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우리를 침범하는 것들>


상식 밖의 무리를 이끄는 부자(父子)의 여러모로 필수적인 듯보인다. 자신처럼 되었으면 아들, 그리고 아들은 그 아들이 자신처럼 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린나래미디어(주)



여기 상식 밖의 무리가 있다. 그들은 외곽에서 캠핑카에 생활하며 국가와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채 그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다. 그 한 가운데에는 콜비(브렌단 글리슨 분)가 있다. 모든 걸 부정한 채 오로지 아버지의 말씀을 바탕으로, 마치 종교집단의 교주처럼 행동한다. 모두들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낄 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없거니와 그곳이 아닌 곳에선 살 수 없다. 


콜비가 이 무리의 정신적 지주라면, 그의 아들 채드(마이클 패스벤더 분)는 이 무리의 실질적 리더다. 비록 그 또한 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그래서 글조차 모르지만, 예의 타고난 카리스마와 대범함은 이 무리가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그 도움이란 다름 아닌 절도 행각이다. 콜비에 의해서 '우리의 권리를 침해받지 않기 위한 대항 행위'라고 명명된 그 범죄는, 실상 이 무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질적 정신적 버팀목이다.


채드는 이제 그 짓거리를 그만두고 싶다. 콜비가 차기 리더로 키우고 싶어하는 그의 손자이자 채드의 아들 타이슨의 미래를 위해서이다. 비록 학교 교육을 받고 있는 타이슨이지만, 콜비의 '교육'으로 채드의 뒤를 잇기에 충분한 몸과 마음을 지니고 있는 중이다. 즉, 미래의 범죄자 말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채드는, 비록 경찰에게 잡혀가지 않지만 범죄를 계속 저지른다. 배운 게 그것 뿐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사면초가. 타이슨만은 자신처럼 되지 않길 바라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범죄밖에 없기에 타이슨이 배우는 건 자연스레 범죄일 수밖에 없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비극의 고리를 끊기 위해선 그가 잡혀들어가는 수밖에 없지만, 그는 범죄의 프로이기 때문에 절대 잡혀들어가지 않는다. 그것 또한 그가 뼛속 깊이 배운 것. 그는 '잘못된' 교육과 본능을 이겨낼 수 있을까? 


몽상가적이고 감성적인 고민


이 영화를 보며 평소 하기 힘든 고민들을 해보았다. 굉장히 비현실적인 것들 같아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현실적이다.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 <우리를 침범하는 것들>은 아버지와 아들, 시스템, 교육, 권리, 가족, 부정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우리가 저 멀리 놓아두곤 하는 몽상가적이고 감성적인 고민을 여기 앞으로 데려다 놓는다. 현실이 끼어들 자리는 일말도 없어 보이지만, 현실에 찌들수록 생각하게 되는 것들인 걸 보면 굉장히 현실적인 이야기 같기도 하다. 


우린 누구나 꿈꾸지 않는가? 히피, 집시의 생활을, 영원히 자유로울 것 같은 그들의 환상적인 일상을,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급자족하며 세계를 돌아다니는 노마드의 기적을.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점점 속박되어 지는 자유와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런 삶은 정녕 꿈이다. 


한편, 영화는 할리우드의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에드워드 노튼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철저함을 자랑하는 마이클 패스벤더 주연으로도 충분한 믿음을 준다. 연기를 빼면 왠지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그의 모습이, 범죄 행각을 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드를 누구보다 잘 표현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거기에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의 조직 보스와 같은 포스와 표정과 리더로서의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할 줄 아는 브렌단 글리슨의 출현은 영화의 중심을 잡아줌은 물론 영화로 자연스레 들어가게 만든다. 패스벤더가 정말 열심히 연기한다는 느낌을 주는 반면, 글리슨은 거기에 원래부터 있었던 듯하다. 


줄기 하나, 가족의 독립


가족에서 또 다른 가족이 탄생해 독립하는 건 숙명이다. 이 영화는 그 숙명을 따르려는 자와 거스르려는 자의 대결이기도 하다. ⓒ그린나래미디어(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묘하디 묘하다. 아들이 가장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대상이 다름 아닌 아버지이지만, 아들이 가장 증오하는 대상이 아버지가 될 수 있다. 새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꺼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들이라면, 아버지라면 최소한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럼에도 모성애 못지 않게 부성애 또한 인류의 가장 숭고한 사랑의 종류 중 하나이다. 


영화에서 이 관계가 지니는 파워는 절대적이다. 세상을 등진 채 한 무리를 이끌며 아버지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따르고 콜비, 자연스레 무리에게 강요하고 무엇보다 아들 채드와 손자 타이슨에게 강요한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발생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 아이러니는 아니다. 여기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다. 


채드는 자신의 삶이 제대로이지 않다는 걸 인지하고 타이슨은 그런 삶을 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신이 아닌 아들을 위해, 자신의 삶 자체를 부정하고 고로 아버지를 부정하고 증오하는 아이러니. 정녕 위대하다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 독립영화 <똥파리>가 겹쳐진다. 끝없이 이어질 고리를 끊기 위해, <똥파리>는 영화적 차원에서 희생을 보여주었고 <우리를 침범하는 것들>은 영화 속에서 희생을 택했다. 여기서 줄기 하나는 '가족'으로 빠진다. 


무리에 속한다는 건 독립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가족을 이루어 독립해 살아야 한다. 콜비가 세상을 등진 채 '독립'해 무리를 이끌며 살아가듯이, 채드도 무리를 등지고 '독립'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엔 갈등과 문제가 뒤따른다. 채드는 물론 타이슨도 마찬가지다. 채드는 이 모든 고리를 끊고 타이슨에게 가족을, 독립을, 삶을 선사한다. 


줄기 둘, 시스템과 교육


현 시대 문명을 지탱하는 시스템과 교육이 반드시 올바른 건 아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콜비가 행하는 반시스템과 반교육적 방법도 결코 옳지 않다.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의 줄기는 시스템과 교육으로도 이어진다. 시스템의 중요성을 말하진 않지만,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 무리는 거대 시스템을 부정하고 반하면서도 '잘' 살아간다. 채드는 수없이 많은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절대 잡히지 않는 것이다. 시스템이 가진 반인간적인 면모를 부각해 머릿속에 인지시키고 시스템이 가진 맹점을 잘 이용하는 것이다. 반시스템에 대한 일종의 정신적, 육체적 훈련이 완벽한 것이다. 


그렇지만 교육은 그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가 보다. 콜비가 아버지의 말씀이라며 무리를 이끄는 절대적 규범을 세우고, 되도 않는 기독교적 지식들을 버무려 사이비종교처럼 만들어 세뇌시키지만, 그건 절대로 교육이 될 수 없다. 거기엔 기본도 없고 도리도 없고 이성도 없고 기준도 없다. 채드가 그걸 깨달은 건 기적에 가깝다. 


영화 <캡틴 판타스틱>에서 가족 무리를 이끄는 아버지이자 '캡틴' 벤은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혹독한 교육을 실시한다. 학교에서 받는 교육보다 모든 면에서 훨씬 앞서는 듯 보인다. 물론 반시스템적이지만 말이다. 우린 그 방법론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벤은 결국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다. 그의 교육은 방과 후에. 


반면 콜비 무리에겐 교육 이전에 철학 비스무리한 것도 없다. 우린 거기에서 그 어떤 긍정적인 면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누구나 어느 정도는 지니고 있을 반시스템, 반교육적 생각의 틀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기까지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반시스템, 반교육을 외치면 외칠수록 말이다. 


이들 무리는, 무리의 수장 콜비는 자신들을 침범하는 것들이 다름 아닌 이 국가, 이 사회, 이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고 채드는 그들(자신들)을 침범하는 것들이 다름 아닌 잘못된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그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고? 남에게 강요하고 피해를 주는 행위가 그 기준이다. 그 행위의 결과는 다른 어디도 아닌 자신들에게 돌아온다. 결국 내가 나를 침범하는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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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양익준 감독·각본·주연 <똥파리>


똥파리 같은 삶을 사는 이가 있다. 모두가 다 피하는 그. 그는 어쩌다가 그런 삶을 살게 되었을까? 그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주)영화사 진진



용역 깡패 상훈(양익준 분)은 닥치는 대로 욕을 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돈을 받아와야 할 대상은 물론, 같이 일하는 후배들도 마음에 안 들면 가차 없이 팬다. 그런 그도 이복 누나와 그 아들인 이복 조카한테는 그나마 대해주는 편이다. 상훈은 사람을 패서 번 돈을 조카 손에 쥐어주며 그 표현을 한다. 


한편 상훈은 길을 가다 우연히 여고생 연희(김꽃비 분)와 시비가 붙는다. 안하무인 상훈에게 대적할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 하는데, 연희는 전혀 주눅들지 않고 상훈에게 대들며 욕을 날리고 침을 뱉고 때리기도 하지 않는가? 이에 상훈도 주먹을 날리고는 곧 둘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가까워진다. 그들에겐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상훈은 15년 만에 출소한 아버지를 찾아가 무지막지한 폭력을 가한다. 그는 왜 아버지에게 폭력을 날리는 것인가? 곧 기가 막힌 사연이 밝혀진다. 상훈이 어린 시절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다. 어느 날 급기야 식칼로 위협을 하려 하는데, 여동생이 사이에 끼어들어 대신 칼에 맞고 죽는다. 상훈이 여동생을 들쳐엎고 병원으로 향하고 뒤따라 오던 어머니는 차에 치여 유명을 달리한다. 그리고 이미 아버지는 새살림을 차렸던 것이다. 


