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표 소설 읽기] <무진기행>


<무진기행> 표지 ⓒ민음사


주인공 윤회중은 서울의 복잡한 일을 피해 고향 '무진'을 찾는다. 배경 좋고 돈 많은 부인과 제약회사 사장인 장인, 그 회사에서 전무 승진을 위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귀찮고 복잡하고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을 피해서였다. 속물 근성이 판을 치는 속세를 떠나 잠시 머리를 식히러 왔다고 하면 맞을 것이다. 


무진은 윤회중이 나이가 든 뒤로 몇 차례 찾았던 곳이다.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쳐야 할 때나 새출발이 필요할 때였다. 그렇지만 무진이라고 하면, 윤회중은 어둡던 청년 시절이 생각나곤 했다. 긴장이 풀리고 느슨해지지만 말이다. 


여행으로 전근대와 근대의 대립을 느끼고 성장을 한다


누구나의 고향이 다 그럴까. 떠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나의 고향은 무진과 비슷하다. 30년 가까이 지낸 그곳은 높디높은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무진의 안개처럼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그곳에 가면 왠지 긴장이 풀리고 느슨해지곤 했는데, 오히려 윤회중이 무진에서 그랬던 것처럼 더러운 옷차림과 누런 얼굴로 방에 처박혀 있곤 했다.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고 내 동생 또한 그러했다. 


김승옥의 대표작이자 1960년대의 대표작인 <무진기행>은 여러 형태로 읽힌다. 무진을 다녀오는 여행 소설, 짧은 여행임에도 성장을 경험하는 성장 소설, 전근대와 근대가 각축을 벌이는 역사 소설로 말이다. 이들은 얽히고설켜 맞물려 있다. 여행으로 전근대와 근대의 대립을 느끼고 성장을 한다고 할 수 있겠다. 


윤회중은 끊임없이 서울과 무진의 대립되는 이미지를 상기한다. 서울의 도시, 햇빛, 현재, 근대가 무진의 시골, 안개, 과거, 전근대와 대립한다. 그 대립의 향연 안에서 그는 고민하고 갈등한다. 자신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결국 그는 무진을 떠나 서울로 가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속세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무기력함을 깨닫은 것이다. 성장을 했다. 


주인공 윤회중의 과거, 현재, 그리고 지금


그가 무진에서 만나는 박, 조, 하인숙은 그가 말하는 것처럼 또 다른 그다. 중학교 후배이자 모교 국어교사로 있는 박은 과거의 그다. 순수하고 진지하지만 가난하고 비현실적이다. '무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동창이자 세무서장으로 있는 조는 그의 현재다. 지극히 세속적이고 출세지향적이다. '서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인숙은 조금 특별하다. 그녀는 서울에서 음대를 나와 박과 같은 중학교 교사로 있다. 성악을 공부해 졸업 연주회 때 '나비부인'의 <어떤 개인 날>을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흔한 유행가 <목포의 눈물>이다. 그녀가 부르는 <목포의 눈물>은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양식의 노래였다. '서울'과 '무진' 사이 어딘가겠다. 그가 처한 지금의 상황과 가장 맞닿아 있는 인물이다. 


"그 양식은 유행가가 내용으로 한느 청승맞음과는 다른, 좀 더 무자비한 청승맞음을 포함하고 있었고 <어떤 개인 날>의 그 절규보다도 훨씬 높은 옥타브의 절규를 포함하고 있었고, 그 양식에는 머리를 풀어헤친 광녀의 냉소가 스며 있었고 무엇보다도 시체가 썩어 가는 듯한 무진의 그 냄새가 스며 있었다." (본문 46쪽 중에서)


도망치더라도 최소한의 '부끄러움'을 느꼈으면


이 소설은 방황하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하는 존재를 그렸다. 현실은 서울로 대변되는 것들이고 이상은 무진으로 대변되는 것들인데, 문제는 무진이 마냥 이상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곧 전근대와 근대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의 대두로 근대가 출현해 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받지만 자신을 돌아보며 근대, 즉 속세를 버리는 이도 있다. 윤회중은 버리지는 못하고 가끔 도망만 치는 겁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도망치는 무진은 그에게 어두운 과거를 상기시키고 우울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만들기까지 하는 것이다. 어느 곳에도 적을 둘 수 없고 어느 곳에서도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없다. 


그렇게 보면 이 소설은 반(反)근대를 내세운 것 같지 않다. 얼핏 봤을 땐 그렇게 느껴질 수 있지만, 전근대와 근대의 대립에서 방황하는 이를 그리며 오히려 근대 쪽으로 더 기울어졌으면 기울어졌지 반근대는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근대 쪽으로 기울어지는 자신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걸 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그래서 윤회중은 하인숙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꼈나 보다. 자기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그럼에도 그는 하인숙을 구출해줄 수도 구원해줄 수도 없다. 부끄러운 그곳으로 돌아가 혼란스럽지도 어둡지도 않은 일상을 즐겨야 하기 때문이다. 


나라고 해도 돌아왔음직하다. 그러면서 또 그곳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반복과 후회와 성장. 이 루틴은 아마도 평생 계속되지 않을까. 그때마다 최소한 '부끄러움'은 느끼는, 그런 삶이길 바랄 뿐이다. 그것마저도 안 되면 내가 정말 싫어질 것 같다. 이 불안의 줄타기를 계속하는 게 가능할까?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때그때 잘 이겨내는 수밖에. 


<무진기행>(민음사)의 여러 단편 중 '무진기행' 한 편에 대한 서평입니다. 

앞으로도 '한국 대표 소설 읽기' 시리즈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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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바람>



영화 <바람> ⓒfilm the days



20대 중반,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현재에 대한 불만이 겹쳐 우울증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어느 누구의 위로도 그 모든 감정들을 추스를 수는 없었다. 단지 현재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미래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니 과거로 도망치게 되었던 것 같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주인공이 갑갑하고 불편한 현실에서 도망쳐 과거로 천착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랄까.

 

지금은 20대 중반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당시에는 어떤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을까? 몇몇 시절들을 꼽아본다. 대학교 2학년 군대 가기 전, 고등학교 1학년 때, 중학교 3학년 때, 초등학교 6학년 때, 유치원 때. 그리고 우울증을 느꼈던 20대 중반의 그때. 이들 시절에는 어김없이 내 옆에 친구들이 있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친구들 또한 이 당시의 친구들이다.

