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래리 플린트>


미국의 대표적 포르노 잡지 창간인이자 발행인 '래리 플린트'의 투쟁을 담은 영화 <래리 플린트>. ⓒ소니픽처스



1950년대 지긋지긋한 어린 시절을 보낸 래리 플린트(우디 해럴슨 분)와 지미 플린트 형제, 정직하게 돈을 벌 거라는 그들의 다짐은 20년 후 실현된다. 래리는 스트립바 허슬러 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곧잘 되는 것 같지만 손님들이 따분해 하는 게 느껴진다. 


어느 날, 앳된 신참내기가 다른 이들을 훨씬 능가하는 섹시미를 풍기며 래리의 눈에 띈다. 그녀는 엘시아(코트니 러브 분), 래리는 그녀의 나체사진을 이용해 화끈한 홍보물을 만든다. 그의 생각은 적중,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급기야 '플레이보이'를 능가하는 포르노잡지 '허슬러' 월간지를 창간해 전국적 홍보를 시작한다. 


'허슬러'는 그의 기나긴 투쟁, 대박으로 가는 길, 한 시대를 상징하는 삶의 시작이었다. 그는 '음란물 간행 및 배포죄'로 체포되어 수많은 재판을 받고, 단숨에 백만장자 반열에 올라 어릴 적 꿈을 이루었으며, 그 어떤 상황에서도 수정헌법 제1조 '표현의 자유'를 최우선에 놓고 외쳐 결국 승리를 따내 시대정신 그 자체가 되었다. 


그의 곁에는, 그의 삶의 지론에 반하는 평생 베필 엘시아와 그가 발행하는 허슬러 잡지는 싫어하지만 그가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에는 모든 걸 걸고 찬성하는 변호사 앨런 아이삭맨(에드워드 노튼 분)이 있었다. 독특하기 짝이 없는 래리 플린트의 삶, 그는 여전한 기행으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거장 감독의 지루하지 않은 다큐멘터리


거장 감독 '밀로스 포만'은 기구한 인물의 삶을 조명해왔다. <래리 플린트>도 그 일환, 지루하지 않은 다큐멘터리다. ⓒ소니픽처스



영화 <래리 플린트>는 1996년 작으로 베를린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했다. 즉, 당대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는 말인데, 이 작품을 연출한 이는 다름 아닌 '밀로스 포만'으로 그 유명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아마데우스>를 만든 거장이다. 그의 명작들은 하나 같이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특징을 갖는다. 


<래리 플린트>는 분명 다분히 다큐멘터리적이다. '허슬러' 창간인 래리 플린트의 한 시대를 거의 그대로 가져와, 여전히 재단하기 쉽지 않은 '표현의 자유' 논쟁 한 가운데에 놓는다. 하지만 우린 래리 플린트만 따라가면 되기에, 아니 그가 가진 파워풀한 에너지에 끌려갈 수밖에 없기에 지루함이나 어려움, 부담감은 없다시피하다. 


더불어, 래리 플린트의 삶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맥머피, <아마데우스>의 모차르트처럼 기구하거니와 동정 혹은 공감가는 부분이 많다. 그는 분명 많은 이들이 싫어하는 방식으로 부를 쌓은 역겨운 자본주의의 상징이자 표상과도 같지만, 어느 극렬보수주의자의 총탄에 의해 하반신 불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후에도 굴하지 않고 더더욱 극렬하게, 신념적으로 또는 의도적으로 반보수 깃발을 들고 투쟁에 들어간다. 그의 뒤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막대한 부가 버티고 있었다. 그 다음이 표현의 자유를 명시한 수정헌법 1조와 진보가 있었다. 영화가 극적인 건 바로 그가 가진 부와 그로 대변되는 진보의 알쏭달쏭하고 간당간당한 동침이다. 


지극히 논쟁적인 주제, 표현의 자유


누구도 절대 피해갈 수 없는 논쟁적 주제, 표현의 자유. 이 영화가 정면으로 다루는 주제다. ⓒ소니픽처스



표현의 자유, 지극히 논쟁적인 주제이고 함부로 재단하기 힘든 주제이며 조금만 생각해도 머리가 아프고 깊숙이 생각할수록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은 주제이다. 그에, 이 영화는, 이 래리 플린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며 그 어떤 권리보다 우선적으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그 의견이 터무니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말도 안 되는 악의적 모함이라도 가능하다. 심지어 허위 사실을 유포한 것이라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 영화가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 논쟁의 첫 번째 핵심이 거기에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악의적 모함이 죄가 아닌가?


래리 플린트는 첫 번째 재판에서 승리한 후 어느 날 '허슬러'에 신망 받는 원리주의 기독교 목사 제리 포웰이 어린 시절 엄마와 근친상간을 했다는 내용의 만화 광고를 실어 버린 것이다. 이는 가히 그 선정적임으로 부수를 늘리려는 전략과 함께 대놓고 보수와 한판 붙으려는 심산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포장을 정말 잘하는 사람인 것 같다. 


이런 짓을 당하고 '허허' 웃으며 지나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100% 완벽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지 않는 입장으로, 표현의 정도를 따지고 최소한의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유야말로 민주주의와 진보의 제1원칙이라지만, 이 또한 자칫 원칙을 지키기 위한 원칙이라는 보수적 프레임이 아닐까?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래리 플린트


뭐니뭐니해도 래리 플린트라는 캐릭터에 호감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소니픽처스



그렇지만, 우리는 래리 플린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앞뒤 없고 경계 없는 트릭스터(trickster) 기질로 말미암은 통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이 생각하기 힘들고 행동하기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일 텐데, 한 단계 더 들어간 논쟁에서의 호불호 또는 가불가를 떠나 그 자체로 '호(好)'임에 분명하다. 


그건 비단 래리 플린트뿐만 아니라 이 사건과 투쟁과 재판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하나의 예능 '쇼'를 지켜보듯 흥미롭게, 그러나 나와 이 사회, 이 나라와 큰 관련이 있는 만큼 응원도 하며 지켜보게 된다. 그건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과 신념과는 별개로, 한 인간의 거대 다수를 상대하는 다부진 모습이 아닌가. 


그가 지극히 순수한 전사(戰士)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별이 아닌가 싶다. 그는 모든 걸 남김없이 드러내고 맞붙었지 않나. 반면 '댓글부대'를 운영하고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조직적으로 허위를 유포하고 사실을 은폐하고 여론을 조작하는 등 드러내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표현의 자유'를 이용한 건 완벽한 범죄다. 


래리 플린트는 '잘 못'했다. 그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도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의 비상식적이고 막무가내, 안하무인 행동으로 물의를 빚는다. 하지만 그가 '잘못'한 건 아니다. 그는 '표현의 자유'라는 지극히 이치에 맞는 주장만 오로지 했을 뿐이다. 그가 허용한 범위의 표현의 자유는 보장받을 수 있었다. 다만, 자유라는 이름 하에 짓밟힐 수 있는 다양한 권리들의 총합이 한계를 넘었다고 판단할 여지가 있는 것들에 대해선 또 다른 견해와 사례, 논쟁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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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미스 프레지던트>


평범한 '박사모'를 들여다본다. ⓒ인디플러그



어릴 때부터 부모님 세대에게 옛날 얘기를 자주 들어왔다. 당신들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그보다 살 만해졌지만 엄청난 고생을 했던 시절의 이야기들을. 후자의 끝은 박정희 또는 전두환이었던 것 같다. 그들의 이름을 대며 그들을 추모하지도 추앙하지도 않았지만, 흠모의 기운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또 하나 명백했던 건, 모두 평범하다는 것. 


작년 이맘때 축제 같은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 광화문에 갔었다. 한번은 너무 일찍 도착해 시청 쪽으로 가게 되었는데 뜻하지 않게 어르신들의 행진에 휩쓸릴 뻔했다. 박사모 집회였던 것 같은데, 어느 어르신께서 아내와 나에게 박근혜 홍보를 하는 것이었다. 우린 당황했지만 그분은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그분은 매우 평범해 보였다. 


김재규가 쏜 총탄에 박정희가 쓰러진 10월 26일에 개봉해 시작부터 모종의 의미부여를 행한 다큐멘터리 영화 <미스 프레지던트>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박사모 회원 세 명을 중심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누군가는 알고 싶기는커녕 쳐다보기도 싫은 그들의 이야기, 하지만 세상이 진정 바뀌고자 한다면 알아야 하는 그들의 이야기. 