연희에게도 사연이 있다. 엄마는 포장마차를 운영하다 용역 깡패에 맞아 죽고 없다. 아빠는 정신 이상으로 집에서 놀고 먹는데, 허구헌날 죽고 없는 엄마 타령이다. 오빠라고 있는 영재는 하는 일 없이 연희에게 돈을 뜯어가며 욕을 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여고생에 불과한 연희는 공부는 물론 알바를 해서 돈을 벌고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양익준 원맨쇼의 수작 <똥파리>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한국 독립영화 르네상스 한 가운데에 <똥파리>가 있다. ⓒ(주)영화사 진진



2009년작 독립영화 <똥파리>는 양익준 감독·각본·주연의 원맨쇼에 가까운, 그럼에도 수작 중 수작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악마의 폭력을 휘두르는 가해자와 그로 인해 어떤 식으로든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긴 피해자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함께 살아가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거니와, 그 해결 방도를 나름대로 제시하고 또 피해자였던 가해자의 흔하디 흔한 자기 변명을 정면으로 응시한 문제작이다. 


이 작품은 2010년을 좌우한 독립영화의 르네상스 한가운데에 위치한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독립영화 3대 작품으로 2005년작 <용서받지 못한 자>, 2009년작 <똥파리>, 2011년작 <파수꾼>을 뽑는데 <똥파리>가 그중 가장 덜 어렵고 가장 직선적인 작품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가장 성공한 독립영화 중 하나이다. 


사실 이 영화는 상대적으로 그리 폭력적으로 비춰지진 않는다. 육체적 폭력의 수위 자체가 그리 높진 않은 것이다. 다만, 폭력의 주 상대가 다름 아닌 가족이라는 점에서 거부감이 크게 다가온다. 그리고 영화 내내 쉬지 않고 나오는 쌍욕도 거북하게 다가온다. 욕은 육체적 폭력의 전조처럼 느껴지기에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린 이 영화의 폭력 수위 자체가 아닌 폭력의 주 상대와 그 연유에 집중해야 한다. 혹여 거기서 폭력의 미학이라든지 폭력의 정당함 따위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폭력의 되물림이 결코 정당방위처럼 여겨져서는 안 된다. 나는 상훈의 폭력성이 아닌 상훈의 자상함과 따뜻함, 착함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똥파리>가 남겨둔 기회의 희극 가능성


일말의 가능성도 없이 나락 같은 비극으로 끝나기 마련인 폭력에 관한 영화들 와중에 기회의 희극 가능성을 남겨둔 <똥파리>. ⓒ(주)영화사 진진



위에서 언급한 <용서받지 못한 자>나 <파수꾼> 또한 다분히 폭력에 관한 영화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는 인지 정도는 하고 있는 사이에 '폭력의 되물림'의 희생자가 된 이들이 주인공이다. 그들은 그 사슬을 끊고 과거의 나와 단절하고자 도움을 청하고 자신을 바꾸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대상은 어쩔 수 없이 폭력의 되물림과 연관된 자들이다. 결국 주인공은 자살을 택한다. 


<똥파리> 주인공 상훈 역시  '폭력의 되물림'의 희생자다. 그 역시 그 사슬을 끊고자 다짐하고 자신을 바꾸고자 하려는데, 어이없게도 그는 죽임을 당한다. 그 대상은 예상했듯이 폭력의 되물림과 연관된 자이다. 누군가가 시작했을 이 폭력들은 결론적으로 가해자 없이 피해자만 속출시킨다. 


하지만 <똥파리>는 다른 작품과 달리 여지를 남겨둔다. 비극적 요소는 당연한 것이지만, 한편으론 기회의 희극 가능성, 그 씨앗을 완전히 거두어들이진 않는다. 상훈이 죽고 나서, 그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이들이 함께 하는 모습이 보인다. 상훈의 아버지, 상훈의 이복누나와 남편, 그 어린 아들, 그리고 연희까지. 여기서 다른 누구도 아닌 상훈의 아버지가 눈에 띈다. 아이러니하지만, 어떤 '희망'과 '기회'의 열망을 엿볼 수 있다. 


물론, 다분히 비극적 요소도 있다. 그 연결고리는 제2의 상훈이라고 할 수 있는, 연희의 오빠인 영재. 그는 비록 불우하기 짝이 없는 가정환경이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는 연희와는 달리 상훈처럼 용역깡패의 길을 간다. 다름 아닌 그가 상훈을 죽이는데, 상훈의 아버지조차 희망과 기회의 공동체 안에 속하지만 그만은 속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안엔 연희와 영재의 엄마를 죽게 한 이가 상훈이라는 비극의 선대(先代)가 있었으니...


폭력의 사슬을 끊어내는, 최소한의 해결 또는 방편


이 뫼비우스의 띠 같은 폭력의 사슬을 끊어낼 방법이 있는가? 이 영화는 그걸 몸소 보여준다. ⓒ(주)영화사 진진



어떤 종류의 폭력이든, 그것이 잉태된 이후에는 수많은 길이 존재한다. 하지만 가장 악질적인 폭력인 '가족에의 폭력'은 누가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거기엔 과연 길이 존재할까. 오직 비극으로의 길밖에 없지 않은가. 영화에서처럼 당사자들 중 누군가가 어떤 식으로든 사슬의 고리를 끊어내야 하는데, 그 사이에 퍼진 암세포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일이다. 이쪽이 해결되는 저쪽이, 저쪽이 해결되면 그쪽이 문제다. 


양익준 감독은 이런 거시적인 관점까지 완벽하리만치 균형있게 그려냈다. 이 세상에 완벽한 해결이라는 건 없다는 진리 위에, 비극의 계속되는 잉태와 희망을 꿈꾸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양면을 올려놓은 것이다. 그는 불안하지 않은 상태를 불안해 하는 현대인의 모순적인 정상을 이런 식으로 포착해낸 듯하다. 


나 또한, 우리 또한 어떤 식으로든 폭력의 사슬 위에 서 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무수히 많은 종류의 폭력들이 지난 세월 나를 괴롭혀 왔다. 그건 즉, 나 또한 누군가를 괴롭혀 왔다는 뜻이다. 내가 알기론, 사람은 받은 것을 최소한은 돌려주려는 습성이 있다. 문제는, 그걸 당사자한테 돌려주긴 쉽지 않으니 다른 누군가에게도 전해지는 것이다. 그건 설사 내가 의식하고 있어도 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거기엔 당사자 또는 당사자가 포함된 집단에 어떤 큰 결단 내지 큰 사건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게 어떤 결과를 낳을지 전혀 알 수 없음에도 말이다. 심지어 그 결과가 대부분 그리 좋지만은 않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영화는 그 잔인하기 짝이 없는 속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최소한의 해결 또는 나아감을 위한 방편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다르다. 제3의 인물이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슷한 아픔을 겪은 사람이라면 비록 애초에 다가가기 힘들겠지만 훨씬 더 가깝고 이해 가능한 도움을 줄 수 있을 테지만, 그저 그(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은 불행한 끝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이라는 게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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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마쓰모토 세이초의 <점과 선>


소설 <점과 선> 표지 ⓒ모비딕



히가시노 게이고와 미야베 미유키,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추리소설가가 아닌)들이다. 추리, 미스터리, 서스펜스 장르 소설을 읽지 않는다는 독자도 이들의 소설 한 편쯤은 접해봤음직하다. 30여 년 동안 정상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더욱 대단한 건 장르 작가의 선입견을 뛰어넘는 대접을 받고 있다는 거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장르 소설을 제외한 소설이 거의 죽다시피 한 일본 소설계의 특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고, 장르 소설을 엄연히 소설의 주류로 받아들이는 일본 소설계의 넓은 아량(?)을 엿볼 수 있겠다고도 하겠다. 


이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우리는 이들을 '사회파 소설가'라 칭한다. 추리를 위한 추리, 미스터리를 위한 미스터리가 아닌, 사회 구조를 테마로 하되 그 방법론으로 추리를 적용하여 더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진실에 다가가고자 한 것이다. 그 끝에는 결국 '인간'이 있다. 그리하여 이들을 단순히 추리소설가로 폄하할 수 없는 노릇이다. 


사실, 사회파 소설의 시초는 따로 있다. 궁핍과 차별을 뛰어넘어 늦게 작가의 길에 들어서는 등 그 자체의 파란만장한 삶으로도, 글에 대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가공할 만한 집념으로도, 일본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서도 유명한 '마쓰모토 세이초'다. 그리고 그의 첫 장편소설 1958년작 <점과 선>은 오늘날 사회파 소설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사회 부조리와 인간을 묘사하는 목적에의 추리


10년도 더 전에, 그야말로 추리소설에 푹 빠져 개걸스럽게 섭렵하고 있었을 때 당연히 이 소설도 접했다. 당시의 나에게 추리소설이란, '추리를 위한 추리'가 중심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추리는, 그 출중하고 복잡하고 완벽한 트릭에도 불구하고 수단에 불과했다. 사회의 부조리와 그 안에 갇힌 인간을 묘사하는 목적에의 수단. 


더군다나 이제껏 본 적 없는 복잡한 시간과 숫자들의 맞물림은 나를 지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모든 것들이 지금 완벽히 해결되었다. 근래 들어 이렇게 빨리 읽은 소설도 드문데, 이토록 어렵고 치밀한 트릭과 추리를 이토록 완벽하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니. 그동안 머리가 큰 것도 있겠고, 번역의 차이도 있겠지만, 애초에 이 소설이 완벽한 게 아니었나 싶다. 