 

지금 내 옆에는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한 친구가 있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힘들어 한다. 그 친구 덕분에 지금의 이 어려움들을 견디고 있지만 가끔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지금 또한 미래의 나에겐 돌아가고 싶은 과거라는 걸.

 

돌아가고 싶은 그때 그 시절


영화 <바람>은 한 남자의 돌아가고 싶은 과거인 고등학교 시절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가 원했던 고등학교 시절은 누구보다 폼 나는 시절이었다. 과연 그는 그 ‘바람’을 이룰 수 있을까? 이 영화의 모티브는 <응답하라 1994>의 주인공 쓰레기 역 ‘정우’의 실제 이야기이다. 자연스레 영화 <바람>의 주인공은 배우 정우가 맡았다.



영화 <바람>의 한 장면. 돌아가고 싶은 그때 그 시절. ⓒfilm the days


 

짱구(정우 분)는 엄한 집안의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폼 나는 학창시절을 보내게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럼 ‘바람’이 통했는지 집안에서 유일하게 명문고가 아닌 골칫덩이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부산 바닥에서 폭력 학교로 유명한 광춘상고에 진학하게 된 짱구는, 불법폭력써클 ‘몬스터’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 무리들과 함께 하게 된다면, 편한 학교생활은 물론이고 그토록 바라던 폼 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짱구처럼 폼 나는 바람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를 회고해보면 분명히 짱구의 바람과 똑같은 바람이 존재했었다. 주위에 남학생들만이 존재하는 남고에서, 편안한 학교생활을 넘어 ‘제대로 된’ 학교생활을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싸움 잘하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폼 잡으면서 학교를 활보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이어졌다. 짱구의 바람은 곧 나의 바람이기도 했었다.

 

폼에 살고 폼에 죽는 학창시절


하지만 짱구는 신학기 조회 시간에 거행되는 몬스터의 후임 물색 작업에서 ‘간택’되지 않았다. 인상을 찌푸리며 카리스마를 내뿜으려 해봤지만 타고난 폼이 폭력과는 거리가 멀었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는 짱구.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소위 잘 나가고 싸움 잘했던 형이 같은 학교에 있었기에, 학교생활은 편했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다가 엉겁결에 몬스터와 다른 불법폭력써클 간의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결국 짱구를 비롯한 친구들은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고, 이로 인해 몬스터의 러브콜을 받게 된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학교 ‘일진’이 된 짱구. 아무리 봐도 순박하고 착한 짱구인데, 엄연히 폭력써클의 일원이 되었기에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그 부적절한 합이 얼마나 웃음을 자아내는지. 그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빛이 난다.



영화 <바람>. 폼에 살고 폼에 죽는 학창시절. ⓒfilm the days


 

1997년 데뷔한 ‘젝스키스’의 노래 중에 <폼생폼사>라는 노래가 있다. 폼에 살고 폼에 죽는 사나이라면 사랑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내용인데, 이는 당시 고등학생 사이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사랑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에서 ‘허세’와 ‘폼’을 중요시했던 학창 시절을 대변하는 노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이를 단순히 웃어넘길 수 없는 것이, 당시(1997년 당시가 아닌 모든 이들의 학창시절)에는 허세와 폼이 하나의 문화였고 모든 것이었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도 그것만은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 <바람>은 그런 바람을 한 치의 ‘오버’나 ‘부족함’없이 보여주기에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잘 나가던 짱구. 무서웠던 선배들이 졸업하고 자신이 직접 조회 시간에 후임을 물색하는 위치가 되었다. 세월 참 빠르고 ‘찌질했던’ 옛날이 생각나게 만든다. 그런데 진짜 옛날이 생각나게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긴급 전화. 당장에 집으로 뛰어간다. 그 뒤를 급하게 뒤쫓는 친구들. 곧 아버지가 간경화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건강에 치명상을 입은 아버지. 시무룩해지고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학교생활을 제대로 못하게 되는 짱구. 하지만 아버지가 당장의 급한 상황을 넘기게 되자 짱구는 다시금 돌아가게 된다.

 

나의 진짜 '바람'은 소중한 가족


사람은 정작 닥쳐보지 않으면 모른다. 일이 닥쳤을 때의 슬픔과 두려움과 밀려드는 후회를. 짱구도 그런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어릴 때 자신을 ‘짱구 박사’라고 부르곤 했던 아버지의 아빠 미소와 다정한 모습을 잊어먹고 있었다. 그렇게 따랐던 아빠였는데. 지금은 왜 그리도 싫은지. 왜 그리도 불편한지.

 

결국 짱구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만다. 그리고 짱구의 학창시절도 끝나고 만다. 허세와 폼을 최우선의 가치로 생각했던 그 학창시절이 말이다.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씁쓸한 기억 뿐. 단, 소중한 친구들과 소중한 가족들이 남았다.

 

학창시절 짱구의 ‘바람’은 폼 나는 폭력써클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폼은 허세의 다른 말일 뿐이었다. 당시에는 허세도 폼으로 읽혔지만 말이다. 반면 짱구에게 가족은 폼의 반대말이었다. 엄격한 집안에서 유일하게 공부 못하고 촐싹거리기만 하는 막내아들인 짱구가 폼 날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루 빨리 독립하고 싶고 여차하면 가출이라고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학교생활에서라도 폼 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짱구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곧 가족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슬픈 매개체였다. 실제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였지만, 또 영화로써도 거의 필수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감독이 원래 짰던 시나리오를 던져버리고 완전히 다시 썼다는 것도 수긍이 간다. 그 정도로 학창시절의 ‘바람’은 그 무엇으로도 쉽게 떨쳐낼 수 없던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짱구가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아버지에 대한 꿈을 꾸며 꿈속에서 말하는 장면이 생생하다.



영화 <바람>의 한 장면. 나의 진짜 '바람'은 소중한 가족. ⓒfilm the days



“아빠...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못했다. 아빠... 아빠... 사랑한다.”

