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표 소설 읽기] 한강의 <회복하는 인간>


<회복하는 인간> 표지 ⓒ아시아



한 자매가 있다. 그들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언니는 화려한 외모에, 건실하고 잘생긴 형부와 결혼해 누구라도 부러워할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반면 동생은 평범한 외모에, 고지식하고 고집이 세고, 신통찮은 전공을 택해 불안정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동생이 언니를 질투하고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언니가 동생을 질투하고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자매 사이는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지고 죽을 때까지 좁혀지지 않는다. 조만간 언니에게 죽음이 찾아온 것이다. 동생은 그렇게 언니를 보내고 고통 속에 살아간다. 아니, 일부러 고통 속으로 걸어들어가 나오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 마치 그것이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자 방식이라는 듯이. 


'고통'과 '아픔'이라는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소설가 한강의 <회복하는 인간>은, 역시 고통과 아픔이 소설을 관통한다. 주인공인 동생은 아프고 고통스럽고 동생의 언니도 아팠고 고통스러웠으며 그들의 가족 또한 그랬다.


초월적 아픔과 고통 앞에선, 그 어떤 아픔과 고통도 없다


동생이 현재 아픈 이유는 화상에 의한 괴사 때문이다. 괴사로 구멍이 난 그곳은 복숭아뼈 아래쪽인데, 닷새 전 왼쪽 발목을 접지른 후 찾아간 한의원에서 처방해준 직접구 때문이었다. 살갗이 탈 때까지 불붙은 쑥덩이를 얹어 두는 뜸인 직접구로 동생의 아픔과 고통이 시작된다. 


그렇지만 실제적 아픔과 고통은 따로 있다. 다름 아닌 언니라는 존재,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지만 언젠가부터 다시는 가까워질 수 없었던 존재, 동생에게만 불치병의 사실을 알리곤 동생과는 멀어진 채 고통과 아픔 속에서 속절없이 떠난 존재 때문이었다. 그 존재 때문에 동생은 아파도 아픈 게 아니었고, 고통도 고통이 아니었다. 그 모든 걸 '이따위'로 치부해야 했다. 


그런 때가 있다. 초월적 아픔과 고통 앞에선, 그 어떤 아픔과 고통도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말이다. 그럴 때면 초월적 아픔과 고통이 아닌 '일반적' 아픔과 고통에서 오히려 위로를 받곤 한다. 거기에서 위안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오로지 그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건 강해지는 것일까, 약해지는 것일까. 초월적 아픔과 고통에서 회복된다고 봐야 할까, 일반적 아픔과 고통이 가중된다고 봐야 할까. <회복하는 인간>은 그 무엇도 아니라고, 그러며 모두 맞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건 아픔과 고통 그 자체로 수렴된다. 


아픔과 고통을 짊어지고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이다


소설은 아픔과 고통으로 시작해 또 다른 아픔과 고통으로 끝난다. 초월적 아픔과 고통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다른 아픔과 고통으로 버텨내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며 조금씩 회복되어 가는 기미가 보인다. 아주 조금씩. 그러나 또 다른 아픔과 고통이 시작된다. 이제는 거기서 벗어나기가 싫어진다. 더 이상 생을 살아가기 싫다는 암시일까?


하지만 초월적 아픔과 고통에도 생을 마감하지 않은 걸 보면, 그런 암시로 보이진 않는다. 결국 계속 버티고 살아갈 거라 생각된다. 다만, 온갖 아픔과 고통을 짊어지고서. <회복하는 인간>은 그것만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회복은 원래의 상태로 돌이키거나 원래의 상태를 되찾는 것이 아니라, 현 상태를 유지하는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치유는 병을 낫게 하는 게 아니라, 병을 짊어진 채 버티며 살아가는 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한강 작가의 글쓰기와 일맥상통한다. 짧은 소설이기에 집대성했다고 보는 건 힘들지만, 한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줬다고 하겠다. 이야기를 읽는 재미를 추구하는 분들에게는 지루하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끼기까지 할 수 있겠지만, 보다 고민과 통찰을 원하는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소설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소설에는, <회복하는 인간>에는 '인간'이 보인다. 



