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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도서

시대와 소통하는 매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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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잡지, 시대를 철하다작년 10월 중순, 서울시 서초구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리서치를 하거나 책을 보기 위해서 방문한 것은 아니어서, 뜻밖의 행운에 들뜬 기분이었습니다. 마침 '추억의 그 잡지'라는 특별전시회를 하고 있었는데, 말로만 들었던 희귀한 옛 잡지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 잡지라는 <대죠선독립협회회보> 1896년도 창간호, 월간 계몽잡지 <소년>을 비롯해서 <개벽>, <신동아>, <뿌리깊은 나무> 등의 잡지. <보물섬>을 비롯한 만화 잡지. <보그>를 비롯한 여성 잡지까지. 마치 우리나라 100년간의 역사를 한눈에 훑어보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이렇듯 한 시대의 여러 가지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줘 소중한 자료이자 재미있는 볼거리였던 잡지(신문 포함)는 방송, 인터넷이 차례로 힘을 얻으면서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잡지만이 가진 어떤 면으로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관통해 많은 연구적 가치가 있는 유물로 거듭났을 거로 생각합니다. 그 안에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죠.

옛 잡지로 역사를 읽는다?

옛 잡지로 역사를 읽는다 <잡지, 시대를 철하다> ⓒ 돌베개

"있는 놈과 없는 놈은 언제든지 생활상 차별이 심하지만은 특히 여름에는 그 차별이 심하다. 있는 놈은 대궐 같은 커다란 집에 광대한 정원을 가지고도 연못 위의 누각을 지어놓고 낮이면 장기, 바둑으로 소일하고 맥주, 사이다로 목을 축이며 예쁜 첩의 부채 바람과 선풍기 바람에 흑흑 느끼다시피 하고 밤이면 생사 모기장 안에 그물에 걸린 고기 모양으로 멀뚱멀뚱 누워서 빈대가 무엇인지 모기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되 없는 놈은 좁고 냄새나는 방 한 칸이나마 마음대로 얻지 못하고 동서남북으로 떠돌아다니며 더위에 울고 장마에 울며 모기, 빈대, 벼룩에 다 뜯겨서 온몸이 만신창이 된다." 



<잡지, 시대를 철하다>(돌베개) 제1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있는 놈과 없는 놈은 언제든지 생활상 차별이 심하지만은'이라는 대목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당시의 빈부격차와 그에 따른 차별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전문을 옮길 수는 없어 말씀을 드리자면) 없는 놈이라면 노동자를 말하는데, 그 고통이 말할 수 없이 컸다고 합니다. 

역사책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당시의 생생한 모습들이 잡지에 담겨 있습니다. 이는 신문(신문의 특정 파트를 제외하고)이나 책을 통해서도 접하기 어려운 것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일반 백성의 모습을 그렸는가 하면, 지금은 유명한 전설적 인물들이나 사건들이 다뤄지기도 했습니다. 

책 제4장에 나오는 내용을 옮겨보겠습니다. 

"그들에게는 상부의 명령 이외에 행동규범이 없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사물을 인정하거나 판단할 권한이 없는 것이다. 그들 자신의 판단이 아무리 정확하고 틀림없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들은 그 현상을 일절 상부에 전달하고 그 명령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나는 문득 보안분대 사무소 벽 위에 붙어 있던 구호 또 하나가 생각났다. '상부 명령의 충분한 이해가 상부 명령의 정확한 수행을 보장한다.' 요컨대 북조선은 현재 상부 명령이라는 원동기와 연락이라는 'V벨트'로 움직여 가는 한 거대한 기계, 인류 사회가 일찍이 가져보지 못한 사회 기계가 되어 있고 이 중에서 개인이라는 것은 그 각부를 형성한 부분품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 북조선(북한)을 방문하고 보고 느낀 점을 담았습니다. 해방 직후라 방문이 어느 정도 요원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들까지 잡지에 담겨 있다니 신기하면서도, '잡지'하면 떠오르는 저(低)급의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있는 듯합니다. 시대를 말하고, 살아있는 역사를 전하는 옛 잡지를 보고 있나니 지금 시대에 잡지를 비롯한 매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 시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매체가 있을까?

저자는 말합니다. 이 책은 방대한 기록 일부에 불과하지만, 당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생생히 느끼게 해줄 것이라고. 오늘의 사회를 해석하는 기초를 제공할 것이라고.

지금 매체들은 어떨까 반문하게 됩니다. 새로운 소식을 전하고, 그 시대와 소통하고, 같이 울고 웃고,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를 잇는 역할을 하는 걸까요? 어느 특정 프레임에 갇혀 다른 매체를 비방하고 특정 단체나 인물을 매도하는 행동이 과해진 것 같지는 않은지요. 독자에게 판단을 맡기는 게 아닌, 강요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며, 저자의 말로 말미암아 깊고 깊은 시련 속에서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견뎌냈고, 어떤 선택을 했는지 짐작할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또한 역사 교과서, 또는 대중 역사서를 통해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을 배웠던 독자들에게는 우리 역사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반면 이런 모습을 생생히 전했던 옛 잡지들을 보며, 지금의 매체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생생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생하다는 것에는 단순히 살아있는 기사, 즉 톡톡 튀는 모습 또는 속보라는 뜻만 있는 게 아닐 것입니다. 

독자가 보지 못하고 지나치고야 마는 그곳, 세상에 알려져야 하지만 어떠한 힘으로 그렇게 되지 못하는 사건, 후세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이 시대의 진짜 모습 등. 이런 것들이 모일 때라야만 그들에게 이 시대의 서술을 맡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오마이뉴스" 2012.11.6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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