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코엔 형제의 <파고>


영화 <파고> 포스터. ⓒ서우영화사



전 세계 시네필이 좋아해 마지 않는 형제 감독들이 있다. 50년대에 데뷔해 70~80년대 유럽영화의 시대정신을 이끌었다는 평가받는 거장 타비아니 형제, 80년대에 데뷔해 현실성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를 내놓으며 칸이 가장 사랑하는 감독 중 하나로 우뚝 선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 그리고 역시 80년대에 데뷔해 오랜 시간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 참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코엔 형제. 


코엔 형제는 1984년 <분노의 저격자>로 제1회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차지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한다. 그들과 함께 또는 그 이후로 짐 자무쉬, 스티븐 소더버그, 쿠엔틴 쿠란티노 등 내로라 하는 감독들이 선댄스를 통해 이름을 알린 바 코엔 형제는 선댄스로 대표되는 미국 현대 인디 영화의 총아이자 시작점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들은 화려한 데뷔를 비롯해 칸 영화제로부터 다르덴 형제보다 더한 사랑을 받으며 80~90년대 전성기를 누린 반면, 2000년대는 상대적으로 주춤한 듯했고, 2010년대 들어선 거의 주류에 안착한 느낌이다. <파고>는 그들의 필모에 있어 여러 모로 최정점에 위치한 영화라 하겠다. 관점을 갖고 들여다보려 한다. 


미국 중북부 노스다코타 주의 파고


영화 <파고>의 한 장면. ⓒ서우영화사



1987년 미국 중북부에 위치한 노스다코타 주의 파고, 자동차 세일즈맨 제리(윌리암 H. 머시 분)는 돈에 쪼들려 자신의 아내를 유괴해 돈 많은 장인어른에게서 8만 달러를 뜯어낼 계획을 세운다. 그는 아는 사람을 통해 칼(스티브 부세미 분)과 게어(피터 스토메어 분)를 소개받고는 차까지 빌려준다. 


제리는 아내를 납치해 장인어른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대신 다른 방법으로 돈을 한 번에 벌고자 하는데 쉽지 않다. 칼과 게어는 재빨리 제리의 아내를 납치해 그들의 아지트로 향한다. 그런데 고속도로에서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한다. 경찰관의 검문에 걸렸고 납치 사실이 발각될까 두려운 나머지 게어가 경찰관을 죽여버린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차를 타고 지나가던 목격자 두 명도 끝까지 쫓아가 죽여버린다. 


한편, 사건이 일어난 곳은 노스다코타 주와 인접한 미네소타 주의 작은 시골 도시 브레이너드, 그 일대를 담당하는 경찰서의 서장 마지(프란시스 맥도맨드 분)는 만삭의 몸을 이끌면서도 철두철미하고 영리하게 사건에 접근한다. 결국 이 모든 사건의 원흉 제리의 사무실까지 당도하는데... 


'비교'와 '대조'로 들여다보는 <파고>


영화 <파고>의 한 장면. ⓒ서우영화사



영화 <파고>는 코엔 형제 스타일 그 최정점에 위치해 있다. 우린 이 영화에 이르러 비로소 그의 스타일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시네필만을 위한 감독이 아니게 되었고, 그들의 영화도 더 이상 시네필만을 위한 영화가 아니게 되었다. 특히 <파고>는 마음껏 물고 뜯으며 즐기고 재멋대로 해석을 하며 파고 파고 또 파도 계속해서 무언가가 나오는 정도의 작품이 되었다. 


이 영화에는 그야말로 수없이 많은 수식어와 해석이 붙고 나온 지 20년이 넘은 만큼 그중엔 정립된 것들도 꽤 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비교' '대조'라는 개념만을 중점으로 들여다보려 한다. 영화사에 영원히 길이 남을 작품에 많은 것들을 들이대는 게 무슨 소용일까. 


얼핏 단조로운 <파고>를 이루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전부 이중성을 띠고 있다 시피 한다. 지명 'fargo'를 뜻함과 동시에 'far go'를 뜻하기도 하는 제목, 모든 걸 파묻어 버릴 수도 있지만 모든 걸 드러내기도 하는 하얀 눈, 모든 걸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모든 걸 잃을 수도 있게 하는 돈, 다른 이를 죽이기도 하지만 나를 죽이게도 하는 총. 그리고 그 모든 이중성을 실행하고 이중성에 당하는, 이중성의 화신 인간까지. 


우리는 이 한없이 '재미있는', 그러나 무차별로 잔인해 너무나도 영화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터무니없이 싱겁고 한량스러운 대화들의 남발로 너무나도 현실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 영화를 굉장히 '진지하게' 읽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코엔 형제는 그걸 의도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그들은 계산적이기보다 본능적으로 시나리오를 만들고 이어 영화를 만들었을 테다. 


'본능적으로' 파는 <파고>


영화 <파고>의 한 장면. ⓒ서우영화사



이번엔 최대한 '본능적으로' <파고>를 들여다보자. 그런데 이게 웬일이람. 그래도 여전히 '너무 많이 가버렸다'는 제목과 모든 걸 드러내어 이야기가 이어지게 만드는 눈과 결국 모든 걸 잃게 만드는 돈과 관련된 거의 모든 이를 죽이게 만드는 총이 눈에 보이는 걸 어쩌나. 그것들은 전부 이 영화를 '계산적으로' 볼 때 나온 것들 아닌가. 


정녕 코엔 형제는 천재 중에 천재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 놀라움을 지나쳐본다. 이 영화의 물흐르듯 흐르는 이야기에 종종 제동을 거는 건, 다름 아닌 싱거운 대화들이다. 문제는, 이 대화들이야말로 코엔 형제가 '계산적으로' 넣은 게 분명해 보이는 장치라는 것이다. 나는 그 대화들이 굉장히 비(非) 영화적으로도 느껴지는데 말이다. 


사실 이 범죄 스릴러의 기본은 의외로 액션이 아니다. 놀랍게도 대화와 장면(풍경)이 그 기본이다. 대화들은 <파고>라는 영화를 구성하기도 하지만 <파고> 속 인물들의 일상을 구성하기도 한다. 장면들은 역시 영화 속 중요한 장치적 맥락을 구성하기도 하지만 그저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로만 쓰이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파고>를 인간, 사회, 범죄, 일상, 비극 등 수많은 객체와 주체들로 바라볼 수 있다. 그 모든 걸 남김없이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라지 않을까. 안타깝지만(?) 이번엔 그 모든 걸 뒤로 하고 그나마 '코엔 형제'에 포커스를 맞춘 것이다. 그들의 또 다른 걸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영화를 해석하는 데에만 공력을 쏟아도 모자라는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그들의 또 다른 작품을 들여다보는 기회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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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번지점프를 하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포스터. ⓒ눈엔터테인먼트



1983년 여름의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서인우(이병헌 분)의 우산 속으로 젊은 여인이 달려 들어온다. 첫눈에 반한 게 분명한 인우는 왼쪽 어깨가 젖어가는 줄도 모른 채 멍한 표정이다. 그렇게 헤어지고는 매일 같이 그 자리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인우다. 


다시 한 번 어느 날, 학교 교정에서 그녀를 발견한다. 국문학과 서인우와 조소과 안태희(이은주 분)의 만남이 시작된다. 급속도로 친해져 사귀게 된 그들, 여타 커플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인우가 군대를 가게 되었을 때 태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끝이 났다. 


17년이 지나 인우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되었다. 가정을 꾸리고 딸까지 있는 그인데, 태희를 아직 잊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가 담임으로 있는 반의 임현빈(여현수 분)이라는 학생이 자꾸 태희를 연상시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럴 수 있다는 정도로 넘어 갔지만, 너무나도 디테일한 부분까지 계속 보임에 인우는 현빈이 태희임을 알아보는데... 17년 전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현빈이 태희일까? 


판타지적 장르가 섞인 멜로/로맨스 영화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한 장면. ⓒ눈엔터테인먼트



2000년대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까지 <접속> <약속> <8월의 크리스마스> <미술관 옆 동물원> <연풍연가> <내 마음의 풍금> 등의 주옥같은 멜로/로맨스 영화가 쏟아져 나왔다. 그 기세는 200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는데, 와중에 정통이 아닌 판타지 장르가 조금 섞인 멜로/로맨스 영화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동감> <시월애> <번지점프를 하다> <클래식> <내 여자친구를 사랑합니다> <인어 공주> 등이 기억에 남는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는 2000년대 초반의 판타지적 장르가 섞인 멜로/로맨스 영화 판도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영화에서 판타지적 장르는 지극히 수단일 뿐이다. 


