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래된 리뷰

메마른 대지 위에 핀 꽃의 맵시 있는 변신

반응형

[리뷰] <슬럼독 밀리어네어>

자말 말릭은 퀴즈쇼에서 상금 6억 원이 걸려있는 최종 단계에 왔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A: 속임수로 / B: 운이 좋아서 / C: 천재라서 / D: It is written

과연 정답은 무엇일까? 영화가 시작하며 나오는 이 물음에서 'D: It is written'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 문구는 영화가 끝나면서도 나온다. 동일한 문구이지만 시작과 끝의 의미는 다르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으니까. '운명이다' 또는 '소설이다'라고 완전히 다르게 해석이 가능하고, 그에 따라 영화의 분위기 또한 달라진다. 이를 감안하시길. 


ⓒ cj 엔터테인먼트(주)

2009년 영화계를 독식하시피한 이 영화. 평단에서 좋은 점수를 받고 200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8개 부문 수상과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4개 부문을 수상하며 두각을 드러내더니 결국은 흥행까지. 당시 모든 부분에서 다른 영화들을 압도했다. 5년 만에 다시 봤다. <슬럼독 밀리어네어> 빈민가 백만장자라는 뜻인데 제목만 봐서는 빈민가 출신의 주인공이 백만장자가 된다는 이야기. 

최근에 나온 영화 <파이 이야기>를 보다가 문득 생각나서 다시 보게 된 영화인데, 이유를 생각해보니 무명에 가까운 주연 배우와 유명한 감독 그리고 베스트셀러 원작이었다. 영화는 (주연) 배우가 누구냐에 따라 작품이 크게 좌우되지만, 그렇지 않은 영화도 있다는 걸 보여준 두 영화였다. 명품 배우가 아닌 명품 감독과 탄탄한 스토리만 갖춰지면 명작이 탄생하는 게 당연지사 아니겠는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감독 얘기를 해야겠다. 대니 보일 감독. 굉장히 스타일리쉬한 영화들을 연출했다. 일례로 <트레인스포팅>이 있다. 이 영화는 20년 가까이 된 영화지만, 지금 봐도 신선하다. 이 영화로 말할 것 같으면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다른 버전이라 할 수 있겠다.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 <비치>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을 맞아 큰 화제를 낳았지만 많이 아쉬웠던 영화였다. 좀비 영화의 신세계, <28일 후> <28주 후>도 있다. 분노 바이러스에 걸린 좀비를 내세워, 분노한 세상을 꼬집었다. 감독의 연혁 얘기는 여기까지.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면,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크게 세 가지 파트로 진행된다. 누군가에게 한 청년이 고문을 받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되는 영화는 그 청년이 '백만장자 퀴즈쇼'라는 프로그램에 출현하는 장면으로 옮겨간다. 고문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청년이 그 프로그램을 하면서 사기를 쳤다는 것이다(고문을 하던 사람들이 경찰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퀴즈쇼 도중 주인공인 청년의 어렸을 때의 장면들이 나온다. 

기막힌 연출과 몰입

이렇게 세 파트가 유기적으로 작용하면서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경찰에게 퀴즈쇼에서 속임수를 쓰지 않고 어떻게 정답을 맞추게 됐는지 진술을 하고 그 진술은 바로 어린 시절로 이어진다. 이 영화의 핵심은 아마도 그 어린 시절의 이야기에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 cj 엔터테인먼트(주)


주인공의 이름은 자말 말릭. 그는 형인 살림과 엄마와 함께 빈민가에서 살았다. 어느 날 라마신교들의 침입으로 이슬람 교도였던 빈민가 주민들은 많은 수가 죽임을 당하고 그중에는 그들의 엄마도 있었다. 결국 알 수 없는 곳으로 도망을 가게 되면서 그들의 기나긴 여정은 시작된다. 그 사이에 알게 된 이는 바로 라티카. 

