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더 킹>


지난 한 해 계속된 '시국영화', <더 킹>은 그 한 정점을 보여준다. 묵직하지만 가볍게, 직설적이지만 풍자적으로. 감독의 전작을 다 괜찮게 본 입장에서, 과연 이 영화는 어떨지? ⓒNEW



지난 2015년 11월 개봉한 <내부자들>부터 시작된 일명 '시국영화'. 사실 이 시국엔 어떤 영화가 나와도 맞물릴 수밖에 없다. 시국을 그린 영화든, 시국을 비판한 영화든, 시국을 위로해줄 영화든 말이다. 2017년에도 변함없이 이어나갈 예정인 듯하다. 아니, 그 강도는 그 어느 해보다 심해질 것이 분명하다. 


한재림 감독의 <더 킹>도 그중 하나로 보면 될 것인데, 가히 그 수위가 어느 영화보다 높다. 블랙 코미디로 무장한 직접적인 실명 거론과 패러디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영화의 몇몇 장면은 '최순실 게이트'를 너무나도 명확하게 그려내고 있어, 한편으론 무섭기까지 했고 한편으론 영화를 너무 날로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들게 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개봉한 건 2017년 1월이지만 영화 촬영이 끝난 건 게이트가 터지기 한참 전일 터, 각본과 연출을 담당한 한재림 감독의 능력에 관심이 쏠린다. 


필모그래피를 들여다보니 한 감독이 연출한 네 개의 영화뿐만 아니라 제작한 두 개의 영화 모두 본 게 아닌가. 그것도 상당히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면서 아주 재미있게 말이다. <연애의 목적>으로 데뷔한 한 감독은 이어서 <우아한 세계> <관상> <더 킹>을 연출했고, <연애의 온도> <특종: 량첸살인기>를 기획, 제작했다. 집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한 감독이 연출한 네 개의 영화 모두 그가 각본, 각색에 참여했다는 것. 


샐러리맨 검사의 권력 정점 라인 타기


영화는 '개천에서 용 난' 한 샐러리맨 검사의 권력 정점 라인으로의 험난하지만 할 만한 길을 보여준다. 그건 곧 한국 현대사의 추악한 일면. ⓒNEW



영화는 주인공 박태수(조인성 분)의 내레이션에 따라 진행된다. 초반엔 오로지 태수의 성장과 성공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양아치로 살아갈 운명이었던 그는 집에 찾아와 아버지를 일방적으로 깔아뭉개는 '검사'의 힘을 보고 미친듯한 공부 신공으로 서울대 법대를 들어간다. 때는 80년대, 민주화운동에 휘말린 태수는 군대에 끌려들어가고 제대를 하고선 단번에 사법고시를 패스해 검사가 된다. '샐러리맨 검사'의 시작이다. 


태수가 바랐던 검사는 권력의 정점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는 검사다. 그가 검사가 되기로 결심한 때가, 막무가내로 힘을 휘두른 삼류 건달 아버지를 단번에 제압한 진짜 '힘'의 검사를 보고 나서이지 않은가. 태수는 곧 정의를 버리고 권력의 라인으로 향한다. 검사 권력의 핵심인 전략부의 양동철 검사(배성우 분)와 전략부장 한강식 검사(정우성 분) 라인이 그것이었다. 그들이야말로 한국을 주무르는 실세. 


한편 목포 최대 조폭 조직인 들개파의 2인자 최두일(류준열 분)은 어린 시절 박태수의 친구였다. 홀연히 나타난 그는 박태수가 처리하지 못하는 더러운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개'가 된다. 대신 한강식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는 태수는 두일의 뒤를 봐주고 두일은 곧 강남의 1인자가 된다. 검사와 조폭이라는 상극이 한통속으로 전락한다. 


그야말로 견고하기 이를 데 없는 한국 최대 '라인', 그렇지만 라인의 생태라는 게 정점에 따라 180도 달라진다는 법, 정점이란 곧 대통령을 말하는데 그들 또한 대선이 있는 5년마다 라인 전쟁에 돌입해야 한다. 그들에게 실력이란 이길 것 같은 라인을 잘 고르는 능력과 비록 진 라인에 타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자리를 보존하는 능력이다. 언제까지 계속 라인을 잘 탈 수 있을까? 천하 권력을 누리는 자리를 계속 보존할 수 있을까?


'이게 나라냐'의 지경으로 이끌어 온 이들을 그리다


이들의 행태를 보고 있자니, 이게 나라인지 의심스럽다. 나라를 몇몇의 개인들이 좌지우지 하다니. 물론 현실은 더 막장이지만, 이들 또한 그에 큰 역할을 했음이 자명하다. ⓒNEW



'이게 나라냐'라는 말이 지난 몇 달 동안 전국을 강타했는데, 결코 영화 유행어가 아니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울분의 토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의 도래. 지구에 혜성이 충돌하거나 지구에 빙하기가 도래하거나 고대부터 예견된 지구 멸망을 목도하는 것만큼 충격적이고 믿어지지 않는, 민간인의 나라 사유화. 모르긴 몰라도 그 역사는 오래되었고 그 뿌리는 깊디 깊을 것이다. 


<더 킹>은 그런 작금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그려내고 있지는 않지만, 그 이면에 있는, 그렇게 되기까지 한국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 이끌어 온 이들을 그린다. 그러기 위해서 차용한 것이 '한국 현대사 일별'. 이 영화를 보면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대선'을 중심으로 한 한국 현대사를 볼 수 있다. 자칫 영화는 안 보이고 한국 현대사만 잘 보일 수 있었을 텐데, 감독의 의도가 그러한듯. 이를 알고 보면 재밌게 볼 수 있다.  


2014년 말에 개봉해 큰 사랑을 받았던 '국뽕' 영화 <국제시장>의 한국 현대사 연대기가 생각나게끔 하는 바, 하지만 <더 킹>은 국뽕과는 전혀 반대되는 면모를 보인다. '이게 나라냐'에 대해 참으로 영화다운 대답을 내놓았다. 그렇다고 '국까' 영화는 아닌듯, 영화를 이끌어 가는 건 사람이다. 


권력에 기생한 기회주의자들이 주인공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권력의 정점, '더 킹'이라 칭한다. 그들을 권력의 노예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그들이 권력을 폭주시키며 나라를 망칠 동안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일면 '더 킹'이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기대를 웃도는 퀄리티, 차기작을 기다린다


영화는 기대 이상의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심각하기 그지 없는 소재들에 묻히지 않고 감독의 본연 스타일을 밀고 나간다. 그게 괜찮게 어울리니, 상당히 좋았다. 차기작이 기대된다. ⓒNEW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영화를 보았다. 전작들을 모두 접한 이상 한 감독에 대한 신뢰는 있었지만, 시국에 편승한 그렇고 그런 영화일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내부자들>류의 수많은 영화들 중 하나일 거라고 지레짐작 했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전혀 아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괜찮네' '참신한대?' '기대 이상이네' '참 영화답게 잘 만들었네'를 연발했다. 다 보고는 '재밌었어'를 합창했고. 


한 감독은 그동안 연출한 모든 영화에서 일관적으로 약간의 사회고발, 지극한 리얼리즘, 은근한 코미디, 영화로만 보여줄 수 있는 시각적 요소를 보여주었는데 <더 킹>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한국 현대사라는 무거운 소재를 화려한 블랙 코미디와 영화시각적 요소로 가지고 놀듯이 보여준 모습들에선 감탄이 절로 나왔다. 


