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표지 ⓒ서해문집



어느 한 나라의 역사는 결코 그 한 나라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만 흘러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세계사적 역사의 흐름에만 맞물려 혹은 휩쓸려 흘러가지도 않는다. 세계는 모든 나라들 구석구석에 영향을 주고, 반대로 모든 나라들의 내부적 목소리가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 이는 역사를 대하는 또다른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역사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라는 아주 유명한 구절을 남겼다. 이는 결코 과거, 현재의 한 때만을 빌어 당시 혹은 다른 시대의 역사를 규정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역사는 모든 순간, 모든 곳, 모든 이들과 연관되어 있거니와 연관하여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일본의 저명한 역사가 가토 요코는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서해문집)를 통해 세계사적 흐름과 내부적 목소리가 맞물리고 현재과 과거과 대화하는 역사 해석을 선보인다.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 중심엔 19세기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일본이 나아간 전쟁의 길이 있다. 


저자는 그 일례로 2001년 9.11테러와 1937년 중일전쟁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9.11테러 이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는데, 전쟁에서 이긴다는 자세보다 악독한 범죄자를 잡는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한편 중일전쟁 당시 일본은 전쟁이 아닌 '보상을 위한 군사행동'이라 규정하며 '일종의 토비전'이라 보았다. 즉, 이 두 전쟁을 상대가 나쁜 짓을 했으니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무력행사를 마치 경찰이 범인을 검거하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전쟁에 대한 보다 폭넓은 관점과 시각


일본은 메이지 시대에 한반도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1894년 청일전쟁으로 근대 들어 강대국과 처음으로 전쟁을 치르고 정확히 10년 후 1904년 러일전쟁을 치른다. 한편, 러일전쟁의 이면에서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러시아와 맞서면서도 서구 열강을 향해서는 만주의 문호 개방을 위해 러시아와 맞서고 있다고 주장했다. 여하튼 일본은 중화질서에서 벗어났고 서구의 지배에서도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세계1차대전 발발 후 일본은 '영일동맹 협약의 예상할 수 있는 전반적인 이익을 방호한다'는 명목으로 독일에 최후통첩을 하고는 전쟁에 뛰어들어 독일령 산둥반도를 점령한다. 엄연히 같은 연합국이지만, 일본의 행동은 미국과 영국에게 비판을 받았고 그에 따라 일본도 미국과 영국에 반감이 싹텄다. 


1930년대 '만주사변' '상하이사변' '러허작전' 그리고 '중일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광폭 행보와 1940년대 중일전쟁이 여전히 계속되는 와중에 선택한 '태평양전쟁'까지, 일본은 외부로는 미국, 영국, 소련이 중국을 원조하며 정치적, 경제적 압박과 내부로는 일면 명확한 이유이지만 또 일면으론 의문스럽기 짝이 없는 이유로 진행된다. 


저자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까지 일본이 걸어간 전쟁의 길을 일본만의 또는 일본만을 생각하는 관점이 아닌 중국과 서구의 관점까지 추가해 세계사적 통합 관점과 흐름으로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전쟁이 지역 및 사회와 국가에 미친 영향과 변화도 명확하게 밝혀주어 전쟁에 대한 보다 폭넓은 생각에 도움을 준다. 


사실, 그리고 진실을 대하는 자세


역사는 때로 몇몇 인물에 의해 속절없이 흘러가기도 한다. 몇몇 인물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통찰력 있는 의견을 제시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감탄을 불러 일으킨다. 1930년대 초 만주사변과 상하이사변 직후 급기야 만주국이 탄생한다. 당시 외상인 우치다 야스야는 강경론을 밀어붙이며 '나라를 초토화하는 한이 있어도' 만주 문제 양보는 없다고 선을 그었는데, 그가 생각하기에 국민정부의 대일유화파가 일본과의 직접 협상에 나올 것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육군이 전격적으로 러허작전에 돌입, 국면은 일본이 어쩔 수 없이 국제연맹에서 탈퇴하는 상황으로까지 진행된다. 


중일전쟁 발발 후 주미 대사가 된 후스의 주장은 탁월하다. 그는 중일전쟁이 시작되기 전 일본의 침공을 예견했는데, 그때 중국이 취해야 할 태도로 극단적 선택을 중용한 것이다. '미국과 소련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중국이 일본과의 전쟁을 정면으로 버티면서 2~3년간 계속 패배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는 '일본의 할복, 할복을 도와주는 중국'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다. 일본이 자멸의 길을 걷고 있다는 통한의 박력이다. 


책은, 마지막 한 문장으로 수렴된다. 저자의 명확한 식견이 반영된 한 문장은 '비판적인 시각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것, 이 두 가지 자세를 함께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역사를 지극히 일방적인 시각 또는 선입관으로 대할 게 아니라 정확한 자료에 입각한 사실, 사실과 사실 사이의 진실 혹은 이면을 두루 살펴야 하는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전쟁에의 길', 특히 섬밖으로 향하는 길에의 애정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남달랐다. 지정학적 특수성인지, 민족적 특수성인지, 정치적 특수성인지, 모든 게 복합적으로 적용된 것인지. 온 세계가 반전으로의 길을 가고자 오랫동안 노력해왔고 더욱이 일본에게는 평화헌법이라는 명확한 반전에의 법이 존재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하는 행동을 대외적으로 허락받고자 분주하다. 


일본 입장에서는 북한이라는 명확한 적, 중국과 러시아라는 사실상의 적을 겨냥한 움직임일테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어찌 이리도 똑같은지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와중에 책에서는 다뤄지지 않다시피 하는 우리나라의 길이 궁금하다. 우리나라가 선택해야 할 건 전쟁 따위도 복속 따위도 아니다, 바로 캐스팅보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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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오직 사랑뿐>


영화 <오직 사랑뿐> 포스터. ⓒ팝엔터테인먼트



러브스토리는 인간 역사에서 만고불변의 중심축이다. 당연히 인간이 만든 대부분의 콘텐츠에서도 가장 많이 다뤄진다. 심지어 인간을 만들었다는 신들의 이야기인 신화에서도 단연 중심이 되는 게 다름 아닌 사랑인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에 울고,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에 웃는, 그것이 바로 사랑 아니겠는가. 


영국 최초 개봉 2년여만에 한국에 소개되는 영화 <오직 사랑뿐>은 사랑 하나로 모든 걸 헤쳐나가는 두 남녀의 실화를 다루었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전쟁의 시대는 끝났지만 차별의 시대는 여전한 그때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가 사랑에 빠졌다. 문제는, 흑인 남자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 백인 여자는 퍼스트 레이디가 된다는 것. 


영화는 달달하지만 때론 끔찍한 사랑의 모습만으로 스크린을 채우진 않는다. 대신 두 사람의 꿋꿋한 사랑으로 수많은 갈등을 헤쳐나가는 모습이 주를 이룬다. 사실 그들이 사랑하는 것 자체가 그 시대에서는 '위험'과 '위대함'이 수반되는 행위였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을 지금에 와서 다시 들여다보는 건 사랑이라는 식상함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랑과 맞물리는 시대를 엿보는 것. 


사랑 하나로 모든 걸 헤쳐나가다


영화 <오직 사랑뿐>의 한 장면. ⓒ팝엔터테인먼트



1947년 전후의 영국, 세레체 카마(데이빗 오예로워 분)와 루스 윌리엄스(로자먼드 파이크 분)는 어느 댄스파티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들은 흑인과 백인, 사방에서 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더욱이 세레체는 당시 영국보호령이었던 베추아날란드의 왕자, 조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루스는 세레체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인다. 


그들의 사랑은 이제 막 시작되었지만, 시련 또한 시작된다. 인종분리정책을 앞세운 영국, 베추아날란드를 호시탐탐 노리는 남아프리카연방, 그리고 세레체 카마의 삼촌 즉, 베추아날란드까지. 전 세계가 그들의 사랑을 반대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래도 그들이 가야할 곳은, 정착해야 할 곳은 영국이 아닌 베추아날란드. 