아시아 출판사가 후원하는 '한국 대표 소설 읽기'의 일환입니다.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과 함께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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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반 일리치의 죽음> 표지 ⓒ창비


죽음은커녕 삶도 제대로 알지 못할 나이에 죽음을 걱정했던 것 같다. 자그마치 초등학교 5학년 12살 때였다. 아마 어느 정도의 삶을, 되풀이 되는 삶의 연속을 경험해본 나이였을 테니까, 이 삶의 끝을 상상해봤을 것이다. 한 때 매일 밤 눈만 감으면 생각했다. 아니,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 생각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는 머리에 든 게 많지 않고 생각도 짧으니 죽음에 대한 한 면만, 그리고 한 가지만 물고 늘어졌다. 죽음은 두렵고 무섭고 나쁘고 아프고 피하고 싶은 것, 부정(不淨) 그 자체였다. 그 끝이 어떻게 될까, 끊임없이 반복해서 생각하게 되니 미처버릴 것만 같았다. 도무지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데 자꾸 생각하게 되니 마냥 무서웠다. 그렇게 겁쟁이가 되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쓸 데 없는' 생각들이 나에게 가져다준 건 아무것도 없다시피 하다. 제대로 형성된 게 없는 그 시기에 그런 생각을 아무 이유 없이 했다니, 그때 즈음 겪은 외할머니와 증조할머니의 죽음이 나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하게 하였을까? 이후 무수히 많은 콘텐츠를 통해서, 실제로도 죽음을 많이 접했다. 설마 오래 전에 죽음에 대한 생각을 모두 끝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큰 감흥이 일지 않았다. 이 짧은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다. 


누군가의 죽음, 내가 아니라 다행이다


레프 톨스토이는 41세 때 <전쟁과 평화>로 대성공을 이루고 난 후 죽음에 대해 늘 생각하며 지냈다고 한다. 당시 평균 수명이 40세 전후였다는 것도 이에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의 나이 58세 때 죽음을 형상화한 대표적 작품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탄생했다. 소설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그의 죽음은 지인들에게 어떻게 비춰졌을까. 


"동료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이들의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로 인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자리 이동과 보직 변경 등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아주 가까운 사람의 사망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누구나 그러듯이 그들도 죽은 게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 (본문 10p 중에서)


그야말로 영원히 곁을 떠난 이에 대해 어떠한 안타까움이나 그리움도 묻어나지 않는 굉장히 현실적인 생각이다. 누군들 다를까? '으레' 그렇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가히 그 통찰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한편으로 끔찍하기 그지없다. 


소설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반 일리치의 간단한 이력과 성격, 살아온 날들을 되짚는다. 그의 삶은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극도로 끔찍했다. 그는 가벼운 재밋거리를 즐기는 성품이었음에도, 자신의 일을 할 때만큼은 극도로 조심스러웠고 관료적이었으며 심지어 냉혹하기조차 했던 것이다. '삶이란 반드시 쉽고, 기분 좋고, 고상하게 흘러가야만 한다.'는 자신의 소신대로 그렇게 평탄하게 흘러갔다. 


끔찍한 두려움과 고통, 그보다 더 힘든 건 '거짓'


소설의 배경이 되는 제정 러시아 시대는 관료가 그야말로 최고의 위치와 지위를 점했다. 이반 일리치의 아버지인 삼등문관 일리야 예피모비치 골로빈이 별 쓸모없이 세워진 관청들을 이곳저것 옮겨 다니며 하는 일 없이 한 자리 차지해 평생을 편안하게 보냈다는 게 당시 관료의 전형적인 예다. 이반 일리치는 그런 인물로 나오진 않지만, 어떻게든 높은 자리로 올라가 많은 봉급과 함께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행세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불고 있는 공무원 열풍과 다를 바 없다. 


그는 어느 때 큰 위기를 겪은 후 회생해 좋은 곳으로 발령나 이사를 간다. 가족들보다 먼저 도착해 집을 꾸미는 와중에 옆구리를 다치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이 짧은 소설에서 그의 죽음 과정이 차지하는 바가 상당한데, 그 피말리는 묘사가 주는 기괴함은 말할 것 없이 엄청나다. 죽음에 대한 태초적인 두려움, 생전 처음 겪어보는 끔찍한 육체적 고통과 함께 오만 가지 생각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다. 감정이입해 보게 되어 비슷한 고통이 엄습하는 것 같다. 


