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클로저>


오랫동안 벼려온 영화 <클로저>. 머리가 커서야 비로소 그 진면목을 알아볼 수 있었다. ⓒ㈜퍼스트런



10여 년 전, 친구의 추천으로 로맨스 영화 한 편을 봤다. 그냥저냥 흔한 로맨스가 아니라고, '진짜 사랑'이 뭔지 생각하게 해줄 거라고, 했던 것 같다. 당시 영화에 막 빠지기 시작해 주로 대중적인 영화를 많이 봤던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영화였다. 당연히 재미는 없었고 결국 기억에 남지 않게 되었다. 다만, 뭔지 모를 찜찜한 여운은 남아 있었다. 


10년 전에는 끝까지 보지 못했었는데 몇 년 전에 한 번 더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도 재밌게 보진 못했던 바, 개인적으로 소설 <위대한 개츠비>와 겹친다. 위대한 소설이라 일컬어지는 <위대한 개츠비>를 나는, 10년 넘게 3번에 걸쳐 읽어내지 못하고 2~3년 전쯤 일사천리로 읽었다. 머리가 커야 이해하고 읽어낼 수 있는 소설인듯, 영화 <클로저>도 나에겐 그런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재개봉 열풍의 끝자락 얼마전 12년 만에 재개봉한 영화 <클로저>, 삼수 끝에 비로소 이해하며 분석하며 재미있고 의미있게 볼 수 있었다. 30대는 되어야 볼 수 있을 것 같은 사랑 이야기 <클로저>는, 사실 사랑을 포함한 인간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렵기 그지 없다. 그래서 이 영화를 다른 각도로 접근할 필요도 있다. 


얄팍한 인간 관계를 사랑으로 들여다보다


겉으로 보기엔, 별 내용 없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삼류 로맨스 영화인 것 같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일류다. ⓒ㈜퍼스트런



수많은 사람들이 출근하는 런던 도심의 아침, 댄(주드 로 분)과 앨리스(나탈리 포트만 분)는 첫눈에 반한다. 앨리스가 댄에게 던진 한 마디 '안녕, 낯선 사람'은 이 운명적인 우연 또는 우연적인 운명의 상징이자 시작이다. 댄은 소설가가 꿈인 신문사 부고 기자이고, 앨리스는 뉴욕에서 온 스트립댄서다. 


앨리스의 삶을 소재로 한 소설로 드디어 데뷔를 한 댄, 책 프로필 사진을 찍기 위해 찾은 사진작가 안나(줄리아 로버츠 분)에게 강렬하게 대쉬한다. 그런 댄이 싫지만은 않은 듯하지만 앨리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멀리하려 한다. 그러곤 그런 안나를 골탕먹이고자 댄이 음란채팅방에서 안나 행세를 해 오프라인 만남까지 성사한 래리(클라이브 오웬 분)와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낯선 사람'이라는 타이틀로 전시회를 연 안나, 댄을 초대한다. 당연히 연인 래리와 댄의 연인 앨리스도 함께 있다. 그럼에도 댄과 안나는 이 전시회를 기점으로 내연 관계로 빠져든다. 이후 안나와 래리는 결혼을 했고 댄과 앨리스는 동거를 시작했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결국 이들은 파국을 향해 치닫게 되는데...


지극히 우연히 만나 연인 관계, 결혼 관계로까지 발전한 댄과 앨리스, 안나와 래리. 하지만 그만큼 우연히 만나 내연 관계로 발전한 댄과 안나도 있다. 그렇다고 래리와 앨리스도 완전히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건 아니다. <클로저>는 이처럼 우연과 낯섬으로 점철된 얄팍한 인간 관계를 사랑의 관점으로 들여다보았다. '사랑'은 수단이고 '관계'과 목적이라 하겠다. 


현대판 <졸업>, 영화 <클로저>


마이크 니콜스 감독은 <졸업>이라는 희대의 명작을 50년 전에 내놓았다. 우린 <클로저>에서 <졸업>을 느낄 수 있다. ⓒ㈜퍼스트런



<클로저>는 2014년에 작고한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살아생전 마지막에서 두 번째 작품이다. 그는 자그마치 50년 전 <졸업>이라는 20세기 최고의 영화를 데뷔 후 불과 두 번째에 찍어냈다. 불안하고 흔들리는 청춘의 일탈과 허무를 세련되고 설득력 있게 표현한 명작으로, 일반적 로맨스 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결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졸업>에서 두 남녀 벤자민과 엘레인이 결혼식장에서 도망치는 명장면을 볼 수 있는데, 그 후 버스에서 보이는 두 남녀의 불안과 허무와 걱정과 허탈함이 뒤섞인 표정에서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인간 심리의 정면을 볼 수 있다. 35여 년이 흐른 후 우리는 <클로저>에서 어김없이 순간이 주는 사랑의 허무를 엿볼 수 있다. 