그들이 넘어야 할 산은 너무 많았다. 삼촌을 비롯한 가족, 베추아날란드 국민, 영국과 남아프리카연방, 언론, 루스에게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아프리카까지. 오직 사랑 하나로 헤쳐나가기엔 너무나도 험했지만, 그들은 그야말로 오직 사랑 하나로 모든 걸 헤쳐나간다. 사랑이 삶이 되고 삶이 사상이 되고 사상이 세상이 되는 순간을 목격한다. 


한편으론 정치적, 한편으론 로맨틱·드라마틱


영화 <오직 사랑뿐>의 한 장면. ⓒ팝엔터테인먼트



영화는 멜로와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를 오간다. <셀마>에서 위대한 마틴 루터 킹 목사로 열연했던 데이빗 오예로워가 이성과 감성을 울리는 연설과 한없이 달달한 눈빛으로 또 다른 위대함을 선보였고, <나를 찾아줘>에서 그야말로 무서운 아내로 열연했던 로자먼드 파이크가 한없이 여려 보이지만 한없이 강한 아프리카 최초의 백인 퍼스트 레이디의 파란만장함을 선보였다. 


한국 개봉 제목인 <오직 사랑뿐>이 멜로에 중점을 두었다면, 원제인 <A United Kingdom>은 드라마와 다큐멘터리에 중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영화의 중심에는 두 사람의 절절한 사랑이 위치하지만, 그 이면에 복잡하기 그지 없는 국내외 정치 정세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종국에 말하고자 하는 건 '베추아날란드'라는 나라가 아닌가. 영화는 이 두 마리 혹은 수십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느낌이다. 


그건 세레체와 루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들의 개인적 사랑과 나라의 공인적 독립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하기 때문이다. 폭압적 시대를 빗겨가려는 또는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그들의 선택들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게 맞물려 있는 건 참으로 정치적이지만 한편으론 한없이 로맨틱하고 드라마틱하다. 


세계사적 흐름과 내부 및 개인의 선택


영화 <오직 사랑뿐>의 한 장면. ⓒ팝엔터테인먼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들의 이야기 또한 역사의 한 부분, 역사를 들여다봄에 있어 중요한 건 세계사적 흐름과 내부 및 개인의 선택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꽤나 탁월한 조망을 보여준다. '사랑'으로 대표되는 멜로를 끝까지 놓지 않은 채 그에 관한 다양한 목소리를 촘촘히 채워나가는 것이다. 


나중에 보츠와나 공화국이 되는 베추아날란드의 면면, 보츠와나 공화국 초대 대통령과 초대 퍼스트 레이디가 되는 세레체와 루스의 면면, 거기에 영국 내부에서도 격렬히 또는 점잖게 오가는 정치적·인도적 차원의 입장에 따른 공방까지. 영화는 전체적으로 차분한 와중에 격정을 토로하고 감성적인 와중에 대단한 이성을 구축하는 한 인간, 나아가 한 나라의 모습 그 자체를 그려내는 것 같다. 


결국 돌고 돌아 사랑이다. 다시 생각해봐도 사랑인 것 같다. 세레체와 루스였기에 그 모든 것이 그들 앞을 가로막았지만, 세레체와 루스가 아니었다면 그 모든 것이 가능했을까. 이 점이 이 영화를 결코 가볍게만 볼 수 없으면서도, 일면 '세기의 로맨스'처럼 가십거리로 봐도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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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몰아보기 딱 좋은 드라마] <하얀거탑>


명작 드라마 <하얀거탑>. ⓒmbc



2000년대 들어서 한국 드라마는 '전형적인 캐릭터', '개연성이 무시된 이야기', '남녀 주인공의 천편일률적인 짝짓기 놀음' 등으로 점철되어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아왔다. '시간 때우기'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걸 타파하기 위해선 '리얼한 직업 세계의 생생한 현장감'과 '살아있는 인간 이야기' 조합에 따른 드라마 패러다임 재판이 필요하다. 


드라마 <하얀거탑>은 2007년 새해 벽두에 드라마 패러다임을 바꾸고자 하는 거창하면서도 명백한 기획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주제로 수렴될 이 명작의 기획의도와 방향은 돌이켜보면 참으로 대단한 도전이고 자기확신에 찬 포부였다. 한국 드라마계의 새로운 기준이자 하나의 혁명과 다름아니었다고 본다. 


물론,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방송 3사의 드라마는 <하얀거탑>이 확언한, 시청자들이 외면하는 '시간 때우기'용이 대부분이다. 거기에 옳고 그름의 잣대를 댈 수는 없지만, '드라마'라는 생명체의 시선에서 보면 그른 게 확실하다. 10년 사이에 방송 3사가 아닌 종편과 케이블 채널들이 수없이 생기며 드라마 또한 다양화가 실시되어 <하얀거탑>이 바꾼 드라마의 패러다임을 수용하고 있는 것 같아 한편 다행인 마음도 든다. 


이 드라마는 빈틈과 군더더기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스피디한 전개, 치밀한 복선과 파격적 임기응변이 함께 하는 다양한 장르의 향연,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며 입체적이기까지 한 캐릭터와 자못 드라마틱하고 한편 비인간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캐릭터들의 조화 등이 시작부터 끝까지 유기적으로 맞물려 눈을 뗄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그야말로 한번에 몰아볼 수 있는, 몰아보기에 용의한 드라마라 아니할 수 없다. 


편, MBC 사장이 교체됨과 동시에 드라마의 혁신을 위하여 시간이 필요하던 차에 한국 드라마계 혁신의 대명사 <하얀거탑>을 UHD로 다시 만날 기회를 얻었다. 지난 1월 22일부터 주중 미니시리즈가 시작될 3월초까지 매주 월~목 10시에 만나볼 수 있다. 여러모로 이번 설 연휴가 <하얀거탑> 몰아보기에 적합한 때가 아닐까 싶다. 


인간군상의 집합체 


인간군상의 집합체. <하얀거탑>의 한 장면. ⓒmbc



<하얀거탑>은 온갖 인간군상들의 집합체이다. 이 드라마를 '야망에 불타는 한 천재 외과의의 질주와 파멸'이라 정리해도 될 만큼, 김명민이 분한 장준혁은 지극히 핵심적 인물이다. 그는 흙수저 출신으로 오로지 실력 하나로 국내 굴지의 대학병원 외과 부교수 자리에 올랐거니와 간담췌 분야의 세계적 실력자로 군림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겐 더 큰 야망이 있으니, 일단 외과 과장이 되는 것이다. 그는 끝없는 질주를 시작한다. 


장준혁과는 학생일 때 과에서 1, 2등을 다툴 정도로 수재이지만 정반대의 삶의 기조를 지니고 있는 소화기내과의 최도영(이선균 분) 부교수가 있다. 그는 형제 모두가 줄줄이 의사로 있는 의사 집안 출신으로 오로지 환자를 생각할 뿐 자리에 운운하거나 권력에의 의지 또는 야망 따위는 없다. 장준혁에 비해 덜 인간적이고 덜 입체적인 인물이지만, 장준혁의 인물상을 부각시키는 데 탁월한 역할을 한다. 


한편,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입체적이며 동시에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이 있다. 일명 '고매한 성품의 소유자'이자 4대째 의사로 있는 이주완(이정길 분) 외과 과장. 정년퇴임을 앞두고 '휴머니즘이 없는' 장준혁이를 10년 동안 자신을 모셨음에도 후계자로 두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야말로 누구보다 위선적이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외과 과장 이주완의 딸이지만 자신의 위치 같은 건 생각 않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하는 마음과 정신의 소유자 이윤진, 돈이라면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장준혁의 장인어른 민충식 원장, 겉으로는 명분을 내세우고 속으로는 철저하게 이해득실을 따지는 진료 부원장이자 소화기 내과 과장 우용길, 절대 타협 불가의 대쪽 같은 성격의 소유자 병리학과 석좌교수 오경환, 장준혁 말이라면 불에라도 뛰어들 외과 의국장 박건하, 장준혁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절대 장준혁처럼 될 수 없는 전임의 염동일 등이 드라마를 탄탄하게 채운다. 