관청 납품으로 급성장한 회사의 오너 야스다 다쓰오는 요정 '고유키'에 자주 들렀다. 그가 올 때마다 오토키가 담당하다시피 했는데, 어느 날엔가 그녀가 아닌 다른 이들 둘과 함께 저녁을 먹는다. 평소 그답지 않게 말이다. 그러곤 그들은 도쿄역으로 함께 가는데, 그곳에서 다름 아닌 오토키가 하카타행 특급에 오르는 걸 목격한다. 그녀는 중앙 관청 부정부패 사건으로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과장대리 사야마 겐이치와 함께 있었다. 여러 말들이 오가던 중 6일 후 후쿠오카 가시이 해안에서 그 둘은 시신으로 발견된다. 누가 보아도 동반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 모습이었다. 


문제는 이제 시작이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은 이 동반 자살 건을 후쿠오카 경찰서의 베테랑 형사 도리카이 준타로가 의심을 갖고, 경기청에서 부정부패 사건을 조사하던 미하라 기이치 경위가 의문을 던진다. 자살이 아닌 타살이 아닐까 하는 의심과 의문. 이후 미하라는 끊임없는 의심과 의문, 섬광 같이 번뜩이는 깨달음, 상사인 가사이 경감의 전폭적인 지지와 함께 사건을 차근차근 해결해 나간다. 


종국에는 일본의 끝과 끝인 훗카이도와 규슈를 오가는 종횡무진 끝에 애당초 점 찍은(?) 용의자를 색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 방법론으로 극도의 리얼리티를 첨가한 추리 기법을 선보이는데, 열차 시간을 시작으로 당대의 항공, 배, 숙박 시간을 모조리 완벽히 꿰어 맞춘 트릭과 알리바이들이었다. 그 사이에 1950~60년대 일본 사회의 시대상을 오밀조밀하게 그려내고, 부조리를 대범하게 드러낸다. 


이 소설 <점과 선>의 흥미점과 위대함


우린 이 소설에서 몇 가지의 흥미점을 찾을 수 있다. 추리소설 팬이라면 광분할 만한 트릭이 그 중 하나이다. 아직도 기억나는 환상적인 트릭이 있다. <오페라의 유령>으로 유명한 가스통 르루의 <노란방의 비밀>이 보여준 세계 최초의 밀실 미스터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로 유명한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살인>이 보여준 완벽한 알리바이 깨기 등. <점과 선>의 열차 시간표를 이용한 완벽한 트릭 깨기도 이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재미를 선사한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에 더 와닿는 무엇이 있을 것이다. 


이 트릭과 추리에 이어지는 깨달음도 있다. 미하라 경위가 계속해서 순간적으로 깨닫는 것들이 그것인데, 다름 아닌 '맹점'이다. 모르는 사이에 작용하는 선입관으로 당연하다고 지나치는 것들을 범인이 이용한 것인데, 이 만성이 된 상식이야말로 정녕 무서운 것이라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수사에 임할 땐 당연한 상식이라도 일단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서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 굉장히 도움이 되는 흥미점이다. 위의 트릭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과 연관되어 있는 걸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이 소설의 위대함을 드러내주는 점으로, 부정부패 사건으로 얼룩진 사회의 부조리와 어두운 내면을 고발하고자 하는 장면이다. 이 소설의 주요 사건은 부정부패 사건을 덮으려는 더러운 목적에서 시작된 것이다. 작가는 이 부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데, 대형 비리 사건에서 모든 걸 짊어지고 자살을 택하는 사람이 꼭 정통 실무자인 과장 대리급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출세에 희망이 보이니 상관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고, 결국 자신의 보신보다 출세를 위해 상관의 뜻에 엽합해서 협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인정이고, 관청은 그런 인정이 얽혀 있는 동네라고 못 박는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비리, 부정부패, 자살을 빙자한 타살 사건들이 판을 치며 세상을 속이려 한다. 사실 개 중엔 소설에서처럼 고위층이 연류된 사건이 상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그들이 아닌 그들을 따른 이가 대신 책임 지고 인생이 파멸에 이르며, 그들은 다른 어딘가로 가 이전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하곤 한다. 이는 더 이상 소설도 아니고 영화도 아니고 설도 아니고 사실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 속에서 살고 있다. 괜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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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플립>


북미 개봉 폭망 이후, 7년 만에 압도적인 지지로 국내 개봉에 성공한 <플립>. ⓒ팝엔터테인먼트



'드디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소식이다. 영화 <플립>의 북미 개봉 7년 만에 국내 개봉(재개봉이 아니다)이 그것인데, 그동안 국내 팬들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서도 꿋꿋하게 개봉을 하지 않았었다. 이유는 북미에서의 압도적인 폭망 때문일 텐데, 2010년 개봉 당시 1400만 불이라는 적지 않은 제작비를 들이고서 1/10 정도의 흥행 성적을 올렸으니, '북미 박스오피스 1위' 타이틀을 밥먹듯이 써먹는 배급사들 입장에선 들여올 이유가 없을 만도 하다. 더욱이 압도적인 지지로 이미 DVD 등으로 볼 사람은 다 봤을 거란 계산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싶은 이들이 참으로 많았던 것 같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흔히 말하는 '인생영화' 리스트에서 종종 봐왔으니. 감독 롭 라이너는 올해로 70세가 되었다. 2010년에도 이미 60대였던 건데, 어쩜 이런 달달하고 귀엽고 풋풋한 영화를 만들었는지. 그의 필모를 잠깐만 들여다봐도 적지 않게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일단 2007년의 <버킷리스트>를 차치하고서라도, 199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미저리> <어 퓨 굿 맨>이 그의 작품이다. 


로코의 시초가 만든 첫사랑 로맨스의 전형


롭 라이너 감독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로 '로코' 장르를 개척했다. 그런 그의 첫사랑 로맨스가 기대되지 않는가? ⓒ팝엔터테인먼트


'전형적'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단어에 속하는데, 여기서 태초의 '전형'을 만들기란 쉽지 않다.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싶은데, 누군가는 만들어낼 것이다. 롭 라이너가 1989년 내놓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바로 그 태초의 전형이다. 이후 1990년대를 넘어 2000년대는 물론 2010년대까지 영화세계를 주름잡는 장르 중 하나인 '로맨틱 코미디'의 시초이다. 


그야말로 감각적인 감독이라 할 수 있는데, 그의 다른 작품들도 해당 장르를 개척하다시피 했다 말할 수 있겠다. 영화 <플립>은 그의 감각적인 노련함이 극대화된 작품으로, '전형적이다' '식상하다'라는 말을 들을 요지가 있을지언정 그 사랑스러움으로 모든 걸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 마냥저냥 기분이 좋아진다고 할까?


길 건너에 이사온 브라이스를 보고 첫 눈에 반하는 7살 여자아이 줄리. 특히 그의 눈이 마음에 들었다. 첫만남부터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만, 브라이스는 달갑지 않고 부담스러운 눈치다. 그런 관계가 자그마치 6년이나 계속된 가운데, 브라이스는 어떻게든 줄리의 마음을 돌려 놓으려 노력한다. 대놓고 여자친구를 사귀고, 그녀의 간절한 도움 요청을 저버린다. 뭐든 함께 하자는 그녀의 요청을 저버리는 건 일상이다. 


어느 날부터 줄리가 암탉을 키우게 되었는데, 무수히 많은 달걀을 감당하지 못하고 브라이스네로 매일 같이 가져다주었다. 실은 브라이스를 보기 위해서 였지만, 아무튼 브라이스는 이 달걀들을 받는 족족 버렸다. 그녀가 닭을 키우는 곳이 더럽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였다. 하지만 우연히 그 모습을 줄리에게 들키고 만다. 이후 줄리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 브라이스를 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부터 였나, 브라이스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 줄리가 신경 쓰이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후로도 한두 번 줄리에게 큰 실수를 저지르고 그때마다 줄리가 브라이스를 피하는 모양새가 더 커진다. 역시 그때마다 브라이스가 줄리를 신경 쓰는 모양새도 더 커지고. 이제 브라이스가 줄리를 쫓아다닐 때다. 첫사랑의 풋풋하고 알콩달콩한 로맨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첫사랑 로맨스를 대하는 할리우드와 우리나라


우리나라의 첫사랑 대명사, <클래식< <건축학개론>. 여기에 <플립>은? ⓒ팝엔터테인먼트



우리나라에서 첫사랑 로맨스의 대명사들이 있다. 2003년작 <클래식>과 2012년작 <건축학개론>이 그것이다. 우린 이 영화들에서 아련하고 아픈 첫사랑의 추억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인가,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아픔,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평생 생각하게 된다는 공식이 생겼다. 


미국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할리우드에는 물론 수많은 첫사랑 로맨스의 정석들이 있겠지만, 최신작 중에 우리들에게 <플립>이 차지하는 비중은 남다르다. 그래서 이 영화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첫사랑 로맨스라고 말하기가 좀 그렇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와닿는 건 엄청나다는 걸 알기에 비교해도 손색없음을 말하고 싶다. 


이들의 첫사랑은 시기가 훨씬 빠르다. 10대를 전후 하기에, 아픔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제3자의 입장에서 느끼는 것이겠지만, 마냥 풋풋하고 귀엽고 앙증맞기까지 하다. 물론 좌충우돌, 갈등과 오해와 증오와 사과가 계속된다. 그건 어느 관계에서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와 다른 점은 이것들을 푸는 과정과 결과에 있다. 


우리는 채 풀지 못하고 여전히 오해와 어느 정도의 증오가 남은 채 시간이 흐른다. 그건 때로 단순 아픔을 넘어 한으로 남는다. 그리고 신파로 흐를 여지가 다분하다. 반면, 이들은 가차 없이 풀어버린다. 한 점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사실 잘 들여다보면 해결하는 과정에서의 미비한 개연성과 결말 부분에서 정작 해결하지 못한 자잘한 것들이 눈에 띈다. 우리의 첫사랑 로맨스가 더 현실적인 것이다. 