 

그때 그 시절, 참 힘들었다. 매일같이 하루에 10시간을 넘게 공부에 매진하고, 그러면서도 양육강식의 남자들 세계에서 살아남으려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발버둥치고, 점점 멀어져 가는 가족들과의 관계에 괴로워하고, 어김없이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불안해하고 현재에 대해 불만에 차 있었다. 과연 지금 그때 그 시절 그곳으로 돌아간다면 어떤 ‘바람’을 갖고서 살아가게 될까. 영화는 그 정답이 ‘가족’이라고 말한다. 반면 나는 대학교 때까지는 ‘공부’였다. 하지만 지금은 ‘가족’으로 바뀐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 그 바람은 더욱 더 확고해질 것 같다. 가족(지금의 가족, 앞으로의 가족)만큼 나를 이해해주고 나를 아껴주고 나를 생각해주는 이는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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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포스터 ⓒ(주)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여배우는 어디서든 특별한 존재이다. 특별하게 취급을 받는다. 자신도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이들이 그녀를 우러러본다. 젊음과 아름다움의 특권을 가장 완벽하게 소화할 줄 안다. 남자 배우를 '남배우'라고 칭하지 않지만, 여자 배우는 '여배우'라고 칭하지 않는가? 


젊고 예쁜 여배우에게 주연은 당연한 거다. 그녀에게 조연을 맡긴다는 건 한 물 갔다는 증표이다. 한 물 갔다는 건 나이가 들어서 아름다움이 퇴색되었다는 뜻이다. 예를 들자면, 지금 엄마, 시어머니, 할머니, 옆집 아줌마, 보모 등의 조연급으로 자주 얼굴을 비추는 중년 여배우 대부분이 소싯적에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 타이틀을 갖고 있었다. 단지 나이에 밀려서 미모에 밀려서 스포트라이트를 넘긴 것이다. 


사실 수많은 주연 여배우들은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은퇴의 길에 접어든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갖고 키우고 살림을 해야 하니 반강제적인 측면이 있다. 이런 측면만 있는 건 아니다. 젊음과 아름다움을 기본적 무기로 세상을 쥐락펴락 했던 이가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자신에게만 비춰오던 스포트라이트가 다른 젊고 아름다운 이로 넘어가는 걸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말이다. 


특별한 존재, 여배우에 대한 이야기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특별한 존재인 여배우에 대한 이야기다. 한때 세상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최고의 여배우, 젊음과 아름다움과 연기력까지 두루 갖춘 완벽한 여배우가 자신과의 격렬하고 치열하지만 조용하고 고요한 싸움 끝에 스포트라이트를 넘겨주게 되는 이야기다. 젊음과 늙음, 과거와 미래, 주연과 조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흘러가는 구름,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물처럼 거스를 수 없는 세계의 법칙에 순응하는 이야기이다. 그 순응의 위대함을 이야기한다. 진정 아름답다.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한 장면 ⓒ(주)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에서 동성의 상사 '헬레나'를 유혹하고 나서 그녀를 이용해 권력을 획득한 다음 무참히 차버림으로써 그녀를 자살로 몰고 가는 '시그리드' 역으로 데뷔해 단숨에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던 대배우 마리아 엔더스(줄리엣 비노쉬 분)는 비서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 분)과 함께 한 시상식에서 <말로야 스네이크>의 감독의 대리 수상을 하러 간다. 가는 도중 감독의 부고 소식을 받고 만다. 


그런 그녀에게 하필이면 <말로야 스네이크>의 리메이크를 제안해 오는 젊고 유능한 감독이 있다. 그 감독은 과거 '시그리드' 역을 했던 마리아에게 '헬레나' 역을 맡기려 한다. 마리아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제안이 아닌가. 아무리 20년이 지나 자신이 나이가 상당히 먹었다고 해도, 어떻게 그런 비참하거니와 조연급의 역을 맡길 수 있는가? 더욱이 자신은 평생 '시그리드'로 살아 왔다. 


하지만 감독의 '헬레나와 시그리드는 결국 같은 인물이에요.'라는 주장과 자신이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해준 <말로야 스네이크>의 리메이크작이라는 점 등 때문에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비서 발렌틴이 옆에서 계속 부추기지 않는가? 그렇게 그녀들은 스위스 실스마리아로 가서 대본 연습을 한다. 


대배우 '줄리엣 비노쉬', 영화에 완벽히 녹아들다


마리아 엔더스 역을 맡은 '줄리엣 비노쉬'는 실제로 세계 3대 영화제(칸, 베를린, 베니스)와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모두 휩쓴 최초의 여배우이다. 거기에 흥행력 있는 작품까지 출연했던,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역사상 가장 완벽한 여배우 중의 한 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에는 영화 <고질라>에 '조연' 급으로 출연하기도 할 정도로 그 명성에 걸맞지 않은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내력이 있는 여배우이니 만큼 이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 완벽히 녹아들었다는 느낌이 든다. 연기인지 실제인지 분간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좋은 연기를 위해서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관찰과 이해에서 출발해 설명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현재의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것이니 그 내공이 얼마나 하겠는가? 그렇지만 당사자야말로 현실과 연기에서 엄청난 혼선을 느꼈을 것이기에 연기 하는 내내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한 장면 ⓒ(주)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영화의 2부는 거의 마리아와 비서 발렌틴의 대본 연습이 주를 이룬다. 집에서도 길을 가다가도 산을 타면서도 대본 연습을 하는 그들. 그런데 마리아는 현실과 연기의 구분이 잘 되지 않는지, 발렌틴에게 그 고통들을 고스란히 내비친다. 일종의 히스테리라고 할까. 그 히스테리의 대부분은 평생을 '시그리드'로 살아온 자신이 '헬레나' 역을 맡게 되는 데에서 오는 괴리감, 상실감, 부러움, 질투심, 우월감 등의 복합적 감정의 발로이다. 


더욱이 리메이크작에서 '시그리드'를 맡게 될 여배우는 조앤(클레이 모레츠 분)이라는 가장 인기 많고 가장 핫하고 가장 문제가 많은 여배우란다.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이런 질 떨어지는 아이와 한 배를 타야 하다니? 이런 하찮은 아이에게 밀려 늙고 추한 역을 맡아야 하다니? 이렇게 연기도 못하고 얼굴만 앞세우는 아이가 나에게 비추던 스포트라이트를 빼앗아 갈 거라니? 안 그래도 '헬레나' 역은 너무 힘들고 벅차기만 한데 말이다. 괜히 한다고 했나? 이제라도 무를 순 없을까? 이 연극을 해낼 수 있을까?


