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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인연과 기억이 준 선물 <너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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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2017년의 시작 <너의 이름은>


일본에서 역사적인 메가히트를 기록한 <너의 이름은>이 한국에 상륙했다. 개인적으로 <시달소> 이후에 최고의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 ⓒ메가박스㈜플러스엠



'저팬'과 '애니메이션'의 합성어인 '저패니메이션'이라는 단어가 생겨날 정도로 일본 애니메이션은 힘이 강하다. 더구나 이 단어가 일본 내가 아닌 전 세계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가르키는 말이라니, 그 대단함이 새삼 엄청나 보인다. 


저패니메이션은 1900년대 초에 최초로 생겼지만, 그 본격적인 전성기는 1960년대 그 유명한 '데즈카 오사무'에 의해서이다. '만화의 신'이라 불리는 그는 일본 최초의 TV애니메이션 <철완 아톰>을 만들었다. 이후 여러 명작들 덕분에 그 대상이 어린이에서 어른까지 확대된 저패니메이션이다. 1980년대에는 현대까지 저패니메이션에 최고의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출현했다. 그는 극장을 점령하며 저패니메이션의 영향력을 그 어떤 문화보다 우위에 서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사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저패니메이션의 주류는 <아키라> <공각기동대> <에반게리온>으로 이어지는 사이버 펑크였다. 폭력적이고 선정적이지만 그 안에 담긴 철학은 심오했다. 그 이후 주류는 2000년대 중반까지 미야자키 하야오였을 것이다. 하야오의 압도적인 메시지와 작화와 캐릭터는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섬세한 스토리와 아름다운 작화, 감수성 어린 캐릭터가 주를 이룬 애니메이션이 등장한다. 그 중심에 아마도 호소다 마모루와 신카이 마코토가 자리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디지몬> 시리즈로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완전히 파악하며 확실한 인지도 위에서 주류를 형성한 호소다 마모루, 빛에 대한 집착과 함께 차근차근 자신만의 감수성 세계를 공고히 하며 명실상부 현재 저패니메이션 NO. 1에 오른 신카이 마코토.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초창기작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가장 기억에 남는 반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최신작인 바로 이 작품 <너의 이름은>이 가장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 두 작품 사이에는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다.  


청춘로맨스에서 판타지까지


꿈 속에서 서로의 모습이 바뀌는 체험을 하는 남과 여, 이들의 청춘로맨스는 판타지로 나아간다. 그 끝엔 무엇이 있을까? ⓒ메가박스㈜플러스엠



두메 산골에 사는 소녀 미츠하, 있는 거 빼고 다 없는 이 시골을 탈출하고 싶어 한다. '다음 생에는 도쿄의 남자로 태어나길' 바라는 그녀. 그건 다음 생에나 가능한 일이고, 그저 도쿄에 놀러가는 건 가능하겠다. 얼마후 꿈을 꾼다. 다름 아닌 '도쿄의 소년 타키'가 되는 꿈. 자신이 꿈 속에 있다는 걸 인지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다른 성의 몸인 만큼 모든 게 쉽지 않다. 


한편, 도쿄의 소년 타키도 꿈을 꾼다. '두메 산골의 소녀 미츠하'가 되는 꿈 말이다. 미츠하처럼 그도 역시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다른 성의 몸인 만큼 모든 게 서툴다. 더구나 타키는 미츠하가 도쿄를 동경했던 것처럼 두메 산골을 동경하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런 식으로 꿈을 꾸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꿈에서 깨어 보면 전날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알고 보니 꿈이 아닌 서로 몸이 바뀌었던 것. 그 사실을 안 그들은 이 상황의 난감함을 최소화하기 위해 서로를 인식하며 서로를 도운다. 


어느 날 더 이상 바뀌지 않게 된 그들. 참지 못할 궁금증이었을까, 운명적인 끌림이었을까,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찾아간다. 이보다 더 엄청난 인연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그 인연을 훨씬 더 뛰어넘는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 청춘로맨스 판타지가 끝나며 시작되는 새로운 판타지에는 감동과 눈물이 있을 것이다. 


