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악의 해부>


<악의 해부> 표지 ⓒ에이도스



제2차 세계대전 하면 생각나는 건 단연 '홀로코스트'다. 통칭으론 대학살을 뜻하지만, 일반적으론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말한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전쟁과 대학살이 있어 왔지만, 이토록 어마어마한 전쟁과 대학살이 동시에 이뤄진 건 일찍이 없었다. 


당연히 홀로코스트에 대한 시각은, '왜'와 '어떻게'로 쏠린다. 왜 나치는 홀로코스트를 자행했고, 나치는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자행했는가. 거기에 홀로코스트를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 핵심인사들을 향한 관심도 있다. 히틀러, 히믈러, 하이드리히, 아이히만 등이 그들이다. 


이들을 비롯 나치는 그렇게 '악마'가 된다. 나라 대 나라의 전쟁이 아닌 일방적인 학살로 수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게 한 그들이 악마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악마여야 한다. 여기서 '왜'는 충분히 설명되어 진다. 그러면 '어떻게'가 남고, 잔인함을 넘은 악마적 학살 방법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우린 그 방법들을 전해듣고 그저 치를 떨 뿐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역설적으로 '누구'에 대한 설명은 부족해진다. 위에 명명된 이름들은 생생하게 다가오는 개인이라기보다 악마적 존재들의 집합체인 나치에 속한 수많은 조직원들 중 하나일 뿐이다. 과연 그게 최선일까? 나치를, 제2차 세계대전을, 홀로코스트를 생각하는 최선일까?


나치 전범을 통해 들여다보는 '악'


정신의학자가 치밀하게 돌아본 '악마' 나치 전범들의 심리를 <악의 해부>(에이도스)로 들여다볼 수 있다. 저자는 책을 통해, 나치 전범을 통해 '악'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을 맺고 다수의 나치 전범들을 수용한 룩셈부르크 아쉬칸 포로수용소에서 시작된다. 앤드러스 대령 교도소장과 정신과의사 더글러스 켈리, 그리고 나치의 제국원수 헤르만 괴링이 등장한다. 


오래지 않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위해 무대가 독일 뉘른베르크로 옮겨진다. 와중에 독일노동전선 수장 로베르트 레이와 반유대주의자 신문 《데어 슈튀르머》 편집자 율리우스 스트라이허가 소개된다. 그리고 대망의 나치 부총통 루돌프 헤스. 또 한 명은 더글러스 켈리와 치열한 나치 전범 심리 분석 대결을 펼칠 심리학자 구스타브 길버트다. 켈리와 길버트에 의한 나치 전범 심리 분석이 시작되는 동시에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으로의 길 또한 열린다. 이 재판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책의 한 축을 이루며 흥미진진하게 나아간다. 일찍이 들어본 적 없는 상황들이다. 


책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위에서 열거한 나치 전범 네 명에 대한 케리와 길버트의 심리 분석. 이 악마들을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먼저 로베르트 레이, 광적인 히틀러 추종자로 반유대주의자였지만 전쟁 중에 행한 활동을 뉘우치기도 한 복잡다다한 인물이었다. 전범 중 유일하게 뇌를 부검할 수 있었는데, 실제로 뇌에 손상이 있었던 만큼 많은 이들이 그의 악을 손상된 뇌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았다. 


루돌프 헤스 또한 같은 맥락이다. 그는 오늘날 병명으로 하면 '편집성 조현병'이라 할 수 있는데, 정신분열증을 겪은 것이다. 거기에 당시 기억상실증도 겪었다고 하지만 꾀병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정신병은 인정되어 사형당하지 않고 종신형을 받았다. 이들의 '악'은 말그대로 뇌의 '이상'에서 비롯된 것일까. 


반면 헤르만 괴링은 '진정한' 나치였다. 그는 감옥에서 자살했는데, 그 이유가 연합국 측에 모욕을 안기고 순교하려는 의도였을 정도다. 그는 사과도 변명도 일절 하지 않았고, 재판에서 외려 연합국 측과 치열하게 공방해 일말의 승리를 얻기도 했다. 그는 엄청난 매력의 소유자인 동시에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사람이었다. 저자는 그를 '호감형 사이코패스'라 칭한다. 


율리우스 스트라이허는 어땠을까. 저자가 단도직입적으로 '나쁜 남자'라 칭하는 그는, 여기서 소개한 여타 나치 전범들과는 다르게 장점이라곤 찾을 수 없는 완전하게 비열한 인물이다. 그는 성격에 '장애'가 있는 게 아니고, 성격이 심각하게 나쁜 거였다. 같은 편조차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나치 전범은 악의 화신인가, 악은 어디서든 자라날 수 있는가


이들의 심리를 분석하며 더글라스 켈리가 내린 결론은 이들이 지극히 평범하거니와 비정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저 과도한 야망, 낮은 윤리기준, 강한 민족주의를 가졌을 뿐이었다고 말한다. 누구에게나 일말의 악은 있으며 이를 결정짓는 것은 사회적 맥락이라는 게 켈리 주장의 핵심이다. 


반면 구스타브 길버트는 나치 전범들이야말로 악의 화신, 악마의 사이코패스라고 말한다. 그들의 악은 특수한 악의 범주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미 나치 전범들이 악이라는 명제를 모든 주장의 전제에 놓았다. 사실 길버트의 주장은 당시 전 세계적인 대세였다. 그와 같은 악행을 저지른 나치 전범들을 일반인과 같은 평범의 범주 안에 놓는 걸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길버트가 가난한 유대인 망명자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객관적 대신 주관적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저자의 시선은 당대에는 비주류였지만 추후 심리학의 핵심을 이루는 켈리의 주장에 가 닿아 있다. 악은 어디서든 자라날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이 악에 대한 다양한 사회심리학적 해석 발전의 토대가 된 것이다. 이후 대단히 영향력 있는 연구 네 건이 이 관점의 함의들을 파고들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학자들과 그들의 연구다. 


먼저 한나 아렌트, <예수살렘의 아이히만>으로 더 없이 유명한 그녀의 '악의 평범성'은 켈리의 주장을 정통으로 잇는 연구다. 그녀는 이에 '악은 주변을 폐허로 만들어버리는 곰팡이 같은 것. 그것에 깊이나 악마적 차원은 없다'고 말했다. 스탠리 밀그램은 '복종'에 대해 연구했다. 그렇게 얻은 결론은 정상적인 사람들도 비정상적인 지시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한 개인이 스스로를 타인이 원하는 일을 수행하는 도구로 보게 되어, 더 이상 자신을 행위의 책임 주체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존 달리와 빕 라타네의 '방관자 무관심' 실험도 켈리를 잇는다. 1964년 3월 뉴욕 시의 제노비스 살인 사건이 세계를 뒤흔든다. 38명이 살인 현장을 목격했지만 아무도 돕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실험을 통해 어느 목격자가 다른 목격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도출해냈다. 마지막으로 필립 짐바르도는 '스탠퍼드 감옥 실험'을 강행한다. <엑스페리먼트>라는 영화가 이 실험을 바탕으로 해서 약간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역할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이 한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도출해낸다. 사회적 맥락은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저열함을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길버트의 뒤를 이은 주장은? 켈리의 주장 전통에는 빈 서판으로 세상에 태어나 타자들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태를 갖추게 된다는 대전제가 있다. 하지만 애초에 빈 서판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기본값이 훨씬 더 어두운 쪽에 치우쳐 있다면? 사이코패스, 즉 나쁜 뇌, 병든 뇌가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 무엇으로도, 아니 정확히는 나치 전범의 심리를 분석한 켈리와 길버트가 남긴 것들로는 진정한 '악'의 근원을 알 수 없었다. 저자는 실망을 금치 못했지만, 생각 끝에 켈리와 길버트 모두가 옮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켈리는 모든 사람에게서 약간씩의 어둠을 찾아냈고, 길버트는 몇몇 사람들에게서 보기 드문 어둠을 찾아냈다는 것. 악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섬뜩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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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박찬욱 스타일의 모든 것을 보여준 영화 <복수는 나의 것>.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CJ 엔터테인먼트

 


자타공인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영화 감독 중 한 명, 박찬욱.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로 국내를, 2003년 <올드보이>로 해외를 접수하면서 지금의 박찬욱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시작은 미약하였다. 자그마치 25년 전인 1992년 <달은... 해가 꾸는 꿈>이라는 들어본 적 없는 데뷔작과 1997년 <3인조>라는 작품 모두 실패하며 암흑의 초창기를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 2002년의 <복수는 나의 것>이 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복수는 나의 것>은 박찬욱 감독 최고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로 데뷔 10여 년만에 입지를 다진 후 그 여세를 몰아 자신만의 색깔을 오롯이 입힌 영화를 만드는데, 그것이 이 작품이다. 박찬욱 영화를 지켜봐았던 사람이든, 박찬욱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이든 단번에 '박찬욱 영화'라는 걸 알 수 있게 해준다. 폭력, 하드보일드, 아이러니, 극단의 조화, 블랙코미디, 미장센...


