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고지전>


<의형제>의 장훈 감독과 <공동경비구역 JSA>의 박상연 작가가 의기투합했다. 그들의 전 작과 이어지는 감정선이 자못 예사롭지 않다. ⓒ쇼박스




1953년 2월, 6·25전쟁은 여전히 휴전 협정 중에 있다. 하지만 매일 같이 뺏고 뺏기는 고지 때문에 제대로 선을 긋고 휴전을 할 수가 없다. 방첩대 소속 강은표 중위(신하균 분)는 해서는 안 될 불순할 말을 내뱉어 영창에 갈 위기에 처하지만, 상사의 선처로 동부전선에 배치되어 사건 하나를 조사하게 된다. 최전방 애록고지의 악어 중대에서 죽은 중대장 시신에 아군 총알이 발견된 것. 


애록고지에서 은표는 죽은 줄만 알았던 친구 김수혁(고수 분)을 만난다. 이등병이었던 그는 2년 만에 중위가 되어 있었다. 한편 이제 갓 약관의 나이가 된 듯한 청년 신일영(이제훈 분)이 임시중대장으로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 걸 보고 기시감을 느낀다. 그는 모르핀 중독 상태였다. 이후 은표는 악어 중대의 비밀을 하나 둘씩 알아간다. 


겁쟁이 수혁이가 어떻게 이리도 매섭고 대범하게 변했는가, 약관의 청년은 어떻게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고 또 왜 모르핀 중독 상태가 되었는가, 죽은 중대장 시신에서 아군 총알이 발견된 사유는 무엇인가, 전쟁통에 술은 어떻게 구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이들이 쉬쉬 하는 그 예전 '포항 철수 작전' 때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전쟁이 주는 참혹함,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참혹함


이 영화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기 위해선 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참혹함이 아닌, 진짜 참혹함을. 그들은 '왜' 서로 죽이고 죽였어야 했나? ⓒ쇼박스



영화 <고지전>은 <태극기 휘날리며>와 <웰컴 투 동막골> 이후 오랫동안 맥이 끊겼던 6·25 전쟁 배경의 전쟁영화이다. 이 영화는 내적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지만 외적으로 많은 논란이 일며 흥행에 실패했고,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6·25 전쟁영화는 나오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전과 이후에  <포화 속으로>와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영화가 있었지만, 이 영화들이 맥을 잇는 건 어불성설이다. 공교롭게도 감독이 같다. 비극이다. 


지금에 와서 60년도 더 된 전쟁 이야기를 꺼내 무엇하랴 싶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전쟁을 그저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전쟁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한다. 대표적으로 양대 산맥이 있을 텐데, '애국'과 '반전'이 그것이다.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쟁을 그린 것, 전쟁을 반대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쟁을 그린 것. 


<고지전>은 '반전'에 속한다 하겠다. 그렇지만 그런 영화는 액션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감동도 약한 반면 참혹함이 상대적으로 강하고 생각할 거리가 많으며 전쟁의 당사자들에게 일면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요소들이 많아, 논란이 일기 쉽고 외면 받기 쉽다. 어찌하여 모든 걸 파괴하는 '전쟁'에 액션과 감동이 주가 될 수 있을까마는, 그게 그렇지 않은가 보구나 싶다. 


이 영화는 전쟁이 주는 눈에 보이는 참혹함보다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참혹함을 전하려 한다. 6·25전쟁의 특수성이 기인한 것일 수 있다. 사실 이 전쟁은 1951년에 끝났다. 하지만 이후 2년 6개월 동안 휴전 협정이 계속되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되풀이 되는 '고지전쟁'으로 5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다. 그들은 전쟁을 해야 하는 이유도 모른 채 동포를 죽이고 자신 또한 죽어갔다. 


'이' 전쟁은 생존의 숙제일 뿐, 애국이 낄 자리는 없다


'이' 전쟁, 6.25는 특수성을 진하게 띠는 전쟁이다. '동포'끼리 '애국'을 걸고 싸우는 모양새. 하지만 이 영화는 '생존'일 뿐이라고 말한다. 단지 내가 죽기 싫어 상대방을 죽이는... ⓒ쇼박스



영화는 사건을 통해서, 캐릭터를 통해서, 대사를 통해서 시종일관 반전 메시지를 드러낸다. 정확히는 '6·25 반전'. 북한군 저격수 '2초'를 잡기 위해 10명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길을 나선 수혁, 17살 막내가 2초에게 당한다. 아무도 그를 구하러 가지 않고 오직 2초를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다. 은표의 분노에 수혁이 날리는 한마디, '네가 전쟁을 알아? 네가 지옥을 알아? 난 아주 잘 알아. 매일 같이 수많은 남상식이 죽어간다고.'


엄청난 수의 중공군이 밀려 오는 상황에서 새로 부임한 대위 유재하 중대장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끝까지 항전할 것을 명한다. 이에 유재하를 쏴죽이고 중대장이 된 수혁은 즉각 퇴각 명령을 내린다. 이 상황을 그냥 넘길 수 없는 은표에게 수혁이 날리는 한마디, '나를 죽이면 네가 중대장이 된다. 그러면 부대를 지휘하게 될 텐데, 네가 우리 부대원들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아? 자신 있으면 어서 쏴. 시간이 없어.'


허무하고 어처구니 없는 죽음, 그 죽음을 방조하고 실행하는 이들, 그런 그들도 누군가에게 죽고, 그들을 죽인 이들 또한 누군가에게 죽는다. 전쟁에서 죽음은 일상일 테지만 인간이라면 절대 죽음을 일상처럼 받아들일 수 없을 터, 하지만 그들은. 그들은 죽음을 방조하고 죽음을 당연시하고 죽음을 자초한다. 그렇다고 죽음이 친근하지도 죽음을 환영하지도 죽음과 대면하지도 못한다. 죽음의 지옥에서 허우적댈 뿐이다.


문제는 이 전쟁의 근원에 있다. 사실상 끝난 이 전쟁을 '왜' 지속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전쟁터에 있는 이상 '전쟁 자체'에 대한 의문은 치우고서라도, 다름 아닌 '이 전쟁'에 대한 의문은 풀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최소한으로 내가 죽기 싫고 내 부대원들을 죽게 만들기 싫어 상대방을 죽인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들에게 이 전쟁은 생존의 숙제일 뿐이다. 거기에 애국은 낄 자리가 없다. 


더 이상의 전쟁영화는 안 된다, 하지만 <고지전>은 되새겨야 한다


수많은 전쟁영화를 봐왔다. 이제 더 이상 전쟁영화는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외친다. 하지만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바, 그렇다면 차라리 <고지전> 같은 영화가 만들어져야 한다. ⓒ쇼박스



전쟁영화는 더 이상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어떤 이유로든 전쟁영화는 그 자체로 '전쟁'에 대한 미화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업영화라는 틀로 전쟁을 대하는 이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지금은 평화의 시대, 전쟁은 우리와는 먼 얘기, 아무리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내장이 튀어나와도 그게 바로 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내가 그곳에 있다면 상대방이 그렇게 될 거라는 무의식, 애초에 나는 그곳에 없기에 그곳을 향해 갖게 되는 동경,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이 갖는 초유의 액션. 


