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작 열전/신작 도서

누군가가 지금도 사전을 만들고 있다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반응형



[서평]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표지 ⓒ윌북



그 어느 때보다 문자에 많이 노출되고 있는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또는 당연하게도 책에 대한 수요는 매년 최하한가를 경신하고 있다. 문자를 기본으로 하는 책을 상당한 금액을 주고 물성으로 소유하기까지 해야 하는 게 여러모로 부담으로 다가오는 게 아닐까 싶다. 한편으론 그럴 이유가 점점 없어지는 것일 테다. 우린 정보의 바다에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책은 여전히 전례 없이 많이 출간된다. 이는 책이 가진 여전한 전통적 공신력과 더불어 전에 없이 정보와 문자에 많이 노출된 신인류의 출현 때문이겠다. 넘쳐나는 정보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들을 대상으로 지식인 또는 전문가가 아닌 지식일반인들이 책을 이용해 큐레이션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 평준화 와중에 아직까지는 책이 대접을 받고 있다. 


와중에 삶에서 거의 '아웃 오브 안중'인 것처럼 되어버린 책이 있다. 다름 아닌 '사전'인데, 불과 10~20년 전만 해도 집집마다 사전 없는 곳이 없었다. 특히 학생들에게 사전은 필수였다. 공부의 기본이랄까. 물론 학생 아닌 이에게도 사전은 필수였다. 살아가는 데 말과 글이 필수이자 기본이듯. 


지금은 어떤가? 인터넷이 도입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종이사전은 사장되었다. 그러면 온라인에서는? 내가 보기에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사전이라는 것 자체가 정보범람 시대에 더 이상 필요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렇지만, 사전은 여전히 존재한다. 종이로도, 온라인으로도. 자고로 누군가는 사전을 만든다. 


사전과 사전 편찬자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전 제작사인 메리엄 웹스터, 그곳에서 20년 넘게 사전 쓰는 편집자로 살아가는 코리 스탬퍼는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윌북)를 통해 사전 편찬자의 관점에서 사전 편찬업이라는 날것의 실체를 다룬다. 그녀는 누군가가 찾는 정답을 만들기 위해 정답을 절대 찾을 수 없는 망망대해를 탐험한다. 


그곳에서 사전 편찬자들은 영어라는 근사하고 음탕한 언어를 다룬다. 그들은 스스로 주체가 되어 돈이나 명예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 스스로 객체가 되어 영어라는 주의 깊은 관찰과 보살핌이 필요한 주체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여기서 영어를 한글로 바꾸어도 전혀 기시감을 느끼지 않을 터, 그들의 마음가짐과 하는 일은 만민공통일 듯. 


사전이라 함은 자못 위대하고 위엄 있고 고귀하고 깨끗할 것 같다. 최소한 사전은 그런 곳에서 만들어질 것 같은데,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전 제작사인 메리엄 웹스터는 잘 쳐줘야 '단조로운 사무실'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그곳엔 사람들의 느낌은 있지만 사람들의 소리는 없다. 


사람들은 사전이 그냥 존재하는 것,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 오류 없는 진실과 지혜가 담긴 신성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하기에 사전 편찬자들을 언어의 창조자이자 구원자이자 지속자 같은 신성한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 하지만 사전은 살아 움직이는 멋 없는 사람들에 의해 꾸준히 편찬되고 교정되고 개정되고 있다. 


그들은 객관적이 되도록, 개인적으로 지닌 언어적 짐은 일찌감치 내려놓도록 훈련을 받는다. 사전 편찬업은 사전 편찬자를 익명이자 무형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언어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끊임없는 변화에 노출되어 있으며 사전 편찬자도 마찬가지다. 사전 편찬이란 과학적인 과정인 만큼이나 창조적인 과정이다. 


작은 단어


저자가 전하는 사전 편찬의 깊숙한 에피소드들은 사전에 관심이 없는 정확히 그만큼 흥미롭다. 또는 관심 없는 사전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영어라는 언어가 우리의 언어가 아닌 정확히 그만큼 어렵다. 그래서 흥미롭지 않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뽑아보았다. 진중하기 짝이 없는 '사전'을 말하는 이 책을 읽는 아이러니한 이유인 '재미'를 이 에피소드를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불운하게도 사전 편찬자의 시간을 가장 많이 잡아먹는 항목들은 아무도 찾아보지 않는 항목들이라고 한다. 'get' 'but' 'as' 'make' 'is' 'a' 'take' 'run' 같은 단어 말이다. 저자는 그중 'take' 항목 작업 전반을 전해주는데, 동사 take의 인용문 분류, 동사 take의 정의 집필 작업, 그리고 명사 take... 


쉼 없이 한 달을 일한 뒤 그녀의 일을 끝낼 수 있었다. 앞으로 take가 거쳐야 할 편집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한 달이란 시간이 어린애 장난(?)처럼 느껴졌을 때가 있었으니, 북미사전학회 격년 모임에서 였다. 60만 개 이상 의미가 실린 유서 깊은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편집자가 'run'을 작업하는 데 아홉 달이 걸렸다고...


틀린 단어와 나쁜 단어


작은 단어에 이어 틀린 단어와 나쁜 단어 에피소드도 흥미롭다. 'irregardless'는 '유관하게'라는 뜻이어야 하지만 '무관하게'라는 뜻으로 쓰인다. 찾아보면, 어이없게도 동의어가 'regardless'다. 이 무슨 시츄에이션인지? 명백히 틀린 단어가 아닌가? 저자는 이해할 수 없고 맹렬히 반대하다가 나중에는 강력히 찬성한다. 


그녀는 깨닫는다. 표준 영어 자체가 교육을 받으며 학습하는, 글로 적힌 이상에 기반을 둔 '방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irregardless는 명백히 비논리적이지만, 적극적으로 성장해가는 힘 있는 언어의 예시였고, 나름대로의 깊이와 역사와 고집이 있는 단어였다. 즉, 언어에 '맞는' 게 따로 없고 '틀린' 게 따로 없다는 것이다. 언어는 변한다. 


나쁜 단어는 어떤가. 저자는 'bitch'를 가지고 왔다. 이 단어는 '개나 다른 육식 포유류 암컷' '음란하거나 부도덕한 여자' '심술궂거나 못됐거나 고압적인 여자' '극히 어렵거나 못마땅하거나 불쾌한 것' '불평'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전엔 다양한 금기어가 존재한다. 이 단어도 일반적인 금기어에 포함되기에 충분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저자는 그 점에 의문을 품고 파헤친다. 


'bitch'는 오랫동안 금기어에 속하지 않았다. 사전 편찬업이라는 게 미국에서는 유복하고 교양 있고 나이 든 백인 남자의 영역이기에, 두 번째 뜻이 여성에게 쓰일 때 폄하 의미일 수 있다는 걸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걸 지적한 두 사람은 직접 bitch라고 불려본 경험이 있는 여자들이었다. 단어는 개인적일뿐더러 형체가 있다. 사전 편찬자들은 단어에 실체가 있다는 걸 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