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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일본 버블붕괴기 '잃어버린 10년'의 기막힌 변주 <종이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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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종이 달>


한 평범한 가정 주부의 기막힌 일탈, 횡령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며 밀회를 즐긴다. 그건 일본 잃어버린 10년의 변주다. ⓒ영화사 오원



일본의 고도성장기와 버블경제기는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끼친 유명한 키워드다. 특히 1990년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버블붕괴기는 현대 일본을 이야기하는 데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시기이다. 2000년대에도 나아질 또는 예전으로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아 '잃어버린 20년'으로 통용되기도 하는 바, 참으로 많은 콘텐츠에서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일본이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고 그 지위를 굳히자마자 앓게 된 숙명적 병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 병은 나라에서 사회로 가정으로 개인으로 전염되었고, 결국 최종적으로 개개인들이 뒤짚어쓰다시피 했다. 많은 사회파 소설과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걸작 소설로 회자되는 작품을 영화화한 <종이 달>은 드라마를 기본으로 한 심리와 상황적 서스펜스 장르를 앞세워 숨막히는 현실감을 선사한다. 199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잃어버린 10년의 진중한 변주가 엿보인다. 그런 한편 지극히 개인적인 요소도 가미해 소설과 영화만이 가지는 예술적 특성의 발현도 만끽할 수 있다. 


일본 버블붕괴기의 변주


이 영화는 시종일관 불안하다. 리카의 삶이 불안하고, 보고 있는 내가 불안하며, 이 세계까지 불안해 보인다. ⓒ영화사 오원



그리 모자를 것 없는 가정에서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아가던 리카(미야자와 리에 분)는 우연한 기회에 별 생각 없이 지원해 파트타임으로 일하게 된 은행에서 어느새 4년차 계약직원이 되었다. 어느 날 외근을 마치고 퇴근하던 중 충동적으로 화장품을 사게 되는데 만 엔이 부족하길래 고객의 예금에서 꺼내 쓰고 나중에 채워놓는다. 채워놨으니 괜찮다고 생각했을 테다. 이 한 번의 행위가 시작이었으니...


이번에도 어느 날 외근을 마치고 퇴근하던 중이었다. 껄끄럽지만 대형 고객의 손자 코타와 마주친다. 일전에 집에 찾아 갔다가 도움 아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리카의 충동은 한 발 더 나아간다. 코타와의 밀회가 시작되는 것이다. 한편 리카의 남편은 상하이로 장기출장을 가는데, 리카는 코타와의 밀회를 계속하면서 홀로 남는다. 그리고 코타가 대학등록금을 내기 위해 대부업체에서 대출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되는데...


그를 위해 리카의 충동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대형 고객의 예금에 손을 댄 것이다. 이전에 잠깐 쓰고 채워놓은 만 엔 정도가 아닌, 200만 엔의 거금이다. 당장 채워놓을 생각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 그런데 그녀는 오히려 더 많은 고객 예금에 손을 대는 게 아닌가? 엄청난 돈을 쓰는 호화로운 생활에 취해버린 것 같다. 그녀의 앞날은 어떨까.


1990년대 중반 일본, 가정주부 출신, 은행, 대형 고객, 횡령, 밀회, 자유. 영화 <종이 달>을 형성하는 키워드들이다. 동일선상의 층위라고 할 순 없지만, 1990년대 일본 버블붕괴기의 여러 변주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 횡령과 밀회와 자유의 상관 관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요소와 개인적 요소를 합리적으로 이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횡령에 의한 호화생활, 그 모든 게 신기루이자 가짜


제목 '종이달'은 신기루이자 가짜의 상징이다. 리카가 횡령으로 호화생활을 하고 밀회를 즐기는 게 모두 그렇다는 것.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라. ⓒ영화사 오원



뭐니뭐니 해도 영화의 중심엔 리카의 횡령이 있다. 그녀가 상대하는 대형고객들은 망령든 일본 사회가 흩뿌린 마지막 행운을 움켜쥔 운좋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버블경제의 수혜자들이다. 그들은 버블경제가 곤두박칠 치기 직전 땅값과 주가가 폭등할 때 한몫 챙겼을 것이다. 이후 모두가 허덕일 때 홀로 자가증식했고 은행의 최대고객이 되었다. 