<클로저>는 현대판 <졸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진짜 사랑'일 거라 생각하고 순간의 선택으로 그 상대에 자신을 내던지는 벤자민. 댄, 앨리스, 안나, 래리는 벤자민의 후예와 다름 없다. 과연 그게 진짜 사랑일까? 많은 세월이 흘러 사랑도 진보해야 할 것 같지만, 이들의 행태를 들여다보면 사랑은 퇴보한 게 분명해 보이기까지 한다. 


인간은 '미지(未知)'를 두려워한다. 우리가 가장 알 수 없는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한편, '미지'에게 끌리는 습성도 있다. 호기심의 발동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낯선 사람'에게 끌리는 인간의 천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겠다. 그러며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남는 게 뭐지? 계속 낯선 사람에게 옮겨다닐 것인가? 


로맨스 영화의 탈을 쓴, 인간 심리와 관계의 명작


이 영화가 명작인 이유는 로맨스와 사랑에 있지 않다. 그걸 수단으로 하는 인간 관계와 심리에 있다. ⓒ㈜퍼스트런



나라고 이 명제에서 자유롭지 못한다. 누구라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가깝고 익숙한 것에 편안함을 느끼며 한없이 머무르고 싶어 하는 습성도, 멀고 낯선 것에 희열을 느끼며 한없이 떠나고 싶어 하는 습성도, 인간은 모두 다 지니고 있다.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기고자 한다. 


고인 물은 썩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한없이 흘러가는 물은 무한정의 좋은 점만 가지고 있는가? <클로저>는 그래서 고인 물을 찬성하고 흘러가는 물을 비난하지 않는다. 흘러가는 물이 고일 때 썩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그러면 흘러가게 놔둬야 할까. 영화는 그 또한 무자비한 거짓만이 판치는 혼란이 있을 거라 말한다.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 영화를 보고는, 어떻게 하라는 건지 조금 짜증도 난다. 로맨스 영화의 탈을 쓰고 인간 천성의 낱낱을 적나라하게 까발려 놓고는 그 어느 쪽도 정답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이 지독한 인간 심리와 관계의 명작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 


<졸업>을 보고 느낀 찜찜함과 내지른 탄성이 <클로저>를 보고도 느껴지고 내질러진다. 내 안에도 이들의 가벼움이 있겠지만, 이들처럼 가볍게 살고 싶진 않다. 그렇지만,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영화만을 볼 때 희대의 명작이라 해도 과찬이 아닐 듯하다. 문제는,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 욕을 하지 않고 볼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는 보고 싶은 않은 네 주인공이지만, 주기적으로 다시 보고 싶어질 것 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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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아무도 모르는 누군가의 몰타>



<아무도 모르는 누군가의 몰타> 표지 ⓒ책미래


족히 10년은 된 듯하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얻어 호주를 1년 다녀왔다. 열심히 일하고 영어를 공부한 다음, 열심히 놀려고 했다. 그 모든 게 다 내 평생 다시 없을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호주에 온 다음 날, 하늘에 뜬 비행기를 보고 집에 가고 싶었다. 도착하자마자 적응도 채 하지 못한 채 일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론 두려웠던 것 같다. 낯선 땅이 아닌, 낯선 자유가. 


큰 기억 없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어설픈 느낌만 남았을 뿐이었다. 자유인지 고독인지 모를 이상한 느낌이었다. 2년 뒤 다시 외국에 나갔다. 이번엔 중국으로, 많은 이들과 함께. 오히려 그곳에서 자유 비슷한 걸 느낄 수 있었다. 왜 한국인들과 함께 있는데 자유를 느끼는 것인가. 그것도 자유는 아니었나? 