몇몇 장면들, 한강식 라인의 승리 자축 파티 장면들에선 마틴 스콜세지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가 연상되었는데, 아무래도 오마주가 아니었나 싶다. 세상을 발칵 뒤집은 희대의 사기극을 성공시키고 열어젖힌 광란의 파티 장면을 차용해 쓰면서, 그들의 자축 파티 또한 사기극 못지 않은 희대의 범죄를 성공시키고 열어젖힌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새 한재림 감독의 차기작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영화를 자유자재로 갖고 노는 듯한 느낌을 주는 감독이 많지 않은데, 그런 감독의 영화는 그 자체로 힐링을 주는 법이다. 그야말로 영화로만 얻을 수 있는 힐링 말이다. <더 킹>도 힐링을 주었나? 단연코 힐링을 주었다. 하지만 씁쓸함은 쉬이 가시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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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여교사>


궁금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영화다. 과연 그 기대에 부응할지는 모르겠지만, <거인>의 김태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는 점도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CJ E&M Pictures



1987년생, 이제 갓 서른 살이 된 젊은 감독 김태용은 지난 2014년 장편데뷔작 <거인>을 내놓았다. 수많은 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 후보에 올랐고, 청룡영화상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수상했다. 이 독립영화는 2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서도 좋은 반응을 이끌어 냈다. 흥행과 비평에서 성공하며 차기작을 기대케 했다. 


가슴 먹먹하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김태용 감독, 2년 여만에, 햇수로는 3년 만에 김하늘과 함께 돌아 왔다. 제대로 들여다보기 전에는 <만추>의 김태용 감독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스타일 상 이런 류의 영화를 연출할 것 같진 않았기에 다시 보게 되었다. 더군다나 그는 장편상업영화를 연출할 때 각본도 쓰지 않는가. 


연출과 각본을 함께 하는 건 젊은 김태용 감독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더욱 기대되었던 바, 영화 <여교사>다. 영어 원제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데, 'misbehavior' 즉 '부정 행위' '불량 행동'이라는 뜻이다. 추측컨대, 여교사가 학교에서 행하는 부정 행위 또는 불량 행동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지 않을까. 일단 여기까지는 나쁘지 않아 보인다. 


두 여교사와 한 남학생의 '부정 행위'


영어 원제가 '부정 행위'를 뜻하는 'misbehavior'인데, 과연 여교사의 부정 행위는 무엇일까. 그게 무엇인지는 영화 초반에 드러난다. 궁금증은 그렇게 풀리고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향한다. ⓒCJ E&M Pictures



계약직 교사 효주(김하늘 분)는 박봉에 야근은 둘째 치고 불안한 현재와 미래가 걱정이다. 어떻게든 정직원 교사가 되어야 하는 상황, 그래도 다음 정직원 발령이 그녀 차례이기에 나쁘지 않다. 와중에 이사장 딸 혜영(유인영 분)이 갑자기 나타나 하루 아침에 정직원 자리를 꿰찬다. 효주로서는 황당하기 그지 없는 낙하산 발령. 그런데 혜영이 해맑은 웃음을 앞세우고 자신이 대학 후배라며 효주에게 들이대는 게 아닌가. 기억에도 없을 뿐더러 그녀의 존재 자체가 싫은 효주는 과하다 싶게 매몰차게 대한다. 


한편 효주는 임시로 맡게 된 학급의 재하(이원근 분)라는 발레특기생을 찾아 간다. 처음엔 뭘 하는 애일까 궁금해서, 두 번째는 연습 잘 하고 있나 궁금해서, 세 번째는 알 수 없는 두근거림으로. 두 번째 방문에서 재하는 술에 취해 효주에게 키스했고, 세 번째 방문에서 효주는 재하와 혜영이 육체적 관계를 맺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효주는 다음 날 당장 혜영을 불러 목격한 장면을 폭로하고는 교사답게 처신하라고 협박한다. 그러고 재하에게는 체육관 대신 학원을 선사한다. 그 이면에는 그녀 만의 꿍꿍이속이 있는 것 같다. 다름 아닌, 혜영에게 말한 '교사답게 처신해라'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위. 과연 이 여교사 둘과 학생 하나 사이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거인>에 이어 이 작품에서도 우린 가슴 먹먹함을 일부 느낄 수 있다. 다만, 그를 훨씬 뛰어넘는 '기분 나쁨'을 느끼게 될 것인데, 이는 명백한 감독의 '착오'가 아니었다 생각해본다. '기분 나쁨'에만 천착해 그것이 마치 '수작'의 좋은 방편인 양 생각한 것 같다. 그렇지만 대놓고 드러내면 수작이 될 수 없다. 자연스레 드러나 관객들이 알아차리게 만드는 게 진짜 어려운 일이고 또 더욱 괜찮은 방법이다. 


파격 사랑 이야기 또는 치밀한 권력 암투기


완전히 다른 곳으로 향한 이야기, 파격적인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분명 감독은 그 이면에 인간 본성의 치밀한 무엇을 상정해놓은 것 같은데...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CJ E&M Pictures



영화의 극초반, 정직원이 되려는 계약직 앞에 나타난 이사장 딸을 봤을 때는 치밀한 권력 암투와 잔인한 살인 방조가 판을 치는 장면들을 예상했다. 그렇지만 채 10분도 안 되어 이사장 딸과 학생의 관계가 있고 나선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이다. 그 앞에 붙는 단어는 '파격'.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더 좋은 건 이것 또는 저것을 드러내놓고 말하면서 그 이면에는 저것 또는 이것을 숨겨놓는 것. 감독은 분명 이를 의도한 것이겠다. 파격적인 사랑 이야기 또는 인간 본성에 투철한 권력 암투기. 그런데 영화를 보고는 감독의 의도를 잘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아마 숨겨놓은 걸 알아차리지 못할 텐데, 굳이 알아차리지 못해도 하등 상관없는 수준이다. 


이는 '능력 미숙'이라기 보다는 '방향 설정 미스'라고 보는 게 맞다. 이번 영화에서 감독은 그 명성에 걸맞은 '전술'을 선보인 반면, '전략'에선 실망을 안겼다. 효주와 혜영의 대비되는 옷차림과 표정, 효주의 옷차림 변화, 효주와 혜영과 재하의 대면 장면에서의 구도 등이 보여주는 미장셴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잘 표현해냈다.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해도 전쟁에서 승리하라는 보장은 없다. 전투에만 승리하면 되는 때는 그 옛날 중국의 춘추시대 이전이다. 제대로 나라가 형성된 이후에는, 나라 대 나라로 벌어지는 전쟁에서 이겨야 하는 것이다. 영화 또한 마찬가지다. 몇몇 장면과 캐릭터가 대단하다고 한들 명작이 될 수 없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시나리오와 의도와 메시지가 튼튼해야 한다. <여교사>는 줄기가 튼튼하지 못한 상태에서 여기저기 잎사귀에 많은 에너지를 투입하려 했다. 


