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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의 예술, 만화

<68년, 5월 혁명> 만화로 혁명을 이야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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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프랑스 그래픽 노블 <68년, 5월 혁명>


<68년, 5월 혁명> ⓒ휴머니스트

아트 슈피겔만의 <>라는 만화가 있다. 만화로서는 최초로 1992년에 퓰리처상을 비롯해 구겐하임상과 전미 도서평가 협회 상을 수상했다. 퓰리처상은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보도·문학·음악 부문에서 시상한다. ‘만화’ <>는 문학으로 취급된 것이다. 그만큼 인문학적 소양과 예술적 감각이 충만했다는 말이겠다.

 

구겐하임상은 어떤가? 세계적인 권위를 갖춘 국제 미술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만화의 가치를 몇 단계 상승시킨 효과를 가진다고 하겠다. 전미 도서평가 협회상은 퓰리처상과 콤비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말인즉슨,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소설이나 인문·과학 도서들이 퓰리처상과 전미 도서평가 협회상을 동시에 받곤 한다는 말이다. 그 자체로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우연히 접하게 된 또 하나의 그래픽 노블


이처럼 만화를 여타 웬만한 예술 작품보다 더 높이 쳐주는 장면을,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볼 수 없다. 유명 만화가들을 화백(畵伯)’이라고 높여 부르기는 하지만, 이는 그림 분야에 한해서 인 것이다. 예술 분야를 통틀어 만화가 가지는 영향력은 아직 미미하다.

 

하지만 예술 강국 프랑스에서는 1970년대에 만화를 9의 예술로 규정하면서, 기존의 8가지 (연극, 회화, 무용, 건축, 문학, 음악, 영화, 사진)를 이은 엄연한 문화예술의 한 범주가 되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여전히 법적으로 만화가 문화예술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얼마 전 6월 달에 만화를 문화예술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을 골자로 한 '문화예술진흥법 일부개정법률안'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는 소식만 들려올 뿐이다.


본래 만화(주로 일본 만화)를 좋아했던 나는, 올해부터 그래픽 노블류의 만화를 보기 시작했다. 만화에 있어 어찌 차등을 둘 수 있겠냐 만은, 거기에 분명 온도 차이는 존재하는 듯하다. ‘오락만을 위한 만화가 아닌, ‘교육또는 일깨움을 주는 만화라고나 할까?

 

얼마 전에 도서관을 가서 세계 역사 파트에 자리를 잡았다. 대작과 명작, 수작과 망작, 구작과 신작이 뒤섞여 있던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만화 한 편을 발견했다. 그게 또 우연찮게도 접해보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그것도 올해 처음으로 보게 된 그래픽 노블인 <앨런의 전쟁>(휴머니스트)의 옮긴이들이 고스란히 참여한 작품이라니. 운명인가 싶었다.

 

제목은 <68, 5월 혁명>(휴머니스트), 앞의 책과 옮긴이도 같았고 출판사도 같았다. 결정적으로 지은이의 나라가, 프랑스로 같았다. 처음으로 만화를 9의 예술로로 규정한 프랑스라는 나라 태생이라니, 역시 뭔가 달라도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빗나감이 없이, 연속으로 나를 만족시켰다.

 

만화로 혁명을 이야기하다


<68년, 5월 혁명>의 첫 장면 ⓒ휴머니스트


만화예술작품은 프랑스 68년 혁명의 40주년을 기념해 기획되어 2008년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사실 68년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지라, 4년 뒤인 2012년에 번역출판 되었어도 어떤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박정희 정권 하에서 소위 경제 발전에 미친 듯이 공력을 퍼붓고 있었기 때문에, 혁명의 기운이 스며들 틈이 없었다. 이미 8년 전에 혁명을 성공했지만 군부 세력에 무참히 짓밟혔고, 저항은 계속되었지만 그 세력은 상대적으로 미미한 상태였던 것이다.