영화는 1/3을 정말 소소하고 평범한 사랑의 시작을 보여준다. 분명 거기에는 일부러 보여주지 않고 감춘 절절함이 있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17년 후를 다룬 후반부에서 하나하나 회상하며 강도를 높여가는 특별하고 본질적인 사랑의 행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 <번지점프를 하다>는 '본질'에 관한 영화이다. 거기에 '사랑' 정도를 덧붙일 수 있겠다. 사랑의 모습은 '남자와 여자' '남자와 남자' '인간 대 인간'까지 나아간다.


사랑의 외연 그리고 본질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한 장면. ⓒ눈엔터테인먼트



영화를 처음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초반 1/3 보다 후반 2/3을 눈여겨볼 수밖에 없다. 판타지적 장르를 수단으로 썼듯이, 동성애적 코드도 수단으로 써버리면서까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 메시지가 2001년 당시에는 꽤 파격적이었고 지금에 와서는 여러 사랑의 정의 중 한 방면의 정석이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외연 상 인우가 남학생 현빈에게 마음이 가는 건 당연히 동성애적 끌림이라 볼 수 있다. 그가 태희를 연상시키는 것도 모자라 태희 그 자체라는 확신이 선다 해도 말이다. 다분히 판타지적 설정임에 분명하기 때문인데, 이 부분에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의 정의가 드러난다. 사랑은 외연이 아닌 본질이라는 것 말이다. 


인우에게 현빈은 현빈이 아닌 태희다. 평생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그의 마음 속에 영원히 남아 있는 그녀 태희 말이다. '남학생' 현빈은 껍데기일 뿐이라는 등식이 성립됨과 동시에, 그들의 사랑이 아주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졌을 거라는 등식도 성립된다. 아주아주 오랜 후에도 계속될 거라는 등식도 역시. 


절벽에서 바다에 떨어지면 기적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죽고 말지만, 같은 절벽에서 번지점프를 하면 기적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살아 돌아와 다시 만난다. '본질'이라는 사랑의 정의에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게 되어 있고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는 '회자정리 거자필반'의 불교 색체가 덧붙여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인간 대 인간의 사랑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한 장면. ⓒ눈엔터테인먼트



영화가 말하는 '본질'의 사랑의 정의는 태희의 현빈화가 전부는 아니다. 또 다른 차원까지 나아갈 수 있는데, 남자를 사랑한다는 외연과 여자를 사랑한다는 본질적 외연을 넘어서 인간을 사랑하는 본질까지 내다본 것이리라. 인우가 남학생의 모습을 한 태희를 사랑한다는 건, 여자 태희가 아닌 인간 태희 그 자체를 사랑한다는 반증이다.


굳이 등식화 하자면 남자 현빈->여자 태희->인간 태희인데, 그 스스로도 남자 인우, 가장 인우, 동성애자 인우 등의 정체성을 넘어선 인간 인우가 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는 사랑의 정의를 이 정도까지 진척시켰고 이 정도에서 멈췄다. 현빈이 그저 남학생 정도로 나왔으니 망정이지, 동물이나 벌레로 나왔으면 어쨌겠는가. 


결혼하기도 한참 전 지금의 아내랑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때 그녀가 자주 물어봤었다. "나 사실 남자야. 나이도 엄청 많아. 그런데도 나랑 사귈 거야?" 나는 그때마다 "그래. 당연하지."라고 답했다. 그땐 반은 장난이고 반은 진짜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결혼하고 나서 그때를 돌이켜 보면서, 아내가 '나라는 인간을 사랑하는 건지' 시험해본 거라고 말했다. 


흔히 "다음 생애에도 지금의 남편 혹은 배우자와 다시 만날 거나?"라고 묻곤 한다. 그때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 장난 반 진담으로 "훨씬 예쁘거나 멋있고 훨씬 돈 많은 사람과 만날 거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며 '운명의 상대'를 찾는 것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운명의 상대가 다름 아닌 아주 오래 전부터 만나왔던 단 한 사람이고, 그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나도 그 역시 그 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는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과 살고 있는지? 그 인연의 끈, 그 형용할 수 없이 길고 끝과 끝이 만날 수 있는 비현실적인 확률을 되새기며, 극 중 서인우의 대사를 읊어본다. "이 줄은 세상인데 이 세상 아무 곳에다 작은 바늘 하나를 세우고 하늘에서 아주 작은 밀씨 하나를 뿌렸을 때 그게 그 바늘에 꽃일 확률... 그 계산도 안 되는 확률로 만나는 게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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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고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




나는 오랫동안, 그러니까 결혼을 하기 전까진 식단으로만 본다면 채식주의에 가까운 생활을 해왔다. 당연히 주식은 쌀밥, 주반찬은 국(김치찌개, 된장찌개, 미역국 등)과 김치류였다. 가끔, 특식으로 삼겹살이나 닭볶음탕, 소갈비를 먹었다. 아주 가끔, 몸보신 용으로 곰탕을 먹었던 것 같다. 


확실치는 않지만 한국인의 보편적 식습관일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 상당한 육식이 함께 하지만, 보다 훨씬 상당한 채식이 함께 한다. 결혼을 하고 몇 개월 정도 아내의 친정에 얹혀 살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특이한 식습관을 가진 가족이었다. 아내는 본인 가족의 주식은 쌀밥이 아닌 고기 또는 면이고, 주반찬은 그때그때 다르다고 했다. 


서양식에 가까운 식단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개월간 평생 먹었던 고기에 버금가는 고기를 먹었던 것 같다. 거의 매일매일이 고기, 넓은 의미의 육식이었다. 대신 나만큼은 쌀밥을 아예 안 먹을 수 없으니 소량의 쌀밥을 함께 먹었다. 굉장히 특이하고 특별한 경험, 나의 식문화에 대한 관점은 상당히 바뀌었다. 


이제 독립해 둘만 살아가는 지금, 여전히 나의 아내는 쌀밥을 먹지 않는다. 아니, 쌀밥이 주식은 아니다. 반면, 나는 쌀밥을 주식으로 하는 예전 식습관으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고기는 육식은 나의 영원한 갈망 대상이다. 고기를 먹으면, '정말 잘 먹었다'라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나오고 심지어 내가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 같기도 하다. 고기를 엄청 찾지는 않지만 고기를 끊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고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메디치)은 나를 포함해 모든 비(非)금식자를 위한 책이다. 


육식의 시작, 육식의 신화, 육식의 경향


책은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다시피, 육식을 주체로 놓고 육식에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오히려 부정적에 가까운 생각의 발현을 내보인다. 인류는 왜 육식을 끊을 수 없는지 사실상 육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걸 기정사실화 해놓고, 인류의 육식에의 필연적 욕망을 수백 만 년 전의 과거부터 현재, 미래까지 들여다본다. 


저자는 우리 조상이 250만 년 전에 육식 식단으로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먹잇감을 사냥할 도구가 있었고, 소화시킬 몸이 있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변했을까? 갑작스런 기후변화가 답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강수량이 줄어 식물들은 줄어든 대신, 동물들은 증가했다. 한편, 지금도 초식동물이 가끔 육식을 하는 것처럼 그저 칼로리를 보충하기 위해 육식을 시작했다고도 한다. 


육식은 인류가 사회적 동물인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한다. 식물을 얻는 것보다 고기를 얻는 게 훨씬 더 힘들다는 걸 알고난 후, 육식은 칼로리 보충용이 아닌 권력에의 표상과 힘의 상징이 된 것이다. 육식이 주는 칼로리의 열량이 채식보다 훨씬 더 크다는 단순한 이유도 물론 존재한다. 


이는 비단 구석기시대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라고 한다. 아시아의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고기의 섭취율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선진국=서양=육식'의 등식이 성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권력의 정점에 육식이 있다는 자못 웃기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현실...


최근 들어, 건강을 이유로 채식을 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진 듯한 느낌이다. 한편으론 인권에 버금가는 동물권리에의 이유를 들어 육식을 하지 않는 사람도 많은 것 같고. 고기로 만들어지는 과정이 너무 더럽고 잔인해 먹을 수 없다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정작 주변에서는 찾기 힘들거니와, 나를 포함해 주변 사람들도 육식을 하지 않는 사람을 이상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내 안에, 인류의 안에 250만 년 전에 시작된 고기를 끊지 못하는 DNA가 있다는 것과 상관없이, 지금 인류가 비록 많은 부분에서 진보를 이루었음에도 여전히 채식주의를 보편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는 이상 누구도 고기를 쉽게 끊을 수 없을 것 같다. 


