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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30년 전 그때, '왜' 범인을 잡을 수 없었을까 <살인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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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올해로 30년이 된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가지고 지난 2003년에 봉준호 감독이 만들어낸 <살인의 추억>. 2000년대 한국 영화가 낳은 최대 최고의 쾌거다. ⓒCJ엔터테인먼트



올해로 30년이 되었다. 한국에서 발생한 최초의 연쇄살인사건이자, 최악의 미제 사건. 일명 '화성 연쇄 살인 사건'. 1986년 9월 15일에 시작되어 10명의 여성이 피해를 입었다. 반경 5km 안에서 일어났음에도, 180만 명의 경찰이 동원되었음에도, 결국 살인자를 잡을 수 없었다. 잡히지 않는 범인도 대단하지만, 범인을 잡지 못하는 경찰도 대단했다. 잡을 마음이 없었던 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1990년대 중반에 3편의 단편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지만 한동안 연출을 이어나가지 않았던 봉준호 감독은, 2000년 <플란다스의 개>로 장편에 데뷔한다. 비록 흥행엔 실패하지만 평단의 호평과 마니아층의 환호 속에 2003년 <살인의 추억>으로 돌아온다.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영화는 그야말로 대대적인 흥행과 호평을 받으며, 봉준호 감독을 단번에 충무로의 총아로 발돋움시킨다. 


대사과 장면은 물론, 캐릭터까지 완벽한 영화로서, 한국만이 가지는 시대상에 그동안 한국 영화가 가지지 못했던 할리우드식 구도를 훌륭히 접목시켰다. <살인의 추억>으로 한국 영화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지극히 영화 내적이니만큼, 전후 어디서도 찾아 보기 힘든 쾌거다. 


'왜' 그때 범인을 잡을 수 없었을까


영화를 보면 답답하기 그지 없다. 도대체 왜 범인을 못 잡는 것인가. 지금이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 '미제' 사건이니까... ⓒCJ엔터테인먼트



1986년 경기도 시골에서 강간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오래지 않아 동일범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특별수사본부가 꾸려진다. 두만(송강호 분)과 용구(김뢰하 분)는 토박이 형사로, 뛰어난 '감'과 끈질긴 '족치기'로 쉽게 범인을 잡으려 든다. 뒤늦게 서울에서 자진 합류한 태윤(김상경 분)은 거짓말 하지 않는 '서류'만 믿을 뿐이다. 


아무래도 처음엔 '감'에 의지하게 되는데, 도무지 '서류'에 맞지 않아 범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태윤을 무시한 채 현장검증을 했다가 범인이 부인해 전국적으로 망신살을 당하고 만다. 결국 반장이 파면당하고 서울에서 새로운 반장이 오기에 이른다. 그는 두만과 태윤의 감과 서류를 모두 이용해 또 다른 유력 용의자를 잡아 들였지만, 그마저도 상식적으로 범인이 아니다. 그렇게 사건은 한없이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영화는 한국 최악의 미제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만큼 결말이 이미 나와 있는 거나 다름 없다. 결국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는 것. 그렇다면 도대체 '왜' 범인을 잡을 수 없었는가 하는 게 중요한 포인트일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게 있다. 그때가 아닌 지금이라면 범인을 잡았을까? 모르긴 몰라도 잡을 수 있을 듯하다. 그건 단순히 30년이라는 긴 세월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세월의 차이가 아닌 다른 차이,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이다. 


나라를 대표하는 이들의 '무능'


시골 형사, 도시 형사를 막론하고 그들은 '무능'하기 짝이 없다.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니만큼 그들은 나라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겠다. 나라를 대표하는 이들의 '무능'이다. ⓒCJ엔터테인먼트