반전을 지향하는 전쟁영화라고 해도 이 정도인데,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전쟁영화는 어떻겠는가. 전쟁 승리를 상정해놓고는, 어떻게 상대방을 몰살시켜 버릴까 고심하는 전쟁영웅, 거기에 여지 없이 중심축을 이루는 극단의 이데올로기. 우리는 여기서 이데올로기에 따른 애국심이 고취됨과 상관 없이, 전쟁 자체에 대한 동경을 전에 없이 끌어올리게 된다. 이 얼마나 멋진가, 이 얼마나 필수불가결한 전쟁인가. 


지난 이야기지만, <고지전>의 흥행 실패가 주는 씁쓸함과 <인천상륙작전>의 흥행 성공이 주는 참혹함은 앞날을 걱정케 한다. 영화의 만듦새와 극단의 이데올로기를 부추기는 요소들의 향연을 뒤로 한채, 전쟁을 미화하는 본새가 그렇다. 앞으로 전쟁영화는 반드시 또 나올 텐데, 모르긴 몰라도 아마 <고지전>이 아닌 <인천상륙작전>류일 가능성이 크다. 정녕 또 한 번 전쟁을 치르고 싶은 것인가?


영화에 많은 논란이 있음에도, 나아가 전쟁영화가 만들어지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고지전>을 되새겨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린 진실을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 거기에 지옥이 있을지라도, 아니 아마 지옥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할 텐데 그럼에도 우린 바로 그곳을 주시해야 한다. 지금도 어딘가에선 지옥과도 같은 '고지전쟁'이 펼쳐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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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쓰쓰이 아스타카의 <모나드의 영역>


소설 <모나드의 영역> 표지 ⓒ은행나무



독자가 책을 접할 때 출판사의 홍보 마케팅 전략 바깥에 있기는 결코 쉽지 않다. 어떤 상품이 그러지 않겠냐마는 책은 다르다. '책'이라는 단일 상품군 안에 샐 수 없이 많은 상품이 존재하는 것이다. 특별한 상품이자 특별한 사업 생태계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거기엔 정녕 수많은 '최고'들이 존재한다. 


'책', 그 중에서도 '소설'은 최근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읽을 거리와 각종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정보는 주지 못하고 읽는 데에 방점을 둔 '소설'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그 와중에 우리나라에서 '일본 소설'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북유럽 소설의 인기가 수직 상승 중이지만 한계가 분명한 반면, 일본 소설은 꾸준히 인기가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등은 그들의 거의 모든 소설이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로 사랑받고 있다. 일본 소설만이 갖는 정서가 작금의 한국 독자에게 잘 들어맞는 것 같다. 일본 SF 거장 '쓰쓰이 야스타카'의 소설도 그 성격에 비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SF적 상상력에 기반한 블랙유머와 넌센스는 얼핏 난해하지만, 인간사회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 내포되어 있다. 


쓰쓰이 야스타카는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유명한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파프리카>의 원작자로 유명한데, 80세가 훌쩍 넘은 고령임에도 장편소설을 써냈다. 제목도 다분히 쓰쓰이스러운 <모나드의 영역>(은행나무). 마지막 장편소설이라고 하는데, '쓰쓰이 야스타카의 50년 작품 세계의 집대성'이라는 홍보문구가 눈에 띈다. 


쓰쓰이 야스타카만의 진지하지만 기상천외한 상상력


개인적으로 쓰쓰이의 작품을 매우 오랜만에 접하는 바, 이번에도 그 특유의 진지하지만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발휘했을지 기대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숙하게 발휘했다고 할 수 있겠다. 미스터리와 SF의 결합, 그리고 인간 세계를 재조명하는 각종 지식들의 총집합이 자못 흥미롭게 진행된다. 


어느 날 강변 둔치에서 발견된 여성의 한쪽 팔, 수사를 맡은 꽃미남 형사 신이치는 '아주 커다란 어떤 사태의 시작처럼 느껴진다는' 상사의 말에 조심히 수사를 한다. 한편 역 앞 로터리 상가에 위치한 빵집 두 곳 중 하나 '아트베이커리', 미대생 알바를 둔 덕분에 평소 동물 모양의 빵을 팔고 있다. 갑자기 휴가를 신청하는 알바 둘, 자기들보다 실력이 더 좋은 친구를 알아봐뒀다고 호언장담한다. 


실력이 더 좋다는 친구 구리모토, 어딘지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과연 실력은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여성의 한쪽 팔과 똑같은 모양의 빵을 만든 게 아닌가? 자기도 모르게 만들었다는 그, 그 와중에 단골 손님인 미대 유이노 교수가 그 빵을 본다. 그 정교함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는 칼럼에 개재한다. 곧 팔 모양 빵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하고 방송도 탄다. 


구리모토 때문에 잘리게 된 알바 둘과 망하게 생긴 맞은 편 빵집 주인은 이 상황을 보고, 그 빵 모양이 강변 둔치에서 발견된 여성의 한쪽 팔과 완전히 똑같다고 경찰에 신고를 한다. 신이치는 빵집으로 향하지만, 구리모토는 찾을 수 없고 어딘지 이상한 미대 유이노 교수를 만나게 된다. 곧 유이노 교수는 공원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을 거듭하는데...


'신'의 말을 빌려 해명하는 쓰쓰이의 50년 기행적 소설 쓰기


소설은 여느 추리소설처럼 흥미롭게 시작된다. 여성의 한쪽 팔에 이어 한쪽 다리까지 발견된 상황, 그런데 그와 똑같이 생긴 빵을 만드는 빵집이 있다? 그 와중에 기이한 행동으로 의심을 받고 또 사람들의 이목도 끄는 미대 학생 구리모토와 미대 교수 유이노까지. 다 갖춰진 느낌이다. 그런데 사건은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지점에서 쓰쓰이 야스타카만의 상상력이 빛을 발한다. 진지하지만 기상천외한, 즉 일상생활을 파괴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 아니 일상생활은 그대로 둔 채 그를 둘러싸고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지극히 마니아적이라고 하겠는데, 그만의 세계가 하나뿐이 아니고 참으로 다채로워 그 층위가 높고 넓다. 


단도직입적으로 소설은 '신의 강림'이라는 소재를 주요 위치에 두었다. 신은 세상의 비밀을 무참히 폭로한다. 그 방법은 다분히 인간적인데, 마지막 장편 소설까지 참 쓰쓰이답다. 상해죄라는 죄목으로 법정에 끌려나온 'GOD', 신은 인간의 말을 빌려 신과 인간세계를 말하고, 그 말들은 조목조목 쓰쓰이가 지난 50년 동안 계속 해온 기행적인(?) 소설 쓰기의 변명 또는 해명처럼 들린다. 그 중심에는 '다중우주'가 있다. 