그가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바로 '거짓'이었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이 고통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당연히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닌다. 그건 일리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는 이유이겠지만, 사실은 그들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는 수작에 다름아니었다. 그렇지만 정작 그는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는 '고상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고상한 사람은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하인 게라심만은 그에게 서슴없이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그의 처지를 이해하고 진심으로 그를 가엾게 여겼다. 일리치는 게라심과 함께 있을 때만 마음이 편안했다. 그건 거짓과 함께 그를 견디기 힘들 게 한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말했지만 진정 마음 아파하지 않았다. 말도 거짓이었고 마음도 거짓이었다. 고통과 죽음보다 견디기 힘든 것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반 일리치는 특별한 인물인가? 소설에나 나옴직한,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유형의 캐릭터이자 삶을 살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평범한 인물이다. 지위와 재력의 높낮이는 있겠지만,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다치게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평범한 사람의 죽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묘사를 보고 있노라니, 죽음에 대한 생각이 다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기 보다, 죽음으로 가는 과정에의 고통과 죽음 이후에 벌어질 사람들의 가식이 두렵게 다가온다. 그 무엇보다 일리치를 고통스럽게 한 사람들의 거짓과 가식이 나에게도 올까봐 두려운 것이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삶에게, 다름 아닌 나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죽음을 이야기하고 죽음을 그리는 건 역설적으로 그만큼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얘기다. 사람들의 거짓과 가식은 결국 삶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삶이 있고 죽음이 있는 것이지 죽음이 있고 삶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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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젖은 모래 위의 두 발>



<젖은 모래 위의 두 발> 표지 ⓒ열린책들



책을 읽는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나와 다른 삶을 구경하고 싶은 욕망에서 기인한다. 나보다 못한 삶 또는 나보다 나은 삶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이다. 아무래도 나보다 나은 삶보다는 못한 삶을 들여다보는 게 편할 것이다. 그래서 나은 삶은 거의 자기계발 영역으로 빠졌다. 반면 못한 삶은 소설이나 에세이, 자기계발에서 예전 삶으로 다방면으로 가능하다. 


<젖은 모래 위의 두 발>은 자전적 에세이이다. 그것도 치명적인 비극과 불행을 그리고 있다. 못한 삶의 정도가 한계를 넘어선 듯 보인다. 그럼에도 끝까지 책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저자의 필력뿐 아니라 치명적인 비극과 불행에 의한 압도적인 슬픔보다 그보다 더한 사랑과 용기 덕분이다. 이제까지 봐왔던 최루성 콘텐츠와는 결을 달리한다. 


서서히 죽어가는 두 아이와 함께 하게 될 가족


엄마 쥘리앙과 아빠 로이크는 영영 빼도 박도 못할, 일상에 아로새겨질 시련에 맞닥뜨린다. 그들의 두 살 된 여자 아이 타이스가 돌이킬 수 없는 병에 걸렸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염성 백질 이영양증'. 심각한 유전병으로, 오래 살지 못하는 퇴행성 질환이다. 서서히 움직이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하고, 눈이 멀고, 결국에는 생명 기능까지 정지해 버리고 만다. 그리고 환아의 동생이 태어날 경우 네 명 중 한 명 꼴의 발병 위험성이 있다. 엄마와 아빠의 나쁜 유전자들이 만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생기발랄하고 부산스럽고 자기 주도적이고 고집도 센 아이 타이스는 서서히 죽어간다. 죽어가는 타이스를 보며 쥘리앙과 로이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의학의 힘을 빌리고 24시간 곁에서 지켜보며 고통을 줄여줄 수 있는 조치를 취하는 것밖에. 이토록 치명적인 병은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다. 


그들에게는 여러 길이 있다. 형용할 수 없는 슬픔에 압도되어 타이스의 남은 생을 눈물 바다로 보낼 것인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고통에 몸부림치는 타이스를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슬픔과 고통과 불 보듯 뻔한 비극과 불행을 딛고 타이스의 예견된 삶을 행복과 사랑으로 채워줄 것인지. 마지막의 삶이 그들이 가야 할 길이라는 건 명백하다. 하지만 그 삶은 너무나 어렵고 가기 힘든 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길을 택한다. 무엇보다 타이스를 위해...


