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지랄발광 17세>


입소문 덕분에, 또는 때문에 DVD로 직행할 운명이었던 <지랄발광 17세>가 개봉해 맹위를 떨쳤다. ⓒ소니 픽쳐스



"선생님, 시간을 뺏고 싶진 않은데 저 자살할 거예요."


네이든이 귀중한 점심 시간을 빼앗으면서까지 담임 선생님을 찾아와 다짜고짜 이런 황당무계한 말을 하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담임은 "나도 지금 막 유서를 쓰는 중이었어"라며 네이든을 세차게 나무라는데, 그래도 거기에 사랑이 묻어나 있어 다행이다. 


네이든은 어렸을 때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당연히 학교를 가기 싫어 했는데, 아빠는 다정하기 그지 없게 그녀를 대해주었던 반면 엄마는 마구잡이였다. 그런 그녀에게 천사같은 친구 크리스타가 다가왔는데, 이후 몇 년간 그녀의 말마따나 최고의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찾아오는 아빠의 죽음으로 최악의 나날이 시작된다. 


엄마는 집안의 어른이랍시고 간섭을 일삼지만 사실 가족에겐 관심이 없다. 그저 잘 커준 오빠 데리언에게만 의지할 뿐이다. 데리언은 잘 생기고 키도 크고 공부도 잘 하고 착하게 컸다. 반면 네이든은 자신이 너무 싫어한다. 못 생기고 몸매도 별로고 공부는 꽝이고 성격은 개차반이다. 그래도 그녀에겐 크리스타가 있다. 


하지만 데리언이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연 어느 날 크리스타와 눈이 맞는다. 이보다 더 최악이 있을까. 더해 네이든은 소년원을 다녀온 노는 오빠에게 한눈에 반해 추파를 던지는데 거들떠도 안 본다. 자주 찾아가 상담을 받을라치면 매몰차게 대꾸하는 담임은 어떻고? 정말 살 맛 안 난다. 가장 끔찍한 건 오빠 데리언과는 정반대의 이런 외모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죽어야겠다. 


우리나라에선 찾기 힘든 할리우드 하이틴 영화


우리나라에선 이제 더이상 하이틴 영화를 찾기 힘들다. 반면 할리우드에선 매년 찾아온다. <지랄발광 17세>는 할리우드에서도 찾기 힘든 수작 하이틴 영화다. ⓒ소니 픽쳐스


매년 빠지지 않고 찾아오는 장르 중 하나가 '하이틴'이다. 10대 후반쯤에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어 흥미와 공감을 이끄는 데 목적이 있다 하겠다. 하지만 요근래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예 씨가 말랐고, 할리우드에서는 흥행과 비평에 망조가 낄 것 알면서도 개봉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우리나라엔 수입되기 힘든 것이다. 


와중에 <지랄발광 17세>라는 파격 제목의 하이틴 영화가 찾아왔다. 북미에서는 작년에 개봉했으니 반년 이상의 시간차로 개봉한 것인데, 아마 우여곡절이 많았을 거라 생각한다. 비슷한 시기에 7년 만에 개봉한 <플립>과 영화 외적으로 겹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관객들이 원해서 개봉에 성공하는 케이스가 많아지면 좋겠다, 싶다. 


이 영화는 그럼에도 흔한 하이틴 영화의 서사 방식과 캐릭터 구성을 따른다. 재기발랄하고 톡톡 튀는 주인공, 코미디 요소가 적절한 좌절을 겪고 감동적인 코드가 다분한 성장을 완성한다. 그 사이, 모든 게 해결되기 직전에 상당히 극단적인 선택과 그에 따른 위기가 함께 한다. 누구나 그런 때가 있었지 하며 공감하는 것이다. 


공감의 판타지 


'공감'이 최종 목표일 것이다. 다만, 그 과정이 상당히 판타지적이다. 이 영화는 그 부분들이 예쁘다. ⓒ소니 픽쳐스



네이든의 담임 브루너가 네이든을 좋아하는 어윈의 존재가 눈에 띈다. 네이든이 심심하면 찾아가 시비를 거는듯 노는듯 고민을 상담하는 대상인 담임. 대개 성장에 있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진지한 문답이 오가곤 한다. 하지만 이들의 문답은 선문답 내지 동문서답에 가깝다. 여타 하이틴 영화에 비해 비현실적인 모습에 가까운데, 공감을 목적으로 하지만 결국 판타지에 가까운 하이틴 영화에 맞는 것 같다. 


어윈 또한 네이든의 깨달음과 성장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집도 무지막지하게 좋고 공부도 잘 하는데 친구도 많고 만화도 잘 그리고 영화제에 출품도 할 정도의 실력 있는 감독이기도 한... 그런 어윈이 별 것 없는 네이든을 좋아한다는 사실보다, 그런 어윈도 네이든과 똑같은 고민을 한다는 것. 그 나이에는 고민과 사랑이 전부라는 것. 


