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하면 슬며시 웃음이 나오지만, 당시에는 참으로 심각했다. 여자친구도 지금은 웃으며 그때의 본심을 이야기 하지만, 당시에는 절대 웃을 수 없었다. 그건 명백히 여자친구의 나에 대한 시험이었다. 며칠 밤을 새도 풀리지 않을 시험. 하지만 그 시험은 나의 사랑을 막을 수 없었다. 


아직 우리가 사귀기 전이다. 옥신각신. 일종의 밀당이라고 할까. 우리 사이는 겉으로는 태평해 보였지만, 안에서는 태풍이 불고 있었다. 태풍의 눈에 들어와 있다고 해야 할까. 그녀는 아마도 나의 사랑을 믿지 못하였나 보다. 그땐 내가 한없이 약했으니까. 역시 약한 지금보다도 훨씬 더. 


그녀는 처음에 장난 비슷하게 시작했다. 가끔씩 자기가 여자가 아닌 남자라면 그래도 자기를 사랑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당시 나는 진지하기 그지 없었으니까. 그 반응이 재미 있었는지, 아니면 그 반응에 실망했는지 점점 장난이 아닌 것 처럼 물어보는 거였다. 


"믿지 못하겠지만, 사실 저 남자예요. 어쩌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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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그녀가 장난을 치는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된 후이기 때문에, 나는 그 질문에 혼란이 밀려왔다. 참으로 오랜 고민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도 그녀는 줄기차게 물어 왔다.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셨냐고. 정말로 난감했다. 살면서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앞으로 그런 생각을 할 마음도 없는데 말이다. 결국 난 마음을 다 잡았다. 그녀의 말에 감동을 받았고 큰 도움이 되었다. 


"난 오빠가 뭐든 상관 없어요. 오빠 자체가 중요해요."


그러며 내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 없다는 게 아닌가. 심지어 내가 인간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그녀였다. 그 말에 감동받지 않을 자 누구인가.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도 한동안을 고민한 뒤 나도 그녀에게 같은 말을 했다. 


"너가 여자든 남자든 상관 없어. 너 자체가 나에겐 중요해."


당시에는 그 말에 그녀가 크게 감동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녀에게는 그게 당연한 거였으니까. 그런데 얼마 전에 고백 아닌 고백을 하는 게 아닌가. 그때 그게 사실 일종의 실험이었다는 걸. 물론 오빠 자체가 중요하다는 건 당시와 지금의 변함 없는 진심이지만. 


덕분에 지금 어느 커플보다 공고한 사랑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다. 웃지 못할, 그렇지만 웃음이 나오는 추억인데 중요한 걸 남겨 주었다. 그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의 사랑이 흩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그 자체로 이해하고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으니까. 시간이 흘러도 그녀는 그녀로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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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북녘 10월의 쌀쌀한 날씨, 새벽의 진솔한 대화로 우리는 전에 없이 친해졌다. 소심하기 짝이 없는 나였기에 선뜻 '사귀자'라는 말을 전하진 못했지만, 우리는 성의껏 붙어다녔다. 수업하는 반이 달라서 평일 수업시간에는 같이 할 수 없었지만, 저녁이면 같이 밥을 먹고 주말이면 같이 놀러다니곤 했다. 종종 점심도 같이 먹고. 


점심하니까 생각나는 게 있다. 그녀가 좋아하는 그것. 다름 아닌 '치킨 버거'. 그것도 학교 내 매점에서 파는 허접한(?) 치킨 버거를 그렇게 좋아했다. 점심만 되면 그것만 먹었던 것 같다. 참 특이한 순서로 먹었는데, 버거라면 응당 한 입에 내용물을 가득 넣어 먹어야 하거늘 그녀는 빵 따로 야채 따로 치킨 패티 따로 먹었다. 재료의 오리지널을 느껴야 한대나 뭐래나. 그 지론은 지금도 변함 없다. 


또 하나 좋아하던 점심의 주 메뉴가 있었는데, 다름 아닌 '라면'이었다. 한국 라면이 아닌 중국 라면! 그건 나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무슨 말이냐면, 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너무 너무 너무 저렴하고 맛있었다. 라면 하면 한국, 한국 라면 하면 신라면인줄 알고 살아왔는데 그게 아니었다. 특히 컵라면을 즐겼는데, 6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환상의 맛이다. 우리는 한마음 한뜻으로 중국 라면을 즐겼다.


자, 이런 걸 함께 할 정도로 우린 친해졌다. 전에 없이 친해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봐도 '쟤네 정말 친해 보인다.'라고 느낄 정도로 말이다. 급기야는 사귀는 게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았으니. 그런데 문제는 당사자들이었다. 내가 연장자고 남자인데 먼저 말을 꺼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난 시간이 가도 가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왜? 도대체 왜? '용기'가 없었다. 그 놈의 용기가 터무니 없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공식적으로 사귀지만 않을 뿐 누가 봐도 사귀는 것처럼 보이는 이상한 관계. 우리는 지쳐갔다. 아마 그녀가 훨씬 더 지쳤을 것이다. 이 바보 멍청이. 친해지면 다야? 친해지는 게 목표인거야? 이 먼 타향 땅에서 그저 외로움을 덜고자 친하게 지내는 게 다란 말이야?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지르는 절규 아닌 절규가 들리는 듯했다. 그런데 어쩌랴... 용기 없는 나의 모습을...


어떻게 해야 할까. 전전긍긍. 뭐라고 말해야 할까. 노심초사. 과연 날 받아줄까. 이럴 땐 경거망동할 필요가 있는데. 너무 안타깝다. 그때의 나에게 말하고 싶다. 진짜 사랑한다면 앞뒤 가리지 말고 고백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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