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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1998년 한국사회의 웃픈 자화상 <전당포를 찾아서> [한국 대표 소설 읽기] 짧은 단편소설에는 등장인물이 최소한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을 몇몇의 등장인물을 통해 짧고 굵게 그리고 비교적 손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편소설이나 대하소설에서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의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가끔 장편소설에서 소수의 등장인물이 등장할 때가 있는데, 굉장히 느리거나 반대로 굉장히 빠르게 진행되곤 한다. 그런데 소설가 김종광은 단편이고 장편이고 수많은 등장인물을 등장시키곤 한다. 특히 단편에서 수많은 등장인물을 등장시키고도 핵심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능력은 발군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욱이 그의 소설은 단연 재미있다. 재미를 추구하는데도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신기한 능력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 더보기
지배자의 폭력과 피지배자의 폭력은 같지 않다 <필론의 돼지> [한국 대표 소설 읽기] "필론이 한번은 배를 타고 여행을 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큰 폭풍우를 만나자 사람들은 우왕좌왕 배 안은 곧 수라장이 됐다. 울부짖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뗏목을 엮는 사람… 필론은 현자인 자기가 거기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도무지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배 선창에는 돼지 한 마리가 사람들의 소동에는 아랑곳없이 편안하게 잠자고 있었다. 결국 필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돼지의 흉내를 내는 것 뿐이었다." (본문 58~59쪽 중에서) 많은 사람의 정곡을 찌를 우화이다. 굳이 내가 무엇을 하지 않아도, 세상은 돌아가게 마련이다. 관성의 법칙도 있지 않은가? 세상은 제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조급하게 나서서 뭐라도 해보려고 하니, 현자가 보.. 더보기
기억조차 하기 싫은 그날을 기억하는 것, 이 소설이 아름다운 이유 <소년이 온다> [지나간 책 다시 읽기] 5.18은 내게 결코 가깝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이승복 기념관을 해마다 찾았고, 그 '투철한 반공정신' 때문에 희생된 이승복 어린이의 정신을 길이 새기며 치를 떨었다. 5.18은 저 멀리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승복 어린이와 일가족이 처참하게 죽어간 그 모습만 떠오를 뿐 그 이면의 정신과 사상이 떠오르진 않는다는 것이다. 그 폭력과 상처만 깊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게 5.18이 다가올 수 있었다. 5.18을 온전히 폭력과 상처의 입장으로 보아야 5.18은 상당 기간 논란거리였다. 지금도 그렇다. 수많은 추측이 난무하는 와중에 정치적으로 다양하게 이용해먹었다. 지금도 그렇다. 그렇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곳엔 폭력과 상처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더보기
아픔과 고통을 짊어지고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이다 <회복하는 인간> [한국 대표 소설 읽기] 한강의 한 자매가 있다. 그들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언니는 화려한 외모에, 건실하고 잘생긴 형부와 결혼해 누구라도 부러워할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반면 동생은 평범한 외모에, 고지식하고 고집이 세고, 신통찮은 전공을 택해 불안정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동생이 언니를 질투하고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언니가 동생을 질투하고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자매 사이는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지고 죽을 때까지 좁혀지지 않는다. 조만간 언니에게 죽음이 찾아온 것이다. 동생은 그렇게 언니를 보내고 고통 속에 살아간다. 아니, 일부러 고통 속으로 걸어들어가 나오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 마치 그것이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자 방식이라는 듯이. '고통'과 '아픔'이라.. 더보기
끔찍한 고통과 두려움, 죽음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건 '거짓' <이반 일리치의 죽음> [지나간 책 다시 읽기] 죽음은커녕 삶도 제대로 알지 못할 나이에 죽음을 걱정했던 것 같다. 자그마치 초등학교 5학년 12살 때였다. 아마 어느 정도의 삶을, 되풀이 되는 삶의 연속을 경험해본 나이였을 테니까, 이 삶의 끝을 상상해봤을 것이다. 한 때 매일 밤 눈만 감으면 생각했다. 아니,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 생각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는 머리에 든 게 많지 않고 생각도 짧으니 죽음에 대한 한 면만, 그리고 한 가지만 물고 늘어졌다. 죽음은 두렵고 무섭고 나쁘고 아프고 피하고 싶은 것, 부정(不淨) 그 자체였다. 그 끝이 어떻게 될까, 끊임없이 반복해서 생각하게 되니 미처버릴 것만 같았다. 도무지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데 자꾸 생각하.. 더보기
인간이야말로 포악하고 야비하고 나쁘다 <울지 않는 늑대> [지나간 책 다시 읽기] 많은 동물 중에 하필 늑대일까. 왜 인간은 늑대를 무서워할까. 왜 인간은 늑대를 미워할까. 늑대는 분명 보기만 해도 오줌이 지릴 것만 같은 강렬한 눈빛과, 단 한 번에 목숨을 끊어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이빨과,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을 것 같은 야생성 다분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밤에 주로 활동한다. 그야말로 인간에게 알려진 동물 중 가장 공포와 미움의 대상이 될 만하다. 그럼에도 늑대는 인간에게 친숙한 편이다. 웬만한 판타지 콘텐츠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늑대인간'이 그러하고, 아무래도 갯과 동물이기에 개와 비슷하게 생긴 외모가 친숙하다. 여우를 생각할 때면 늑대가 항상 붙어 다녀 '늑대와 여우'라는 명제가 자연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 더보기
기다리는 동물들을 기억으로 보답하다 <후쿠시마에 남겨진 동물들> [지나간 책 다시 읽기] 울컥합니다.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 한 편이 먹먹합니다. 일부러 보지도 듣지도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비극은 여전히 저를 괴롭히네요. 앞으로 살아가면서 또 이런 비극이 있을까요. 제발 없기를 바랍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부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에 이은 쓰나미와 예상치 못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 그로 인해 방사능이 대량으로 유출되어 그 일대는 곧 아무도 살지 못하는 곳이 됩니다. 사고 후 원전 20킬로미터 이내 지역이 경계 구역으로 지정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난을 떠났기 때문이죠. 말 그대로 ‘죽음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미처 챙기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동물’들. 그 죽음의 땅에 버려지거나 남.. 더보기
다시 오지 않을, '클린트 이스트우드 식' 인간과 영화 <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지나간 책 다시 읽기] 작가 지망생인 나는 숙부를 대신해서 팬션과 낚시터를 관리하고 있다. 어느 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팬션에 찾아온다. 알고 보니 제작자와 다툼 끝에 도망친 거였다. 언론들은 쿠바와 멕시코를 유력한 은신처로 뽑았는데, 정작 그는 한국으로 도주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서부의 영웅이 아니었다. 아무런 명분도 없이 폭력을 행사하고 푼 돈을 빼돌린 추잡한 도망자이자 고집 센 늙은이에 불과했다. 오한기의 소설 (아시아)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인 나에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찾아오며 시작된다. 도망 다니는 주제에 거장이라 불리는 감독들과 주옥 같은 작품을 폄하하면서, 자신의 아주 오래된 영화 만을 대단하다고 치켜세우곤 한다. 그러며 자신이 여전히 누구나 한 번만 뵙길 청하는 정도의 거물로 인식하..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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