박찬욱 영화들이 그렇듯 <복수는 나의 것> 또한 절대로 마음 편하게 즐길 수는 없을 거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불편할 것이며, 보고 난 후에도 계속 괴롭힐 것이다. 물론 그 불편함들을 충분히 감수하고도 남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영화이기에 후회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린 이 영화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인간에 대해서...


복수는 그들 모두의 것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복수의 뫼비우스의 띠. 그거 참... ⓒCJ 엔터테인먼트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류(신하균 분)는 신부전증을 앓고 있는 누나(임지은 분)가 있다. 누나는 반드시 신장을 이식받아야만 살 수 있는 상황인데, 혈액형이 다른 류는 신장을 이식하지 못한다. 조급한 마음에 천만 원을 가지고 아무도 몰래 장기밀매업자를 찾아가 자신의 신장을 떼어주는 대신 누나에게 이식할 수 있는 신장을 받기로 거래하는 류, 사기를 당한다. 


그때 병원에서 좋지만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온다. 누나에게 이식할 수 있는 신장을 찾았다는 것... 천만 원만 있으면 수술이 가능하다는 것... 이 사실을 알게 된 류의 여자친구 영미(배두나 분)는 일단 류를 쥐어패고는 일명 '착한 유괴'론을 설파하며 천만 원을 구할 방도를 제시한다. 잘나가는 사장님 자식을 납치해서는 잘 대해주고 딱 천만 원만 받으면 바로 아이를 돌려주는 것. 


류와 영미는 중소기업 사장 동진(송강호 분)의 딸 유선(한보배 분)을 타겟으로 삼는다. 그들 스스로가 약속한대로 유선을 마치 딸처럼 잘 보살핀다. 그리고는 곧 동진에게 협박편지를 보내 천만 원을 받아낸다. 하지만 당일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잇따른다. 자신 때문에 아이를 유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류의 누나가 자살하고, 류가 강가에 누나를 묻고 있는 사이에 함께 온 유선이 물에 빠져 죽는다...


이제 시작된다. 류와 동진의 한 맺힌 복수가. 아무 잘못도 없는 딸을 유괴해 죽음까지 이르게 한 류와 영미를 향한 피의 복수, 역시 아무 잘못도 없는 자신의 천만 원과 신장을 갈취한 장기밀매업자를 향한 피의 복수, 그리고 조직에 속해 있는 영미를 죽인 동진을 향한 피의 복수까지. 그야말로 복수는 그들 모두의 것이다. 


복수할 상황에 처할 이유가 없는 이들에 남은 것, 복수


복수할 상황이 그들에게 갑자기 닥쳤다. 그저 복수를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CJ 엔터테인먼트



다름 아닌 가족, 그것도 삶의 이유와 마찬가지인 가족의 죽음이 눈앞에 당도했다. 동진은 사실 잘나가는 사장님이 아니다. 일에만 몰두하다 이혼을 하고 아이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 회사마저 어려운 지경이었던 것을, 그래서 더욱 아이만 바라보고 있었던 그때 아이가 유괴당하고 죽기까지 한 것이다. 그에게 남은 게 복수밖에 더 있겠는가. 


류는 힘든 것도 그렇게 힘든 게 없는 주물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하루 아침에 해고당한 처지다. 거기에 누나의 치료비로 모아두었던 유일한 천만 원을 사기 당했다. 나름 방책을 연구해 '착한 유괴'를 실행에 옮기고 성공을 눈앞에 뒀는데 누나가 자살을 택하고 만다. 그에게 남은 게 복수밖에 더 있겠는가. 


잔인해도 이렇게 잔인한 복수가 없다. 눈이 찌뿌려지고 헉 소리가 나고 흠칫 놀란다. 우린 그동안 이보다 더 한 잔인함이 동반된 영화들을 무수히 많이 봐왔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이고. 그리고 이 영화가 복수에 초점을 맞췄기로 복수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행위가 눈에 띄는 건 행위의 연유와 사연의 처연함과 서늘함에 있겠다. 그들은 복수할 이유는 있었지만 복수할 상황에 처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외적 하이라이트는 류와 동진의 복수에 있지만, 주요 쟁점은 동진의 천만 원을 갈취하고 류의 누나가 자살하고 동진의 아이가 물에 빠져 죽는 그때에 있으며, 우리가 생각해야 할 곳은 영화의 초반에 있는 것이다. 물론 류와 동진의 복수에서 연유하는 '악'의 개념도 생각해야 할 지점이다. 박찬욱 감독은 앞의 생각 지점보다 뒤의 생각 지점, 즉 악의 개념 또는 인간의 본성에 더 중점을 두었을 것이다. 


복수의 잔인함보다 초첨을 맞춰야 하는 곳


이 영화의 복수는 지극히 잔인하다. 하지만 눈을 크게 뜨고 복수를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CJ 엔터테인먼트



두 주요 지점이 사실 진부한 논의가 발화되는 곳이기는 하다. 류와 동진이 복수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궁극적인 이유가 이 사회에 있다는 것. 밑바닥의 소외계층과 망한 상류층 간의 대결 구도.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그들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고, 왜 하필 그들끼리 서로 싸우게 된 것인가. 


그들과 똑같은 처지에 있는 누군가에겐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걸 보면 그들의 능력 또는 운명이겠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어디로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능력론과 운명론. 영화에서 장기밀매업자의 사기 행각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비롯 많은 '만약에'들에 안타까움을 표할 수밖에 없는데, 일개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성질의 것들이다. 누가 해줄 수 있을까, 누가 해야만 할까. 


일련의 행위 원인을 들여다보았다면, 일련의 행위 결과를 들여다볼 차례다. 물론 영화에 나온 두 캐릭터들로만 일반화시킬 순 절대 없겠지만, 작은 표본을 도출할 순 있을 것이다. 이들의 행위 자체는 아무리 자신의 삶의 이유를 잃고 남은 삶을 포기해버렸기로서니 분명 악마적이다. 직접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했으니 더욱더.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온 그들에게 '악마'의 타이틀을 붙일 순 없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 같은 짓을 저질렀지만 사이코패스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안나 하렌트가 아이히만을 두고 주장한 '악의 평범성'을 대입할 수 있을까. 거기에 어떤 깊이나 악마적 차원은 없었던 만큼 최소한 어느 정도는 맞는 면이 있겠다. 


그들은 내재된 악마의 목소리를 따랐다기보다, 상황이 던진 복수의 목소리를 따랐다. 즉, 누구도 그런 상황에 처하면 그정도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그에 버금가는 짓을 행할 수 있는 요지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이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행했다는 것처럼, 그들도 그저 그들에게 주어진 복수의 임무를 충실히 아니, 어쩔 수 없이 행했다. "너 착한놈인 거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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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킬러의 보디가드>


2015년 <킹스맨>과 2016년 <데드풀>의 만남이자 두 영화 2편의 사전 맛보기라 할 수 있겠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저급하리만치 돼먹지 못한 말들의 향연에 의한 코믹, 지극한 사실성과 과도한 잔인성을 앞세워 오히려 현실감 없이 재밌게만 느껴지는 액션의 극단적이고 모순적인 조합의 영화가 최근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2015년 <킹스맨>과 2016년 <데드풀>이 그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데, B급의 메이저화 또는 메이저의 B급화이겠다. 


공교롭게도, 아니 의도한 것이겠지만 두 영화에서 극단적 조합에 결정적 역할을 한 두 배우가 한 영화에서 뭉쳤다. 제목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흐르는, <킬러의 보디가드>. <킹스맨>의 라이언 레이놀즈와 <데드풀>의 사무엘 L. 잭슨이 그들인데, 성공적 캐릭터를 거의 그대로 가져 왔다. 


백인과 흑인의 버디 케미 코믹 액션은 1980~90년대 <리셀웨폰> 시리즈, 1990~2000년대 <러시아워> 시리즈로 상종가를 쳤다. 자신의 한계를 완벽히 깨닫고 그 한계 내에서 자기 위치성을 뽐내며 시대가 원하는, 즉 대중이 원하는 입맛에 취합하기도 하고 오히려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기도 했다. <킬러의 보디가드> 역시 다분히 킬링타임용 일회성 무비라 칭하겠지만 가히 역대급의 자기 위치성을 뽐냈다. 현재 비슷한 시기에 나와 훨씬 월등한 위용을 뽐내는 <청년 경찰>과 비교해보는 것도 한 재미겠다. 


