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목소리의 형태>


<목소리의 형태>는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 주류의 한 정점임에 분명하다. ⓒ디스테이션



일본 애니메이션이 굉장히 철학적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방대하고 집요하다. 선악의 경계를 무너뜨린 대우주 서사시 <건담> 시리즈나 일관되게 자연과 인간의 대결과 화해의 주제를 내놓는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들, 거기에 <공각기동대>를 필두로 하는 사이버 펑크 애니메이션의 철학으로의 집요한 접근이 대표적이다. 


그렇지만 일본 애니메는 미국 그래픽 노블이 선보이는 '작화보다 텍스트'를 추구하진 않는다. 대단히 철학적인 주제로 나아가는 만큼 일본이 자랑하는 극도의 비현실적 '예쁜' 작화와 대중적인 소재를 채택한다. 자칫 조화롭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오래 전부터 그토록 상반된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기에 정립이 되어 있다고 하겠다. 


우린 올해 초에 그 한 정점을 보았다.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이다. 예쁘기 그지 없는 작화와 여기저기에서 많이 봐온 대중적이고 자극적인 소재 안에 범상치 않는 주제를 담았다. 그리고 4개월 만에 찾아온 또 다른 정점 <목소리의 형태>. 홍보는 두 애니메가 비슷한 것처럼 했는데,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결을 두고 있다. 개인적으로 <목소리의 형태>가 더 좋았던 것 같다. 훨씬 더 나의 일상과 맞닿아 있어 공감이 갔다. 


치기어렸던 학창 시절의 이야기?


따돌림과 괴롭힘은 학창 시절에 으레 겪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디스테이션



쇼야는 고등학생에 불과한 어린 나이이지만 무슨 이유인지 삶의 끈을 놓으려 한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대신 그는 수화학교를 찾아간다. 그리곤 거기서 쇼코를 만난다. 엉겹결에 너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시점은 과거로 가 초등학교 6학년 쇼야의 반으로 쇼코가 전학오는 때다. 쇼코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쇼야는 그런 쇼코를 놀린다. 처음에는 그저 장난으로, 나중에는 집단 따돌림으로 발전한다. 그럼에도 쇼코는 그저 미안하다면서 싱글벙글 웃을 뿐이다. 


그런 쇼코의 유일한 친구였던 사하라, 하지만 그녀는 어느 날 사라진다. 그러곤 쇼코도 버티지 못하고 전학을 간다. 곧 쇼야는 이지메 주범으로, 함께 쇼코를 따돌리는 데 앞장섰던 친구들에게 역으로 집단 따돌림을 당한다. 이후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가는 와중에도 이지메 주범이 꼬리표로 달려와 항상 '왕따'로 있는 그다. 그런 와중에 다시 만나게 된 쇼코다. 


쇼야는 쇼코와 친구가 되고자 수화를 배우는 등의 노력을 한다. 하지만 쇼코 곁에 항상 붙어 있는 유즈루라는 친구 때문에 다가가기 쉽지 않다. 아무래도 절친 같다. 그러며 감히 '친구'라는 걸 만들고 싶어 하는데, 그런 그에게 나가츠카가 마음을 연다. 이후 예전에 쇼코를 따돌림하는 데 일조했던 우에노를 만나고, 쇼코의 유일한 친구였던 사하라도 만나며, 이쪽도 저쪽도 아니었던 카와이도 만난다. 과연 쇼야는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쇼야와 쇼코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목소리의 형태>는 얼핏 치기어렸던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듯하다. 머리가 크고 돌이켜보니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라도 지나왔을 그때 그 시절의 안타깝지만 웃으면서 얼버무리며 지나갈 수 있는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저 그렇게만 흘러가면 이 애니메를 볼 이유가 없겠다. 


원죄와 구원의 측면에서 바라보기


가해자라는 원죄, 그리고 속죄로 이어질 구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디스테이션



우린 이 애니메를 원죄와 구원, 존재라는 거창하기까지 한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학창 시절의 치기 어린, '누구나 그땐 그럴 수 있어'라고 넘길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제대로 돌아봐 직시하고 풀 수 있는 건 풀어야 한다. 쇼야가 자살까지 생각하게 된 이지메는 자신이 저지른 이지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나쁜 짓을 했으니 똑같이 나쁜 짓을 당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원죄를 직시하고 당사자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러며 '친구의 자격'이라는 씁쓸한 단어로 구원받으려 한다. 이에 당사자인 쇼코는? 그녀보다 그 주위 사람들이 더 반대한다. 특히 그녀의 어머니는 그가 한때나마 그녀에게 한 짓을 아주 잘 알기에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난 약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와 중학교 3학년 때 따돌림이 아닌 괴롭힘을 당했다. 20여 년이 지났어도 생생한 기억들은, 나로 하여금 그를 다시 만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상태에 있게 만든다. 솔직히 모르겠다. 지금 만나면 어떤 복수를 해줄지. 그런 한편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는 오히려 내가 누군가를 괴롭힘이 아닌 따돌린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어떤 식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뭔가를 했던 건 확실하다. 


