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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이 '만화'가 최고의 콘텐츠인 이유, 다시 보는 이유 <마스터 키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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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마스터 키튼>


어른이 되고서야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를 접했고, 나의 모든 콘텐츠 리스트 중 최상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중에 특히 <마스터 키튼>은 특별하게 남아 있다. <마스터 키튼> 표지 ⓒ대원씨아이



만화책을 처음 보기 시작했던 중학교 2학년, <미스터 초밥왕> <더 파이팅> 등이 주는 '노력이 모든 걸 압도한다' 식의 교훈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드래곤볼> 류의 비현실적인 소년 만화는 조금 뒤에 받아들였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콘텐츠를 접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재미'와 '감동'이 된 게 말이다. 무엇보다 캐릭터에 나를 이입할 수 있는 걸 원하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지금은 나에게 있어 최고의 만화가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는, 오랫동안 나의 만화 리스트에 오르지 못했다. 심각하고 우울하며 재미와 감동과는 거리가 먼 듯한 그의 만화에 관심을 둘리 만무했다. 다 때가 있는 걸까. 어른이 되고서야 그의 만화를 접했고, 나의 모든 콘텐츠 리스트 중 최상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마스터 키튼> <몬스터> <20세기 소년> <플루토> 등 영화도 이런 영화가 없었고, 소설도 이런 소설을 접하기 힘들었다. 그중에 특히 <마스터 키튼>은 특별하게 남아 있다. 


최고의 자리에 있던 그에게도 '꿈'이 있다


<마스터 키튼>은 히라가 키튼이라는 영국인과 일본인 혼혈 보험조사원의 활극을 다룬다. 세계 최고의 보험사인 로이드에서 일하면서, 파트너 다니엘 오코넬과 자체적으로 보험조사회사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 매 에피소드마다 완결성을 갖는 옴니버스 형식의 만화로, 심리 추리 스릴러가 주를 이루는 그의 만화 중에서 그나마 가볍게 볼 수 있다. 


키튼은 굉장히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인데, 세계적인 명문 옥스퍼드 대학교 고고학과를 졸업했다. 학생 시절에 옥스퍼드 최고의 미인과 결혼해서 아이도 낳았지만 오래 가지 않아 파경을 맞아 이혼하고 만다. 그는 군대로 도망간다. 다름 아닌 SAS(영국육군특공대), 세계 최고 최악의 특수부대다. 키튼은 그곳에서 서바이벌 교관으로 있었다. 한편 포클랜드 전쟁과 이란대사관 점거사건에서 부사관으로 활약한 경력도 있다. 그야말로 '전투의 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을 하든 '최고'의 자리에 있던 그이지만, 그에게는 꿈이 있다. 고고학자. 그것도 학계에서 이단 취급을 받을 정도로 비주류인 '유럽 문명의 도나우 강 기원설'을 지지하는. 그가 위험한 보험조사원 일을 계속하는 것도,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할 게 뻔한 유적 발굴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대학교에 강사 자리를 얻는 게 어렵거니와, 얻는다 해도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 키튼의 고민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나의 현실과 꿈을 되새김질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현실을 멀리하고 있지도 않은 바, 그동안의 경력을 살리며 목숨까지 내놓고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불가능을 꿈꾸는 리얼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했던 체 게바라의 말이 떠오른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허구와 진실, 현실과 비현실의 조화


만화는 세계 정세가 급변하는 1989년에 시작되었거니와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는 보험조사원 일을 하는 히라가 키튼을 주인공을 내세웠기에 그야말로 스케일이 크다. 더욱이 당대 세계 정세와 유럽 역사에 대한 치밀한 조사와 취재가 엄청나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여서, 단순한 만화 읽기로 완전히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세계 정세와 유럽 역사만 보면 대하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인데, 만화라는 장르 특성상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없다. 그것도 이 만화를 읽는 큰 재미 중 하나일 것이다. 반면 주인공의 활약을 보면 누가 보아도 만화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다. 무슨 일을 하든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스스로 헤쳐 나간다. 


그 중심이 아주 잘 잡혀 있다. 허구와 진실, 현실과 비현실이 서로의 자리를 아주 잘 커버한다. 궁금할 필요 없이 그냥 키튼을 따라 가면 된다. 정 궁금하면 찾아 봐도 되고 직접 해봐도 된다. 그것도 이 만화를 읽는 한 방법일 터, 작가가 의도했을 법하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학력과 이력, 경험을 가졌지만, 정작 자신은 그런 것들을 크게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는, 비현실과 현실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가 히라가 키튼이다. 정녕 매력적인 캐릭터다. 


이 만화를 계속 다시 보는 이유


20년이 훌쩍 지났으며, 당시의 시대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만화. 거기에 진지하고 때때로 지극히 현실적인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제 아무리 고증이 잘 되어 있다고 해도 만화이기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굳이 만화로 이런 내용을 들여다볼 이유는 하등 없어 보인다. 역사를 좋아하고, 진지한 리얼극을 좋아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이 만화에는 여타 어느 콘텐츠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닌 주인공 '키튼', 그리고 그의 주변 사람들.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 어느새 극을 이끌고 있는, 허술한 듯 허당인 듯 행동으로 믿음을 안기는, 모르는 게 없고 못하는 게 없지만 굉장히 여린 마음을 가진 캐릭터다. 특히 아이들에게 '멋진' 사람인 그다. 


3대 째 이혼의 아픔이 있지만, 그가 대면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불행에 비해서 더 하다고 할 수가 없다. 너도 아프고 나도 아픈 거다. 멋진 사람이지만 잘못도 많이 저지르고 후회도 많이 하고 아픔도 많이 있다. 이 시대 현대인의 자화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지만 키튼은 현대인에게서 점점 사라지는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 꿈, 이상, 동심 따위들이다. 굉장히 복잡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이 만화를 계속 다시 보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거다. 어느 콘텐츠에서도 찾아 보기가 힘들다. 지독한 현실을 헤쳐나가면서도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들을 지켜나가는 캐릭터가 말이다. 아마 중심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욕 먹기 딱 좋기 때문일 텐데, <마스터 키튼>은 참으로 적절하다.


얼마 전에 <마스터 키튼> '리마스터'가 출간되었다고 한다. <마스터 키튼>이 끝나고 20년 후가 배경인데, 그가 지켜왔던 것들을 여전히 지키고 있는지 궁금하다. 20년이면 모든 게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모든 게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게 있다는 걸 일깨워줬으면 좋겠다. 그걸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도 할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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