복잡한듯, 단조로운


내용은 뭐, 적당히 꼬아서 적당히 마무리 한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내용은 복잡한듯 단조롭다. 가타부타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고 바로 인물의 사연과 함께 캐릭터성을 선보인다. 자칭 '트리플 A'급 보디가드 마이클 브라이스(라이언 레이놀즈 분)는 특급 고객을 지키지 못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는 마약에 쩔은 변호사 보디가드나 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재판석에 앉게 된 벨라루스 대통령이자 독재자 두코비치(게리 올드만 분), 그는 악행을 증언하려는 증인들을 계속 암살해 무죄로 풀려나고자 한다. 그 와중에 인터폴은 아내의 사면을 조건으로 내밀며 사상 최고 최악의 킬러 다리우스 킨케이드(사무엘 L. 잭슨 분)를 증인으로 내세우고자 한다. 하지만 역시나 두코비치의 표적이 되어 재판이 열리는 국제형사재판소로 향하는 길이 만만치 않다. 


이에 킨케이드 운반 책임자이자 브라이스의 옛 연인 아멜리아는 브라이스의 트리플 A급 복귀를 돕겠다는 조건으로 브라이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브라이스와 킨케이드는 30번 가까이 서로를 죽이고자 했었던 철천지 원수지간, 서로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가 유일하게 서로인 만큼 실력 하나는 최고인 사이. 과연 이들은 모든 악연을 뒤로 하고 서로를 지키며 안전하게 국제형사재판소로 가서 두코비치를 끌어내리는 결정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두 주인공의 다양한 합(合), 케미


모든 게 완전히 다른 두 주인공의 합(合)이 영화의 모든 걸 이룬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영화는 브라이스와 킨케이드의 합(合)으로 거의 모든 걸 처리한다. 전작에서 엄청난 말빨을 선보였던 그들의 녹슬지 않은 욕의 향연의 합, 길지 않았지만 절정 고수들인 그들간의 맨몸 액션의 합, 정반대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다른 성격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게 되는 극단끼리 통하는 합, 그리고 절묘하진 않지만 적어도 삐그덕거리지는 않는 시나리오의 합까지. '케미'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중에서 이 영화가 재미있는 결정적 이유는 다름 아닌 시종일관 쉬지 않고 나불대는 말 대결에 있다. 한마디 한마디 절대로 빠지지 않는 쌍욕은 덤이다. 그리고 그에 상반되는 느낌의 액션도 중요하다. 모든 액션이 다 그렇진 않지만, 상당히 진중하고 굉장히 사실적이다. 잔인하다는 얘기다. 


<킹스맨>과 <데드풀>은 이 지점에서 다시금 불려나온다. 관객은 이 두 영화 덕분에 수많은 전작에서 로맨틱하고 진중한 분위기를 선사한 이 두 영화배우가 이토록 코믹하고 잔인한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에 하등 기시감을 느끼지 못한다. 아주 친근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 둘은 여자와의 관계로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서로를 돕는다. 악의 화신이라 할 만한 킨케이드는 사랑의 화신이고, 고객을 지키는 게 일인 브라이스는 자기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한다. 이 영화를 이루는 여러 모순적 재미들의 모습이 여기에도 통용되는 것이다. 


결국 사랑이다


B급 정서가 다분한 '바퀴벌레'의 사랑을 보여주는, 그들만의 사랑 방정식이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그렇다면, 여러 의미로 살인마(?)들인 이들이 꼼짝 못하는 여인들은 영화에서 어떻게 비춰질까? 죽음과 함께 하는 '바깥' 일을 하는 남자에 비해 여자는? 여자도 마찬가지로 죽음과 함께 한다. 즉 동종업계에서 일하는 이들이다. 비록 영화 전체적으로는 조력자에 불과하지만, 이 남자들보다 훨씬 더 강단 있는 모습을 비롯해 좌중을 압도하는 모습도 선보인다. 


전쟁 중에도 사랑은 꽃핀다고 했던가. 자칫 증언 허락 시간에 늦어 두코비치가 풀려날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수줍게 사랑을 고백하는 브라이스나 두코비치의 암살자들이 맹렬히 쫓아오는 와중에도 여유롭게 브라이스의 속마음을 전해주는 킨케이드의 모습은, 상황에 맞지 않는 어이없음을 전해주기보다 은은한 웃음꽃을 전해주기에 충분하다. 


결국 사랑이다. 이 영화에서 사랑은, 특히 킨케이드 부부의 사랑은 다분히 영화의 병맛적인 느낌을 극도로 살리기 위한 장치일지 모르나 그럼에도 얼굴이 찌뿌려지지 않고 박장대소에 가까운 웃음이나마 보낼 수 있는 건, 우리 모두 사랑을 향한 열망이 그만큼 크고 사랑을 대하는 방식과 눈이 그만큼 유하다는 반증이겠다. 


이 영화에서 뭔가를 끄집어내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반면 이 영화를 통해 내 안의 무엇을 끄집어내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저 마음 놓고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하나씩 하나씩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게 욕이든, 웃음이든, 환희든, 살인 충동이든, 사랑 열망이든,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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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온다 리쿠의 <꿀벌과 천둥>


<꿀벌과 천둥> 표지 ⓒ현대문학



중2 음악 시간, 선생님께서 종종 수업 대신으로 영화 한 편을 보여주셨다. 족히 20년은 흐른 지금까지도 개인적인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꼽는 <아마데우스>를 그때 처음 보았고, 여전히 뒷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절정의 영화 <파리넬리>도 그 시간을 통해 처음 보았다. 공교롭게도 둘 다 서양 클래식 음악을 다뤘고 그 덕분인지 몰라도 오랫동안 클래식은 나의 조그마한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유독 그때 그 음악 시간은 클래식 음악 숙제가 많았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의 대표곡들을 듣고 감상문을 써오는 숙제, 직접 오페라 콘서트 실황을 보고 감상문을 써오는 숙제 등. 우리나라 교육의 폐해였을까. 악기를 직접 연주하는 건 리코더나 멜로디언 정도였고, 나머진 사실 글쓰기 과제였던 거다. 


음악 감상의 느낌을 글로 쓰는 건 고역이었다. 머리가 훨씬 큰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로 아예 한 글자도 쓰지 못할 것 같은데, 감정이 팔팔한 그 나이대에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묘사가 태반을 차지한다는 걸 알고 일본 만화에서 참조한 적도 있는 것 같다. 당시 한창 <미스터 초밥왕>을 열독했었는데, 거기엔 무수히 다양한 묘사들이 있었다. 나중에는 <신의 물방울>이 이어받았으려나. 하여튼 일본 음식 만화가 답이었다. 


온다 리쿠 스타일의 절정


일본이 자랑하는 온다 리쿠 작가의 신작 <꿀벌과 천둥>(현대문학)을 보고 있으려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 굴지의 피아니스트 콩쿠르 오디션의 전초전 격인 일본의 요시가에 피아노 콩쿠르 이야기를 다룬 소설로, 일명 온다 리쿠 스타일의 정점이다. 뭐랄까, 오그라들다 못해 민망한 스토리와 캐릭터를 아주 진지하게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랄까. 극단적으로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소설은 일본 소년 성장 만화의 영향을 극단적으로 받았다 못해 낳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슬램덩크>를 필두로 하는 천재와 둔재의 성장과 경쟁의 한 시절, <신의 물방울>을 필두로 하는 민망하지만 헤어나오지 못하는 묘사의 절정이 모두 이 한 소설에 집약되어 있다. 


주인공은 한 명이 아니라 네 명, 여지없이 모두 천재적이고 구구절절 사연이 있고 확고한 캐릭터성이 있다. 양봉가 아버지를 따라 떠도는 10대 중반의 최연소 천재 소년 가자마 진이 전설적인 음악가 호프만의 추천서와 절대적인 자유로움으로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가운데 다른 세 명이 각자의 자리에서 경쟁을 벌인다. 


천재 중 천재로 불렸지만 어머니의 죽음으로 갑작스럽게 무대를 떠났다고 부활의 날개짓을 하는 소녀 에이덴 아야, 완벽 그 자체로 모두를 압도하는 줄리아드 음악원 출신 소년 마사루 카를로스 레비 아나톨, 그리고 어렸을 때 음악을 전공했었지만 악기점 점원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20대 후반의 최고령 다카시마 아카시까지.