아마 이 피해자와 가해자로서의 경험들이 뒤죽박죽되어 이후 오랫동안 새로운 사람들을 잘 사귀지 못했었던 것 같다. 극 중 쇼야는 고등학생이 되고 사람들 얼굴을 잘 쳐다보지 못하거니와 얼굴에 'X'표가 달려져 있게 되었는데, 그게 다 그가 저지른 가해자로서의 경험과 그가 당한 피해자로서의 경험이 합쳐져서일 것이다.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며 애니메이션으로만 구현이 가능한 이 표현은, 쇼야의 복잡한 극도의 심정을 잘 표현해냈다. 


원죄와 존재의 측면에서 바라보기


스스로 생각하기에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원죄와 그럼에도 세상에 꼭 존재해야 한다는 부정과 합의 이야기다. ⓒ 디스테이션



결국은 쇼코가 쇼야를 용서해줄 줄 안다. 어떤 식으로? 거기엔 원죄와 구원이라는 키워드 외에 '존재'의 키워드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번엔 쇼야가 아닌 쇼코다. 누가 봐도 쇼코는 잘못한 게 없지만, 그녀는 항상 미안하다고 한다. 그건 청각장애인이라는 쇼코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며 자신만 사라지면 모든 것들이 원만할 거라 생각한다. 


이 세상은 피해자가 도망가야 하는 상황이 두루 존재한다. 결은 다르지만, 영화 <한공주>를 보면 한공주는 피해자일 뿐더러 잘못이 없는데 가해자로부터 도망다녀야 한다. 그러며 언제든 존재의 사라짐을 준비한다. 결코 삶의 끈을 놓을 생각은 없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쇼코는 자신을 괴롭힌 당사자였던 쇼야가 수화를 배워와 자신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말 못할 감동을 느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쇼야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쇼야와 쇼코는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로서의 도식이 아닌, 원죄와 존재 그리고 구원으로서 서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도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 아무리 쇼야의 첫 번째 절친 나가츠카, 쇼코의 수호천사 유즈루가 있다 해도 그들은 서로가 있어야 한다. <목소리의 형태>는 초중반부의 일반적 차원에서 후반부의 철학적 차원으로 넘어가며 이 도식을 직접적으로 내보인다.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을 얻는다. 


한편 우린 이 작품을 통해 아픈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죽을 만큼 아픈 사람들을 말이다. 그런데 아직 세상을 제대로 접하지 못하고 알지 못한 아이들이다. 쇼야의 경우, 어른들이 생각하기에 터무니 없는 이유로 세상을 등지려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바로 그 점이다. 누구나 겪었을 만한 아픈 이야기를 어른이 되면 잘 거들떠 보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땐 그럴 수 있어' 하며 넘어가려 할 뿐이다. 그 어느 것 하나 그냥 넘어가면 안 되는 것이다. 들여다보자. 그들이 말하려는 목소리의 형태를. 


세상의 아름다움, 그리고 나의 이야기


<목소리의 형태>는 아름답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누구나의 이야기다. 그것으로도 충분한 것 같다. ⓒ디스테이션


<그의 이름은.>의 신카이 마코토가 '빛의 작가'라는 수식어를 얻을 만큼 빛의 섬세함을 일상과 접목시켜 치밀하게 보여주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반면, <목소리의 형태>는 세상을 등질 만큼 심각한 상황에 맞지 않는 것 같은 자연의 신비를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선보이려 하는 것 같다. 


우린 이 작품에서 아름다운 벚꽃, 귀여운 잉어, 예쁜 다리 밑 개울가 풍경을 수시로 볼 수 있다. 현실은 시궁창인데 보이는 풍경은 이리도 아름다우니 만큼 시궁창 현실을 미화하려는 수작인가 생각하기 쉽지만, 그 일원인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데 크게 일조한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들은 아직 어리다. 


의외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는데, 어느 정도 내 이야기 같다고 느낀 측면도 클 것 같다. 그렇지만 학창 시절의 이런저런 일들, 상당히 심각한 게 분명하지만 '그땐 그럴 수 있지'라며 넘기기 일쑤인 일들은 그야말로 누구나 한 번쯤 겪을 것이기에 나말고도 나처럼 느낀 이들이 많을 줄 안다. 