생각해보니, 나에게 자유는 고독과 다름 아니었던 것 같다. 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나에겐 자유보다 울타리 안에서의 안정이 더 맞다. 장소가 아닌 사람이 중요한 거라고 스스로 위로해본다. 그래서 자유를 알고 자유를 외치고 자유를 만끽할 줄 아는 사람이 부럽다. <아무도 모르는 누군가의 몰타>(이하 '몰타')는 내가 참으로 먼 이야기지만, 정녕 부러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나라에 가서 살 생각을 하다니. 그곳에서 자유롭게 사는 걸 그렇게도 즐길 수 있는지. 나라면 못할 거다. 


아무도 모르는 세계 최고의 파라다이스 '몰타'


하루에 한 번은 되뇐다. 벗어나고 싶다고. 돈 많이 모아서 나중에 세계 여행을 떠날 거라고. 동시에 드는 생각은, 아마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거다. 20대 때 여기저기 다녀왔으면 된 거 아니냐고 자문하면서. <몰타>의 저자가 나랑 다른 건, 후자의 생각을 애써 무시했든 점점 줄여나갔든 전자의 생각을 선택했다는 거다. 직장을 다니고 있는 처지임에도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자신을 잘 알고 자신과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많은 고민을 해본 게 아닌가 싶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의 나를 조금 더 생각하자고. 


그렇게 선택한 게 '몰타'라는 곳이다. 개인적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이름이나 위치를 나름 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몰타는 잘 알지 못했다. 이름만 어설프게 들어 보았을 뿐, 나라의 위치도 동남아시아 쪽으로 알고 있었고 나라가 아닌 조그마한 휴양 도시 쯤으로 잘 못 알고 있었다. 몰타는 유럽의 이탈리아 남쪽 지중해상에 위치한 섬나라로, 나라 전체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유명한 곳이다. 연영방에 속하는 나라라서 영어가 주요 언어 중 하나이다. 저자가 몰타를 선택한 이유가 바로 그것인데, 저렴한 물가에 영어공부를 하며 유럽여행을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몰타라서 그럴 수 있었던 건지, 저자가 그런 사람이라서 그럴 수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아마 몰타와 저자이기 때문이라서 그럴 수 있었던 거겠지. 저자는 몰타라는 파라다이스를 제대로 만끽한다. 기가 막힌 자연과 문화유산이 선사한 선물에 술과 파티가 빠져선 안 되겠지. 그리고 스페인에만 있는 줄 알았던 시에스타(낮잠 시간)가 몰타에도 있는 게 아닌가. 


그렇지만 무엇보다 사람이다. 내가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던 '좋은 장소보다 좋은 사람'. 몰타에는 '좋은 분위기'도 만연해 있다. 무엇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장소와 사람과 분위기가 일체 되어야 하겠는데, 이 중 하나라도 만족하지 않으면, 다른 두 개 또한 존속하기 힘들다. 저자는 운이 좋은 건가? 나는 운이 나쁜 거고? 나도 나름 좋은 장소의 좋은 분위기에서 좋은 사람과 함께 있었는데도?


'나'를 위해 나아가는 게 중요하다


저자가 중요시한 게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몰타라는 파라다이스를 제일 중요시 했을까? 그곳에서 만난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을 중요시 했을까? 파라다이스에서 좋은 사람들과 어울린 그 시간과 분위기를 중요시 했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것들도 중요시 했지만, 정작 그가 중요시 했던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던 것 같다. 나의 시간을 갖기 위해, 나를 찾기 위해 간 여행이었으니까. 내가 그곳에 있다는 거, 내가 그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거, 내가 그 좋은 시간을 보냈다는 게 중요한 거다. 


전 세계의 누군가는 한국이 평생 잊지 못할 자유와 청춘의 중요 기착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소가 그렇게 중요할까? 아니다. 1순위는 아니다. 다만 '몰타'라는 곳은 특별할 수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통상적으로 '아무도 모른다'고 할 수 있을 만한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가고자 하는 곳은 다른 사람에 눈에 비치는 내가 아닌 그냥 나일 수 있게 해주지 못하는 데 반해, 이런 곳은 그럴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다. 