이 드라마에 몰입하게 되는 이유


이 드라마에 몰입하게 되는 이유. <하얀거탑>의 한 장면. ⓒmbc



이 드라마는 몇 번을 봐도 혼란을 불러 일으킨다. 나는 이중에 누구인가, 또는 누구와 맞대응 되겠는가. 말하기 부끄럽지만 그나마 겉과 속이 다른 이주완 과장 또는 비슷한 맥락에서 겉으로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이해득실을 따지는 우용길 부원장에 가장 가깝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다른 누군가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 인물은 볼 때마다 바뀌고, 상황이 바뀜에 따라 역시 바뀐다. 


그게 이 드라마에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겠는데, 아무래도 장준혁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외과 과장이 되는 험난한 길을 거쳐, 치명적이면서 필연적인 실수로 기나긴 법정 공방을 치르고, 와중에 많은 신호가 오지만서도 무시해버린 결과 돌이킬 수 없는 병 때문에 죽음으로 치닫게 되는... 그의 너무도 치열한 삶 앞에서 고개가 숙여지면서도 한숨이 나오는 건 '인생무상'이라는 말 때문이겠다. 


피도 눈물도 없이 모든 걸 뒤로 하고 오로지 앞과 위만 보고 질주하는 것 같은 장준혁이지만, 그에겐 이 세상 누구보다 중요한 어머니가 계시고 속 깊은 모든 얘기를 건네고 위로 받을 수 있는 애인이 있으며 때론 옆도 뒤도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친구 최도영이 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게 만드는 비극적 종말이다. 


그래서 얼핏 보면 선(최도영 등)과 악(장준혁 등)의 대립과 그에 따른 권선징악의 수순이 그려지고 있는 것 같지만, 애초에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지조차 의문스럽게 만드는 대목과 인물들이 매순간 우리를 찾아온다. 더군다나 장준혁이 법정 공방을 치르게 될 때 보란듯이 합심해 정의 편이 아닌 장준혁 편을 드는 대학병원 의사들의 꼬락서니는 더더욱 그런 생각을 들게 만든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얀거탑>의 한 장면. ⓒmbc



인생무상, 선과 악의 모호함과 그에 따른 혼란 등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로의 주제로 수렴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로 넘어간다. 한두 번 정도 보는 걸로는 절대 답을 낼 수 없는 만큼, 몇 번이고 그것도 한번에 몰아봐야 약간의 답길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생각들, '인간'이라는 한 단어로 이 드라마의 궁극적 물음을 요약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얀거탑>의 진정학 명작화가 시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전까지 <하얀거탑>은 그저 굉장히 흥미진진하고 잘 만든 드라마일 뿐이다. 그 이후 <하얀거탑>은 드라마 따위를 뛰어넘는 시대불문 '명작' 콘텐츠가 된다. 


아직 한 번도 접하지 못한 분들께 드리는 경고(?)는, 이 드라마가 결코 의학 드라마가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서 의학은 정치, 법정 공방의 수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거의 모든 등장 인물이 의사인 이상 의사 세계의 단면을 기가 막히게 그려내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하얀거탑>은 의사 세계도 역시 사람 사는 세계라고 말하며 의사들을 하야디 하얀 순백의 탑에서 지상으로 끌어내린다. 적어도 이 드라마에서는 더 이상 그들만의 세상이 아닌 것이다. <하얀거탑>의 또 다른 위대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고, 우리가 시대를 뛰어넘는 공감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드라마로서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를 뛰어넘거나 본연의 임무를 다한 모습이 여기에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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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아키라>


<아키라> 포스터. ⓒ(주)삼지애니메이션



일본 애니메이션, 일명 '재패니메이션' 하면 <철완 아톰>의 '데즈카 오사무'와 30년 넘게 최고의 영향력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떠오를 것이다. 그들 덕분에 재패니메이션은 그 어떤 문화 콘텐츠와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니 그보다 더 위에서 굽어보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1980~90년대 재패니메이션의 진정한 중심에는 일명 '사이버 펑크' 장르가 있었다. 너무나도 유명한 것도 모자라 전설이 되어버린 <공각기동대> <에반게리온> <인랑>, 세 작품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넘친다. 이 세 작품은 1990년대 태생이다. 굳이 명명하자면, 일본의 버블경제 시기에 태어난 작품들. 이들이 보여주는 디스토피아는 현재진행형이었던 것이다. 


반면, 이들보다 거의 10년 가까이 먼저 태어난 시조격의 작품이 있다. <아키라>가 그것이다. 붕괴 조짐은 보였지만, 여전히 사상 최고이자 전 세계 최고의 물질적 토대를 세우고 있던 1980년대 후반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디스토피아는 현재만 아니었을 뿐, 과거와 근 미래와 먼 미래까지도 아울렀다. 재패니메이션의 기준이 되었다는 <아키라>는 어떻게, 무엇으로, 왜 진정한 전설이 되었나.


더할나위 없는 완벽한 마스터피스


더할나위 없는 완벽한 마스터피스. <아키라>의 한 장면. ⓒ(주)삼지애니메이션



1988년 제3차 세계대전으로 도쿄는 무너진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2019년, 네오도쿄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어 첨단을 달리는 도시가 된 도쿄이지만, 안으로는 혼돈 그 자체이다. 그래서일까, 반정부 시위가 극렬하다. 한편 도시는 폭주족의 세상이기도 하다. 테츠오도 그중 하나인데, 사고를 당하고는 누군가에 의해 어딘가로 끌려간다. 


테츠오의 친구이자 폭주족 집단 대장이라 할 수 있는 카네다는 테츠오를 구하고자 하지만 당연히 쉽지 않다. 와중에 반정부 조직 활동에 휩쓸리게 되고 조직원 케이와 함께 테츠오를 구하려는 움직임을 갖는다. 한편 테츠오가 끌려간 곳은 군 직할 연구소로, '아키라'라는 무지막지한 초능력 에너지를 봉인해 놓은 곳이다. 


그곳은 시키시마 대령이 관리하는 곳으로, 오오니시 박사로 하여금 아키라를 비롯한 초능력 에너지들을 제대로 관리해 무너지고 있는 도시를, 사회를 지키고자 한다. 과거 한때 아키라의 폭주로 큰 피해를 본 적이 있기에 그 무시무시한 힘을 잘 알고 있다. 여기에 테츠오가 끌려왔고 그들은 테츠오에게 제2의 아키라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발견했다. 하지만 테츠오는 점점 폭주하게 되는데... 테츠오의 미래는? 도쿄의 미래는?


<아키라>는 여러 면에서 더할나위 없이 완벽한 콘텐츠다. 아니, 애니메이션이자 만화였기에 가능한 완벽함이 있는 만큼 콘텐츠보다 애니메이션이라고 지칭하는 게 맞겠다. 이 작품은 일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동시에, 만화와 애니메이션만이 뽐낼 수 있는 모든 걸 보여준다. 그 자체로 마스터피스이면서도, 이전의 걸작들을 계승하고 이후의 걸작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일본을 설명하는 가장 탁월한 작품


일본을 설명하는 가장 탁월한 작품. <아키라>의 한 장면. ⓒ(주)삼지애니메이션



너무나도 유명한, 하나의 상징이 되어버린 이 작품에 대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싶다.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위험을 무릎쓰고(?) 최선의 소개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뭐니뭐니 해도 이 작품에서 가장 충격적인 건 일본의 전과 현과 후를 아우른다는 점이다. 일본을 설명하는 가장 탁월한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20세기 초중 일본은 사실상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다. 크지 않은 섬나라의 불과한 나라에서 분출되는 넘치는 에너지를 밖으로 뿜어내야 했는지, 나라를 이끄는 고위급들이 일반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였는지, 다양한 이유로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결말은 끔찍하다. <아키라>의 시작과 겹치는 부분이다. 


이후 시간이 흘러 일본은 전후 재건과 호황을 맞이한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은 그 상징과도 같다. <아키라>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주무대가 다름아닌 공사가 한창인 올림픽 경기장이다. 2020년에 올림픽이 치러지는가 보다. 실제로 2020년은 도쿄 올림픽이 예정되어 있다는... 30년의 시간차를 두는 소름끼치는 예언이다. 한편 그와 반대급부의 극렬한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는데, <아키라>에서도 볼 수 있다. 