말인즉슨,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전부는 아니라는 것. 수많은 '가능세계'가 존재하고, 그 각각이 각각의 세계로 존재하며, 신은 이 세계의 근본 원리인 '모나드'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신은 모든 것들을 '사랑'함으로. 신은 쓰쓰이 야스타카의 현현이다. 쓰쓰이가 만든 확고한 세계, 참으로 다양한 그 확고한 세계. 그는 '다중우주' 또는 '다중세계'를 문학 세계 전체에 걸쳐 만들어냈지만, 작품마다 소재로 종종 써 왔다. 그는 '작품의 조물주가 신'이라는 명제를 가장 잘 구현해냈다. 


소설의 '읽는 재미'를 완벽하게 느낄 수 있는 소설


이 소설을 진정 '집대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이 점에 있다. 작가가 신이라는 개체의 목소리를 빌려 자신의 문학 세계를 돌아보고 또 인간 세계를 다시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굳이 '소설'이라는 장르를 빌리지 않고 훨씬 더 잘 표현해낼 수 있었겠지만, 그가 굳이 소설을 이용한 건 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쓰쓰이 야스타카이기 때문이다. 


초를 치는 것 같지만 말해두지 않을 수 있다. 흥미를 끄는 초반의 사건, 그러곤 갑자기 신이 강림하는 그 연계점이 상당히 부실해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후반부에서 이를 신다운 명철함으로 훌륭히 봉합하지만, 그때까지 꺼림칙함을 벗어버릴 수 없을 거다. 이 또한 그의 대단함으로 치환할 수 있는 바, 이밖에도 여러 점들이 눈에 띄어 상당히 괴롭히지만 우리는 그가 가리키는 달을 보고 있지 달을 가리키는 손을 보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 알면서도 여유작작하게 그것을 해낼 수 있는 작가다. 


'이 소설을 보고 쓰쓰이의 전작들에 눈길이 갈까?' 하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는데, 그리 가능성이 높진 않은 것 같다. 적어도 이 소설 자체로만 본다면 말이다.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특별하게 다가올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실망으로 다가올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물론 열광할 부분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우린 이 얇은 소설에서 천재적인 상상력이 선사하는 인류적 반전을 맛볼 수 있을 테고,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선사했던 따뜻함의 업그레이드 버젼을 받을 수 있을 테며, 일본 소설의 한 축을 단 번에 흡수하는 황홀감을 얻을 수 있을 테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무너져 가는 '소설'의 자존심인 '읽는 재미'를 완벽하게 느낄 수 있을 게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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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하트 오브 더 씨>



영화 <하트 오브 더 씨> 포스터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어두운 밤, 젊은 남자가 늙은 남자의 집을 찾는다. 젊은 남자는 전재산을 늙은 남자 앞에 내밀며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라고 부탁한다. 늙은 남자는 한사코 강하게 거절한다. 이에 젊은 남자도 강하게 밀어붙이지만 결국 거절 당한다. 그때 늙은 남자의 아내가 나선다. 그녀도 평생 듣고 싶었지만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다. 아내의 부탁으로 늙은 남자는 입을 연다. 


젊은 남자는 훗날 늙은 남자가 들려준 이야기를 바탕으로 <모비딕>이라는 희대의 걸작을 탄생 시킨다. 젊은 남자는 다름 아닌 '허먼 멜빌'이다. 늙은 남자는 1819년 여름, 미국 낸터킷 섬에서 출항했던 포경선 에식스호에 승선한 21명의 선원 중 한 명이다. 그는 에식스호에서 세상 누구도 겪어보지 못했을 그런 일을 겪었고, 그 이야기를 허먼 멜빌에게 해준다. 늙은 남자는 '토마스 니커슨'이다. 


해양 블록버스터에서 조난으로


영화 <하트 오브 더 씨>는 이처럼 참으로 재미없게 시작한다. 해양 블록버스터에서 조난으로 이어지는 스토리라는 걸 알고 영화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같은 시작은 그리 반길 만하지 못하다. 중요한 건 얼마나 스펙터클한 장면을 선사할 것인지,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생존을 얼마나 처절하게 그려낼 것인지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현재와 함께 정확히 시간의 순서대로의 회상을 번갈아 이어간다. 


포경선 에식스호에는 본래 오웬 체이스(크리스 헴스워스 분)이 선장으로 약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체이스는 귀족 출신이 아닌 바, 약속은 약속일 뿐이었다. 선주는 체이스를 일등 항해사로 삼고 선장 대신 많은 돈을 주기로 약속한다. 단, 기준 이상의 많은 향유를 가지고 와야 했다. 한편, 선장은 유명한 귀족 가문의 조지 폴라드(벤자민 워커 분)가 되었다. 체이스가 보기에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마치 온갖 전투에서 잔뼈가 굵은 상사 급이 이제 막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높으신 분의 아들 소위를 상사로 모시고 전투를 치르러 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떠난 여정, 얼마 가지 못해 고래 사냥을 제대로 하지도 못한 채 강한 풍랑을 만난다.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선장 대신, 일등 항해사 체이스와 이등 항해사 조이가 진두지휘 한다. 자존심에 상한 폴라드 선장은 무리하게 전진한다. 선장으로의 자존심, 어떻게든 향유를 얻어야 한다는 조바심, 자연의 무서움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무지함이 드러난 참사와 같은 결정이었다. 



영화 <하트 오브 더 씨>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거대한 자연이냐, 육지의 왕 인간이냐


계속되는 전진 끝에 에식스호는 소기의 목적을 이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흰고래의 습격으로 배가 한순간에 침몰한다. 선원들은 조그만 한 배에 옮겨 타 여정을 계속한다. 계속 쫓아오는 흰고래의 습격으로 무인도에 조난을 당하기도 한다. 그곳에서 폴라드와 체이스는 대립한다. 흰고래의 습격을 받고도 작살을 던지지 못한 체이스였다. 


체이스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는 먼지보다 못한 존재다"라고 말을 건넨다. 이에 폴라드는 "우리는 육지의 왕이며, 싸울 기회가 생긴다면 남자답게 싸우며 죽겠다 "라고 받아 친다. 누구의 말이 정답인지는 알기 힘들지만, 영화는 체이스의 말이 맞다는 걸 보여주는 듯하다. 


영화는 해양 블록버스터의 느낌을 물씬 풍기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건 다름 아닌 자연과의 치열한 사투이다. 그 사투를 누구보다 많이 경험한 체이스, 그러하기에 누구보다 잘 이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도무지 상대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의 산물 흰고래가 계속해서 나타났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작살은 쓸모 없거니와, 그저 자연에 순응한다는 생각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영화는 해양 블록버스터에서 조난 혹은 재난으로 이어진다. 영화는 적막에 휩싸인다. 