피아노 연주를 글로 표현해내는, 이 소설의 백미


엄청난 양을 자랑하는 작품임에도 헤어나오기 힘든 흡입성을 보이는 건 이미 일본 현지에서 입증되었다. 제156회 나오키상과 제14회 서점대상을 최초로 동시 수상하는 영예를 받은 것. 둘 다 지극히 대중성과 거리가 가까운 상들인데, '읽히는 소설'을 쓰는 온다 리쿠 앞에서 작품성 운운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되묻게 된다. 나아가 작품성이라는 게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중간하면, 욕하면서 시간때우기용으로 적당히 볼 것이다. 수많은 콘텐츠들이 그런 취급을 받고 있지 않은가. 물론 그런 취급을 받을 줄 알면서 그렇게 만든 것이겠지만. 그런데 이 소설 <꿀벌과 천둥>은 그걸 넘어선 듯하다. 피아노라는 예술의 한 면을 다뤄서가 아니라, 이쯤 되는 캐릭터와 묘사에의 열정이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분량이 워낙 길기도 했고, 1차 예선이니 2차 예선이니 해서 구분도 되어 있고, 주인공마다 챕터가 확연히 갈라져 있어, 중간 중간 쉬면서 다른 책들도 보면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봤음에도 그때마다 주인공들이 확연히 되살아날 정도였다. 굳이 책을 앞에서 다시 일별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머릿속에 그 형상이 잡혀 지워지지 않게 된 것이다. 자칫 가소로워 보이는 캐릭터들을 얼마나 연구했을지 상상이 안 갈 정도로. 


무엇보다 이 소설의 백미이자 하이라이트는 다양한 개성을 가진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글로 표현해낸 부분들이라 하겠다. 몇 쪽에 걸쳐 펼쳐지는 각종 묘사의 향연은 솔직히 한 번 웃지 않고 지나갈 사람 없을 만한 민망함을 깔고 있지만, 작가가 소설을 통해 연주를 표현한 것처럼 '비범하고 환상적이다'. 그때만큼은 '소설의 신'이 내려온 것 같다... 종종 온다 리쿠를 찾을 것 같다. 매일 건강에 좋지만 맛은 그다지 없는 음식만 먹을 순 없으니, 종종 한없이 달콤하고 맛있는 디저트도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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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윤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우리들>


여러 수작 단편을 쏟아내고는 멋진 장편 데뷔작 <우리들>을 들고온 윤가은 감독이다. ⓒ엣나인필름



두 명이서 가위바위보를 해 함께 하고 싶은 한 명씩을 데려와 편을 가르는 방법을 택한 어느 체육 시간 피구 게임, 선이는 어느 쪽에서도 선택받지 못한 최후의 일인이 되었다. 왕따는 아닌 듯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외톨이인 듯하다. 키도 크고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리더십도 있는 보라는 그런 선이를 이용해 먹기도 한다. 


보라의 부탁으로 방학식 날에 홀로 남아 반 전체를 청소하는 선이, 전학을 왔다는 지아를 우연히 마주친다. 보라의 치졸한 속임수 때문에 다리 위에서 실의에 빠져 있는 선이, 다리를 지나던 지아와 우연히 마주친다. 둘은 금새 친해지고 선이는 보라를 주려던 수제팔찌를 지아에게 준다. 둘은 생애 다시 없을 것만 같은 방학 한때를 보낸다. 


지아의 부모님은 지아가 초등학교 1학년일 때 이혼을 하셨다. 그 때문인지 선이가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살가운 시간을 갖는 모습을 본 후 왠지 모를 적대감이 생기는 지아다. 그래도 그건 금새 풀었다. 하지만 지아가 영어학원을 다니고, 그곳에 다른 누구도 아닌 보라가 있었고, 개학을 하며 지아가 정식으로 전학을 오게 되며, 선이와 지아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진다. 지아는 선이를 본 척도 않고 보라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 이후 선이와 지아와 보라의 물고 물리는 관계가 계속되는데...


어른들이 무시했던, 아이들의 무시무시한 세상


누구나 지나왔을 어린 시절, 여러모로 '무시무시'했던 그때를 어린이 되고서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엣나인필름



2016년 최고의 수작 중 하나라 할 만한 영화 <우리들>. <손님> <콩나물> 등으로 단편영화계에 신기원을 이룩한 윤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독립예술영화계에선 거물로 통할 만한 '엣나인필름'이 배급을 맡아 온전한 '독립영화'라고 할 순 없을 것 같지만, 대신 '예술영화'로 포지션하여 다양성영화의 훌륭한 계류라고 보면 될 것이다. 


윤 감독은 앞선 두 대표 단편에서 어른이 되기 전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뤘는데, <우리들>로 그 재능과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무시하곤 한다. 한없이 동물에 가까운 본성을 지닌, 아직 이성적 존재 인간이 덜 된, 생각 따윈 없고 본능을 따를 뿐인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찌들대로 찌들고 죄질대로 진 어른 세상의 해법이 무지의 순수한 아이들에게 있다고까지 한다. 


하지만 우린 이 영화에서 아이들의 치명적 관계 유착과 되물림, 권력에의 의지와 빌붙음을 목격할 수 있다. 그야말로 어른들의 세상, 그중에서도 지독하기 그지 없는 막장 인간들의 관계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을 말이다. 차라리 어른들의 세상이 더 유치한 것 같은 이유는, 그만큼 아이들의 세상을 무시했다는 방증이겠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를 불러온다. 특히 영화에서 선이에게 특별한 깨달음을 안기는 선이의 남동생, 어리디어린 윤이는 너무나도 귀여워 '보는 맛'이 날 정도이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어른들이 아이들을 무시한 것처럼 선이는 자신보다 어린 윤이를 무시했다. 영화는 올려다보는 깨달음이 아닌 내려다보는 깨달음이라는 신선한 깨달음을 선사한다. 


예리하고 섬세하고 긴장감 있게 파고드는 '관계'


영화 <우리들>의 첫 번째 주요 키워드는 '관계'다. ⓒ엣나인필름



'관계'라는 미묘하기 짝이 없는 건 아이들이고 어른이고 평생을 가도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한다. 어떤 관계가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올바른 것인지, 바르지 못한 것인지, 괜찮은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오랫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그나마 괜찮은 관계가 무엇인지 모색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콘텐츠는 관계의, 관계에 의한, 관계를 위한 것이다. <우리들> 또한, 아니 <우리들>야말로 '관계'를 예리하고 섬세하고 긴장감 있게 파고드는데, 지극히 아이들의 시선과 생각과 행동으로 볼 수 있다는 메리트가 크게 다가온다. 빈 곳 없이 잘 표현해낸 주인공 아이들의 노력 덕분이겠다. 


2011년 최고작 <파수꾼>이 떠오르는 건 다름 아닌 관계에 대한 천착 때문이다. 다만 <파수꾼>이 '관계'가 주인공에 다름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관계에 있는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필히 비극이 찾아올 수밖에 없는 <파수꾼>, 반면 희극에의 희망이 있는 <우리들>. 개인적으로 손이 가는 영화는 앞엣것이다. 


생애 다시 없을 한때를 보낸 이들에게 파국이 찾아오는 건 한순간이고 그 이유도 하찮기 그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한 번 틀어진 관계를 다시 잇는 건 너무나도 어렵다. 그런데, 그러면 누구랑 노나? 친구가 가장 소중할 때에 말이다. 매일 가장 친한 친구랑 티격태격하며 자주 맞고 다니지만, 그 친구가 아니면 누구랑 노냐는 윤이의 말이 가슴 깊숙히 와 닿는다. 


문제면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누군가는 먼저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가. 관계가 틀어짐에 있어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동등하게 피해를 입혔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반드시라고 할 만큼 한 명이 자신을 굽히고 다가가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지는 게 이기는 거다' 따위의 깨달음을 알 것 같진 않고, 아이들이 그런 깨달음을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또 하나의 키워드 '권력'


영화 <우리들>의 두 번째 주요 키워드는 '권력'이다. ⓒ엣나인필름



'관계'와 함께 <우리들>의 중요한 키워드는 '권력'이겠다. 관계가 선이와 지아를 천착하는 거라면, 권력은 보라를 중심으로 역시 선이와 지아를 천착하는 것이겠다. 앞서 주지했듯 보라는 한 마디로 모든 걸 가진 아이다. 그리고 모든 걸 가져야만 하는 아이다. 그녀에게 존재감 없는 외톨이 선이는 '아웃 오브 안중'이다. 그럼에도 선이는 보라와 보라가 이끄는 소그룹을 선망한다. 


