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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1980, 90년대 한국 사회의 찌질한 천태만상 <우묵배미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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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장선우 감독의 <우묵배미의 사랑>


영화 <우묵배미의 사랑> 포스터. ⓒ모가드코리아



화려한 옛시절을 간직하지 못하고 뒤로 한 채 한국 영화계 최악의 영화로 길이 남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감독으로 이름이 드높은 그, 장선우. 그는 세기말에 <거짓말>로 한국 영화계 최고의 파격을 선보였던 바, <나쁜 영화>와 더불어 괜찮지 못한 길로의 발을 내디뎠다. 한국이 낳은 명감독 반열에 오르는 갈림길에서 선택을 잘못했다.


그는 일찍이, 그러니까 80년대부터 '좋은' 영화들을 선보였다. 90년대 들어 보다 논쟁적으로 변했지만 자못 성공적으로 당대를 비췄다. 단 한 작품도 빼놓지 않고 연출은 물론 각본까지 직접 수행했다. 주로 원작이 있는 작품들이었는데, <우묵배미의 사랑> <경마장 가는 길> <화엄경> <너에게 나를 보낸다> <꽃잎> <거짓말>이 대표적이다. 


올해 출연배우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서 30여 년만에 재개봉한 <우묵배미의 사랑>은, 1990년에 개봉하여 그야말로 90년대 한국 영화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 작품이다. 당대를 비추는 새로운 창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방법론에 있어서 사실주의로 부드럽게 선회하였다. 장선우 감독의 영화 인생 절정기이기도 하다. 


작디작은 마을의 '금지된 사랑'


그들의 금지된 사랑. 영화 <우묵배미의 사랑>의 한 장면. ⓒ모가드코리아



서울 바닥에서 놀고 먹던 일도(박중훈 분)는 아내(유혜리 분) 그리고 갓난 아기와 함께 경기도 한적한 마을 우묵배미로 이사온다. 능력은 있었던지 자그마한 치마공장에 취직되어 미싱을 돌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일도는 치마공장 옆자리에 앉은 공례(최명길 분)에게 관심을 보인다. 


공례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네댓살 먹은 아들이 하나 있는데, 문제는 남편이다. 무차별적인 남편의 폭력, 공례는 일도의 관심을 외면할 도리가 없다. 일도는 본래 그런 놈이기도 하지만, 억센 아내와 서울에서 살다온 '가오'라는 이유 아닌 이유들이 있다. 그들은 일도의 첫 월급날 밤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공례와 그런 공례가 답답한 일도, 둘은 각각 남편과 아내에게 한바탕 얻어맞고는 출근해서 함께 웃으며 희한한 우애를 다진다. 전에 없이 가까워진 일도와 공례, 공례와 일도는 본격적으로 외도를 시작하는데... 과연 이 작디작은 마을에서 그들의 '금지된 사랑'은 계속될 수 있을까?


흔한 시골 마을에서, 흔한 남녀가, 흔한 불륜 관계를 맺는 이야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겠지만, 그 자체로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가는 한국 사회의 찌질한 천태만상 중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에 더할 나위 없는 의미가 될 수 있겠다. 그 의미는 시간이 갈수록 퇴색되는 게 아니라 선명해진다. 


소외된 소시민들의 사랑


소외된 소시민들의 사랑. 영화 <우묵배미의 사랑>의 한 장면. ⓒ모가드코리아



<우묵배미의 사랑>에서의 불륜은, 또는 로맨스는, 그 흔하디 흔한 소재는 이 영화에 자연스럽게 빠지게 만드는 수단에 불과할 것이다. 그 대상, 두 주인공 일도와 공례는 완벽하다싶은 스테레오 타입인데 날것의 현실 같은 연기가 스테레오 타입의 전형성과 지루함을 압도한다. 


일도는 소시민이다. 화려한 서울 생활을 뒤로 하고 시골 변두리로 오게 된, '소외된' 소시민 말이다. 영화는 서울 아닌 시골의 소시민을 조명한다. 지금은 물론 당시에도 소시민을 그리는 영화라면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온 이들을 그린다. 또는 서울에서 시골로 쫓겨나다시피 하는 과정을 그린다든지. 


반면 이 영화는 소시민이 갖는 특성 중에서도 '소외'에 보다 방점을 찍고 '시골'을 소외의 공간으로 치환했다. 그런 곳에서의 '사랑'은 당연히 특별할 게 없지만, 특별할 게 없는 사랑이기에 그런 '곳'으로 시선이 돌아가는 것이다. 우묵배미의 '사랑'이 아닌 '우묵배미'의 사랑. 소외된 소시민들의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보다시피 별반 다르지 않다. 똑같다. 영화는 한편 어딜 가나 사랑의 모습은 똑같고 그 주체가 소외된 소시민일지라도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있다. 사랑을 불륜으로 바꿔도 똑같다. 특별한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불륜의 모습도 마찬가지로 똑같다는 것. 영화는 소외의 모습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똑같다고 말한다. 


1980, 90년대 한국의 전형적인 형상


1980, 90년대 한국사회의 전형적 형상. 영화 <우묵배미의 사랑>의 한 장면. ⓒ모가드코리아



일도와 공례의 밤기차 밀애, 일도는 말한다. "우린 계속해서 이렇게 샛길로 가야 할 거예요." 찌질한 현실에서 도피해 남몰래 가는 짜릿하지만 불안할 길. 공례는 답한다. "멀고 험한 길은 재미가 없잖아요." 일도가 말한 샛길을 함께 가겠다는 대답이다. 그녀는 끝날 것 같지 않은 힘든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다. 


비단 한국뿐이겠냐마는, 한국의 1980~90년대는 호황 중의 호황이었다. 30여 년 전이라곤 믿기 힘든 고층빌딩들이 도시에 즐비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어 호황을 만끽했다.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게 있었으니 남과 여, 여와 남의 위치나 관계이다. 


일도는 예의 그 놀고 먹는 놈팡이로 집에서는 아내한테 꼼짝 못하고 살지만 밖에서는 남자라는 이유 하나로 떵떵거린다. 공례는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살지만 이유 없는 남편의 폭력에 상습적으로 시달린다. 한 명, 파격적일 수도 있는 인물이 있는데 일도의 아내이다. 그녀는 아내임에도 남편을 육체적으로 압도한다. 


하지만 그녀조차 아이가 있기에 남편을 버릴 수 없고, 정신 못차리고 사는 남편을 죽이지 못할 망정 시댁에 데리고 가서 화해 아닌 화해를 하고, 그의 성향을 알면서도 다시 챙겨주며 잘 살아보려 한다. 어쨌든 남편 없이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시대가 낳은, 시대가 만든 어쩔 수 없는 좌절의 형상이다. 


이 영화를 단순히 가부장적 테두리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재단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렇기에 일도의 아내로 대변되는 좌절의 형상이 또 하나의 빛나는 성취로 다가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지는 당대의 전형적인 산물 형태. 2018년도 끝을 향해 가는 이때, 영화에서 비춰진 2010년대의 전형적인 형상은 누구일까. 자못 궁금하다. 바로 앞의 2000년대는? 바로 뒤에 올 2020년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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