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사회 고발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 삼우반



[지나간 책 다시 읽기] 조지 오웰의 사회 고발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잘 알려진 소설가 조지 오웰은 영국인으로 식민지 인도 태생이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와 누이를 따라 영국으로 돌아왔고, 공부를 잘해서 명문 이튼 스쿨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부터 외려 성적이 떨어졌다고 한다. 19살이 되던 해 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인도 제국경찰에 들어가 버마(미얀마)에 부임한다. 굉장히 안정된 직업이었지만, 그는 견디지 못했다. 식민지 경찰로써 제국주의의 온갖 추악한 면모와 모순을 겪게 된 것이다. 그 한계를 절감하고 오웰은 이후로 그 누구보다도 이를 통렬히 비판한다. 


결국 6년 뒤 경찰을 그만두고 파리로 건너가 작가 수업을 쌓는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부랑자와 접시닦이 등의 밑바닥 생활을 전전한다. 파리에서 런던으로 건너갔지만 마찬가지였다. 그 나날들이 1928년부터 1932년까지 자그마치 5년 간 지속된다. 이 5년은 그에게 잊지 못할 소중한 체험으로 남아, 이듬해인 1933년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라는 르포르타주 자전 소설 출간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다.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은 알다시피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세계가 침체되었던 시기였다. 더구나 유럽은 그 직격타를 맞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리는 실직자와 부랑자들이 넘쳐 나고 있었다. 조지 오웰이 의도적으로 밑바닥 생활을 경험했는지 어쩔 수 없이 경험하게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6년 간의 식민지 경찰 생활이 죄의식으로 남아 그를 괴롭혔을지도 모르겠다. 


조지 오웰은 이 소설로 처음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게 되었고 상당한 명성을 얻게 된다. 또한 앞으로 계속될 그의 집필에서 이 소설은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의 날카롭지만 유머가 번뜩이고, 비판적이지만 풍자적인 문학적 분위기가 첫 소설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가 겪은 밑바닥 생활은 얼마나 '더럽고 힘들고 위험했을까'(3D-Dirty, Difficult, Dangerous).


나의 밑바닥 생활


잠시 나의 밑바닥 생활을 소개해본다. 지금은 책에 관련된 고상한(?) 일을 하며 황송하게도 사무실에 앉아 일을 하고 있지만, 나의 지난 아르바이트 경력을 돌이켜보면 현장에서 몸을 움직여야 하거나 밤을 새며 하는 일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쁘지 않은 추억으로 남아있지만, 보수나 처우 면에서는 정말 형편없었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정말 "내가 밑바닥이구나"라고 생각하게끔 하는 아르바이트가 몇 개 있었다. 돈을 모아야 한다는 일념이 아니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텐데. 


생각만 하면 아주 진저리가 처진다. 호주에서 1년 간 체류했을 때였다. 가자마자 다음 날부터 일을 하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밤샘 아르바이트였다. 밤 9시부터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대형 마트 2개를 청소하는 일이었다. 도착하자마자 30분 만에 미친 듯이 화장실 청소를 해치운다. 그러고 나서 우리나라 대형마트 1, 2층을 합쳐 놓은 것보다 더 큰 초대형 마트를 쓸고 닦는다. 그걸 두 명이서 해야 했다. 본래 3명이서 해야 할 일을 말이다. 


당연히 6시간 만에 끝낼 수 없었고,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계속했다. 고용주가 한국인이었는데, 너무나 당연하게(?) 추가 수당은 지급하지 않았다. 대신 아침밥으로 라면을 끓여주곤 했다. 일당은 6시간에 72불이었으니, 시간당 12불(한화 12000원)이었다.


한국의 3배에 달하는 액수였으나, 당시 호주의 최소 시급은 17불이었다. 애초부터 명백한 위반에 추가 수당 54불(추가 수당은 1.5배)도 주지 않았으니, 호주까지 가서 일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결국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고 말았다. 정말 피가 나고 알통이 배기고 이가 갈리는 경험이었다. 


그런데 서러운 외국에서의 밑바닥 생활은 이제 시작이었다. 한 달 동안 수십 통의 이력서를 뿌렸지만 단 한 군데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그 곳들이 전부 호주인이 운영하는 곳이라는 점. 그래서 한국인 가게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한 달여가 지나 불안이 극에 달했을 때, 브리즈번 유일의 중국집에서 연락이 왔다. 바로 달려가 주방 보조로 일하게 되었다. 인생 최악의 아르바이트가 시작된 것이다. 