박정희와 육영수를 영원한 은인으로 모시는 그들


평범한 그들은 박정희와 육영수를 평생의 은인으로 모신다. ⓒ인디플러그



그들은 청주에 사는 조육형 씨와 울산에 사는 김종효, 최순옥 씨 부부다. 조육형 씨는 매일 아침 의관을 정제하고 박정희 사진에 절을 올리며 국민교육헌장을 외운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가난을 철퇴하여 지금에 이를 수 없었다는 생각, 자신으로 하여금 새마을운동에 앞장서 가난 철퇴 선봉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해준 고마움, 박정희를 향한 감사는 당연한 것이다. 인간의 도리다. 


김종효, 최순옥 씨 부부도 박정희를 향한 마음이 조육형 씨와 같다. 배고픔을 해결해준 고마운 분, 인간답게 살게해준 감사한 분. 육영수를 향한 마음도 이에 못지 않다. 천사같은 모습에 천사같은 마음씨를 지닌 그녀의, 천사같은 행동들은 그때 그 시절을 향한 그리움 그 자체다. 총탄에 쓰러진 두 분을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나온다. 누가 뭐라 하든 박정희와 육영수는 마음속 영원한 은인이다. 


그들에게 박정희와 육영수의 딸 박근혜는 한 가족이나 다름 없다. 가족이라면 그 어떤 일을 저질러도 편이 되어줄 수 있거니와 편이 되어야 한다는 정서의 일환으로, 그들은 무조건적으로 박근혜를 편든다. 거기에 어떤 고뇌나 갈등도 없다. 그건 일종의 종교, 그들은 박정희와 육영수는 숭배의 대상, 박근혜는 한가족이자 동정의 대상이다. 


미스 프레지던트. myth, mis, miss


제목 <미스 프레지던트>는, 박정희 신화와 잘못한 나쁜 대통령 박정희, 그리고 박정희를 그리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디플러그



박정희는 한국근현대사의 절대적 인물이다. 어느 누구도 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로도 아주 오랜 시간 그 그늘이 한국에 드리우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그는 신화적(myth) 대통령이었다. 영화가 제목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의 첫 번째가 아닐까 싶다. 박정희 신화는 그가 죽은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린 끊임없이 그 신화를 파헤쳐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 수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우상이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잘못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그는 분명 잘못한(mis) 대통령이었다. 그의 후광을 업고 당선되었던 박근혜, 수많은 불법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치명적으로 배신한, 잘못한(mis) 대통령이었다. 영화가 제목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의 두 번째다. 그들은 나쁜(mis) 대통령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영화의 주인공들은 박정희와 육영수를 그리워(miss)한다. 박근혜가 탄핵을 당해 대통령직에서 끌어내려지고 구속 수감 중임에도 그들은 박정희와 육영수를 향한 그리움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를 향한 마음도 변치 않을 것이다. 그들을 향한 마음이 변한다는 건, 곧 자신들의 삶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들이 박정희와 육영수를 숭배하고 그들과 그 시대를 그리워하고 잘못된 대통령을 뽑아 잘못을 저질러도 아랑곳하지 않는 건, 모두 자신들의 삶을 긍정하려는 것이다. 그들을 진정 숭배한다기보다 그 험난한 시절을 헤쳐나온 자신들의 업적을 지켜내려는 것이다.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세대들도, 그들의 업적을 인정하고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은 기울여야 한다.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의 의미


아무 개입없이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인디플러그



영화엔 어떤 입장도 없어 보인다. 감독이 <트루맛쇼> <MB의 추억> <쿼바디스>를 연출해 풍자의 끝을 보여준 김재환 감독이기에 상당히 의아하다. 감독이 보기에 이 영화 <미스 프레지던트>의 주인공들은 풍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동안 그가 풍자의 대상으로 택한 이들은 미디어, 현직 대통령, 교회였다. 막강한 힘을 가진 그들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판단했기에 풍자를 했던 게 아닐까. 


반면, 조육형 씨와 김종효, 최순옥 씨 부부는 평범한 일반인들이다. 물론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모여 역사를 바꾸는 거대한 물줄기를 형성할 수 있겠지만, 미디어, 대통령, 교회 등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로 소명을 다하려 했던 것일 테다. 다만, 앞서 내놓았던 작품들과는 다른 차원의 논란이 예상된다. 


힘있는 자들을 향한 명백한 풍자는, 힘있는 자들을 편들려는 이 또는 당사자들에게 몰매를 맞을 우려가 있다. 그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예견된 수순이다. 반면, 이 영화처럼 명백히 잘못을 저지른 힘있는 자들을 편들려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저 듣는 행위는 자못 이해가 안 되는 행위로 비춰질 수 있는 것이다. 그 어느 쪽에서도 환영을 못받거니와 모두에게 지탄을 받을 게 자명하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잘 알 것 같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을 이해하기에 앞서 그들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속깊이 들어보고 들여다봄으로써 거대한 통합의 물꼬를 트려는 의도. 그 어느 때보다 갈등의 골이 깊어진 한국을 위해 한몸 희생한(?) 김재환 감독. 그렇지만, 이 영화 하나로 그 갈등의 골이 얕아지기는커녕 더 깊어질 수도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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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


소설 <나를 보내지 마> 표지 ⓒ민음사



많은 소설을 읽다 보면, '이건 진짜다' 하고 감탄하고 가슴 속에 깊숙이 저장시키는 작품이 있다. 그런 소설은 언젠가 반드시 다시 읽게 되어 있는데, 나의 영혼이 뒤바뀌거나 몸에서 나가버리지 않는 이상 한 번 영혼을 건드린 작품은 앞으로도 더욱 거대한 무엇을 선사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부끄럽지만, 얼마 전 발표한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그 이름을 처음 듣게 된 가즈오 이시구로의 2005년작 <나를 보내지 마>는 이제야 나에게 그런 작품, 나의 영혼을 건드렸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거대한 흔적을 남길 게 분명한 작품이 되었다. 그 우아하고 세련된 문체와 분위기, 압도적이기까지 한 세밀한 심리묘사는 이전까진 느끼지 못한 그것이었다. 


현실을 기반으로 하되 분명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이야기는 분명 SF적 요소가 다분한 성장 소설로 분류할 만하다. 거기엔 스펙터클한 사건이나 사상 초유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작품에서 참으로 많은 걸 느끼고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주는 여운에 한동안 잠식당할 게 분명하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비인간 존재들


'헤일셤'이라는 기숙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여느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과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당연히 학교도 별다른 게 없다. 우리가 보기엔 그곳은 지극히 평범하다. 그런데 사실 그들의 정체는 인간이 아닌 클론, 인간에게 장기이식을 하는 목적으로 복제되어 태어나 살아가는 존재다. 헤일셤은 클론만을 위한 학교인 것이다. 


지금, 캐시는 그곳 헤일셤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코티지에서 간병사 교육을 받은 후 회복 센터에서 간병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가 간병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장기이식을 한 클론으로, 그녀는 학창 시절 가장 친하게 진했던 루스와 토미를 간호하고 또 여지 없이 떠나보낸다. 그녀도 결국 장기이식 후 죽음을 맞게 될 운명이다. 


소설은 캐시의 지금과 캐시가 회상하는 헤일셤, 코티지, 회복 센터 간병사 시절을 오간다. 그녀와 함께 한 이들은 그녀가 간병하고 또 떠나보낸 루스와 토미다. 그들은 함께 클론으로선 절대 얻지 못할 평범한 생활에서 기인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의혹들로 힘들어하고 괴로워하고 체념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아간다, 살아간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지만 참으로 인간적인 울림을 준다...


그들이, 클론들이 인간적으로 보일수록 인간적인 울림을 줄수록 미안하고 부끄럽고 슬픈, 복잡하기 그지없는 마음이다. 그들은 절대 바꿀 수 없는 정해진 길, 죽음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인간의 영원한 생을 위해 자신을 내주어야 할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소설로만 볼 수 있는 완전히 다른 존재의 삶을 엿본다. 그들은, 아름답게 슬프고 슬프게 아름다운, 너무나도 인간적인 비인간 존재다. 


정녕 특별한 소설


우리는 인간이 만들어 낸 존재에 관한 작품을 무수히 봐왔다. 그 작품들에서 그들은 여지없이 다양한 형태의 존재부정, 현실부정을 통해 일종의 혁명을 일으키고자 한다. <바이센테니얼 맨>에서는 인간이 되려 하고, <아일랜드>에서는 탈출을 하려 하는 게 그 대표적 모양새다. 