책에 소개된 저자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몰타가 아니더라도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해봤을 것 같은 일들이다. 그래서 따로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것보단 저자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접하는 게 더 중요하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몰타 같은 파라다이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곳이 아니어도 나쁠 건 없다. 어딜 가든 '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나'의 생각을 잘 알아, '나'를 위해 나아가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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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원했던 것은 너무나 적었건만 그마저도 주어지지 않았다. 한줄기 햇살, 가까운 들판, 한줌의 평온과 한 쪽의 빵,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기, 다른 이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다른 이들로부터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기.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거부당했다. 동냥 주는 것을 거절하는 이가 동정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지 외투 주머니 단추를 풀기 귀찮아서 그러듯이. 결국 내가 원한 것들은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적막한 내 방에서 홀로 서글픈 심정으로 글을 쓴다. 그리고 정말 보잘것없어 보이는 나의 목소리가 혹시라도 수많은 목소리들의 본질, 수많은 삶들이 열망하는 자기표현, 그리고 일상에 매인 운명, 부질없는 꿈과 가능성 없는 희망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나를 비롯한 수많은 영혼들의 인내심을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사실을 의식하는 순간 나의 심장은 힘차게 고동친다. 삶이 고양될 때면 더욱더 강렬하게 살아 있음을 느낀다. 내 안에 있는 어떤 종교적인 힘, 일종의 기도, 절규가 느껴진다. 그러나 자각은 나를 제자리로 되돌리곤 한다...... 도라도레스 거리의 건물 사층 방에 있는 나를 졸린 상태에서 본다. 무언가를 반쯤 써내려간 종이 위로 아름다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삶과, 닳아빠진 압지 너머 손을 뻗어 재떨이에 비벼 끄려던 싸구려 담배가 보인다. 여기 이 사층 방에 있는 내가 삶에 대해 묻고, 영혼이 느끼는 바를 말하고, 천재나 유명 작가라도 되는 듯이 글을 쓰고 있다니! 여기, 내가, 이렇게!......



 <불안의 책>,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오진영 옮김, 문학동네 펴냄)



포르투갈의 국민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 텍스트 6의 전문입니다. 한없이 우울하죠. 그리고 불안하기 그지 없습니다.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작가의 작품인데,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접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100년의 시간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고 같은 시대,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네요. 


첫 문장부터 가슴을 후벼 팝니다. 그리고 극히 공감이 가고요. 내가 원했던 건 정말 작은 건데 그것마저도 얻을 수 없다니요. 우울하지만 역사에 남을 대문호도 이런 심정이었을 거라 생각하니 한편으로 위로(?)가 되기도 하는 군요. 물론 그가 느낀 바와 우리가 느낀 바는 차원이 다른 것일 수 있겠지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질감을 느끼니 신기할 따름입니다. 


아랫 부분에서는 불안과 함께 분열적인 모습이 보입니다. 서글프다가, 생의 강력한 힘을 느끼다가도, 다시 울적해지며 자격지심이 듬뿍 담긴 생각을 합니다. 그러며 마지막에는 '나'에 대한 자각을 보이기도 하죠. 이 또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두루 보이는 모습과 일치해요. 앞엣것보다 조금은 더 고차원적일 수 있을 겁니다. 존재에 대한 것이니까요. 


천천히... 천천히...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그의 생각에서, 그의 삶에서, 이 책에서 많은 걸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건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께도 해당하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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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허삼관 매혈기>


<허삼관매혈기> 표지 ⓒ 푸른숲

몇 년 전, 일명 '현대판 라푼젤' 브라질 소녀가 10년 동안 길었던 머리카락을 600만 원 가량에 판매해 소형 주택을 장만했다는 기사가 난 적이 있다. 얼마후엔 영국 여성들이 돈이 필요해 머리카락을 팔았다는 기사도 났었다. 몸의 한 부분을 팔아서 돈을 장만하는 것만큼 절실한 건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부모님께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신조가 널리퍼진 나라에서는 더욱 말이다. 그럼에도 불과 몇 십년전, 국가 전체가 가난에 찌들었을 당시에는 머리카락을 팔아 간간히 연명하는 집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 옛날 일도, 그리 먼 일도 아닌 것이다. 


요즘은 여간해서 한 가지 일만 해서 먹고 살기가 힘든 것 같다. 그래서 '투잡 시대'라고 하는가 보다. 불황의 그림자는 정말 깊고 넓게 드리우고 있다. 소설 <허삼관 매혈기>(푸른숲)에서 주인공 허삼관은 피를 팔아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각종 사건을 해결한다. 


사실 그는 본 직업이 있다. '하얗고 보드라운 누에고치로 가득 찬 수레를 미는 작업'(37쪽)을 한다. 하지만 그걸로 인생을 온전히 살아가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허삼관은 근룡이와 방씨를 알게 되어 본격적인 '매혈'로 접어든다. 허삼관이 왜 피를 파냐고 묻자, 근룡이가 말한다.