그 모든 일들이 절대 그저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그렇지만 그 어떤 일도 용서하고 구원받지 못할 건 없다는 것도 말해주고 싶다. 물론 여기엔 단서가 따른다. 다른 누가 끼어들 수 없는 당사자들끼리의 원죄의 대한 속죄와 용서에 따른 구원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절대 허투루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이는 비단 학창 시절의 상대적으로 강도가 덜한 일들만이 아니다. 나아가 국가, 인류의 절대적 강도의 일들에도 해당된다. 쇼야가 쇼쿄에게 하는 진심어린 속죄와 사과를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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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83일-어느 방사선 피폭 환자 치료의 기록>



<83일>-어느 방사선 피폭 환자 치료의 기록 ⓒ뿌리와이파리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원전 사고. 지진과 쓰나미가 대비할 수는 있지만 원천적으로 막을 수 없는 자연에 의한 자연 재해라면, 원전 사고는 그야말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인간에 의한 인재이다. 그래서 분노가 치밀고 안타깝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더욱이 원전 사고는 절대 지워질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방사능 피폭의 직격탄을 맞는 후쿠시마현은 거의 유령 마을과 다름없게 되어 버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실종되었으며, 아직까지 타지역에서 피난 생활을 하고 있다. 대지진과 쓰나미 때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원전 사고에 의한 방사능 피폭 때문이었다. 방사능 피폭은 무엇을 의미할까? 한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방사능 피폭의 위력이라면 일개 개인에게는 죽음을 의미하지 않을까?


2011년 대규모 방사능 피폭을 당한 이웃나라 일본은 이미 20세기 말인 1999년에 일본을 떠들썩 하게 했던 방사능 피폭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난 곳이 도쿄에서 북동쪽으로 약 22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라면, 1999년 방사능 피폭 사건은 도쿄에서 북동쪽으로 1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다. 이바라키 현 도카이무라 'JCO 도카이 사업소'에서 핵연료 가공 작업을 하던 불과 서른다섯 살의 남자 오우치가 대량 중성자선에 피폭당했다. 피폭량은 일반 사람이 1년에 받을 수 있는 방사능 량의 2만 배에 달했다. 일본에서 최초로 일어났던 방사능 피폭 임계 사고였다. 


피폭 환자의 치열한 사투를 담다


책 <83일-어느 방사선 피폭 환자 치료의 기록>(뿌리와이파리)은 1999년 당시 오우치가 피폭 당한 후 83일 간 병원에서의 치열한 사투를 담은 2001년의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옮긴 것이다. 다른 그 어떤 콘텐츠보다 원전 사고와 방사능 피폭에 관해 훨씬 더 경각심을 일으키게 할 만하다. 그만큼 피폭 당했던 오우치와 그를 치료하고자 했던 의료진들의 사투가 끔찍했고 지난 했으며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책은 그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수많은 사람이 방사능 피폭을 당해 죽고 지워질 수 없는 상처를 입고 간다는 통계적 전달보다 단 한 사람에 집중해 최선을 다해 치료하고 살고자 하지만 결국은 죽어갈 수 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강렬하다.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시시각각 파괴되어 가는 몸과 정신, 그리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몸의 상태. 그 앞에서 어느 누군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방사능 피폭 환자 오우치는 이틀째만 해도 멀쩡하게 보였다. 농담도 할 수 있을 만큼. 그냥 여기저기가 조금 아플 뿐이었다. 직접적으로 피폭을 당한 오른팔 정도. 그러던 그의 상태가 며칠이 지나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하게 되었고,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의식이 사라졌고, 염색체가 산산이 부숴져 내장도 혈액도 피부도 되살아나지 않았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부디 편히 쉬세요.


여동생의 조혈모세포를 이식해 희망이 생기는 듯했지만, 그마저도 유전자가 파괴되어 버렸다. 방사능에 의한 잇따른 장애, 한번 장애가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신체가 된 오우치, 그리고 결국 심장이 멈추고 만다. 겨우 겨우 심장을 다시 뛰게 했지만, 그로 인해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갔다. 국내외에서 아직 상용화 단계에 이르지 못한 온갖 약물까지 투여해 목숨만 부지해 놓은 상태가 되고 만다. 


여기서 간호사와 의사들은 어쩔 수 없는 의문이 들고 만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 차라리 죽음보다 못한 고통스러운 치료를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가. 어느 누가 보아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전혀 없는 이 환자를 왜 붙잡아 놓고 있어야 하는가. 이것이 정녕 환자를 위한 것인가. 이런 딜레마는 오우치를 치료했던 모든 의료진의 숙제이자 숙명이었다. 