로맨스 그리고 인생 성장 메시지


북미의 경우인지, 이 영화만의 경우인지, 첫사랑 로맨스에 로맨스만 들어가는 게 아니다. 거기엔 첫사랑 연령의 성장도 있다. ⓒ팝엔터테인먼트



오직 로맨스에 천착하기 십상인 우리네 첫사랑 영화와는 다르게 이들이 잊지 않고 넣는 게 있다면, 어리디 어린 이들을 위한 인생 성장 메시지이다. 브라이스와 줄리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집안 사정인데, 단도직입적으로 간단명료하게 말해 브라이스네는 잘 살고 줄리네는 잘 못산다. 


그렇지만 속사정은 많이 다른 듯, 브라이스네는 브라이스가 배울 만한 게 없고 줄리네는 줄리가 배울 만한 게 넘쳐난다. 물론 그건 왠만한 학교 공부 따위에서 배울 수 있는 정형화된 배움이 아니다. 그야말로 인생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배움이다. 줄리는 아버지에게서, 작은 아버지에게서, 오빠들에게서, 엄마에게서, 심지어 브라이스네 할아버지와 닭들에게서도 배운다. 


그녀는 크나큰 아름드리 나무에 올라가 누구도 보기 힘든 세상을 보았고, 직접 닭을 키우며 손수 달걀을 얻어 돈을 주고 팔고 고마움의 표시로 드리는 기쁨과 환희를 맛보았고, 지체장애인인 작은 아버지의 모습에서 인생의 또다른 면을 들여다보았다. 음악을 하고 싶어 하고 또 잘하는 오빠들에게서는 세상의 다양하고 넓은 품을 엿보았고, 브라이스네 할아버지와 함께 정원을 만드며 편견과 고정관념을 저버려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아이러니하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부싸움과 이후의 합리적이고 사랑스러운 대응을 통해 현실을 깨우칠 수 있었다. 


<플립>은 마냥 첫사랑 로맨스 영화만은 아니다. 성장 영화이기도 하다. 사랑과 성장이 사이좋게 한 발씩 나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더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또 우리나라에선 이런 류의 영화를 찾아보기 힘들기에 미국보다 훨씬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참에 '인생영화' 리스트에 <플립>도 추가하는 게 어떠신지? 후회는 없을 거라 자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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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금발이 너무해>


여러 가지로 여러 면에서 잽을 날리는 영화 <금발이 너무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미국 할리우드가 영화 하나는 정말 '잘' 만든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작정하고 세상이 놀랄 블록버스터를 내놓을 때도, 제대로 된 진지하고 의미있고 비판적인 작가주의 영화를 내놓을 때도 아니다. 물론 돈 벌고자 만든 그렇고 그런 상업 영화도 아니다. 다름 아닌 여러 가지로 여러 면에 적당히 잽을 날리는 영화를 볼 때 그런 생각이 든다. 


15년도 더 된, 자그마치 2001년에 나온 영화 <금발이 너무해>는 내게 그런 영화 중 하나다. 이 영화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은커녕,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나쁘진 않은 상업 영화 중 하나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 이상의 것을 주지도 않았고 그 이상의 명작으로 남아 있지도 않을 거다. 하지만 여러 모로 '잘' 만든 것만은 확실하다. 


나아가 이 영화가 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 영화에서 얻어가고 의미 있게 끄집어낼 것들이 있을 것 같다. 영화는 때론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내놓거나, 그 자신의 포지션보다 더 많은 포텐셜을 터트려 더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하는 법 아닌가. 가령, 니콜 키드먼이 주연으로 분한 최악의 리메이크 중 하나로 뽑히는 <스텝포드 와이프>도 나에겐 참으로 많은 걸 생각하게 해주었다. <금발이 너무해>라면?


잘 만든 영화 <금발이 너무해>가 줄 것들은?


<금발이 너무해>는 '잘' 만든 영화이다. 마냥 재밌게 볼 수도, 문제의식의 시선으로 볼 수도, 다분히 할리우드식 영화를 보는 느낌으로 볼 수도 있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금발이 너무해>로 괜찮은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데뷔한 후 연달아 흥행면에서는 당시 톱랭커에 들게 된 로버트 루케틱 감독. <21>로 정점을 찍고, 2010년대 들어서는 되도 않는 우려먹기로 폭망의 길을 걷게 된다. 여하튼 그런 그가 데뷔작을 함께 할 주연으로 점찍은 이는 리즈 위더스푼. 작은 키에 올망졸망 귀여운 얼굴, 스탠퍼드대학 출신(중퇴라고는 해도)에 이전까진 주로 정적인 영화에 많이 출연했다. 


이 영화가 마냥 귀엽고 재밌고 즐거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오래된 편견과 고정관념이 내재되어 있으며, 주인공에게 그것을 타파하려는 타파해야 하는 임무 아닌 임무가 주어져 있으니, 리즈 위더스푼만 한 배우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마찬가지인데, 이후 종종 <금발이 너무해>의 느낌을 울궈먹고자 하는 게 보여 안타까울 때가 있긴 하다. 그것도 그녀의 생김새에 따른 편견이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리즈 위더스푼이 분한 엘 우즈는 청초한 금발, 귀엽고 예쁜 얼굴, 군살 없는 몸매, 핑크핑크하고 화려한 옷가지, 장학생이자 캠퍼스 모델, 부잣집 딸로 세상 모든 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스펙의 소유자이다. 하버드 법대생 남자친구까지 있다. 문제의 시작은 다름 아닌 그 남자친구 워너. 워너가 청혼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 특별한 저녁 자리에서, 워너는 엘에게 이별통보를 한다. 자신의 집안이 5대 째 상원 의원을 배출한 명문가이기 때문에 명문가 딸이랑 결혼해야 한다는 등 별별 이유를 다 대지만, 중요한 건 엘이 'Legally Blonde', 즉 머리 나쁜 금발이라는 이유였다. 


엘은 곧바로 하버드 법대를 준비하고 좋은 성적으로 붙어버린다. 하지만 그곳은 화려한 겉모습을 자랑하는 그녀가 있을 곳 같지 않다. 이에 엘은 화려함을 벗어 버리고 다시금 열심히 공부한다. 비로소 하버드 법대생이 된 것 같은 엘, 급기야 극소수의 엘리트만 붙는다는 인턴에도 붙어 승승장구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수많은 난관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거기에 존재하는 난관들은 그동안 그녀를 옭아맨 편견에서 기인한 것들이다. 과연 그녀는 극복할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극복할까?


'머리 나쁜 금발머리'가 부딪히고 극복해야 할 편견과 고정관념들


화려한 금발머리는 머리가 나쁘다는 인식. 이 영화가 던지는 문제의식이자, 주인공 엘 우즈가 극복해야 할 편견과 고정관념의 화신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이 영화의 재미 포인트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진지해야 할 또는 진지하게 비칠 엘의 난관 극복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녀가 계속해서 부딪히게 되는 난관들은 수없이 많고 엄청 깊은 편견과 고정관념들이다. 애써 코믹하게 그려내 자각하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기에 더욱 주의깊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한편으론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감이 있어 조금만 살펴도 될 것 같기도 하다. 


단연코 그녀를 가장 충격에 빠지게 한 한 마디이자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편견의 상징과도 같은 말은 워너가 그녀에게 건넨 '머리 나쁜 금발머리'이다. 금발머리 여성이 머리가 나쁘다는 인식은 상당히 오래되었고 엄청나게 고착화 되었을 거다다. 그건 일종의 형상화인데, 유추되고 유추된 것들의 총합이다. 굉장히 무서운 편견이다. 경우에 따라선 가장 많이 선행되고 있지만 가장 피해야 할 악질적 차별인 '인종차별'과 '남녀차별' 등과도 동급이라 할 만하다. '우생학'과도 연결시켜볼 수 있다. 


금발머리는 일단 그 자체로 화려하다. 화려한 금발머리 여성 중 당연히 몇몇은 화려한 겉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당연히 몇몇은 실제로 머리가 나쁠 것이다. 이런 화려한 것들의 당연한 총합은 굉장히 눈에 잘 띄고 자연스레 하나의 형상화로 뇌리에 박혀 잘 기억하게 된다. 그렇게 머리 나쁜 금발머리의 형상이 굳어진다. 이런 식이라면 만들기 나름이지만, 이 총합이 주는 시각적 충격이 워낙 크기에 알려지기는 쉽고 기억되기 쉽지만 잊히기는 쉽지 않고 바로잡기도 쉽지 않다. 


엘이 이후에 계속 넘어야 하고 넘게 되는 난관들은 모두 이 대표적인 편견에서 파생된 변종들이다. 그래서 아마도 그녀가 금발이 아니었더라도 겉모습이 화려하지 않았더라도 얼굴과 몸매가 예쁘지 않았더라도, 셋 중 하나만으로도 편견은 계속 그녀를 향했을 것이다. 편견들의 총합이 큰 형상을 이룬 이상, 각각의 편견들도 각자 충실히 기능한다. 모두 다 하나씩 깨부술 수밖에 없다. 


자신을 버리지 말고 나아가자


결국 극복에 성공한 엘 우즈. 그녀는 말한다.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확신에 찬 용기와 열정, 강한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엘을 가로막는 편견은 사실 굉장히 이성적이다. 감성하고는 거리가 멀다. 머릿속에 박혀 있는 당연한 사실 또는 진리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성적 사고의 산실과도 같은 하버드 법대에서조차 그녀를 그렇게 대한다는 건 더 이상의 방법이 없다는 걸 뜻한다. 이성에서 길을 찾을 수 없고 외부에서 방법을 찾을 수 없으니, 그녀가 택한 건 이성이 아닌 감성 즉 열정이고 외부가 아닌 내부 즉 자신이다. 