"네가 이제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움직일 수도 없게 된대. 엄마 아빠는 어떡하지. 그래도 우리 딸, 엄마 아빠는 너를 언제까지나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 네가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뭐라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우리 예쁜 아기, 엄마가 약속할게. 너는 아주 예쁘게 살다 갈 거야. 다른 아이들이나 가스파르 오빠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네가 뿌듯해 할 만한 삶일 거야. 그 삶에 사랑만큼은 모자라지 않을 거야." (본문 중에서)


그들은 처참하고 지옥 같다, 그런데 행복하다고 한다


쥘리앙과 로이크는 셋째 아이를 낳는다. 언니와 같은 병에 걸릴 확률이 25%에 달하는 아이. 25%의 확률은 100%가 되어 그들의 심장을 겨냥했다. 셋째 아이 아질리스도 이염성 백질 이영양증이란다. 소름이 끼치고 억장이 무너지고 눈물이 비 오듯 내린다. 심장이 너덜너덜해진다.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 타이스를 잘 보내고... 아질리스를 잘 살려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이 모순 속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가려니 너무 힘들다. 그들은 도움을 청한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그들을 돕는다. 숨통이 트이고 눈물이 흐른다. 기쁨의 눈물인가, 안도의 눈물인가, 체념의 눈물인가. 


그들의 이야기는 처참하다. 그들의 삶을 보고 있으면 매일매일 순간 순간이 지옥처럼 느껴진다. 내 삶은 반대로 화창하게 느껴져야 하는데, 그들의 처참한 삶에 압도되어 감히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그들은 행복하다고 말하고 그 어느 때보다 그 누구보다 사랑으로 충만하다고 말한다. 아무리 그런 길을 걷기로 결연하게 맹세했기로서니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가능한가? 


다름 아닌 죽어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타이스 덕분이다. 타이스는 모든 것을 빼앗겼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노래하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그러나 아이는 사랑한다. 그저 사랑밖에 할 수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타이스한테 '사랑'은 남을 것이다. 타이스가 준 사랑, 타이스에게 준 사랑. 


비극과 고통의 극단에서 행복과 사랑의 극단을 끄집어내다


흔히 비극과 고통을 억지로 이겨내려는 사랑을 보고 '오그라든다'는 말을 쓴다. 그럴 때 고통의 눈물과 사랑의 환희는 멀리 날아가 버리고 남는 건 아무것도 없게 된다. 잘못된 선택이자 방법이다. 반면 이 이야기는 어떤가. 비극과 고통의 극단에서 행복과 사랑의 극단을 끄집어냈다. 극단으로 치닫는 건 좋지 못하고 극단과 극단은 서로 통한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에서는 전자는 틀리고 후자는 맞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극단에는 극단만이 대항할 수 있는 것이다. 


"귀여운 우리 딸, 엄마가 애원하잖니, 조금만 더 싸워 줘. 제발 버텨 줘. 네가 없으면 엄마는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나의 태양이고, 나의 세상이고, 나의 마음, 나의 힘, 나의 급소란다. 네가 나의 반석이고, 나의 심연이야. 사랑한다, 내 딸아. 지금 가면 안 돼. 오늘은 여기 있어 줘.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본문 중에서)


이 짧은 소개로는 그들의 고통을 1%도 전해줄 수 없다.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접한다고 해서 그들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고 전해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 또한 각자의 아픔이 있을 뿐이다. 온전히 그 아픔을 서로 나눌 수 없다. 


그런데 신기한 게 '사랑'은 그렇지 않다. 사랑 만은 이 짧은 소개로도 충분히 전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접하면 그들의 사랑을 더욱 이해하고 전해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 또한 사랑을 힘껏 공유하고 있다. 온전히 사랑을 서로 나눌 수 있고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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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가짜 우울>


<가짜 우울> ⓒ마음산책

10년 전 쯤, '우울증'이라는 용어를 처음 들어 보았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없이 활발한 편이었던 지인이 어느 날 말하기를, "사실 나 우울증에 걸렸다."라고 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거 자살까지 하게 만드는 심각한 '병'이 아니냐고, 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겠냐고 말을 건넸더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였다. 알고보니 자가진단으로 우울증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 당시는 우울증이 시대의 화두였다. 많은 사람들이 힘들고 외롭고 슬픈 감정을 우울증이라고 생각하며, 마치 자랑거리인 양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녔다. 그 지인의 우울증 이유는 '힘듦'이라고 했다.


3년여가 지나, 나에게도 '우울증'이 찾아왔다. 당시 1년여 동안 외국생활을 했는데, 너무 외롭고 고독했다. 그 감정들을 추수리기가 너무 힘들었고, 결국 스스로 우울증이라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며 누군가가 나를 위로해 주기를 바랐다. 당시 나의 우울증 이유는 '외로움'이었다.