한편, <아키라>가 당시 현재의 시대상을 녹여낸 건 테츠오의 광기와 폭주의 모습이다. 그는 자격지심이 심한대, 그 욕망이 잘못되게 분출되어 폭주하고 마는 것이다. 일본의 과거가 그러했고, 1980년대 후반 당시도 그러했다. <아키라>는 그것이 결국 한낱 거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렇다고 반정부 조직에 손을 들어주지도 않는다. 모든 것이 허망함으로 귀결되는, 허무주의의 한 단면이 엿보이기도 한다. 


<아키라>의 절대적인 스타일


<아키라>의 절대적 스타일. <아키라>의 한 장면. ⓒ(주)삼지애니메이션



이 정도는 세 발의 피다. <아키라>의 진정한 힘은 위에서 언급한 연출과 이야기보다 작화와 스타일에 있다. 말도 안 되게 세밀한 작화는 1989년부터 연재를 시작한, 장인정신에 빛나는 작화를 자랑하는 <베르세르크>에 비견되지 않을까. 즉,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이다. 


스타일이야말로 <아키라>를 규정짓는 가장 큰 개념이다. 수많은 <아키라> 이후 사람들이 존경하고 팬을 자처하고 오마주하고 패러디한다. 심지어 사이버펑크의 대표주자들, 일반인들에겐 <아키라>보다 훨씬 유명하다고도 할 수 있는 <공각기동대>나 <에반게리온>도 같은 급일 수 없다. 아류라고 할 순 절대 없지만, '제2의 <아키라>'라고 할 순 있겠다. 아니, 그래야만 할 것이다. 


<아키라>는 '사이버펑크'라는 반체제, 반문화적인 성격을 갖는 문화개념의 원류 중 하나이다. 그렇지 않아도 서브컬쳐로 인식되었던 재패니메이션인데, 거기에 서브 중의 서브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파격을 선보인 것이다. 결과는 모두가 다 아는 압도적인 모습의 발현. 콘텐츠 자체가 갖는 힘 앞에선 어떤 성찬의 미사여구나 불안과 걱정 따위는 필요가 없다. <아키라>는 그저 <아키라>일 뿐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다. 


이런 작품이 또 나오긴 절대적으로 힘들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건 다름 아닌 '리메이크'다. <아키라>가 상당 부분 오마주했을 거라 생각되는 영화 <매드 맥스> <블레이드 러너>가 최근에 리메이크되지 않았는가. <공각기동대>처럼 실사로 리메이크하는 건 쉽지 않아 보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다시 보고 싶다. 재개봉이 아닌 형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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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코코>


<코코> 포스터.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픽사, 디즈니, 혹은 픽사&디즈니는 거의 매해 우리를 찾아와 거의 실망을 안기지 않았다. 세상이 점점 디지털화 되어가는 만큼 최첨단 디지털 기술로 나날이 완벽해가는 애니메이션을 선보이는 동시에, 살아가는 데 기본 중에 기본이 되는 지극한 아날로그적 가치를 선보인다. 그 조화는 가히 환상적이다. 


픽사&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아이들보다 어른들에게 더 와닿는 연유가 역설적으로 거기에 있다 하겠다. 조금이라도 더 어른일수록 조금이라도 더 아날로그적인 습성이 남아 있지 않겠는가. 그걸 접해본 사람이라면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고 말이다. 영화 <코코>의 기본은 '가족' '사랑' '우정' '화해' '기억' 등의 가치이다. 


<코코>는 멕시코라는 이질적이라면 이질적이고 친숙하다면 친숙한 곳의 '죽은 자의 날'이라는 멕시코 전통 명절을 배경으로, 현실과 비현실이 만나고 삶과 죽음이 모이며 흩어진 가족과 멀어진 사랑이 다시 만난다. 그 가장 중요한 키를 '코코'가 지니고 있지만, 그 사이사이를 이어주는 이들은 따로 있다.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의 모험 아닌 모험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의 모험 아닌 모험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아빠가 음악가인 한 가족이 있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아빠는 꿈을 이루기 위해 가족을 뒤로 하고는 떠나버린다. 홀로 남은 엄마는 살기 위해 신발을 만든다. 그녀는 신발 만드는 법을 온가족에게 퍼뜨리고 집안 자체가 신발 만드는 기업이 된다. 여기 그 아빠와 엄마를 고조할아버지와 고조할머니로 둔 미구엘이 있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좋아라 한다...


미구엘의 고조할아버지 때문에 멕시코에서 유일하다시피 음악을 멀리하게 된 미구엘의 집안, 그럼에도 그는 멕시코 최고의 음악가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즈의 '기회를 잡아라'라는 말을 듣고는 꼭 음악가 광장에서 연주를 하려고 한다. 할머니가 부셔버린 기타 대신 그가 택한 기타는 델라 크루즈 납골당에 전시해놓은 기타. 


하필 그 날은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은 그 기타를 훔쳐 한번 튕기는 순간, 죽은 자의 세계로 가버리고 만다. 미구엘은 다시 산 사람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이멜다 고조할머니는 음악을 절대 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그의 저주를 풀어주고자 한다. 하지만 미구엘은 그런 조건이라면 사절!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고조할아버지라고 믿게된 델라 크루즈에게 축복을 받고자 길을 떠난다. 


기억, 사랑, 통섭...


기억, 사랑, 통섭...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죽은 자의 날'은 스페인의 침략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멕시코의 전통 명절이다. 해골과 뼈 모양의 조형물이나 사탕을 만들고, 죽은 사람의 사진과 이름을 제단에 올리고는, 여러 종류의 축제를 연다. 이승과 저승이 이때만큼은 한 곳에 모여 어울리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굉장히 중요하게 비치는 바, 제단에 사진과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으면 저승에 있는 이가 이승으로 갈 수 없다. '기억'의 소중함...


멕시코에서 음악은 곧 삶이다. 멕시코인들은 비록 고단한 삶이지만 와중에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치며 스페인 등의 풍습과 문화가 혼합된 특유의 낭만과 열정이 이를 뒷받침한다. 음악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인 것이다. 한편 잘 드러내려고 하진 않지만 이면에 항상 있는 슬픔 또한 음악만큼 잘 표현해낼 수 있는 수단이 없다. 미구엘의 가족이 음악으로 흩어졌다지만 반드시 음악으로 다시 뭉칠 수밖에 없을 거다. 


<코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는 픽사&디즈니가 추구하는 가치와 일맥상통하는 '통섭'이 아닐까 한다. 서로 소통하고, 전체 또는 부분들을 하나로 잇는 것 말이다. 미구엘과 그의 강아지 친구 단테는 참으로 꼬이고 꼬여 대대로 끊어져버린 태초의 끈을, 음악이라는 그 끈을 다름 아닌 음악으로 잇고자 한다. 그 와중에 가족이 있고 사랑이 있고 화해가 있고 기억이 있다. 그 작업은 쉽지 않지만 반드시 해내고 말 것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시간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시간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가족이라는 명제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시대에 전통적이기 짝이 없는 케케묵은 가족 개념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 살아생전 얼마나 잘 살았냐에 따라 죽어서도 계급이 나뉘어 지는 듯한 모습 등 말이다. 보편적이고 아날로그적인 가치를 전하기 위해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조금 더 신경 써 주었으면 하는 부분들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급기야 20년이 넘은 기억부터 5년 전 기억까지 불러낸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어떤 건 희미해져 한 장면 정도밖에 기억나지 않고, 어떤 건 여전히 생생하기 그지 없어 가슴이 아리고 쓰린 그 기억들이 차례로 떠오른다. 그들이 기억하는 게 그들로 하여금 저승에서조차 사라지지 않게 한다는 영화 속 깨달음. 


