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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12년 간의 촬영으로 소년기를 온전히 보여주다 <보이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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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12년 촬영의 위대한 결과물 <보이후드>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 한 점 부담이 없을 영화 <보이후드>. 6~18세의 소년기를 정녕 그대로 보여준다. ⓒUPI코리아



우리는 '최고'라는 수식어는 수없이 본다. 또 쓰기도 한다. 자신이 느끼기에 최고이면 되는 것이다. 상당히 주관적인 인식이 깔려 있다. 반면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는 함부로 붙일 수 없다. 만약 신이 있다면 신에게나 붙일 수 있을 것이고, 인간에게라면 극소수만 허락될 것이다. 그런 사항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이 영화 <보이후드>에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데 주저함이 없다. 


'보이후드(boyhood)'라고 하면 '소년기'를 뜻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만 열두 살부터 스무 살까지로 잡는 반면 서양에서는 여섯 살부터 열여덟 살을 잡는다. 프로이트의 심리성적 발달단계,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단계 등에서 공통적으로 이 시기를 소년기로 잡는다. 인생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는 보이후드, 이 시기를 그려내고자 하는 노력은 참으로 많았다. 소설만 보아도 <데미안> <호밀밭의 파수꾼> 등의 위대한 작품이 있다. 영화는? <보이후드>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여섯 살부터 열여덟 살의 12년을 영화로 보여주는 건 쉽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쉬울 수 있다.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방법은 너무나 다양하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이들은 그런 것에 관대한 편이다. 하지만, 12년을 그대로 보여주려 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일단 촬영 기간만 12년이 걸릴 것이다. 감독 이하 스탭들과 등장인물들은 12년 동안 촬영에 임해야 한다. 무엇보다 12년의 기간 동안 질주하는 영화 관련 기술들의 발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의 처음과 끝이 다르면 안 되겠는데. 


12년 간의 촬영으로 소년기를 온전히 보여주다



이 영화의 위대함은 소년기의 12년에 해당하는 기간을 촬영했다는 점이다.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하고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것을 해냈다. ⓒUPI코리아


영화 <보이후드>는 여섯 살부터 열여덟 살의 소년기를 온전히 영화로 보여주기 위해 실제로 12년 간의 촬영을 감행했다. 이런 무모하지만 위대한 생각을 한 이는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 그리고 <스쿨 오브 락>으로 유명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다. 그는 현실성을 극도로 강조하기로 유명한데, <비포> 시리즈뿐만 아니라 <보이후드>도 영화적 시간과 현실적 시간을 가능한 일치시키려 노력했다. 12년 동안 매년 15분씩 만나 촬영을 했다고 하는데, 러닝타임이 160분을 상회하니 만큼 거의 비슷하다. 


6살 메이슨은 누나 사만다, 엄마 올리비아와 함께 텍사스에서 살고 있다. 아빠 메이슨과는 주말마다 만나고 휴가도 함께 보내면서 항상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같이 살진 않는다. 십대 후반의 이른 나이에 사고를 쳐 아이를 낳고는 오래지 않아 헤어진 것 같다. 올리비아에게는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고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던지는 삶에 대한 설움이 있다. 어린 메이슨은 엄마의 절규에 가까운 성토를 엿듣는다. 


감수성이 특별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 환경에 절대적으로 휘둘릴 수밖에 없는 소년기의 한 가운데, 어린 메이슨은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나름대로 헤쳐나간다. 방황은 어른들에게도 찾아간다. 특히 올리비아. 그녀는 아이를 키우느라 하지 못했던 공부를 뒤늦게나마 시작해 승승장구하지만, 결혼 생활은 정반대이다.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피해가 가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더 있겠는가?


어린 메이슨의 12년 소년기는 그 어떤 영화가 주는 현실성보다 더 현실적이다. 얼마나 현실적이고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면, 그래서 중간중간 안 봐도 될 만하다고 생각되는 장면이 있었겠는가. 덕분에 종종 밀려오는 졸음을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위대한 영화에게 큰 결례인 바 반드시 또 보도록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추구하는 것이 인생 그 자체이기에, 영화보면서 조는 실수도 감싸주지 않을까?