 

혁명이라는 단어 혹은 그 연원 속에는 사람을 흥분하게 하는 요소가 다분하다. 하지만 <68, 5월 혁명>은 그러한 요소를 완전히 배제시켜 버렸다. 아무런 상관없는 제3자의 화자가 나와서 당시를 설명한다. 으레 그렇듯이 감정이 들어간 회고나 한 쪽으로 치우친 설교를 하지 않고 오로지 객관성을 유지하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68년 봄 제2차 대전 승전 이후 경제적 풍요 속에서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권위를 거부하며 체제에 대항해 시위와 토론을 하던 프랑스의 젊은 대학생들. 그들은 흩어진 정치 파벌로 제대로 뭉치지 못하고 그냥 으레 하는 통과의례처럼 학생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던 3월 파리 낭테르대학의 과격파 학생들이 미국계 은행 폭파사건 용의자로 체포되었다. 이를 기회로 삼아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를 기치로 한 운동이 시작되고, 판은 점점 더 커진다. 이런 분위기에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정부와의 대처 과정에서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다.

 

이에 샤르트르, 자크 라캉 등의 지식인들이 지지선언문을 발표하고, 노동자와 공무원 그리고 시민들까지 연대해 천만 명이 참여한 총파업으로 발전한다. 사회 전체가 참여한 혁명에 준하는 운동이었던 것이다. 이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드골이 의회를 해산시키고 국민 투표를 제안하는 등의 초강수를 두었고, 결국 한달 만에 혁명의 열기가 수그러든다. 어떠한 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 실패한 혁명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만화는 진짜 같은 가짜 인터뷰이들을 통해 당시 상황을 아주 생생하고 자세하게 전한다. 그들은 각각 혁명 당시 마오주의자로 깊숙이 개입했다고 하는 프로듀서 사미아, 혁명 당시 트로츠키주의였던 JCR(혁명적 공산주의청년회)과 함께 어울리며 개입했다고 하는 조형예술 교수 프랑수아즈, 혁명 당시 한발 물러선 곳에서 사건을 빠짐없이 지켜봤던 평범한 학생이라고 하는 은퇴한 교육가 루이, 혁명 당시 국무총리였던 조르주 퐁피두의 보좌관이었다는 전직 고위 공무원 샤를이다. 그리고 아무런 상관없는 화자인 학생 폴.

 

이들은 각각 혁명 당시 혁명의 주역인 운동권 학생, 가까이에서 혁명을 계속 목도한 평범한 학생, 그리고 정부를 대변하는 핵심 인물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화자가 적절히 끼어들어 만화를 더할 나위 없이 객관적인 산물로 만들고 있다.

 

엄연한 역사책임과 동시에 만화예술 작품


너무나 객관적인 서술에만 치우쳐 있어 자칫 지루함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다방면을 대변하는 인터뷰이들의 현장감 있는 중계(?)들로 인해 지루할 틈이 없다. 또한 어떻게 취재를 하고 리서치를 했는지 궁금하게 만들 정도로 시간, 장소, 입장에 맞게 적확하고 디테일한 사실들을 내보이고 있다. 내용 전달과 교육적 차원에 몰두를 하다보면 그림에 소홀해질 수도 있는데, 이 만화는 거기에도 엄청난 공력을 쏟는 게 느껴진다.

 

엄연한 역사책임과 동시에 만화예술 작품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하겠다. 왜 이 만화가 도서관의 역사파트에 자리 잡았는지 명확하게 알게 해주면서, 아트 슈피겔만의 <>가 생각나게끔 한다. 서문을 장식한 68년 혁명의 주역 다니엘 콩-방디의 글도 이 작품의 품위를 한층 올리는 것 같다.

 

과거와 새로움 사이에는 그날의 유작밖에 없다!’

 

첫 페이지에서 685월 혁명을 아름다운 혼란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그림과 아름다울 정도로 정교하게 재연된 그날, 그리고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버린 그날, 하지만 혼란의 한 가운데에 있던 그날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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