한편 비서 발렌틴은 모든 것을 다 이룬 대배우 마리아가 부러운 듯하다. 자신은 열정은 앞서지만 하찮고 가진 것 없고 실력은 모자라는 일개 비서일 뿐이다. 인생은 미완성이고 까칠한 여배우 아래에서 온갖 수발을 다 들어주고 있을 뿐이다. 답답하고 불안하다. 참을 수가 없다. 훨훨 날아가고 싶다. 나만의 길을 찾고 싶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물 흘러 가듯 거스를 수 없는 것'에 순응하는 위대함


영화 제목인 <실스마리아의 구름>은 영화 속 연극 제목인 <말로야 스네이크>와 한 쌍을 이룬다. 뱀 형상의 구름이 실스마리아 호수를 뒤덮는 이미지가 상징적으로 다가온다. 모든 걸 뒤덮어버리는 구름으로 인해 사라져버리는 산과 호수. 당연한 듯 찾아오는 구름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그 사라져버리는 모든 것을 바라보며 마리아는 무엇을 느꼈을까. 과거는 흘러 미래가 된다. 젊음은 늙음이 된다. 주연의 자리에 있는 이는, 조연의 자리로 옮겨간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은 추함이 되는가? 


끝없이 젊음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여배우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실상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신이 자신 인생의 주연인 듯 울음 대신 웃음을, 두려움 대신 자신감 있는 모습을, 쓸쓸함 대신 화려하게 꾸민 모습을 내보이며 자신을 추스리고 있다. 하지만 내면은 울음과 두려움과 쓸쓸함으로 가득하다.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한 장면 ⓒ(주)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마리아는 영화 말미에서 큰일을 해낸다. 자신에게 들어온 '시간을 초월하는' 젊은 역할을 마다하고 후배 조앤을 추천하는 것이다. 후배 조앤에게 현실적이지만 쓰디쓴 말을 듣고 난 직후였다. 그녀의 모습에서 늦은 나이에도 한 단계 성장하는 삶, 과거를 내려놓고 미래에 바통을 넘기는 '물 흘러 가듯 거스를 수 없는 것'에 순응하는 위대한 생각의 전환이자 회귀가 엿보인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참으로 아름답다. 실제 스위스 실스마리아의 황홀한 풍경을 한 점 한 점 잡아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몽환적 지역이 영화의 주제와 완벽히 맞아 떨어진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고민할 때, 나조차 나를 통제하지 못해 힘들어 할 때, 내려놓지 못해 괴로울 때면 이 영화가 생각날 것 같다. 그리고 스위스 실스마리아로 가서 힐링의 시간을 갖고 싶어질 것 같다. 그렇지만 깨닫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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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표지 ⓒ 민음사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2009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그 영화의 비밀>(예담)에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남자, 여자, 침대, 술이라는 욕망의 4대 원소로 삶의 허망한 구조를 드러내온" 것으로 평가한 바 있다. 


또한 프랑스 최고 권위의 일간지 <르 몽드>에서는 홍상수 감독을 두고 '그는 현대의 연애와 성생활의 실태에 대한 씁쓸한 페시미즘의 초상을 명료하게 그리면서, 자기표현의 도구를 사상의 방법으로 변형시킬 줄 아는 예술가다'라는 극찬을 하기도 했다. 


다소 어려운 말인데, 단적으로 말하자면 홍상수 감독은 현대인에 내재된 욕망을 에둘러 표현할 줄 아는 예술가라는 거다. 그리고 그 모습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우리네 진실된 모습과 너무나 닮아있기에, 그의 영화를 보며 감탄하고 재밌어하면서도 마냥 즐길 수 만은 없다. 그래서인지 클라이막스가 없는 단조로운 일상을 그리고 있음에도, 그의 영화는 긴장감이 넘친다. 


욕망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명한 고전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제목에서 주는 강렬함과 맞물려 내용 또한 적나라하기 그지없다. 욕망을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뜻이다. 잔잔한 물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고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사라지는 파동처럼, 주인공 블랑시 또한 그녀의 동생 주위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고 사라져간다. 


주요 등장인물 4인방을 보면 현실과 이상을 상징하는 두 인물(스탠리와 블랑시)이 첨예하기 대척점을 이루고 있고, 다른 두 인물(스텔라와 미치)은 현실 쪽에 무게를 두고 있거나 가운데에서 무기력하게 대응하고 있다. 


블랑시는 전형적인 미국 남부 백인 귀족 출신이다. 집안 대대로 살아온 저택 벨 리브(아름다운 꿈)를 잃은 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뉴올리언스의 '극락'이라는 지역을 찾는다. 그곳에는 블랑시의 여동생인 스텔라와 그녀의 남편 스탠리가 살고 있었다. 스스로를 굉장히 이성적인 식견을 가졌고 이상적인 여인이라고 생각하는 블랑시는, 귀족 출신인 여동생 스텔라가 그런 곳에서 적응한 채 살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너무나 동물적인 본성의 스탠리와 그의 친구들을 경멸한다. '현실'과 '이상'의 전쟁 아닌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작품에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들


테네시 윌리엄스는 블랑시를 두고 자신과 같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삶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의 아버지는 호탕하고 시끌벅적한 사람이었던 반면, 어머니는 히스테리 가득하고 극도로 예민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또한 누나 로즈는 사회적인 적응을 못하였고 정신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테네시 윌리엄스는 그 자신 굉장히 예민해졌고, 캐릭터성이 짙은 그의 가족들을 작품에 투영시켰다. 


여기에 시대성이 반영된다. 이 희곡이 나왔을 때가 1947년으로, 미국은 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세계 최고의 국가로 발돋움한 시기였다. 그때까지도 미국은 청교도적인 보수적 가치관이 지배하던 사회로 인종, 여성 차별을 비롯한 각종 차별이 여전히 팽배했다. 


희곡의 배경이 되는 남부 사회의 분위기도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당시 미국 남부는 상당히 발전이 더딘 곳이었고, 물질문명과 기계문명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밀려나온 사람들이 찾곤 하였다. 블랑시는 그런 사람들을 상징한다 하겠다.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전부터 살아온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곳에는 단조롭고 소박하지만 거친 힘의 논리가 적용되고 있었다. 스탠리가 이를 상징한다. 


수많은 상징의 충돌


스탠리의 부인이자 블랑시의 여동생 스텔라는 귀족 출신이지만 모든 걸 뒤로 하고 스탠리를 만나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남편을 잃고, 가족을 잃고, 직업을 잃고, 고향을 잃고 낙향하다시피 한 블랑시를 못 본 체 할 수 없다. 이 섬세하고 서정적이며 귀족의 전통과 문화를 알지만, 막장에 이른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과거의 영욕에 집착하는 여인을.