와중에 방학 중 선이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개학해 정식으로 전학을 오게 된 지아, 선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많은 걸 숨기고 거짓말로 점철한 채 영어학원을 다니며 친해진 보라와 함께 한다. 아니, 보라가 지아를 자신의 그룹에 끼워준 것이겠다. 지아가 숨기고 거짓말을 한 것 중에는, 전 학교에서 왕따였다는 것과 엄마가 영국에 계신다는 것과 영국에 가봤다는 것 등이었다. 


선이는 그 모든 걸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폭로한다. 첩첩산중으로, 보라는 이미 자신의 영원한 공부 1등 자리를 뺏어간 지아와 격렬히 대치 중이었다. 자연스레 보라와 선이가 한패가 되고 지아가 외톨이가 되는 형국으로 권력이동이 실시된다. 관계 못지 않게 권력의 속성이란 게 참으로 하찮고 한순간이다. 그런 중에 인간이 인간다움을 지킬 요량이 많지 않다. 선이, 지아, 보라 중 누가 가능할까. 


영화에서 선이가 자신과 지아에게 물들여준 봉숭아물, 보라의 매니큐어를 따라한 지아의 매니큐어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관계와 권력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건 선이와 지아가 함께 한 봉숭아물일까, 보라와 보라를 따라한 지아의 매니큐어일까. 나는 '당연히' 권력과 관계를 응원한다. 선이와 지아가 함께 한 봉숭아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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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레이디 맥베스>


고전적 캐릭터 '레이디 맥베스'가 기본 골자 위에 입체적으로 재탄생했다. ⓒ씨네룩스



온몸을 뒤덮는 베일을 쓴 한 소녀, 불안한 눈빛으로 두리번 거린다. 보이진 않지만 옆에는 남편될 사람인 듯하고, 뒤에는 늙은 남자와 흑인 여자가 서 있다. 결혼식이다. 뭔가가 빠져 있는 결혼식. 곧이어 첫날밤, 모습을 드러낸 남편은 소녀 캐서린(플로렌스 퓨 분)에게 벗으라고 명령하고는 혼자 침대로 들어가 몸을 돌려버린다. 이해할 수 없는 첫날밤. 일반적인 결혼식과 첫날밤의 모습이 아니다. 


19세기 영국, 알고 보니 캐서린은 탄광을 소유한 명가에 팔려온 이였다. 남편은 원하지 않았고 남편이 극도로 싫어하고 증오하는 아버지가 사온 것. 일련의 이상함들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캐서린이 이 집에서 할 일은 없다. 집에서 나가지 말고 가만히 성경이나 읽고 있으면 된다. 여자로서의 본분을 지키면 되는 것이다. 더욱이 그녀는 이 집의 여주인이기 전에, 하인들과 마찬가지로 시아버지의 재산에 불과하다. 


무료함 때문인지 천성 때문인지 캐서린은 시아버지와 남편의 말에 고분고분하지는 않다. 무표정해 보이는 표정에서부터 알 수 있다. 어느 날 탄광이 폭발해 남편과 시아버지 모두 집을 비운다. 그 때문인지 집안 남자 하인들이 단체로 흑인 여자 하인 안나에게 몹쓸 짓을 한다. 이를 목격한 캐서린, 안나를 구해주는데 그중 한 명인 세바스찬에게 기묘한 욕정을 느낀다. 그렇게 흔하디 흔한 주인 마님-하인의 희비극 러브스토리가 펼쳐지는 듯하다. 


레이디 맥베스의 인물상


'욕망의 화신'을 둘러싼 다양한 은유들, 이 영화를 이루는 것들이다. ⓒ씨네룩스



영화 <레이디 맥베스>는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충심으로 가득 찬 최고의 전사 맥베스에게 욕망으로의 결정적 속삭임을 건네는 레이디 맥베스가 생각나는데, 원작은 19세기 러시아의 니콜라이 레스코프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으로 사랑 때문에 3명을 엽기적으로 죽인 한 여인의 이야기다. 그 끝은 좋지 않다.


레이디 맥베스는 이처럼 욕망의 화신이다. 욕망에 사로 잡힌 그 끝에 남은 건 파국뿐이라는 걸 말해왔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레이디 맥베스는 단순한 욕망의 화신 그 이상이다. 그녀의 욕망 안에 담겨 있는 것들이 실로 다양하다는 뜻이거니와, 영화가 거기에서 끄집어내어 은유로서 말하고자 하는 바 역시 실로 다양하다. 


고로 레이디 맥베스의 인물상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여자의 본분을 잊은 채 자주 외출하고 부인의 본분을 잊은 채 하인과 사랑을 나누며 며느리의 본분을 잊은 채 시아버지에게 대들기도 한다. 급기야 살인으로까지 나아간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사이코패스적인 살인 행각, 그 순간들에는 안나와 세바스찬이 있다. 그들의 한없이 괴로워하는 모습에 비춰 캐서린의 무표정이 더욱 눈에 띈다. 


공교롭게도 살인 대상은 모두 남자들, 이쯤 되면 혁명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욕망에 사로 잡혀 미쳐 날뛰는 이의 즉흥적인 살인이 아닌, 완벽하진 않아도 나름의 체계가 잡힌 조직적 살인일 수 있다. 권좌에 앉을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캐서린 그 자신이다. 


혁명과 체제 전복의 파편들


캐서린이 행하는 행각은 가히 엽기적이지만, 다분히 체제 전복의 성격이 담겨 있다. ⓒ씨네룩스



캐서린은 시각에 따라 살인보다 더 생각하기 힘든 행각도 벌인다. 재산에 불과한 하녀 안나를 자신과 한 식탁에 앉게 하기도 하고, 역시 재산에 불과한 세바스찬을 주인처럼 차려 입게 하고는 자신과 한 식탁에 앉히기도 한다. 주인 없는 곳에서 권력을 누릴 양으로 욕망 분출에의 욕망의 모습일지 모르지만, 은유로 자리잡기 충분한 모양새다. 


그건 곧 뜻했건 뜻하지 않았건 여성, 계급, 인종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혁명과 체제 전복의 파편들이다. 최소한 캐서린은 뜻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원작과 다른 길을 택한 영화로서는 완벽히 뜻한 모습이다. 그녀 자신이 여성으로서의 본분 따위를 던져버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욕망을 분출하고 있고, 계급의 경계를 한순간이나마 무너뜨려버렸으며, 자연스레 인종 간에 가지는 높낮이를 수평으로 만들었다.


영화는 이 모든 것들을 지극히 캐서린의 입장에서, 캐서린의 생각과 행동 하에 집행함으로서 그 자체의 소구점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다. 즉, 캐서린이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다양한 선린들임과 동시에, 그리하여 캐서린이 입체적 인물이 되게끔 도와준다. 등장인물 모두, 사건들 모두, 요소들 모두 캐서린의 작품이자 캐서린을 이루는 것들이다. 


이뿐만 아니다. 영화에서 가장 대립적인 것은 다름 아닌 집안과 집밖이다. 정확한 좌우대칭의, 거기에 있어야 하는 것들이 반드시 거기에 있는, 절대 그곳에서 빠져나가선 안 되는 집안의 모습. 이에 반해 집밖으로 조금만 가면 펼쳐진 대자연의 정형화되지 않은 날 것의 모습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앞서 숨이 탁 트이는 한숨을 자아낸다. 캐서린은 집밖으로 도피하려는 것 같지만 무엇보다 집안을 가지려는 여인이다. 


시대를 지배하고 개개인을 억누르는 상(像)


지극히 단조롭고 정형화되고 제한적인 집에서 날 것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조차 해선 안 되는 일이었으니... ⓒ씨네룩스



영화가 다분히 캐서린을 따라가려 하다 보니 집밖의 날 것 느낌을 눈 씻고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 없다. 그녀가 집안에서 머리를 바짝 묶고 단색의 드레스를 입은 채 무표정으로 조신하게 앉아 있는 모습보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집시풍(?)의 드레스를 입은 채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바람을 맞는 강가의 모습이 훨씬 아름답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잠시 잠깐의 일탈로 보일 뿐이다. 그녀는 어느새 집안을 더 중요시 한다. 


그러다 보니, 영화는 집안을 극도로 제한적으로 보여주며 시대를 지배하고 개개인을 억누르는 어떤 상(像)을 제시한다. 누군가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다고, 아주 여유롭고 평화로운 삶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그런 집, 그런 상 말이다. 모든 걸 뒤엎을 수 있는, 찾아보기 힘든 캐서린조차 그 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캐서린의 끝은, 즉 영화의 끝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돌이킬 수 없는 사건들을 겪어온 그녀에게 비극은 무엇이고 희극은 무엇일까. 원작처럼 그녀가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게 비극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게 되는 게 희극일까. 그건 영화를 잘 지켜본 이에겐 아무래도 상관 없을지 모르겠다. 