우리가 고기를 끊을 수 없는 이유


미국에 해당하는 이야기일 수 있으나, 책은 우리가 고기를 끊을 수 없는 여러 이유가 더 있다고 말한다. 육류 관련 협회는 육류 생산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육류가 더 많이 소비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일을 하며 수수료로 먹고 사는데, 정부 시책과 맞물려 시행되는 그들의 어마어마한 홍보는 사람들의 인식까지 지배할 정도라고 한다. 그들은 광고는 물론 과학자들을 동원, 학술적으로까지 접근하여 우리의 가슴과 마음 깊숙이까지 육식에의 어느 정도는 만들어진 심리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만들어진 신화'를 차치하고서라도 고기가 주는 직접적이고 '만들어지지 않은 맛'에의 욕망을 인간 누구도 저버릴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감칠맛과 지방의 조합이 환상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건 우리 몸에 내재된, 우리가 고기를 끊을 수 없는 가장 어쩔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문제는, 현재 우리의 건강과 미래 후손의 세상이다. 이런 식의 육식이라면 단적으로, 여전히 심장 질환과 암 질병 발생률에 지대한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지금도 지구에 엄청난 아픔을 초래하는 가축들이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기에 대기 및 수질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안길 것이다. 


저자는 크게 위의 두 이유로 육식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류가 육식을 포기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 길이 너무나 길고 험하다는 걸 잘 알기에, 채식주의자가 되라는 게 아닌 육식을 줄여야 한다는 절충안을 내린 것이다. 매우 적절하고, 매우 마음에 드는 결론이다. 왠만한 사람이라면 '육식을 많이 하면 몸에 좋을 게 없지만 최소한은 섭취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있는지라, 그 인식에 완벽히 부합한다. 


육식을 끊을 수도 없겠지만, 끊을 이유를 잘 모르겠다. 채식주의를 하는 건 자유지만, 채식주의를 강요하고 육식주의자를 혐오하고 배척하는 건 아니지 않나 싶다. 물론, 그 반대의 행위도 말이 되지 않는다. 저자의, '여러 방면에서 본질을 명확히 인식하고, 대립하는 양 면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취합하여, 실현 가능한 절충안을 내는 방법'에 박수를 보내며 지지하고 응원한다. 그리고 그 취지에 공감하며 따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인류의 육식 연대기'라는 이 책의 부제와 다른 또 다른 부제를 붙이고 싶다. '육식을 줄여야 하는 이유'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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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로건 럭키>


영화 <로건 럭키> 포스터. ⓒ스톰픽쳐스코리아



스티븐 소더버그는 20대 때 내놓은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로 선댄스와 칸을 휩쓸며 굴지의 천재감독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후 그는 연출과 각본뿐만 아니라 편집과 촬영과 기획, 그리고 제작에 이르는 영화판 일련의 작업을 거의 모두 섭렵했는데 진정 영화를 즐기는 느낌이랄까. 데뷔 30년이지만 아직 50대 한창의 나이다. 


2000년대 극초반 <에린 브로코비치> <트래픽> <오션스 일레븐>을 잇달아 내놓으며 최전성기이자 지금까지 보건대 마지막 전성기를 맞이했다. 특히 <오션스 일레븐>으로 범죄 전문가들이 한 탕을 계획하고 치밀한 전략 하에 다채로운 기법으로 흥미로운 강탈 범죄를 저지르는 '하이스트 무비'(케이퍼 무비)의 전형을 수립했다. 


2010년대 흥행과 비평에서 나쁘지 않은 작품들을 내놓으며 부활의 날개짓을 펴고 있다.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려는 것인가? 와중에 하이스트 무비 <로건 럭키>가 눈에 띈다. 현대판 하이스트 무비의 전형을 세운 장본인인 만큼 기대가 되는 게 사실이지만, <오션스 일레븐>의 후속편들이 워낙 처참했기에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스티븐 소더버그의 하이스트 무비라면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않나 싶다. 


비(非) 범죄 전문가들의 대규모 범죄


영화 <로건 럭키>의 한 장면. ⓒ스톰픽쳐스코리아



고교 시절 미식 축구 스타였지만 부상으로 다리를 다쳐 지금은 공사장 인부 일하는 지미 로건(채닝 테이텀 분)은 어느 날 갑자기 다리 부상을 이유로 해고를 당한다. 이혼도 한 마당에 살길도 막막하고 할일도 없는 그는 세계 최대 규모 레이싱 대회의 금고를 털 '한탕' 계획을 세운다. 레이싱 경기장 보수 공사 인부로 일하던 중 그 수많은 돈이 어떻게 지하 금고로 모이는지 그 원리를 터득한 덕분이다. 


그는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이라크 파병을 나갔다가 왼쪽 팔꿈치 아래를 잃고 지금은 바텐더로 근근히 생활하는 남동생 클라이드 로건(아담 드라이버)과 미용사로 일하고 있는 여동생 멜리 로건(라일리 코프 분)의 '로건 남매', 그리고 감옥에 있는 일명 폭파 전문가 조 뱅(다니엘 크레이그 분)와 두 남동생들의 '뱅 형제'. 


문제는, 그들 중 누구도 '범죄 전문가'라 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로건 남매는 범죄 전문가는커녕 제대로 된 범죄를 저질러 본 적도 없는 시골 촌뜨기 블루칼라 노동자들이다. 어설프고 허술하기까지 한 그들이 어떻게 세계 최대 규모 레이싱 대회의 금고를 터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자. 


매력적인 소소함, 어설프고 허술함


영화 <로건 럭키>의 한 장면. ⓒ스톰픽쳐스코리아



영화는 기대완 다르게 소소하다. 앞서 말한대로 어설프고 허술하다. 아둥바둥 사는 모습이 범죄를 저지를 때까지 이어지는 느낌이랄까. 그 스스로가 정립한 전형적인 하이스트 무비의 범죄자 같지 않은 이들이 저지르는 깔끔하고 체계적이고 완벽하리만치 믿을만한 행각이 이 영화엔 전혀 나오지 않다시피 한다. 


그 점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는 점이 '기대완 다르다'는 말의 한 꼭지에 해당한다. 전문가 아닌 우리도 이들처럼 어마어마한 강탈을 저지를 수도 있겠다(?) 하는 환상 아닌 환상을 품게 해주는 면도 있겠지만, 그들의 아둥바둥 지리멸렬 좌절과 실패를 겪으면서도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 자체에 연민이 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범죄 행각 자체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비록 꽤나 치밀한 전략을 세웠지만 너무도 쉽게 쉽게 실행에 옮기는 장면들에서는 헛웃음이 나올 뿐이다. 영화 한 편 또는 드라마 한 편 전체를 할애하는 탈옥을 몇 초만에 실현시키지 않나, 수많은 리허설로도 실패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는 금고까지의 초행길을 역시 몇 초만에 실현시키는 것이다. 


반면 영화는 캐릭터들의 개인사에 초점을 맞추는 듯하다. 그들이 그런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연유을 되짚어보는 게 아닌, 그들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 연유를 말이다. 이는 그들이 어설프고 허술하고 소소하기까지 한 이유임과 동시에, 한편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휴머니티와 이어진다. 


트럼프 시대를 향한 이유 있는 항변


영화 <로건 럭키>의 한 장면. ⓒ스톰픽쳐스코리아



자본주의 세상에서 휴머니티란 무엇일까. 반자본주의까진 아니더라도 자본주의에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로건 남매가 금고를 터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누구도 납득할 만한 명분이라는 게 없다. 


몸이 성하지 않다는 이유로, 블루칼라라는 이유로 해고당하고 무시당하는 것이 그들의 솔직한 명분이랄까. 자본주의, 그 핵심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레이싱 대회의 금고를 터는 걸로 세상에 소소한 하이킥을 날리는 것이다. 스티븐 소더버그는 영화 외적으로도 메이저 배급사를 통하지 않는 배급으로 자본주의 세상에 소소한 하이킥을 날렸다. 


영화는, 그래서 스티븐 소더버그의 이유 있는 항변이라 할 수 있다. 어떤 항변이냐, 어디를 향한 항변이냐. 자본주의 세상, 더 파고들면 미국의 현 트럼프 시대다. 그는 통계로도 나와 있듯이 블루칼라의 절대적인 지지를 등에 엎고 그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실상은 어떤가, 영화에서도 단편적으로 볼 수 있듯이 여전히 형편 없는 대우를 받고 있지 않은가. 그중에서도 영화의 배경이 되는 미국 남부 웨스트 버지니아는 최악. 