"우리는 여자를 얻고 집을 짓고 하는 돈은 전부 피를 팔아 벌어요. 땅 파서 버는 돈이야 겨우 굶어 죽지 않을 정도니까요."


'매혈'을 해야 한번에 목돈을 쥘 수 있는 것이다. 복권보다는 장기매매에 가까운, 비합리적이지만 누구나 생각해 봄직한 행위이다. 처음 해보는 매혈은 그에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허삼관은 이렇게 피를 판돈으로 이쁜 여자 허옥란을 낚아챈다(?). 피는 곧 돈이고, 돈은 곧 힘인 것이다. 이미 '그'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누구나 살면서 반드시 '매혈'을 해야 할 때가 올 것이기에. 한번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


허삼관은 3형제(일락, 이락, 삼락)를 낳아 잘 살아간다. 그러던 중 첫째 일락이가 점점 허옥란의 전 남자친구 하소용을 닮아가는 것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이를 두고 허삼관에게 중국 최악의 욕인 '자라 대가리'라며 놀려 댄다.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른 가정은 사상누각에 있다. 어느 날 일락이가 대형 사고를 친다. 대장장이 방씨의 아들을 돌로 찍어 위태로운 상태에 빠지게 하고, 허삼관에게 치료비를 청구하지만 자기 아들도 아닌 일락이 때문에 돈을 물어 줄리 만무한 허삼관이었다. 방씨는 허삼관네 가산을 차압해 간다. 


결국 허삼관은 옛날을 생각하며 피를 팔아 방씨로부터 다시 가산을 되찾는다. 이후 어쩌다가 다쳤다는 하소용 아내의 병문안을 가 그녀와 관계를 맺는다. 허옥란은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이에 허삼관은 너도 했으니 나도 했다는 식으로 넘어간다. 


문화대혁명 시기, 전래 없는 대가뭄으로 모두가 허기에 시달린다. 역시 허삼관은 세 번째로 피를 팔아 가족을 살린다. 애잔하게 마음을 울리는 허옥란의 푸념을 들어본다.


"일락이가 대장장이 방씨네 아들 머리를 박살 냈을 때 피를 팔러 갔었지. 그 임 뚱땡이 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피를 팔았고. 그런 뚱뚱한 여자를 위해서도 혼쾌히 피를 팔다니 피가 땀처럼 덥다고 솟아나는 것도 아닌데...... 식구들이 오심칠 일간 죽만 마셨다고 또 피를 팔았고, 앞으로 또 팔겠다는데......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고생을 어떻게 견디나...... 이 고생은 언제야 끝이 나려나.(171쪽)


끝없이 이어지는 가난과 역경 속에서, 언제 끝날지 모를 고생을 하는 이 시대의 부모님들이 생각나는 구절이다. 피를 팔아서는 안 되지만 팔지 않으면 '이 고생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아이러니. 슬픈 일이 있으면 기쁜 일도 있고, 울 때도 있으면 웃을 때도 있는 법. 이 소설은 무겁고 암울하지 만은 않다. 익살과 해학으로 때론 비극도 희극으로 승화 시키고 있다. 


익살과 해학에 가려지는 슬픔과 비극


피를 팔기 전에 물을 몇 사발 먹어 피를 물게 해야 많이 팔 수 있다고 해서 오줌보가 터지기 직전까지 물을 마시고 어기적 어기적 걸어가는 모습이라든지, 허옥란이 아들 셋을 날 때 허삼관은 밖에서 한번, 두번, 세번 웃어서 이름들이 일락, 이락, 삼락으로 지었다는 내용은 잔잔한 웃음을 머금게 한다. 


일락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라 하소용과 허삼관 사이를 왔다갔다 하다가 결국 가출을 시도한다. 허삼관은 걱정된 나머지 일락이를 찾아 나서는데, 집에서 몇 발자국도 옮기기 전에 일락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대거리 끝에 허삼관은 일락이를 업고 어딘가로 향한다. 


"이 쪼그만 자식, 개 같은 자식, 밥통 같은 자식......오늘 완전히 날 미쳐 죽게 만들어놓고.....가고 싶으면 가, 이 자식아.(중략) 나중에는 네가 내 계부 노릇 좀 해라. 너 꼭 기다려라. 내세에는 내가 널 죽을 때까지 고생시킬 테니....."