주방 보조가 할 일은 참 쉽지만 너무나 많았다. 30분 일찍 와서 밥 32인분을 얹혀 놓고, 청소를 하고, 기본적인 재료들을 준비한다. 손님이 들이닥치면 요리사를 위해 수십 가지 재료들 중에서 조합을 맞춰 준비를 해주고, 요리사 시중(땀 닦아주기, 각종 심부름 등)을 들고, 미친 듯이 설거지를 하고, 선임 주방 보조와 다른 요리사들이 시키는 잡다한 심부름을 한다. 평소에는 과묵한 사람들이 일만 시작되면 온갖 욕설을 퍼붓는다. 


나는 수첩에 각종 밑 재료 조합들을 써서 외웠음에도 그들의 윽박지름과 욕설에 머리가 하얘지곤 했다. 시간이 가도 좋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바로 전번에 했던 일에서 패배를 맛보았고 한 달 동안이나 일없는 고통 속에서 살았기에 이를 악물고 참았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고 역시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고 말았다. 나의 밑바닥 생활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너무나 괴로워서 급여도 받지 않고 그만둔 것이 큰 타격으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또 스트레스를 풀 요량으로 여기저기를 싸돌아다녔기 때문에 수중에서 돈이 점점 사라졌다. 결국 한 달이 지나도록 일자리를 잡지 못해 방세 조차 내지 못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일주일 안에 일자리를 잡지 못하면 2개월 만에 무일푼, 무경험으로 집에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더구나 편도로 와서 엄마한테 비행기 삯을 빌려야 했다. 지옥 같은 나날들이 계속되었고 정점에 올랐을 때 다행히 일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때의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덕분에 이후의 호주 생활은 적어도 밑바닥은 아니었다. 


조지 오웰의 밑바닥 생활-파리


조지 오웰의 밑바닥 생활은 그의 자전 소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 아주 자세히 나와 있다. 주인공은 빈민가 싸구려 호텔에 머물며 영어 교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일자리를 잃고 본격적으로 무일푼 생활에 뛰어든다. 몇 개월 동안 일자리를 잡지 못해 며칠 씩 굶는 날과 씻지 못하는 날이 계속되었고, 옷가지들을 전당포에 맞기며 겨우 겨우 목숨을 연명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파리 밑바닥 생활 1기는 가난과 배고픔으로 점철되었다. 


배고픔은 사람을 완전히 무척추, 무뇌 상태로 전락시키는데, 증상이 무엇보다 독감 후유증과 비슷하다. 몸속의 피가 모두 빠져나간 다음, 미지근한 물로 채워져버린 듯하기도 하다. 배고픔에 대한 주된 기억은 완전한 무기력이다. 또 침을 아주 자주 뱉게 되고, 좀매미 거품처럼 이상하게 하얗고 솜털 같은 침이 나온다.(본문 속에서)


이후 친구의 도움으로 호텔 식당에서 접시닦이 일을 하게 된다. 일은 말할 수 없이 바쁘고, 고되며, 지루하다. 또한 너무나 길다. 환호 속에서 일을 시작해 가난과 배고픔을 면했지만, 또 다른 고통이 그를 찾아간다. 처음에는 하루에 15시간씩 지속되는 일이라도 감지덕지해 고마워하며 일을 했지만, 점점 더 지쳐갔다. 온갖 멸시와 괄시는 견딜 수 있었지만, 수면 부족과 함께 찾아오는 몸의 고통은 견딜 수 없었다. 파리 밑바닥 생활 2기는 수면 부족과 참기 힘든 육체적 고통으로 점철되었다.


배고팠던 경험이 나에게 음식의 진정한 가치를 가르쳐주었듯이 호텔 노동은 잠의 진정한 가치를 가르쳐주었다. 잠은 단순한 신체적 필요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관능적인 것이었고, 휴식이기보다 폭식이었다.(본문 중에서)


조지 오웰의 밑바닥 생활-런던


견디기 힘든 파리에서의 생활을 뒤로 하고, 주인공은 런던으로 떠난다. 파리에서의 고된 노동에 비해 수월한 듯한 일. 하지만 다른 문제가 뒤따른다.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괄시, 무시를 받는 문제였다. 파리에서는 영국 사람으로서의 메리트를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던 것에 반해, 런던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영국인이었다. 주인공은 그냥 부랑자에 불과했다. 런던의 밑바닥 생활 1기는 심적 고통이 뒤따른다.


여자들은 죽은 고양이를 본 듯이 혐오스럽다는 몸짓을 솔직히 드러내며 몸서리치며 피한다.(본문 속에서)


여기에 말도 못할 정도로 지독한 잠자리도 주인공을 괴롭힌다. 헐값인 숙박소에서 마치 수용소에서처럼 한 방에 10명씩 자는 생활을 한다. 냄새와 소음, 불결한 환경에서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결국 돈이 떨어져 무료 구호소를 전전하는 생활까지 하게 된다. 런던의 밑바닥 생활 2기는 육체적 고통이 뒤따른다. 런던에서의 생활은 상대적으로 파리보다 짧다. 체류 기간도 짧지만, 결과적으로 일이 잘 풀렸다. 