하지만, 그런 존재 부각의 모양새는 오히려 그들의 존재 주체의 측면에 소홀하기 쉽다. 그들은 거대 담론과 논쟁의 소모품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들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반면, 가즈오 이시구로가 그려내는 <나를 보내지 마> 속 클론들의 삶은 다른 무엇의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충분히 격렬한 논쟁의 한 담론을 도출해낼 수 있으면서도 그런 방향성을 견지 하지 않고 다분히 안으로 안으로 천착함으로써 궁극적인 성찰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는 클론의 시선을 통해 소외된 모든 존재, 보이지 않는 모든 존재, 그리고 나만이 들여다볼 수 있는 나라는 존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무얼까 생각해본다, 아니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인간을 위해, 인간이 만든 존재이니까. 그들을 그들의 손이 아닌 인간의 손에 맡길 의무가 인간에게 있고, 그들을 신의 손에 맡길 권리는 인간에게 없다. 그런데, 그들에게 평범한 삶을 줄 수 있는 방법도 능력도 없다. 


그들에게 '학창시절'의 추억을 준 헤일셤의 존재는 그래서 특별하다. 우리가 그들의 학창시절을 '성장'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 작가의 능력 또한 특별하다. 이 소설로 조금은 세상을 '다르게' 사유할 수 있다면, 우리 또한 특별할 것이다. 특별한 존재이지만 평범함을 소원하는 클론들도 평범하기에 가능할 수 있는 특별함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보내지 마>는 정녕 특별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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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최동훈 감독의 <타짜>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감독과는 다른 스타일로 한국 영화를 할리우드에 가깝게 한 최동훈 감독의 정점 <타짜>. ⓒCJ엔터테인먼트



2004년 <범죄의 재구성>으로 혜성같이 등장해 스타감독의 반열에 올라선 최동훈 감독. 데뷔 13년이 된 현재까지 불과 5편의 작품밖에 내놓지 않았지만 단 한 편도 흥행에서 고배를 마시지 않았다. 더욱이 최근 내놓은 두 편 <도둑들>과 <암살>이 1000만 명을 넘으며 윤제균 감독과 더불어 현재까지 유이한 2편의 1000만 이상 관객 동원 감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야구로 치면 홈런왕과 장타율 1위의 최강 거포다. 


그 흥행 이상 가는, 아니 버금 가는 작품들이었을까?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이 던진 웰메이드 충격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세련'된 영화라는 게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게 아닌가 싶다. 감히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감독과는 다른 스타일로 한국 영화가 할리우드에 가까워졌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공교롭게도 한국영화 흥행에 새역사를 쓴 최근 두 작품이 그의 역량을 가장 집약시켰음에도 오히려 그의 역량이 퇴보하고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게끔 한다. '최동훈 스타일'은 확립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각인되었지만, 사실 데뷔작과 두 번째 작품인 <타짜>에서 이미 확립되어 있었기에 진정 긍정적 진보가 될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최동훈의 인생작이자 정점은 <타짜>이다. 


타짜 인생


도박판에서 모든 걸 잃고 나서 타짜로의 길에 들어선 고니. 그에게 타짜 인생은 무엇인가. ⓒCJ엔터테인먼트



허영만·김세영 원작, 전설의 만화 <타짜>의 존재에 최동훈 감독이 직접 각본까지 진행해 안 봐도 100% 충만한 기대감이 용솟음친다. 가구공장에서 일하며 그런저런 인생을 살아가는 고니(조승우 분)는 우연히 공장 한 편에 차려진 도박판에 낀다. 3년 모은 돈을 한 번에 날리고도 모자라 누나의 이혼 위자료도 모두 날려먹는다. 뒤늦게 모두 타짜들의 짜고 친 판이었다는 걸 알고 그 일행을 찾아 전국을 헤맨다. 


더이상 잃을 게 없는 고니, 어느 도박판에서 모든 걸 잃고 여지 없이 깽판을 치고 있던 와중 전국 최고의 타짜 평경장(백윤식 분) 눈에 띈다. 고니는 득달같이 달려가 제자로 받아들일 것을 부탁하고 타짜로의 길에 들어선다. 지방원정 중 알게된 설계자 정마담(김혜수 분), 그녀에게로 향하는 욕망과 그녀가 내뿜는 욕망에 끌려 평경장을 떠나 그녀와 함께 하게 된 고니다. 잘나가는 그들, 하지만 경찰의 단속을 피할 순 없다. 


이번에는 경찰 단속을 피하던 와중 만나게 된 소시민적 타짜 고광렬(유해진 분)과 파트너가 되어 전국을 유랑하는 고니, 우연히 술집에서 만나게 된 화란과 안정적인 삶을 꿈꾸지만 정마담이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정마담 뿐이랴? 그를 도박의 길로 들어서게 한 일당, 평경장, 정마담, 고광렬 등과 얽히고 설킨 모든 이들이 그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 것이다. 그에게 이 타짜 인생은 무엇인가. 


순간의 욕망


타짜에게 있어 '순간의 욕망'은 모든 것이다. ⓒCJ엔터테인먼트



총 4부로 구성된 만화 <타짜>의 1부인 '지리산 작두'를 영화화한 영화 <타짜>는, 만화와 같이 주인공 고니의 타짜인생을 그렸다. 정확히는 고니가 타짜의 길로 들어선 후 그의 타짜인생 1막 정도에 해당한다 할 수 있겠다. 그러하기에 이 영화에서 고니의 타짜인생은 곧 '욕망'이다. 


도박의 길에 한 번 들어서면 헤어나올 수 없다는 말, 몸소 겪어봐서 잘 알고 있다. 외국에서 1년 여 살았을 때 일이 끝나면 카지노에 매일 '출근해' 블랙잭을 했다. 매일 지니고 가는 돈은 지금 생각해도 매우 큰 10만 원. 10만 원을 따던지 10만 원을 잃던지. 그러던 중 하던 일을 떼려친 직후인 연말, 하루밤새 100만 원을 잃는다. 수중에 돈이 없는 상황,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위기에 겨우 다시 일을 잡는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일을 잡고 돈이 조금씩 생기니 다시 카지노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다. 마음잡고 철저한 자기관리 하에 '투 잡'으로서의 블랙잭을 다시 시작하지만, 잘 될 턱이 있나. 고니가 계속해서 파트너를 바꿔 가면서까지 전국 도박판을 유랑하는 이유가 뭔가. 누나에 대한 미안함? 돈을 향한 소유욕? 스승님의 복수? 사랑? 우정? 이 모든 게 조금씩은 투영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 '순간'이다. 수많은 종류와 이유의 욕망이 들끓는 도박판에 자리하고 있는 그 순간 말이다. 승리의 짜릿함과 황홀감, 패배의 쓰라림과 무력감, 그 모든 걸 넘어선 도박판의 흥분. 도박판이야말로 내가 진정 나일 수 있는 유일한 자리라는 느낌과 믿음의 발로다. <타짜>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 즉 페이소스를 서사와 이야기와 캐릭터의 향연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놓았다. 


서사와 이야기와 캐릭터


최동훈 감독의 스타일, 서사와 이야기와 캐릭터를 최우선적으로 추구한다. 그 최후의 목적은 '재미'가 아닐까. ⓒCJ엔터테인먼트



<타짜>를 보고 가장 와닿는 건 페이소스 이전의 서사와 이야기와 캐릭터의 향연이다. 서사와 이야기는 고니의 타짜인생역전으로 완성된다. 계속되는 우연의 연속으로 다른 파트너와 다른 인생을 사는 듯하지만, 또 다른 필연의 연속으로 이전의 파트너를 만나고 이전의 파트너와 관련된 이를 만나 내려가고 올라가는 일을 반복한다. 


천부적 이야기꾼으로 통하는 최동훈 감독의 이야기는 보는 모든 이들을 만족시킬 만하다. 마음 놓고 즐기되, 기본 이상의 질적 양적 퀄리티로 믿음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다. 그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건, 최동훈 스타일의 기반이 되는 캐릭터와 대사에 있다. 