리카가 그들의 예금을 빼돌려 내연남과 함께 분수에 맞지 않은 호화 생활을 한 건, 그러면서도 그들의 대한 죄책감 하나 가지지 않았던 건, 그들이 아닌 버블경제가 낳은 '버블'이라는 쓰레기를 조롱하며 그 또한 언젠가 사라질 신기루이거나 이미 진짜 아닌 가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통렬한 비판이다. 


그렇지만, 리카는 달리 말한다. 왜 횡령을 일삼았냐는 질문에 그녀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그 앞에 '가짜로서의'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그녀 입으로 직접 대형고객들의 예금을 빼돌려 호화 생활을 한 게 전부 '가짜로서의 자유'를 만끽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 돈 모두 버블에 지나지 않은 신기루라고 못을 박고 있는 것이다. 


리카는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빼돌린 돈으로 호화 생활을 하면서도 종종 보이는 그녀의 공허한 표정은 앞으로 다가올 예정된 비극을 암시한다. 그녀의 앞날은 어찌될 것인가. 죗값을 달게 받을까. 그건 이 변주의 정석적인 마무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죗값을 받지 않는다면 그건 이 변주의 훌륭한 마무리가 될 것이다.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으로 죗값을 받고 있지만, 정작 버블을 일으킨 당사자들은 죗값을 받기는커녕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차원을 달리하는, 나라를 이끄는 이들의 무감각


'가짜'와 '자유'를 운운하는 그녀의 횡령범죄, 진짜 문제는 그리고 영화가 진짜 말하고자 하는 건 나라를 그 꼴로 만든 이들의 무능력과 무감각과 무탈함일 것이다. ⓒ영화사 오원



시대의 소시민이라 할 수 있는 평범한 가정주부 출신의 리카가 벌인 희대의 범죄 행각은, 그 평범함이 주는 무감각만큼 불쾌하고 불안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횡령은 그 어느 누구라도 실행 가능한 범죄이며, 그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범죄다. 무엇보다 한 번 시작하면 헤어나오기 힘들다. 부자의 돈이라며 자기합리화하고, 다시 채워넣으면 된다고 자기최면을 건다. 


더 큰 문제이자 더 불쾌하고 불안하고 무섭게 다가오는 건, 나라를 이끄는 이들의 무감각이다. 횡령을 비롯한 그들의 범죄는 전국민 누구나 알게 되어 공론화 되지만, 전국민 누구도 그 자세한 사항과 비하인드 스토리와 이후의 일들을 알지 못한다. 회자되고 비난받고 역사에 그 이름이 남을지 모르지만, 정작 그들 자신의 삶은 이전과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소시민의 평범한 범죄가 주는 소름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진정한 범죄가 아닌가. 


일본의 버블붕괴, 한국의 IMF사태, 미국의 금융위기와 같은 초국가적 경제 위기는 모두 나라를 이끄는 이들의 비상식적이고 의도된 무감각에서 비롯되었다. 거기에 비하면 리카의 '자유'와 '가짜' 운운하는 횡령 범죄는 비록 그 평범함 때문에 더 깊숙이 와 닿아 더 치를 떨고 지켜보게 되지만, 그럼에도 차라리 귀엽다고 하겠다. 한편, 리카가 말하는 자유와 가짜가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이들에게 던지는 말이니 만큼 아니러니하다 하겠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계속 생각했다. 범죄를 저지르는 건 한순간이기에 '나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라는 건 통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에 해당된다. 돈을 채워놓지 않는 한 반드시 들통 나게 되어 있다. 그렇지만 채워놓을 마음도 없고 능력도 없으니, 결국 들통 난 이후에 해당될 것이다. 죗값을 받을까? 도망갈까? 여기에서의 선택은 보다 개인적이고 예술적인 영역인 바, 도망을 택하겠다. 리카는 어떻게 했을까?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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