혹시 무일푼이 되면 당신에게 이런 세계가 기다린다는 것 정도만은 말할 수 있겠다. 언젠가는 그 세계를 더 철저히 탐구하고 싶다. (중략) 접시닦이, 부랑인, 강변 둑길 노숙자의 영혼 속에는 정말로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이해하고 싶다. 현재로서는 가난의 언저리까지밖에는 보지 못한 것 같다.(본문 속에서)


조지 오웰의 사회 고발


이 소설이 단순히 조지 오웰의 체험기로 그쳤으면 그리 많은 사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은 중간 중간 주인공의 '소비자 고발', '사회 고발' 등을 적절히 가미 시킨다. 예를 들어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아주 자세하게 일류 호텔 식당과 상위 클래스 식당의 속살을 폭로한다. 사회 하위계층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런던에서는 사회복지랍시고 행해지는 갖가지 행태들을 꼬집는다. 복지가 일종의 희망고문과도 같다. 정부는 사회 하위계층에 대한 복지를 보여주기 식으로 행할 뿐이다. 


또한 작가는 사회에 엄연히 '계급'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 중 최하위 계층은 해고 내지 감옥이 아닌 이상 평생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고용주는 그가 죽지 않을 만큼만 돈을 주고 죽지 않을 정도의 일을 시킨다. 그들은 너무나 적은 돈에 너무나 많은 일을 하기 때문에 평소에 아무런 여가 활동을 할 수 없다. 그냥 그렇게 평생 일만 하다가 죽는다. 문제는 그보다 더 못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이고 더욱 못한 사람들도 부지기수이다. 일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황송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지금과 무엇이 다른가. 7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과 무엇이 다른가. 바뀐 것이 없다. 이 사회에도 엄연히 '계급'이 존재하고, 그 계급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경쟁의 일상화에 더해 총체적 경제 난국의 시대이다. 고용주의 말은 곧 하늘의 계시이다. 그 계시를 따르지 않을 시, 죽음으로 가는 길은 훤히 열린다. 그 계시를 충실히 따른다면 그나마 죽지 않고 먹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보장된 미래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찬란했던 과거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죽지 못해 사는 현실이 있다.


소설에 따르면 나도 접시닦이이다. (소설에서 돈이 많든 적든 노동자는 모두 접시닦이라는 말이 나온다.) 나도 일을 할 수 있는 것 만으로 황송해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평생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성공한 접시닦이들은 말한다. 언젠가 반드시 기회가 올 거라고. 그건 마치 열심히 접시를 닦다가 실수로 깨뜨린 접시에서 다이아몬드가 튀어나왔는데,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믿은 접시닦이가 운 좋게도 그걸 발견해 잘 이용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열심히 일하고 먹고 살면서 그때를 기다려본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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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프랑스 만화 <설국열차>


<설국열차> 표지 ⓒ 현실문화연구

<구약성서> '창세기' 6~8장을 보면,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나온다. 최초의 인류가 타락한 생활에 빠져 있어 하느님이 대홍수로 심판하려 한다. 홀로 타락하지 않고 바른 생활을 하던 노아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홍수가 올 것을 미리 알게 된다. 그는 120년에 걸쳐 길이는 약 135m, 폭은 약 23m 높이 약 14m의 삼층 구조 배를 만든다. 8명의 가족과 여러 쌍의 동물들을 데리고 방주에 탑승한다. 


대홍수는 40일(또는 150일)동안 계속되어, 노아의 방주에 탄 이들을 제외한 모든 생물이 전멸한다. 인간의 탐욕이 초래한 재앙을 피할 길은 오로지 노아의 방주 뿐인 상태이다. 언제 끝날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극한의 두려움 속에서 노아의 가족은 어떤 생활을 할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종교적 상징을 뒤로 하고 상황 자체만을 두고 봤을 때, 상당히 흥미로운 설정이다. 극도의 두려움과 절망감, 고립감 그리고 안도감 등의 수많은 감정들이 소용돌이 칠 것이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에 사랑, 정치, 종교가 뒤섞일 것이다. 


극악의 상황에 놓인 인간들


프랑스 만화 <설국열차>의 배경은 이와 비슷하다. 동서 양 진영의 갈등이 극으로 치달아 기후 무기까지 개발하기에 이르렀고, 세상은 눈으로 뒤덮였다. 설국열차에 오른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생물은 전멸했다. 이 대재앙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설국열차에 탑승하는 것뿐이고, 설국열차의 정지는 죽음을 의미한다. 