상당히 노골적인 반 트럼프 어조를 영화 전반에 깔고 있음에도 잘 느끼지 못하는 건, 그 진지할 수 있는 어조를 상쇄시키는 발랄한 어조의 연출과 촬영과 편집 센스 그리고 그동안의 연기톤을 180도 바꾼 다니엘 크레이그를 비롯 배우들의 대체적인 톤 다운 덕분이었겠다. 그런 한편, 만연해 있고 당연시 되는 차별과 혐오의 풍토가 현 시대를 잠식하고 있어 잘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은 서늘한 느낌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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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대학과 권력>


<대학과 권력> 표지 ⓒ휴머니스트



대학 위기론이 팽배하다. 사학 비리는 추악한 대한민국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는 대표적 얼굴마담이 된 지 오래이고, 저출산으로 인한 학령인구 감소는 등록금으로 먹고 사는 사립대학들이 폐교의 수순까지 밟게 하는 폭탄으로 자리매김하기 직전이다. 그야말로 이곳 저곳에서 위기의 촉수를 뻗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대학 위기의 현대적 원인들 즉,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계속된 원인들이 존재한다. 대학이 너무 많아졌다는 것, 대학은 많아졌는데 대학교육 질적 상태는 답보상태라는 것, 취업자 알선소도 모자라 실업자 양성소 소리를 듣게 되었다는 것, 국제화 시대에 발맞춰 세계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


어딜 가나, 누구나 한 마디씩 해봤음직한, 누구한테나 한 마디씩 들어봤음직한 대학 위기의 원인들이다. 와중에 충격적일 수 있는 사실을 전하자면, 위의 '현대적 원인들'이 결코 현대적이지 않다는 것 즉, 우리나라 대학이 생기기 시작한 100여 년 전부터 이미 존재해온 고질적 병폐라는 것을 말이다. 


한편에서는, 한국의 대학이 공공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 수도권과 지방 대학 간의 양극화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 대학 특성화를 구현해야 한다는 것, 대학 자율화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 등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대한민국 대학 역사 100년을 되짚은 책 <대학과 권력>(휴머니스트)은 지금의 대학, 그 위기와 문제의 원인을 찾아 나선다. 저자는 그 원인 중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권력'을 꼽았고 그중에서도 대학권력, 국가권력, 시장권력을 핵심으로 보았다. 권력으로 본 대한민국 대학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반대로 대한민국 대학 역사를 통해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들여다볼 수도 있겠다. 


타율적 권력의 그림자 그리고 대학권력


우리나라 대학은 애초에 자율적이 아닌 타율적으로 생겨나 운영되었다. 근대 고등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이제 시기였다. 서울대학교의 전신이라 할 만한 경성제국대학과 관립 전문학교, 그리고 조선인을 위한 사립 전문학교가 모두 일제의 식민권력의 통제 아래 있었다. 해방이 되고서는 일제 식민권력 대신 미군정이 들어서 미국적 학문을 토대로 미국식 대학 모델을 심었다. 이후 대학은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 가장 미국화된 곳이 되었다. 


이미 70여 년 전, 한국의 대학은 가장 미국화된 곳이었다. 즉,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었다고 무방한대, 작금의 대학 위기 중 하나인 '국제화 시대에 발맞춰 세계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있다'와 정반대의 지점이라는 게 흥미롭다. 한편, 태초의 지점에서부터 자율이 아닌 타율의 그림자가 드리운 건 작금의 대학 개혁 방향인 '자율성 회복'과 맞물리는 대목이라 역시 흥미롭다. 


1950년대 들어 그동안 식민권력에 억눌러 있었던 교육열이 폭발하면서 대학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거기에는 이승만 정부의 방임만이 아닌 부추김, 대학교육 특히 사립대학 재건에 앞장 선 주요 인물들의 대학 안팎 권력 독점 등의 원인이 있었다. 하지만 1950년대가 저물고 1960년대 들어 4.19로 이승만이 물러가면서 대학 또한 크게 변한다. 


대학 위기의 현대적 원인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너무 많은 대학'은 이미 60년 전에 존재하는 대학 위기의 원인 중 하나였다. 또한 대학의 양적 팽창이 대부분 사립대학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점이 현대 대학이 나아가야 할 개혁 방향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대학의 공공성 확보'와 맞닿아 있다는 게 한편 신기하면서도 자못 충격적이다. 사학 비리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나게 한 '대학권력'의 모태는 이미 오래전에 존재했었다. 


국가권력, 그리고 시장권력


1960년대 들어 대학 민주화를 통해 대학 위기를 돌파하려 했었지만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며 무참히 짓밟혔다. 대학권력을 압도하는 국가권력의 손길은 대학의 자율과 자치를 고려하지 않고 개혁과 대학 안정화라는 명목으로 대학 운영 전반에 깊숙이 개입했다. 이는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 1979년까지, 즉 20여 년 동안 계속됐다. 하지만 짧은 서울의 봄이 지나고 1980년대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며 국가권력의 무시무시한 촉수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졌다. 


현대에도 여전한 대학 위기 최대의 원인이자 대학 개혁 최대 기원, 그리고 대학교육 방향 중 가장 첨예한 논란의 주인공인 '대학 자율화'가 가장 침해를 받았던 시기가 1960~80년대다. 필자도 최소한의 의문이 드는 부분이 '대학 공공성 회복'과 '대학 자율화 회복'의 동시 추구 가능성인데, 이 중 한 가지를 추구하면 다른 한 가지를 추구할 수 없을까?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던 것 같다. 아마 극악적 양자택일의 우리나라 역사의 성질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 


1990년대들어 한국 대학은 전에 없는 놀라운 변화를 했다. 양적 팽창에 버금가는 질적 향상은 평가에 따른 선별 지원과 대학 스스로의 개혁으로 확보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전 세계를 휩쓴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의한 시장권력에 포섭되어 갔다. 더 큰 문제는, 국가권력과 대학권력이 바로 이 시장권력의 우산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 세 권력의 공고한 연대는 2010년대에서 2020년대로 넘어가는 바로 지금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다. 대학은 스스로 위기를 극복할 주체가 없다. 


돌아보니, '역사는 반복된다'는 명제가 한국 대학만큼 잘 적용되는 사례도 드문 것 같다. 1950년대가 저물 때 대학은 위기에 몰렸고 여기저기서 '대학망국론'이 등장했고 이에 대학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고 한다. '1950년대'를 '2010년대'로 고쳐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도 제시한 대학 개혁의 방향 중 진정한 '대학 자율화'야말로 한국 대학 위기의 반복된 역사의 가장 큰 이유이자 그 역사의 반복을 그만 끊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다른 위기나 개혁 방향이 그때 그때의 시대와 포섭된 권력에 따라 달라지는 것과는 다르게, 일제시대부터 시작된 한국 대학의 역사를 들여다보아도 공통적으로 진정 이룩할 수 없던 게 '대학 자율화'이기도 하고 말이다. 


2015년 8월 17일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고현철 교수는 교육부가 총장 선출 방식을 직선제 대신 간선제로 바꾸라고 요구한 데 반발해 투쟁하다 부산대 본관 4층 건물에서 투신해 숨졌다. 대학의 자율화와 민주화를 요구한 것인데, 이에 정부는 국립대 총장 선출에 있어서 대학의 자율권을 보장하고 간선제 유도 방식도 폐지하겠다고 말했다. 한 교수의 고귀한 죽음이 던지는 파장이 부디 널리널리 퍼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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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모노노케 히메>로 환경을 생각해보다


<모노노케 히메> 포스터. ⓒ월트 디즈니 코리아



북쪽과 동쪽 사이의 어디쯤 에미시 일족이 사는 마을에 재앙신이 출물한다. 차기 족장 '아시타카'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활을 날려 물리치지만 오른팔에 재앙신의 각인이 새겨져 죽을 운명에 처한다. 마을의 무녀 히이님으로부터 서쪽에서 불길한 일이 일어나고 있고 재앙신의 출몰도 그곳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말을 듣고 아시타카는 서쪽으로 여정을 떠난다. 중간에 만나게 된 지코보, 그는 지코보에게 사정을 털어놓는데 지코보는 그에게 서쪽 끝에 있는 '사슴신'과 신들의 숲 이야기를 해준다. 