명작과 망작 사이에


'한 끗 차이', 명작과 망작의 사이에 위치한 이 영화 <여교사>. 시나리오에 신경을 썻을 게 분명하지만, 영화는 시나리오가 아닌 다른 곳에 중점을 둔 듯 보인다. 패착이다. ⓒCJ E&M Pictures



영화는 참 애매모호하다. 명작과 망작은 한 끗 차이라고 하는데, 이 영화에 해당하는 말인 듯하다. 시나리오와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는데 반해, 편집과 연기가 점수를 다 깎아먹었다. 요즘 영화치곤 러닝타임이 짧은 편인데, 편집을 과도하게 한 결과이겠다. 편집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과하면 논리적 전개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이 영화는 시나리오에 가장 많은 신경을 썼을 게 분명한 바, 캐릭터들의 감정선 하나하나가 예민하게 반응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최소한 영화에서 보여진 것보단 조금 더 많은 설명이 필요했다. 반면 영화는 감정선을 극의 흐름이 아닌 분위기, 구도, 옷차림 등으로 표현하려 했다. 그게 패착이 되지 않았나 싶다. 


이는 연기에서도 다를 바가 없다. 캐릭터보다 그밖의 다른 것들에 더 많은 신경을 쓴 것 같다. 문제는, 그렇다고 미장셴이 전에 없이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각본까지 담당한 감독은 시나리오에 가장 중점을 둘 것이 분명하기에. 배우들의 연기도 눈에 띄지 않았지만, 연기를 끌어내는 감독의 의도가 불분명했던 게 더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이도 저도 아닌 연출 의도가 영화를 다른 의미로 치명적이게 만든 것 같다. 충분히 치명적이게 매력적인 영화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인데, 치명적이게 기분 나쁘기만 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거인>으로 받은 기대가 상당히 꺾여 안타깝다. 그럼에도 여전히 기대하는 감독임은 분명하다. 나이와 경력이 아직은 단출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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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자발적 복종>



<자발적 복종> ⓒ생각정원



세월호, 땅콩회항, 밀양 송전탑, 쌍용차 해고, 제주 해군기지 등 한반도 여기저기에서 수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작년에 일어난 사건도 있고, 몇 년 동안 해결되지 않은 사건도 있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시작된 이 사건들은, 시간이 갈수록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모르게 포메이션 된다. 


언론은 그 사건 자체, 대형 사건 자체에 관심이 있을 뿐 더 이상 깊이 들어가 자세한 내막을 들추려 하지 않는다. 그런 언론이 있다 해도, 다른 언론들이 벌떼 같이 달려 들어 장막을 친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사람들 머리에서 지워지고 당사자들만 남아 힘겨운 싸움을 계속 한다.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알 수 없이 말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멈추지 않는다. 이들을 도와주고 함께 하는 이들 또한 멈추지 않는다. 이는 곧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굴종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도, 거대한 권력의 힘이 압박해 앞길을 막아도, 그보다 더한 조롱과 회유가 흔들리게 해도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자유로워 보인다. 시대의 권력 앞에, 물질적 권력 앞에, 보이지 않는 권력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까. 


500년 전 프랑스의 한 청년 법학도가 낸 목소리 또한 흔들리지 않고 자유를 노래한다. 그 이름도 유명한 라 보에시의 <자발적 복종>(생각정원). 그는 이 얇디 얇은 책을 통해 '복종'과 '자유'를 말한다. 사람들은 왜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자유를 갈망하지 못하는가? 권력자들은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의 맛을 잃어버리게 하고, 그들 스스로 복종의 길을 택하게 만드는가? 자발적 복종을 끝맺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왜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자유를 갈망하지 못하는가?


"멍에를 지고 태어나 노예 상태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전 세대가 어떤 삶을 누렸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이 태어난 대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 (본문 중에서)


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자유를 갈망하지 못하는 지에 대한 저자의 답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환경이었기에 자연스레 그렇게 밖에 살 수 없게 되었고 그런 생각 밖에 할 수 없게 되었으며 태생적으로 부여받은 자유를 망각하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지금보다 옛날이 무조건 더 못 살았을 것 같고, 더 비참했을 것 같으며, 더 멍청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보니 지금에 만족하게 되고 내가 사는 이 환경이 하등 이상할 게 없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옛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활동하던 시대가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지혜와 지식이 빛을 발할 수 있고,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지금보다 더 민주주의적이며, 팍스 로마나 시절의 중산층이 누렸던 부는 지금의 중산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돈의 노예로 길들여지는 지금의 우리는, 돈에, 권력에 아부하는 지금의 우리는 과연 옛날 사람들보다 나을 게 있을까? 우린 전 세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관심이 없고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살아가고 있다. 자유롭지 않는 그 무엇을 자유라 부르고, 복종을 복종이라 부르지 않은 채로. 


권력자들은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의 맛을 잃어버리게 만드는가?


"대부분의 전제군주들이 물밑에서 백성들을 어리석고 나약하게 만들기 위한 술수를 모색했고, 다양한 방법들을 실행으로 옮겼다."(본문 중에서)


권력자들은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의 맛을 잃어버리게 만들까? 그들이 쓰는 방법은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주 줄기차게 써먹고 있다. 향락과 소비의 문화를 전면에 내세우고, 뒤로는 지식인의 씨를 말리려 하는 것이다. 스포츠 스타와 연예인들이 나라 전체를 좌지우지한다면 의심해봐야 한다. 


과거 전두환 군부 독재 정권이 시행한 '3S 정책'이 이와 정확히 일치한다.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 성(Sex) 또는 속도(Speed)로 국민들의 시선을 완전히 향락과 소비의 문화로 돌려버리게 하려는 '우민화 정책'. 이 정책은 아주 잘 먹혀 들어간 듯하고, 지금 여기에 하나라도 걸쳐 있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자발적 복종에서 벗어나기 위해 할 일은?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그것을 간절히 원하기만 하면 된다."(본문 중에서)


그렇다면 이 자발적 복종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저자는 '자각'과 '용기'를 말한다. 저자는 거기에 어떤 크나큰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자유를 간절히 원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자유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 자유롭게 된 이후의 설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 무엇보다 자유의 맛보다 복종의 맛을 더 좋아하기 쉽다는 것. 


위에서 언급한 많은 사건들의 당사자들은 복종의 맛보다 자유의 맛을 더 좋아하고, 음미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분명하다. 저자는 그런 사람들이 반드시 존재하며 그들 덕분에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자유의 맛을 오롯이 음미하는 것이 물리적·정신적으로 굉장히 힘들다는 건 누구나 인지하고 있다. 


국가, 기업, 가족, 조직, 모임 등의 우산 안에 들어 있을 때 알게 모르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굉장히 많지 않은가? 그 권력 또는 권력 아닌 권력의 호수 안에서 헤엄치면 안전하지 않는가 말이다. 먼 바다 한 가운데에서 생존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게 자유의 필연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인데 말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그런 자유의 맛을 음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500년 전에도, 500년 후에도.


이 책을 지금 시점에 출간하는 의미는 너무나 당연하다. 지금 한국의 상황이 그만큼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자유에서 복종으로, 독재로 역행하고 있다는 것. 정치 권력과 자본 권력의 합종연횡과 유착으로 그 어디에도 손이 뻗어 있다는 것. 그럼 한 번 일독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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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유하 감독의 <강남 1970>



<강남 1970> 포스터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거리는 극히 양면적인 면모가 있다. 연인들에게는 팔짱을 끼고 함께 같은 곳을 보며 걸을 수 있는 공간이다. 앞이 탁 뜨인 거리는 걷는 것으로도 힐링이 되곤 한다. 갈 곳을 정해두지 않고 정처 없이 걷는 거리는 낭만적이다.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 쬐는 주말 오후의 거리를 느낌이란 형용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준다. 