수많은 난관을 뚫고 당당히 졸업하게 되는 엘은 졸업연설로 명대사를 시전한다. '하버드에서의 첫 강의 때 존경하는 교수님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하셨죠. "법은 열정을 배제한 이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죄송하지만 하버드에서의 3년을 되돌아보니 열정이란 법과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더군요.'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데,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리버티 대학교 졸업연설에서 표절했다는 논란이 있었다. '확신에 찬 용기와 열정, 강한 자신감이 있어야 세상에 나갈 수 있어요. 첫인상은 틀릴 수 있다는 걸 기억하세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거예요.'


엘은 그럼에도 자신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사람들의 머릿속 깊이 박힌 편견의 형상, 그 표준과도 같은 엘은 그 모습이 그대로 세상을 향했다. 얼마나 어렵고 두려운 것인지는 굳이 영화를 보지 않아도 안다. 그래서 한편 이 영화는 자기확신과 그에 이르는 열정, 그에 따른 용기라는 자기계발의 주요 요소를 보여주기도 한다. 세상 탓하지 말고 우선 자기부터 계발하라는 말이다. 


조금 꺼림칙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닌 것이, 혼자만 바뀐다고 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나부터 먼저 바뀌고 또는 올바른 길을 가면 그 영향이 두루두루 퍼진다고 말하고 있기에, 그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고 싶다. '연대'는 애초에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만나 주고받으면서 잇는 것도 가능하지만, 깨달은 누군가가 툭 튀어나와 찾아다니고 설득하며 잇는 것도 가능하다. 엘은 잘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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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선한 이웃>


<선한 이웃> 표지 ⓒ은행나무



민주화 30주년의 2017년 6월,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이 시점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올해 6월 참으로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민주화 영령들이 불려 나왔다. 그중엔 당연히 소설도 있는 바, 이정명 작가의 <선한 이웃>(은행나무)도 그중 하나다. 제목에서부터 풍기는 선과 악의 대립 또는 선과 악의 모호함 등의 소재, 이정명이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우리가 익히 아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의 픽션적 뒷이야기들. 


세종의 한글 창제 뒷이야기를 집현전 학자 연쇄살인 사건으로 풀어내고,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과 관계의 뒷이야기를 추리적 기법으로 풀어냈으며, 윤동주와 검열관 스기야마 도잔의 뒷이야기를 검열관 죽음과 미스터리로 풀어내는 등 이정명의 소설은 구미를 당기는 무엇이 있다. 나는 앞의 두 책 <뿌리깊은 나무>와 <바람의 화원>은 재밌게 읽었는데, 뒤의 책 <별을 스치는 바람>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주제인 '민주화 운동'과 관련되었다는 이 책 <선한 이웃>을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좋던 나쁘던 기존의 이정명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실존 인물을 참조했겠지만, 적어도 실존 인물이 나오진 않는다. 유명한 사건의 뒷이야기를 그만의 형식으로 풀어내고 핵심인물들에 천착하는 건 여전하지만, 조금 더 서사에 집중했다는 데서 사건과 인물에 집중했던 이전 작품보다 고전적이 된 것 같다. 고전적 의미로 더욱 소설가다워졌지만, 소설로서는 재미가 많이 반감되었다. 


정교한 시나리오가 몇 겹에 걸쳐 잘 짜인 소설


신출귀몰 용의주도 얼굴 없는 운동가 최민석을 잡기 위해 김기준 팀장을 위시한 정보요원팀이 출동한다. 지난 6개월 동안의 추적을 비웃듯 눈앞에서 놓치고, 관리관에 의해 김기준 팀은 해체되고 모두 좌천된다. 한편 극작가 이태주는 <줄리어스 시저>로 화려하게 데뷔하지만 마지막 공연에서 대사가 문제시 되어 정보당국에 잡혀간다. 그를 제외하고 모두 고문을 받고, 극단주와 주연배우는 구속된 반면 그는 풀려난다. 


변절자로 낙인 찍힌 이태주는 삼류 에로극 주연 여배우 김진아와 연인이 된 후 함께 <엘렉트라의 변명>을 힘들게 준비한다. 김진아는 알고 있다, 이태주가 이 연극으로 세상에 맞서려고 한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를 진정 사랑하기에 망설임 없이 그를 도와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자 한다. 


좌천당하고서도 여전히 최민석에게 심히 집착하는 김기준, 관리관은 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 김기준은 여러 후보군을 추려 <엘렉트라의 변명> 연출자 이태주를 최민석으로 점찍고 공작에 들어간다. 그는 이태주가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완벽하고 정교한 시나리오를 작성하기 시작하는데... 


정교한 시나리오가 몇 겹에 걸쳐 등장인물들을 옭아매는지 모를 정도로 잘 짜인 소설 <선한 이웃>.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선과 악의 모호함이 소설의 절정에서 그 절정을 맞이한다. 거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건 없다. 앞으로 계속 생각하게 될, 생각해야 할 개념이 생겼을 뿐이다.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건 선한 이의 악


이전 작품보다 서사의 흐름과 상징의 모호함에서 오는 깨달음을 더 절실하게 전하며 새로움을 선사하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정명의 소설에서 등장인물의 특출한 캐릭터성을 엿볼 수 있다. 김기준, 이태주, 김진아 그리고 관리관까지. 이들이 얽히고 설킨, 물리고 물린, 복잡다단한 관계와 자기 신념들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건 악한 이의 악이 아니라 선한 이웃의 악이다'를 대변한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거기엔 일면의 긍정적인 면은 없고 부정적인 면이 도사린다. 1980년대 서슬퍼런 독재 정권 시대, 어쩔 수 없이 악에 부역하며 그렇지만 자신은 악이 아니라는 신념을 가졌던 이들이 있다. 아주 많을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본래 평범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평범하고 힘없는 이가 악을 행하면서 '나는 악이 아니다' '나는 그저 내 일을 할 뿐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지옥이다. 


사실 이는 식상하기 그지 없는 개념이자 도식이다. 한나 아렌트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인 아이히만의 '나는 맡겨진 일을 그저 열심히 했을 뿐'이라는 말을 빗대어 '악의 평범성' 개념을 만든지 오래다. 이후 수많은 콘텐츠에서 이 개념은 인용되고 변주된다. 이 책의 제목인 '선한 이웃'도 사실 '악의 평범성'의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식상한 변주가 있다. 명백한 악을 행하고서도, 심지어 그것이 악인 줄 잘 알면서도, 그걸 행한 자신을 평범하다고 성실하다고 신념화 시킨다면 여지 없이 '악의 평범성' 개념을 꺼내들어 변주해야 한다. 물론 '잘' 해야 한다는 단서는 있다. 그런 면에서 <선한 이웃>은 어느 정도 이상의 성과를 보였다. 


쉽지 않은 소재와 주제를 풀어나가고자 정공법을 택했는데, 고대 그리스 배경을 위주로 한 연극의 내용을 대대적으로 가져와 비유와 상징으로 쓴 것이다. 연극도 연극이지만, 고대 그리스 배경이 주는 생소함과 내재되어 있는 수많은 인간 자체에 대한 비유와 상징들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잘 뒷받침해준다. 작가가 한탄하는 것처럼 30년이 지나도 달라진 것만 있지 변한 게 없는 한국 사회와는 달리, 이정명 작가는 달라지는 것 대신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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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봉준호 감독의 <옥자>


'거장' 봉준호 감독이 4년 만에 들고온 영화 <옥자>. 개봉한 지 열흘 가량 지났지만, 몇 달은 지난 느낌이다. ⓒ넷플릭스



봉준호 영화는 대체로 직선적인 스토리 라인을 지닌다. 확실한 목표가 거기에 있고, 우리의 주인공은 그곳에 다다르고자 부단히도 노력한다. 그 자체로도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대, 영화를 통해 가장 재밌게 대리만족 또는 대리경험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에드벤쳐적 요소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단 관객을 끌어모으고는, 봉준호는 진짜 하고 싶은 얘기를 한다. 그건 다름 아닌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이야기다. 


봉준호처럼 필모에서 흑역사가 없는 감독도 드물 것이다. 2000년의 시작에서 <플란다스의 개>로 시대를 앞서간 실험적인 현실 풍자 코미디를 선보이고는, 에누리 없이 3~4년에 한 번씩 작품을 들고 왔다. 여전히 그는 현실을 그리고, 가감없는 코미디적 요소를 적재적소에 흩뿌리며, 누군가에게는 실험적일 수 있는 풍자를 선보인다. <옥자>라고 다르지 않을 텐데,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 영화가 '봉준호 영화'라서 좋다. 


문제는 그의 영화에서 문제점을 찾기 힘들다는 데에 있다. 사건은 이해하기 쉽고, 등장인물은 따로 또 같이 개성과 조화를 두루 갖췄으며, 메시지는 도처에서 두루두루 양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영화를 영화적으로도 현실적(영화 외적)으로도 비평하기가 너무 힘드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럴 땐 '봉준호 영화'가 싫다. 


<옥자> 간략 스캔


'미자의 옥자 되찾아 오기 여정'이 주를 이루는 영화 <옥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넷플릭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설국 열차>를 어느덧 4년 전으로 뒤로 하고, 그보다 더 많은 말과 탈을 안고 우리 앞에 나타난 <옥자>를 들여다볼 때다. 상황 논리에 따라 봉준호 영화가 좋다느니 싫다느니 라고밖에 운을 뗄 수 없는 리뷰 초입을 뒤로 하고, 영화를 간략히 스캔해보자. 