한편, 타타라바 마을은 '에보시'의 탁월한 지도 아래 여자들은 철을 생산하고 남자들은 그 철로 쌀을 거래해 오는 등의 체계로 작지만 탄탄하게 꾸려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안정되고 지속적이고 잘 돌아가는 마을을 위해 근처 숲뿐만 아니라 사슴신이 사는 신들의 숲까지 파괴하고자 한다. 아시타카에게 저주를 내린 재앙신도 사실 에보시의 총에 맞아 죽어간 멧돼지신이었던 것이다. 아시타카는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여자들뿐 아니라 나병 환자한테도 차별없이 대하는 마을이 아닌가. 


모노노케 히메 '산'은 들개신과 함께 숲에서 살아가며 인간으로부터 숲을 지키기 위해 타타라바 마을의 에보시를 죽이려 한다. 그녀는 아시타카와도 얽히는데, 아시타카가 그녀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하였거니와 어쨌든 아시타카는 타타라바 마을로 대표되는 다분히 '인간' 편은 아닌 것이다. 물론 산도 인간인 만큼 '자연' 그 자체라고 할 순 없다. 아시타카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꿈꾼다. 과연 그의 바람은 이뤄질까. 


에코니즘과 페미니즘 사이


<모노노케 히메>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코리아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영원히 남을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1997년작 <모노노케 히메>, 일본 현지에서 당대 최고의 흥행과 비평을 거머쥔 명작 중의 명작이다. 자그마치 1984년작인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와 더불어 미야자키 하야오의 에코니즘(자연주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이 작품은 일본 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시대극이다. 


일본 특유의 원령 신화, 일본의 원주민 아이누 신화와 북방계 샤머니즘 신화 등이 혼합된 복합적 일본 신화 체계를 가져다 놓았는데, 그래서 <모노노케 히메>를 통해 일본 신화를 들여다보는 해석 작업도 활발했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를 영화의 중심에 놓는다면, 일본 신화보단 에코니즘이 더 정면에 나와야 하지 않나 싶다. 


한편, 에코니즘과 더불어 영화가 추구하는 큰 틀은 페미니즘이다. 전 세계적으로 미투·위드유 운동이 활발한 와중에 유독 일본에서만 잘 되지 않고 있다지 않은가. 그런 일본의 중세시대에 여자는 그저 남자의 소유물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모습이나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타타라바 마을을 움직이는 핵심 인사 에보시는 물론, 핵심 물품인 철을 만드는 이들 모두 여자이다. 남자들도 물론 그 철을 가지고 쌀로 거래를 해오고 전쟁에도 참여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만, 여자인 에보시가 진두지휘를 하고 여자들도 전쟁에 참여한다. '자연'의 입장에서 본 '인간'을 상징하는 타타라바 마을을 무작정 매도할 수도 무작정 적대시할 수 없게 만든다. 


에코니즘


<모노노케 히메>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코리아



그 와중에, 그 사이에 에코니즘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영화를 통해 에코페미니즘을 통합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영화 속에서 페미니즘을 행하는 인간들이 정작 에코니즘은 적대시하는 것이다. 아시타카는 이 둘의 공존을 홀로 외롭게 외치고 있고 말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에코니즘은 큰 개념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연을 사랑하자' 따위의 단순한 개념도 아니다. 


우선, 자연(신)은 인간의 인간만을 위한 이기심 때문에 터전을 잃었다. 그래서 터전을 다시 찾기 위해 인간과의 전쟁을 이어간다. 설령 그 전쟁이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에 인간도 손놓고 있을 순 없다. 그들도 자신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치른다. 


이 폭력의 순환은 인간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우리네 지구를 보자. 인간이 지구상에 출현하기 전, 아니 인간이 농경혁명으로 정착하여 모든 것을 바꾸기 시작하기 전과 비교해 살 만한 곳이 되었는가? 그렇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터전이 확립되고 인간을 위한 문명이 들어서고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모든 것이 정립되고 있다.


반면,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가. 인간에게 터전을 빼앗겨 왔고 빼앗기고 있으며 빼앗길 예정이다. 수많은 동식물들이 멸종되고 있으며 '자연환경'이라는 말은 옛말, 촌스러운 말이 되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공생? 아니, 전쟁을 하면 공평하겠지만 이건 일방적인 학살 수준이다. 


진정한 에코니즘


<모노노케 히메>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코리아



<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사슴신은 얼핏 인간인 아닌 자연의 편인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그에겐 회생과 죽음의 능력이 공존하는데, 이른바 '대자연'이라 칭할 수 있을 것 같다. 천재지변이 인간에게만 피해를 주는 게 아닌 자연에게도 큰 피해를 주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대자연이 건네는 회생과 죽음의 섭리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답이라 해도 무방하다. 인간과 자연, 각자의 절대적인 사연 때문에 절대 물러설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치라면 이치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논의 따윈 없다. 인정 후에, 함께 살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개념 탑재가 수순인 것이다. 그 자체로, 인간에 의해 시작된 전쟁이기에 인간에게 유리하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렇기에, '자연을 사랑하자' '자연을 원래대로 돌려놓자'는 일차원적인 개념도 안 된다. 그건 다분히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 위주의 생각이다. 여기엔, 총체적이고 통합적인 자연환경의 입장과 개념과 생각이 필요하다. 주체가 '인간' 또는 '자연'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서로 양보할 건 양보하고 함께 할 건 함께해야 한다. 


문제는, 인간은 자연이라는 게 입장이 없고 생각이란 걸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자연의 입장을 추측하고 재단한 뒤 실행에 옮겨버린다.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인간 입장일 뿐이다. 사실 일반적인 에코니즘은 여기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모노노케 히메>는 탁월하다. 


만화로서만 표현할 수 있을 테고, 만화이기에 오히려 유치하지 않게 보일 수 있을 텐데, 인간의 입장과 생각만큼 자연의 입장과 생각을 내보이고 있다. 멧돼지와 들개가 말을 하고 또 신이기도 한, 황당하고 낯설지만 그러하기에 오히려 매우 설득력 있는 진정한 에코니즘의 방증이라 하겠다. 


에코니즘에 대해 말할 땐 더 이상 '우린' 또는 '인간'으로 시작하는 구호를 내지 말자. 물론 그것이 어렵다는 걸 알기에, 거기에 최소한의 의미 부여는 하되 절대적인 의미 부여는 하지 말자. 이 대자연에는 우리 인간만이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자연도 있다. 우선,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인간과 자연의 존재.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공존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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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아이, 토냐>


영화 <아이, 토냐> 포스터. ⓒ누리픽쳐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피겨스케이팅에 관심을 갖고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토냐 하딩(마고 로비 분), 극악한 엄마(앨리슨 제니 분)의 폭력적인 관심과 가르침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반면, 그 때문인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출중한 성적과 함께 성격과 행동의 돌출적이고 폭력적인 끼를 숨기지 못했다. 


토냐는 우연히 만난 제프 길롤리(세바스찬 스탠 분)와 격렬한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한다. 하지만 그는 폭력적이기 짝이 없는 광인이었다. 지옥 같은 엄마와의 일상에서 빠져 나와서 정착한 곳이 또 다른 지옥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들한테서 사랑을 느꼈다. 문제는, 삶을 파괴할 게 분명한 그의 폭력이 끝없이 되풀이 된다는 것이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미국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킬 정도의 출중한 실력은 대중의 사랑을 불러일으킨 반면, 클래식이 아닌 하드코어 음악을 틀고 점잖치 못한 의상을 입고서 무대에 오르는 이 선수를 심사위원들은 고깝게 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미국을 대표하는 선수였고, 1992년 알베르빌과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다.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직전 일어난 '그 사건'은, 그녀로 하여금 더 이상 피겨스케이팅을 타지 못하게 하였고, 그녀에게 '은반 위의 악녀'라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을 부여했으며, 미국 피겨스케이팅계 추락의 빌미를 제공했다. 


미국이 원하는 여성상


영화 <아이, 토냐>의 한 장면. ⓒ누리픽쳐스



영화 <아이, 토냐>는 1990년대 미국을 발칵 뒤집은 사건 중 하나인 '낸시 캐리건 습격 사건'을 주요 키워드이지만 루즈한 톤으로 깐, '토냐 하딩'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거대한 사건에 가려진 토냐의 진짜 삶의 면면들 말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토냐의 모습을 통해 '그대로의 여성'과, 또한 미국과 대중과 미디어의 민낯을 들여다볼 수 있다. 