과연 그러기만 할까? 거리에는 무표정으로 오로지 앞만 보고 걷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누가 쫓아오는 양 빠른 걸음으로. 그럴 때 거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냥 목적지까지 가는 길에 불과하다. 한편 거리는 '무법', '야생'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 아무도 없는 으슥한 뒷골목 거리는 누구의 손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 거리에서 태어나 거리에서 자란 이들에게 거리는 집임과 동시에 생존을 위해 끝없이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링이다.


그런 거리에는 필연적으로 욕망과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끝 간 데 모를 욕망이어야만 두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 있다. 결국 또 다른 욕망에 의해 파멸 될 운명이지만, 그 또한 누군가의 욕망을 밟고 그 자리에 있을 터였다. 폭력은 그들을 그들 이게 한다. 폭력으로만 그들 자신을 정의할 수 있다. 이성의 시대에 이런 욕망과 폭력의 인간들은 가장 밑바닥 취급을 받고 가장 멀리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그러나 지금은 가장 이성적이고 고결한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인 것처럼 포장되어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서울 강남이다. 


폭력과 욕망이 도사리고 있는 그곳, 강남


유하 감독은 2004년 <말죽거리 잔혹사>, 2006년 <비열한 거리>로 '거리'와 '폭력'의 다양하지만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중심엔 '강남'이 있었고, 2015년 <강남 1970>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그 안에 '거리', '폭력', '강남'을 비롯해 '욕망', '잔혹' 등 일명 '거리(폭력) 3부작'의 모든 것이 들었다. 거리 안에 폭력은 있다 지만, 폭력 안에 거리가 있다 고는 할 수 없기에 '거리 3부작'이 더 정확하다 하겠다. 


<강남 1970>은 제목 안에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 전부 들어 있다. 지금의 강남이 만들어진 때가 1970년이다. 영화는 이 시대의 강남 개발이 당시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대선 자금 확보의 일환으로 핵심 중의 핵심 권력인 중앙정보부가 하달한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본다. 명령을 이루기 위해 큰 두 세력이 맞붙는데 이들은 국회의원들이고 실질적으로 행동을 하는 이들은 일명 조직폭력배 깡패들이다. 



<강남 1970>의 한 장면.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넝마주이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고아 종대(이민호 분)와 용기(김래원 분)는 자신들의 집을 부수려는 정부 용역 깡패들에게 저항하다가 붙잡힌다. 그런 와중에 쪽수(?)가 모자란 깡패들이 데려가 그야말로 지극히 우연한 계기로 깡패들의 세계에 입문하는데, 이 둘은 헤어지고 만다. 이후 그들은 실력을 뽐내며 자리를 잡아가고, 또다시 우연히 이들은 조우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들은 서로 다른 세력에 있었다. 강남 개발의 큰 두 세력 말이다. 종대는 용기에게 자신 쪽으로 넘어오라고 하지만, 용기는 중간에 큰 사고를 쳐서 함부로 행동할 수 없는 처지다. 대신 스파이 노릇을 한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까지 종대를 돕고, 이는 종대도 마찬가지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인들


이 와중에 등장하는 여인들이 있다. 종대를 거두고 키우다시피 해준 길수(정진영 분)의 딸 선혜. 종대는 선혜를 사랑하는 듯하다. 하지만 사실상 친동생과 마찬가지인 존재이기에 멀리서만 바라볼 뿐이다. 그녀가 결혼해서 남편에게 맞고 도움을 청하면 그 남편을 찾아가 죽도록 패버리는 뭐 그런 거다. 


그리고 종대와 강남 개발 사업을 하게 되는 민마담(김지수 분). 그녀는 정재계 거물들과 상대하며 엄청난 정보를 바탕으로 빠르게 강남 개발 중심에서 돈 놓고 돈 먹기 게임을 벌인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강남 개발의 비열한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핵심 장면들이 여기서 나온다. 정부의 강남 개발 시책에 맞춰 집값이 폭등할 것을 예측하고, 그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과 시골자락의 집과 땅을 미리 사들이는 전략. 불법 독점과 투기 협잡 등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의 등골을 파 먹는 파렴치한 이들의 전형이다. 



<강남 1970>의 한 장면.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또 한 명은 용기의 부인 소정(이연두 분)이다. 그녀는 애당초 보스의 여자친구였지만, 용기와 비밀리에 연인 관계였다. 이 둘 간의 사랑은 방식은 달라도 종대와 선혜처럼 자못 애처로움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건 선혜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한 가지가 있는데, 이 둘의 비밀 연애를 선배 깡패가 봤고 용기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죽인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를 죽인 것이 큰 화를 불러 일으킨다. 그렇지만 용기의 성격 상 언젠가 죽일 것이었기에, 사실 소정의 존재는 무의미하다. 


영화의 결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감독의 의도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이 영화의 결점이 있다. 여자 캐릭터들은 말할 나위 없고 주연 급의 캐릭터들도 모두 다 영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아 보인다. 영화의 스토리 상에 필요한 캐릭터라는 느낌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와중에는 캐릭터가 보이는 데, 끝나고 나면 아무 기억이 없다. 비단 등장인물들이 많이 죽기 때문 만은 아니다. 배우들을 가져다 쓰고 버린 듯한 느낌이다. 



<강남 1970>의 한 장면.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스토리가 훌륭한가? 등장 인물들의 헌신적인 죽음을 감수하고도 남을 만큼? 그런데 바로 이게 감독이 의도한 바인 것 같다. 결국은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한 사람만 남고 모두 이용만 당하고 버려지는 스토리를 봤을 때, 그 느낌을 더 잘 살려주었다. 즉, 배우들을 가져다 쓰고 버린 듯한 느낌이 들게 연출한 의도는, 권력의 비열하고 간악한 유지를 위해 가차 없이 이용했다가는 어김없이 처리하고 마는 그 진짜 모습을 피부에 와 닿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강남 개발조차 그 권력이 이용한 것이다.


이 폭력과 욕망의 무간지옥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죽어서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 만약 살아남았다고 해도 더욱 더 고통스러운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지옥을 만들고 관장하는 높으신 분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호의호식하고 있다. 그들이 서로 치고 박고 죽고 죽이면서 발생된 그 욕망의 덩어리가 만들어낸 거대한 에너지를 통해서 말이다. 그것이 지금의 강남이고, 지금의 권력자들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비상했다가 추락하고 죽고 죽일까


얼마 전에 강남 삼성동 한국전력 부지를 놓고 현대차그룹과 삼성그룹이 일대 혈전을 벌였다. 예의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대기업 둘 간의 결투였다. 그 결과 예상 값의 3배가 넘는 돈인 10조 원 이상을 투자한 현대차그룹이 매입했다. 이후 주위의 땅값이 4년 전보다 6배 이상 뛰었다고 한다. 뻥튀기도 이런 뻥튀기가 없다. 강남 1970에 이은 강남 2015라고 할 만 하다. 