영화 <하트 오브 더 씨>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정녕 실망인 반전, 그래도 '론 하워드'


조난의 여정은 참으로 오래 이어진다. 94일 간 7,200km의 표류. 희망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이 절망 만이 계속되는 망망대해.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다리는 거였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 자신들을 구조해줄 배를 만나는 거, 또는 육지가 보이는 거. 그렇지만 너무 오래 지속되는 표류의 나날은 그 기다림의 희망도 온 데 간 데 없게 했다. 그렇게 그들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지르게 된다. 가장 비극적인. 


문제는 막상 그 비극적인 선택의 전말을 알게 되면, 참으로 허무하기 짝이 없다는 거다. 이미 보지 않았는가? 영화 <파이 이야기>를 통해서 말이다. 이 거대한 여정의 끝에서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하게 된 그 비극의 전말이 늙은 토마스 니커슨이 평생 숨기며 살았던 사실이며, 그것이 이 서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반전이라면 실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녕 실망이다. 안타깝기 그지 없다.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 반전이 이 영화에서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감동의 층위를 깎아내리며,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고래와 인간을 더 심층적으로, 사실과는 다르더라도 다른 측면으로 그려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아예 정통 스타일로, 바다 위에서의 자연과 인간의 사투를 그려냈어도 차라리 좋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갖는 분위기, '론 하워드' 감독 만의 꼼꼼한 연출, 전혀 엉성함이 보이지 않는 영상 등에선 흠잡을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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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네메시스>



<네메시스> ⓒ문학동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4년 미국 뉴저지의 뉴어크 지역, 폴리오 바이러스가 발병한다. 이 치명적인 전염병은 주로 열여섯 이하의 아이들에게 걸리며, 마비로 인해 기형적인 불구자가 되거나 죽음에 이르게 했다. 백신이 없는 상태였기에 발병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감염된 사람에게 가까이 있기만 해도 옮을 수 있었기에 쉽지 않았다. 동네는 불안에 사로잡혔고 평화는 깨졌다. 아이를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은 도시를 벗어나 산이나 시골의 여름 캠프에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메르스 사태와 흡사한 라인을 가진 이 이야기는 필립 로스의 마지막 소설이라 일컬어지는 <네메시스>의 초반부이다. '네메시스'라 하면 '보복'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보복의 여신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바이러스와 복수에 얽힌 이야기를 할 것인가? 일단 제목의 뜻풀이와 소설 배경의 조화가 합격점. 문제는 필립 로스가 마지막으로 던지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인가 이다. 


훌륭한 만큼 죄책감에 시달린 청년


소설은 놀이터 감독인 이십삼 세 청년 버키 캔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버키는 키는 작지만 단단한 몸에 운동선수로서 능력이 출중하고 강인한 의지로 가득 차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전쟁터에 싸우러 나가지 않은 극소수의 청년 중 하나였는데, 치명적으로 시력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버키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두고 하염없이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런 자신을 용납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법이 놀이터 감독으로서 아이들을 폴리오에게서 방어하는 것이었다. 폴리오 방어를 제2차 세계대전과 버금가는 전쟁으로 생각하고서 말이다. 버키는 자신이 있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한테서 받은 따뜻하고 다감하며 강인하고 건전한 몸과 마음의 균형이 그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형편없는 시력이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듯이, 폴리오가 아이들을 위협하는 것도 그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관리하는 놀이터에 폴리오가 침투하기 시작한다. 


어떤 일을 수행함에 있어 완벽함을 추구하며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완벽하게 일을 수행하지 못했을 때 받게 되는 죄책감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충분히 할 수 있는 건데 하지 못했고, 나 때문에 일을 수행하지 못했다. 나는 정말 못난 사람이고,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이런 경우 파국으로 치닫기 쉽다. 그렇지만 그는 누가 봐도 강인하고 훌륭한 사람이다. 


계속되는 죄책감 퍼레이드, 그리고 최악의 결과


훌륭한 젊은이 버키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그 훌륭함에 버금가는 죄책감을 지니고 있다. 폴리오에게서 아이들을 지켜내지 못했을 때 그가 괴로워하며 죄책감을 느낀 이유는 그가 그만큼 훌륭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그의 죄책감 퍼레이드는 놀이터를 떠나 파라다이스에서도 계속된다. 그는 폭염의 뉴어크를 떠나 약혼녀가 있는 인디언 힐 여름 캠프로 간다. 그곳의 물놀이 감독이 징집 되어 그 자리를 이어받기 위해서 였다. 약혼녀 마샤의 입김이 많이 작용했는데, 그녀는 버키가 폴리오 때문에 위험한 뉴어크를 떠나 안전한 인디언 힐로 왔으면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최악의 결과를 낳고 만다.


폴리오는 인디언 힐도 덮친 것이다. 문제는 이번에도 버키의 죄책감이었다. 버키는 인디언 힐에 폴리오를 옮긴 사람이 자신이라는 판단을 스스로 해버렸고, 나아가 뉴어크 놀이터에 폴리오를 옮기게 한 사람도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놀이터에 이탈리아인이 찾아왔을 때 제대로 대응을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도 그들의 행패에 잘 대응했었다. 버키는 그런 사람이었다. 


의무와 죄책감과 의지 그리고 두려움


소설은 뒷부분에 반전을 숨겨두고 있다. 그 반전으로 소설은 훌륭하게 균형을 잡으며 끝을 맺는다. '그런 사람'인 버키는 아마도 쉬운 길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이해할 수 없는 생각과 행동을 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올바른 삶은 산 것일까? 올바르지만 멍청한 삶을 산 것일까?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것일까? 


소설은 사망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전염병인 폴리오를 주요 소재로 그리고 있다.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지며 오싹함과 두려움을 감추기 힘들다. 메르스에 공포가 확산일로에 있는 현재, 폴리오에 대한 감정이입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죽지는 않을 지라도 평생 불구로 살아가게 될 거라는 무시무시한 전언은 덤이다. 하지만 버키에게 그보다 더 두려웠던 건 다른 데 있었다. 


버키의 심경은 다음과 같이 변해 간다.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 아이들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 신을 향해 포효하며 현실에 대해 분개하는 의지, 자신에게 들이닥칠지 모르는 알 수 없는 병에 대한 두려움. 버키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걸 두려워했다.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 없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의무와 죄책감 그리고 분노만 쌓여갔다. 두려워하면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지 못했고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렇지만 버키가 보여준 일련의 심경은 국민을 지켜야 하는 수장의 그것과 동일하다. 아니, 수장이 버키의 심경과 동일해야 한다. 그 자신을 파국으로 몰고 가라는 게 아니라, 그때까지 심경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의무와 죄책감과 분노 그리고 의지를 보여줘야 하는 게 수장이 아닐까. 버키가 뉴어크에서 인디언 힐로 갈 때 놀이터의 관리자가 버키에게 한 치명적인 말을 옮겨 본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응? 당연히 선택할 수 있지. 자네가 지금 하고 있는 걸 바로 선택하는 거라고 해. 자네는 지금 폴리오한테서 도망치는 거야. 일을 하겠다고 계약을 했는데 폴리오가 발생하니까 일 같은 건 난 모르겠다, 약속 같은 건 난 모르겠다, 하고 있는 힘을 다해 미친듯이 달아나는 거야. 자네가 하는 건 그저 달아나는 것일 뿐이라고." (본문 중에서)


네메시스 - 8점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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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결혼식 전날>


<결혼식 전날> ⓒ애니북스

개인적으로 '단편 만화'를 접한 적이 없다. 한 컷이나 4 컷 만화를 단편이라 할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일정 정도 이상의 스토리와 서사가 존재한다는 전재 하에, 단편 만화는 일단 제작하기가 너무 힘들 것이다. 