영원히 달리게끔 되어 있는 설국열차이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한다. 이 인류 생존의 마지막 보루에도 계급이 존재하는데, 위기가 닥치자 위의 계급이 아래 계급을 밀어내려 한다. 일명 '꼬리 자르기'로, 꼬리칸을 떨쳐버리려 하는 것이다. 이 죽음의 레이스의 전말을 알게 된 꼬리칸의 한 남자는 반란(혁명)을 시도한다. 


4년 전에 개봉해 엄청난 흥행과 더불어 많은 논란거리를 남겼던 영화 <2012>의 후반부 스핀오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영화는 마야설에 근거해 2012년에 세상이 멸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후반부에 현대판 노아의 방주가 출현한다. 영화는 재난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노아의 방주 탑승과 노아의 방주 내에서의 생활은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이 사라진 곳에 내린 노아의 방주 탑승자들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설국열차>는, 이런 극악의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극도로 좁은 공간에서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극대화된 상징성들


<설국열차>는 그래픽노블로서의 장점(눈을 자극하는 화려한 그림체와 시각적 상상력 등)을 어느 정도 포기하면서까지 상징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철저히 인간을 그리려는 문학에 가까워 보인다. 그 상징성을 몇 가지 살펴본다. 


계급

설국열차는 수직이 아닌 수평적 구조이다. 고로 계급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지만, 엄연히 칸이 나뉘어져 있고 그에 따라 계급이 확연히 나뉘어져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죽음에 가까워 있으면서도, 공존의 길을 찾지 않고 공멸의 길로 가려는 모습이 안타깝다. 오히려 서로를 더욱 증오하는 모습은 자못 아이러니하다. 


전염과 이분법

꼬리칸에서의 치욕스러운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칸으로 건너가려는 주인공은 군사당국에 붙잡히고 만다. 이때 그들은 주인공에게 '전염병'이 있을지 모른다며, 그의 머리를 밀고 목욕을 시킨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가 꼬리칸 출신이라는 것. 낮은 계급에, 못 먹어서 건강하지 못하고 못 씻어서 더럽다고 생각한다. 극명한 이분법적 생각이다. 너는 너, 나는 나. 너는 우리가 될 수 없고, 나는 너희가 될 수 없다. 


돌진

<설국열차>를 영화로 제작한 '봉준호'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격렬하게 앞으로 돌진하는 인간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보고나면 우리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인간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핏 들으면 무슨 뜬구름 잡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여기에 배경이 들어가면 이해가 된다. 꼬리칸 출신의 주인공은, 처음엔 끌려가고 나중엔 반란을 일으킨다. 그가 가고자 하는 칸은 부자와 권력자들의 칸이다. 즉, 돌진은 혁명이고 혁명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봉준호 감독은 다른 의미로 해석했을 수도 있다. 가령 '돌진'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 자체를 생각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고 말이다. 


고립

열차가 정차하지 않는 이상 뛰어내릴 수 없다. 그런데 설국열차는 영원히 멈추지 않는다. 또한 설국열차의 밖은 곧 죽음이기에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다. 모든 것이 완벽히 차단된 고립무원의 상태이다. 옛날 달마대사는 소림사에 들어가 면벽좌선 9년 후 도를 깨달았다고 한다. 고립을 자처해 한계를 넘어섰다. 감옥에서 또 다시 사고를 치면 아무도 없는 독방에 고립시켜 놓지 않는가. 고립은 그토록 끔찍하다. 고립된 설국열차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타인과 분리되어 멀어진 상태인 고립과 수많은 사람들이 만났을 때, 어떤 문제들이 일어나는지는 이미 수많은 콘텐츠들을 통해 입증된 바 있다. 


인간

<설국열차>에서 제일 중요한 건 인간이다. 인간의 탐욕으로 자행된 파멸, 파멸 속에서도 피어나는 사랑과 전쟁 그리고 혁명, 영원히 멈추지 달린다지만 인간이 있어야만 하는 기계. 한마디로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이다. 기계의 움직임도 목적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공존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협력이 가능하다


언제 어느 때나 생존은 중요하다. 인간의 역사가 곧 생존의 역사이다. 그 역사에는 무수한 반목과 협력이 있어왔다. 반목의 역사는 지워졌고, 협력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협력이 무조건적인 찬성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의 조건이 필요할 것이고, 반목 또한 무조건적인 반대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협력과 반목에 공존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함은 자명하다. 


우리나라는 시간이 갈수록 '갑과 을', '너 아닌 나'와 같은 이분법의 나라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은 시간이 갈수록 자국만 생각하는 일방적 나라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먼 이웃나라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인류 공동의 가치 실현에 앞장서려는 나라를 찾을 수 없다. 그런 인간을 찾기도 어렵다. 


인간은 '人'의 생김새에 기반을 둔 노력이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받아주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때 희망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돌진'하지 않으면 '전염'의 공포로 점철된 '고립'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계급'주의적 세상의 '인간'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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