여기엔 어떤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을까? 일차적으로는 대기업의 투자 대결이지만, 조금만 더 생각하면 강남 부자를 위해 땅값을 올리려는 수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이상도 가능하리라. <강남 1970>에서 강남 개발 그 위에 진짜 목적이 대선 자금 확보에 있었듯이 말이다. 그 안에서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비상했다가 추락하고 죽고 죽일까. 그 정점에선 누가 모든 수혜를 업고 그들만의 세계를 더욱 견고히 만들어 살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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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용서 받지 못한 자>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포스터. ⓒ 청어람



철없는 청소년기를 지나 청년이 된 남자에게 "군대를 갔다 와야지 철도 들고 정신차리지"라는 말은, 마냥 듣기 싫은 말이기 보다 일종의 기대심리가 적용되는 말이다. 말인즉슨, 누구나 군대라는 통과의례를 거치면 세상이 원하는 진정한 남자가 되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엔 필수적으로 '변화'가 뒤따른다. 과연 어떤 변화일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한국 특유의 위계질서, 그 중심에 있는 남자들만의 위계질서. 군대를 가기 전의 '무질서'에서 군대를 다녀온 '질서'로의 변화가 이를 주도한다. 군대는 문신을 새기듯 질서를 몸에 체득시킨다. 이는 곧 한국 사회에서 진정한 남자가 되는 길인 것이다. 그리고 그 길에는 수많은 '용서 받지 못한 자'들이 존재한다.


영화 <용서 받지 못한 자>는 군대라는 소재를 아주 미시적으로 접근해 한국 사회에서 진정한 남자로의 변화, 권력의 질서 안에서 변해가는 자들의 모습 등을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 너무나 공감이 되는 내용에, 몇 번이고 몸서리치며 보고 또 봤던 기억이 난다. 필자 또한 '용서받지 못한 자' 중의 한 사람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또 한 번 몸서리가 처진다. 한 점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용서 받지 못한 자들


영화는 두 파트로 나뉘어 진행된다. 승영이 자대 배치를 받고 난 후 군대에서의 이야기와, 승영이 상병 휴가를 나와 태성과 만나는 이야기. 먼저 군대에서의 이야기부터 풀어본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그리고 등장인물들 또한 간단하다. 제목처럼 전부 '용서 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 중에 누가 봐도 용서 못할 인물이 있다. 


말년 병장 '수동'(임현성 분). 그는 내무실 최고참으로 최 정점의 위치에서 권력을 마구 휘두른다. 후임의 팬티를 훔쳐 입고, 후임의 편지를 훔쳐 읽으며, 성추행까지 행하는 등의 각종 부조리한 짓거리를 일삼는다. 그가 하는 말은 대체적으로 이렇다. "고참이 하자면 하는 거지." "야, 나도 옛날에 그렇게 당하면서 지냈어." 그렇다. 예전부터 그래왔으니까 되물림 하는데 너무 당연한 것이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군대가 낳은 용서 받지 못한 자이다. 그러면서도 제일 큰 희생자이기도 하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한 장면. 일방적 가해자와 희생자로 비춰지는 수동과 승영. ⓒ 청어람



그런 그와 거의 동년배인 분대장이자 병장 유태성(하정우 분)이 있다. 그는 스스로 군대 생활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즉, 뒤 끝없이 조이고 풀어주는 역할을 잘했다는 말이다. 수동의 행동을 이해하면서도 적당히 풀어줄 줄 아는 그는 사실, 수동보다도 더 용서 받지 못한 자라 할 수 있겠다. 이는 그의 신참 부사수이자 중학교 동창이기도 한 이승영(서장원 분)과의 애매모호한 관계 속에서 피어난다. 태성은 중학교 동창이라는 이유로 승영과 허물없이 지내려 한다. 그래서 부조리한 군대 생활에 쉬이 적응하지 못하는 승영을 언제나 감싸주려 한다. 하지만 결국은 이와 같은 행동이 군대라는 곳에서 승영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승영은 부조리한 군대 권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참을 수 없어 몇 번이고 선임과 다툼을 하고 그럴수록 미움만 받는다. 그런 사이에 승영의 부사수인 허지훈(윤종빈 분)이 들어온다. 지훈은 일명 고문관으로, 지지 리도 어리바리한 인물이다. 승영은 그런 모습을 착하다고 생각하며 한없이 잘해준다. 이윽고 얼마 후 태성이 전역을 하고 그들에게 시련이 닥친다. 여기저기에서 후임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승영을 몰아세우는 것이었다. 이에 승영은 결국 돌아서고 만다. 그 누구보다도 부조리한 권력을 반대했던 그마저도 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훈을 버리고 권력에 한 가운데로 들어가는 승영. 갈 곳 없는 지훈은 자살을 택한다. 어리바리하게 군 생활에 적응을 못하는 지훈을 욕할 것인가, '전향'에 가까운 변화를 택한 승영을 욕할 것인가. 진정 용서 받지 못한 자는 누구인가.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한 장면. 일방적 희생자였던 승영은 어느샌가 가해자가 되어 있다. ⓒ 청어람



진정 용서 받지 못할 자는 누구인가


영화의 다른 파트를 들여다보자. 승영은 상병 휴가를 나와서 태성을 만나려 한다. 그런데 태성은 좀처럼 만나주려 하지 않는다. '민간인'에게는 '군인'이 별거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한마디로 그들에게 쓸 시간이 아까운 것이 아니겠는가. 


여하튼 태성을 만난 승영은 자신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는 지훈에 대해 상의하려 한다. 물론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는 승영. 이에 태성은 '군인은 다 힘들어'라는 말을 전달하며 더 이상 얘기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으로 비추어보아 군대에서의 일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다 해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힘들기 때문에 그냥 버티라는 말 밖에는 해줄 말이 없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오며 애초에 차단을 해버리니, 승영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태성한테 말해봐야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기겠는가. 그는 어설픈 자기 학대를 시도하고, 태성에게 매달려 울어도 본다. 하지만 남는 건 생채기와 '괜찮아'라는 태성의 영혼 없는 위로 뿐. 


이 타이밍에서 영화가 말하는 '용서 받지 못한 자'는 승영이다. 그는 신병 때부터 고수해온 권력에의 반(反)함과 '후임이 왕이다'라는 생각을 완전히 반대로 고쳐먹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그 때문에 지훈은 자살을 선택하고 만 것이다.(사실 지훈은 여자친구와의 헤어짐으로 인한 충격으로 승영과 다른 선임에게 무례한 행동을 했고, 이를 본 승영은 폭발해 지훈을 심하게 나무랐고 지훈은 자살을 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휴가를 나온 승영이 자살을 택하고 만 것이 아닌가. 이는 누구 때문일까. 자신의 선택으로 빚어진 일로 인해 괴로워하다가 자살을 택했으니 다른 누구의 잘못도 아닌 걸까? 꼭 그렇지 만은 않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태성이 조금이라도 승영의 말을 들어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렇다면 태성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용서 받지 못한 자'인가? 몇 번이고 돌려봐도 진짜 '용서 받지 못한 자'를 찾기란 가히 쉽지 않다. ·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한 장면. 이 영화에서 멱살잡기는 가해자와 희생자를 상징하는 듯하다. ⓒ 청어람



혹시 나는 용서 받지 못한 자가 아니었나?