글로만 표현하는 단편 소설과 달리, 단편 만화는 독자들로 하여금 단 한 컷 만으로도 전달 받을 수 있는 것들이 엄청 많다. 단편 소설은 독자가 상상을 해야 하는 바가 많기 때문에, 단편 소설의 묘미인 '반전'을 보여주는 데 적합하다. 그래서 단편 만화보다는 짧은 몇 컷의 만화가 더 인기가 많으며 활발히 만들어지는 것 같다. 


'단편 만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다


사실상 이번에 처음 접하게 된 '단편 만화' <결혼식 전날>(애니북스)는 이런 고정관념 아닌 고정관념을 완벽히 상세해주고도 남는 작품이다. 단편 만화 모음집이니 작품들이라 해야 맞겠다. 6편이 실린 이 모음집의 제목은 첫 번째 작품인 '결혼식 전날'에서 따왔다. 


표지는 지극히 평범하다. 표사나 띠지에서는 놀라운 반전과 따뜻한 감동의 이중주를 선전한다. 반전과 감동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던 바, 얼마 만큼의 감동과 어느 정도의 반전이 있기에 전면에 내세웠는지 궁금해졌다. 만약 이 둘을 훌륭히 접목 시킬 수 있다면, 기억에 꽤 오래 남아 있을 만화일 터였다. 


결론적으로 말해, 모든 단편들에서 반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감동까지도. 감동과 반전의 시너지를 발견할 수 있었냐고 물으신다면, 확실한 대답을 해드릴 수 없겠다. 어떤 만화는 그랬고, 어떤 만화는 그렇지 못했다. 표제작 '결혼식 전날'이 감동과 반전을 제일 잘 접목 시켰다고 보인다. 그리고 이 만화의 뒷 이야기('뒷 이야기'라는 것 자체가 반전의 스포일러이다.)인 6번째 만화 '그후'도 좋았다.


다른 만화 4편은 그리 와 닿지 않았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제일 좋은 만화로 다가갈 것이 분명한 2번째 만화 '아즈사 2호로 재회'는 개인적으로는 작위적이게 다가왔다. 감동을 극대화 시키기 위해 반전을 억지로 넣은 느낌이다. 그건 5번째 만화도 마찬가지이다. 그 밖의 다른 만화는, 반전을 시도한 것 같은데 어떤 게 반전인지 잘 모르겠고 내용 자체도 그리 감동적이지 않았다. 


감동과 반전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결혼식 전날>의 한 장면. ⓒ애니북스



반면 '결혼식 전날'은 그야말로 잔잔하다 못해 자칫 지루하기까지 할 일상의 단면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너무 예쁘게 다가온다. 억지로 쥐어 짜지 않았는데도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건 아마 우리네 실생활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반전이라는 장치조차 '이게 현실에서는 가능한 일인가?'라는 의구심이 들지 않게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을 이 만화는 해냈다. 


감동은 스토리와 그림체, 반전은 주인공의 독백이 거든다. 이 중에서 단연 압권은 '그림체'이다. 무심한 얼굴에서 종종 보이는 옅은 미소, 환한 미소에서 보이는 슬픈 얼굴과 갑작스러운 눈물. 이런 모습들을 완벽히 구사해내는 그림체는 잔잔하지만 강렬하다. 


이 모음집에 수록된 만화들의 공통된 소재이자 주제는 '두 사람'이다. 누나와 동생, 아빠와 딸, 형과 동생, 오빠와 동생 등 누구나의 삶에서 당연한 듯 존재하는 '두 사람'이다. 여기서 공통적인 사항을 발견할 수 있다. '두 사람'이 모두 가족이라는 사실. 그래서 인지 이 만화를 보고 나면, 왠지 모를 애뜻함과 따뜻함이 저 밑에서 올라오는 것 같다. 가을이 가기 전 만화로 가족을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갖는 경험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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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표지 ⓒ 다산책방

난 현재 평범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남들처럼 아침에 지친 몸을 일으켜 세워 아침도 먹지 않은 채 출근길을 재촉해 출근을 완료하고 정신없이 오전을 보낸다. 점심을 먹고 졸음을 참아가며 오후를 보내고 퇴근을 기다린다. 퇴근길에는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책을 탐독하고 집에서 저녁을 먹는다. 컴퓨터를 하고 TV를 보다가 잠자리에 든다. 너무나 단조롭고 평범한 일상이 계속 되다보니, 이 범주 밖에서의 기억들은 자연스레 해체된다.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 한 시간이 흘러 온전히 기억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간다. 


누군가 나의 말이나 행동에 상처 받거나 감동을 받았을지 모른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내 평생에 걸쳐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장면이 있지만, 정작 장면 속 주인공은 기억하지 못할 때가 허다하다. 그래서 그에 관련된 무엇을 간직해 놓거나 기록해 놓는다. 그리고 그것을 보며 기억을 떠올려본다. 하지만 온전히 떠올리기에 불충분하다. 그렇게 부정확한 기억과 불충분한 문서가 만나 한 사람의 역사가 만들어진다. 그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다. 


2011년 세계적 권위의 영어권 최고 문학상인 부커상을 수상한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다산책방)는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는 노년의 주인공이 불충분한 문서를 얻게 되면서 일어나게 되는 일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부정확한 기억에 의지해 이 문서가 무엇인지 추론해 보지만,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너무나 뜬금없고 생각지도 못했던 문서이다.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어린 시절(중학교 때)과 노년 시절을 구분 짓는다. 1부의 어린 시절은 주인공 토니의 부정확한 기억으로 기반한다. 그에겐 친한 두 친구가 있었고, 그 시절엔 으레 그렇듯이 허영심이 가득했다. 그런 그들 앞에 '진짜'가 나타난다. 전학생 에이드리언이다. 그는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아주 명철하고 이성적인 철학자와 같은 생각과 행동을 보였다. 