반면 스탠리는 블랑시를 가차 없이 몰아붙인다. 그는 가식적이고 가녀리기까지 한 블랑시가 못마땅하다. 한편으론 용서할 수가 없다. 전통, 문화가 다 무언가, 지나간 과거의 영욕 따위가 현실에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블랑시 또한 스탠리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그와 같은 곳에 있다는 것 자체가 치욕스럽기까지 하다. 저렇게 폭압적이고 막무가내인 사람과는 도저히 같이 있을 수 없다. 


이들의 충돌은 수많은 상징의 충돌을 말해준다. 도시, 귀족 출신의 블랑시와 시골, 빈민가 출신의 스탠리. 과거를 살아가는 블랑시와 현실을 살아가는 스탠리. 건전한 성(性)을 상징하는 블랑시와 왜곡된 성을 상징하는 스탠리. 그리고 무엇보다 확실한 대척점의 상징은 블랑시의 '이성'과 스탠리의 '욕망'이다. 결국 블랑시는 스탠리에게 굴복하고 마는데, 애초에 그녀가 '욕망'이라는 전차를 타고 '묘지'(죽음)라는 전차를 갈아타는 장면에서 예상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찾은 '극락'은 무엇일까. 


이 밖에도 수많은 상징성들이 출동하는 이 희곡을 평가하고자 할 때, 이동진 평론가가 홍상수 감독을 평가한 말을 그대로 옮겨와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과거와 결별을 고하는 것이 필요할 때


우리는 살면서 누구나 과거와 결별을 고한다. 아련한 추억, 젊음의 화려함, 돈이 주는 풍요로움 등. IMF 때는 국민 대부분이 물질적 풍요로움과 결별했다. 그리고 금융 위기 때는 겨우 쌓아올린 아주 소소한 풍요와 또 다시 결별을 고했다. 유럽은 이미 그 화려함과 풍요로움을 잃었고, 오래전 잃었던 풍요로움과 화려함을 되찾으려는 일본의 움직임은 블랑시를 연상시킨다. 


극 중에서 블랑시는 계속되는 정신착란 끝에 결국 정신병원으로 가고 만다. 우아한 귀족 출신의 그녀가, 아픔과 고통을 우아하게 견뎌내지 못하고 파국을 맞이한 것이다. 그녀의 모습에서 자신이 투영된다면, 이제는 과거와 우아하게 결별을 고할 때가 온 것이다.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 우아하게 화려함과 결별하고 스탠리와 스텔라처럼 쿨하게 현실에 적응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블랑시 : 난 언제나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지해 왔어요."(본문 속에서)


그런 면에서 스탠리의 친구 미치야말로 나약한 현대인을 전적으로 투영한다. 그는 스탠리와는 다르게 감수성이 풍부하고 섬세한 면이 있는데, 블랑시에게 반하고 만다. 하지만 블랑시의 남다른 과거를 알게 되고 갈팡질팡 마음을 못 정한다. 현실에 발을 담구고 있으면서도, 포용으로 과거를 감싸주지 못하는 인간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욕망? 현실? 이상? 과거? 환상? 어느 것에 중점을 두고 살아가는가. 누구 하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등장인물들의 초상을 비켜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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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미드나잇 인 파리>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소니픽쳐스



이런 말을 자주하는 지인이 있다. “1930년대에 태어나고 싶다. 모던걸과 모던보이가 거리를 활보했던 그 낭만적인 시대에.” “조선 시대에 태어나고 싶다. 그때 태어났으면 뭐가 되어도 되었을 텐데.” “중세시대 유럽에서 태어나고 싶다. 산 속에서 세상 모르게 소박한 삶을 살 수 있을 텐데.” 끝없이 이어지는 과거 지향적 발언에 두 손 두 발 다 들곤 한다.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조금은 다른 의미로 나도 과거 지향적이니까.

 

나는 역사를 좋아하는 편이다. 한국 역사 교육의 폐해인지는 몰라도, 연도나 인물 그리고 사건 등의 역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몇 년도에 누가 어떤 사건을 일으켰거나 휘말렸는지 그 자체가 너무나 재미있고 흥미롭다. (물론 머리가 커짐에 따라, 그 의미를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그때에 태어나고 싶거나 하지는 않는다. 나는 단지 유명한 무엇에 대한 갈증이 있나 보다.

 

파리를 사랑하고 과거를 동경하는 한 남자

 

우디 앨런의 2011년 작 <미드나잇 인 파리>는 파리를 사랑하고 과거를 동경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3분을 할애해 파리의 아침부터 밤까지의 하루 전경을 달달한 음악과 함께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주인공의 파리에 대한 예찬, 예찬, 예찬.

 

끝내주네! 저길 봐! 이런 아름다운 도시는 세상에 다시 없을 거야. 파리에 자주 못 오니까, 비 내리는 이 도시가 얼마나 멋진지 사진 한 장 찍자. 1920년대의 이 도시를 상상해봐. 20년대 파리를. 빗속에 작가들과 화가들을.”

 

전 시나리오 작가이자 소설가 지망생인 주인공 길(오웬 윌슨 역)은 파리를 예찬하며 약혼자 이네즈(레이첼 맥아담스 역)에게 파리에서 살 것을 권한다. 하지만 이네즈는 미국으로 돌아가 살 것을 확고히 한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한 장면. ⓒ소니픽쳐스


 

사실 이 첫 장면에서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 성공한 시나리오 작가를 그만두고 소설가가 되려하는 길이 못마땅한 이네즈인데, 더군다나 파리라는 이상에 사로잡혀 있다니 말이다. 더욱이 1920년대의 과거를 사랑한다니. 영화의 줄거리는 안 봐도 뻔하고, 이 둘의 끝 또한 좋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영화, 예정된 결말까지의 과정이 너무나도 재미있고 환상적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을 법한 보편적 생각을 끄집어내 이야기에 버무리고 있어 결코 가볍지는 않다. 그 이야기는 길이 현실에 지친 어느 날, 자정이 지난 골목에서 클래식 푸조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면서 시작된다.