테이프를 앞으로 감아본다. 다시 처음부터. 용서할 수 없는 또는 자신도 모르게 용서 받을 수 없는 자가 된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보인다. 태성은 승영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승영은 결정적일 때 지훈을 질책하며 그를 저버렸다. 지훈 역시 시간이 가도 군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수동을 비롯한 승영과 지훈의 선임들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군대에 만연한 권력 구조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을 보이며 후임들을 몰아세웠다. 공통적으로 이들은 모두 군인이다.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용서 받지 못한 자'는 군대란 말인가. 몇 번이고 영화를 돌려봐서 얻은 결론이다. 군대로 상징 되는 이 시대의 거대한 틀, 구조.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그 희생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용서 받지 못한다. 가해자이기 때문에. 


생각해본다. 나는 군대에서, 사회에서 희생자인가. 가해자인가. 생각할 필요가 없다. 희생자이기도 하고 가해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 사슬을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가 처음 볼 때는 코믹하고 일상적인 군대 이야기로 보이다가, 보면 볼수록 섬뜩하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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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완장>


<완장> ⓒ 현대문학

이명박 정부가 물러가고 새 정부가 출범한 지도 어느덧 일 년 반이 지나갔다. 5년 임기 중 벌써 1/3 지점에 다다른 것이다.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한시적이고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권력의 속성을 모르지는 않을 터인데, 왜 그리 목을 맸던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왜 그리 휘둘러 댔는가. 권력이란 그물은 언젠가 휘두른 본인을 향한다는 사실도 모른 채.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으면 그리 되는 것인가. 누구라도 '완장'을 차면 눈이 뒤집히는 것인가. 글쎄, 모를 일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 배긴스와 친구들은 한낱 완장보다도 훨씬 어마어마한 권력·힘의 근원인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목숨을 건 여행길에 오르지 않았는가. 하지만 완장은 절대반지처럼 유일무이하지 않다. 절대적이지도 않다. <반지의 제왕>에서 악의 축을 담당하고 있는 사우론의 설치는 부하들이 완장의 속성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비슷한 점이 있다면 착용하는 순간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변해버린다는 것이다. 사실 도처에 도사리면서 사람들을 유혹하는 완장의 힘이 더 막강할지도 모른다. 비록 권력에 기생하는 잔챙이에 불과할지라도. 권력이 완장을 대변하지는 않겠지만, 완장이 권력을 대변할 수는 있다.


윤흥길의 소설 <완장>(현대문학)은 하찮은 권력을 미끼로 나약한 인간들을 유혹하는 완장의 속성과 그에 얽혀버린 어떤 이의 이야기이다. 어떤 이는 임종술이라는 이름의 동네 건달이다. 그는 항상 완장을 찬 이들에게 당하고만 살았다. 그러다보니 완장이란 허울을 던져 놓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구경하는 권력의 실체는 보지 못한 채, 완장에 눈이 멀어 버렸다. 


그런 그에게 거짓말같이 완장이 뚝 떨어진다. 기업가 최씨가 저수지에 양어장을 만들어 그 관리를 종술에게 맡긴 것이었다. 그렇게 안하무인이 된 종술은 완장의 힘을 이용해 못할 것이 없었다. 어느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았고, 급기야 저수지 주인인 최씨가 낚시질하는 것도 막아서지 않는가? 결국 관리인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완장도 같이 빼앗길 처지에 놓이고 만 것이다. 


그에게 저수지의 관리인이라는 완장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국가는 국민의 것이고 자신들은 국민에게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거부하고, 국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과 그에 맞는 지위의 완장을 차고 외려 국민을 핍박하는 모습의 정치인들이 생각나게 한다. 어디 정치인들뿐이겠는가. 어디에서 '한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떠오른다. 


87년도 작품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통해 이문열은 권력의 형성과 붕괴를 한 1950년대 초등학교를 배경으로 그려낸 바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한병태가 반장이라는 완장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자 완전히 바뀌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심지어 그 시절에는 '선도'라는 권력적 자리는 물론이고, '주번'이라는 비권력적 자리에도 완장이 목을 디밀고 있었지 않은가. 권력이라는 괴물이 잉태한 기이한 작태였다. 


또 하나의 유명한 완장이 있다. 독일 나치즘의 상징이자 히틀러의 왼쪽 팔에 항상 둘러있던 하켄크로이츠(또는 갈고리 십자가). 이 문양은 본래 깃발로 만들어진 것으로,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욱일승천기와 함께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친 공포의 상징이었다. 이런 완장의 속성을 알아챘는지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을 실시하면서 모자와 완장을 만들었고, 이는 곧 새마을운동이라면 물불가리지 않는 또 하나의 까막눈을 양성했다. 


그렇다면 완장을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떨까? 권력의 무서움을 느낄까? 아니면 완장을 두른 사람의 무서움을 느낄까? <완장>의 서두를 살펴보며 생각해 본다. 


"그 해 이른 봄부터 이곡리 일대를 온통 휘젓고 다니며 마냥 으스대는 종술의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물론 종술의 성깔을 익히 아는 주민들은 그의 행패가 두려워서 감히 맞대놓고 그를 어쩌지는 못했다. 주민들은 그저 먼발치에서 그의 뒷모습을 겨냥하며 주먹으로 쑥덕감자를 먹이기도 하고 혓바닥을 날름 내밀어 보이기도 할 뿐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구름 의자에라도 앉은 것같이 더욱 거드름을 피우고 다녔다. 


그 자신이 생각하는 임종술과 마을사람들이 보는 임종술 사이에는 사실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는 자기가 마치 때까치 종류에서 하루아침에 보라매 같은 당당한 모습으로 탈바꿈한 양 굳게 믿었다. 반면에 사람들은 때까치이던 그가 물까마귀쯤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들은 때까치 시절의 종술이 그래도 사람 꼴에 가까웠다고 회고하곤 했다."(본문 중에서)


임종술이 생각하는 자신은, 권력의 상징인 완장을 찬 권력자 임종술이다. 반면 마을 사람들이 생각하는 임종술은, 임종술이 권력의 상징인 완장을 찬 것이다. 즉, 사람들은 완장 찬 임종술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임종술이 찬 완장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완장 찬 임종술의 행패가 두려운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정확히 30년 전에 나온, 군부 독재의 권력에 눈이 먼 사회상을 비판하는 이 책이 여전히 현재성을 발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쫓겨난 임종술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저수지를 지키고 있었다. 가뭄이 들어 저수지의 물을 뺄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도 그는 자신의 권한을 지키기 위해 수리 조합 직원들과의 충돌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그는 술집 작부 부월이의 절규에 찬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작가가 정녕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닌가 싶다. 


"눈에 뵈는 완장은 기중 벨 볼일 없는 하빠리들이나 차는 게여! 진짜배기 완장은 눈에 뵈지도 않어! 자기는 지서장이나 면장 군수가 완장 차는 꼴 봤어? 완장 차고 댕기는 사장님이나 교수님 봤어? 권력 중에서도 아무 실속 없이 넘들이 흘린 뿌시레기나 줏어먹는 핫질 중에 핫질이 바로 완장인 게여! 진수성찬은 말짱 다 뒷전에 숨어서 눈에 뵈지도 않는 완장들 차지란 말여!"(본문 중에서)


진짜배기 완장은 눈에 뵈지도 않는다는 말과 진수성찬은 눈에 뵈지도 않는 완장들 차지란 말이 종술에게 뼈아프게 다가왔을 것이다. 결국 종술은 완장을 저수지에 버리고 부월이와 함께 자취를 감춘다. 다음 날, 저수지 위에 종술의 것이었던 완장이 나타나고 소용돌이치면서 빠지는 물과 함께 사라진다. 