1980, 90년대 미국은 절제와 통제의 시대로 진입해 있었다. 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집합체는 여러 곳에 손을 뻗었고, 스포츠 종목 중 유독 예술적이고 여성적인 피겨스케이팅은 실력만큼 중요한 아니, 그보다 중요한 외모와 이미지가 순위를 결정하고 대표를 선발했다. 가난해서 '제대로 된' 의상을 입을 수 없었고, 치명적인 환경에서 자라와 '고상할' 수 없었던 토냐 하딩은 부적격자였다. 


그녀의 실력은 미국을 대표하고도 남았지만, 그녀의 이미지는 미국(의 심사위원)이 원하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전보다 훨씬 다양성과 개성이 추구되는 지금이라면 그녀의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원석의 느낌도 충분히 강점이 되고도 남았겠지만, 그때는 더할 나위 없는 특급의 약점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그녀, 그대로의 여성으로 남아 있기 힘들었다. 만들어진 여성, 미국이 원하는 여성상, 보수적인 여성상이어야만 했다. 


토냐 하딩의 삶의 면면


영화 <아이, 토냐>의 한 장면. ⓒ누리픽쳐스



영화는 실화를 기반으로 하며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면서도 블랙 코미디 요소를 섞는 기발함을 발휘했다. 그때 그 시절의 느낌과 캐릭터를 최대한 그대로 가져와 토시 하나 바꾸지 않는 대사를 차용했지만 진지하지 않은 편집과 음악과 여러 영화적 기법을 통해 더 깊은 감정이입을 차단하기도 했다. 그러하기에 시종일관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토냐 하딩의 삶의 면면에 환멸과 냉소를 던지기도 한다. 


반강제적인 통합과 편입에는 필히 반발이 따를 수밖에 없다. 세계 패권 국가로서의 미국이라면 당연히 자기 입맛에 맞는 선수를 국가대표로 내보내려고 했을 터, 출중한 실력과 외모를 자랑하는 문제아 토냐는 골칫덩어리이자 고민덩어리였을 것이다. 그래서 문제 삼는 게 바로 그녀 삶의 면면들이다. 


그녀의 삶은 비극의 연속이다. 비극은 그녀의 모든 것인 피겨스케이팅에 거대한 명과 암을 선사한다. 명암은 미국에 고민을 던지고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은 다시 그녀에게 돌아와 또 다른 비극을 낳는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그녀,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그녀, 그에 대한 고민을 또는 반론을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조심스럽게나마 들어볼 수 있게 되었다. 적나라하게 내보이면서도 빠르고 단편적으로 쓸고 지나가는 듯한 영화의 면면들은 그런 조심스러운 들여다보기의 흔적들이다. 


토냐 하딩이고 싶었던 토냐 하딩


영화 <아이, 토냐>의 한 장면. ⓒ누리픽쳐스



토냐 하딩이 더 이상 피겨스케이팅을 할 수 없게 만든, 그리고 그녀에게 '은반 위의 악녀'라는 낙인을 찍어버린, 그 사건은 엉망진창이다. 하필이면 그 사건의 주인공(피해자) 낸시 캐리건은 토냐의 강력한 라이벌이자 미국을 대표하는, 미국이 원하는 여성상에 거의 완벽히 부합하는, 그야말로 토냐와 정반대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하필이면 그 사건의 또 다른 주인공(가해자)인 괴한이 토냐의 남편과 토냐의 보디가드(라고 주장하는)와 연류되어 있던 게 아닌가. 미디어와 대중이 그런 스캔들과 가십거리를 가만히 놔둘리가 없다. 미디어로서는 그만큼 대중의 이목을 끌만한 사건이 더이상 있을 수가 없고, 대중으로선 그만큼 신나게 열광할 사건이 더이상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토냐 하딩과 낸시 캐리건은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던 미국 피겨스케이팅계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라이벌이 아닌가. 어떤 식으로든 최고의 유명인의 속절없는 추락은 하릴없는 대중, 별 것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대중, 그런 대중에게 입맛 당기는 기삿거리를 찾는 미디어에게 가장 핫한 일이다. 


이 사건을 온전히 토냐 하딩의 불우한 비극의 삶의 연속적인 행태의 정점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미국과 미디어와 대중이 한통속이 되어 토냐 하딩을 지옥으로 이끌어 버렸다고 할 수도, 토냐 하딩의 전 남편과 보디가드가 그녀 모르게 꾸민 범죄의 결과로만 생각할 수도 없다. 진실은,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 어디에서도 정작 '토냐 하딩'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토냐 하딩은 그저 토냐 하딩이었을 뿐이고, 토냐 하딩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것, 피겨스케이팅을 타고 싶었을 것이다. 그저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고, 평범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의 바람을 이해하고 동조하고 도와준 이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었다. 자신조차도 말이다. 그녀는 '은반 위의 악녀'는커녕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고 이용당하고 조작당한 한 여자였다. 단순히 불쌍하다는 말로는 그녀를 설명할 수 없다. 차라리 악녀가 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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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랩 걸>

 

 

<랩 걸> 표지 ⓒ알마


 

'과학책'의 진화가 계속되고 있다. 본래 과학책은 잘 읽히지 않았다. 인류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어렵고 재미없는 과학을 다룬 책이라면 역시 어렵고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래서 누군가가 대중화에 앞장섰다. 칼 세이건, 스티븐 제이 굴드 등이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섰다면, 올리버 색스 등은 의학의 대중화에 앞장섰다고 할 수 있겠다.

 

앞서 언급한 세 명이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에 와서는, 알파고의 출현이나 4차 산업 혁명의 도래 등의 트렌드에 맞춰 과학의 대중화가 상당히 진척된 느낌이다. 그 총체적 접근법은 역시 책이다. '과학책' 말이다. 과학 자체를 대중의 입맛에 맞게 소개하기도 하고, 과학자를 색다르게 대중에게 소개하기도 하며, 때론 그저 과학자가 썼을 뿐 과학과 연결된 게 없는 것 같은 이야기를 건네기도 한다.

 

미국의 저명한 여성 식물학자이자 교수 호프 자런의 <랩 걸>(알마)은 과학자가 썼을 뿐 얼핏 과학과 연결된 게 없는 것 같은 이야기를 중구난방 건네는 책이다. 식물에 대한 다층적이고 다방면인 단편, 종종 드러내는 내외면의 깊숙한 이야기, 그리고 과학자로서 치열하게 사투하는 자전적 에세이까지. 저자는 치밀하게 구성한듯, 마음대로 느슨하게 구성한듯, 크게 세 이야기들을 오가며 식물, 과학, 사랑, 인간을 말한다.

 

식물에서 과학으로

 

저자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나무는 은청가문비라고 한다. 그 나무는 모질고 긴 겨울 내내 초록색을 자랑하며 우뚝 서서 푸른 빛을 발한다. 팔십 년을 넘게 살고는 어느 해 치명적인 실수를 범해 죽고 만다. 때아닌 5월의 폭설 때문이었다. 저자는 그때 비로소 나무가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무는 삶을 살고 있었다. 사람의 삶과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고비를 넘겨 최고의 시간을 누리고 시간에 따라 변화했다. 


나무에게서 과학의 정수를 발견했다. 과학은 가르쳐주었다. 모든 것이 처음 추측하는 것보다 복잡하다는 것, 무엇을 발견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레시피라는 것, 한때 벌어졌거나 존재했지만 이제 존재하지 않는 모든 중요한 것을 주의 깊게 적어두는 것이야말로 망각에 대한 유일한 방어라는 것을.


사람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자라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저자가 과학을 선택한 것은 과학이 저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의 집, 다시 말해 안전함을 느끼는 장소를 저자에게 제공해준 것이 다름 아닌 과학이었다. 저자의 식물을 향한 관심이 곧 저자의 과학에 대한 깨달음과 이해로 나아간 것이다. 그녀는 식물학자가 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 아닌 여자였다. 그녀는 아빠와 같아지기를 절실히 원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극복할 수 없는 큰 산과 같은 엄마의 연장이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대학 생활은 문학 전공으로 시작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과학이야말로 진정 속한 분야라는 것을 깨달았다. 머지 않아 과학계에 만연한 성차별을 받게 될 운명. 


과학계 내 성차별은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성차별은 굉장히 단순하다. 그건 "저 여자가? 그럴 리가."와 같이 지금의 네가 절대 진짜 너일 리 없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고, 그 경험이 축적되어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다. 