얼마 전, 또 다른 지인이 '우울증'이라고 하며 위로받길 원하는 듯한 느낌을 풍겨왔다. 하는 일이 잘 안되고, 계속 자신을 탓하다 보니 너무 우울해졌다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니 너무 슬프다고 하며. 심리 치료도 몇 번 받아보았다고 했다. 그 지인의 우울증 이유는 '슬픔'이었다. 살면서 우울증에 안 걸려본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하는 사연들이다.


우울증은 병이 아니다?


전 세계적인 경제 불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지금.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상당히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스타들의 과거 고백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가 '우울증'이고, '우울증'으로 자살을 했다는 소식도 끊이지 않는다. 우울증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길래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되었을까?


미국의 심리치료사이자 창의력 전문가인 에릭 메이젤 박사는 그의 저서 <가짜 우울>(마음산책)을 통해 "우울증은 병이나 정신장애가 아니며, 단지 깊은 슬픔에 잘못 붙여진 꼬리표일 뿐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며 "슬픔은 현실이고 또한 고통스럽지만...그런 것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들어서 '우울증 증상'을 완화하려고... 화학물질을 택하는 것이 슬픔에 대한 해답이 될 수는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책에서는 그에 대한 진정한 해답을 찾기 위한 실존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무슨 근거로 우울증은 병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너가 겪고 있는 슬픔이나 아픔은 누구나 겪는 거니까, 그냥 기운내고 열심히 살아'하고 시크하게 한 마디 던지고 싶은 것인가. 저자의 말을 한번 들어볼 필요가 있겠다.


"사실상 우울증이라는 단어는 우리 내면의 어휘 체계에서 불행을 실질적으로 대신하고 있다. 우리는 슬픔을 느끼면서도 우울증에 걸렸다고 말한다.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언어를 교체한 뒤 도움을 구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우울증 전문가를 찾는다. 알약에, 치료사에게, 사회복지사에게, 목회 상담가에게 의지한다. 설령 우울한 이유가 각종 청구서 대금을 내는 일이 힘에 부치거나, 하는 일이 제대로 안 풀리거나, 인간관계가 위기에 처해서일지라도" -1장에서


위에서 소개한 사연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힘듦, 외로움, 슬픔 등의 감정을 '우울증'이라는 단어로 대체하고 있다는 사실. '우울증'이라고 명명된 그 알 수 없는 증세는 점점 '병'이자 '장애'가 된다. 그렇게 우울증에 관한 전문가를 찾아 도움을 청한다. 저자는 그 접점에대중매체, 제약회사, 상담사, 심지어 문화업계까지 얽혀서 "모든 종류의 불행이, 이따금씩 나타나는 것이든 만성적인 것이든 모조리 정신건강 산업의 먹잇감이 되었고 장애로 둔갑하고 말았다"고 말하고 있다. 즉, 우울증은 만들어진 정신장애이자 문화적 최면일 뿐이라는 것이다.


불행은 인간의 정상적인 특징이다. 그 실체를 알고 이겨내자.


저자는 우울증이라는 하는 병이나 장애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삶에서 지워버리라고 주문하고 있다. 그러며 삶에서 수반되는 불행이나 고통은 지극히 정상적인 특징이며 그것이 장애가 될 순 없다고 말하고 있다.


"고통과 어려움이 아무리 극심하고 오래 지속된다 해도 '정신장애'나 '정신질환'의 증거가 될 순 없다. 극심한 치통은 신경치료를 받으라는 정확한 신호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극심한 슬픔은 그 어떤 아픔 못지않게 견디기 힘든 정신적 고통이라 해도 정신질환이나 정신장애의 징후는 아니다." -프롤로그에서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아무리 고통과 어려움, 슬픔과 외로움 등의 불행이 정상적인 감정이고 피할 수 없다 해도, 그것이 결코 좋을리는 없다. 그래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모든 감정의 실체를 알고 있지만서도, 기분 좋은 감정은 '정상적인 감정', 기분 나쁜 감정은 '비정상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일쑤이다. 하지만 저자는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모두 '정상적인 감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결코 피할 수 없는 그 존재를 인정하고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방법이 무엇일까?