한편, 충격이라면 충격일 수 있지만 따뜻하기 그지 없게 다가온 부분도 거기에 있다.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장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삶과 죽음 모든 것들을 축복한다. 우리에게 죽음은 너무나도 먼, 무섭고 두려운 무엇이 아닌가. 우리도 제사를 지내며 조상님을 모시지만 그건 굉장히 엄숙한 자리가 아닌가. 멕시코가 부러워지는 것이다, 이 영화 한 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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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유발 하라리의 <대담한 작전>


<대담한 작전> 표지 ⓒ프시케의숲



<사피엔스>로 단번에 세계적인 지식인 반열에 오른 유발 하라리, '역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학문을 넘나드는 통섭 인문학을 선보였다. 세계적인 석학 제래드 다이아몬드의 1998년작 <총.균.쇠.>를 연상케 하는 인류역사학의 대작이다. 인간이 가장 관심있는 건 역시 '인간'임을 이런 책들은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유발 하라리의 전공은 '중세 역사'와 '전쟁 역사'라고 한다. 박사학위도 '중세 전쟁사'로 받았다고 하는데, 굉장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겸비한 그의 전쟁 이야기가 어떤 재미를 선사할지 궁금하다. 학문적 고증과 저자의 행실은 둘째치고, 그 자체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대중 인문 교양서인 시오노 나나미의 다양한 중세 전쟁사 이야기 책들이 생각나게 할까. 유발 하라리의 지금이 있게 한 원류의 책이 나왔다. 


<대담한 작전>(프시케의숲)은 유발 하라리의 전공을 제대로 살린, 그야말로 가장 그다운 지식과 스토리텔링의 향연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책은 '특수작전', 그것도 서구 중세 시대의 아무도 자세히 알지 못할 특수작전에 대해 다룬다. 1장은 중세시대, 즉 기사도 정신의 시대의 특수작전에 대한 전반적 해설이고, 2장부터 7장까진 개별적인 특수작전들을 1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 앞에 선보인다. 


명확한 자료에 입각한 팩트, 상상력과 추측에 입각한 픽션의 아슬아슬한 경계 혹은 균형이 개개의 이야기들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든다. 곧 딱딱한 역사 따위는 저멀리 던져버리고 한없이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역사 이야기를 선사하는 것이다. 한 편 한 편의 특수작전 이야기들은 차라리 한 편의 영화이다. 우리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역사 액션 드라마 영화를 보고 있는 거다. 


암살과 납치, 니자리파의 특수작전


특수작전에 암살이 빠지면 섭하다. 서구 중세시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거점과 최고지휘관이었다. 그것들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기사도 정신에 입각한 정통적 공성전의 정규작전만이 답이었는데, 특수작전 즉 암살과 납치야말로 지극히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이 책은 기사도 정신의 중세에 암살과 납치가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책에서 보여지는 특수작전들의 행태를 보면 맞는 말이다. 


니자리파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비밀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암살' 'assassin(아사신)'이 다름 아닌 이 조직에서 유래했다. 이 조직은 시아파에서 갈라져 나온 과격파 집단 중에서도 극닥전인 파였다. 그들은 유럽 전역에 그 악명을 떨치며 여러 지역에 독자적인 근거지를 확립했다. 


그들의 수많은 업적(?) 중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긴 것은 몬페라토 후작 콘라트가 예루살렘 왕 대관식을 앞둔 때 살해당한 사건이다. 이탈라아 북부의 가장 중요한 귀족가문 중 하나인 몬페라토의 후작 콘라트는 살라딘에 의해 망해가는 예루살렘 왕국에 도착해 착실히 기반을 늘려간다.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 왕관을 쓰게된 그다. 


대관식으로 분주하던 차, 콘라트는 수도사로 변장해 있던 니자리파의 두 암살자에 의해 말 위에서 혹은 성당 안에서 살해당한다. 배후 없이 니자리파 수장에 의한 직접적 암살이었는지, 애초에 콘라트를 지지하지 않았던 잉글랜드 왕 리처드가 배후였는지 잘 나가던 차에 걸림돌이 된 콘라트를 암살할 필요가 있던 살라딘이 배후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이로 인해 니자리파의 명성은 더더욱 확고해졌다. 


차라리 역사소설에 영화 한 편


이밖에도 다양한 특수작전들을 소개하고 있다. 주로 공성전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공격측에 의한 기습인데, 그 방법이 대부분 매수이다. 충성심이 투철하지 않은 책임자 중 한 명이라도 꿰어내 상상도 하지 못할 엄청난 돈으로 유혹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역공을 당한 사례도 있다. 그 사실을 사전에 알고 함정을 파놓은 것.


15세기쯤 되면 유럽이 봉건시대의 절정기, 수많은 가문들의 이합집산이 혼란에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그 와중에 독살로 수렴되는 암살은 셀 수 없을 정도로 자주 행해졌다. 물론 그 죽음이 누구에 의한 암살인지, 암살이 맞긴 한 것인지 정확히 알려진 건 거의 없을 것이다. 이 또한 누군가에 의한 특수작전일 터다. 


유발 하라리가 들려주는 서구 중세시대 특수작전 이야기는 비단 특수작전만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 적어도 그 전후로 50~100년은 훑어야 하는 바, 사실상 1000~1500년대까지 유럽 역사의 한 단면을 압축적으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대하역사소설 내지 서구 중세시대 역사 이야기에 특수작전을 중심으로 하는 영화 한 편을 얹어놓은 느낌이다. 


한편, 고상하고 고고한 명예에 입각한 기사도 정신의 이중적 성격을 가차없이 비판하는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사람의 인생과 나라의 운명이 달린 전쟁에 무슨 명예 따위가 설 자리가 있을 것인지 생각하면 전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무수히 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정규작전보다 특수작전이야말로 전쟁에서 그나마 가장 '좋은' 개념이 아닐까. 비록 소수의 생명은 어쩔 수 없이 버려질 지라도. 


특수작전이라는 특수한 주제에 대한 특이한 주장이 이리도 스무스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게 하는 건 전적으로 저자의 몫이겠다. 그 가치와 쟁점 등의 연구적 목적을 제처두고서라도 이 책은 참으로 재미있게 잘 읽힌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연구서로서는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다. 이미 이름높은 유발 하라리이지만, 그 이름을 기억하고 그의 저작물들을 더 접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대담한 작전 - 10점
유발 하라리 지음, 김승욱 옮김, 박용진 감수/프시케의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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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벤 애플렉의 <아르고>


영화 <아르고> 포스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2500년 동안 이란 땅은 '샤'라는 이름의 왕들이 통치했다. 1950년 이란 국민들은 세속주의 민주주의자인 무함마드 모사테크를 수상으로 선출했다. 그는 영미(英美)의 석유 보유를 국영화하여 국민들에게 이란의 석유를 돌려주었다. 그러나 1953년 영미는 쿠데타를 꾀하여 모사테크를 퇴위시키고 레자 팔레비를 취임시켰다. 


팔레비는 부유와 방종으로 유명했다. 반면 국민들은 굶주렸다. 그는 무자비한 국가 치안 정보국 '사바크'를 통해 권력을 유지했다. 고문과 공포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 후 그는 이란을 서구화시키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고 국민들은 격분했다. 결국 1979년 이란 국민들은 팔레비를 타도했다. 


추방되었던 종교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란을 통치하기 위해 귀환했다. 이란은 보복과 암살, 혼란의 시대로 빠져 들어갔다. 한편, 팔레비는 미국으로의 망명을 허락받았다. 이에 이란 국민들은 미국 대사관으로 몰려가 팔레비가 귀환하여 재판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지길 요구했다. 


미국인의 이란 탈출을 위한 가짜 영화 만들기


미국인의 이란 탈출을 위한 가짜 영화 만들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영화 <아르고>의 2분 여의 프롤로그에 불과한 내용이지만, 영화를 제대로 짚고 이해하기 위해선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이다. 이른바 '이란 혁명', 국민들의 손으로 왕조를 타도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후 이어지는 일련의 행동이다. 팔레비를 향한 분노는 미국을 향한 분노로 바뀌었고, 곧 미국 대사관을 향한 분노로 바뀐다. 


미국 대사관은 점령 당하고 60명이 넘는 미국 시민들은 인질로 잡히고 만다. 한편 미국 대사관 직원 6명은 극적으로 탈출해 테헤란에 있는 캐나다 대사 집으로 피신한다. 하지만 머지 않아 혁명수비대는 6명이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집집마다 '사냥'을 시작한다. 이에 미국 CIA는 차라리 안전한 인질들보다 캐나다 대사 집에 피신해 있는 직원들을 탈출시키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그 어떤 작전도 최악을 벗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탈출 전문가 토니 멘데스(벤 애플렉 분)는 아들과 통화를 하며 영화 <혹성탈출>을 보다가 영감을 얻는다. 가짜로 영화를 찍는다 하고, 그 6명을 캐나다인 로케이션 스카우터로 위장시키고자 한 것이다. 곧 상부의 허락을 받고 본격적인 가짜 영화 만들기에 돌입하는데...