그녀가 보여준 혁명적 생각과 행동들, 그리고 치명적인 사건들은 적어도 우리들에게 무언가를 남겼다. 가장 많은 신경썼을 게 분명한 화면적 미장센의 아름다움은 너무나 당연하거니와, 그 이상으로 신경썼을 것으로 생각되는 스토리적 미장센, 즉 군더더기 없는 역동성의 모순적 진행이 주는 대립의 아름다움이 눈을 확 트이게 하고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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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영속패전론>


<영속패전론> 표지 ⓒ이숲



우리의 역사인식에서 '일본'은 절대 떼려야 뗄 수 없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명을 바꿀 만한 초유의 전쟁인 임진왜란은 그렇다 치더라도, 19세기말에서 20세기, 나아가 21세기에 이르는 일본에 의한 한반도 침략과 수탈과 망언의 역사는 지겹도록 계속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없이 말이다. 


그래, 침략과 수탈까지 다 좋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나라들이 침략과 수탈을 자행했다. 그런데 여전히 계속되는 망언의 이유는 무엇인지, 왜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하기 힘든 언행을 반복하는 것인가.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망언들은 이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궁금하다, 그 메커니즘이. 도대체 왜?


일본의 젊은 정치사상가 시라이 사토시 교수의 <영속패전론>(이숲)은 정녕 허무할 정도로 속시원하게 그 궁금증을 해소해준다. 그건 일본(의 내셔널리즘)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부인'에서 시작된다. 저자는 이것이 전후 일본의 핵심이라고 단언한다. 여기엔 '평화와 번영'이라는 전후 일본의 본래 핵심의 종언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미국에의 종속...


일본 왈, '우리는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


이 책은 다분히 학술적인 면모를 풍기는데, 워낙 시원시원하게 그러면서도 꼼꼼한 자료와 논리를 바탕으로 주장을 밀고 나가기에 지루하지 않다. 분명히 어려운 내용인데 어렵다고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재밌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저자의 주장 흐름이 굉장히 서사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2차 대전에서 무참히 패하며 초토화가 되었음에도 이후 일본은 대번영의 길을 걷는다. 그런 한편 비록 겉으로만 일지라도 평화주의를 표방한다. 하지만 1980년대 유례없는 버블 경제 대붕괴를 겪고 90년대 이후 '잃어버린 20년'의 장기침체에 돌입한다. 번영이 사라지니 평화도 사라진다. 기존의 전후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기조가 자리잡는다. 그 옛날의 '대일본제국', 그리고 영속패전. 


문제는 미국이다. 대일본제국에의 긍정은 곧 미국과의 전쟁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 이미 일본 깊숙이 들어와 있는 미국이다. 그래서 일본은 미국에의 종속을 영위하는 대신 자국을 비롯 아시아를 향해 울부짖는 것이다. 자신들은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결국 그 끝에 있는 건 전쟁이라고, 그리고 종국엔 패배하고 말 거라고. 패전 부인은 다시 패전을 부른다는 것, 영속패전이다. 


정녕 깔끔한 논리의 기막힌 결론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단번에 현재 일본의 정치군사적 상황과 앞으로의 방향, 가장 궁금했던 원인과 이유를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지난 2011년 3.11의 의미도 명백해진다. 번영과 평화라는 전후의 확실한 종말로, 어느 누구도 이 대참사에 책임을 지지 않는 모습이 전쟁 패전을 부인하는 모습과 겹쳐진다. 


일본의 패전 부정, 한국의 식민지 부정


저자는 오에 겐자부로가 나카노 시게하루의 표현을 인용한 "우리는 모욕 속에 살고 있다"를 재인용하며 3.11 이후 일본이 놓여 있는 상황을 적확하게 표현했다. 지난 날을 돌아보자. 우리도 2014년 4.16의 대참사를 당했다. 이후 정부의 움직임은 실로 기괴했다. 3.11에 대한 일본의 '무책임'과 상당히 겹친다. 


우린 그로부터 2년반 후에 시민혁명을 이룩하며 4.16 이후로 계속되어온 무책임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그러며 숱하게 당해왔던 모욕을 어느 정도 풀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라. 저들의 '영속패전'이 그리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지 않는가. 우리네 내셔널리스트들도 똑같이 미국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국내에서는 식민지를 부정하고 있지 않은가. 저들이 패전을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는 이대로라면 결국 또다시 전쟁이 시작되어 불보듯 뻔한 패전의 길로 나아갈 거라 말하는데, 그걸 그대로 우리의 경우에 이식해볼 수 있다. 일본에 의한, 미국에 의한 식민지가 모두 우리를 위해서라고, 덕분에 우리 삶의 질이 더욱더 향상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바람은 결국 또다시 식민지이다. 그래야 그들은 그들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 이외의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 나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 얇은 책 한 권으로 속속들이 완벽히 알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명백히' 알 순 있었던 것 같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모두 모욕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정권이 바뀌고 '우린 해냈다!'고 자평한 지 100일이 훌쩍 지났다. 하지만 우리에게 모욕을 준 이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크고 우렁차다. 또다시 모욕 속에서 살지 않기 위해선 명백히 알거니와 속속들이 알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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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쇼생크 탈출>


어느덧 개봉 20년이 훌쩍 넘은 자타공인 최고의 영화 <쇼생크 탈출>. Best of Best다. ⓒ더 픽쳐스



평생 가장 많이 본 소설은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연히 접하곤 1년마다 꼭 한 번씩은 봐서 최소 10번은 족히 봐왔다. 한국어는 물론 영어로도 중국어로도 봤고, 일본어로는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요즘 몇 년 동안엔 못 보고 있는데, 여전히 내 생애 최고의 소설로 남아 있다. 드라마도 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하얀 거탑> <하이킥 시리즈> <응답하라 시리즈> 등. 


영화는 어떨까. 한국과 미국 것이 나눠진다.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를 참 많이 봤다. 군대 경험이 있는 한국 남자라면 뿜어져 나오는 웃음과 평생 남을 트라우마의 역설로 괴로워하면서 재밌게 볼 것이다. 그리고 스티븐 킹 원작,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쇼생크 탈출>이다. 


스티븐 킹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은 미드의 새로운 신기원을 이룩한 <워킹데드 시리즈> 초창기를 진두지휘한 이로 유명하다. 모르긴 몰라도 많은 이들이 가장 많이 본 영화로 <쇼생크 탈출>을 뽑지 않을까 싶다. TV에서 잊을 만하면 방영되는 결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수많은 명작을 제치고 '네이버 평점'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명작 중의 명작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쇼생크 탈출'의 의미는 무엇일까?


주인공 앤디에게 탈옥, 즉 '쇼생크 탈출'은 자유 그 자체다. 뭐가 더 있겠나. ⓒ더 픽쳐스



영화는 1947년 미국, 전도유망한 은행 부지점장 앤디(팀 로빈슨 분)가 바람난 아내와 그 애인을 총으로 쏴죽인 혐의로 종신형을 언도 받고 '쇼생크' 교도소에 갇히면서 시작된다. 다음날 입소 동기 중 한 명이 잘못 보여 간수장에게 얻어맞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건 으레 있는 일로 치부된다. 이곳의 갇힌 죄수들은 인간 이하 취급을 받으며 소장과 간수장 이하 간수들은 절대적 권력의 소유자들이다.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 모두가 그리 주장하듯이 앤디도 한사코 무죄를 주장한다. 자신은 아내와 그 애인을 죽이고 싶었지만 결코 죽이진 않았다는 것. 곧 쓰러질 것 같이 비리비리한 앤디의 첫인상을 좋지 않게 보았지만 점점 그 결기랄까 아우라랄까에 빠져든 레드(모건 프리먼 분), 그는 이미 20년째 복역 중인 종신형수로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 없는 이다. 앤디는 그에게 상식 밖의 물건들을 요청하곤 한다. 


앤디는 오래지 않아 간수장과 소장의 눈에 띈다. 은행원이라는 점을 이용해 간수장의 세금 문제를 해결해주고 이어 소장의 회계 비서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그건 곧 소장의 비리를, 즉 돈세탁과 세금포탈을 맡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앤디는 우연히 자신의 혐의가 벗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소장이 이를 가로막는다. 어느날 앤디는 방에서 감쪽 같이 사라지는데... '쇼생크 탈출'을 감행한 것일까. 