무스비에서 기억으로, 방점은 감동과 눈물


영화를 관통하는 두 주제, 무스비(인연 또는 결연)와 기억. 방점은 감동과 눈물에 있다. 초반의 웃음이 자연스럽게 감동과 눈물로 이어지는 것이다. ⓒ메가박스㈜플러스엠



남자와 여자의 몸이 바뀌는 스토리는 사실 획기적이지 못하다. 획기적이기는커녕 지금에 와서는 아무도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는 아이디어다. 단순하게 기억으로만 더듬어 봐도 최소한 20년도 더 전에 나온 스토리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왜 주인공들의 몸을 바꾸었을까. 


아무래도 '판타지'에 방점이 찍히겠지만, 뒤에 맞게 될 감동과 눈물에 그 방점이 찍히는 게 맞을 것이다. 그는 이 트랜스 섹슈얼 판타지를 흥미를 끌 만한 그 자체의 독특함과 더불어 전달하고자 하는 바의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겠다. 모르긴 몰라도 감독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 의외로 이 판타지가 아니었을까. 


<너의 이름은>의 감동과 눈물은 미츠하의 할머니가 되뇌는 '무스비'라는 단어에 집약되어 있는 것 같다. '매듭'이 본 뜻인 바 '인연'이나 '결연'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타키와 미츠하가 몸이 바뀌는 신기한 체험을 한 게, 운명이라기보다 인연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들의 몸이 바뀐 게 운명이라면 더 이상 몸이 바뀌지 않게 된 것도 운명이 아닌가. 그건 그들 사이에 끈이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반면 이들 사이엔 무스비가 존재한다. 짧고 약하고 알아보기 힘들지만, 어떻게든 이어질 끈이 있다. 그 끈의 끝에는 그 또는 그녀가 존재한다. 나의 인연이 말이다. 영화는 이제 '기억'으로 넘어간다. 인연임을 알지만 누구인지 모르며, 내 인연일 누군가가 그곳에 있음을 알지만 이름을 알지 못한다. 너의 이름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건 나에게서 그(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 없다.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 영화를 보고 '동일본 대지진'과 '세월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감독도 의도한 바,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재로 인한 재앙이니 많은 이들을 살릴 수 있을 텐데. ⓒ메가박스㈜플러스엠



감동과 눈물을 담당하며 '무스비'와 '기억'라는 추상적 개념을 현실로 옮긴 사건은 1200년 만에 찾아온 아름다운 혜성과 관련 있는데, 감독은 그 모티브를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라고 밝힌 바 있다. 미증유의 사건, 하지만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인재(人災)'라는 진짜 재앙. 우리한테는 세월호가 그 자리에 있다. 


자연의 엄청난 힘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재앙이었다면, 그 안에 인간의 의한 어떤 안타까움이 없었다면, 그저 슬퍼했을 것이다. 그저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위적인 힘이 작용했다면, 그래서 더욱 악화되었다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분노는 오래 가지 않는다. 분노하면 할수록 더 빨리 잊혀진다. 기억하지 않는 것이다. 


<너의 이름은>은 '기억'하는 것이 그 사건을 대하는 또 다른, 그리고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 기억의 주체는 '사건'이 아닌 '이름'이다. 지극히 동의한다. 활활 타오르다가 금방 사그라지는 그런 불꽃이 아닌, 마그네슘 촛불처럼 활활 타오르지는 않지만 사그라지지 않는 그런 불꽃을 들어야겠다. 


영화는 후반부에 이 사건을 중심으로 모든 얼개를 맞춘다. 그 사건에,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주인공들이 펼치는 모험에, 안타까움과 가슴졸임과 환희에, 누구도 열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전에 누구도 가슴 한 켠이 시려오는 경험을 피해가지 못할 것이다. 


동일본 대지진, 세월호를 비롯해 수많은 재앙들, 그 중에서도 충분히 빗겨갈 수 있었을 인재(人災)들이 가슴을 짓누른다. 그 사건들을 다시, 또다시 대할 때마다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하고 생각한다. <너의 이름은>은 바로 그 부분을 건드린다. 처음엔 감성적으로, 나중에는 현실적으로, 마지막엔 따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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