최동훈 감독 작품들이 꽉 차 있다고 느끼는 건 기본적으로 캐릭터들의 빈틈없는 생각과 행동과 대사에 있다. 상당한 숫자의 주연급 조연들이 출연해 각자의 개성을 최대치로 발휘하며 하나같이 영화 스토리라인에 주요하게 기여하는데, 그래서 시종일관 어느 한 장면, 어느 한 캐릭터에도 집중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타짜>는 최동훈 감독의 그런 감각과 역량이 최대한으로 완벽에 가깝게 구현된 영화라 하겠다. 몇 번을 봐도 새로운 게 보이고, 몇 번을 봐도 뒤가 궁금해지고, 몇 번을 봐도 끝나는 게 아쉬운 영화가 아닌가 싶다. 그에게서 '스티븐 킹'의 향기가 스멀스멀 나는 건, <타짜>에서 가장 압도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건 비단 나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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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단조로운 내레이션에 숨은 어려운 삶에의 철학이 돋보이는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싸이더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아버지조차 말도 못 할 아기 시절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내가 기억할리는 없다. 그런 할머니가 나는 익숙하고 그런 할머니의 형상이 그려지는 건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었을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아버지한테 전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이 모두 정확할리 만무하다. 머릿속 어딘가엔 정확한 기억이 있지만 능력 상 꺼내지 못하는 것이든, 애초에 걸러서 기억하거나 어느 한 순간 또는 마지막 순간만 기억하는 것이든, 원본의 기억이 아닌 편집본의 기억이라는 것이다. 마치 역사와 같지 않은가. 사실도출에의 노력을 추구하지만, 영원히 그렇게는 불가능하다.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기억의 취사선택과 기억의 이어짐이라는 다분히 추상적인 주제를 가장 앞에 둔다. 여기에 역시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 관계라든지, 가족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주제를 따르게 한다. 하지만,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의 순간을 눈앞에 실증적으로 불러내는 인간 형상 홀로그램이, 이 잔잔한 이야기에 심심한 파동을 일으켜 많은 주제들의 추상이 형상화된다.


인간 홀로그램


인간 형상의 홀로그램에 기억을 심어 마치 그때 그 사람과 얘기하는 듯한 느낌. 이 영화의 주요 볼거리다. ⓒ싸이더스



여든다섯의 할머니 마조리(로이스 스미스 분) 곁에는, 원하면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는 홀로그램이 있다. '그'는 15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 월터(존 햄 분)의 젊은 시절 모습을 하고 있다. 기억을 심어주면 영원히 그 기억을 그대로 간직할 그는, 기억을 되살리거나 기억을 공유하며 마음을 달래주는 친구 또는 대체자로서 완벽한 존재다. 


그런 그를 마조리의 딸 테스(지나 데이비스 분)는 싫어한다. 자신보다 그를 더 찾고 그에게 더 의지하는 엄마가 싫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간 아닌 존재가 인간을 아주 잘 대체하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반면, 테스의 남편 존(팀 로빈스 분)은 적극 찬성하는 쪽이다. 다른 모든 걸 제쳐두고 마조리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데 아주 좋은 친구가 아닌가. 그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잃어버린 형상들과 기억들 때문에 괴로웠던 마조리의 마지막 나날들은 다분히 월터의 홀로그램 덕분에 치유받는다. 월터의 형상이 눈앞에 있고 월터와 함께 했던 화려한 젊은날의 기억 또한 되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월터에게 날조된 기억, 사실이지만 기분 좋은 기억과 사실이 아닌 기분 좋은 기억을 심어준 덕분이다. 기억하기 싫은, 기억에서 지워버린 기억은 아예 심어주지 않았다. 예를 들어, 마조리가 세계 8위의 테니스 선수 대신 월터를 선택했다고 거짓말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들 데미안에 대한 기억은 아예 전해주지 않으려 한다. 


이 영화의 핵심, 기억


인간 형상 홀로그램이 이 영화의 주요 볼거리라면, 기억과 관계는 이 영화의 핵심 주제이다. ⓒ싸이더스



영화는 연극을 원작으로 한 만큼 굉장히 정적이다. 90% 이상의 장면이 그들이 기거하는 집안이며, 역시 90% 이상의 장면이 그들 중 2인 또는 3인의 대화이다. 그들의 대화가 즉 영화이기에, 대화를 깊숙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 우린 '기억' '관계' 등의 핵심 주제를 찾아 엿볼 수 있다. 


존은 기억이란 뇌 안의 퇴적층과 같아서 기억하지 못할 뿐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 어떤 식으로든 꺼내어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홀로그램 월터의 존재를 옹호하며, 그로 하여금 마조리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거나 마조리의 기억 한 부분을 차지하게 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겠다. 


반면 테스는 기억이란 우물이나 서랍장 같은 게 아니라고 말한다. 무언가를 기억할 때는 기억 그 자체가 아니라 기억한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복사본의 복사본처럼 계속 희미해질 뿐 절대 생생해지거나 선명해지지 않는다. 이는 홀로그램 월터의 존재가 마조리 기억을 되살리거나 생생하게 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그녀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아마도, 테스의 주장 또는 이론이 맞을 것이다. 기억은 점점 쇠퇴해 언젠가는 소실할 거라는 건 누구나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모두들 몸소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심정적으로 존의 말을 믿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서랍장에 기억을 보관하고 언제든 꺼내 눈앞에 놓고 싶단 말이다. 인류가 낳은 최고 천재 아인슈타인도 그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관계, 그리고 기억


모든 건 기억에서 비롯된다. ⓒ싸이더스



관계는 기억과 함께 한다. 기억들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기억이 사라지면 관계 또한 사라진다. 마조리로부터 받은 한없이 작은 사랑, 마조리로부터 받은 적이 없다시피한 사랑의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테스이지만 마조리는 모른다.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일방적인 기억이 아닌 서로 간의 기억이야말로 사실상 그(그녀)와 나의 전부다. 


시간을 어김없이 흐르고, 기억은 쇠퇴하여 사라지고, 생명은 죽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기억은 계속 남아 있다. 영화에서 홀로그램이 상징하는 건 바로 그 누군가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이다. 이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영화가 좀 더 힘을 실어주는 주장이, 앞서 테스가 아닌 존의 말에 있다는 걸 증명한다. 


누군가에 대한 기억은 그동안 글, 그림, 사진, 영상 등으로 전해져왔다. 이젠 홀로그램이 가능해진 시대, 그 누군가를 눈앞에 데려와 함께 기억을 직접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미래형 SF적 요소가 있지만 SF영화라 칭할 수 없다. 인류는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기억, 기록을 남기는 데 전력을 다한다. 


비단 월터 홀로그램만 존재하진 않을 것이다. 마조리, 존, 테스의 홀로그램이 다른 산 사람을 위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 와중에 '나에겐 많은 시간이 있으니까'라고 말하는 월터 홀로그램과 '얼마나 좋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다니'라고 말하는 마조리 인간, 그리고 마조리 홀로그램의 한 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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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카오스 멍키>


<카오스 멍키> 표지 ⓒ비즈페이퍼



'소설처럼 재미있다'는 말이 경제경영서나 자기계발서만큼 잘 어울리지 않고 통용되지 않는 장르도 드물 것이다. 아무리 읽기 쉽게 변형을 가한다고 해도, 기본이자 본질이 되는 곳에 도사리고 있는 건 언제나 교훈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들은 이야기가 아닌 사례에서 파생된다. 이야기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과 다르게, 사례는 그 자체로 수단이 되어 교훈에 목적이 있다. 


경제경영서와 자기계발서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혁신'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장르의 책들은 절대 기존의 것을 완전히 바꾸어 새롭게 한다는 뜻의 혁신을 행하지 않는다, 못한다. 온갖 혁신적인 사례와 교훈을 들먹이며 혁신의 찬가를 불러대도 말이다. 


여기 '혁신'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는 책 한 권이 있다. 명색이 경제경영서이지만, 저자 자신의 삶과 저자가 몸담았던 월가 및 실리콘밸리의 민낯을 말그대로 낱낱이 파헤쳐 까발린 책 <카오스 멍키>(비즈페이퍼)다. 신기하고 특이하게도 이 책은 소설보다 더 재미있으면서 왠만한 경제경영서와 자기계발서보다 더 진득한 교훈이 있다. 


저자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아마 사실이겠지만, 우리가 다른 건 몰라도 매일같이 몇 시간이고 매달리는 것들이 만들어지고 운영되어지는 실리콘밸리는 '똥구덩이'다. 그동안 수없는 내부고발로 이미 똥구덩이인 줄 잘 알고 있는 정치판이나 금융계완 달리 IT업계는 순수한 이들만 있는 줄 알고 있었는데, 완전히 똑같다는 것이다. 