그러던 중, 그리 친하지는 않은 친구인 롭슨이 자살을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소문이 떠돌기 시작한다. 제일 유력한 진상으로 그와 여자친구 사이에서 아기가 생겨서 자살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토니와 에이드리언을 비롯한 친구들은 갖가지 허영심에 가득 찬 해석을 한다. 에이드리언은 역사 시간에 선생님의 질문인 '역사란 무엇인가'의 대답에서 롭슨의 자살을 예로 들며 이 해석에 종지부를 찍는 발언을 한다. 그리고 이 해석은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중략) 우린 그가 죽었다는 것, 그에게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것, 그녀가 현재 임신했다는 것, 아니면 과거에 그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외에 우리가 뭘 알고 있을까요?(본문 속에서)


토니에게 베로니카라는 여자친구가 생긴다. 허세만 있을 뿐 실세는 없는 토니는 베로니카에게 숙맥 같은 모습을 보인다. 베로니카는 이에 싫증을 느낀 것일까? 결국 그들은 헤어지고 시간이 흘러 베로니카는 에이드리언과 사귀게 된다. 에이드리언은 이를 허락받기 위해 토니에게 편지를 쓴다. 토니도 이에 성실히 답변을 해준다. '아주 유하게'


한편, 토니는 베로니카와 헤어지기 전 베로니카 집에 초대를 받는다. 그녀의 가족들은 알듯 모를 듯 뭔지 모를 위화감이 들게 한다. 그곳에서의 기억들이 훗날 토니에게 다가올 거대한 파국의 강도를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된다. 흩어져 있던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면서. 


그리고 시간이 흘러 토니는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친구들과 만나서 그가 왜 자살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너무 똑똑해서 자살을 했다? 그들로써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는 에이드리언의 자살이었다. 


2부는 토니의 현재인 노년 시절을 이야기한다. 작가가 묘사하는 노년 시절은 아주 섬세하고 실제적이다. 그 노년의 이야기만 놓고 보면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문학동네)에 필적하고도 남는다. 어떤 면에서는 더욱 와 닿기도 한다. 이 소설을 즐김에 있어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과는 약간 다르지만 잠시 머리를 식히며 쉬어가는 페이지로 너무나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토니는 어느 날 우연히 문서를 발견한다. 그 문서는 편지봉투이다. '고 사라 포드 여사의 재산 처분 문제'로 집 주소를 확인하고 여권 사본을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오백 파운드와 두 개의 '문서'가 남겨졌다는 것. 오백 파운드는 포드 여사의 유산이다. 두 개의 문서 중 한 개는 포드 여사의 유언, 두 번째 편지는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이다. 이 일기장은 현재 베로니카의 소유로 되어 있다. 하지만 포드 여사의 유서 내용 상으로는 토니의 것이기에 토니는 베로니카를 찾아 나선다. 그녀와 만나게 되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거대한 파국으로 점점 다가가게 된다. 


그런데 토니에게는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베로니카의 어머니인 하라 포드 여사가 왜 유산과 유언을 자신에게 남겼고,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왜 하라 포드 여사가 가지고 있었는지, 그걸 또 어떻게 베로니카가 소유하고 있는지. 이 모든 궁금증을 풀기 위해선 베로니카를 만나야 했다. 


결국 베로니카를 만나게 되었고, 그녀로부터 충격적 사실을 듣게 된다. 에이드리언이 토니에게 베로니카와 사귀는 것을 허락 받는 편지를 보냈고 이에 대해 토니가 답장을 보냈을 때, 그 내용은 '아주 유하게'가 아니라 '아주 격하게'였다는 것이다. 그의 기억은 완전히 반대로 되어 있었다. 


나는 이 편지를 몇 번에 걸쳐 읽고 또 읽었다. 내가 그 편지를 썼다는 사실이나 그렇게 험담을 퍼부었다는 것을 부인하기가 어려웠다. 행여 하소연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 편지를 쓴 당시의 나와 현재의 나는 다르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이지, 나의 어떤 성정이 나를 부추겨 그런 편지를 쓰게 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본문 속에서)


'부정확한 기억'에 대한 충격, 그리고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토니의 아주 격한 편지에 대한 충격. 그리고 이어지는 베로니카가 데리고 다니는 조금은 지능이 낮아 보이는 아이에 얽힌 충격. 여기에 또 다시 이어지는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 포드 여사와 에이드리언에 얽힌 충격적 반전. 


소설은 토니의 정확해 보이는 기억에 기반한 어린 시절을 시작으로, 그의 평온한 노년 시절을 지나, 마구 쏟아지는 충격과 거대한 비극적 반전으로 끝을 맺는다. 부정확한 기억과 닫힌 뇌의 폐쇄 회로는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경구를 무색하게 만든다. 그 끝에는 거대한 혼란만이 남아 있다. 


언뜻 보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는 제목은 소설의 내용과는 정반대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읽는 사람에 따라 확실히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마케팅적인 측면이 강한 제목이었다고 생각된다. 책으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데는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지만 읽을 때는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았나 싶다. 


내용면에서도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작가인 줄리언 반스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스토리에 완전히 녹아들지 만은 않는 내용들이 언뜻 언뜻 보인다. 이런 내용들이 누구에게는 좋게 다가오고 누구에게는 너무 생소하고 뜬금없어 나쁘게 다가올 것이다. 


마지막 최후의 반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지만, 내용을 밝히지는 않겠다. 마지막 두 페이지에서 최후의 반전이 전개되는데, 웬만한 독자도 이 반전을 알게 된 후 바로 책을 덮지는 못할 것이다. 중간 중간 메모를 하지 않은 이상, 앞을 다시 뒤적일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한 반전이지만, 주인공 1인칭 시점이 발목을 잡는다. 시종일관 토니의 입장에서만 서술되기 때문에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독자가 아는 사실은 거의 없다. 토니의 부정확한 기억과 토니가 얻게 된 불충분한 문서가 전부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읽고 나서도 뒷맛이 개운치 만은 않다. 여전히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다. 모든 걸 해결하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알 도리가 없다. 처음 읽을 때는 주인공의 시선을 쫓아가기 바쁘겠지만, 다시 한 번 읽게 될 때는 모든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짧고 잘 읽히는 이 소설이 결코 짧게만 느껴지지는 않는 이유이다. 소설 작법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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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전쟁의 슬픔>


<전쟁의 슬픔> ⓒ아시아

전후 세대에게 전쟁은 고통, 슬픔, 분노, 아픔 등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아마도 전쟁마저도 상품으로 팔아 먹으려는 자본주의의 첨병들 때문이다. 그들은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듯, 전쟁을 게임, 영화, 드라마, 소설 등의 각종 콘텐츠부터 레크레이션이나 일일 체험으로까지 발전시켰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여 실제와 거의 흡사한 체험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이로 하여금 전쟁의 진면목을 겪게 할 수는 없다. 이는 오히려 전쟁을 이용하려는 자들에게는 잘된 바, 전장에서의 긴장감은 스릴로, 죽고 죽이는 고통은 쾌감으로, 전쟁의 시작과 끝에서 겪는 아픔과 허무함은 각각 설렘과 영웅적 자부심으로 바뀌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전쟁의 고통, 슬픔, 분노, 아픔 등이 

더욱 될수록 간접 경험을 하는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재미'있게 다가 오게 된다. 