"아버지, 우리 지금 국수 먹으러 가는 거예요?"

"그래."


온화한 미소로 대답해주는 허삼관의 표정이 눈앞에 떠오르는 듯하다. 이후 하소용이 죽으려 할 때 일락이를 필요로 한다. 허삼관은 알량한 마음일랑 접어두고 사람 목숨을 소중히 하는 마음으로 일락이더러 해주라고 한다. 일락이는 마지못해 이를 따르지만, 결국 하소용은 죽고 만다. 진짜 아버지 하소용이 주고 가짜 아버지 허삼관이 진짜 아버지가 되는 순간이다. 


그래도 가족이다


어느 날,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허옥란이 비판 대상자가 된다. 하소용과의 불미스러운 과거가 원인이 된 것이었다. 결국 가족 비판 대회까지 열어 허옥란을 비판하게 된다. 여기서 허삼관은 자신의 입으로 아들들이 보는 앞에서 임분방과의 일을 말한다. 허옥란으로 향하는 비판의 화살을 자신에게로 돌리기 위해서 였다. 그는 양심 있고 정 많은 그런 사람이다. 


시간이 흘러 일락이와 이락이가 농촌 생산대로 떠난다. 일락이가 쇠약한 몸이 되어 집에 왔을 때 그를 다시 보내기 위해 피를 팔고, 또 이락이의 생산 대장이 방문할 때 대접하기 위해 피를 판다. 한번 피를 팔면 세 달은 쉬어야 하는데, 한 달에 두번이라니. 가족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피땀' 흘리며 일하는 아버지의 자화상이다. 그런데... 이렇게 피땀 흘려 일해도 남 부끄럽지 않게 돈을 벌 수 있는 현실인가? 반문하게 된다. 


일락이의 가족에게 큰 위기가 닥친다. 옛날 피를 처음으로 팔게 되었을 때 알게 된 방씨가 오줌보가 터져 몸이 망가지고, 피를 팔고 나선 근룡이가 쓰러져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허삼관은 일락이가 간염에 걸려 위독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허옥란과 함께 상하이에 보내 먼저 치료를 하게 하고 자신은 가는 길에 계속 피를 팔며 돈을 마련하기로 한다. 계속되는 고난한 여정으로 허삼관의 생명이 단축되어 가는 걸 느끼지만, 계속 가야만 한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눈물의 여정은 계속되지만 쉽지 않다. 그래도 결국 일락이는 건강을 되찾는다. 


이제는 당신들을 위해 사세요


시간을 훌쩍 흘러 허삼관의 나이 예순. 허삼관은 어느 날 승리반점 앞을 지나다가 옛날 피를 팔고 항상 들려 먹었던 돼지간볶음 한 접시와 황주 한 잔이 먹고 싶어진다. 그래서 그는 생전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피를 팔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젊은 혈두에게 치욕스럽게 거절 당하고 만다. 사십 년 만에 처음으로 피를 팔지 못한 것이다. 그러며 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해야 하는지 걱정하며 눈물 짓는다. 이에 아들 셋은 동네 창피하다고 울지 말라고 허삼관을 나무란다. 허옥란은 아들들을 욕하며 허삼관과 함께 승리반점에 가 한없이 돼지간볶음과 황주를 먹는다. 자기 자신을 위해. 


가끔 가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제는 부모님이 그만 고생하셨으면 좋겠다고. 더 이상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지 마시고, 당신들을 위해 돈을 벌고 돈을 쓰고 인생을 보내셨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피땀 흘려 돈을 벌어도 가족들 먹여 살리기 힘든 이 세상에 말이다. 그래도 부모님께 한마디 건네고 싶다. 


'이제는 당신들을 위해 사세요. 저희들은 부모님 덕분에 잘 컸으니까요. 알아서 살아갈 수 있어요. 이제는 저희가 잘 보살펴 드릴게요. 건강하세요.'


예전에 이 소설을 누군가에게 추천해준 적이 있다. 그때 들었던 말이, "펄 벅의 <대지>랑 비슷하네. 그 책 먼저 봐봐." 하지만 나는 엄연히 다른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이 소설이 더 마음에 와 닿기도 했다. 적어도 계속 보고 싶어지는 소설이라는 점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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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