영화는 날카로운 연출력과 유머를 장착해 미국이라는 나라의 여러 모습과 이란 혁명수비대를 통해 보는 폭력적 민족주의의 모습, 그리고 할리우드 풍자와 드러나지 않는 개인의 위대함 등을 두루두루 살핀다. 이 모든 걸 지나치더라도 가짜 영화 제작과 극적 탈출의 실화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재미와 가치를 지닌다. 


미국을 향한, 이란을 향한 서슴없는 비판과 풍자


미국을 향한, 이란을 향한 서슴없는 비판과 풍자.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미국은 세계 경찰을 자임하며 전 세계를 '정리'하려 한다. 그것이 그 나라와 그 나라 국민들을 위함이고 전 세계를 위함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모든 건 미국을 위한 일일 테다.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은 이란의 혁명수비대에 의한 치명적 위험에서 미국 시민을 탈출시키는 게 주요한 사정이지만, 실상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에 의한 치명적 개입과 오판에서 시작된 것이다.


영화는 그런 미국의 이면을 이란 여성의 기자회견 장면을 통해 상당히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미국은 인권을 옹호한다지만, 실상 인권을 옹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에서 인권을 침해합니다.' 그리고 미국 시민 사회는 이란이라는 나라뿐만 아니라 일반 이란인을 향한 분노를 서슴지 않고 표현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것인가. 그 즉시 미국은 그들이 비난하는 이란과 다를 바 없어진다. 


한편, 이란의 폭력적 민족주의를 향한 비판은 영화 전반에 퍼져 있다. 그들이 인질로 잡고 있는 수십 명의 미국인들과 그들이 사냥하려 하는 6명의 미국인들 또한 미국의 입장을 조금도 반영하지 못한다. 사실상 그들은 잘못이 없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프레임을 씌워 미국을 협박하는 건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할 잘못이다. 


잠깐이지만 등장하는 이란에서의 'KFC'는 할리우드와 함께 미국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상징이다. 문화적 점령의 첨병이라고 할까. 이란은, 이란인들은 투철한 반미 감정을 지니며 미국을 소비한다. 영화는 그들의 무지에 의한 내부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씁쓸함을 동반하는 위대한 개인의 탄생


씁쓸함을 동반하는 위대한 개인의 탄생.ⓒ워너브라더스코리아



할리우드와 합작해 가짜 영화를 만드는 프로젝트에 착수한 CIA, 저명한 제작자와 함께 해야 하는 건 물론이다. 가짜이지만 진짜 같아 보여야 하기 때문에, 그 어떤 영화를 제작하려 할 때보다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즉,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속여먹여야 한다. 그렇지만, 그건 그들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매일같이 하는 일이란 게 사람들 속여먹는 것이기 때문에. 


아는 사람은 안다. 수많은 영화들이 제작 직전에 엎어지고, 심지어 제작이 되었으면서도 개봉되지 못한다는 걸.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엄청난 돈이 몰려드는 곳이 영화판 할리우드이다. 그러므로 '가짜 영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진짜 영화'라는 게 존재하지 않으므로 '가짜 영화'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게 맞다. 


결국 작전을 성공시키는 건 다름 아닌 '개인'들이다. 미국이라는 세계 경찰도 아니고 CIA라는 세계 최고의 공작기관도 아니며, 할리우드라는 세계 최고의 영화판의 힘도 아니다. 적어도 영화에서는 토니 멘데스라는 개인의 용단과 그와 함께 한 할리우드 제작자의 믿음과 인내이다. 때로 개인은 사회, 국가, 조직보다 힘이 쎄다.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건 이와 같을 것이다. 영화가 비판하는 것들인 미국이나 이란이나 할리우드의 실체는 개개인의 삶의 향상이나 긍정적 도움에 있는 게 아니라 그들 각자도생에 있다는 사실. 더 이상의 정의는 없고, 더 이상의 긍극적 인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대한 개인의 탄생과 부각은 씁쓸함을 동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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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표지 ⓒ황금가지



1800년대부터 시작되었다는 추리소설, 그 수많은 작품들 중 단연 가장 유명한 건 무엇일까? 우선, 가장 유명한 소설가는 누구일까? 아서 코난 도일이나 애거서 크리스티를 들 수 있겠지만, 뭐니뭐니 해도 추리소설의 창시자라 불리우는 애드거 앨런 포가 아닐까 싶다. 아니, 그는 '유명'보다 '위대'의 칭호를 붙여야 하겠다. 


셜록 홈즈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최고의 추리소설 캐릭터이다. 아서 코난 도일이 창조해, 언젠가부터 그의 손을 떠나, 하나의 상징이자 살아 있는 인간처럼 되어버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힘과 영향력이 더 막강해지니 신기할 노릇이다. 적어도 캐릭터로는 셜록 홈즈를 넘어설 게 절대 없다. 


가장 유명한 작품을 들라고 하면, 그것도 또 골치가 아프다. 정녕 수없이 많은 명작들이 있지 않은가. 앨러리 퀸, 반 다인, 존 딕슨 카 등의 정통 추리소설가 작품도 많고, 레이먼드 챈들러를 빼놓으면 섭하고,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들 몇몇은 반드시 최상위권에 위치시켜야 한다. 


그래도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최고의 위치에 놓는 데 아무도 반대하진 않을 거다. 가장 대중적인 선택이고 가장 안정적인 선택이라고 비난 아닌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거의 모든 면에서 확실한 믿음을 주는 작품인 건 확실하다. 지극히 일반적인 추리소설 독자로서는, 추리소설이란 이 소설에서 시작해 이 소설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범인은 이 안에 있다!


소설은 밑도 끝도 없이 시작된다. 직업도 성별도 나이도 사는 곳도 다양한 남녀 8명이 각자 다른 이유로 무인도 인디언섬에 초대받는다. 그들 각자의 사정상 그들은 그곳에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녕 치명적인 전략이다. 하지만 정작 인디언섬에 도착한 그들 앞에 초대한 사람은 없었다. 대신 하인 두 명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스피디하게 사람이 죽어나간다. 남은 이들을 더욱 두렵게 하는 건, 식탁 위에 있는 인디언 인형의 개수와 벽에 붙어 있는 인디언 동요의 가사이다.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양이 인디언 동요 가사와 같고, 한 명이 죽을 때마다 인디언 인형 한 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정작 그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건 다함께 있을 때 어디선가 울려퍼진 그들 각각의 '죄상'들이다. 그들 모두는 누군가를 직간접적으로 죽게 했다는 것이고, 이 섬에 모이게 한 이유는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하겠다는 확신의 발로라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같이 현실뿐만 아니라 과거의 두려움과도 싸워야 한다. 


문제는 범인, 조그마한 섬을 모조리 뒤져도 범인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으니, 범인은 다름 아닌 이 10명 안에 있다는 사실. 더구나 험악하기 짝이 없는 날씨 때문에 그들은 꼼짝 없이 이 무인도에 갇힌 꼴이 되고 만다. 만화 <명탐정 코난> <소년탐정 김전일>의 명언 "범인은 이 안에 있다!"의 진정한 시조라고 할까. 


위대한 추리 '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외형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또다른 걸작 <오리엔트 특급 살인>과 유사하다. 한정된 공간에 갇힌 피해자이자 용의자, 그리고 국가의 손이 닿지 못하는 사각지대의 범죄를 개인이 대신 심판하려는 모습까지 닮았다. 특히 이 소설은 애초에 대놓고 그런 모습을 보인다. 죄를 저질렀지만 법의 이름으로 심판할 수는 없었던 사건들의 당사자를 불러내어 확실하게 응징한다. 


물론, 이 추리 '소설'의 위대한 점은 마지막 반전의 도덕적 뒤틀림에 있겠지만 말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보여준 슬프기까지 한 반전과는 완전히 반대의 느낌이랄까. 한편, 이 '추리' 소설이 주는 서스펜스는 극렬하기 짝이 없다.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상황에서 조금씩 숨통을 조여오는 느낌이랄까. 


