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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기억조차 하기 싫은 그날을 기억하는 것, 이 소설이 아름다운 이유 <소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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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소년이 온다>


<소년이 온다> 표지 ⓒ창비



5.18은 내게 결코 가깝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이승복 기념관을 해마다 찾았고, 그 '투철한 반공정신' 때문에 희생된 이승복 어린이의 정신을 길이 새기며 치를 떨었다. 5.18은 저 멀리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승복 어린이와 일가족이 처참하게 죽어간 그 모습만 떠오를 뿐 그 이면의 정신과 사상이 떠오르진 않는다는 것이다. 그 폭력과 상처만 깊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게 5.18이 다가올 수 있었다. 


5.18을 온전히 폭력과 상처의 입장으로 보아야


5.18은 상당 기간 논란거리였다. 지금도 그렇다. 수많은 추측이 난무하는 와중에 정치적으로 다양하게 이용해먹었다. 지금도 그렇다. 그렇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곳엔 폭력과 상처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젠 거기에 도달할 때가 되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5.18을 제대로 본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창비)는 그 시작점이자 정점이다. 5.18을 온전히 폭력과 상처의 입장에서 보는 것. 


잘 알려져 있다시피 5.18이 한강 작가에게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광주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사한 후 아버지(한승원 소설가)가 구해온 5.18 사진집을 몰래 펼쳐보고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졌고'(199쪽)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된 비밀스러운 계기가 됐다'고 한다. 그에게 <소년이 온다>는 소설가로서 인간으로서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던 것이다. 5.18을 온전히 폭력과 상처로 보는 시작점이자 정점이 <소년이 온다>라면, 한강 작가 개인에게도 소설가로서 인간으로서 넘어야 할 산의 시작점이자 정점이 <소년이 온다>라고 할 수 있겠다. 


당연하겠지만, 그동안 5.18에 대한 소설은 상당히 많이 나왔다. 임철우의 <직선과 독가스> <봄날>, 홍희담의 <깃발>, 박혜강의 <꽃잎처럼> 등이 있다. 소설은 물론 영화로도 웹툰으로도 나온 바 있다. 장선우 감독의 <꽃잎>,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 그리고 강풀 작가의 <26년>이 그것들이다. 어쩌다 보니 5.18에 대한 거의 모든 콘텐츠를 접했는데, 하나같이 치명적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소년이 온다>는 여기서도 정점을 이룬다. 


작가가 들려주는 6개의 광주 이야기


중학교 3학년생 동호는 가족과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도청에 남으려 한다. 그건 곧 죽음을 의미하지만, 그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친구 정대를 버리고 도망친 자신을 말이다. 정대는 죽었다. 그의 혼은 아직 그의 육신에서 완전히 떠날 수 없다. 결국 자유로워진 그의 혼은, 그렇지만 갈 곳도 없다. 어디든 갈 수 있지만 갈 수 없다. 


은숙은 5.18에서 살아남았다. 처음부터 살아남으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결국 살아남았고 그녀의 영혼은 부서졌다. 그렇게 살아남아 출판사 직원이 되었고,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진수는 도청에 끝까지 남아 항전한 이들을 이끌었다. 결국 붙잡혀서 모진 고문을 받은 후 수감되었다. 풀려나고서도 그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었다. 유리 조각 같이 산산히 부서진 영혼을 되살릴 방도가 없었다. 


작가가 들려주는 6개의 이야기는 서로 얽히고설켜 있다. 모두 5.18 당시의 폭력과 상처로 얼룩진 열흘에 대한 이야기다. 너무 아픈 그 이야기들은, 처음엔 살며시 다가와 조곤조곤 가벼울 수 있는 폭력의 기억을 전하다가 갑자기 그날의 칼날 같은 기억을 전하며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그날의 기억이 영혼을 도려내고 부숴버린다면, 그날이 아닌 그날에서 파생된 폭력의 기억은 가볍기까지 한 것이다. 


아이러니한 건, 그가 들려주는 폭력과 상처의 서사가 왜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냐는 것이다. 단순히 문장이 가진 아름다움이나 인간의 역사가 아이러니하게도 폭력과 아름다움을 추구해왔다는 당위론적인 얘기가 아니다. 분명 이 소설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만약 그 잔혹한 참상만을 드러내는 데 천착했다면 이토록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 참상과 폭력에 더해 기억과 상처를 드러냈다. 우린 그 기억과 상처에서 예상치 못한 충격과 더 심한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원천, '기억의 복원'


그렇다면, 바로 그 예상치 못한 충격과 더 심한 고통에서 일종의 가학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한강 작가가 특기를 살려 그려낸 금식한 충격과 고통에 대응하는 극도의 아름다움을 곳곳에 심어놓은 것일까? 내 생각은 이렇다. 이 소설은 다분히 한강 작가의 시선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강 작가가 그동안 추구했던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그는 그 답으로 폭력과 그로 인한 고통을 짊어지고 사는 게 삶이라고 말해왔다. 거기서 더 나아갈 수 없다고도 말해왔다. 이 소설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면 되는데, 한 단계 더 나아간 듯하다. 태초의 폭력과 고통으로 돌아가서 그 안에 상처받은 존재들을 보듬는, '기억의 복원'까지 진전된 것이다. 바로 그 기억의 복원이 아름다움의 원천이 아닐까. 단지 기억하는 것조차 어려운 그날을, 기어코 기억하려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날 광주에는 울려 퍼졌다. 


"여러분, 지금 나와주십시오.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그리고 기억해 주십시오."


그날은 많은 사람들에게 잊고 싶은 기억일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소설은 그날 희생당한 사람들을,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사람들을 되살린다. 특히 절대적 피해자였지만 살아서도 가해자로 자신을 인지하고 불우하게 살았던 이들의 기억을 복원하는 게 크게 다가온다. 아프고 고통스럽고 또다시 상처받겠지만, 잊지 말고 그날을 억해야 한다. 그날은 당사자들만의 기억도, 광주만의 기억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기억인 것이다. 


언제쯤 우린 매일 같이 소년이 찾아 와도 웃으며 맞이 하고 그 아픈 기억을 보듬을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아니, 그래선 안 될 것이다. 그 아픔은 평생 함께 짊어지고 가야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인지하고 기억해야 한다. 다시는 그와 같은 아픔과 상처를 되물림하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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