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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신혼여행에서 헤어지는 커플 이야기, 그 고전적 매력 <체실 비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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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체실 비치에서>


영화 <체실 비치에서> 포스터. ⓒ그린나래미디어



줄리언 반스와 더불어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현존 작가 이언 매큐언, 데뷔한 지 40년이 넘은 지금도 활발히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초창기의 그는 특이하고 특별한 이야기를 특이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전하길 즐겼다. 독보적인 방식으로 명성을 쌓은 그는 스타일을 바꾼다. 가장 평범하고 무난한 이야기를 가지고 오기 시작한 것. 


그 절정에 이른 작품이 소설 제목으로는 <속죄>로, 영화 제목으로는 <어톤먼트>로 잘 알려진 작품이다.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가히 그 묘사와 문체와 구조와 반전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다. 시기적으로 절대 오래된 작품이 아니지만, 이미 영국의 고전 중 하나로 칭송받고 있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들은 1990년부터 10편이나 영화화되었다. 이번에 한국에도 소개되어 천천히 은은하게 사랑받고 있는 <체실 비치에서>는 그의 2007년 작으로 출간 10년 만에 영화화되었다. 가장 평범하고 무난한 이야기를 가져온 대표적 소설이기도 한대, <속죄>처럼 압도적이지 않는 와중에도 고전적 매력을 발산한다. 


서투른 처음


영화 <체실 비치에서>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1962년 영국, 에드워드(빌리 하울 분)와 플로렌스(시얼샤 로넌 분)는 결혼 직후 체실 비치로 신혼여행을 온다. 떨리는 마음으로 함께 해변을 걷고 호텔에 들어와 식사를 하고 사소한 다툼을 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그러고는 신혼여행지에서의 첫날을 보내려 침대로 향한다. 하지만 둘의 첫날은 순조롭지 않다. 


그들은 우연히 반핵 운동 모임에서 첫눈에 반한다. 영국 굴지의 명문 대학인 옥스퍼드에서 클래식을 전공한 플로렌스, 그녀의 집안은 전기회사 사장 아버지에 철학교수 어머니의 중상류층이다. 반면, 비록 수석이지만 런던 칼리지에 '불과한' 에드워드는 초등학교 교장 아버지에 정신 이상자 미술가 어머니의 상대적으로 하류층이다. 


그럼에도 우여곡절 끝에 연애 결혼에 골인한 에드워드와 플로렌스, 그들은 서투른 자신과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헤어져 그 길로 각자만의 삶으로 가버린다. 왜 가장 행복했던 신혼여행 첫날을 순조롭게 보내지 못한 것도 모자라 헤어지기까지 했어야 했을까. 누구에게나 처음은 오고 누구나 서투를 때가 있는 법 아닌가. 


인간의 나약함과 슬픈 운명


영화 <체실 비치에서>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그들은 젊고 잘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둘 다 첫날밤인 지금까지 순결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요즘에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시절은 성문제를 화제에 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던 때였다."


원작 소설의 첫문장이다. 1960년대 초 아직 전 세계를 휩쓸 총체적 혁명이 시작되기 전의 영국, 모든 면에서 보수적이고 경직되어 있는 그 분위기와 체제를 보여준다. 이 영화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하고 직접적인 문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 보면 한없이 찌질하고 너무나 안타까워 한편으로 나무라지만 한편으로 비웃게 되는 그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메타포가 되기도 한다. 


에드워드와 플로렌스는 그 시대 영국의 가장 정직한 일원, 플로렌스가 보다 지극히 영국적이고 에드워드가 보다 덜 영국적이라 하더라도 '행위적 성(SEX)'에 있어서 무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당연히 경험이 없었을 그들, 아니 경험이 없어야만 했을 그들의 처음은 당연히 파국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화는 또는 소설은 일면의 체제 비판을 문학적 아쉬움으로 승화시킨다. 보는 이들은 그 지점에서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헤어짐은 체제와 분위기에 순응한 결과라고 하지만, 한편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초세밀한 심리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엔 어쩔 수 없는 나약함과 그에 따른 슬픈 운명이 있다. 


'지금'에 끌리는 이유


영화 <체실 비치에서>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우리의 신혼여행을 생각해본다. 뿐만 아니다. 극초반의 신혼 시절을 생각한다. 신혼 직후의 지금을 생각한다. 거기엔 수많은 처음들이 있고, 사실은 자신을 향한 것일 서로를 향한 끝없는 질타가 있으며,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사랑의 쉼표가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생기지 않을 감정들이 있는 것이다. 


체제에 순응한 결과에 따른 비판이나 수많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점철된 문학적 승화보다, 이 영화에서 이상하게도 더욱 끌리는 건 '지금'이라는 단어다. 영화는 끝없이 옛날을 보여준다. 신혼여행에선 연애 시절을 보여주고, 사실 신혼여행 자체도 옛날 옛적 이야기다. 그 모든 게 결국 회한이 아닌가. 


항상 지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지금 행복했어도 나중의 언젠가 불행할 때 그에 반추해 지금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행복도 불행의 연장선상이 될 것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문학적 아쉬움도 그 순간의 서투르고 섣부른 선택이 부른 불행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평생을 좌우할 선택. 


'왜 그때는 몰랐을까' '왜 그때 그렇게 행동했을까' 하는 아쉬움은 누군가의 마음이라도 절대적으로 슬프고 그래서 문학적으로 훌륭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회한을 느끼고 싶어 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감탄만 하고 깨닫지 않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지 않으려 문학과 영화를 접한다. 그래도 쉽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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