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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13인의 자객> 태평성대의 사무라이가 존재 증명하는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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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일본 영화 <13인의 자객>


일본 하드코어 액션 무비 <13인의 자객> ⓒ 미디어소프트(주)/알토미디어(주)


1950년대 일본영화의 황금기를 이끌며, 세계 영화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영화감독 중 한 사람인 '구로사와 아키라'. 그의 중기 1954년작 <7인의 사무라이>. 이 영화는 산적들의 행패에 맞서는 7인의 사무라이 이야기를 그렸다.

 

2007년 개봉해 전 세계적인 흥행 돌풍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수많은 패러디까지 양산했던 영화 <300>. 페르시아의 100만 대군에 저항하는 스파르타의 300명 소수 정예의 싸움을 스타일리시하게 그려냈다.

 

다수에 대항하는 소수의 싸움은 숭고함과 비장미를 선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별것 아닌 장면에서도 숭고함에 감동을 받으며, 극도의 비장미를 위해 실제보다 과장되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자기희생으로 최후를 맞이한다거나 잔인해진다거나 하는 것이다. 위의 두 영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이런 소재의 영화에서는 소수가 다수에 저항해야 하는 이유가 확실하고 또 이유가 합당하다. 아니, 그래야 한다. 다수는 다수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이유, 즉 평화의 논리가 있는 반면, 소수는 세상이 인정하지 않는 자신들만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논리가 합당하지 않는 다면 이 소수 대 다수의 싸움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질적으로 다른 '하드코어 액션' 무비

 

2010년에 개봉한 일본 사무라이 액션 영화 <13인의 자객>의 경우, 위의 논리가 확립돼 상당히 잘 표현돼 있다. 일단 이 영화가 외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하드코어 액션'이다. 여타 B급 사무라이 영화에서 나오는 저급의 하드코어, 즉 팔과 다리 그리고 머리가 잘리고 피가 난무하는 액션을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그 하드코어의 정교함과 사실성의 질이 다르다. 또한 난무보다 절제를 선택해 오히려 더 섬뜩하다.

 

이는 영화 <300>에서 보여주는, 소수의 비장미를 표현하는 하드코어 액션의 성질과는 다르다. 애초에 그 비장미의 성질이 다른 것이다. <300>100만 대군을 고작 300명이서 무슨 수를 쓰던 막아야 한다는 설정이라면 <13인의 자객>은 겉으로는 '대의를 위해서'이지만 속으로는 사무라이로서 존재가치가 말살된 태평성대에 자신을 찾고자 마지막 길을 간다는 설정이다.

 

영화는 크게 두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첫 파트에서는 13인의 사무라이가 모이게 되는 배경을 설명한다. 때는 막부 말기인 1800년대 후반. 태평성대의 시대에 쇼군의 동생이자 포악한 영주 나리츠구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무료함을 달랜다. 이를 보다 못한 쇼군의 최측근 도이는 사무라이의 절대 임무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를 어기고, "대의를 위해서" 나리츠구 척결을 결심하고 신자에몬에게 부탁을 한다.

 

이에 신자에몬은 태평성대에 사무라이로서 쓰임을 받음에 손이 떨릴 정도의 쾌감을 느끼고 일생일대의 도박을 감행한다. 그리고 그 도박에 동참하는 12인의 자객. 그렇게 13인의 자객이 나리츠구 암살 작전에 돌입한다. 만약 이 파트에서 13인 자객을 일일이 비춰주며 도박 출정 동기에 대해 설명했으면, 상당히 모양새가 웃길 뻔했다. 마치 만화 <외인구단>이나 영화 <소림축구>처럼 말이다. 그 작품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에는 맞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대신 주인공격인 신자에몬과 그의 조카 신로쿠로의 동기를 대표로 보여주고 있다. 신자에몬이나 신로쿠로나 검술실력은 매우 출중하다. 하지만 때는 태평성대, 그 검술실력을 내보일 때가 없다. 그러던 중 "대의를 위한" 일에 가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손이 떨릴 정도의 쾌감. 오랜만에 맛보는 살과 뼈의 감촉. 그들은 사무라이로서 죽을 것을 각오한다.