 

그를 지치게 한 현실이라 하면, 그의 약혼녀 이네즈가 있다. 이네즈는 낭만이라고는 없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이고 속물이다. 또 그녀의 부모는 어떤가? 역시 속물이다. 그리고 그들은 잘 나가는 시나리오 작가였던 길은 환영해도 소설가 지망생 길은 못마땅해 한다. 여기에 이네즈의 친구들도 가관이다. 그 중에서도 길이 사이비지성인이라 칭하는 폴은 풍부한 지식을 자랑하는 아주 재수 없는 녀석이다. 길은 모든 사람들이 그를 무시해 현실에서 도망치려 하는 것일까? 어느 정도는 맞지만, 그건 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 과거 지향적이지 않던가.

 

환상적이고 재미있는 과거 여행

 

여하튼 길의 비현실적인 과거 여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클래식 푸조를 타고 도착한 곳은 어느 파티 현장. 그곳에서 길은 스콧 피츠제럴드 연인을 만나고, 헤밍웨이를 만나게 된다. 그 파티는 장 콕토가 주최한 것이었고, 시종일관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는 콜 포터가 피아노치는 소리였다. 그는 꿈에 그리던 1920년대 파리에 와 있던 것이었다. 현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는 황홀경에 빠져 이 시간을 즐기고 매일 자정에 어김없이 클래식 푸조를 타고 1920년대 파리를 누빈다.

 

가는 곳마다 역시나 전설적인 명사들이 즐비하다. 피카소, 찰스톤, 벨 몬테, 달리, 부뉴엘, 레이, 앨리엇, 거트루드 스타인 등. 이 밖에도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명사들이 나온다. , 1920년대 파리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나오는 거의 모든 이들이 명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는 말이 되지 않는 설정이지만, 이미 말이 되지 않는 설정 위에서의 설정이므로 웃으면서 흥미롭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영화의 큰 흥미거리 중 하나가 이 전설적인 명사들의 면면인 것이다.

 

그러던 중 길은 아드리아나(마리옹 꼬띠아르 역)을 알게 된다. 당시 그녀는 피카소와 염문을 뿌렸지만, 곧 헤어진 뒤 헤밍웨이와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고 돌아온다.(이는 영화적 설정이 많이 가미된 부분이다. 실존 인물이고 헤밍웨이와 관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시기가 맞지 않고 피카소와의 관계는 없었다.) 길은 아드리아나와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타이밍에 그들은 1890년대로 가는 마차에 오른다.

 

1890년대로 가자 더욱 더 어마어마한 사람들을 보게 된다. 로트렉, 고갱, 드가... 아드리아나는 이 시대를 황금시대라 칭하며 1920년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을 선언한다. 자신이 사는 1920년대는 너무 지루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길은 1920년대야말로 완벽한 황금시대인걸? 그때 불현 듯 깨달음을 얻게 된 길. 그는 아드리아나와의 사랑이 지속될 수 없음을 직감한다. 그러며 미래에서부터 왔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그녀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을 봐요. 이 사람들의 황금기는 르네상스에요. 이들은 황금시기를 버리고 미켈란젤로와 같이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해요. 또 그때 사람들은 쿠빌라이 칸 시기를 동경할걸요?... 아드리아나, 당신이 여기 살면 여기가 현실이 되는 거요. 그럼 당신은 또 다른 세계를 동경하게 돼요. 진짜 황금시기를요... 현실은 그런 거예요. 항상 불만족스럽죠. 인생은 그런 거니까요... 저도 당신처럼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어요. 황금시기로... 하지만 이건 진짜가 아니에요. 내가 진정한 글을 쓰고 싶다면 내 환상을 없애야 해요. 과거가 더 좋았다는 환상을.”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한장면. ⓒ소니픽쳐스



이 영화가 더욱 환상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음악가이면서 음악애호가이기도 한 우디 앨런 감독의 음악적 취향이 듬뿍 담겨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파리를 가본 적도 없거니와 그 실체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영화를 보면, 자연스레 파리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품게 될 것이다. 극단의 과거 지향적 성향에 대해서는 결국은 비판의 형식을 취하고 말지만, 파리에 대해서는 끝까지 우호적인 감정을 유지한다.

 

이 영화를 즐기는 방법은 상당히 많다. 우디 앨런 감독에 대해 알고 있는 분이라면 그의 색다른 취향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음악과 함께 등장하는 파리의 기막힌 전경을 감상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다. 또한 위에서도 주지했듯 수없이 등장하는 전설적인 명사들을 보는 재미가 무엇보다도 쏠쏠하다. 마지막으로 현실에서의 도피와 과거에 대한 동경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는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는 영화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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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전쟁의 슬픔>


<전쟁의 슬픔> ⓒ아시아

전후 세대에게 전쟁은 고통, 슬픔, 분노, 아픔 등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아마도 전쟁마저도 상품으로 팔아 먹으려는 자본주의의 첨병들 때문이다. 그들은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듯, 전쟁을 게임, 영화, 드라마, 소설 등의 각종 콘텐츠부터 레크레이션이나 일일 체험으로까지 발전시켰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여 실제와 거의 흡사한 체험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이로 하여금 전쟁의 진면목을 겪게 할 수는 없다. 이는 오히려 전쟁을 이용하려는 자들에게는 잘된 바, 전장에서의 긴장감은 스릴로, 죽고 죽이는 고통은 쾌감으로, 전쟁의 시작과 끝에서 겪는 아픔과 허무함은 각각 설렘과 영웅적 자부심으로 바뀌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전쟁의 고통, 슬픔, 분노, 아픔 등이 

더욱 될수록 간접 경험을 하는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재미'있게 다가 오게 된다. 


또한 전쟁의 시작에는 정치적 입김이 다분히 작용하는 바, 전쟁을 일으킨 정치 권력자들은 이념 또는 정치의 방향을 선전하는 도구로 전쟁을 이용한다. 자연스레 전쟁 자체에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전쟁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모자라 전쟁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게끔 한다. 그 때문에 무고하게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필자 또한 비교적 어릴 때부터 전쟁에 대한 수많은 콘텐츠들을 접하며, 어느새 전쟁을 '동경'하기까지 했다.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그들이 숭고하고 멋있고 닮고 싶으며 나도 전쟁에 참여해 영웅이 되고 싶기까지 하였다. 특히 남자라면 상당 부분 동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겪은' 전쟁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영화 <지옥의 묵시록>이 '반전(反戰)'이라는 메시지를 남기려고 할 때, 왜 그렇게 화끈한 전투 장면이 계속되지 않는지 불만만 늘어 놓곤 했다. 