네이든의 좌절과 성장과 깨달음은 하나에서 파생된다. 그녀는 말한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였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지랄발광'을 하며 다녔는데, 사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걸 담임과 어윈에게서, 그리고 극단적인 경험을 하고서 깨닫는다. 평범함의 진리가 주는 성장, 평범함이야말로 특별함이 모여 평균을 이룬 집합체라는 깨달음, 모든 이들이 자신만의 고민을 떠앉고 있다는 눈물겨움.


평범함의 진리를 깨닫는 씁쓸함


결국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평범함의 진리. 평균이 가장 보기 좋다는 주장. 틀린 말은 아니나 씁쓸하다. ⓒ소니 픽쳐스



무진장 재미있고 상당한 깨달음과 먹먹한 감동이 함께 한 <지랄발광 17세>, 이 영화가 주는 깨달음과 감동에 동의하지만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다. 그게 우리가 누구나 거쳐야 할 통과의례야 한다는 게 슬프기까지 하다. 사랑받고 싶고, 주목받아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만은 없다는 사실, 나만의 고민과 깨달음이 사실 모두 하고 있고 했었다는 사실 말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와 비로소 세상을 겪게 되었을 때의 환희도 존재하겠지만, 반드시 세상에 편입되어야만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 제대로 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건 너무 슬프지 않은가. 그게 결코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 그거야말로 세상을 구성하고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기본 진리라는 것이 더욱 슬프다. 


어렸을 땐 누구나 자신이 특별한 줄 알았고, 당연히 특별한 사람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특별하기는커녕 평범하기조차 힘들다는 걸 깨달았고, 언제부턴가 평범해지는 게 꿈이 되었다. 대표적인 성장 소설이자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데미안> <호밀밭의 파수꾼>이 모두 평범함으로의 나아감을 모토로 한다. 이 세상에 온 걸 환영한다. 남들을 본받고 남들을 따라하고 남들에게 인정을 받아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금 생각하면 슬며시 웃음이 나오지만, 당시에는 참으로 심각했다. 여자친구도 지금은 웃으며 그때의 본심을 이야기 하지만, 당시에는 절대 웃을 수 없었다. 그건 명백히 여자친구의 나에 대한 시험이었다. 며칠 밤을 새도 풀리지 않을 시험. 하지만 그 시험은 나의 사랑을 막을 수 없었다. 


아직 우리가 사귀기 전이다. 옥신각신. 일종의 밀당이라고 할까. 우리 사이는 겉으로는 태평해 보였지만, 안에서는 태풍이 불고 있었다. 태풍의 눈에 들어와 있다고 해야 할까. 그녀는 아마도 나의 사랑을 믿지 못하였나 보다. 그땐 내가 한없이 약했으니까. 역시 약한 지금보다도 훨씬 더. 


그녀는 처음에 장난 비슷하게 시작했다. 가끔씩 자기가 여자가 아닌 남자라면 그래도 자기를 사랑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당시 나는 진지하기 그지 없었으니까. 그 반응이 재미 있었는지, 아니면 그 반응에 실망했는지 점점 장난이 아닌 것 처럼 물어보는 거였다. 


"믿지 못하겠지만, 사실 저 남자예요. 어쩌실래요?"



anisos.tistory.com



흠...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그녀가 장난을 치는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된 후이기 때문에, 나는 그 질문에 혼란이 밀려왔다. 참으로 오랜 고민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도 그녀는 줄기차게 물어 왔다.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셨냐고. 정말로 난감했다. 살면서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앞으로 그런 생각을 할 마음도 없는데 말이다. 결국 난 마음을 다 잡았다. 그녀의 말에 감동을 받았고 큰 도움이 되었다. 


"난 오빠가 뭐든 상관 없어요. 오빠 자체가 중요해요."


그러며 내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 없다는 게 아닌가. 심지어 내가 인간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그녀였다. 그 말에 감동받지 않을 자 누구인가.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도 한동안을 고민한 뒤 나도 그녀에게 같은 말을 했다. 


"너가 여자든 남자든 상관 없어. 너 자체가 나에겐 중요해."


당시에는 그 말에 그녀가 크게 감동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녀에게는 그게 당연한 거였으니까. 그런데 얼마 전에 고백 아닌 고백을 하는 게 아닌가. 그때 그게 사실 일종의 실험이었다는 걸. 물론 오빠 자체가 중요하다는 건 당시와 지금의 변함 없는 진심이지만. 


덕분에 지금 어느 커플보다 공고한 사랑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다. 웃지 못할, 그렇지만 웃음이 나오는 추억인데 중요한 걸 남겨 주었다. 그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의 사랑이 흩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그 자체로 이해하고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으니까. 시간이 흘러도 그녀는 그녀로 남아있을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