또한 전쟁의 시작에는 정치적 입김이 다분히 작용하는 바, 전쟁을 일으킨 정치 권력자들은 이념 또는 정치의 방향을 선전하는 도구로 전쟁을 이용한다. 자연스레 전쟁 자체에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전쟁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모자라 전쟁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게끔 한다. 그 때문에 무고하게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필자 또한 비교적 어릴 때부터 전쟁에 대한 수많은 콘텐츠들을 접하며, 어느새 전쟁을 '동경'하기까지 했다.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그들이 숭고하고 멋있고 닮고 싶으며 나도 전쟁에 참여해 영웅이 되고 싶기까지 하였다. 특히 남자라면 상당 부분 동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겪은' 전쟁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영화 <지옥의 묵시록>이 '반전(反戰)'이라는 메시지를 남기려고 할 때, 왜 그렇게 화끈한 전투 장면이 계속되지 않는지 불만만 늘어 놓곤 했다. 


알 수 없는 그러나 매우 명백한 슬픔과 공존하다


그렇게 '전쟁광'적인 측면에 매몰되어 가고 있을 때 <전쟁의 슬픔>(아시아)이라는 작품을 접하였다. 전쟁에 당연히 슬픔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고 그런 반전 소설이겠거니 생각하며, 정치적이며 화끈하지 않은 원론적인 이야기를 예상했다. 다만 작가 바오 닌이 실제로 베트남 전쟁에 출전한 경력이 있으며, 자그마치 6년 동안 최전선에서 싸웠다는 사실이 전투 장면들의 실제적인 묘사를 기대하게 했을 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상했던 것과 소설 간의 괴리는 너무나 컸다. 소설 내적(내용)으로, 기대했던 실제적인 묘사는 기대 이상이었고 원론적인 이야기가 아닌 실제적인 이야기로 반전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예상 외로 이 반전으로의 주장을 함에 있어 '사랑'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 지독한 전쟁 뿐만 아니라 지독한 사랑도 이 소설에서의 슬픔에 크게 작용했다. 


한편 소설 외적(기법)으로, 문체에 슬픔이 뚝뚝 묻어 났다. 경험해본 자만이 쓸 수 있는 지독한 슬픔의 글이었다. 또한 그 슬픔을 가장 잘 표현해 내는 구성이었다. 시간과 공간을 어지럽게 오가는 구성은 그 자체로 주인공이 느끼는 슬픔이 독자에게도 느끼게끔 하였다. 책을 읽는 내내 알 수 없는 그러나 매우 명백하게 느낄 수 있는 슬픔과 공존했다. 


"그를 괴롭히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주요한 상념들이 희미해질 만큼 모든 생각이 뒤죽박죽되고, 어떤 맥락도 없이, 모든 감정과 사고가 뒤섞이는 듯했다. 물론 그는 알고 있었다. 끊긴 생각, 두서없는 이야기, 보이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의 한계에 고통스러워하는 영혼을 해방시켜 주는 것들이었다." (본문 중에서)


결국 아무것도 잊을 수 없다


주인공 끼엔은 17살의 어린 나이에 평생을 함께할 여인과 불미스러운 일로 헤어지며 입대한다. 그렇게 전쟁의 시작에서 끝까지 함께 하며 10년을 전쟁터에서 보낸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지독한 운으로 생존한 그는 10년 전 헤어진 연인 프엉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듯, 이미 그녀와의 관계는 파탄이 난 상태였다. 


이번에는 거꾸로 프엉이 끼엔을 떠나게 된다. 이후 끼엔은 그 슬픔과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술로 지탱하며 소설을 씀으로써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순화 시킨다. 그가 쓰는 소설은 그가 겪었던 전쟁의 슬픔, 시대의 슬픔, 사랑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그의 마음은 이미 갈가리 찢겨 봉합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지만, 과거의 그 슬픔들을 다 끄집어 내서 다시금 자신의 마음을 찢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운명이, 시대가, 국가가, 사회가, 그리고 이 전쟁이, 이 사랑이 슬픔의 원인이라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그는 어쩌면 영원히 고통스러울 것이었다. 늘 어둡고, 고통스러운 가운데 악몽과 현실 사이에서 남은 인생을 높고 가파른 절벽 위를 오가듯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10년 전에도, 지금도,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계속 살아가야 할 것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잊을 수 없다. 슬픔과 고통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어 전쟁을 거치고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하나로 커다랗게 뭉쳐진 응어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통을 받아들여야 세상에 태어날 수 있듯이, 또한 삶을 다하는 날까지 고통 때문에 살아야 하며 행복을 추구하고 사랑을 하고 예술을 하고 즐기고 견뎌야 하리라." (본문 중에서)


전쟁의 슬픔에 사랑을 녹여낸 탁월한 선택


이 소설의 미덕은 이렇게 모든 슬픔을 있는 그대로 끄집어냄으로써, 어떠한 과장도 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특히 전쟁에 관해서는 개인이 간직해 왔던, 결코 꺼낼 수 없었던 치욕적인 부분을 내보이고 이는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살기 위해 눈 앞에서 동료가 처참하게 강간을 당하고 결국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숨죽인 채 지켜보는 장면. 그리고 전쟁에서의 승리로 인해 영웅적일 것만 같은 참전 용사들의 추잡하기 그지 없는 모습(술로 삶을 지탱하고, 죽은 자들이 나오는 악몽을 꾸며, 망가진 몸과 마음으로 망가진 인생을 살아가는)까지. 


한편 망가진 인생을 표현함에 있어 망가진(정연하지 못한) 구성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표현 방식이지만, 이런 뒤죽박죽의 느낌은 자칫 작가의 능력을 잘못 파악하게 만들 수 있다. 오롯이 서사를 따라 진행되었다면, 이 슬픔을 더욱더 깊이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랑과 우정, 그리고 전쟁의 슬픔, 전후의 아픔까지 그린 전쟁 대서사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통속적인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를 범했을 지도 모르기에 단언할 수는 없을 듯하다. 


마지막 부분의 반전(反轉)에 이르러서야 절실히 깨닫고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깨닫지만, 전쟁의 슬픔에 사랑의 절절함을 녹여 낸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쟁의 슬픔이 단순히 전쟁에 따른 슬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슬픔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로 슬픔, 고통, 아픔의 3중주를 가뿐히 넘어서는 사랑의 힘이다. 하지만 전쟁의 포화는 사랑마저 휩쓸어 버렸다. 사랑은 전쟁이 잉태한 부정을 이길 수 있었지만, 전쟁 자체를 이길 수 없었다. 