자유에의 희망


앤디가 역설한다. '자유' 그 자체보다 더 필요한 건 자유에의 '희망'이라고. ⓒ더 픽쳐스



원작자 스티븐 킹은 스릴러공포 장르로 유명하고 또한 정평이 나 있다. 소설도 소설이지만 영화로 나와 엄청난 인기를 얻었는데, <캐리> <샤이닝> <미저리>라는 공포스릴러의 대명사급 영화들이 그것이다. 반면 생각 외로 공포와는 거리가 먼 드라마 장르로도 우리를 설레게 했다. <쇼생크 탈출>을 필두로 <그린 마일> <스탠 바이 미> 등의 영화들이 그것이다. 그는 정녕 장르를 가리지 않는 이야기꾼인 것이다. 


<쇼생크 탈출>은 제목에서도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듯 <몬테크리스토 백작> 이후 '감옥 탈출'이라는 오래되었지만 엄청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모토를 가져왔다. 우리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어떻게' 탈출할지 노심초사, 학수고대하며 지켜볼 수밖에 없다. 얼마나 기상천외한 방법을 선보일까?


하지만 이 영화는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한 것들을 우리에게 선보인다. 그건 '왜' 탈출해야 하는지와 맞물려 있는데, 영화는 시종일관 단순명쾌하게 '자유에의 희망'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 모습은 전적으로 앤디의 행동과 그 행동으로 레드가 유추하는 바를 통해서다. 그리고 몇몇 죄수들의 에피소드들까지. 


앤디는 간수장의 세금 문제를 해결해주는 대신 함께 땡볕 아래서 일하는 동료 죄수들에게 '맥주' 2캔씩을 부탁하고, 한창 소장 밑에서 잘나가고 있을 때 모든 죄수들에게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선사하곤 독방으로 직행한다. 레드에게는 반드시 탈옥하여 완벽한 자유를 선사할 멕시코의 어느 해변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이름으로 함께 사업할 것을 약속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자유'로 수렴된다. 그 장면들이 하나같이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들이다.


'희망을 버리지 말자'는 인생에의 지독한 은유


그렇지만, 희망에의 과정은 너무 가혹하다. 그리고, 자유에의 결과는 더욱 가혹하다. ⓒ더 픽쳐스



마냥 좋을 것만 같은 '자유'의 역설도 잊지 않는다. 장장 50년 동안 교도소에서 생활하다가 이제는 자신의 죄를 완전히 뉘우치고 사회생활을 해도 되겠다고 판단해 풀어준 죄수가 있다. 그는 교도소 내에서 도서관 사서로 꽤 중요한 일을 하며 간수와 죄수 모두에게 두루 신뢰를 얻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밖에 나가면?


죄수들 중에서야 중요하고 신망이 두텁지 일반인 중에서는 죄수 출신 늙은이일 뿐이다. 그는 교도소에서 나가기 전에 사고를 일으켜 형을 연장하고자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교도소를 나가서도 사고를 일으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너무 늦었음을 직감했다. 결국 그가 그가 할 일은 생을 마감하는 것밖에 없었다. 자유를 진정 바라고 그에 준비된 사람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역설을 몸소 보여준 에피소드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딜까, '내가 있고자 하는 곳'은 어딜까. 나에게 자유가 없을 때 과연 끝없이 자유를 탐할 수 있을까. 본래 자유로운 몸이었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실로 오랫동안 자유가 주어지지 않을 때도 여전히 자유를 탐할까, 오히려 자유가 없는 그곳이 더 자유롭다는 역설이 가능하지 않을까. 


문제는 그럼에도 강제로 자유가 주어졌을 때다. 강제로 자유를 빼앗고 다시 강제로 자유를 부여하고. 그보다 더 '강제'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말한다. 희망을 절대 버리지 말라고. 여기서는 '언젠가 반드시 풀려날 거라는' 직접적 희망이겠다. 인생의 부분부분들에 대한 지독한 은유인데, 살면서 진정 자유롭다고 생각할 때가 언제인지, 과연 그런 때가 있긴 한 건지 생각해보면 알 것이다. 실제 감옥을 탈출해서는 안 되겠지만, 인생 감옥에서는 탈출을 꿈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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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로우>


우리나라에 개봉될 게 요원한 프랑스산 호러공포영화 <로우>. 근래 본 공포영화 중 최고라 할 수 있으니, 안타깝다... ⓒ포커스 월드



완고한 채식주의자 부모님 밑에서 채식주의자로 살아가는 쥐스틴, 어쩐지 불안한 심리와 어딘지 불편한 몸의 상태가 엿보인다. 그들은 함께 쥐스틴이 입학할 생텍쥐베리 수의학교로 향한다. 그곳은 다름 아닌 쥐스틴의 부모님이 다녔던 데는 물론 언니 알렉스도 다니고 있는 데다. 그녀에겐 광란에 찬 오리엔테이션과 혹독한 신고식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동물의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토끼 생간을 먹어야 했다. 하지만 쥐스틴은 채식주의자가 아닌가? 채식주의자일 언니 알렉스는?


칸, 토론토, 런던, 선댄스, 시체스 영화제 등 세계 유수 영화제를 섬렵하고 한국의 부천 영화제에 상륙해 호평을 받은 영화 <로우>의 시작이다. 프랑스 태생인 이 영화는 자그마치 '줄리아 듀코나우'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흔치 않은 프랑스 호러공포 영화로, 할리우드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제목 그대로 '날 것'의 공포를 선사한다. 


최근 다시금 활발히 활동하는 프랑스 최고의 국민배우 '이자벨 위페르' 덕분에 생전 접하지 않았던 프랑스 영화를 몇 번 잇따라 보았는데, 그때마다 느꼈던 것들을 <로우>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어떤 장르에서도 보는 이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와 정반대랄까. 최대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려하되, 대신 그 자체에 충분한 접함점이 있어 더 빨려들어 더 집중하게 되는 측면이 있다.


성장, 그리고 억압에서 해방되어 얻은 자유


<로우>는 공포, 그중에서도 식인공포의 탈을 쓴 '성장' 영화다. ⓒ포커스 월드



신입생이라면 반드시 치러야 할 신고식이거니와 이행하지 않을 땐 전교적 왕따가 될 수 있기에 쥐스틴은 살아생전 처음으로 육식의 대상인 토끼 생간을 먹는다. 당연히 뒤탈이 날 수밖에. 그녀는 온몸에 심한 피부질환을 앓는다. 마치 육식을 시작한 이라면 반드시 치러야 할 신고식처럼. 이후 그녀는 육식에의 충동과 욕망에 휩싸인다. 


영화는 크게 쥐스틴 개인의 성장이라는 측면과 쥐스틴의 변화로 상징되는 억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 진정한 자신을 찾는다는 도식의 측면으로 나눠 바라볼 수 있다. 부모님과 언니가 걸어간 길을 그녀 또한 걸어간다.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선을 넘어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간다. 지극히 협소한 성장 개념이지만 최소한의 의미는 있다. 


쥐스틴은 채식을 선택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유산으로, 채식이든 육식이든 잡식이든 자신의 본능을 겪을 시간이나 기회를 박탈당한 채,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가 육체가 도처에 깔린 수의학과에 와서 본능의 해방을 경험한다. 처음은 타인에 의한 강제였지만, 이후의 선택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다. 


물론 그녀가 휩싸인 충동과 욕망이 오롯이 그녀의 선택이고 몫이라고 할 순 없다. 하지만 경험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선택은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정인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그녀는 이제 한 번이라도 육식을 경험한 후이니, 적어도 육식에의 충동과 욕망은 그녀의 선택이고 몫이라 하겠다. 그때 그녀는 자유를 얻고 진정한 자신을 찾을지도 모르겠다. 


인육보다 무서운, 욕망의 덩어리


억압되어 있던 '욕망의 분출'이 단순 성장을 넘어 인간의 근원 탐구로 나아간다. 자못 심오하다. ⓒ포커스 월드



문제는, 채식주의자였던 그녀가 단순히 육식을 원했다는 것에 있지 않다. 그녀는 그 너머, '인육'을 향한 욕망에 휩싸인다. 거기엔 어떤 인자가 있을 터, 알고 보니 언니 알렉스도 인육을 먹었던 것이다. 가족력인가? 알 수 없다. 어쨋든 쥐스틴은 다시 자신을 억압하려 한다. 그건 되돌릴 수 없는 죄악이니 말이다. 물론 쉽지 않다. 반면 알렉스는 이미 주최할 수 없을 만큼 멀리 가버린 듯하다. 


