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박맹호' 이름 석 자가 주는 힘... <박맹호 자서전 책>

띠끌 자옥한 이땅 위의 일을 한바탕 긴 봄꿈이라 이를 수 있다면, 그 한바탕 꿈을 꾸미고 보태 이야기함 또한 부질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같은 냇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 없고, 때의 흐름은 다만 나아갈 뿐 되돌아오지 않는 것을, 새삼 지나간 날 스러진 삶을 돌이켜 길게 적어나감도, 마찬가지로 헛되이 값진 종이를 버려 남의 눈만 어지럽히는 일이 되리라. (경향신문 1983.10.24)


ⓒ 민음사

이문열 작가의 1988년 작 <평역 삼국지>(민음사)의 출간 전 <경향신문> 연재 당시, 1회 첫 소절이다. "지금까지 모두 합쳐서 1800만 부가량 필린 슈퍼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은"(185쪽) 이 작품은 많은 사람들한테 읽힌 만큼, 많은 사연들이 있을 것이다. 필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저자 이문열과 이번에 소개할 책 <박맹호 자서전 책>(민음사)의 저자 박맹호 회장 사이의 사연을 소개하기에 앞서 간단히 소개해 본다. 

이야기 하나, 15년여 전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다. 위인전을 다 띠고, 본격적인 문학소년으로의 길을 걷기 위해 알맞은 책을 알아보던 중이었다. 내 눈에 들어왔던 책은 다름아닌 출간된지 10년 남짓 지난 초대형 베스트 셀러이자, 전 국민 필독서격이었던 이문열 작가의 <평역 삼국지>. 당시 많지 않은 나이로 10권 분량의 소설은 무리였을지 모르지만, 무작정 부모님을 졸라 처음으로 책을 '구입'했었다. 그렇게 그 작품은 당시 겨울 방학 내내 나의 머릿속을 헤집어 놨고, 중국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후에 나는 중국학과를 졸업했다.) 


<박맹호 자서전 책> 5장을 보면 1983년 당시 등단 3년 남짓한 신인이었던 이문열과 민음사 박맹호 사장의 흥미로운 만남이 나온다. 어릴 때부터 박맹호 회장은 <삼국지>를 특별히 생각해 왔는데, 마침 <경향신문>과 뜻이 맞아 연재할 기회가 생기게 된 것이다. 

박맹호 회장은 이문열에게 제안했고, 처음엔 뜨악한 반응을 보였던 이문열은 "이 작업은 노후의 양식이 될 테니, 반드시 한번 해 보시오"(183쪽)라는 권유와 파격적인 대우로 마침내 성사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평역 삼국지>는 "한국 출판 역사상 가장 만이 팔린 책 중 하나가 되었다."(184쪽)

박맹호 회장이 누구이기에 작가 이문열을 키웠다시피 한 것일까? 출판 특성상 책 이름은 알아도 출판사의 이름은 생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출판사의 스태프라고 알 턱이 있을까. 그럼에도 출판계에서 '박맹호'라는 이름 석 자가 주는 힘은 가히 대단하다. 

출판인이자 지식인 박맹호는 1933년 충청북도 보은에서 출생했다. 정확히는 "비룡소를 300년 넘도록 지켜 온 초가"(5쪽)에서. 비룡소란 이무기가 날아오른 못이라는 뜻인데, "나중에 민음사 출판 그룹의 아동 출판사를 만들 때 그 이름을 비룡소로 정했다"(7쪽)고 한다. 이후 경복중학교, 청주고등학교를 거쳐 195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박맹호는, 출판수업을 거쳐 "1966년 5월 19일, '민음사'라는 이름의 출판사"(60쪽)를 설립했다. 1달이 채 안되어 "외국책을 일본어로 번역한 <요가>라는 책을 들고 와"(60쪽) 다시 한국어로 번역해 책을 내었는데, 대박을 터뜨렸다. 하지만 바로 다음 작품에서 참단한 실패를 겪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본격적인 단행본 출판을 시작하고 시인 고은, 문학 평론가 김현이라는 한국 현대 인문계의 거물들과 친분을 맺는다. 문학 출판을 시작한 박맹호 회장은 한국 출판계의 최초가 될만한 사건들을 연출한다. '세계 시인선', '오늘의 시인 총서', '이데아 총서', '현대 사상의 모험', '대우 학술 총서', '세계 문학 전집'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리즈를 펴내면서 한국 출판계의 대표적 출판사로 이름을 올린다. 또한 "단행본 출판 사상 거의 최로로 모든 책에 본격적으로 가로쓰기를 도입했고"(107쪽), 신구문화사에서 편집자로 있던 정병규를 영입해 "한국 최초의 전문 북 디자이너라는 닉네임이 생기게"(116쪽) 도와주기도 하였다. '최초의 사건'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전집류를 제외하곤 신문 5단 광고 전체를 할애해서 단행본 한 권의 책을 광고한 것도 해방 이후에는 민음사가 거의 처음이었고, 전면 컬러 광고를 과감하게 시작한 것도 민음사가 거의 처음이었다."(119쪽)

<박맹호 자서전 책>의 부록에 박맹호 회장의 21세 때 소설 <자유 풍속>이 실려 있듯이, 박맹호 회장의 삶에서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히 컸었다고 생각된다. 그의 생각이 고스란히 투영된 계간지 <세계의 문학>과 '오늘의 작가상', '김수영 문학상'을 보면 말이다. 황석영, 박완서, 최인훈, 박경리 등 한국 문단의 거성들의 작품들을 다룬 <세계의 문학>. 이성복, 김용택, 장정일 등의 시인을 배출한 '김수영 문학상'. 

이야기 둘, 도올 김용옥이라는 존재를 본격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된 책이 민음사에서, 그것도 박맹호 회장에 의해서 라는 것을 아시는가? 1983년 <세계의 문학> 에 수록된 김용옥의 눈문인 '우리는 동양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로 바꿔 출간해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었다고 한다. 

책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으로써, 박맹호 회장의 자서전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책은 지은이보다도, 만든 이보다도, 읽는 이보다도 오래 남는다"(255쪽)는 말씀. 책을 누구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나의 생각을 알아주는 듯하다. 그럼에도 책을 만들어 살아가기란 너무나도 힘든 게 현실이다. 같은 값으로 다른 무엇을 살 때보다, 책을 살 때 더 많은 것을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책을 만들 때는 자기한테 도움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구매하려 들지 않는 합리적 독자를 늘 염두에 둬야한다"(256쪽)고 말하는 것일 게다. 

<박맹호 자서전 책>은 단순히 한 사람의 자서전으로만 끝나지 않고 나아가 한국 출판계, 한국 대표 출판사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한국 출판문화에 대한 공부가 될 것 같다. 

"오늘날 출판 위기론이 팽배해 있지만, 동료나 선후배 출판인들의 한없는 열정이야말로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가장 큰 잠재력이라고 본다."(257쪽)

다른 누가 아닌 한국 출판계 큰어른이 후배들의 등을 토닥여주는 것만 같다. 



"오마이뉴스" 2012.12.25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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