심리 추리의 대가 포와로 경을 굳이 불러오지 않아도 애거서 크리스티는 심리를 자유자재로 다뤄 우리 앞에 풀어놓는다. 그 자리에 있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느끼는 동시에, 사람이 죽어갈수록 극심해지는 그들의 심리전쟁을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건 차라리 하나의 게임이다. 찾을 수 없는 범인을 찾아야 하고, 풀 수 없는 사건을 풀어야 하며, 탈출할 수 없는 섬을 탈출해야 한다. 무엇보다 살아남아야 한다. 


터무니 없이 빨리 읽히는 와중에 수없이 많은 장면과 생각과 심리들이 소용돌이 치게 만드는 소설, 그러면서도 애거서 크리스티가 절대로 간과하지 않는 '사회 정의', 추리소설만이 주는 서스펜스와 반전은 차라리 덤이다. 이제야 이 소설을 추천하는 건, 애거서 크리스티를 보라고 하는 건, 염치가 참으로 없는 짓이지만 그래도 할 건 해야 한다. 난 소설 같은 거 재미없어서 안 봐, 하는 분이 있다면 무조건 이 소설을 봐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10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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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이 영화 안 본 눈 삽니다] <빅토리아 & 압둘>


영화 <빅토리아 & 압둘> 포스터 ⓒ유니버셜픽처스



여러 가지 면에서 최악이라고 할 수는 절대 없는, 아니 어느 면에서는 수준급의 모양새를 보이는 영화를 보게 되었을 때는 참으로 애매하다. 하지만 그 영화가 그 모양새를 앞세워 사실을 보여주되 진실을 오도하려 할 때는 더 이상 애매하지 않다. 철저히 까발리고 진실을 바로 세워야 하는 것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모양새 좋은 영화야말로 영화의 본연, 즉 '보여주기'에 충실한 거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건 요즘 영화에서 어찌 보면 기본 중에 기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건 옳은 말도 아니다. 결국 알맹이가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스토리텔링 말이다. 


스토리텔링은 그저 이야기의 나열이 아니다. 거기엔 어떤 식으로든 메시지가 담겨져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그 메시지에 최소한의 '옳고 그름'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메시지 또한 겉모양이 아닌 알맹이, 그 너머와 그 이면을 살펴야 한다. 영화 <빅토리아 & 압둘>은 그런 면에서 단언컨대 최악의 영화라 할 수 있다. 이런 식의 모양새는 훌륭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스토리텔링과 메시지는 곤란하다, 아니 옳지 않다. 


판타지 로맨스에나 나올 법한 우정의 실화


영화 <빅토리아 & 압둘> 한 장면 ⓒ유니버셜픽처스



1887년 인도의 아그라, 감옥에서 일하는 인도인 카림 압둘(알리 파잘 분)은 키가 가장 크다는 이유로 빅토리아 여왕 폐하(주디 덴치 분) 50년제에 맞춰 모후르(인도 금화)를 운송해 보내주는 임무를 맡는다. 그는 이를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며 길을 나선다. 한편 그와 함께 가게된 모하메드는 인도를 지배하고 있는 자들한테 줄 빌어먹을 선물 때문에 수천 마일을 가야 한다며 분개한다. 


모후르 수여식에서 빅토리아는 압둘의 잘생긴 외모에 반하고 급기야 곁에 두고자 한다. 그렇지 않아도 여왕을 향한 무한한 애정을 공공연히 드러낸 압둘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며 빅토리아의 환심을 더더욱 사게 된다. 압둘 덕분에 인도에 대해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고 인도에 지대한 관심을 쏟게 되는 빅토리아. 압둘은 그야말로 승승장구, 빅토리아의 개인 비서이자 스승이자 가족과 같은 급에 이른다. 


하지만 일개 식민지 인도인의 평민 따위가 왕실의 일족처럼 취급받는 걸 원하는 사람은커녕 그저 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 당연히 온갖 시샘과 협박과 음모가 이어진다. 전 세계 1/4를 차지하고 10억 명의 백성이 있는 빅토리아 여왕과 그저 수십억 명 중 하나일 뿐 아니라 식민지 백성 중 하나일 뿐인 카림 압둘은 과연 그 특별한 우정을 계속 지켜나갈 수 있을까? 


영화 <빅토리아 & 압둘>은 자못 흥미로운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아니, 판타지 로맨스에서나 다룰 법한 내용이지만 엄연히 실화이기에 어쩔 수 없는 궁금증이 인다고 하는 게 맞겠다. 빅토리아 여왕과 식민지 인도인 평민 카림 압둘은 어떤 연유로 모든 걸 뛰어넘는 우정을 나누게 되었는가?


이들의 특별한 우정, 거기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


영화 <빅토리아 & 압둘> 한 장면 ⓒ유니버셜픽처스



압둘의 빅토리아를 향한 무한한 애정부터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애정의 사연과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출세에 눈 먼 평범한 청년인가. 차라리 그렇게 그려졌다면 최소한 이해는 되겠지만, 영화는 그를 그렇게 그리지 않는다. 빅토리아를 향한 인간적 애정이 한껏 묻어나오는 것이다. 


빅토리아의 압둘을 향한 총애는, 압둘이 잘 생겼다는 것, 그녀를 둘러싼 암투와 격식과 시샘 등 온갖 것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순수함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명목상의 통치자일 뿐 정작 가본 적 없는 인도에 대한 동경 등이 함축되어 있다. 압둘의 애정과는 달리 빅토리아의 애정엔 최소한의 이해는 가지만, 반면 이해하기 싫은 측면이 있다. 


다름 아닌 여기에, 이 영화가 내세우는 특별한 우정에 함정이 있다는 걸 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빅토리아 여왕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최전성기인 19세기를 온전히 통치해온 자다. 그녀는 제국의 수장으로, 뼛속깊이 제국주의가 들어찬 인물인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런 그녀를 마치 반제국주의자, 반인종차별주의자이자 수많은 파렴치한들에 둘러싸여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으로 그린다. 


한편 빅토리아 여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명제로 유명하다. 유럽 대부분이 혁명으로 왕권제 자체가 사라지는 와중에 영국은 수상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에 정치권력 대부분을 내어주는 대신 상징성만을 남겨두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안에 대한 결정권은 행사했으며, 정치에서도 수상들을 통해 의견을 관철시켰다. 말하자면, 그녀는 명백한 제국의 수장이었고 고로 수많은 나라와 백성과 전통을 없애버린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영화 <빅토리아 & 압둘>은 균형감을 완전히 상실한 잡종에 불과하다. 


빅토리아 여왕, 대영제국의 치졸하고 무서운 술수


영화 <빅토리아 & 압둘> 한 장면 ⓒ유니버셜픽처스



영화는 말년의 빅토리아 여왕을 완벽하리만치 연기한 주디 덴치를 앞세워 19세기 영국 왕실을 역시 완벽하리만치 재현해냈다. 의상과 분장면에서 위화감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그 겉모양과 겉치레를 앞세운 영국 왕실을 빅토리아 여왕이 셀프 디스(?)하며 자잘하게 균형을 맞추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 


압둘과 같이 오게된 모하메드가 죽으면서까지 영국의 추악한 면모를 가멸차게 비판하는 장면 또한 자잘한 균형 맞추기의 일환이다. 하지만 그 모습들이 애써 끼워맞추기 내지는 균형을 맞추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술수로 보이는 건 비단 나뿐 만이 아닐 것이다. 이는 빅토리아 여왕의, 대영제국의 치졸하고 무서운 술수와 다름 없다. 


일제강점기, 문화통치시기가 그러했다. 겉으로는 전에 없이 조선인의 자유를 묵인했지만 실상 조선을 일본의 완전한 속국으로 만드려는 잔인한 술수였지 않은가. 그 기반엔 '당연함'의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 빅토리아가 영화 내내 '인도의 여제' 운운하는 것도, 모든 이들의 위에 군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수많은 나라와 백성과 전통들이 사라지는 아픔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의 집합체이다. 


우리로서는 조금만 시선을 돌려 생각해보면 될 일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천황과 천황을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조선인 평민이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런데 영화가 천황을 반제국주의자이자 반인종차별주의자로 그리며, 천황이기 때문에 받게 되는 불만 등 때문에 매우 불쌍한 사람인 것처럼 그려내면 어떠하겠는가. 이건 명백한 진실 오도와 잘못된 망상이 아닌가. 더욱이 그것이 실화을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면...