글로벌 기업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CEO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 분)는 회사를 환경친화적인 기업으로 변화시키고자 거대 프로젝트인 '슈퍼돼지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세계 26개국에 슈퍼돼지를 분양하고 잘 키워진 슈퍼돼지를 10년 후에 데려오는 것이다. 강원도 두메 산골에 살고 있는 미자(안서현 분)의 소중한 친구이자 가족인 '옥자'가 바로 그 슈퍼돼지인데,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이들이 옥자를 뉴욕으로 끌고 간다. 


미자는 할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앞뒤 볼 것도 없이 옥자를 끌고 가는 이들을 쫓는다. 두메산골에서 내려와 미란도 한국 지부에 쳐들어가고, 옥자를 뉴욕으로 끌고 가는 트럭에 매달리는 등 위험천만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급기야 옥자를 이용해 그들만의 작전을 벌이려는 비밀 동물 보호 단체 ALF와의 협치, 그리고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협박과 회유로 미자는 뉴욕에서 옥자와의 재회를 꿈꾼다. 


하지만, 그 사이 옥자는 ALF의 대의명분과 미란도의 탐욕, 나아가 한때 동물을 사랑했지만 이제는 미란도의 하수인이 된 동물학자 죠니(제이크 진렌할 분)의 광기로 당해서는 안 될 잔인하고 잔혹한 짓을 당한다. 과연, 미자는 옥자와 함께 강원도 두메산골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옥자는 '돼지고기'로 전락하지 않을 것인가?


전형적인 봉준호 영화 <옥자>


여러모로 봉준호가 생각나는 영화다. 봉준호 스타일 구축에서 봉준호 월드 창조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넷플릭스



<옥자> 역시 전형적인 봉준호 영화였다. 자연스레 봉준호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동시에 느껴졌다. 전체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흐름과 사건과 캐릭터와 카메라워킹과 미장센과 메시지였다. 오랫동안 고심한 흔적과 고심을 고스란히 영화로 옮길 수 있는 능력과 능력을 만천하에 영화 내외적으로 이슈화하면서 떨침에 여한이 없었다. 


봉준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더 많아지면 많아졌지 줄어들진 않는다. '영화'로서 우리가 기대하는 최소한의 기대치가 아닌 최대한의 기대치에 근접한 퀄리티를 선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봉준호 영화가 아닌 봉준호 스타일인 것 같다. 처절하게 와닿는 비판이나 작정하고 비꼬는 풍자가 아닌, 다분히 상업영화의 자장 안에서 이루어지고 보여지는 것들이다. 그래서 봉준호 영화는 점점 이슈는 늘어나고 논의는 적어진다. 


또 봉준호 영화는 그 안에서 다른 요소들에 비해 직선적이고 단편적인 스토리 라인을 띄고 있기 때문에, 보여주고 전해주고 싶은 것들이 많아질수록 독이 된다. 그건 다름 아닌 메시지에서 비롯되는데, 덕분에 사건 진행은 산만해지고 캐릭터는 소모되며 영화 내적 재미가 아닌 영화 외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요소는 줄어든다. 


신념과 교조주의 사이에서 흔들리며 대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ALF의 위상과 존재 의의,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운전기사로 잠시 잠깐 얼굴을 비춰 약간의 추임새로 자본주의의 대명사 대기업과 현대사회 젊은이의 우환을 드러낸 김군이 아닌 배우 최우식의 쓰임새, 연관되어 '초호화 캐스팅'과 '사건 진행과 메시지 전달'을 위한 수많은 주연급 배우들의 소모 등. 


그의 영화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입장에선 안타깝지만, 그의 입장에선 이해가 간다. 그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지, '예술'을 만드는 게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영화'를 보여주려 하는 것이지, '스타일'을 보여주려 하는 게 아니다. 이처럼 거시적으로나마 또는 거시적으로밖에 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또 안타깝다면 안타까운 부분이다. 미시적으로 들어가면, 봉준호 영화는 <설국열차> 이전에 이미 모든 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봉준호 월드'를 구축하지 못한 게 또 마음에 걸린다. 


봉준호 영화를 본다


누가 뭐라해도, 봉준호 영화가 나오면 보지 않을 수 없다. <옥자> 또한 최소한 몇 번은 볼 것 같다. ⓒ넷플릭스



그럼에도 우린 봉준호 영화를 본다. 그는 자타공인 지금, 아니 21세기 들어 한국에서 가장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이다. 그를 만나지 않고는 한국 영화를 제대로 만났다고 하기 힘들다. 과장을 보태지 않고 그가 '한국'에서 태어나 '영화'를 하게 된 건 수많은 이들에게 축복인 것이다. 영화의 총본산 할리우드와 영화의 본고장 유럽에서 인정하고 찬양하는 봉준호다. 


한편 드는 생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하필 한국에서 태어나 영화를 하게 된 게 그에게는 결코 축복이 아닐 거라는 거다. 할리우드였다면 그는 단연코 크리스토퍼 놀란 이상 가는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하다 못해 일본이었다면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지난 <설국열차>, 이번 <옥자>를 접하고 더욱 확고해진 생각이다. 


<옥자>를 통해 봉준호 감독이 앞으로 조심해야 할 것들이 보였는데, '비판을 위한 비판'과 '디테일을 위한 디테일'이 그것이다. 둘다 지금의 봉준호를 있게 한 요소들인데, 천착과 스타일은 자칫 울궈먹기와 흐르지 않는 물로 변형·고착될 수 있다. 우린 여지없이 <옥자> 전체와 부분들에서 자본주의 비판적 요소를 볼 수 있었고, 찰나의 순간이나 단역급 캐릭터에게서 봉준호가 던지는 메시지의 핵심들을 볼 수 있었다. 


그가, 봉준호가 파격의 길을 서슴없이 가길 바란다. 언제나 빈틈없이 완벽한 '영화'를 내놓은 그가 이제는 '세계'를 창조하길 바란다. 나는 봉준호의 예술작품이 아닌 영화를 보길 원하지만, 그가 샛길로 빠질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자가 옥자를 기어코 데리고 강원도 두메산골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고, 미자와 옥자의 여정이 봉준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들로 점철되어 목적이 아닌 수단처럼 비춰지지 않길 바라며, 무엇보다 내가 봉준호 감독의 속깊은 의도를 넘겨짚지 않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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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더 랍스터>


현대사회에 대한 우화로도, 사랑에 대한 기막힌 상상으로도 읽을 수 있는 압도적 수작 <더 랍스터>. ⓒ영화사 오원



근시라는 이유로 아내에게 버림받은 데이비드(콜린 파렐 분)는 호텔로 오게 되었다. 그곳은 일명 '커플 메이킹 호텔'로, 45일 간 머무르며 커플이 되는 교육을 받는다. 만약 그 시간이 지나서까지 커플이 되지 못하면 동물로 변한다. 단, 매일 숲으로 가서 마취총을 이용해 서로 사냥을 하는데 거기에 성공한 횟수만큼 기간이 늘어난다. 이 시대는 누구나 반드시 사랑을 하고 커플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 그런 시대다. 


데이비드는 혹시 동물이 되는 상황이 되면 랍스터가 되고자 한다. 100살까지 살 수 있고 피는 귀족적인 푸른색이며 근시다. 그렇지만 동물이 되긴 싫다. 동물이 되면 숲에 버려지는데, 위험에 상시노출되어 있지 않은가. 커플 메이킹 호텔에서 사람들은 자신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상대방을 찾아 다닌다. 그것이 일차적인 사랑의 증표인 것이다. 데이비드는 커플 되기에 성공할까?


우여곡절 끝에 호텔에서 탈출해 숲으로 향한 데이비드, 그곳은 호텔과는 완전히 반대로 절대 사랑을 해서도 안 되고 커플이 되어서도 안 되는 솔로 구역이다. 안 그러면 동물이 되는 게 아니라 죽는다. 그런데 데이비드는 하필 그곳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 근시를 가진 여인을 말이다. 데이비는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할까? 또 탈출 감행?


영화 <더 랍스터>는 현대사회에 대한 실험 우화를 치명적으로 통렬하게 보여주는 데 정통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네 번째 장편이다. 그리스에서 온 이 젊은 감독을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지극히 사랑하는데, 이 영화는 제68회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세상은 넓고 좋은 감독과 작품은 많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퍼포먼스다. 


'솔로 지옥 커플 천국' 커플 메이킹 호텔


절대적으로 커플이 되어야 하는 '커플 메이킹 호텔'에서 커플이 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사 오원



먼저, 커플이 되지 못하면 동물로 변해버리는 '솔로 지옥 커플 천국' 커플 메이킹 호텔 이야기다. 개인의 자유를 심히 억압하는 전체주의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아프게도 민주주의 한복판에 위치한 우리도 이 전체주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알려준다. 참으로 눈물난다. '커플 천국'의 아이러니다.


굳이 과거의 우리나라나 이웃나라 중국의 산아 제한 정책이나 출산 장려 정책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연애와 결혼에 대한 당연한 시각이 지배하고 있음을 안다. 동물로 변해버리는 것 못지 않게 커플이 되지 못한 이, 결혼을 하지 못한 이가 갖는 절망을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건 역사에서 사회로, 사회에서 개인으로 내려온 역겨운 전통이다. 


문제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꺼낼 수조차 없는 분위기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체제'일 텐데, 그렇다면 누군가는 '체제 전복'을 외칠 만한대,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여기에 온 이들도 사랑을 하고 싶기 때문일 거다. 그렇지만 사랑을 해야 한다고 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 부분에서 사랑은 더 이상 지극히 은밀하고 가장 아름다운 개인의 사생활이 아니라, 자유를 속박 당한 집단에 속한 개인의 의무가 된다. 