저자의 삶으로 들여다보는 IT업계의 속살


책은 저자의 직업 일대기를 따라 진행된다. 저자가 직접 자신의 삶을 내보이며 자신이 속했던 직업계의 모습모습들로 완벽한 '재미'를 주고 나름의 '교훈'을 주고자 한 것이다. 버클리라는 초일류는 아니지만 충분히 일류에 속하는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를 취득하고 국제금융시장을 대표하는 투자은행 겸 증권회사 골드만삭스에 취업한다. 저자는 기업신용파생상품부에서 가격결정을 담당하는 퀀트였다. 


이 똥구덩이에서 여러 개새끼들과 함께 큰 수익을 가져다주는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는 일을 해왔던 저자는, 우연히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에 관한 기사를 접하고 '애드케미'라는 회사에 지원해 입사하게 된다. 그곳은 수학을 이용한 광고 최적화 프로그램 개발사였다. 무너져 내리는 자본주의의 격랑 한복판인 월가에서 나름 격리되어 있고 외떨어진 IT업계야말로 최후까지 살아남으리라 생각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러한가?


하지만 저자가 생각하기에 애드케미 또한 똥구덩이인 건 마찬가지, 얼마 못 버티고 엔지니어 두 명과 함께 스타트업 회사 애드크로크를 창업하며 그곳을 나온다. 그들은 실리콘밸리 최고 최대의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 와이 콤비네이터의 우산 아래에서 회사를 시작하고 이끌어간다. 그야말로 모든 걸 내팽겨친 채 회사에만 매달려 열심히 하고 잘 하고자 그들에게 '트위터'가 접근한다. 


하지만 저자가 생각했던 금액의 절반 정도밖에 제시하지 않는 트위터와의 협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페이스북에도 제안을 하고, 페이스북은 저자의 동료들이 아닌 한 명만 입사하길 원한다. 이에 애드크로크는 트위터에 인수당하고, 저자는 페이스북의 광고팀에 입사한다. 황당하기 그지없고 앞뒤 없는 무례한 방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리콘밸리에서 아주 흔하게 일어나는 모습이란다. 이쯤에서 다시 나오는 똥구덩이...


실리콘밸리의 혁신을 주도하는 인간쓰레기들


650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절반쯤 도착했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저자의 페이스북에서의 치열하고 황당하고 비열하고 당황스럽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현재 전 세계 최고의 기업이자 가장 유명한 기업이자 누구나의 생활 속에 이보다 깊숙이 들어와 있는 기업이 있을 수 없을 만큼의 기적을 일구어낸 기업 페이스북.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2013년 전까지 페이스북의 수익은 한심할 정도였고 광고규모는 놀라우리만큼 작고 매력 없었으며 기성 관리 툴은 버그로 가득해서 쓰기가 괴로울 정도였다. 


사실 이 책의 절반 정도는 알 수 없는 말들로 가득 차 있다. 금융계와 IT업계에서만 쓸 법한 수많은 단어들의 향연, 당연히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을 텐데 그럼에도 아주 빠른 속도로 읽고 큰 무리 없이 지나갈 수 있는 건 우리 모두가 알 만한 기업 페이스북과 역시 우리 모두가 알 만한 IT업계의 다양한 이름들 덕분이겠다. 물론 저자의 거침없는 풍자와 자학, 이래도 되는 것인가 할 정도의 실랄한 내부고발과 실명비판도 큰 몫을 차지한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건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애플의 스티브 잡스 '소시오패스론'이다. 


애플 창업 초기 핵심 동업자 스티브 워즈니악을 비롯 직원들을 등쳐먹고 끝까지 착취했던 스티브 잡스, 경쟁자의 아이디어를 가로채 IBM에 Dos를 납품했던 빌 게이츠, 쌍둥이 형제의 아이디어를 훔쳐 비록 수천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했지만 족히 수백억 달러를 버는 지금의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저커버그까지. 이들이야말로 대표적인 '카오스 멍키'다. 카오스 멍키는 서버가 늘어선 데이터센터에서 원숭이가 케이블을 뽑고 서버를 부숴 난장판을 만들듯이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일부러 프로세스와 서버를 다운시킴으로써 그러한 공격에서 성능 저하 없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실험하는 내부 결함 테스팅 툴로 넷플릭스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저자 또한 그 자신이 카오스 멍키나 다름 없는데, 책은 그들이야말로 실리콘밸리의 혁신을 주도한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를 포함,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회사와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는 사람과 회사들은 하나같이 '쓰레기'들이지만 그렇게 해야만 이 실리콘밸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야말로 실리콘밸리를 이끌며 떠받치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실리콘밸리를 통째로 바꿀 수 있는 진정한 혁신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아마 내부동력으로는 영원히 바꿀 수 없지 않을까. 


이들은 우리 모두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우리 자신과 하등 관련이 없다. 단순 물리적으로도 너무 먼 존재이고, 살아생전 절대 만날 수 없을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를 배우듯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보듯, 실리콘밸리 신화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삶의 형태가 그들로 인해 바뀌어 왔지 않은가. 단순히 그들의 대외적인 모습만을 숭배하며 받아들일 것인가. 그들의 대내적인 모습을 면밀히 검토하고 받아들일지 말 것인지 결정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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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폭력의 씨앗>


올해 거의 마지막이 될 독립영화 명작이다. '폭력'의 시선 확대에 큰 기여를 한듯. ⓒ찬란



'폭력', 인류가 오랫동안 천착해 온 주제이다. 그 어느 누구도 이 폭력이라는 놈이 쳐놓은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도 폭력이라는 소재와 주제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천착해왔다. 영화, 그중에서도 한국 독립영화에 국한한다면,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폭력의 악순환이 가장 큰 주제를 형성했다. 


윤종빈 감독, 하정우 주연의 <용서받지 못한 자>가 그 시작으로 보는데, 여기서 '용서받지 못한 자'는 누구일까. 구성원 모두가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용서받지 못한 자이자 가해자라 할 수 있는 이 영화에서, 결국 진정한 최후의 가해자는 '군대' 그 자체이다. 그들이 군대라는 곳이 아니었다면 그 정도의 폭력을 휘두르고 그런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그런 극단적 후회를 했었을까?


이후 한국 독립영화는 거의 매년 폭력의 악순환에 관한 수작을 선보여 왔다. 요즘도 여전히 폭력을 말하지만 시선이 다른 것 같다. 사회가 해결해주지 못하는 폭력의 굴레를 개인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해 스크린에 옮겨 놓는 작업이 잇따르고 있다. 폭력의 악순환보다 더 넓은 시야와 더 구체적인 연출이 필요해 보인다. 


한편 가장 폭력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일명, 군대 영화는 연성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창>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아성이 높고 깊기도 했거니와, 군대가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좋아지고 있다는 인식이 군대 영화의 필요를 무색케 했다. 이번에 나온 <폭력의 씨앗>은 그래서 의미 있고 눈여겨볼 만한 영화다. 


이미 오래전 발아하고 있던 폭력의 씨앗인가


상당히 노골적인 제목 '폭력의 씨앗', 그 씨앗이 어디서 어떻게 왜 발아되었는가 살펴보고 생각하게 만든다. ⓒ찬란



단체외박을 나가는 한 무리의 군인들, 상병 이상 고참들과 이등병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병만이 모든 일을 처리하다시피 한다. 각자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 전 모여 술 한잔 하는 그들, 일병 주용은 최고참 선임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누군가가 지난번에 이어 선임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고 중대장에게 말하려 했다는 것. 


주용의 맞후임인 이등병 필립은 이번만은 절대 자신이 아니라고 애원하지만 주용을 위시한 고참들은 당연히 필립이 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끝까지 이번만은 자신이 아니라고 우기는 필립을 주용이 일차로 위협을 가하지만, 여전히 굴복하지 않자 분대장이 가차없이 팬다. 


입술이 터지고 이빨이 부러진 필립, 주용은 만나기로 했던 친누나와 연락이 되지 않자 필립과 함께 직접 인천으로 점프를 뛰면서까지 찾아간다. 매형이 치과의사였다. 인천으로 가는 도중, 인천에 도착하고서, 인천에서 다시 복귀하기까지 주용과 필립은 부딪힌다. 사소하게 시작한 부딪힘은 주용으로하여금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주용은 매형과 누나에게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류를 눈치채고 그들을 추궁한다. 사실 매형이 누나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한 전력을 주용 또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상한 기류에는 이런 전력이 한몫했던 듯. 주용의 선한 얼굴에 내재된 폭력의 씨앗은 이미 예전에 발아하고 있었던 건가.