이혼한 가정의 소년이 겪은 소년기의 전형


이혼한 가정의 소년은 어떤 삶을 살까. 이혼이 아무리 흔하다지만, 그래도 특별한 일일 거다. 그의 소년기는 내 이야기같아 공감가지만, 너무 기구해 영화 같기도 하다. ⓒUPI코리아



나의 여섯 살을 회상해본다. 솔직히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 사진으로 남아 있어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모르겠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어린 메이슨의 여섯 살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에게는 부모님의 '이혼'이라는 요즘 세상에서는 특별할 것 없지만 그래도 특별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후의 또 다른 결혼 생활도 좋지 못했고.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이혼한 가정의 소년이 겪은 소년기의 전형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여느 가정과 크게 다르진 않을 거다. 주로 바깥 일을 하는 아빠와는 거리가 있는 반면 부딪히는 일도 별로 없을 테지만, 주로 집안 일을 하는 엄마와는 가까운 반면 부딪히는 일도 많다. 어린 메이슨의 엄마가 바깥 일도 하고 집안 일도 하며 아이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게 좀 다르지만, 보이는 모습이 다를 뿐 본질은 같다. 


피를 나눈 누나와는 가장 많이 부딪히지만 또 가장 의지가 되기도 한다. 친구나 형, 동생과는 다시 없이 좋은 때를 보내지만, 다른 학교로 가거나 이사를 가면 훌쩍 떠나 기억에서 잊히고 만다. 새 친구를 사귀는 건 참으로 고역이고 귀찮고 때론 두렵기까지 한 일이지만, 언제 그랬나 싶다. 


한편 거리가 있는 아빠지만, 또 엄마한테는 말 못할 비밀을 공유하기도 하는 존재다. 그렇지만 가장 무서운 존재도 아빠인 바, 집 안에서 가장 힘이 세고 발언권이 강한 가장이 폭력을 쓰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집이 파탄을 맞이하는 건 정말 한순간이다. 그렇게 파탄난 가정을 되돌리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지만, 아이를 낳아 키우고 난 후 금이 가고 깨어지는 건 돌이키기 힘들다. 어린 메이슨이 겪는 일들은 참으로 기구하다. 대부분 내 이야기 같아 공감하지만, 때론 너무 기구해 응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누구나 한 시기가 지나고 새로운 시기가 찾아온다


영화의 마지막은 예고되어 있다. 소년기의 마지막, 다음 시기로 가야 하는 소년. 그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저 받아들이면 될 것. ⓒUPI코리아



이러저러 해도 어린 메이슨이 겪는 소년기는 별 다를 게 없다. 아무리 즐거워도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슬퍼도 크나큰 사건이나 전환점 없이 물 흐르듯 흘러간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는 것 같다. 그저 그렇게 흐르고 흘러 지금의 내가 되었다고 할까. 영화 막바지, 메이슨이 독립을 하려고 짐을 싸 나가려는 순간 엄마 올리비아가 울면서 말하는 대사가 가슴을 찌르고 들어온다. 


"오늘은 내 인생 최악의 날이야. 떠날 건 알았지만 이렇게 신이 나서 갈 줄은 몰랐다. 결국 내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 거야.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결혼하고 애 낳고 이혼하면서. 네가 난독증일까 애 태웠던 일, 처음 자전거를 가르쳤던 추억. 그 뒤로 또 이혼하고, 석사학위 따고, 원하던 교수가 되고, 사만다를 대학에 보내고, 너도 대학 보내고... 이젠 뭐가 남았는지 알아? 내 장례식만 남았어! 난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뭔가 더 있을 줄 알았다는 올리비아의 말, 메이슨이 온전히 소년기를 겪을 때 그의 주위 사람들도 온전히 그들만의 '소년기'를 겪는다는 걸 나타내는 단적인 대사다. 소년기가 끝나고 새로운 시기와 맞닥뜨리게 되는 아이들을 떼놓으려고 매몰차게 대하는 엄마의 모습이 바로 전 시퀀스에서 비춰져 올리비아의 대사와 행동이 더욱 와 닿는다. 우리 부모님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고 하지만, 내 인생은 나만의 것이 절대 아니다. 


그렇게 길고 긴 한 시기가 지나고 새로운 시기가 찾아온다. 누구나에게도 찾아올 것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도, 나라도, 인류에게도 찾아온다. 그 경계가 언제인지는 잘 모른다. 기억 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기억이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그때를 생각하는 기억이 아니라, 지금은 알 도리가 없지만 그때 당시의 '지금'을 인지하고 당시의 '순간'을 맛보았으면 되는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찾아올 거다. 어떤 기나긴 시기의 시간, 그리고 다음 시기로의 길, 또 다른 어떤 기나긴 시기의 시간. 그 순간들을 억지로 잡으려 할 필요는 없다. 메이슨의 말대로 그 순간들이 우리를 잡으려 할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려는 마음만 가지면 된다. 순간은 우리를 스쳐 지나가며 손짓하며 인사할 것이다. 순간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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