결국 피폭 당한지 83일만에 오우치는 심장이 멈추고 말았다. 그런 그를 보며 의료진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오우치씨,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부디 편히 쉬세요."라고 말한다. 종교적이기까지 한 이 말은, 방사능 피폭의 고통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는 아주 통렬한 말이다. 


남의 일도, 오래전 이야기도 아닌 원전 사고


그런 와중에 우리나라는 현재 23기의 원전을 가동하고 있고 11기의 원전을 더 지어 올리고 있다. 규모로는 세계 5위지만, 단위 면적당 용량은 세계 1위에 빛난다. 또한 설계 수명을 다한 월성 원전 1호기의 수명을 연장하는 위험한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고리 원전과 월성 원전 주변에는 족히 500만 명은 될 만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아주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 일어난 그런 일들을 보고도 말이다. 원전 사고가 모두 인재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무리 좋은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만에 하나 원전에서 사고가 일어나면 반드시 누군가는 피폭을 당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반드시라고 할 만큼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원전의 폐쇄를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원과 파멸의 두 얼굴을 지니고 있는 원자력이니 만큼 말이다. 다만 원전 사고가 남의 일만은 아니며, 오래전 이야기만도 아니며, 만약 일이 터지면 그 어느 곳보다 많은 피해를 당하게 될 곳이 우리나라라는 걸 잊으면 안 되겠다. 파멸의 위험이 다분한 구원의 길은, 그 자체로 이미 구원이 아니지 않은가. 이는 도박이나 마찬가지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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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가장 사소한 구원>


<가장 사소한 구원> ⓒ알마

그다지 끌리지 않는 표지, 유명하다지만 개인적으로는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는 저자, 더군다나 노교수와 청춘이 주고받은 편지 모음집이라니... 세대 담론을 앞세워 사회를 진단하고 끝에는 힐링으로 끝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앞서 들었다. 그럼에도 이 책 <가장 사소한 구원>(알마)를 선택한 이유는 하나다. 바로 '구원'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두 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마' 출판사에 대한 믿음도 한 몫 했다.)


'구원'은 굉장히 종교적인 단어인데, 일반적으로는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함'을 뜻하고 기독교적으로는 '인류를 죽음과 고통과 죄악에서 건져냄'을 뜻한다. 그래서 인지 일반적으로 아무 때나 쓰지는 않는 듯하다. 뭔가 거룩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지금 시대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 구원이다. 


이 시대의 아픈 청춘들은 얼마나 구원을 원하고 있는가. 그런데 들여다보면 엄청난 것을 원하는 게 아니다. 일을 하고 싶고, 연애를 하고 싶고, 결혼을 하고 싶고, 아이를 낳고 싶고, 집을 갖고 싶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고, 노후에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을 뿐이다. 나열해 보니 너무 많은 걸 원하는 건가? 전혀! 전혀 그렇지 않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당연히 누리고 싶은 것들이다. 하지만 지금 많은 청춘들이 이런 것들을 포기하며 살아간다. 이들은 정말 '사소한 구원'을 원한다. 


노교수의 뻔하지 않은 방법으로 구원하다 


<가장 사소한 구원>에서의 구원은 위에서 말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70대 노교수와의 서른 두 통의 편지를 통해 30대 청춘이 받는 지극히 개인적인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녀 개인이 겪었던 아픔과 상처들에 대한 구원 말이다. 그녀 김현진에게 그 아픔과 상처들은 평생을 따라다니며 지독히 괴롭힌 악마 같은 것이다. 아버지와의 관계, 사랑과 이별, 죽음 등. 그녀의 아픈 이야기는 어디서도 쉽게 들을 수 없다. 


"저는 지금 속이 끓는 것 같은 분노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때 제 팔의 큰 상처 자국을 보시고 왜 그러냐고 물으신 적이 있지요. 누군가를 죽이고, 저도 죽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제가 목숨 바쳐 죽일 만큼 가치가 없었고, 제 목숨도 그렇게 헐하게 버릴 만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만두었지요. 그런데 제 인생의 숨통을 반쯤 끊어놓은 사람이 희희낙락 즐거워하고 있는 것을 우연히 목격하고 나니 누군가 심장을 쥐여짜는 것 같았습니다. 아주 잔인하고 얼음 같은 손으로 말이죠." (본문 중에서)


그런데 이 아픔과 상처를 70대 노교수인 라종일 교수는 누구나 겪을 수 있다고 말한다. 종류는 다를 수 있겠지만 아픔의 강도는 비슷하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 수도, 가해자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 외의 충고를 해주기도 한다. '세상에 무서운 일은 없고, 우스운 일뿐이다', '이야기된 고통은 더이상 고통이 아니다'와 같은 주옥 같은 문구로 위로하기도 한다. 그만의 뻔하지 않은 위로의 방법이다.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아픔과 슬픔을 자세히 이야기해주며 역시 그만의 방법으로 공감한다. 


