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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빠름의 시대에 느리게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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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 ⓒ공명

이 시대 모든 이들이 '빠름'을 외친다. LTE(Long Term Evolution)는 빠름의 상징이 되어 모든 이들을 빠름의 세계로 인도한다. 장기적 발전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보니, 어디까지 빨라질지 기대가 되면서도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과연 나는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있을까? 뒤처지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빌 게이츠가 15년 전에 예견했듯이 속도가 비즈니스를 결정하고 세계를 변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빠름의 세계에 진입했다. 빠름의 세계에서 느림은 부끄러운 것이고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 받는다. 머지않아 패배, 죽음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반면 빠름은 최고의 가치이자 시대가 요구하는 미덕으로 자리 잡았다. 빠름과 느림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치 기준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 사실 이미 그리 된 지도 모른다. 


이 와중에 느림의 의미를 되새기고 느림을 설파하고 느림이야말로 이 시대가 나아가야 할 가치이자 방향이라고 말한다면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야말로 빠름의 시대의 '패배자'가 공허하게 외치는 분노의 울부짖음으로밖에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느끼게 된다. 삶은 사라지고 행복은 짧아지며 영혼의 자유가 없다는 것을.


'지친 영혼을 위한 여유로운 삶'이라는 부제를 달고 15여 년 만에 재출간 된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공명)는 바로 이 빠름의 시대에 느림의 의미를 내세우고 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느림은 과연 무엇일까? 


말 그대로 빠름의 반대되는 의미로의 느림? 느리게 생각하고 느리게 판단하고 느리게 행동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것일까? 하지만 이 빠름의 세계에서 그렇게 했다가는 설령 느림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가치라고 할지라도, 그것의 의미를 되새기고 설파하기도 전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나쳐버린다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이다. 


필자는 15여 년 전에 출간되었던 이 책을 10대 후반 때 이미 접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있는 자의 여유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결국 읽다가 포기했고 책은 어딘가로 팔려갔다. 당시 나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 없는 책이었다. 그 진정한 의미를 알기도 전에 역효과만 내고 사라진 것이다. 


시간이 흘러 빠름의 세계에 뛰어들어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는 지금, 이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머리가 커지고 아는 것이 많아졌기 때문에 어릴 때의 나를 질책하며 보게 된 것이 아니다. 정말 필요했기 때문이다. 느림이 무엇인지, 느림이 왜 필요한지, 그리고 스스로가 느림이 필요했기에. 


"느림이란 더 빠른 박자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느림은 시간을 성급히 다루지 않겠다는 의지, 시간에 쫓겨 허둥대며 살지 않겠다는 의지, 세상을 넉넉히 받아들이며 인생길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 능력을 키워가겠다는 의지의 확인이다." (본문 중에서)


책은 재출간 되면서 기출간본과는 다르게 16개의 파트로 나뉘어졌다. 그 중에서도 독자들이 책을 읽고 직접적으로 와닿으면서 느림의 자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들이 9개 있다. 간략히 나열해 보자면, 한가로이 걷기, 듣기, 권태, 꿈꾸기, 기다리기, 내면의 고향, 글쓰기, 포도주, 모데라토 칸타빌레이다. 


이중에서 '권태'는 의외였다. 게으름, 나태함, 싫증을 상징하는 권태가 느림의 자세라니? 이는 사람들이 흔히 느낄 '느림'의 의미에 게으름, 나태함, 싫증, 안일함 등이 있을 수 있는데, 저자가 그것을 정면돌파 하려는 의지의 표명으로 해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른 느림의 자세는 제목만 보아도 대략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권태는 해석이 필요할 듯하다. 느림의 자세를 대표하여 권태를 풀어본다. 


저자는 권태도 권태 나름이라고 말하며 피해야 할 권태를 먼저 말한다. 그것은 고상한 권태로, 무한성에 심취되어 자신을 둘러싼 일상의 삶이 저급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권태이다. 반면, 그가 제안하는 권태는 한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정말로 급하지 않은 일은 모두 뒤로 미룬 채 행복감에 젖어 즐겁게 하품할 수 있는 권태이다. 


그러며 저자는 온천이 있는 도시를 권한다. 그런 도시에서 온천요법을 시도해보라는 것이다. 숙소의 경우 널찍한 특급 호텔, 붐비는 민박집 중에서 저자는 널찍한 특급 호텔에서 오히려 더욱 중압감에 짓눌릴 것 같다고 말한다. 더불어 부드럽고 감미로운 음악을 듣고 게임도 하며 여유롭고 즐거운 마음으로 현재를 즐기는 것이다. 


그에게 권태는 세상을 정직하게 활용하는 수단이자, 세상에 한 발 더 다가가거나 반대로 세상에서 한 걸음 더 벗어나서 좀 더 마음껏 즐기기 위해 음미하는 수단이다. 이를 느림에 대비 시켜도 전혀 이상하거나 불편하지 않다. 권태, 나아가 느림은 결코 빠름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빠름에 굴복해 빠름의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여기저기서 행복을 찾은 외침과 움직임들이 눈에 띈다. 하지만 방법을 찾기가 무척 힘든 듯하다. 어떻게 이토록 빠른 세상에서 그에 맞는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행복에 빠름을 얹혀 보라. 행복 또한 LTE급 속도로 우리를 스쳐 지나 갈 것이 아닌가. 물론 불행도 그만큼 빠르게 스쳐 지나 간다. 문제는 그로 인해 우리 삶은 빠른 속도로 흩어지고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로 빨리. 


어떤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살아가야 할까. 정작 빠름의 세계를 예언하고 세계를 빠름에 종속되게 만든 장본인들은, 정작 느림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느림의 삶을 살기 위해 우선 빠르게 살아왔을 테다. 그렇다면 애초에 느리게 사는 것은 불가능한 걸까? 느림이 틀린 것이 되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느림을 본래의 다른 것으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한 걸까? 이 책은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불가능을 논하기 전에 어서 '빨리' '느림의 삶'을 시작해야 한다고. 


"느림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선택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자면, 정해진 시간을 앞당기지 말고 시간에 쫓겨 허둥대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사방에서 뭔가 재촉을 받고, 또 그런 압력에 자진해서 따르는 사회에서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 하루 빨리 시작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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