쥐스틴이 인육에 눈을 뜨며 함께 나온 게 있다. 한 번도 남자 경험이 없는 그녀에게 찾아온 이성에의 눈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육식에의 욕망 이상의 것이 곧바로 찾아온 것처럼, 그녀에게 이성에의 눈 이상의 '섹슈얼리티'가 찾아온 것 같다. 그야말로 욕망 이상의 욕망으로, 채식이라는 극단에서 발화한 정반대의 극단이 아닌가 싶다.


욕망은 사람을 삼켜버리기 일쑤다. 우린 종종 욕망에 몸과 마음과 머리를 맡겨버리곤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DNA 깊숙이 박혀 있기에 하찮은 이성으로 중심을 잡긴 힘들지 않을까. 쥐스틴과 알렉스는 거기서 파생된 억압하는 이성과 표류하는 감성의 표본과 같다. 쥐스틴은 이성으로 그 엄청난 것들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정말 쉽지 않다. 반면 알렉스는 포기한듯 즐기는듯 자신의 모든 걸 욕망에 맡겨버렸다. 


이 영화에서 인상 깊고 무서운 건, 그래서 인육을 먹는 장면 따위가 아니다. 쥐스틴과 알렉스가 욕망에 몸부림치는 장면들, 욕망에 이끌려가는 장면들, 욕망과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장면들이다. 특히 한없이 여리고 어리바리했던 쥐스틴의 표정에 짙은 갈망이 점차 묻어가 급기야 코피까지 흘리는 장면은 압권이다. 거기엔 인육과 섹스와 지배에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시나리오, 연기, 카메라 그리고 영화 외적인 것들


이 작은 영화는 기술적으로도 뒤지지 않는다.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다고 할까. ⓒ포커스 월드



쥐스틴과 알렉스는 정반대의 인물로 시작되지만 점차 가까워지는 것 같다. 그러다가도 어김없이 정반대의 습성이 가지는, 자신만의 표시를 가차없이 상대에 가한다. 한 핏줄로서 가지는 극도의 모순을 날 것으로 표현해낸 시나리오에 찬사를 보내며, 역시 날 것으로 연기해낸 배우들에게 기대에 찬 박수를 보낸다. 


쥐스틴의 오락가락하는 이성과 감성의 싸움 덕분에, 강렬한 순간과 정적인 순간이 교차된다. 그 순간들의 교차가 물 흘러가듯 보이는 건 다분히 카메라 덕분이겠다. 숏워킹과 롱테이크가 기술적으로 한 점 오차 없이 선보이는데, 전혀 위화감이 없다. 적재적소라는 말은 이런 것을 위함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공포가 단순히 감정적 최전선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장르가 아님을 이 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공포를 느낄 때는 물론이고 그 전후로 우리가 느끼고 깨닫고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것들이 참으로 많다. 아무래도 문제는 공포가 아닌 공포 '영화'겠지. 영화 외적인 것들이 영화를 잠식하는 '구조'겠지. 그런 구조 안에서 '공포'의 본질을 떠들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마 <로우>는 우리나라에서 정식 극장 개봉하진 못할 것이다. 자극의 강도가 아닌 자극의 층위와 역할이 할리우드의 그것과는 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그리해준다면 무한한 영광으로 알고 극장을 찾으며 관계자분들께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겠다. 20년 가까이 된 '식인 영화' <양들의 침묵>에 비추어 보아, 조금의 기대를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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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조선자본주의공화국>


<조선자본주의공화국> 표지 ⓒ비아북



북한 핵 위협, 일명 '북핵'으로 대표되는 북한의 끝없는 질주. 그를 둘러싸고 최소 한, 중, 일, 미, 러 5개국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연일 논의에 논의를 거듭한다. 그럼에도 북한은 멈추지 않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기에. 대내외적으로 '우린 아직 건재하다' '우리에게 관심을 줘라' 하고 말하는 것 같다. 


북핵에 대한 관심은 일반인에게서만큼은 멀어져 간다. 수 년 전만 하더라도 북핵 실험에 마음을 졸였지만, 이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 일쑤다. 그저 북한이 '또' 미사일 발사했네, '또' 핵실험을 감행했네 정도의 관심 정도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북한 자체에 대한 관심 또한 멀어져 간다. 그동안 우리에게 북한이라는 나라는 다른 무엇도 아닌 '위협'과 동일어였으니 말이다. 


유일하게 북한에 대해 알게 되는 통로인 언론도 마찬가지다. 북한의 실상 같은 건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북핵만 보도할 뿐이다. 종종 기획보도로 실상을 알리고자 하지만, 이미 독자의 입장에서 안중에도 없어졌다. 우리는 북한의 실상, 북한의 일반 주민 생활을 알 도리가 없게 된 것이다. 


1990년대 중반 대기근 이후 북한의 실상


우리나라에서 북한은 오랫동안 가장 금기시된 단어이고 가장 알아선 안 되지만 한편으로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곳이었다. 이젠 아무려면 어떠냐는 식이 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궁금하다. 군대에 있을 때도 북한 주민은 '적'이 아니라고 배웠다. 헌법상 한반도 전역이 대한민국 영토인 만큼 북한 주민도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겠는가. <조선자본주의공화국>(비아북)의 출간이 반갑게 다가왔다. 


영국 출신의 두 수재 기자이자 특파원 제임스 피어슨과 다니엘 튜더가 전해주는 북한의 실상을 담았다. 최소한 내 기준으로 보아도 굉장히 희귀하고 독특하고 소중한 저작물인데, '북한 정부'가 아닌 '북한 사회'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동안 수없이 접해 왔던 북한은 대부분 '정부'였고, 그 '사회'는 여지없이 굶주리고 헐벗고 무기력한 이들의 집합소였다.


이런 생각에 찬물을 확 끼얹는 것처럼 저자는 북한 사회가 굉장히 역동적이거니와 북한 주민도 우리만큼 일상적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북한도 한국처럼 '재벌과 대기업의 나라'가 되어 간다는 충격적인 말도 전한다. 1990년대 중반에 북한의 사회를 송두리째 바꾼 대기근 때문이라는 것. 최소 수십 만 명이 희생된 대참사 이후 북한 주민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송두리째 바뀐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족히 수백 만 명은 희생되었을 게 분명한 그 참사 이후 조선 백성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가게 되었다. 나라는 더이상 버팀목일 수 없었다. 대기근 이후 북한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더이상 '공산주의체제'가 가지는 의무를 다하지 못했고, 주민들은 유사 자본주의체제의 시장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대기근 이후 변한 북한의 실상을 스캔하는 입문서로 더할 나위 없다 하겠다. 


우리를 흔드는 북한의 충격적 변화들


지금은 당연한 게 되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돈이면 다 된다'는 말이 굉장히 이상하게 들렸었다. 그 말은 이제 북한에게도 통용되는 말이 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북한에서 돈이면 안 되는 게 거의 없다고 한다. 한 마디로 '법 위에 돈이 있다'는 것이다. 명백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로의 진입, 아니 거기에 허울상의 무너져가는 체제일지라도 '봉건주의제 왕조국가'의 이름을 붙여주어야 맞겠다. 


이 거대한 충격적 변화 속에 자잘한 충격적 변화들이 우리를 흔든다. 더이상 정부가 완벽한 통솔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건 고사하고, 오히려 자본주의를 장려하다 못해 직접 사업에 뛰어들어 시장경제체제로의 길을 닦는 건 충격에 들지도 못한다. 정부가 아닌 일개 개인이 사업을 한다든지, 외국 TV와 영화를 시청하고 컴퓨터와 휴대폰과 USB는 물론 초소형 SD카드와 태블릿까지 사용하며, BB크림을 바르고 스키니진을 입고 다니며 성형수술까지 감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놀라움을 금치 못해 전혀 현실과 동떨어진 영화나 소설을 보는 느낌이다.


이보다 훨씬 많은 자잘한 충격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일일이 다 열거하면 그 충격이 오히려 사그라들 것 같아 말을 아낀다. 충분히 충격일 줄 안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와 역학 관계는 여전히 쉽지 않다. 2017년을 기해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새로이 취임했다. 내년이면 중국에서는 시진핑이 5년 중임제 국가주석에 새롭게 연임하게 될 것이고, 일본에서는 자민당 총재 선거가 있어 아베 신조의 교체가 유력시되고 있다. 


각국 지도자의 변화에 따라 북한에 대한 대응이 시시각각 바뀌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결코 덮어두고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게 있겠다. 북한의 진짜 모습, 북한의 밑바닥부터 시시각각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실상을 말이다. 이 책은 현 시점으로선 그에 대한 가장 완벽한(가장 최신은 아니지만) 정보를 전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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