이 영화 때문에 우정이 갖는 순수함과 그 어떤 것도 초월할 수 있는 우정의 무한함이 퇴색되어버린 느낌마저 든다. 물론 빅토리아와 압둘의 우정은 특별했다. 그 자체로 신분과 인종과 나이를 초월한 순수함과 무한함이 엿보였다. 그러나, 영화는 그 너머까지 특히 빅토리아를 중심으로 나아갔고 무참히 찬물을 끼얹어버렸다. 영화의 만듦새 때문에 한편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히려 그 만듦새가 진실을 오도하는 데 앞장섰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빅토리아 & 압둘> 안 본 눈을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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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


영화 <인터스텔라> 포스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10년 전 <다크나이트>부터였던 것 같다.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던져줄 거라고. 2년 뒤에 나온 <인셉션>은 그 기대에 부합하는 최상의 작품이었다. 아니, 놀란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메멘토>부터 우린 그에게 기대를 해왔고 그는 항상 부합해 왔다고 보는 게 맞다. 


2017년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 할 만한 <덩케르크>로 '부활'하기까지 그에겐 사실상 여러 부침이 있었다. 그가 연출하지는 않았지만 기획하고 프로듀서하고 제작했던 영화들이 흥행과 비평에서 쓴맛을 맛본 것이다. 그 한가운데 그가 연출한 <인터스텔라>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1000만 명 관객을 돌파한 이 영화가 놀란의 '흑역사'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놀란이라면'에 부합하지 못한 흥행과 비평 성적을 거두었다. 북미에서는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고 그나마 월드와이드 흥행이 잘 되었다. 영화는 놀란의 엄청난 필모에 비해 명백한 '평작'이다. 그럼에도 <인터스텔라>를 다시금 들여다보는 이유는, 영화가 던지는 이야기들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가지고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줄거리를 알 필요가 있다.


실현 가능한 최신·최고의 우주적 상상력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코리아



20세기에 저지른 잘못으로 모든 게 무너진 미래의 머지 않은 미래의 어느 때, 인류는 끝없이 불어닥치는 먼지와 옥수수밖에 남지 않은 식량 고갈로 앞날이 캄캄하다. 아들 딸과 함께 옥수수밭을 일구며 농부로 살아가는 전직 NASA 연구원 쿠퍼(매튜 매커너히 분)는 집에서 일어난 초자연적인 일이 중력에 의한 좌표를 말하는 걸 알고 그곳을 찾아간다. 알고 보니, 그곳은 극비로 운영되고 있는 NASA였다. 


NASA는 다목적 우주선 인듀어런스호를 만들어 지구를 떠나 '새 집'을 찾기 위한 마지막 탐험을 준비하고 있다. 쿠퍼는 모두를 뒤로 하고 막중한 임무를 받아들인다. 그들은 48년 전에 생겨난 '웜홀'을 통해 다른 은하계로 가고자 한다. NASA는 이미 여러 행성에 여러 탐험대를 내보냈었고 이번 탐험으로 그들 중 몇몇을 구출하며 그들에게서 행성의 정보를 얻어 '새 집' 여부를 판단하고자 한다. 


성공적으로 떠나는 탐험대 겸 구출대, 여지없이 실패를 맛보며 대원 중 한 명을 잃고 아무런 소득 없이 지구 시간으로 20년 넘게 써버리는 불상사도 겪지만 굴하지 않고 전진한다. 결국 성공에 가까워지지만, 뜻하지 않은 거대한 비밀 또는 거짓말을 알게 된다. 그들은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지구는 여전히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인가. 


영화는 실현 가능한 최신·최고의 이론을 바탕으로 상상 그대로의 우주를 스크린으로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3시간 가까이 다른 무엇도 아닌 그 신세계들만 감상해도 충분할 정도이다. 이 영화를 앞뒤로 1년의 차이를 두고 찾아온 <그래비티>와 <마션>을 훨씬 뛰어넘는 압도적 고증과 상상력이다. 


압도적인 반쪽 짜리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놀란은 <인터스텔라>로 보여주고 싶은 것도 말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 중심엔 다른 누구도 무엇도 아닌 '인간'이 있었을 텐데, 그래서 볼 거리와 감상할 거리보다 생각할 거리가 많았으면 했을 텐데, 보는 이로 하여금 과학적으로 단련된 상상력의 구현과 함께 그와는 굉장히 거리가 멀어보이는 사랑과 가족애가 돋보였다. 


영화는 현재까지 물리학, 그중에서도 우주론에 입각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들이 다수 나온다. 인듀어런스호가 웜홀 입구로 가기 위해 화성 주변에서 화성의 중력을 이용하는 건 '중력기둥'이라 한다. 인듀어런스호가 계속 회전하는 이유는 '등가원리' 때문이다. 이것을 활용하면 인위적인 중력을 만들 수 있어 불편함 없이 우주선 생활이 가능하다. 그리고 '블랙홀과 웜홀'이 있다. 


<인터스텔라>는 블랙홀의 '중력렌즈' 효과, 즉 블랙홀을 원반층이 적도를 가로지르고 있고 블랙홀 주면으로 고리 모양의 층이 보이는 모습을 최초로 묘사했다. 웜홀을 이용한 시간여행이야말로 이 영화의 백미인데, 영화의 감수를 본 세계적인 학자 킵 손은 웜홀의 입구를 광속으로 운동시킬 수 있다면 시간여행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영화는 그의 주장에 입각해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이 놀랍도록 비영화적인 이론에 놀란의 상상력이 입혀지니 경이롭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장면들이 압도한다. 그런데, 거기에 '사랑'이라는 옷을 입히니 많이 어설퍼 보인다. 아니, 사랑이라는 건 옷 따위가 아닌 결정체이니 '과학'의 옷을 입히고자 했다는 게 맞다. 하지만 과학이 쏘아보낸 강렬함이 눈길을 모조리 뺏아가 버리니 사랑의 위대함이 오히려 묻혀버리고 만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다, 한 마리 토끼만 그것도 의도치 않은 토끼만 잡은 셈이 되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사실상 반쪽 짜리, 아니 반쪽도 못 되는 정도이지만, 그 반쪽 짜리가 엄청난 힘을 발휘했기에 이 정도 대접(?)을 받는 것이다. 적어도 그 힘과 영향력에 대해선 이의가 없다.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면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돌고 돌아 다시 '놀란'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놀란이 설 자리는, 놀란의 전후 작품들보다 훨씬 적다. 경이로운 볼 거리에 압도 당하고, 블랙홀과 웜홀 등에 관한 과학적 논란에 흥미를 빼앗기고, 점점 사랑의 산으로 향하는 영화를 향한 호불호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이 영화만큼은 귀결점이 놀란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다른 누구도 아닌 놀란의 영화에서 놀란을 빼놓을 순 없다. 놀란의 생각과 의도를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건 큰 차이다. 그의 필모와 인터뷰를 살펴 봤을 때, '인간'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결국 과학도 사랑도 모두 인간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리라. 쿠퍼가 NASA에 가게 되어 우주 저 멀리까지 가게 된 것도 결국 알 수 없는 '그들'이 아닌 생생하게 살아 있는 '그' 때문이지 않은가. 


문제는, 우주를 은하계를 심지어 시간을 관통하고 관장까지 하게된 인간의 중심성이 과도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안으로 안으로 들어간 <인셉션>과 달리 밖으로 밖으로 나간 <인터스텔라>의 성향과 맞지 않았을지도. 과도해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것인지, 아무도 알아채려 하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부분에서 놀란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다시금 '인간'에 천착한 놀란은 <덩케르크>로 성공과 부활을 만끽했다. 


그의 차기작도 인간에 천착할 것은 명약관화이다. 그가 다시금 초심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또 다른 <다크나이트>를 보고 싶다고 하면 너무 큰 바람일까. 내러티브와 스타일에 매몰되지 않고 완전히 장악한 그의 면모를 말이다. 기대는 기대를 낳고 실망은 실망을 낳지 않는 법. 크리스토퍼 놀란을 향한 기대는 영원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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