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나간 책 다시읽기

인간 정약용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반응형



[지나간 책 다시 읽기]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표지 ⓒ창비



지금으로부터 4000여 전인 기원전 1700년 경의 수메르 점토판에는 자식에게 '제발 철 좀 들어라'라는 말이 적혀 있고, 2500여 년 전인 기원전 425년에는 소크라테스가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라고 했다. 그밖에 상상도 되지 않는 옛날에 아비는 자식을 혼내고 스승은 제자를 나무랐다. 물론 거기엔 진심어린 사랑과 관심이 있었다. 


인간 정약용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학자로 뽑히는 정약용. 그는 40세인 1801년 천주교 교난 때 천주교와 관련된 혐의로 유배를 당해 1818년까지 올라오지 못한다. 관료가 나랏일을 하지 못했기에 그 시기는 암흑기였을지 모르지만, 학문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18년 동안 연구와 저술, 강학에 힘써 엄청난 업적을 이루었다. 그의 학자로서의 업적은 거의 그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그런 한편 정약용은 그 시기에 무수한 편지도 남겼는데, 학자 정약용이 아닌 인간 정약용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더 자세히는 아버지이자 스승이자 동생으로서의 정약용. 박석무 교수가 편집하고 옮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창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자체로 의미를 부여하며 보아도 좋고, 다산 정약용 선생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전에 맛보기 또는 입문용으로 보아도 좋다. 


고백해야 할 게 있다. 이 진지하고 학술적이고 뜻깊은 책을 읽으며 몇 번이고 웃음 짓지 않을 수 없었던 일을 말이다. 200여 년이 지난 지금, 정약용이 혼내고 나무라고 무시하는 제자와 자식들은 하나같이 중요 연구 대상이 되어 있다. 정약용만큼의 대학자는 못 되더라도 충분히 일가를 이루고도 남을 인물들인 것이다. 그런 분들을 정약용 선생이 심하게 꾸짖고 과도하게 나무랄 때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런 분들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 4000년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정녕 주옥같은, 그러나 행하기 어렵고 숨막히는 가르침들


정약용 선생은 그 무엇보다 '효제(孝弟)'를 중요시했다. 즉, 최우선적으로 가족을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후에야 학문에 뜻을 둘 수 있다고 했다. 학문에 뜻을 두면, 비로소 독서를 할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다. 효제를 실천하는 것이 곧 근본이오, 근본이 서지 않으면 학문을 할 수 없고, 학문을 할 수 없으면 선비가 아니다. 


폐족이 된 마당에 어디 그게 쉬우랴. 하지만 정약용은 근본을 행하지 않는 자식들을 나무라며 오히려 폐족이 되었기에 학문에만 정진하기 쉽다고 역정을 내다시피 역설한다. 그러며 정녕 주옥같은, 그러나 엄하디 엄하고 너무도 행하기 어려운 가르침을 전한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하고, 어떤 책을 어떻게 지어야 하며,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어떤 행동으로 학문에 힘써야 하는지, 그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마치 옆에서 지켜보는 듯 자세한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다. 당사자라면 숨이 막혔겠지만 제3자 입장에서는 인생을 통틀어 얻기 힘든 소중한 가르침들이다. 


다만, 그는 '눈높이 교육'이란 건 알지도 알려 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던 것 같다. 교육할 때 자신이 행하지도 않는 걸 가르치는 건 안 될 일이지만, 자신이 너무 잘한다고 그것을 그대로 행하게끔 가르치는 것도 안 될 일이다. 정약용은 후자의 잘못된 교육 방식의 화신이었다. 그 자신이 조선 역사를 넘어 우리나라 역사 전체를 뒤져봐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학자인데, 그걸 자식과 제자들에게 그대로 쏟아부으려 했으니... 참 안타깝고 아쉽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그럴 정도의 대학자라는 걸 알았다. 


그런 그도 막내아들이 죽었을 때는 비참하고 비참하며 간장을 후벼파는 슬픔이 북받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자녀 중 6번째 죽음이었는데,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헤어진 슬픔에 몸을 가루기 힘들 때 닥친 죽음이었다. 비교할 수 없는 슬픔이 엄습해왔다. 그 와중에도 정약용은 아내의 심신을 챙긴다. 두 아들로 하여금 아내, 즉 어머니를 마음과 뜻을 바쳐 모시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이다. 인간 정약용의 근본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본받지 않을 도리가 없다. 


두 아들, 둘째형님, 그리고 제자들


책은 크게 4부분으로 나뉜다.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가훈, 둘째형님 정약전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절반 이상이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가훈이다. 사실 대부분 아버지보다 스승으로서 보내는 편지인 듯한 느낌이다. 그만큼 아버지로서의 정보다는, 인생 선배이자 스승으로서의 사는 법을 가르친다. 


아마도 폐족이 되어 관료의 길이 막히고 오직 학자로서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된 아들에게로 보내는 메시지일 것이다. 강하게 키우고자 오히려 더 강하게 대하는 것이리라. 그 마음 씀씀이가 곳곳에 묻어난다. 더군다나 거의 20년 동안 아버지 없이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지 않겠는가? 편지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정약용은 매일 같이 가족들에게 미안해서 대성통곡을 했을 것이다. 


둘째형님과 주고받은 편지들은 그 자체로 온갖 학문의 집대성이다. 정약용 못지 않은 대학자로 이름을 떨친 정약전과 편지로 그야말로 학문의 향연을 펼친다. 그러면서 만나지 못하는 혈육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과 걱정과 사랑이 굵게 묻어나와 가슴을 친다. 이성과 감성이 강렬히 충돌하는 장이기도 한 '둘째형님에게 보내는 편지' 파트는 이 책의 백미다. 마음껏 뿜어내는 정약용의 학문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말들은 앞의 세 파트에 비해선 상당히 이성적이다. 제자 한 명 한 명에게 맞는 해야 할 일을 자세하게 전해준다. 정약용의 방대한 학문 세계와 세심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제자들이 무엇을 어려워하고 무엇을 잘하고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다 알고 챙겨주니, 자녀들에게와는 달리 여기선 '눈높이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그들은 태반이 장차 관료가 되어 나라를 이끌어 나가야 하니 다른 교육 방식이 필요했을 테다. 새삼 정약용 선생이 대단하다. 


두 아들에게 말하는 편지를 읽을 때는 아들이 되어 보고, 둘째형님에게 말하는 편지를 읽을 때는 형님이 되어 보라. 제자들에게 말하는 편지를 읽을 때는 제자가 되어 보는 게 어떤가. 이 한 권으로도 근본이 확실히 선 학문의 길을 가기에 충분할 것이다. 평생 진정한 스승 한 명이면 충분하다고 하는데, 정약용 선생이면 과분할까?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 찢어진다고 하는데, 그렇게 한계를 한 번 넘고 나면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 시작을 이 책으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괜찮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