한 것 같다. 


"만약 이들을 진실로 죽여야 할 대의가 있다면, 그에게도 동료 제대병들과 함께 살인죄를 나눌 양심과 용기는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곳을 지배하는 것은 눈먼 증오와 격양된 감정이 있을 뿐, 대의는 없었다."(본문 68쪽 중에서)


지배자의 폭력과 피지배자의 폭력은 같지 않다


과연 그럴까. 과연 그런 것일까. 주인공의 눈에는 지배자의 폭력과 피지배자의 폭력이 같아 보이는가. 작가도 그렇다. 주인공이 돼지와 다를 바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곳에 대의가 없다는 핑계를 댔다고 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곳에서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주인공에게서 그런 생각이 나오는 건 어불성설이다. 물론 하나의 우화로 작동하는 것이겠지만, 폭력에 대한 생각은 우화로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일제 시대 친일 부역자들을 모조리 잡아 그에 맞는 벌을 받게 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냥 좋은 게 좋은 것이야, 하면서 그들은 그들대로 나는 나대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많이 오버된 것 같지만, 충분히 같은 맥락이다. 


물론 크게 보면 특전사 현역이나 육군 예비역이나 국가와 시대가 낳은 피해자일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생각이 일언반구 들지 않게 한다. 단지 폭력에 당한 만큼 폭력으로 갚는다는 것이 대의에 맞지 않는다고 보고 있을 뿐이다. 현상만 볼 뿐 본질은 보지 '않은' 것 같다. 본질을 보았으면, 한 발 더 나아가 폭력과 폭력이 만나게 된 그 상위층의 폭력에 대해 생각했어야 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못지 않은 탁월한 알레고리 형식으로 1980년대 우리 사회를 들여다본 이 소설은, 그러나 이처럼 잘못된, 좋게 말해 논란 거리가 되는 바를 남겼다. 그럼에도 하나는 확실하다. '필론의 돼지'는 1980년대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그 어느 때 어느 곳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그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현명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떻게 보든 '그들'은 분명 혐오스러운 존재다. 


그런데, '그들'이 언제까지 '그들'일까. '우리'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 때도 여전히 혐오스러운 존재일까. 문제는 그 혐오스러운 존재들이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많이 있다는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그 혐오스러운 존재들을 환영하고 그들이 더 많아지길 바라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다. 필론의 돼지가 스스로가 아닌 그들이 만들어낸 거라면, 세상이 어떻게 될지 심히 걱정된다. 


아시아 출판사가 후원하는 '한국 대표 소설 읽기'의 일환입니다.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과 함께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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