알 수 없는 그러나 매우 명백한 슬픔과 공존하다


그렇게 '전쟁광'적인 측면에 매몰되어 가고 있을 때 <전쟁의 슬픔>(아시아)이라는 작품을 접하였다. 전쟁에 당연히 슬픔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고 그런 반전 소설이겠거니 생각하며, 정치적이며 화끈하지 않은 원론적인 이야기를 예상했다. 다만 작가 바오 닌이 실제로 베트남 전쟁에 출전한 경력이 있으며, 자그마치 6년 동안 최전선에서 싸웠다는 사실이 전투 장면들의 실제적인 묘사를 기대하게 했을 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상했던 것과 소설 간의 괴리는 너무나 컸다. 소설 내적(내용)으로, 기대했던 실제적인 묘사는 기대 이상이었고 원론적인 이야기가 아닌 실제적인 이야기로 반전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예상 외로 이 반전으로의 주장을 함에 있어 '사랑'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 지독한 전쟁 뿐만 아니라 지독한 사랑도 이 소설에서의 슬픔에 크게 작용했다. 


한편 소설 외적(기법)으로, 문체에 슬픔이 뚝뚝 묻어 났다. 경험해본 자만이 쓸 수 있는 지독한 슬픔의 글이었다. 또한 그 슬픔을 가장 잘 표현해 내는 구성이었다. 시간과 공간을 어지럽게 오가는 구성은 그 자체로 주인공이 느끼는 슬픔이 독자에게도 느끼게끔 하였다. 책을 읽는 내내 알 수 없는 그러나 매우 명백하게 느낄 수 있는 슬픔과 공존했다. 


"그를 괴롭히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주요한 상념들이 희미해질 만큼 모든 생각이 뒤죽박죽되고, 어떤 맥락도 없이, 모든 감정과 사고가 뒤섞이는 듯했다. 물론 그는 알고 있었다. 끊긴 생각, 두서없는 이야기, 보이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의 한계에 고통스러워하는 영혼을 해방시켜 주는 것들이었다." (본문 중에서)


결국 아무것도 잊을 수 없다


주인공 끼엔은 17살의 어린 나이에 평생을 함께할 여인과 불미스러운 일로 헤어지며 입대한다. 그렇게 전쟁의 시작에서 끝까지 함께 하며 10년을 전쟁터에서 보낸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지독한 운으로 생존한 그는 10년 전 헤어진 연인 프엉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듯, 이미 그녀와의 관계는 파탄이 난 상태였다. 


이번에는 거꾸로 프엉이 끼엔을 떠나게 된다. 이후 끼엔은 그 슬픔과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술로 지탱하며 소설을 씀으로써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순화 시킨다. 그가 쓰는 소설은 그가 겪었던 전쟁의 슬픔, 시대의 슬픔, 사랑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그의 마음은 이미 갈가리 찢겨 봉합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지만, 과거의 그 슬픔들을 다 끄집어 내서 다시금 자신의 마음을 찢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운명이, 시대가, 국가가, 사회가, 그리고 이 전쟁이, 이 사랑이 슬픔의 원인이라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그는 어쩌면 영원히 고통스러울 것이었다. 늘 어둡고, 고통스러운 가운데 악몽과 현실 사이에서 남은 인생을 높고 가파른 절벽 위를 오가듯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10년 전에도, 지금도,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계속 살아가야 할 것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잊을 수 없다. 슬픔과 고통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어 전쟁을 거치고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하나로 커다랗게 뭉쳐진 응어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통을 받아들여야 세상에 태어날 수 있듯이, 또한 삶을 다하는 날까지 고통 때문에 살아야 하며 행복을 추구하고 사랑을 하고 예술을 하고 즐기고 견뎌야 하리라." (본문 중에서)


전쟁의 슬픔에 사랑을 녹여낸 탁월한 선택


이 소설의 미덕은 이렇게 모든 슬픔을 있는 그대로 끄집어냄으로써, 어떠한 과장도 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특히 전쟁에 관해서는 개인이 간직해 왔던, 결코 꺼낼 수 없었던 치욕적인 부분을 내보이고 이는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살기 위해 눈 앞에서 동료가 처참하게 강간을 당하고 결국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숨죽인 채 지켜보는 장면. 그리고 전쟁에서의 승리로 인해 영웅적일 것만 같은 참전 용사들의 추잡하기 그지 없는 모습(술로 삶을 지탱하고, 죽은 자들이 나오는 악몽을 꾸며, 망가진 몸과 마음으로 망가진 인생을 살아가는)까지. 


한편 망가진 인생을 표현함에 있어 망가진(정연하지 못한) 구성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표현 방식이지만, 이런 뒤죽박죽의 느낌은 자칫 작가의 능력을 잘못 파악하게 만들 수 있다. 오롯이 서사를 따라 진행되었다면, 이 슬픔을 더욱더 깊이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랑과 우정, 그리고 전쟁의 슬픔, 전후의 아픔까지 그린 전쟁 대서사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통속적인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를 범했을 지도 모르기에 단언할 수는 없을 듯하다. 


마지막 부분의 반전(反轉)에 이르러서야 절실히 깨닫고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깨닫지만, 전쟁의 슬픔에 사랑의 절절함을 녹여 낸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쟁의 슬픔이 단순히 전쟁에 따른 슬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슬픔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로 슬픔, 고통, 아픔의 3중주를 가뿐히 넘어서는 사랑의 힘이다. 하지만 전쟁의 포화는 사랑마저 휩쓸어 버렸다. 사랑은 전쟁이 잉태한 부정을 이길 수 있었지만, 전쟁 자체를 이길 수 없었다. 


"정의가 승리했고, 인간애가 승리했다. 그러나 악과 죽음과 비인간적인 폭력도 승리했다. 들여다보고 성찰해보면 사실이 그렇다. 손실된 것, 잃은 것은 보상할 수 있고, 상처는 아물고, 고통은 누그러든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슬픔은 나날이 깊어지고, 절대로 나아지지 않는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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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보는 관점은 각기 다르다. 과거는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과거와 현재는 연결되어 있어 과거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관점이 정답이라고 말할 순 없다.


이번에 다뤄볼 주제가 독일의 과거와 현재인데, 보는 시각에 따라 의견이 편애하게 갈라질 것이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친 사건들에 대해서 말이다. 필자가 어느 한편에 서서 의견을 피력하는 건 어리석은 생각인거 같고, 더구나 확고한 지식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일의 과거가 현재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그중에서도 분단과 통일과정에 관련해 한국이 가야할 길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한다.