"정의가 승리했고, 인간애가 승리했다. 그러나 악과 죽음과 비인간적인 폭력도 승리했다. 들여다보고 성찰해보면 사실이 그렇다. 손실된 것, 잃은 것은 보상할 수 있고, 상처는 아물고, 고통은 누그러든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슬픔은 나날이 깊어지고, 절대로 나아지지 않는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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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영화 <관상> 포스터 ⓒ쇼박스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단종1)에 당시 왕의 숙부였던 수양대군이 일으킨 친위 쿠데타. 3정승(황보인, 김종서, 정분)을 비롯해 여러 대신들을 죽이고 반대파를 숙청하여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일찍이 이방원이 일으켰던 왕자의 난과는 다르게 명분다운 명분이 없었다. 기껏 명분이 김종서를 죽이고 나서 말했던 김종서의 모반이었다.

 

이 나라가 이 씨의 것이냐 김 씨의 것이냐?”

 

영화 <관상>은 조선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인 계유정난을 배경으로 한다. 그 한 가운데에 조용히 살아가는 천재 관상쟁이 내경(송강호 분)이 뛰어든다. 그리고 그의 처남 팽헌(조정석 분)과 아들인 진형(이종석 분)이 같이 한다. 역적 집안이었기에 조용히 살고 있었던 그들은 서울에서 온 기생 연홍(김혜수 분)의 관상 일에 대한 제안에 따라 서울로 진출한다. 아들 진형은 과거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하기 위해 서울로 진출한다.

 

이들 부자가 공통적으로 했던 생각은 이렇게 재능을 썩인 채 살아갈 순 없다.”였다. 세상을 바꿀 수 없을지 망정, 자신의 삶을 바꿔보려 한 것이다. 한편 팽헌은 진형을 아버지 내경보다 더욱 각별히 생각한다. 이는 뒤에서 영화에 (나아가 조선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관상>의 한 장면 ⓒ쇼박스


실없는 웃음의 향연


영화는 초반을 넘어 중초반까지(40~50) 내경과 팽헌이 아닌 송강호와 조정석 콤비가 이끌어 나간다. 아무리 봐도 그들은 송강호와 조정석이었다. <넘버 3>때부터 일관되게 능청스러운 송강호와 <건축학개론>으로 능청스러움의 계보를 이은 조정석의 코믹 연기 콤비.

 

최소한 이들의 연기는 시종일관 웃음을 유발했다. 아니, 비극적인 이 영화에서 유일한 웃음을 담당했다. 그러나 실없기 짝이 없는 웃음이었다. 다가올 거대한 비극을 예견했던 것일까? 실없음을 넘어 쓸쓸하기까지 하다.


<관상>의 한 장면 ⓒ쇼박스


중초반까지의 실없는 웃음들의 향연이 끝나고 내경 일행이 서울로 진출한 이후, 내경의 천재적인 관상 능력을 알아본 이들의 의해 영화는 급박하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의 능력을 써먹으려는 자들과 그의 능력의 무서움을 알아보고 후환을 제거하려는 자들이 그를 회유하고 협박하는 것이다.

 

내경 일행이 서울로 진출했을 때는 문종이 죽어가던 때였다. 문종은 내경의 관상 능력을 높이 사 세자를 지켜줄 요량으로 역적이 될 만한 상을 알아보도록 한다. 자연스레 김종서와 가까워진 내경. 그는 호랑이상인 김종서(백윤식 분)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이리상인 수양대군(이정재 분)을 보고 역시나 경악을 금치 못한다. 명확하게 역모를 꾸밀 상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본다는 그의 관상 능력으로 볼 때, 계유정난이라는 실제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었다.

 

궁금하지 않은 인물과 스토리를 다루는 방법


여기서 영화는 딜레마에 빠진 듯 보인다. 그리고 이 딜레마를 어느 정도 잘 다룬 것 같다. 누구나가 다 알고 있어 궁금하지 않은 인물과 스토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먼저 인물 같은 경우는 음악으로 다룬다. 코믹스러운 내경과 팽헌의 모습에서는 통통 튀고 장난스러운 음악을 선보인다. 김종서와의 첫 대면에서는 웅장하고 장엄하며 평화스러운 음악을 선보이고, 수양대군과의 첫 대면에서는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위압감과 불량스러움의 음악을 선보이는 식이다.

 

대면하기도 전에 상기된 명확한 정보로 인해 누군인지 알고 있지만, 이를 음악으로 커버해 안정감을 부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뻔한 설정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안정감을 부여한 것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관상>에서의 김종서와 수양대군 ⓒ쇼박스


반면, 영화가 시작할 때 나오는 늙은 대감의 정체와 영화가 거의 끝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명회의 존재는 괜한 궁금증을 일으키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연홍의 존재는 아쉬웠다. 내경으로 하여금 서울로 오게 하고 이름을 널리 알리게 하는 역할이었을까? 영화가 아닌 드라마였다면 절대 빠질 수 없는 감초 역할로 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스토리의 경우는 어떨까? 스토리 역시 명확한 정보로 인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결국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죽일 것이고, 김종서에 붙었던 내경 또한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볼 것이 당연하다. 이를 어떤 식으로 커버할 것인가? 영화는 이를 팽헌과 진형으로 해결하려 한다.

 

진형에게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던 팽헌은 어느 날 진형이 테러를 당한 것을 보고 이성을 잃는다. 김종서가 관리명단의 이름에서 한 사람을 뽑아 단종에게 올리면 단종이 그 위에 점을 찍어 그 사람을 관리로 임명한 황표정사에 대해서 진형이 단종에게 그 폐단을 솔직히 발언하자, 김종서의 부하들이 진형에게 테러를 가한 것이었다. 알고 보니 이는 조작된 것이었지만, 팽헌이 이 사실을 알게 되어 수양대군에게 달려가 김종서의 거사를 밀고한 것이었다. 마치 영화에서 팽헌과 진형이 이 사건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질감이 있지만,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내경 집안이 역적이었다는 걸 초반에 굉장히 부각시켜놓고선 후반으로 가면 아무런 언급조차 없다. 단지 내경과 팽헌과 진형의 서울행을 위한 이유 때문이었나?

 

내경이 서울로 올라와 일사천리로 김종서의 핵심 멤버가 되어 거의 수양대군의 한명회와 동급의 참모 역할을 하게 되는 것 또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 순간부터 영화는 <관상>이 아닌 <계유정난>이 되어버렸고, ‘관상쟁이내경의 존재는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수양대군은 왜 진형을 죽이게 되는지 알 수 없다. 훌륭한 왕이 될 상이라는 내경의 말을 듣고 그 보답이라며 활을 쏴 죽이게 되는데, 이후의 모습을 보니 내경과 진형의 진한 가족애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여러 개성 강한 캐릭터들을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 위에 놓고, 격렬히 부딪히면서도 죽지 않고 살리려는 감독의 의지가 돋보였다. 돋보였지만 성공적으로 잘 이루어졌는지는 의문이다. 살려야 하는 캐릭터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보여줘야 하는 사건들도 많았다. 그래서 컷은 짧게 짧게 그러나 굉장히 많이 나왔지만, 자연스레 러닝 타임이 늘어나 지루한 부분이 종종 보였다. 에필로그는 에필로그다웠지만, 영화에 어울리는 에필로그는 아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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