일시적인 권력의 속성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이 장면을 보며, 그 허망함에 속이 시원하다기 보다 씁쓸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권력이라는 거대한 욕망 앞에 휘둘려 하수인 노릇이나 한 완장 두른 사람들이나, 그 앞에서 완장의 힘이 두려워 어쩌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언젠가 다시 찾아올 줄도 모르고 다시는 안 올 것처럼 멀리 가버리는 권력의 상징을 보며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불행해 보이는 건 왜일까. 


작가는 진짜배기 완장을 찬, 눈에 뵈지도 않는 자들은 지서장이나 면장 군수, 사장님이나 교수라고 말하고 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진짜배기 완장을 찬 분들은 같은 분들인가 보다. 더 무서운 게 무엇인지 알겠는가? 지금은 그나마 눈에 보이던 '완장'이라는 뚜렷한 표상체도 없는, 말 그대로 '눈에 뵈지도 않는' 권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진화의 진화를 거듭하는 권력은 이제 아무 실속 없이 뿌시레기나 흘리진 않는다. 그럼에도 '벨 볼일 없는 하빠리들'은 존재하는가 보다. 


독특한 리얼리즘 기법에 입각해 권력의 속성과 그에 얽힌 사람들의 비루한 삶을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낸 이 작품 <완장>을 눈에 뵈지도 않는 진짜배기 완장을 찬 분들께 권하고 싶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고 레닌과 스탈린이 생각난 어린 친구들께도 과감히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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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한국인과 영어>


<한국인과 영어> ⓒ인물과사상사

대한민국 역사상 제일 많은 영향을 끼친 세 나라를 뽑자면, 제일 가까운 나라들인 중국과 일본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미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나라는 공통적으로 우리나라를 통치한 적이 있다. 자연스레 그들 나라의 문화와 언어를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한자는 과거 수천 년 동안 우리나라 언어 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한편 현대 중국의 영향이 과거만큼 크지 않기에, 현대 중국어는 아직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치지는 않고 있다. 물론 앞으로 거대해질 것이지만. 반면 일본어는 우리나라의 일본에 대한 뼛속 깊은 반감 때문에 직접적 통치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그리 많은 영향을 주지 못했다. 물론 저도 모르게 많은 단어들을 쓰고 

있지만, 그마저도 비속어 취급을 당한다. 


그렇다면 미국 언어인 영어의 경우는 어떠한가? 미국은 중국, 일본과는 다르게 우리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거니와 역사도 형편 없이 짧아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최초 미국과의 접촉은 19세기 후반 미국 이양선의 출몰, 그리고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을 겪은 후 내부 정비와 대륙 개척에 몰두하면서, 그 힘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실시하고 있던 때였다. 


정작 우리나라가 영어와 최초로 접촉한 때는 17세기이고 그 대상은 네덜란드인이었다고 한다. 이후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조선 본토 연안에 출현한 영국의 배는 '한국인과 영어'의 지독한 애증 관계의 시작이었다. 


강준만 교수의 <한국인과 영어>(인물과사상사)는 제목 그대로 한국인과 영어의 이 지독한 관계가 어떻게, 왜 시작되어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 최초의 접촉부터 시간의 흐름에 따라 꼼꼼하게 다룬다. 때론 신기하고, 때론 어처구니 없고, 때론 씁쓸한 기록의 향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하고 한숨이 나오기도 하거니와 어쩔 수 없었구나 하는 체념의 기분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이 되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이 과열을 잠재울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저자가 한국인과 영어의 역사를 쭉 살피면서 얻게 된 결론이 세 가지 있다. 첫째, 영어는 애초에 권력이었다는 것. 영어는 사교권 장악 수단이었으며, 일제의 패망 조짐이 보이면서 일종의 '복음의 소리'가 되었고, 이는 이후 전개될 '영어 패권주의'를 예고한 셈이라는 것이다. 


일제 시대 때 이미 영어로만 출세해 고위직에 오른 사람이 있고, 주요 언론사는 영문란을 설치했으며, 경성제국대학에 가기 위한 필수 과목으로 영어가 채택되었다. 결정적으로 당시 영어 학습의 최강자라 불린 어느 영어 학교는 <조선일보> 광고를 통해 영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시대의 영어 광고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한 내용이다. 


"늙은이 젊은이나 영어를 모르면 지금 세상에는 암흑"(1931년 5월 23일)

"금일 이후 영어를 알지 못하는 분은 사회의 패잔자요"(1936년 8월 25일)

"영어 인풀레 시대가 도래한 오늘 근무의 여가에 시간을 쪼개 영어를 배워 생애의 희망을 실현하라"(1937년 9월 26일)


해방 이후 영어의 위상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사실상 일본 대신 미국의 지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맥아더가 발표한 포고령 1호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고 하였다. 이에 영어는 최대의 출세 무기이자 생존 무기가 되었다. 


영어 권력은 한국 전쟁이 끝나고 새 시대가 도래했을 때도 여전했다.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장준하 등은 모두 영어권 유학파 출신 내지 영어 실력이 출중한 사람들이었다. 이후 본격적인 수출 전쟁이 시작된 박정희 정권 하에서의 1970년대에서도 영어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모든 길은 수출로 통했고, 수출을 하기 위해서 영어가 필요했다. 


저자의 두 번째 결론은 한국인에게 영어란 종교와 같다는 것이다. 영어가 종교와 비교된 배경에는 '세계화'가 있었다. 1993년 대통령 자문기구 21세기위원회는 국제화를 위해서는 국제사회에서 활동할 수 있는 능력과 소양을 갖춘 국제인의 양성이 최우선 필요하다면서 영어와 한자 교육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언급했다. 이때부터 거짓말처럼 영어 교육 붐이 불기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된 토익 및 토플 폭풍, 조기 영어 유학 열풍 등. 영어만 잘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고, 좋은 기업에 취직할 수 있으며, 좋은 배우자를 얻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실제로 영어로만 충분한 돈과 명예를 쟁취할 수 있었기에, '영어'라는 절대적인 힘을 숭배하고 신성하게 여겨 거기에 선(善)의 이름을 붙이기까지 하였다. 


세 번째 결론은 영어가 공포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제는 단순히 영어를 잘해야겠다는 생각보다, 영어를 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영어를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절박한 생존의 영역에 발을 들이게 된 상황이다. 이 때문에 혀 수술까지 하는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공포의 느낌을 받게 하는 데는 '공포 마케팅'이 크게 기여(?)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6살 아이를 둔 부모가 상담을 요청하자 학원은 늦었다고 하며 3, 4살 때부터 시작한 친구들을 들먹이는 것이다. 이런 조기 교육의 공포 마케팅이 먹히는 이유는, 훗날 그가 서게 될 '영어 계급사회'에서의 위치 때문이다. 토익 점수에 따라 평균 연봉이 차이 나고, 그에 따라 그의 인생이 상당 부분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편 급격히 변화하는 세상에 대응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도 한몫 한다. 특히 지금 시대는 인터넷이 대부분의 정보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영어를 못한다면 영어 천지인 인터넷을 못하는 것도 같은 말이다. 


