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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다

언제나 위태로웠던 한글, 진실을 간략히 짚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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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9일 한글날이 2013년에 공휴일로 재지정되었습니다. 23년 만인데요. 1991년 당시, 공휴일이 너무 많아 경제발전에 저해가 된다는 이유로 국군의 날과 함께 법정 공유일에서 제외되었었습니다. 한글날은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과 함께 우리나라 5대 국경일이죠. 1926년 음력 9월 29일 조선어연구회(현 한글학회)가 지정한 '갸갸날'이 그 시초이며, 1928년 '한글날'로 개칭되었습니다. 광복 후에는 10월 9일로 확정되었고, 2006년부터 국경일로 지정되었다고 하네요.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 한자만이 유일한 표현 수단으로 우리 의식을 지배해왔다. 그러나 한자는 우리의 생각을 우리식대로 표현해 낼 수 있는 문자가 아니었다. 더구나 이때 글을 안다는 것은 '기득권'의 상징이었다. 아무나 글을 알아서도, 써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백성의 문맹은 더욱 극심해져 갔다. 그것이 세종이 맞닥뜨린 현실이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백성과 어떻게 교감할 것인가?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한글'이었다.

 

세종, 근본적인 문제를 풀려하다

 

<훈민정음> ⓒ 한글박물관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字)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 


'훈민정음' 서문이다. 백성들에게 전할 수 없고, 백성들의 말을 들을 수 없는 왕의 고뇌가 읽힌다.

 

세종은 그 누구보다도 글자가 가지는 힘을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이 대부분의 지식을 문자로 통해 얻지 않았는가. 백성들과의 벽을 허물고 다가가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고, 공유하고 싶어 했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 <세종실록> 25년 12월 30일

 

이 간단하고 무궁한 글자는 세종 28년(1446) 9월에 가서야 비로소 공표된다.

 

비밀 프로젝트 '훈민정음'

 

중국의 한자와는 다른 우리만의 언어. 백성과 교감할 수 있는 즉, 누구나 알 수 있고 쓸 수 있는 언어.

 

하지만 기득권의 극심한 저항에 부딪힌다. 이와 관련해 1444년(세종 26)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상소문을 올린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다. 문자를 권력 쟁취 및 유지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던 시대에 기득권층의 이러한 반대는 세종에게 적지 않은 위협요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훈민정음은 1443년(세종 25) 12월에 완성되었음에도, 세종28년까지 공표되지 못했다.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 가운데 일부(신숙주, 박팽년, 성삼문 등)를 언문청(諺文廳)에 모아 같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언문청이란 무엇인가.

 

<용재총화(慵齋叢話)>,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보면 '세종께서 언문청을 설치하여 신숙주·성삼문 등에게 명하여 한글을 짓게 하니'라는 문구가 나온다.

 

세종실록 28년 11월 8일자를 살펴보자.

 

'드디어 언문청을 설치하여 사적을 상고해서 용비시를 첨입하게 하니, 춘추관에 아뢰기를'

 

'훈민정음'의 공표 2개월 후에 비로소 언문청이 설치되었다는 실록의 내용은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훈민정음'은 비밀스럽게 진행된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세종이 주축이 된 '훈민정음'이지만 혼자서는 불가능하기에 집현전이 만들어진 1420년(세종 2)이후 오랜 세월에 걸쳐 학자들은 비밀리에 활동을 해왔을 것이다. 겉으로 들어난 성삼문·신숙주 외에 정인지·최항 등은 핵심 멤버였다.

 

그러하기에 세종실록에는 '훈민정음'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기득권층의 저항과 명나라의 압력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가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쉽지 않은 한글의 생존

 

오랜 시간을 넘어와 우리는 이제 누구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한글이 헤쳐 나가야 하는 현실은 결코 녹녹치 않다. 외국어·외래어 및 잡어들에 둘러 싸여 있는 것이다. 한글은 위태롭다.

 

우리는 왜 '한글'을 지켜야만 하는 것일까? 만일 우리가 한글을 잃어버린다면 그동안 쌓아왔던 문화적 기반을 상실함과 동시에 쇠퇴일로에 들어서 옛 만주족이나 인디언들처럼 사라지게 될지 모른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며 우리에게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지킬 의무를 부여한 것이다.

 

훈민정음은 조선왕조실록과 같이 1997년 9월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기록유산에 지정되었고, 2007년에는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 제43차 총회에서는 183개국 만장일치로 한국어를 국제특허협력조약 국제 공개어로 채택된바 있다.

 

또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정신을 알리고, 문맹 퇴치에 기여한 개인 및 단체를 장려하기 위해 19

89년 '유네스코 세종대왕상(UNESCO King Sejong Literacy Prize)'을 제정해 1990년부터 개발도상국의 모국어 발전과 보급에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를 선정, '세계 문해의 날'에 시상 해오고 있다.

 

'한글'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평등한 원칙 하에 만들어진 문자이다. 우리의 얼과 문화 그리고 민족 정체성 등 모든 것을 아무르는 '근원적인 문화 유전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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