20세기 세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세계 제1차, 2차 대전. 그 주범인 독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고 덮으려 해도 덮어지지 않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과오이자 상처이다. 그로인해 오래전부터 독일 내부에서는 치열한 논쟁이 오고 갔다고 한다. 그들의 조국이 과거에 저질렀던 일의 현재에서의 영향에 대해서 말이다.


이는 어느 한쪽이 옳다고 또는 그르다고 할 수 없다. 또 다른 중요 사건인 분단과 통일.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감동적인 평화적 통일.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고 한다. 어찌 보면 이 모든 사건에 우리나라 또한 영향을 받았고 앞으로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주의 깊게 들여다봐야하고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독일의 과거와 현재


독일의 과거를 들여다보면, 역사적으로 많은 국가가 세워지고 무너졌다. 이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면인데, 지형적 특징이 다르기도 하고 지금도 그렇지만 유럽에는 무수한 인종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통일된 왕국을 건설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특히 독일은 국가가 통일되기까지의 기간이 매우 길었다. 불과 200여 년 전 19세기에 이르러 통일을 이루었고 독일제국을 세웠다. 이때부터 독일의 비극 아닌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그전까지 독일은 통일을 이루지 못해, 유럽에서도 후진국이자 2류 국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통일 후의 급격한 발전과 군사력 증가로 인해 강대국 반열에 들어서고 전쟁을 시작하는데, 이후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약 100년간 유럽은 황폐해져 간 것이었다.


지금의 독일은 유럽은 물론,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선진국이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파워만큼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들의 과거 때문이지 아닌가 싶다.


이것이 독일의 과거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전쟁 주범이면서도 일본이 느끼고 있는 '피해자 의식' 과는 다른 '가해자 의식' 말이다. 독일은 전쟁의 전범이라는 사실을 덮으려 하지 않고 그 사실을 인식하고 그 죗값을 치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예로, 2차 대전 이후에도 무수히 많은 전쟁이 치러졌었는데 독일은 의도적으로라도 참여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외국인이(특히 가난한 외국인) 자국에 들어와서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적극장려하고 있다.(물론 100%를 만족시키는 정책이란 있을 수 없다.)


전쟁에 관한 영향이 독일과 타국가간에 관한 것이었다면 독일의 분단과 통일은 독일 내부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미국과 소련에 의해 양분되었기 때문에 내부가 아니라 외부와도 관련이 있다.)


전쟁에 패하고 난 후 독일은 공산주의 진형인 동독과 자본주의 진형인 서독으로 나뉘어졌다.(원인과 과정은 다르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양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약 50년 동안 나뉘어져 있던 독일은 1990년에 마침내 '평화적 통일'을 이룩한다. 하지만 문제는 통일 이후에 발생한다.



▲ 독일 통일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 독일 통일 전 서 베를린과 동 베를린의 경계선을 이루었다. ⓒ 연합뉴스



오랫동안 거의 모든 면에서 다른 생활을 하였고 국가적으로 판이하게 대립되는 체제와 확연히 차이가 나는 국력 등으로 인해 수많은 마찰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동독과 서독 나름대로 이득보다는 손해를 훨씬 많이 본 것이다.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동서독 사람들 사이의 대립, 사실상의 서독에 의한 흡수통일에서 오는 동독 쪽의 상실감과 실망감, 그런 동독으로 인해 짊어질 것이 많아진 서독 쪽의 불만 등.

'오씨(Ossis)와 베씨(Wessis)'로 대표되는 서독 지역 사람들과 동독 지역 사람들 간의 대립. 서독사람들은 동독사람들을 오씨(게으른 동독인들)라고 놀리고 이에 동독사람들은 서독사람들에게 베씨(거만한 서독인들)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독일의 통일은 독일 사람들에게 실로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독일의 통일 이후와 우리나라


여기에는 포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중립을 지키는 것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닌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이는 우리나라에도 적용된다. 현재의 우리나라는 분단 이후 극우주의와 반공사상으로 인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기는커녕 적이라고 생각한다. 북한 정권을 향한 '주적' 개념은 여전히 존재하고, 북한에서는 미사일과 핵실험이 여전히 빈번하다.


이런 식으로는 '절대로' 통일을 이룩할 수 없다. 평화적 통일을 했다는 독일에도 저렇게 많은 갈등이 남아있는데 말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의 반공사상을 갖고 있다. 필자도 어릴 때부터 군대에서까지 '우리의 적은 북한'이라는 식의 교육을 받아왔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다. 적과 어떻게 평화적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가.


비록 통일 이후의 독일에 많은 문제가 있지만 분명히 배울 점이 있을 것이다. 통일에 관해 그들 자신이 직접 관여를 해서 적극적으로 대화를 하려고 노력했으며(우리나라의 경우 한반도 통일이 우리들의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외세에 휘둘리고 있다.) 상대에 대해 열린 생각을 갖고 있었다.



▲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남북한 경비병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 아시아뉴스통신



우리나라의 경우, 겉으로는 한민족이니 형제니 하고 말하고 있지만 여지없는 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건 북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안들은 남한에서 주도적으로 생각하여할 것이다.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것들. 그건 단지 그들의 사상이고 성향일 뿐이라는 생각이 주도를 이루어야 한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가. 시대착오적인 생각들을 타파하는 것이 한반도 통일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우리가 가야 할 길


독일이라는 나라. 그들의 역사적인 행적들. 그리고 현재의 독일. 그들의 과거가 결코 지워지지 않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에 목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게 하지 않게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독일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들 내부에서 과거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으며 계속적으로 의견들을 절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우리나라는 통일조차 되지 않은 지금까지도 의견조차 내지 못하게 입을 막아버리는 행동을 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리나라는 점차 다른 길로 가는 것 같다. 무력에 인한 통일은 파멸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 오직 평화적 통일이 있을 뿐인데 아직까지도 편 가르기 식의 논리가 팽배하다. 지난 5년의 정부 움직임을 보면 그런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하게 된다. '파멸의 길'을 말이다.


독일에서는 최초의 여성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이 '실용주의'를 앞세워 조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있다. 우리나라도 케케묵은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벗어나서 실용주의 노선을 타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좀 더 열린 생각을 갖고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겠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미래가 조금 더 밝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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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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