그건 시골이 가지는 후진성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두만'이라는 한 개인이 가지는 특수성에 기인할지도 모든다. 아니면 둘이 합쳐졌는지도. 그는 감에 의지해 곧잘 범인을 때려잡는다. 그런데 그에겐 좁디좁은 동네 돌아가는 사정을 꿰뚫는 여자가 하나 있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하는 얘기를 귀담아들었다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과학에 입각한 수사'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떨어져 있다. 이게 과연 시골에만 해당하는 걸까.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만큼, 두만은 시골을 대표하는 게 아니라 나라를 대표하는 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유연성 없는 서류 수사의 후진성일까. 이 또한 '태윤'이라는 한 개인이 가지는 특수성에 기인 또는 둘이 합쳐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서류에 의지해 범인을 잡으려 한다. 거기에는 사실만 있을 뿐이니까. 시험문제 답은 전부 교과서에 있는 법 아닌가. 그런데 중학생한테 고등학교 시험 문제를 내주면 풀 수 없는 법, 태윤한테는 이 신출귀몰한 범인은 너무 어려운 시험 문제다. 교과서 밖에서 낸 응용문제다. 그는 두만이 잡아들인 용의자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알 뿐이다. 두만과는 또 다른 종류의 '무능'. 나라를 대표하는 이들의 무능은 종류도 다양하다. 


이 판국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별의별 말 같지도 않은 추리를 진지하게 내뱉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그 중에 절정은 무당. 두만과 용구는 무당한테 찾아가 범인의 얼굴을 알 수 있는 방법을 알아온다. 무당이 준 화선지에 먹물을 쓱 뿌리고 자연스럽게 내려 말리면 범인의 얼굴이 비춘다는 것. 얼마 전까지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짓이었을 거라 생각했겠지만, 지금이라면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어련하시겠어요. 


영화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태로 천천히 흘러간다. 완벽한 짜임새다. 그들만의 세상 - 이물질 투여 - 대립 - 그들과 이물질의 실행 - 실패 - 결합 - 성공 징후 - 최종 동반대실패. 분명 이들에게도 성공의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가 망치고, 운이 따라주지 않았고, 정부가 도와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시대가 그들을 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미제 사건의 근원, 지금도 활개치고 있다


이 미제 사건의 근원은 당시 '시대'에 있겠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왜 여전히 이 사건은 미제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인가. ⓒCJ엔터테인먼트



때는 1986년, 전두환 시대의 절정이다. 비록 이듬해 민주화 운동의 거침 없고 매서운 불길에 움츠러들 테지만, 바로 그 전이기에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는 정권의 움직임은 매서웠을 것이다. 영화는 그런 모습들을 짧게나마 잡아내는데, 그 순간이 의미심장하다. 연쇄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에게 행하는 발길질을, 데모하는 여학생에게 똑같이 행하는 용구의 모습은 시대의 상징 그 자체이다. 


우린 그 순간의 모습으로 한 가지 사실이자 이 '미제' 사건의 근원을 알 수 있다. 정부는 이 사건을, 이 여성 강간 살인 사건을 수사할 저의가 없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들의 눈은 강간당해 죽은 여성에게 향해 있지 않았고, 자신을 위협하는 여성에게 있었다. 그들의 발은 자신을 위협하는 여성을 밟는 데 힘을 소진해, 강간당해 죽은 여성의 억울함을 밝히는 데 힘을 쏟을 여지가 없었다. 그때는 그런 시대였다. 


지금도 그런 시대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그 시대를 마음껏 욕하면서, 그 시대를 살았던 무능하고 악랄한 이들을 욕하면서, 그 시대를 향유했던 이들을 욕하면서, 그 시대가 물려준 아픔과 상실과 치욕을 치유하려 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 시대는 자칫 역사상 최악의 시대가 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 위기를 헤쳐나간다고 해도, 분명 이 시대는 '무능의 시대'로 남게 될 거다. 


'살인의 추억'은 여러 모로 잔인했다. 에먼 사람을 잡아 족치는 동안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하고, 서로 잘났다 못났다 싸우는 동안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하고, 화해한답시고 거나하게 술판을 벌이는 동안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한다. 이보다 잔인한 게 있나. 에먼 사람을 잡아 족치는 것 자체가 희생자를 유발하는 행위이기도 한 것을, 그런 추억은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다. 


하지만 기억하지 않으면 발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억하고 되새기고 잊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왜 자꾸만 더 어처구니 없고 황당무계한 일들이 벌어지고 마는 것일까. 어째서 잊지 않으려 하는 데에서 멈추고 바꾸려 하지 않는 것일까. 바꾸지 못하는 것일까. 바뀌지 않는 것일까. 정녕 모든 걸 비우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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