<13인의 자객>의 한 장면. 영화는 하드코어 액션의 진수를 보여준다. ⓒ 미디어소프트(주)/알토미디어(주)


영화는 두 번째 파트로 넘어간다. 13인의 자객은 치밀한 전략과 토론, 정확한 예측으로 나리츠구의 200명 대군의 손발을 묶고 선제 타격을 가하는 데 성공한다. 그 다음에는 13인 개개인의 능력에 맡겨야 한다. 최소 115의 싸움, 실력이 아무리 좋다지만 체력이 관건. 하나 둘 죽어가는 13인의 자객. 마지막에 남는 나리츠구와 그의 심복 한베이, 그리고 신자에몬과 그의 조카 신로쿠로. 그들의 마지막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나리츠구의 심복 한베이는 신자에몬과 어릴 적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하지만 한베이는 '무사도'의 절대 원칙인 "주군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고, 주군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를 맹목적으로 지키는 이다. 그의 삶에 있어서 다른 어떤 것도 이 절대 원칙에 위에 선 것은 없다. 그의 군대는 대군이지만, 그의 생각은 소수에 속한다.

 

반면 신자에몬은 "대의를 위해서" , 일반 백성 및 보편적 이성에 의해 움직인다. 그에게 있어서 절대 원칙이란 없다. 그가 이끄는 13인의 자객이 훈련을 할 때, "무사도를 버려라! 칼이 없으면 막대기로, 막대기가 없으면 돌로, 돌이 없으면 손발을 써서 상대를 죽여라!"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그의 군대는 소수이지만, 그의 생각은 다수를 대변한다.

 

하지만 그도 마지막에는 자결을 택하며, 주군에 대한 절대 원칙을 고수한다. 주군에 반기를 든 그가 없어짐에 따라, 주군의 이미지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존재가 없어진 것이다. 이 또한 어찌 보면 주군뿐 아니라, 주군을 따르는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보는 즐거움과 생각하는 즐거움 주는 무비

 

<13인의 자객>의 한 장면. 그들은 왜 그 같은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 ⓒ 미디어소프트(주)/알토미디어(주)


이처럼 이 영화는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스토리의 안정감을 주고 강렬한 액션으로 '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이론적인 측면에서 볼 때 소수 대 다수의 싸움이지만, 동시에 소수가 다수로, 다수가 소수로 바뀔 수도 있다는 것. 그 안에는 보편과 특수의 관계도 보인다. 이를 영화 내적으로 말하자면, 무사도에 대한 해석이 될 것이다.

 

더 거시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평화시대에 대한 고찰이다. 폭군 나리츠구나 13인의 자객들은 모두 평화시대의 산물이다. "누가 나를 죽여줬으면 좋겠는데"라고 말하며 극도의 '심심함(?)'을 표출하는 나리츠구. 그는 마지막에 죽을 때 "내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는 날이 오늘이었다."라는 말까지 남긴다.

 

신자에몬의 경우 주지했듯이 손이 떨릴 정도의 쾌감을 느꼈다. 나로쿠로는 매일같이 술과 도박 여자에 빠져 살다가 어느 날 5~6명의 건달들을 해치운 후 '시시함'을 느꼈다. 그들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방법은 오직 검이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태평성대에 살고 있을까, 난세에 살고 있을까. 태평성대에 살고 있다면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켜야 할지도 모른다. 반면 난세에 살고 있다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다. '반란''혁명'이 되고, '반동분자''영웅'이 되기 일쑤다.

 

지금 시대는 한 번 영웅은 영원히 영웅이고, 한 번 반동분자면 영원한 반동분자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렇다면 태평성대의 시대라는 것인데, 이리도 암울한 태평성대가 어디 있을까? 새삼 13인의 자객들이 부러워진다. 자신들이 가야할 길, 있어야 할 곳, 존재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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