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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비틀게 보여주는,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인간 <너는 여기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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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너는 여기에 없었다>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 포스터. ⓒ팝엔터테인먼트



살인 청부업자 조(호아킨 피닉스 분)는 수시로 자살 충동에 시달린다. 수시로 시도를 하는데, 봉지로 얼굴을 덮어 숨을 못 쉬게 하거나 칼을 입속으로 넣어 찌르려 하거나 철로에 떨어질 것처럼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하다 못해 칼로 위험한 장난을 치기도 한다. 모든 건 무표정 위에 어린 복잡한 심정으로 행한다. 


그가 자살 충동에 시달릴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기억들이 있다. 어린 시절인 듯 학대의 기억들, 전쟁인 듯 당한 기억과 행한 기억들, 그리고 오래 되지 않은 가해의 기억들까지 그를 괴롭힌다. 그런 그가 자살을 할 수 없는 건 늙은 어머니의 존재 때문이다. 인정사정없는 살인 청부업자이지만 어머니한테는 다정다감한 하나뿐인 아들이다. 


그에게 의뢰가 들어온다. 차기 주지사로 유력한 상원 의원 알버트가 딸 니나를 찾아달라는 것이다. 지체없이 소굴로 가 니나를 구출한 조, 하지만 머지 않아 알버트가 죽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곧이어 정체불명의 이들에게 니나를 빼앗긴다. 조는 다시 한 번 니나를 구출하기 위해 길을 나서는데...


차기 거장 과작 감독의 신작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한 장면. ⓒ팝엔터테인먼트



영국 출신의 여성 감독 린 램지는 1999년 장편 데뷔 후 20여 년 동안 4편밖에 내놓지 않은 과작 감독이다. 내놓는 작품마다 비평 면에서 좋은 성과를 보이며 차기 거장의 면모를 발휘하고 있지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와중에 2011년 작 <케빈에 대하여>는 우리나라에서도 큰 화제를 뿌렸다. 사랑할 수 없는 아들과 사랑하기 힘든 엄마의 치명적 심리 스릴러로,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모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비틀기를 시도해 반향을 일으켰다. 


틸다 스윈튼이라는 명배우와 함께 시너지를 냈던 <케빈에 대하여>에 이어 6년 만에 장편 <너는 여기에 없었다>를 들고 온 린 램지 감독은, 이번에는 명배우 호아킨 피닉스를 낙점했다. 그녀는 이번 영화에서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어떤 식으로든 비틀어 내보인다. 


다만, 전작이 관계와 서사의 심리를 중점에 둔 반면 이번에는 개인과 기억의 은유에 중점을 두어 보다 스타일리시해졌지만 다소 난해가 구석이 많을 수 있겠다. 그런 만큼 관객이 해야 할 게 많아졌다. 


폭력에 대하여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한 장면. ⓒ팝엔터테인먼트



기본적 스토리 라인은 여러 영화들을 생각나게 한다. 뤽 베송의 <레옹>, 토니 스콧의 <맨 온 파이어>, 심지어 한국 영화 <아저씨>까지 연상되는 것이다. 암울한 과거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유령 남자가 여 아이를 구하면서 구원된다는 이야기. 하지만 <너는 거기에 없었다>는 이 영화들과 결이 다르다.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와 결이 같다고 할 수 있을까. 남자 주인공이 여자를 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닌, 여자를 구하는 걸 본인 구원의 상징으로 치환한다. 여자가 구원되는 것도, 여자를 구하는 게 남자를 구원하는 방법의 하나가 되는 것도 된다. 또한 그들의 관계 형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남자 주인공 내면에 보다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똥파리> <파수꾼>을 비롯한 한국 독립영화의 일면,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인간들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 


조가 니나를 구출하는 장면이 그 한 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른 영화였으면 얼마나 스타일리시하게 또는 얼마나 잔인하게 죽이는지 신세계적인 액션을 보여주려 하였다면, 이 영화는 망치 하나로 일망타진하는 폭력적인 이야기와 장면을 CCTV 화면과 다분히 편집된 이야기로 보여준다. 영화는 현실에서의 폭력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를 꺼려하고 있다. 


또 다른 한 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조가 괴로워하는 플래시백들이다. 현실의 폭력과 폭력 이후를 보여주는 방식과 정반대로, 극히 짧은 시간 스쳐지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플래시백들이 굉장히 직접적이다. 하지만 이 또한 날 것의 피가 난무하는 폭력보다 폭력 이후만을 보여준다. 상상하게 만드는 폭력이란 얼마나 폭력적인가. 


'여기', 그리고 새로운 시작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한 장면. ⓒ팝엔터테인먼트



조는 폭력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듯하다. 어머니라는, 삶의 이유이자 폭력의 굴레에서의 쉼터가 있지만 언젠가 사라질 운명이다. 영화는 조의 이유이자 쉼터를 어머니에서 니나로 옮기는데, 그건 과연 죽음일까 부활일까 구원일까. 이 역시 영화는 판단을 감독의 몫도 배우의 몫도 아닌 관객의 몫으로 돌린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결국엔 가해자나 피해자나 모두 사라지는 것밖엔 방법이 없다. 누군가한테 죽임을 당하든, 스스로 죽든. 그 지점에서 구원의 양상이 영화마다 제각각인 것이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죽음-부활-구원의 라인을 택한 듯하지만, 아무것도 택하지 않은 ‘새로운 시작’을 택한 것도 같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라는 건 ‘너는 여기에 없어야 한다’로 읽힌다. ‘너’는 조 자신일 수도 있고, 니나일 수도 있고, 어머니일 수도 있다. 심지어 그의 사업 파트너일 수도 있고 그에게 원수진 수많은 이들일 수도 있다. 그를 죽이러 온 이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라는 공간과 시간을 통합하는 철학적 개념이 이 영화를 주되게 관통하기도 한다. 


액션은커녕 말도 거의 없거니와 딱딱 끊기는 OST는 영화를 한없이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게 한다. 다름 아닌 주인공 조의 내면과 기억 속으로. 그러면서 특유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으니,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이라면 그 암담함과 조용한 긴박감을 견뎌내야 한다. 감히 재미있다고 말하진 못하겠지만, 감히 참고 견디며 한 번쯤 보라고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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