어떤 영화든지 그 안에 너무 많은 주제를 내포해서 모든 걸 보여주려 하다보면 어느 것 하나 보여주지 못하고 끝날 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 이 영화는 꽤나 많은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제들을 깔끔한 스토리 안에서 하나하나 잘 풀어내고 있다. 쉽지 않은 작업을 훌륭히 해냈기에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빈민가에서 자란 그들은 긴 여정의 초반에서 착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구걸을 하며 지내게 된다. 하지만 그 착한 남자의 사기 행각을 알아챈 주인공 형제. 탈출에 성공하지만 라티카를 놓고 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여정은 다시 시작된다. 라티카를 찾기 위한 여정.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

여기서 한 가지 주제를 끄집어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 착한 남자는 아이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해서 잘 부르면 돈을 잘 벌게 해준다고 거짓말을 한 후 눈을 멀게 해서 수준 높은 앵벌이 노릇을 하게 만든다. 너무 비약적일지는 모르지만 그 남자는 인도라는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 cj 엔터테인먼트(주)


현재의 인도의 경제는 중국과 같이 지칠 줄 모르고 급성장하고 있다(몰론 세계 경제 한파로 어려운 건 사실). 하지만 그 안을 잘 들여다보면 수많은 빈민가 계층이 존재하고 있다. 아마도 그들은 인도에만 존재한다는 그 천민일 것이다. 형제를 속이려 한 그 남자도 겉으로는 경제력 있고 마음씨 좋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검게 썩어있다. 

영화의 종반부에서는 주인공들은 청년이 되고 빈민가들은 모두 빌딩으로 대체된다. 인도의 중심이 된 것이다. 인도의 중심이 예전엔 빈민가였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인가. 이건 비단 인도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 주제가 이 영화의 제1주제가 아닐까.

또 하나의 주제는 돈 그리고 의리일 것이다. 주인공 형제 중 형인 살림. 그는 어릴 때부터 돈이라면 무슨 짓이든 했다. 그런 그도 동생에 대한 의리는 있었다. 그 남자에 의해서 눈을 잃을 위기에 처한 동생을 데리고 탈출했던 형. 나중에 라티카를 찾으러 다시 찾은 빈민가에서 그런 의리 있던 형은 그 남자를 죽이고 동생인 자말을 내쫓은 뒤에 빈민가의 실력자인 자비드의 밑으로 들어간다. 자말이 그토록 찾았던 라티카와 함께 말이다. 

하지만 결국 형인 살림은 동생과의 의리를 지켜서 라티카를 놓아주고 자신은 자비드를 죽인 뒤 살해된다. 그는 죽음을 각오한 뒤 욕조에 돈다발을 풀어놓고 그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태생부터 돈에 대해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그. 그의 둘도 없는 동생이자 평생의 동반자인 자말에 대한 의리. 돈과 의리. 공존할 수 없는 이 둘. 그는 의리를 선택했고 돈다발 속에서 죽어갔다. 

이 영화가 말하려 하는 건 따로 있을지 모른다. 진부해보일지 모르지만 그건 바로  '운명적 사랑'이다. 주인공인 자말은 시종일관 불안하고 초조한 표정, 불만족스러운 표정, 허무한 표정 등 부정적인 표정으로 일관한다. 아직 라티카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는 어렸을 적에 그 남자에게서 리티카를 탈출시키지 못했다. 그 이후 그의 삶의 목적은 리티카인 것이다. 몇 번이고 리티카를 찾아내지만 그의 형에 의해 재지를 당한다. 그럼에도 결국은 그들의 사랑은 이뤄진다. 

자말의 백만장자 퀴즈쇼 출현도 라티카에게로 가기위한 여정의 한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자말이 라티카를 알고 난 이후부터의 모든 여정은 그가 그녀를 찾아가는 이야기인 것이다. 결국은 재회한 자말과 라티카. 이 여정과 마지막 장면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 cj 엔터테인먼트(주)


이 영화는 화려한 볼거리도, 숨 막히는 두뇌싸움도, 액션도 없다. 반면에 여러 가지 진지한 주제와 탄탄한 스토리 그리고 멜로·범죄·드라마·로맨스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 이 영화만의 매력이 있다. 필자의 스타일과는 거리가 조금 있는 영화였지만 시대의 영화 흐름에 맞는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평을 내리고 싶다. 영화 안에서 다양한 시도를 한 것 같은데 조악하지 않게 제자리를 잘 잡은 것 같다. 스타 배우 하나 없이 비록 할리우드 영화이지만 생소한 인도 배경으로 이런 영화를 만들다니 자주 보이는 것만이 세상의 모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들게 해줬다. 

개인적으로는 사랑에 대해 누구나 꿈꿔본 운명적 사랑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켜줬고, 크게 봐서 인도만의 문제일 수 없는 경제의 급성장 뒤에 숨겨진 진실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줬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이 영화. 지금 봐도 전혀 거리감이 없다.



"오마이뉴스" 2013.2.13일자 기사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