사회, 가정, 군대를 아우르는 폭력의 굴레


'군대의 폭력은 군대에서 시작된 게 아니다.'라고 영화는 말한다. ⓒ찬란



영화는 시종일관 긴장의 연속이다. 목숨이 오갈 정도의 끔찍한 일, 나라의 명운이 달린 큰 일은 없지만, 주용에게 남은 군대에서의 나날들에 암흑이 내릴 일들이 점점 더 그 강도를 더한 채로 덮쳐온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 모든 건 필립 때문이다. 나는 정말 잘하고 있는데, 이 새끼가 평범하게만 했어도...


사회에 나와서도 똑같겠지만, 군대에서야말로 어리바리 후임을 둔 사수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2년여 동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절대 바꿀 수 없는 한 운명체인 게 더 곤혹스럽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에게나 피해갈 수 없는 그때 그 어리바리 시절이 있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내리갈굼으로 대표되는 폭력의 악순환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끊어버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용에게 내재된 폭력의 씨앗은 군대에서 필립에게 가하는 폭력의 형태로 처음 발아된 것이 아닐 테다. 만약 그것이 처음이라면 그는 군대에 오기까지 폭력의 한 면도 보지 못한 온실 속 화초에서 지내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리는 없으니, 그는 이미 폭력이 무엇인지 대략이나마 알 뿐더러 이미 폭력을 당해봤거나 폭력을 행사해본 적이 있다는 말이 된다. 


영화의 시선은, 폭력을 바라보는 시선은 군대에서 사회 또는 가정으로 옮겨간다. 그건 즉, 폭력의 최정점에는 사회 내지 가정이 있었다는 뜻이다. 군대에 적을 두고 있어도 이전까지 그리고 이후에 있을 곳은 군대가 아니지 않은가. 군대의 폭력, 사회 또는 가정의 폭력은 결코 '또 다른' 폭력이 아닌 하나로 이어지는 폭력의 굴레다. 


인지하지 못한 채 우리를 뒤흔드는 일상 폭력


우리가 아마 절대 인지하지 못할 수많은 소소한(?) 폭력들이 우리 일상을 지배한다. ⓒ찬란



영화가 보여주는 폭력은 사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잘 인지하지 못한 채 당하기도 하고 행하기도 하는 일상의 폭력들을 극히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지금까지 봐 왔던 그 어떤 폭력의 양식이나 행태보다 심각하고 무섭다. 앞서 말했던 목숨이 오가는 끔찍한 일이나 나라의 명운이 달린 큰 일보다 오히려 더 우리를 뒤흔드는 일이 아닐까 싶다. 


시종일관 우리를 덮쳐오는 긴장은 이런 일상적 폭력에서 기인한 것일 테다. '알 수 없음'에서 발인한 사소한 실수에 반응하는 언어적 폭력, 호의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우리만치 포장된 권위적 폭력, 도움이라는 행동으로 자행된 상대방은 물론 주위를 생각하지 않는 무개념 폭력 등. 이보다 훨씬 많은 폭력들에서 우리는 살아 간다. 


차라리 눈에 확연히 보이는 갈등 속 폭력이나 치고박고 싸우며 피가 난무하는 폭력의 양상에서 긴장은 덜 느껴진다. 영화를 100%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긴장의 끈이 절대 풀어지지 않는 것이었겠지만 오히려 일상적 폭력의 장면들이 긴장을 더 이끌어낸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는 해결해야 할 수많은 문제들과 함께 살아간다. 개중엔 해결은커녕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문제가 아주 많은 것이다. 거기에 진짜 문제가 있다. 문제를 문제라 인식할 정도의 큰 문제들은 누구나 인지하고 해결방도를 찾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문제를 문제라 인식하지도 못할 정도의 작은 문제들은 모두가 자신도 모르게 행하고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러면 그건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폭력도 그러한가? 거기에 폭력을 대입해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지만, 아니 없다시피 할 테지만,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사람은 부지기수일 거다. 지금의 폭력의 씨앗들은 계속 발아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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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제목만으로도 힐링을 주는, 흔치 않은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이수C&E



파라다이스 같은 곳에서의 뜬구름 잡는 희망섞인 대화에서, 썩어가는 포도와 출근 준비를 하는 찌든 얼굴의 남자로 이어진다. 그리고는 좁은 사무실에 우루루 모여 있는 직장인들의 모습들까지. 아오야마는 홀로 도쿄에 올라와 자취를 하며 오랜 취업활동 끝에 영업사원으로 발탁되었다. 하지만 상사에 의한 일방적인 갈굼, 당연히 수당을 받을 리 없는 야근, 한밤중까지 걸려오는 상사의 전화로 더 이상 살아갈 마음이 없다. 


어느 날 밤늦게 퇴근하던 그, 너무 힘들어서 쓰러진 것인지 자살하려고 했던 것인지 지하철이 들어오던 찰나 선로로 떨어지려 한다. 간발의 차이로 그를 살려내는 이, 야마모토. 다짜고짜 만면의 웃음을 띄며 아오야마의 초등학교 동창이란다. 그러며 한잔 하러가 서로를 알아간다. 그것도 모자라 아오야마가 쉬는 날을 이용해 아오야마의 고루한 외모를 세련되게 바꿔준다. 이후 일이 잘 풀리는 듯한 아오야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한다. 가장 중요한 계약건을 거의 다 끝내놓고도 마지막에 가서 황당하고 어이없기 그지 없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급기야 부장의 명령에 의해 그 계약건은 에이스인 이가라시에게 맡겨진다. 한편 야마모토가 성가신 아오야마인데, 우연히 길을 가던 야마모토의 평소답지 않은 우울한 모습에 전격적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고 다름아닌 그가 3년 전에 자살했다는 기사를 접한다. 이게 무슨?


힘겨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이란?


'제로'에서 시작하는 게 아닌 '마이너스'에서 시작하는 시대에 '희망'이란 존재할까. 있다는 그건 무엇일까. ⓒ이수C&E



힘겹게 살아가는 현대 젊은이들의 삶의 면면, 특히 취업을 다루는 콘텐츠가 정녕 부지기수다. 사실 2008년 전세계 금융 위기가 있고 나서 몇 년 후인 2010년대 초반에 절정으로 유행했기에 이젠 조금 시들한 감이 있다. 하지만 그 여파는 취업시장에서 회사로까지 침투했으니,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는 그 이야기다. 


물론 회사에서 힘든 이야기는 비단 지금뿐의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육체적으로는 위기 시대가 아닌 성장일로 시대 때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때의 노동자는 성장을 위해 한몸 바쳐 희생하는 조직체였다. 지금의 객체적 개념과는 천지 차이다. 그래서 '나때는 말이지-' '요즘 젊은 것들은-'으로 이어지는 장광설이 나오는 것일 테다. 


지금은 제로성장, 아니 마이너스성장 시대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가까스로 제자리를 지킬 수 있는 지금, 육체적 고통 이전에 정신적 고통이 기본적으로 수반된다. 압박을 하고 압박을 당하는 모양새가 전과 비할 바가 아니다. 육체적 고통은 어떠냐고? 절대적 강도가 줄어들었을 뿐, 여러모로 발전된 현대사회의 기준과 일치하진 못한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배경으로 사는 게 뭐냐는 질문에 희망을 갖는 거라고 대답하는 대화로 영화가 시작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희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희망이라는 게 어떤 성격일까. 더 나은 회사원이 될 거라는 희망? 더 나은 인간이 될 거라는 희망? 부디 후자이길 바래본다. 


치가 떨리게 공감되는, 회사의 악랄한 일들


영화는 신입사원이 겪는 악랄하기 짝이 없는 회사 상사의 술수를 초중반에 집중적으로 보여주며 후반에 있을 감동 코드를 배가시키고자 한다. ⓒ이수C&E



영화는 아오야마가 야마모토 덕분에 보다 밝게 바뀌어가는 만큼 회사에서의 일로 더욱 힘들어 한다. 그러며 한순간 눈물 쏙 빼놓는 감동도 선사하는 걸 잊지 않는다. 전형적이리만치 일본적인, 즉 밝은 것이든 악랄한 것이든 감동적인 것이든 극단을 선보이는 것이다. 그중 가장 와닿는 건 단연 회사에서 겪는 악랄한 일들이다. 


같은 회사원으로 공감을 하고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아오야마를 위로하고 걱정하는 나를 발견한다. 힘든 하루 일을 마치고 오직 상사만을 위해 야근까지 완료한 후 걸려오는 상사의 전화, 그저 쉬고 싶고 자고 싶고 내일 따위는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여기서 가장 악랄한 건 업무시간 이후에 걸려오는 상사의 전화다. 


