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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야간비행> 풍성하게 잘 자란 나무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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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야간비행>



영화 <야간비행> 포스터 ⓒ엣나인필름



외롭고, 힘들고, 억울하고... 이런 감정들은 인간이 평생 안고 가야 할 짐이다. 누구도 대신해줄 수는 없다. 다만 이해해주고 보듬어줄 수 있는 이와 함께 헤쳐나가는 것 뿐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을 찾기가 힘든 경우가 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찾기 힘든 경우가 아닌, 어쩔 수 없는 경우 말이다. 이런 경우는 자신의 외로움과 힘듦과 억울함의 이유를 누구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을 때이다. 


내가 힘들다고 말할 때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 또한 엄청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내가 힘든데  누구에게도 힘들다고 말할 수조차 없을 때는 살아가기조차 힘들다. 운전을 잘 못하는 이가 낮에 운전을 하면서 힘드니까 도와 달라고 말하는 것과, 운전을 잘 못하는 이가 밤에 운전을 하면서 누구도에게도 힘들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 같을 수 있겠는가. 


절친했던 세 친구, 지금은?


영화 <야간비행>은 이런 상황을 다룬다.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이 여느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외로움과 힘듦에 찌들어 서서히 죽어가는 고등학생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주위를 둘러싼 사회의 파렴치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파헤쳤다. 


영화는 세 명의 친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용주(곽시양 분)는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하는 1등급 모범생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남에게 알릴 수 없는, 알리기 힘든 비밀들이 있다. 미혼모인 엄마 밑에서 자랐고, 그는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여느 사람들과는 성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영화 <야간비행>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그런 용주에게는 중학교 때부터 절친이었던 두 명의 친구가 있다. 그 중에 기웅(이재준 분)은 고등학생이 된 지금 학내 폭력서클에서 우두머리를 점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들이 주로 괴롭히는 이가 중학교 때부터 절친이었던 또 한 명의 친구인 기택(최준하 분)이다. 용주가 마음에 두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바로 기웅이다. 


너무나 아름답게 표현한 이들의 사랑


이런 상황은 학창 생활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중학교 때 친하게 놀던, 강하거나 잘 놀기는커녕 약한 축에 있던 친구가 고등학생이 되더니 폭력서클에 가담해 중학교 때의 절친을 오히려 더욱 괴롭히는 상황. 암울했던 과거를 알고 있는 친구를 더욱 괴롭힘으로서 과거를 지우려고 하는 행동의 발로가 아닐까. 


극 중에서도 중학교 시절 기웅이 몇몇에 의해 집단으로 폭행을 당하고 울면서 가는 장면을 그의 절친 두 명이 보고 나서 이들의 사이가 벌어진 것으로 나온다. 이후 기택은 이유 없는 시달림을 받는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어떤 파국의 느낌이 영화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다. 흔히 있는 학교 폭력과 흔히 있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동성애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을 뿐이다. 



영화 <야간비행>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영화는 동성 간의 사랑을 아름다운 풍경과 색채를 이용해 너무나 아름답게 표현한다. 용주를 좋아하는 또 다른 친구인 준우. 그들이 함께 있는 곳은 주로 아무도 살지 않는 건물의 옥상인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보여지는 삭막한 서울의 야경과는 차원을 달리 하는 것이다. 


또한 용주가 기웅과 마음을 확인한 뒤 같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갈대습지공원의 모습은 가벼운 탄성을 부른다. 굳이 이렇게까지 아름답게 표현해야 하는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라고 할까. 이 영화를 보고 조금은 달라진 생각 또는 시각에 이 모습들이 한 몫 했다. 


풍성하게 잘 자란 나무를 보는 듯한 느낌


한편 기웅도 용주처럼 편모 슬하에서 자란 듯 보인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현재 수배 중. 회사 노조에 가담했다가 주동자로 과격한 행동을 해 경찰에 쫓기고 있는 신세이다. 용주처럼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 외에 가족 간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진이라는 친구가 나오는데 반장으로 용주에 이어 2등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이 친구는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져 기웅의 밑에서 폭력서클의 행동대장이자 2인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그에게는 공부도 싸움도 최고의 자리에 설 수 없다는 열등감 아닌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학교의 선생님들이란 작자는 학생들에게 어떤 말을 지껄이고 어떤 행동을 자행하는가? 학생이면 공부만 잘 하면 되고, 1~3등급 아래면 인간 취급을 해주지 않으며, 동성애자를 더럽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며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던 간에 무조건 좋은 대학만 가라고 한다. 



영화 <야간비행>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이 영화가 단순한 학원물 또는 퀴어 영화 그 이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사회 고발 영화가 아닌) 사회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현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겪어 봤을, 겪고 있는, 겪을 만한 일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풍성하게 잘 자란 나무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영화의 하이라이트. 기택은 우연히 용주와 기웅의 관계를 눈치챈다. 배신감을 느낀 기택은 이 사실과 함께 기웅의 가족 뒷얘기를 성진에게 고자질한다. 용주와 기웅 모두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던 성진은 이들을 한꺼번에 밟을 절호의 찬스를 얻은 것이다. 영화는 이때부터 가파르게 빨라지며 파국으로 흘러가는 듯 보인다. 과연 어떤 결말을 맺게 될까?


영화를 보고 나면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 감독이 의도했던 그렇지 않았던 몇몇 장면들은 그들의 외로움, 힘듦, 억울함을 절절하게 보여주는 것에 성공했다. 내가 그들의 상황이었다면 그야말로 세상에 혼자만 있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인식 변화의 첫걸음을 '이해'라고 했을 때, 이 영화는 그 '이해'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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