그래서 자유를 찾아 솔로 천국의 숲으로 도망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게 된다. 그 이상의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여지가 아예 없어지는 것이다. 이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장막을 걷어내기란 불가능하다. 어찌저찌 도망을 간 솔로 천국의 숲은 어떨까? 거대한 장막의 자장 밖에 있을까?


'솔로 천국 커플 지옥' 숲


절대적으로 솔로가 되어야 하는 '숲'에서는 솔로로 남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영화사 오원



다음, 커플이 되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솔로 천국 커플 지옥' 숲 이야기다. 커플이 되지 않을 자유를 찾아 커플 메이킹 호텔에서 탈출한 이들이 사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이 어째서 자유로운 곳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솔로 지옥 입장에서 보면 솔로를 선택할 수 있는 이 곳이 자유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솔로도 커플도 자유로운 제3자 입장에서 보면 거기나 거기나 거기가 거기다. 도긴개긴이다. 


문제는 자신도 모르는 새 운명적인 '만남'은 들어봤어도 운명적인 '헤어짐'은 익히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는 역설이 이성적인 깨달음이라면, 이것저것 볼 것 없이 만남은 감성과 이성을 초월한 깨달음이다. 커플이 되는 것만큼 어려운 게 솔로로 살아가는 거라는 말이다. 


이런 초월성을 죽음으로 막겠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우리는 안다. 사랑을 택하고 죽음을 받아들인 수많은 커플들의 역사를 말이다. 솔로 천국의 아이러니다. 굳이 이들의 세계에 전체주의의 뱃지를 달아주지 않는 이유다. 대신 이곳에는 어리석음의 뱃지를 달아주고자 한다. 


단순 비교를 하자면, 무조건 커플과 무조건 솔로의 통제 중 무조건 솔로가 더 어려울 것이다. 이는 인간의 본성과 본능, 인간다움, 아니 생물다움을 버린 처사다. 물론 이 역시 역겨운 처사다. '사랑을 해야 한다' 안에는 조금이나마 '사랑하고 싶다'가 내재되어 있는 반면, '사랑하면 안 된다' 안에는 '사랑하기 싫다'가 조금도 내재되어 있지 않다. 


뼈아프게 잔인하고 잔혹한 이 세상의 실체, 나의 실체


이 영화가 치명적인 이유는, 세계를 형성하는 가장 무섭고 두려운 부분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사 오원



나부터도 그러한대, 우리는 흔히 이것을 피하고자 저것을 택한다. 아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선택지가 이것 아니면 저것이기 때문일 거다. 남자 아니면 여자, 커플 아니면 솔로, 삶 아니면 죽음, 커플 메이킹 호텔 아니면 숲. 데이비드도 그렇게 했다. 나름 자의적인 선택, 그나마 혁명의 끄나풀 정도 잡고자 한 행동. 그것도 결코 쉽지 않은 게, 자그마치 죽음을 각오한 탈출인 거다. 


고약한 건, 내가 제3자의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이것 아니면 저것, 저것 아니면 이것만을 선택해야 하는지 안타깝고 분통 터지고 욕지거리까지 튀어 나오지만, 나는 이곳에서 탈출할 용기나 지혜, 하다못해 지식도 없다. 세상에서 알고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게 가장 '나쁜' 거라는데, 나는 못난 것도 아니고 나쁘다. 


영화에서 제3지대나 제3자는 아예 나오지 않거니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고 말로 꺼내지 않는다. 내가 사는 이곳에서 원하는 것들이 불편하고 역겨울 때가 시도때도 없지만,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고 말하고 어딜 가나 똑같을 거라고 말할 뿐이다. 그건 사실이다. 영화에서 보지 않았나. 


원점으로 돌아간다. 커플 메이킹 호텔의 짓거리가 전체주의적이라 했던가? 숲 인간들의 짓거리가 한심하다 했던가? 둘 다 똑같다고 했던가? 그렇다. 내가 고작 생각할 수 있는 한도치는 '둘 다 똑같다' 정도의 깨달음과 비판이다. 감독은 영리하게, 너무 영리하게 그 이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이상의 깨달음을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실체, 나의 실체라고 말한다. 


너무나도, 그 어떤 영화보다도 잔인하고 잔혹하다. 고작 현실의 부정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우화의 나열과 그 사이를 건너는 한 인간의 서사를 보여줄 뿐이지만, 이 세계를 관통하는 가장 무섭고 두려운 부분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감히 말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정확한 이 세계의 지도(MAP, 地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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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독자에게] <이 세상의 똘똘하고 경이로운 것들> 출간에 부쳐


<이 세상의 똘똘하고 경이로운 것들(수의사 헤리엇의 이야기 3) 표지 ⓒ아시아



2년여 전 쯤이었을 겁니다. 우연히 책 두 권을 접했습니다. 시리즈인듯 아닌듯 같은 출판사(웅진닷컴)의 같은 저자(제임스 헤리엇), 같은 번역자(김석희)의 책이었죠. 한 권은 2001년, 다른 한 권은 2002년에 나왔더군요.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제목과 <조금씩 행복해지는 이야기>라는 제목이었습니다. 동일한 부제인 '수의사 헤리엇이 만난 사람과 동물 이야기'로 책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무지 재미있었습니다. 어쩜 이리 아기자기 하면서 풍성하고 행복하면서 슬프고 긴박하면서 느긋할 수 있는지, 그 모든 것들을 어찌 이리 잘 표현해내는지, 글을 읽으면서 이렇게 편했던 건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즉시 국내에 출간된 제임스 헤리엇 책을 모조리 구입해 직원들 모두가 돌려가며 읽고 분석에 들어갔죠. '어떤 식으로 복간을 할 것인가?'가 목적이었습니다. 


그에 앞서 이미 저작권 해결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가장 먼저 김석희 선생님께 전화해 복간 작업에 참여할 의향이 있는지, 원고를 가지고 계시는지와 더불어 계약과 진행 관련된 사항을 간략히 주고받았죠. 그러곤 에이전트에 판권은 살아 있는지, 이전에 출간한 출판사에서 복간할 의향이 있는지 문의하고는 바로 계약에 들어갔습니다. 


'제임스 헤리엇' 시리즈를 결정하다


알고 보니, 제임스 헤리엇이 쓴 책이 수십 권에 이르더군요. 기본이 되는 4권의 시리즈가 있고, 나머지 책들은 대부분 그 책에 상당 부분 가져와 추가 원고를 더해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중에서 우리나라에 출간된 책들은 시기도 출판사도 번역자도 중구난방이었습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1, 2권이 4권으로 분리되어 나왔고, 2000년에도 1권이 나왔으며, 2001년과 2002년에 각각 2권과 3권이 나왔었습니다. 


이처럼 오래전부터 소개되어 왔던 제임스 헤리엇이지만, 사실 많이 알려지게 된 건 2001년과 2002년부터죠. 그리고 2003년에는 '개 이야기'가 2권으로 분리되어 같은 출판사와 번역자의 손에 출간되었습니다. 이후 2005년에는 다른 출판사와 다른 번역자가 '동물 이야기'와 아동용 책들을 출간합니다. 


우리는 우선 기본이 되는 4권에 더해, 3권을 추가로 계약했습니다. '개 이야기' '고양이 이야기' '동물 이야기'가 그것이고요. 일관성 있는 시리즈를 위해 김석희 선생님께 7권 모두를 맡겼습니다. 이 시리즈를 가장 잘 알고 있을 사람이 분명하고, 국내 최고를 자랑하는 실력은 두말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본인께서 1권부터 끝까지 제대로 번역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그럼에도 여러 우여곡절 끝에 1년여 만에 2016년 10월 첫 책 <이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생물들>(아시아)이 나왔습니다. '제임스 헤리엇'을 아시는 분들이 은근히 많아서 소소한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김석희'라는 이름이 가지는 힘도 크게 작용했고요. 이후 12월 <이 세상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들>과 2017년 2월 <수의사 헤리엇의 개 이야기>를 내놓았습니다. 


연작 소설 또는 연작 에세이


2개월 주기로 2017년 내로 7권 모두를 내놓자는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식 시리즈 3권에 해당하는 <이 세상의 똘똘하고 경이로운 것들>을 출간하기 전에, 말씀드릴 순 없지만 지나칠 수 없는 문제들이 생겼습니다. 더불어 '수의사 헤리엇의 이야기'와 같은 동물 관련 책인 <반려동물을 잃은 반려인을 위한 안내서>를 출간하기도 했고요. 여하튼 계획한 것보다 2개월 늦은 6월에 3권을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시리즈는 '연작 소설' 또는 '연작 에세이'에 가깝습니다. 굳이 1권부터 읽지 않아도 충분한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지만, 이왕이면 1권부터 접하며 제임스 헤리엇가 이제 갓 수의대를 졸업하고 요크셔 지방의 대러비로 이주해 수의사로 일하게 된 사연과 수의사로서의 일들, 그리고 장차 아내가 될 이와의 연애와 결혼까지 들여다보고, 2권으로 본격적인 시골 수의사로서의 일들과 달콤한 신혼을 들여다볼 수 있죠. 


3권인 <이 세상의 똘똘하고 경이로운 것들>에선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공군에 입대해 훈련을 받는 제임스 헤리엇과 대러비에서의 과거 회상이 주를 이룹니다. 4권은 제대 후 대러비로 돌아와 아이를 낳고 지역의 명사가 되는 이야기가 나오죠. 더불어 '개 이야기' '고양이 이야기' '동물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천착한 이야기들입니다. 