저자는 '일상 의미화 전략'이라는 실존 프로그램 20단계를 제시한다. 자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1단계에서 부터 부여, 집중, 소통, 대처 등의 단계를 지나 실존적으로, 인지적으로, 행동적으로 자신을 돌봐야 한다는 마지막 단계까지.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삶에 주어진 불행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현실을 직시하고, 의미를 파악한다.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고 의미를 부여한다. 자긍심을 갖고 의미를 만들고, 욕구와 필요 그리고 가치를 고려해 선택한다. 삶의 목적이 담긴 문장을 만들고, 의미를 평가하는 지혜를 발휘한다. 의미에 집중하고, 문화적 최면에 저항한다. 다시 현실을 살피고, 의미와 소통한다. 의도를 지닌 문장을 외우고, 의미에 대해 훈련한다. 의미를 어디에 투자할지 협상하고, 의미를 구체화 시킨다. 의미가 길을 잃을 때 이에 대처하고, 자신을 돌본다.


다시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의미'를 만들라는 말이 되겠다. 불행을 없애는 건 불가능 하겠지만, 불행조차 삶의 일부분으로 포용할 수 있다면 성공적인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를 진정한 삶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불행조차 삶의 일부분으로 포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스스로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알고, 생각과 행동이 중요한 것에 맞춰져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진정한 삶'을 목적으로 삼아, '삶에서의 중요한 무엇'을 향해, '생각과 행동'을 지니고 가는 것이다.


우울증이라는 말은 언어의 부패다. 우리 사회가 우울증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그 말은 우리 모두를 점점 더 불행으로 몰아갈 것이다. 불행의 병리화는 불행을 만들어낸다. 우울증이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고, 그 대신 의미를 만들어라. -에필로그에서


'힐링'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무엇을 치유하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치유하고 있는 것일까? 이 책 <가짜우울>은 힐링의 방법론을 소개하고 있다. 여느 힐링 관련 책들 같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 힐링이 된다고 할 수는 없다. 대신 책을 읽다보면 '나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어떤 희망이 생길 것이다. 먼저 시작해보자. 우울증이라는 말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자신의 존재를 들여다보자. 인생의 의미를 만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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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3박 4일동안 일본 도쿄 여행 중입니다. 그동안은 제대로 된 방문, 댓글, 추천, 작성 등이 불가능할 것 같네요. 대신 이렇게 편지로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보내는 편지가 아닌 '프란츠 카프카'가 보내는 편지라는 것이, 그것도 이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편지라는 점이 심히 마음에 걸리지만요.) 연인에게, 친구에게, 지인에게 보내는 프란츠 카프카의 편지들을 보면서 그 애뜻함을 함께 느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프란츠 카프카라는 사람이 워낙에 내면 세계가 심오하고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기도 하고, 내면으로 침참해 들어가는 성향이 강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유명한 작품보다도 일기나 편지, 산문, 에세이 등에서 그의 진면목을 잘 알 수 있다고 하네요. 읽으시는 김에 이왕이면 '프란츠 카프카'라는 사람의 진면목을 조금이나마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여행 잘 마치고 돌아오겠습니다. 


프란츠 카프카는 평생 동안 극심한 내면 고통으로 힘들어 했습니다. 다음의 짧은 편지들에도 그런 상태가 절절히 나타나 있는데요.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져 옵니다. 그는 왜 그렇게 힘들어 했을까요. 20세기 초의 찬란한 유럽의 한복판에서 그는 왜 그렇게 아파했을까요. 

(참고로 저는 여행에서 아주 재미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답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묘지와 동상.

막스 브로트 앞 

[그림 엽서(레호보트 식민지). 

빈, 우편 소인 : 1913년 9월 9일]


친애하는 막스, 무자비한 불면증, 감히 손을 이마에 대지 못하겠어, 그랬다간 열 때문에 놀랄 테니까. 도처에서, 문학 그리고 회의에서 도망치고 있어, 드디어 가장 흥미롭게 되어가는데 말이야. 

프란츠



펠릭스 벨취 앞

[그림 엽서. 빈, 우편소인 : 1913년 9월 10일]


즐거움은 별로, 많은 의무, 더욱 많은 권태, 더욱 많은 불면증, 더욱 많은 두통 - 이렇게 살아가오. 그러다 바로 지금 10분 동안 조용히 빗속을 바라보고 있어요, 호텔 마당에 내리는 비를

프란츠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솔)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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