인생을 먼저 살아가며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선배가 후배에게 보내는 따끔하고 현실적이지만 따뜻한 조언이자 위로로 보이기도 하고, 많은 이야기들을 대동해 할아버지가 손녀를 어르고 달래는 장면으로 보이기도 한다. 김현진의 말마따라 '남자친구'와 '여자친구'의 대화로는 보이지 않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만약 남자친구를 선택할 때 '존경'을 제일로 놓는다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그들의 대화는 톡톡 튀고 진득하며 예리하고 두루뭉술하며 따뜻하고 자연스럽게 물 흐르는 듯하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그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게 없다


김현진이 라종일 교수에게 보내는 16번의 편지와 라종일 교수가 김현진에게 보내는 16번의 답장은 일관성을 유지한다. 김현진이 자신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이 시대의 문제를 묻는다. 라종일 교수는 지극히 겸손한 자세로, 때론 부탁하는 투로, 때론 강압적이기까지 한 태도로 답한다. 책을 다 보면 라종일 교수가 이 시대의 청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걸 알 수 있다. 김현진은 이 시대의 청춘을 대표해서 그에게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그의 답이 뻔하지 않기에, 생산적이기에, 때론 김현진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기에 그 가치가 출중하다. 하나하나 곱씹어 볼 만하다. 


하지만 그의 답이 모두 정답인 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기성세대의 보수적인 측면이 엿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김현진이 지금 청춘들이 일도, 연애도, 결혼도, 아기도 포기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물었을 때 그는 세계의 모든 나라가 똑같은 아픔을 겪고 있으며 옛날 자신이 어렸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넨다. 그 끝에는 항상 '무슨 도움이,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하는 자조 섞인 말을 하는 걸 보니, 그도 별 수가 없어 보인다. 


그러며 시종일관 아기에 대한 찬양(?)을 설파 한다. 인구 감소 때문도, 노동력 부족 때문도, 민족 융성 때문도 아니라고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소감을 전하며 아기를 낳아 부부가 함께 양육하면서 겪는 특별한 경험을 말한다. 그에게는 그런 경험이 사람으로서 존재에 매우 중요한, 불가결한 일면이다. 


한편 그는 모든 면을 두루 살피려 한다. 오직 상대적인 면을 강조한다. 좌우를 막론하고, 스탈린과 히틀러까지 포용한다. 심지어는 일베와 서북청년단까지 끌어 안는다. 가히 충격적인 생각과 발언이라고 생각되지만,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이해가 되는 신기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마치 인간 사회가 굉장히 작아지면서 한 눈에 모든 걸 바라보게 되는 느낌이다. 그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게 없어진다. 적어도 그의 말을 듣고 있을 때는 말이다. 신기한 경험이다. 


"현진은 이런 일에 관해 너무 판에 박힌 쉬운 의견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로서는 일베이건 서북청년단이건 좀더 심층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태도가 바람직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중략)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아무리 우리 입장에서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사람도 아니다' 혹은 '미친놈들'이라고 말하지 말자는 뜻이었어요. 사람으로서 특히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이해하기 힘든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본문 중에서)


"이제 아무 걱정 마라, 나는 네 편이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이들의 대화. 길지 않은 대화 속에서 평생 가져 보지 못했던, 갖기 힘든 생각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생각들을 잘 이끌어 낸 김현진이 대단하다. 라종일 교수는 이 책 하나로 이 시대 청춘들에게 멘토 이상의 버팀목이 될 것 같다. 단적으로 말해, 30대의 나이지만 흔치 않은 슬픔과 상처를 안고 있는 그녀가 낫기 위해 매달릴 만하다. 사소한 구원을 위해서.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속만 상해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다면 그의 말을 한 번 쯤 들어봄이 어떤가. 마지막으로 라종일 교수가 김현진에게 건네는 세 가지 이야기를 올려 본다. 첫째, 이제 아무 걱정 하지 마라. 둘째, 나는 네 편이다. 셋째, 글 쓰는 사람은 원래 어느 정도 불행해야 한다. 당신도 그것을 알지 않느냐? "이제 아무 걱정 하지 마라, 나는 네 편이다." 책을 덮고 나서 왠지 모르게 눈물이 핑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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