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포스터 ⓒ스폰지 ENT
일본 영화는 잔잔한 드라마가 강한 것 같다. 그럼에도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죽지 않는다. 갈등이 심화되지 않는 잔잔한 드라마에서 어떻게 등장인물들이 묻히지 않을 수 있을까? 스토리에 과한 조미료를 치지 않고, 영상에 힘을 실으며, 절제된 각본을 통해 여운을 짙게 남기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일본의 모든 드라마 장르 영화가 그렇지는 않다. 그 중에는 작정하고 관객들을 울리는 일명 '최루성 영화' 들도 존재한다. 우리나라는 이런 영화가 점점 더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웃음보다 더한 힐링이 바로 울음이라는 걸 아는 제작자는 최루성 영화가 관객을 끌어들일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런 최루성 영화도 킬링타임용이라고 생각하는데, 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울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잔잔함과 여운으로 승부를 보다
반면 시종일관 지루함을 동반한 잔잔함으로 관객들에게 엄청난 어필을 하지 못하는 영화들은 길고 짙게 남는 여운으로 승부를 본다. 이런 영화들은 거의 필히 2~3번 이상 보게 되는데, 처음 봤을 때는 빨려 들어갈 듯 보지 못했기에 다시 보면 전에는 보이지 않던 장면들과 대사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2003년 작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바로 이런 영화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굉장히 그리고 지극히 잔잔하게 시작하고 그렇게 흘러간다. 심지어 여자의 벗은 모습조차 잔잔하게 보여질 만큼. 밤에는 마작게임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 츠네오는 우연히 조제와 마주친다. 조제는 두 다리를 못쓰는 장애인이고 할머니와 같이 산다. 할머니는 조제가 산책을 나가고 싶어하면 유모차에 실어 다닐 만큼 남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며, 조제는 그런 할머니의 영향 탓인지 낯선 사람을 극도로 불신한다. 낯선 사람이 보이면 다짜고짜 칼을 휘두를 만큼. 사람들은 그들에게 해를 끼치기도 한다.
조제를 도와준 츠네오는 그녀의 집으로 초대를 받게 되어 아주 맛있는 식사를 한다. 집에서 나가지 못하는 대신 남들이 버린 책들을 엄청 주워와 읽은 덕분에 박학다식을 자랑한다. 츠네오는 조제의 그런 모습을 가슴에 담아 두고 종종 찾아간다. 츠네오는 그 와중에도 여자친구와 좋은 시간을 가지곤 한다. 하지만 한 번 두 번 찾아가고, 조제가 읽고 싶어하는 책도 구해주고, 복지과에 말해 조제의 집도 고쳐주고, 유모차와 보드를 합쳐 세상 구경도 시켜준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의 한 장면 ⓒ스폰지 ENT
여기까지는 츠네오가 장애인인 조제를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건 조제 또한 마찬가지인데,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츠네오를 그저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건 장애인과 일반인이 아닌 일반인과 일반인 사이에서도 자주 보이는 관계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의 관계가 사랑이라는 걸 확인 시켜 주는 사건(?)이 생긴다. 복지과에 말해 조제의 집을 고쳐준 뒤, 복지과에서 후속 조치를 취해줄 때였다. 때마침 츠네오의 여자친구가 찾아온 것이다. 그녀의 전공이 복지였기 때문인데, 이 어색한 기류에서 그녀가 츠네오의 여자친구라는 걸 알아챈 조제는 실망감을 감추지 않는다. 그리고 며칠 후 찾아온 츠네오를 단호히 거절한다.
하지만 츠네오는 조제가 계속 생각난다. 여자친구와 같이 있어도 생각난다. 조제를 생각나게 하는 결정적인 무엇도 있었다. 그러다가 일전에 복지과 과장과 친해져 면접까지 보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조제의 소식을 듣게 된다. 조제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과 조제가 혼자 살기 힘들게 되었다는 것. 츠네오는 그 자리를 박차고 조제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렇게 그들은 1년을 지낸다.
복선과 상징으로 가득 차다
이 영화는 복선으로 가득 차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츠네오는 영화에서 총 3명의 여자와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즉 그가 언제든지 조제를 떠날 수 있다는 걸 암시한다. 조제는 프랑소와즈 사강의 소설『한 달 후 일 년 후』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거기에 어떤 구절을 읊는다. "언젠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 거야. 베르나르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 우린 또다시 고독해지고, 모든 게 다 그래. 그냥 흘러간 일 년의 세월이 있을 뿐이지." 일 년을 함께 보내고 바뀐 모습을 암시한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의 한 장면 ⓒ스폰지 ENT
또한 이 영화는 극명한 상징을 띄고 있기도 하다. 제목에서 볼 수 있는 호랑이와 물고기들이 그것인데, 둘 다 조제의 대사로 유추해볼 수 있다. 먼저 조제는 츠네오와 함께 호랑이를 보며 말한다.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남자가 안 생기면 호랑이는 평생 못 봐도 상관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게 되네."
그녀는 본래 세상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을 무서워 했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는 울타리이자 보호막인 할머니. 하지만 할머니는 조제를 인간이 아닌 장애인으로 대했다. 조제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 수도, 사랑을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할머니가 돌아가시니 조제는 혼자 살아가기가 벅찼다. 그 앞에 나타난 츠네오. 츠네오 덕분에 조제는 인간으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츠네오와 함께 제일 무서워 했던 호랑이, 즉 세상과 조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제목에서 보이는 물고기들은 조제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츠네오와의 여행에서 뭔가를 느낀 조제. 그녀는 여관에서 사랑을 나눈 후 츠네오에게 말하는 듯 혼잣말인 듯 말을 한다.
"깊고 깊은 바닷속, 나는 거기서 헤엄쳐 나왔어... 나는 두 번 다시 거기로 돌아가진 못할 거야.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 다니겠지.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진 않아."
이 또한 츠네오와의 사랑을 통해 얻게 된 인간으로서의 당당한 삶을 의미한다. 장애인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천대 받을 걸 두려워해 집안 구석에서만 지내온 조제는 츠네오를 만나 사랑을 하면서 세상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던 걸까. 언젠가 츠네오가 떠나갈 거라는 걸. 그렇지만 그녀는 이미 변화했다. 온전한 인간으로.
인간, 사랑, 변화에 대한 충분한 공감
얼핏 보면 장애인과 일반인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다루고 있다고 보이는 이 영화는, 곱씹어 보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2~3번 다시 보면 더더욱 잘 보일 것이다. 지극히 일반적인 사랑 이야기이다.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혼자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사랑하는 누군가와 같이 라면 못할 게 없어지는 경험. 그러며 조금씩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 이건 어느 한 사람만의 경험이 아닌 쌍방의 경험. 단지 이 영화에서는 조제의 변화가 눈에 띄는 것 뿐이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의 한 장면 ⓒ스폰지 ENT
물론 이 영화를 '장애인의 떳떳한 인간으로서 성장하기'와 같이 보아도 무방하다. 그 단적인 예로서의 장면이 츠네오의 전 여자친구와 조제의 만남인데, 그녀들은 서로 동등하게 뺨을 때린다. 별 것 아닌 장면으로 자신의 남자친구를 뺏어간 여자에게 복수 아닌 복수를 해주고자 하는 걸로 단순하게 비춰질 수 있지만, 조제의 당당한 모습은 전과 확연히 다르다. 장애인으로서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래도록 사랑 받는 영화의 조건을 두루 갖춘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인간에 대해, 사랑에 대해, 변화에 대해 성찰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한 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 특유의 잔잔한 드라마, 그 진면목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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