인간에서 사랑으로


책은, 인간과 사랑에 대한 심오하지 않은 에세이적 고찰, 그래서 훨씬 마음에 와 닿는 고찰로 나아간다. 거의 1년 365일 실험실에 틀어박혀 생활하는 그녀에게도 평생 친구가 생기고, 또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는다. 평생 친구는 다름 아닌 빌, 함께 실험실을 꾸려가는 동료이기도 하다. 


빌은 오른손 일부가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졸업무도회도 가본 적 없다는 그, 저자와 함께 액슬하이버그 섬에 도착해 연구를 할 때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춤을 추다. 저자는 빌의 바로 앞에 앉아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본다. 빌이 지금 하고 있는 일, 빌이라는 인간, 그 순간의 모든 것을 똑바로 목격하는 증인으로서. 


저자는 야외에서 간단하게 피크닉하는 자리에서 클린트를 만난다. 그들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었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희생하지도 않았다. 사랑은 너무 쉬웠고 달콤했다. 인간으로서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닐까. 머지 않아 저자는 사랑의 결정체, 임신을 한다. 하지만 임신은 그녀의 일생에서 가장 힘든 일이었다. 그녀는 조울증을 앓았는데 당연히 약을 먹을 수 없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녀의 조울증을 설명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었고, 그저 함께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임신 기간 동안 여러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정상적이고 건강한 분만을 했다. 그녀는 아이의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가 될 것을 결심한다. 그게 얼마나 이상한 생각이라는 걸 생각하지 않은 채 그를 사랑할 것이고, 그도 그녀를 사랑할 것이고, 모든 게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훗날 그녀는 아이의 엄마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온다. 


그녀는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걱정했고, 태어난 후에는 그녀의 사랑이 아이가 이해하기에 너무 큰 게 아닐까 걱정한다고 한다. 그리고 비로소 깨닫는다. 아들이야말로 그녀가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기다렸던 기다림의 끝이라는 것, 그 아이는 불가능한 동시에 불가피했다는 것, 누군가의 엄마가 될 단 한 번의 기회가 한 번 그녀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말이다. 


모든 게 과학이고 과학의 눈으로 보면서도 과학은 일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인간은 빛을 향해 자라난다는 점에서 식물과 같지만, 식물은 중대하고도 기초적인 면에서 인간과 같지 않다. 사랑은, "널 사랑해"라는 말을 어떻게 할지는 모르지만 행동으로 어떻게 보여줄지는 아는 것과 같다. 형체가 없어 만질 수는 없지만 항상 함께 있다는 걸 믿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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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기획] 언론인의 모습과 자세를 들여다보는 영화들


언론은 힘이 셉니다. 그 자체로 이 세상 모든 것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언론에게는 특별히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한 통제가 수반되죠. 모든 게 그 가공할 파급력에서 기인하는데, 가장 먼저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은 물론 진실을 추구해야 하고, 공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선행된 후에 누구도 그들이 보도할 권리를 통제할 수 없는 자유의 권리를 얻는 것입니다. 


역사상 수많은 사건사고들이 언론을 통해서 알려졌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건사고들이 그러했었겠죠. 언론의 권리와 의무를 다한 권리라 하겠습니다. 물론 쉽지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실제로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죠. 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에 의해 행해지는 것인지라, 실수도 있었겠거니와 유혹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언론의 소임을 다한 이들이 있습니다. 영화가 그런 '위대한' 이들의 이야기를 그냥 지나칠리 없죠. 기억해야 하고 되새겨야 하고 현재를 반추해야 합니다. 여기 위대한 언론인을 다룬 영화 몇 편을 불러내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다룬 사건사고의 위중함과 심각성보다, 그런 사건사고를 다룬 언론인의 모습과 자세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더 포스트>


영화 <더 포스트> 포스터.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미국을 넘어 전 세계를 뒤흔든 1971년 <워싱턴 포스트>의 '펜타곤 문서' 폭로를 다루었다. 본래 최초 보도는 <뉴욕 타임스>였던 바, <워싱턴 포스트>는 정부에 의해 보도가 금지된 '펜타곤 문서' 폭로를 오랜 고심 끝에 결정한다. 거기엔 톰 행크스가 분한 편집장 벤의 언론인으로서의 자세와 메릴 스트립이 분한 발행인 캐서린의 여성으로서의 성장이 겹친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이를 훌륭히 조합해냈다. 


너무나도 유명한 사건이기에, 그 사건 앞에 충분히 영화의 모든 것이 휩쓸려 버릴 수 있었으나 '언론'과 '여성'이라는 투 트랙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집스럽게 잡아 밀고 나간 모습에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고 싶다. "우리가 보도하지 않으면, 우리가 지고 국민이 지는 겁니다"라는 벤의 캐서린에게 보내는 절규어린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영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포스터. ⓒ워너브라더스



<더 포스트>의 주인공 <워싱턴 포스트>가 다시 한 번 큰 일을 해냈다. 영화의 말미에도 잠깐 모습을 드러내는데, 1972년 6월 닉슨 대통령의 재임을 위해 공작반이 워싱턴에 위치한 워터게이트 빌딩에 잡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가 발각되어 잡힌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루었다. 


자그마치 더스틴 호프만이 분한 칼 번스타인 기자와 로버트 레드포드가 분한 밥 우드워드 기자는 그야말로 발로 뛰고 눈으로 보고 손과 귀와 입으로 전화한다. 영화는 이 아날로그적이기 짝이 없어 루즈하기 쉬운 모습을 지극히 다큐멘터리적으로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을 유지했다. 


단순히 언론인으로서의 기자만 보여준 게 아닌, 정치적 역학관계도 여과없이 보여줬기 때문이 아닐까. 엄청난 사건에 뛰어든 두 기자의 치열한 언론현장과 더불어 영화적인 흥미의 맥락까지 살려낸 수작 중 수작이라 하겠다. 



<굿나잇 앤 굿럭>


영화 <굿나잇 앤 굿럭> 포스터. ⓒ유레카픽쳐스



1950년대 미국을 광풍으로 몰아넣은 매카시즘. 위스콘신 주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반공'을 기치로 각계 각층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 색출에 뛰어들어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고발 열풍까지 이어진 것이다. 극에 달한 열풍은 급기야 공산주의와는 관련 없는 무고한 사람들까지 몰아가지만 그와 맞서려는 이는 감히 없었다. 


당시 메이저 방송사 중 하나인 CBS의 명성 있는 앵커 에드워드 R. 머로와 프로듀서 프레드 프렌들리는 'SEE IT NOW'라는 정치 시사 다큐멘터리로 뜨거운 이슈를 던져 논란을 일으켰다. 여지없이 매카시에게도 정면으로 도전한 그들, 그야말로 공산주의자로 몰려 인생의 말로로 치달을 수도 있을 위협을 무릅쓴 것이다. 


언론인이라 해도, 언론인의 자세가 진실을 추구하고 알리고 관철시키는 것이라 해도, 모두가 그것을 안다고 해도, 이런 직접적이고 광할한 위협 앞에선 그것이 당연하다고, 무조건 해야 한다고 말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언론'은 힘이 쎄다는 것, '진실'은 더욱 힘이 쎄다는 걸 실제로 보여준 단적인 예다. 


"TV는 가르치고, 계몽하고,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허나, 그렇게 되려면 인간이 그런 목적으로 사용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이 없는 한 TV는 바보 상자로 전락하겠죠. 좋은 밤 되시고, 행복하십시오."



<스포트라이트>

 

영화 <스포트라이트> 포스터. ⓒ팝엔터테인먼트



가톨릭 성직자 아동 성추행 사건 중 대표(?)로 뽑히는 '보스턴 가톨릭 성직자 아동 성추행 스캔들'의 <보스턴 글로브> 스포트라이트 팀의 폭로 실화를 다루었다. 사건도 사건이거니와 폭로도 폭로였다.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사건의 폭로는 참으로 힘든 것이다. 만류 당하고 저지 당하고 협박 당하고 난항을 겪는다. 


영화는 그런 와중에 사건 자체와 폭로에 집중하기보다 언론인의 자세에 집중한다. 이미 피해자 중 한 명은 오래전부터 계속 알리고 제보해왔지만, 언론에서는 다루지 않았고 다루더라도 지극히 관행적으로 다뤘을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그야말로 '이런 사건을 알리지 않으면 언론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런 사건을 언론이 알리지 않으면 누가 알릴까?'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엔딩 크레딧 전 '버나드 로 추기경은 사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가톨릭의 최상단 교구로 부임되어 성직자 생활을 계속했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 영화는 언론의 화끈한 승리를 보여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언론은 진실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한다. 