동물을 넘어 생물로


그렇습니다. 이 시리즈는 하나 같이 1930년대 요크셔 지방을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1916년에 태어난 제임스 헤리엇이 50세가 넘은 1970년대에 들어 비로소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어낸 것이죠. 의도한 게 아닌, 우연히도 시리즈 첫 책을 낸 2016년은 제임스 헤리엇 탄생 100주년이었습니다. 좀 더 세밀하게 조사해 일찍 알았다면 뭔가 더 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더 많은 분들께 알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아무래도 이 시리즈가 갖는 태생적 한계도 존재하지 않나 싶습니다. '수의사'라는 그다지 관심이 많이 가지 않을 수 있는 키워드를 타이틀에 넣어야 하는 반면, '반려동물' 하다못해 '동물'도 타이틀에선 다루지 않죠. 엄연히 '수의사 제임스 헤리엇'이 주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인지 책 곳곳에서 우린 1930년대의 원시적인 의약품과 시술법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 소중한 역사를 알게 되는 것이죠. 더불어 그가 '시골 수의사'이기 때문에 알게 되는 외딴 요크셔 지방의 생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동물 환자뿐만 아니라 환자의 인간 주인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였죠. 즉, 순수한 자연에서 지내며 모든 '생물'들에 지극한 관심과 애정을 보인 것입니다. 수의사(獸醫師)의 수(獸)가 짐승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생물을 의미하게 만드는 위대한 진보입니다. 


그렇다면 '제임스 헤리엇'을 알리는 길밖엔 없을 텐데, 서양에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르며 최소 수천만 부 이상 최대로 잡아 1억 부는 족히 팔리고 1권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앤서니 홉킨스가 제임스 헤리엇의 은인과 같은 동업자 시그프리드 파넌 역을 맡았으며 BBC에서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이 또한 수천만 명은 봤을 정도로 위인의 자리를 꿰찬 그를 이곳에서 반의 반도 끌어올리지 못했습니다. 제임스 헤리엇에게 죄송할 따름입니다. 


시리즈는 이제 막 절반을 지났습니다. 잘하면 올해 내로, 못해도 내년 초까지는 시리즈가 일단락날 것 같고요. 나름대로 부단히 노력할 테지만, 모든 생물을 사랑한 제임스 헤리엇을 이보다 더 알리는 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연장선상에서 '수의사 헤리엇의 이야기' 시리즈를 더 알리는 것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간절함을 담아 한 번 여쭤보려고요. 후회하지 않을 그 이름, '제임스 헤리엇'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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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에브리바디 올라잇>


이 영화는 '복잡미묘'하지만, 결코 '섹시 코믹 스캔들'은 아니다. ⓒ(주)화천공사



의사 닉(아네트 버닝 분)과 조경사 줄스(줄리안 무어 분)는 각각 낳은 아이들 조니(미아 바쉬이코브스카 분), 레이저(조쉬 허처슨 분)와 함께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렇다, 그들은 레즈비언 부부이다. 큰딸 조니는 일찍 철이 든 케이스로 엄마들을 이해하고 존중한다. 그녀는 똑똑하다. 반면 작은 아들 레이저는 사춘기의 한복판에 있어서인지 몰라도 의문과 함께 위화감을 지니고 있다. 그는 운동을 좋아한다. 


조니와 레이저는 아빠를 찾고자 한다. 그들은 누군가가 정자은행에 제공한 정자로 태어났는데, 공교롭게도 닉과 줄스는 한 명의 정자를 받아 임신해 그들을 낳았다. 생물학적 아빠 폴(마크 러팔로 분)을 찾은 그들, 조니는 좋은 느낌을 받은 반면 레이저는 그리 좋은 느낌을 받진 못했다. 이후 조니와 레이저는 번갈아 가면서 혹은 함께 폴과 시간을 보낸다. 서로가 끌리는 걸 그들이 막을 도리는 없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닉과 줄스의 시선이 그리 곱지는 않다. 함께 식사자리도 마련하는 등 노력하지만, 가장의 역할을 떠맡은 닉은 더욱 노심초사할 뿐이다. 그 와중에 줄스는 오랜만에 조경사 일이 들어오는데, 다름 아닌 폴의 의뢰였다. 급기야 줄스는 자신의 성정체성까지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는데... 


'평범한' 동성결혼 가족


동성결혼 가족이라는, 한국에는 법적으로 없는 가족 형태. 이 영화는 극히 평범하게 그려낸다. ⓒ(주)화천공사



수많은 영화를 통해 일반적이지 않은 가족 형태를 많이 봐왔는데, 영화 <에브리바디 올라잇>이 보여준 가족 형태는 또 새롭다. 특히 동성결혼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선 어설픈 상상은 가능하지만 실제에 기반한 현실적인 상상은 불가능하다. 그러하기에 허구에 기반한 영화에서도 비춰지기 힘들다. 


반면 이 영화에서 동성결혼에 의한 가족 구성은 아주 평범하게 보인다. 전혀 위화감이 없고 편안하다. 작은 아들 레이저가 지니는 의문과 위화감도 심각한 수준은 아니고 감성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아마 거기엔 레즈비언 부부를 연기한 두 베테랑 줄리안 무어와 아네트 버닝의 연기력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거기에도 조금의 제약은 따른다.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보호막은 예전에 쳤을 테지만, 아이들 특히 레이저에겐 제대로 된 설명이 필요하다. 남들과 다른 가족 형태는 물론 남들과 다른 섹스 라이프까지도. 이런 것까지 말해야 하나 할 정도로 모든 사생활을 남김없이 말해주어야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린 이 영화의 이 가족을 보며 하등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단, 생물학적 아빠 폴을 만나기 전까지. 두 아이들의 아빠 폴이 등장하면서 생각이 많아진다. 이를 삐딱한 시선으로 보자면, 즉 지극히 생물학적인 시선으로만 보자면 일부이처가 아닌가? 여기서 이처가 부부인 건 이상할 게 없다. 그런데 이처 중 하나가 일부와 다시 그렇고 그런 관계를 형성시킨다면... 모든 게 이상해지는 것이다. 


특수한 경우를 헤쳐나온 이들의 삐걱거림


특수한 경우를 수도 없이, 즉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에게도 삐걱거림이 존재한다. ⓒ(주)화천공사



사실 이 영화는 초반 20분도 채 되지 않아 1막이 끝난 느낌을 들게 한다. 레즈비언 부부의 두 아이들이 생물학적 아빠를 만나 어색한 인사와 대화를 마무리하고 헤어진다. 더 이상 어떤 스토리가 있을까 싶다. 그리고 2막이 시작된다. 아이들이 생물학적 아빠를 계속 만나는 것이다. 그런 한편 닉과 줄스는 뭔가 삐걱대는 것 같다. 


여기서 주목할 건 아이들이 생물학적 아빠를 계속 만나는 게 아니라 닉과 줄스의 삐걱거림이다.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레즈비언 부부라는 특수한 경우를 함께 헤쳐나온 이들이라면 살아가는 데 아무 문제도 없을 것 같다고 말이다. 그리고 둘 다 여자이니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부부보다 서로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들에게 삐걱거림이라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똑같은 삐걱거림이 존재한다. 18년 동안 함께 한 닉과 줄스에게도 당연히 각자의 역할이 생겼을 것이고 완연히 다른 성격이 존재할 것이다. 그에 따른 갈등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런 모습에서 우린 역으로 올라가 레즈비언 부부의 평범함과 비(非)이질성을 감지한다. 그들은 레즈비언 이전에 부부다. 


이 영화에선 닉이 더 돈을 잘 벌고 더 괄괄하며 더 가부장적이다. 반면 줄스는 일을 거의 안 하는 반면 아이들과 집안을 책임지다시피 한다. 그들이 합의 하에 정한 역할일 테지만, 여느 부부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2막에서 아이들이 폴과 가까워지는 모습이 아닌, 눈여겨 보아야 할 닉과 줄스의 삐걱거림에는 이런 연유가 있다. 


평범한듯 평범하지 않은듯, 이 가족


다른 누구도 아닌 이들의 삐걱거림은, 이들이 지극히 평범한 존재들이라는 반증이다. ⓒ(주)화천공사



영화의 3막 시작은 폴의 의뢰에 의해 줄스가 오랜만에 조경 디자인을 하게 되는 장면이다. 이내 그들은 어이 없게 한 몸이 된다. 그러며 닉과 줄스의 삐걱거림은 더 심해지고 그럴수록 줄스의 외도도 더 심해진다. 한편 아이들과 폴의 관계도 더 진전되어 어색함은 사라지고 의미있는 관계로 발전되는 기미가 보인다. 


결국 들킬 것이 분명한 폴과 줄스의 밀회, 이 황당하고 어이 없는 관계보다 우리가 이 3막에서 눈여겨 봐야 할 건 이 가족이다. 2막에서 닉과 줄스의 삐걱거림으로 이 레즈비언 부부의 평범함을 역설했듯이, 3막에서는 폴과 줄스의 밀회로 터져버린 네 가족의 삐걱거림으로 이 가족의 평범함을 역설한다. 


백 번 양보해 일반적이라고 할 순 없는 이 가족이, 거기에 폴이라는 생물학적 아빠의 출현으로 꼬여버린 듯한 이 가족이, 평범하다는 걸 역설하기 위해서 황당한 일을 겪었을 때 평범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린 생각한다. 일반적이지 않은 가족이라면, 일반적이지 않은 일을 겪었을 때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을 대처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들은 지극히 일반적으로 대처한다. 당사자들을 욕하고 배척하고 몰아세운다. 누군가는 비뚤어진다. 그럼에도 진심어린 사과와 속죄, 받아들임과 시작이 이어진다. 그게 가족이다. 그리고 이 가족도 그런 모습을 보인다. 당연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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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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