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모노노케 히메>로 환경을 생각해보다


<모노노케 히메> 포스터. ⓒ월트 디즈니 코리아



북쪽과 동쪽 사이의 어디쯤 에미시 일족이 사는 마을에 재앙신이 출물한다. 차기 족장 '아시타카'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활을 날려 물리치지만 오른팔에 재앙신의 각인이 새겨져 죽을 운명에 처한다. 마을의 무녀 히이님으로부터 서쪽에서 불길한 일이 일어나고 있고 재앙신의 출몰도 그곳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말을 듣고 아시타카는 서쪽으로 여정을 떠난다. 중간에 만나게 된 지코보, 그는 지코보에게 사정을 털어놓는데 지코보는 그에게 서쪽 끝에 있는 '사슴신'과 신들의 숲 이야기를 해준다. 


한편, 타타라바 마을은 '에보시'의 탁월한 지도 아래 여자들은 철을 생산하고 남자들은 그 철로 쌀을 거래해 오는 등의 체계로 작지만 탄탄하게 꾸려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안정되고 지속적이고 잘 돌아가는 마을을 위해 근처 숲뿐만 아니라 사슴신이 사는 신들의 숲까지 파괴하고자 한다. 아시타카에게 저주를 내린 재앙신도 사실 에보시의 총에 맞아 죽어간 멧돼지신이었던 것이다. 아시타카는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여자들뿐 아니라 나병 환자한테도 차별없이 대하는 마을이 아닌가. 


모노노케 히메 '산'은 들개신과 함께 숲에서 살아가며 인간으로부터 숲을 지키기 위해 타타라바 마을의 에보시를 죽이려 한다. 그녀는 아시타카와도 얽히는데, 아시타카가 그녀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하였거니와 어쨌든 아시타카는 타타라바 마을로 대표되는 다분히 '인간' 편은 아닌 것이다. 물론 산도 인간인 만큼 '자연' 그 자체라고 할 순 없다. 아시타카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꿈꾼다. 과연 그의 바람은 이뤄질까. 


에코니즘과 페미니즘 사이


<모노노케 히메>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코리아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영원히 남을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1997년작 <모노노케 히메>, 일본 현지에서 당대 최고의 흥행과 비평을 거머쥔 명작 중의 명작이다. 자그마치 1984년작인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와 더불어 미야자키 하야오의 에코니즘(자연주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이 작품은 일본 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시대극이다. 


일본 특유의 원령 신화, 일본의 원주민 아이누 신화와 북방계 샤머니즘 신화 등이 혼합된 복합적 일본 신화 체계를 가져다 놓았는데, 그래서 <모노노케 히메>를 통해 일본 신화를 들여다보는 해석 작업도 활발했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를 영화의 중심에 놓는다면, 일본 신화보단 에코니즘이 더 정면에 나와야 하지 않나 싶다. 


한편, 에코니즘과 더불어 영화가 추구하는 큰 틀은 페미니즘이다. 전 세계적으로 미투·위드유 운동이 활발한 와중에 유독 일본에서만 잘 되지 않고 있다지 않은가. 그런 일본의 중세시대에 여자는 그저 남자의 소유물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모습이나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타타라바 마을을 움직이는 핵심 인사 에보시는 물론, 핵심 물품인 철을 만드는 이들 모두 여자이다. 남자들도 물론 그 철을 가지고 쌀로 거래를 해오고 전쟁에도 참여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만, 여자인 에보시가 진두지휘를 하고 여자들도 전쟁에 참여한다. '자연'의 입장에서 본 '인간'을 상징하는 타타라바 마을을 무작정 매도할 수도 무작정 적대시할 수 없게 만든다. 


에코니즘


<모노노케 히메>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코리아



그 와중에, 그 사이에 에코니즘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영화를 통해 에코페미니즘을 통합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영화 속에서 페미니즘을 행하는 인간들이 정작 에코니즘은 적대시하는 것이다. 아시타카는 이 둘의 공존을 홀로 외롭게 외치고 있고 말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에코니즘은 큰 개념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연을 사랑하자' 따위의 단순한 개념도 아니다. 


우선, 자연(신)은 인간의 인간만을 위한 이기심 때문에 터전을 잃었다. 그래서 터전을 다시 찾기 위해 인간과의 전쟁을 이어간다. 설령 그 전쟁이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에 인간도 손놓고 있을 순 없다. 그들도 자신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치른다. 


이 폭력의 순환은 인간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우리네 지구를 보자. 인간이 지구상에 출현하기 전, 아니 인간이 농경혁명으로 정착하여 모든 것을 바꾸기 시작하기 전과 비교해 살 만한 곳이 되었는가? 그렇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터전이 확립되고 인간을 위한 문명이 들어서고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모든 것이 정립되고 있다.


반면,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가. 인간에게 터전을 빼앗겨 왔고 빼앗기고 있으며 빼앗길 예정이다. 수많은 동식물들이 멸종되고 있으며 '자연환경'이라는 말은 옛말, 촌스러운 말이 되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공생? 아니, 전쟁을 하면 공평하겠지만 이건 일방적인 학살 수준이다. 


진정한 에코니즘


<모노노케 히메>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코리아



<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사슴신은 얼핏 인간인 아닌 자연의 편인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그에겐 회생과 죽음의 능력이 공존하는데, 이른바 '대자연'이라 칭할 수 있을 것 같다. 천재지변이 인간에게만 피해를 주는 게 아닌 자연에게도 큰 피해를 주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대자연이 건네는 회생과 죽음의 섭리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답이라 해도 무방하다. 인간과 자연, 각자의 절대적인 사연 때문에 절대 물러설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치라면 이치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논의 따윈 없다. 인정 후에, 함께 살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개념 탑재가 수순인 것이다. 그 자체로, 인간에 의해 시작된 전쟁이기에 인간에게 유리하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렇기에, '자연을 사랑하자' '자연을 원래대로 돌려놓자'는 일차원적인 개념도 안 된다. 그건 다분히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 위주의 생각이다. 여기엔, 총체적이고 통합적인 자연환경의 입장과 개념과 생각이 필요하다. 주체가 '인간' 또는 '자연'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서로 양보할 건 양보하고 함께 할 건 함께해야 한다. 


문제는, 인간은 자연이라는 게 입장이 없고 생각이란 걸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자연의 입장을 추측하고 재단한 뒤 실행에 옮겨버린다.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인간 입장일 뿐이다. 사실 일반적인 에코니즘은 여기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모노노케 히메>는 탁월하다. 


만화로서만 표현할 수 있을 테고, 만화이기에 오히려 유치하지 않게 보일 수 있을 텐데, 인간의 입장과 생각만큼 자연의 입장과 생각을 내보이고 있다. 멧돼지와 들개가 말을 하고 또 신이기도 한, 황당하고 낯설지만 그러하기에 오히려 매우 설득력 있는 진정한 에코니즘의 방증이라 하겠다. 


에코니즘에 대해 말할 땐 더 이상 '우린' 또는 '인간'으로 시작하는 구호를 내지 말자. 물론 그것이 어렵다는 걸 알기에, 거기에 최소한의 의미 부여는 하되 절대적인 의미 부여는 하지 말자. 이 대자연에는 우리 인간만이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자연도 있다. 우선,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인간과 자연의 존재.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공존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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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