"전문가들은 "영어에 대한 관심이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지만 최근의 이상 열풍은 과거보다 훨씬 절박한 이유에서 비롯됐다"며 인터넷과 경제의 글로벌화를 지적했다. 인터넷을 통해 전파되는 정보의 80퍼센트 이상이 영어로 되어 있어 영어를 못하면 지식 정보 사회에 낙오자로 전락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본문 중에서)


그런데 저자는 맺는말에서 갑자기 영어 문제는 입시 문제와 판박이라며 학벌 얘기를 꺼낸다. 그리고 영어 광풍에 근본적인 개선 방안은 있을 수 없다며, 조금 너그러워지자는 주장을 배경으로 한다. 저자는 소위 SKY라 불리는 학벌의 최상위권 대학을 깨거나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대안은 '서열 유동화'이다. 


서열 유동화의 요지는 '다원적 경쟁 체제'이다. 사회 각계 엘리트의 절대 다수가 3개 대학이 아닌 30개 대학에서 나오게끔 하자는 것이다. 엘리트 충원 학교가 수적으로 대등한 수십 개 대학으로 늘어나면 서열 유동성이 생겨나게 되고, 대입 전쟁의 열기를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 분산 시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저자는 이렇게 해야 진정한 경쟁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저자의 주장은 일면 굉장한 파격을 보여준다. 하지만 필자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못한다. 다른 건 젖혀 두고서라도, 1대 99로 대변되는 기득권층과 비기득권층의 싸움이 10대 90 혹은 그 이상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단지 기득권층 안에서의 싸움 만을 심각하게 보고, 그 싸움을 완화시키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 것 같다. 


엘리트의 저변이 확대되면 물론 내부 경쟁이 비교적 완화될 테고 그러면 그 싸움의 궁극에 있는 영어 광풍이 어느 정도 수그러들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외적으로 비엘리트계층의 수는 줄어들 테고 그러면 그들이 갖는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커질 것이 아닌가? 


필자가 이 책을 읽고 나서 굳이 학벌주의의 대안을 제시할 이유가 없지만, 평소 생각했던 바는 '대학 평준화'이다. 어떤 의미에서의 평준화인가 하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대학에 철퇴를 가하고 제대로 된 대학 만을 남겨두는 것이다. 그리고 대신 직업 학교와 전문 학교의 수를 늘려야 한다. 정말 대학을 가서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은 대학을 가고, 일찍 전문 직업을 가지고 싶은 사람은 직업 학교 내지 전문 학교에 진학하는 것이다. 영어 또한 직업에 필요로 하는 사람만 배우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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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봐도 봐도 재밌고 또 봐도 감동적인 콘텐츠들이 있다. 드라마, 영화, 책, 만화, 음악 등. 퇴색되지 않는 재미와 감동은 물론이고, 볼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 그건 아마도 볼 때마다 환경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기 때문이리라. 필자가 살아가면서 보고 또보고 계속봤던, 앞으로도 계속 보게 될 콘텐츠들을 나름 엄선해 간단히 리뷰해본다. 이 시리즈는 계속될 예정이다. 보고 또보고 계속보기 : 드라마① [하얀거탑]

소설 <하얀거탑>. 총 4권으로 완결되었다. ⓒ청조사

<하얀거탑>은 본래 일본 장편 소설이다. 정확히 50년 전인 1963년에 연재가 시작되어 2년동안 계속되었다. 이후로 1966년에 일본에서 영화화되었고 1967년, 1978년, 1990년, 2003년에 드라마로 리메이크되었다. 그 엄청난 인기와 더불어 콘텐츠에 대한 신뢰가 엿보인다. 한국에서는 일찍이 1978년 청조사라는 출판사에서 소설이 출간되었고, 2005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재출간되었다. 잠시 청조사라는 출판사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 출판사는 <우동 한 그릇>이라는 짧디 짧은 일본 소설을 출간해 소위 '대박'을 친 바 있다. <하얀거탑>은 2007년이 시작됨과 동시에 MBC에서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로 선보였다. 당시 군대를 갓 제대한 터라 정신없는 와중에서 제대로 시청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인터넷에서 떠들썩했음에도, 안타깝게 본방사수는 하지 못했고 나중에서야 접하게 되었다. <하얀거탑>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한 천재 외과의사의 끝없는 질주와 비극적 종말이다. 당연하게도(?) 이 외과의는 권력에의 야망이 엄청나다. 대신 외롭다. 일종의 정략결혼을 한 탓으로 아내에게 자신의 외로움을 비롯한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다.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여자는 따로 있다. 그의 권력에의 야망은 어렸을 때 찢어지게 가난했던 기억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를 끔찍이도 위한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다. 걱정하실까봐. 그의 제일 친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내과의사인데, 주인공과는 달리 의사 집안 출신의 전형적인 인자한 의사 타입이다. 권력에의 의지보다 환자에의 의지가 강하다. 천재는 아닐지언정, 누구나 인정하는 훌륭한 실력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그는 친구이자 천재인 주인공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저돌적이지 못하고 언제나 수치에 입각해 정확한 진찰과 검사에 의지하는 자신을 한탄하기도 하는 것이다. 

한국 드라마 <하얀거탑> ⓒMBC

드라마는 2천년대에 들어선 한국 드라마가 전형적인 캐릭터와 개연성이 무시된 이야기, 천편일률적인 남녀 주인공의 '짝짓기 놀음'으로 점철되었기에, 시청자들로부터 외면되었다고 하면서 이를 타파하기 위한 드라마를 만드려했다는 기획의도를 명백히 밝혔다.그리고 이 의도에 완전히 부합하는 드라마가 만들어진 것이다. 시청률(AGB)은 10%대로 출발해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며 20%를 넘기며 종영한다. 주인공 장준혁 역의 김명민은 2007년 MBC 연기대상에서 최우수상과 백상예술대상에서 남자 부문 최우수상을 탄다. 당시 MBC 연기대상을 시청하며 한탄했던 기억이 난다. 대상은 태왕사신기의 배용준이 탔었다. 김명민은 다음해인 2008년 베토벤 바이러스로 대상에 재도전했고 대상을 탔다. 하지만 이마저도 에덴의 동쪽의 송승헌과 공동대상이어서 옥의 티였다.  이 드라마는 얼핏보면 선과 악의 대립, 권선징악의 교훈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위에서 주지했다시피 주인공의 권력에의 야망에는 남모를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온갖 권모술수와 부정행위로 야망을 이루고야 마는 주인공은 결국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고 만다. 시종일관 주인공의 최대의 적으로 나오는 주인공의 10년간 스승이, 주인공에게 패한 뒤 물러나 칩거하고 있을 때 읊는 구절이 주인공의 비극적 종말을 상징한다 하겠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하얀거탑>은 기본적으로 의학 드라마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정치, 법정, 심리 드라마에 가깝다. 혹여 아직 접하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이 점을 유념하시면 좋을 것이다. 

필자는 이 드라마 DVD를 선물로 받아서 소중히 간직하면서 1~2년마다 한 번씩 다시 보곤 한다. 스피디하고 긴장감 있는 전개와 물오른 연기들을 보고 있으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나름 드라마 시청 경력(?)이 20여년 되었지만, 최고의 드라마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하얀거탑>을 꼽을 것이다. 자신있게 추천드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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