믿기 힘든 실수로 중요한 계약건이 날아간 아오야마에게 내려진 명령, 에이스 이가라시에게 계약을 통째로 넘겨라. 그리고 사무실 직원 모두에게 무릎 꿇고 진심으로 사과하라.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여기선 인격살인과도 같은 사과 방식보다 몇 개월 동안 공들인 계약건이 성사 직전 통째로 넘겨졌다는 게 더 악랄하게 다가올 수 있다. 


아오야마가 자살을 생각하는 건 그리 와닿진 않는다. 극의 전개상 어쩔 수 없는 거라고 해도 말이다. 반면, 다음날 기다리고 있을 끔찍하고 견디기 힘든 일을 생각하느라 '자야 한다, 자야 한다' 말하면서도 잘 수 없는 아오야마의 잠자리는 치가 떨리게 공감된다. 생각이 꼬리를 물어 잘 수 없고, 벌떡벌떡 일어나고, 괴로워 미칠 것 같은...


전형적인 현실공감판타지


이 영화는 현실공감판타지다. 현실을 기반으로 하지만, 결론으론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들이다. 그럼에도 공감이 가는 건... ⓒ이수C&E



우린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야마모트를 쫓아가 들여다봐야 한다. 모르긴 몰라도 그에게도 아마 아오야마와 비슷한 일이 있었을 게다. 그가 아오야마에게 건네는 별 거 아니지만 그 어떤 말보다 진실된 말들에서 행간을 읽어볼 여지가 있다. '무슨 일 있니?' '잠은 잘 자니?' '밥은 잘 챙겨먹고?'


저렇게 물어봐주는 사람은 아마 가족, 또는 가족 같은 사이뿐이지 않을까. 영화는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가족 이야기, 가족의 소중함으로 이어진다. 이어서 회사원이 아닌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로까지. 전체적으로 본연의 맛을 잃고 조금 삐그덕대는 느낌이 들지만, 한순간에 짧고 굵은 감동의 눈물로 어느 정도 상쇄가 된다. 


아오야마의 선배이자 팀 에이스 이가라시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불만과 불안 등이 일찌감치 겉으로 표출되어 갈등이 이어졌으면 단순히 신입사원의 이야기가 아닌 회사 전체의 이야기가 될 수 있어 영화 전체적으로 더욱 입체감이 살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그러기엔 이 영화의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른 데 있긴 했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책임질 사람이 없는 아오야마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제목처럼 쉽게 회사를 그만두는 것에 긍정적 공감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현실공감판타지. 영화를 보는 순간이나마 공감하고 위로하고 위로받고 대리만족할 수 있었다. 이 영화의 목적이 그것이었을 테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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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문학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문학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표지 ⓒ현암사



지난 10월 5일 발표된 2017년 노벨문학상, 그 영광은 일본계 영국인 가즈오 이시구로에게로 돌아갔다. 그 직전까지 매년 치르는 한바탕 소동을 이번에도 되풀이 했는데,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기 때문이겠다. 다름 아닌 고은 시인 덕분이다. 지난 2002년부터 장장 15년 간 강력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내리고 있는 그 아닌가. 이미 많은 국제적 문학상을 수상해오며 그 문명(文名)을 전 세계에 알린 그가, 아이러니하게 국내에서는 노벨문학상 수상 실패로 가치 절하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도대체 노벨문학상이 뭐길래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것인가. 분명 세계 최고의 문학상 중 하나이긴 할 테지만 그밖에도 저명한 문학상이 많지 않을까 싶다. 또, 우린 우리나라 사람이 후보에 오르내리지 않은 문학상에 대해선 일절 관심이 없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작년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로 뽑히는 부커 국제상에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로 선정되면서 국내에 큰 파란을 일으켰는데, 올해는 물론 그 전까지 누가 그 상을 탔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줄 안다.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에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느 때보다 수많은 책이 쏟아져 나온다. 문학상은 분명 그중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옥석을 가린 측면이 있기에 독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유명 문학상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일본에서 건너온 <문학상 수상을 축하합니다>(현암사)으로 조금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세계 유수 8대 문학상을 들여다보다


책은 세계 유수 문학상 중 8개를 뽑았다. 자타공인 세계 3대 문학상으로 뽑히는 노벨문학상, 맨부커상, 공쿠르상을 비롯 퓰리처상, 카프카상, 예루살렘상, 나오키상, 아쿠타가와상이 그것들이다. 다분히 일본의 입장에서 고른 것이니 만큼, 일본의 2대 문학상인 나오키상과 아쿠타가와상과 무라카미 하루키가 수상했던 카프카상과 예루살렘상이 있다는 게 특이할 만한 점이지만 거기에 불만이 있을 정도는 아니다. 


이밖에도 개인적으로 아는 유수 문학상들에 국제더블린문학상, 펜포크너상, 전미도서상, 노이슈타트국제문학상 등과 중국의 마오둔문학상, 일본의 일본서점대상, 한국의 이상문학상 등도 있음을 알리며, 책에서 말하는 8개 문학상 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다. 어떤 작가, 어떤 작품, 어느 나라의 어느 작풍이 주로 수상의 영광을 얻었을까 궁금하다. 


가장 유명한 '노벨문학상', 책은 이 상이 세계의 문학상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지만 실은 유럽에 상당히 치우친 상이라고 말하며 캐나다의 앨리스 먼로와 터키의 오르한 파묵과 트리니다드토바고의 비디아다르 나이폴을 소개한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노벨문학상과는 거리가 조금 있는데, 먼로보다는 마거릿 애트우드가 더 어울리며 파묵보다는 야샤르 케말이 더 어울린다. 나이폴의 경우 트리니다드토바고 출신의 인도계 영국인으로 '국민문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아쿠타가와상은 순문학 쪽, 나오키상은 대중문학 쪽에서 뽑는 걸로 알려져 있고 또 알고 있다. 거기에 영압하는 분위기인 건 사실이지만, 그 반대인 경우도 종종 있다는 거로 저자들이 밝혀내어 해부한다. 영국의 맨부커상은 프랑스의 공쿠르상에 대항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하나같이 노벨문학상을 뛰어넘는 최고의 문학상이라고 치켜세운다. 그해에 나온 영어권 작품 중 반드시 최고를 선정한다는 것이다. 이 책으로 거둔 가장 큰 수확이라면, 맨부커상을 향한 기대와 믿음의 확실성이라 하겠다. 


프랑스의 공쿠르상과 미국의 퓰리처상, 체코의 카프카상은 분명 세계 최고의 문학상들이지만 아무래도 지역적인 특색이 강하다. 아니, 강했었다. 점점 최근으로 올수록 수상 목록에서 보이는 세계화가 눈에 띈다. 오히려 노벨문학상의 지역적 특색이 상대적으로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상은 카프카상, 세르반테스상과 더불어 노벨문학상을 받기 전에 거쳐가는 이미지가 강한데, 세계 유수 문학상 중 괜찮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나만의 문학상 리스트


책에서 소개하는 작품(작가와 더불어) 24권 중 부끄럽기 그지 없지만 읽어 보기는커녕 들어본 적도 없는 작품과 작가가 태반을 차지했다. 일본과 한국의 문학적 취향의 차이이기도 할 테고, 문학상 또는 전문가와 대중의 시선 차이이기도 할 테다. 상마다 3명의 전문가가 각각 한 작품씩 3 작품을 소개하는데, 역시 모두 알고 있는 건 노벨문학상이 유일했다. 작품을 접했고 아니고를 떠나서 이름이라도 익히 들었던 기준으로. 


사실 여기서 소개하는 모든 상의 수상작가 작품을 적어도 하나씩은 읽어 봤다.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은 말할 것도 없고, 맨부커상의 윌리엄 골딩이나 살만 류수디, 공쿠르상의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나 미셸 우엘벡, 나오키상의 미야베 미유키나 히가시노 게이고나 온다 리쿠, 아쿠타가와상의 무라카미 류나 메도루마 슌, 무라타 사야카, 카프카상의 필립 로스나 옌렌커, 예루살렘상의 이언 매큐언이나 무라카미 하루키까지. 


정녕 수많은 작가와 수많은 작품들이 문학상이라는 이름을 드높이는 데 이용되고, 문학상을 통해 인생이 역전되기도 하며, 간혹 문학인생을 망치기도 한다. 그 자체로 충분히 훌륭한 작가이자 작품이지만 하필이면 함께 수상을 겨루었던 작가와 작품들이 역대급일 때 수상한 사례가 있다. 이는 문학상뿐만 아니라 많은 종류의 '상'에서 종종 일어나는 해프닝이다. 