<트루스>


영화 <트루스> 포스터. ⓒ라이크 콘텐츠



2004년 11월경, CBS 시사 고발 프로그램 '60분'은 큰 결정을 한다. 훗날 '래더 게이트'라 불리는, 부시 대통령 병역비리 보도인데 큰 사건인 만큼 철저하고 끈질기게 조사하고 추적했고 내부 조사단에 맞서 결국 TV 보도에 성공한다. 하지만 곧 오보 의혹을 받으며 남은 건 피나는 가시밭길이었다. 


영화는 승리한 언론인의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다. 언론인에게 있어 승리, 즉 진실을 보도하는 데 실패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이 너무나도 힘들고 처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진실'이라는 게 때론 얼마나 주관적인지 아니,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성찰도 가히 어렵고 힘들다. 


이 어마어마한 사건은 여전히 미궁 속에 있다. 반면 그 사건을 맡은 60분 팀은 와해된다. 과정에서 명백한 실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실수를 실수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수를 의도로 읽어, 언론인으로서 올바른 자세를 견지했던 기자를 다른 층위로 공격했다는 데 있다. 진실 추구는 언제나 환영하고 응원한다. 다만, 그 과정과 결과가 추구를 뒷받침하지 못한다면 모든 게 허사가 되지 않는가. 모든 것에 힘을 실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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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제주 4.3 사건 70주년을 기해서


영화 <지슬> 포스터. ⓒ영화사 진진



올해가 '제주 4.3 사건' 70주년이다. 1948년 제주도 각지에서 남로당을 주축으로 한 무장대가 남한 단독 정부 수립 반대와 조국 통일, 완전한 민족해방 그리고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 기치를 내걸고 봉기를 일으켰다. 이는 5.10 총선거까지 이어졌는데, 제주도는 5.10 총선거를 거부한 유일한 지역이 되었다. 


선거 이후 제주도에서의 문경과 무장대의 대립은 더욱 첨예해진다. 같은 해 8월 15일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되고 제주도에 대한 강경 진압 수위를 높여간다. 제주도 근해에 소련 선박 또는 잠수함이 출현했다는 소문을 조작하여 대대적인 토벌전이 준비되는 것이다. 10월 "해안선 5km 이외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내리고, 11월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곧 '초토화작전'이라 불리는 진압이 시작된다. 


잠정적으로 1954년 9월에 끝이 나는 이 사건은, 보도연맹 학살 사건과 더불어 대한민국 정부가 벌인 최악의 자국 민간인 대량 학살 사건이자 제주도 최대 최악의 비극이라 할 만하다. 우리 모두 이 사건의 진실을, 이 사건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야 하며, 끊임없이 불러일으켜야 한다. 거기서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왜 민간인이 학살을 당해야 했던가. 이제 와서 우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하다


영화 <지슬>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 2>는 5년 전에 개봉한,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1948년 10월에 행해진 '섬 해안선 5km 밖인 중산간지역의 모든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고 무조건 사살하라'는 명령과 계엄령 선포로 시작된 '초토화작전'으로 도망쳐 산으로 피신한 사람들과 계엄군 이야기를 다룬다. 


마을 사람들은 왜 도망가야 하는지 모른 채 어디로 도망가야 하는지는 잘 안다. 불과 몇 년 전에 끝이 난 일제강점기 때에도 무수한 위협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도망을 다녔고 무수한 죽음을 뒤로 한 채 살아남은 그들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속해 있는 나라의 정부로부터의 위협은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산 기슭의 아무도 모를 굴 속으로 피신한 마을 사람들은 내일 모레 곧 나갈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이 조금만 참자고 서로를 다독인다. 그러며 평소 정겹고 살갑게 나누던 이야기를 이어가고 도망나올 때 가지고 온 지실(감자)을 사이좋게 나눠먹는다. 또 누군가는 마을로 내려가야 한다는데, 기르고 있는 돼지들에게 밥을 주어야 하고 편찮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와야 하며 어디로 간지 모를 순덕이를 데리고 와야 한다.


한편, 계엄군들에게서도 인간군상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상사란 놈은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중사란 놈은 매일 칼을 갈며 돌아가신 어머니의 복수랍시고 빨갱이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상병이란 놈은 상사의 말 한 마디에 아무렇지도 않게 민간인을 죽이고 후임들에게 죽기 싫으면 폭도를 잡아 죽이라고 한다. 


와중에 일병 한 놈은 자신들이 여기 와 있는 건 폭도 때문이 아니고 명령 때문이라며, 자신들이 잡아 죽이는 이들은 폭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들이 민간인이라는 걸 이성과 감성의 개념으로 직시하고 있다. 신병 한 놈도 이 일병의 생각에 동조하고 있는 것 같다. 


웰메이드 작품 <지슬>


영화 <지슬>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영화 <지슬>은 제주 4.3 사건이라는, 다른 한국 근현대사의 수많은 비극들보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 있지 않은 비극을 다룬다는 영화 외적인 요소보다, 너무도 잘 만들어진 웰메이드 작품으로의 영화 내적인 요소로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그런 작업이 선행되고 나면 영화를 보는 눈에, 영화를 보는 생각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전체적으로 씬이 많지 않다. 한 씬마다 롱테이크를 쓰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대부분 마을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데 할애한다. 영화적 기법을 영화의 주제와 조화시키는 형태라고 보는데, 거대 비극 속에서도 인간성을 져버리지 않고 '유머(humor)'를 발산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유머는 나아가 영화에서 종종 묻어나오는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와 장면에 활기를 불러일으킨다. 그건 다시 영화적 기법으로 이어져 궁극의 '미장센'이 탄생한다. 영화 전체가 흑백으로 처리되는데, 그래서 롱테이크와 함께 정적인 구도가 더욱 눈에 띄고 빛을 발한다.


구도는 장면의 자체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계엄군 사이의, '인간'과 '비인간'의 구도로까지 우리 앞에 나타나는데, 거기에 차라리 이데올로기 대립과 정부에 의한 합법적이고 합리적이기라도 한 명령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다. 거기엔 오로지 광기만 있을 뿐이다. 광기에 대응하는 건 광기도 총도 무력함도 아닌 유머 뿐이다. 그리고 '지슬' 즉, 감자. 


이해할 수 없는 사건, '기억의 전쟁'을 이어가다


영화 <지슬>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한라산 일대에 잠복한 350여 명의 무장대를 소탕하기 위해 제주도 중간산 마을 초토화 명령을 내렸다는, 믿기 힘든 사실은 최대치의 이성을 동원해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 없다. 타국과의 전쟁에 임해서도 민간인 피해는 절대적으로 없게끔 하는 게 당연한 것인데, 자국 민간인 학살을 어찌 대놓고 명령할 수 있는지 말이다. 


경제적으로만 보았을 때 경제 주체가 되는 사람들 수의 하락은 국가에 불이익을 가져오지 않는가. 정치적으로만 보았을 때도 제주도에만 악독한 짓을 저지르는 건 역시 국가에 불이익을 가져오지 않는가. 군사적으로만 보았을 때도 그 멀리 있는 제주도로까지 군사를 파견해 그 눈 쌓인 산을 포위하고 힘겹게 소탕작전을, 그것도 민간인을 상대로 펼치는 건 너무도 쓸데 없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인지상정의 개념으로는 백 번 천 번 만 번을 생각해봐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이 사건을 계산적으로만 생각해봐도 마찬가지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그런 사건을 대함에 있어, 이제와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왜곡되지 않고 억지 숨김을 당하지 않은 기억들을 후세에 이어주는 것밖에 없다. 


70년 전 그때 그곳의 기억을 온전히 가진 이들이 머지 않아 이 세상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이 곳은 이데올로기라는 미명 하에 민간인 학살의 주체를 옹호하고 그들 역시 빨갱이 폭도 분자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들은 존재할 것이다. 


'기억과의 싸움'이라고 했던가. 이 싸움은 단순히 네 편, 내 편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진실의 문제이고, 진실을 전달하고 알리는 문제이고, 진실을 간직하는 문제이다. 진실 앞에서 모두 평등하다고 하지만, 그 진실 또한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영원히 그 자리 그대로를 유지할 수 없을지도 모를 문제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싸움을 영원할 것이다. 올바름을 전달하는 이들이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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