잘은 모르지만, 개인적 소견과 책에서 소개하는 전문가의 소견을 합쳐 책에서 소개한 작가들 중 각 문학상의 only one을 뽑자면 오르한 파묵, 메도루마 슌, 후나도 요이치, 마거릿 애트우드, 미셸 우엘벡, 줌파 라히리, 필립 로스, 이언 매큐언이다. 누가 읽어도 절대 후회하진 않을 만한 작가들이다. 


책에서 따로 정리를 하진 않았지만, 전체적인 리스트의 공통점이 눈에 띈다. 한마디로 말해서 '비주류'인데, 다양성, 외부의 시선, 낮은 곳에서, 문학상 취지에 맞지 않는 것 같은 작품들이다. 대담 주체자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리스트가 신선했고 의미있게 다가왔다. 모든 문학상의 모든 수상자와 수상작을 알 필요가 없는 만큼, 또 너무나도 유명한 책들을 따로 알아내려 애쓸 필요가 없는 만큼, 이 책 <문학상 수상을 축하합니다>를 통해 색다르지만 수준높은 문학 리스트를 만들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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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우아한 세계>


조폭의 발견, 느와르의 발견. 만드는 작품마다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고루 성적을 내는 한재림 감독의 <우아한 세계>. ⓒ롯데엔터테인먼트



2000년대 두 편, 2010년대 두 편만을 세상에 내놓았을 뿐이지만 흥행과 비평 어느 한 면에서 두루 두각을 내고 있는 한재림 감독. 공교롭게도 <연애의 목적> <우아한 세계>, <관상> <더 킹>으로 비슷한 느낌, 지향하는 바가 같은 두 편을 두 번 선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2020년대 가서야 또 다른 느낌과 성향의 차기작을 내놓지 않을까 싶다. 


그의 데뷔작 <연애의 목적>은 충분히 충격적이고 센세이션 했다. 연애란 게 이런 거였나 또는 연애에 이런 모습도 있었나. 2000년대 들어와 연애를 새롭게 발견한 느낌일까. 그야말로 '연애'의 발견이다. 이어 내놓은 <우아한 세계>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조폭이란 게 이런 건가. 


조폭의 발견이라고 해야 할까. 느와르의 발견이라고 해야 할까. 그저 평범한 가장의 발견이라고 해야 할까. 각본까지 함께한 한재림 감독의 발견인 건 확실하고, 이 영화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송강호의 발견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도무지 목격할 수 없는 '우아한 세계'의 발견은 언제쯤 이뤄질까?


평범한 우리네와 다를 바 없는 특별한 조폭의 삶


'특별한' 조폭이 어찌 '평범한' 일반인과 같을 수 있을까? 영화는 그 본질이 하등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서울 강남에서 활동하는 들깨파 중간보스 강인구(송강호 분), 20년 짬밥에도 불구하고 불철주야 졸음운전까지 해가며 열일 중이다. 그가 하는 일이야, 여기저기 중요 거점들 관리하고 등쳐먹을 인간들한테서 어떻게든 계약서 지장 찍는 일 정도. 집에서는 여느 가장들처럼 아내와 자식들에게 등돌림을 당하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좋은 곳에 위치한 전원주택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은 소망 하나뿐이다. 


그야말로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미래의 우아한 세계를 꿈꾸고 있는 이 나라의 흔하고 평범한 가장이란 말이다. 하지만 그는 특별하다. 특별히 조폭 세계에 몸을 담고 있다. 평범함과는 굉장히 동떨어진 세계에서의 직업이다. 그러니 그에게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특별할 게 없다. 길을 걷다가 칼 맞고 쓰러져 그대로 죽어도 말이다. 


그가 하는 일이란 게, 먹고 살고자 하는 목적이지만 누군가에게 물적, 심적으로 피해를 줄 수밖에 없다. 물론 그 가장 큰 대상은 경쟁하는 조직일 것이다. 그런데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가장 큰 적이 내부에 있는 경우도 많다. 우리 강인구 씨가 내부경쟁의 피해자 또는 가해자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고 말이다. 


조직폭력배 조직 중간보스 강인구가 사는 세계가 '특별'하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평범하다는 우리네 생활, 사회생활과 그의 생활에 무슨 차이점이 있는지 찾기 힘들다. 다분히 조폭의 발견인 동시에, 그에 심히 접점이 있는 일반인의 발견이기도 하다. 특별한 줄 알았던 조폭이 알고보니 우리네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산다는 것보다, 우리네가 조폭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산다는 게 충격적이지 않는가. 


조폭도 피해갈 수 없는 먹고사니즘, 오직 송강호


어느 누구도, 아니 왠만한 사람이라면 평범하든 특별하든 피해갈 수 없다. '먹고사니즘' ⓒ롯데엔터테인먼트



조폭이라고 '먹고사니즘'을 피해갈 순 없다. 조폭 중간보스에, 벤츠 S클래스를 끌고 다녀도, 오래된 전세 아파트를 떠나 가족들과 함께 좋은 환경의 전원주택에서 사는 꿈을 이루기 위해선 모든 걸 버리고 '먹고사니즘'을 최우선에 둘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 조폭이고 뭐고 다 평등해진다. 


조폭은 더 이상 누군가에게는 선망의 대상, 누군가에게는 무서움의 대상, 누군가에게는 그저 영화에게나 등장할 법한 멀리 있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영화에서 조폭은 그런 추상적인 객체, 우아한 세계의 존재, 아름다운 일의 대상이 아니라 직접적인 주체, 억척스러운 세계의 존재, 추하기 짝이 없는 일의 대상이다. 


송강호가 맡았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라, 송강호밖에 맡을 배우가 없지 않나 싶다. <넘버3>에서 소규모 조폭의 두목을, <반칙왕>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소시민을, <효자동 이발사>에서 소박한 아버지를, <괴물>에서 사투를 벌이는 가족의 한 일원을 맡아 완벽히 소화해낸 송강호의 다층적인 면모를 <우아한 세계>에서 발휘한 것이다. 


강인구는 일을 잘 해냈다. 항상 우여곡절이 있지만 회장님에게 유일하게 믿을 만한 부하가 강인구뿐이다. 하지만 그러하기에 내부에 적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수많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내부의 적 때문에 심히 괴로워했던 것처럼 말이다. 거기에서 오는 감정의 흔들림, 생존이 걸린 소시민적 흔들림을 표현해낼 수 있는 배우도 송강호뿐이다. 


이제는 일에게 굽신거려야 하는 인간


이제는 '일'에게 인간이 굽신굽신 거려야 한다. 그 시작은 2008년 세계 금융 대위기가 아니었을까. 2006~7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그걸 예언한 것일까. ⓒ롯데엔터테인먼트



1시간 50분짜리 영화는 1시간 30분쯤에서 사실 일단락을 맺는다. 하지만, '일'이라는 게 뭔지, 평생 그 일밖에 해보지 않았으니 먹고사니즘의 문제를 떠나 다른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마지막 20분은 그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 일이 나쁜 쪽으로 특별한 일이지만 막대한 부를 주고, 그래서 가족들을 훌륭히 부양하게 해주지만 정작 가족들은 싫어하고, 가장은 외로울 뿐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선택한 일이고, 자신이 선택한 가족의 화목이고, 자신이 선택한 결과에 따른 외로움이기에,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이제 특별함과 평범함, 우아함과 억척스러움,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는 무의미하며 구분도 필요없다. 모든 사람들은 일의 주체가 아닌 일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영화는 그런 면에서 2006~7년 만들어진 당시 일종의 예언을 했거나 또는 시대의 흐름을 예리하게 포착해냈다고 할 수 있다. 곧 찾아올 세계적인 경제 위기, 그 후에 지속될 일에의 노예화와 먹고사니즘의 광범위화를 말이다.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고 말이다. 우리나라에게는 10년 만에 또다시 찾아온 재앙이었다. 


이제는 '일'이라는 놈에게 가서 굽신거려야 한다. 사람이 하는 일은 점점 없어질 테고, 성장은 점점 멈출 거다. 전방위적인 고착화를 향해 아주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아이러니를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익숙한 일을 바꾸는 건 당장 죽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거기에 그 어떤 바람, 질타, 후회도 막아서지 못할 생존의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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