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작 열전/신작 영화

좋은 만듦새의, 균형감 상실의 진실 오도와 망상 <빅토리아 & 압둘>

반응형



[이 영화 안 본 눈 삽니다] <빅토리아 & 압둘>


영화 <빅토리아 & 압둘> 포스터 ⓒ유니버셜픽처스



여러 가지 면에서 최악이라고 할 수는 절대 없는, 아니 어느 면에서는 수준급의 모양새를 보이는 영화를 보게 되었을 때는 참으로 애매하다. 하지만 그 영화가 그 모양새를 앞세워 사실을 보여주되 진실을 오도하려 할 때는 더 이상 애매하지 않다. 철저히 까발리고 진실을 바로 세워야 하는 것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모양새 좋은 영화야말로 영화의 본연, 즉 '보여주기'에 충실한 거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건 요즘 영화에서 어찌 보면 기본 중에 기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건 옳은 말도 아니다. 결국 알맹이가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스토리텔링 말이다. 


스토리텔링은 그저 이야기의 나열이 아니다. 거기엔 어떤 식으로든 메시지가 담겨져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그 메시지에 최소한의 '옳고 그름'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메시지 또한 겉모양이 아닌 알맹이, 그 너머와 그 이면을 살펴야 한다. 영화 <빅토리아 & 압둘>은 그런 면에서 단언컨대 최악의 영화라 할 수 있다. 이런 식의 모양새는 훌륭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스토리텔링과 메시지는 곤란하다, 아니 옳지 않다. 


판타지 로맨스에나 나올 법한 우정의 실화


영화 <빅토리아 & 압둘> 한 장면 ⓒ유니버셜픽처스



1887년 인도의 아그라, 감옥에서 일하는 인도인 카림 압둘(알리 파잘 분)은 키가 가장 크다는 이유로 빅토리아 여왕 폐하(주디 덴치 분) 50년제에 맞춰 모후르(인도 금화)를 운송해 보내주는 임무를 맡는다. 그는 이를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며 길을 나선다. 한편 그와 함께 가게된 모하메드는 인도를 지배하고 있는 자들한테 줄 빌어먹을 선물 때문에 수천 마일을 가야 한다며 분개한다. 


모후르 수여식에서 빅토리아는 압둘의 잘생긴 외모에 반하고 급기야 곁에 두고자 한다. 그렇지 않아도 여왕을 향한 무한한 애정을 공공연히 드러낸 압둘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며 빅토리아의 환심을 더더욱 사게 된다. 압둘 덕분에 인도에 대해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고 인도에 지대한 관심을 쏟게 되는 빅토리아. 압둘은 그야말로 승승장구, 빅토리아의 개인 비서이자 스승이자 가족과 같은 급에 이른다. 


하지만 일개 식민지 인도인의 평민 따위가 왕실의 일족처럼 취급받는 걸 원하는 사람은커녕 그저 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 당연히 온갖 시샘과 협박과 음모가 이어진다. 전 세계 1/4를 차지하고 10억 명의 백성이 있는 빅토리아 여왕과 그저 수십억 명 중 하나일 뿐 아니라 식민지 백성 중 하나일 뿐인 카림 압둘은 과연 그 특별한 우정을 계속 지켜나갈 수 있을까? 


영화 <빅토리아 & 압둘>은 자못 흥미로운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아니, 판타지 로맨스에서나 다룰 법한 내용이지만 엄연히 실화이기에 어쩔 수 없는 궁금증이 인다고 하는 게 맞겠다. 빅토리아 여왕과 식민지 인도인 평민 카림 압둘은 어떤 연유로 모든 걸 뛰어넘는 우정을 나누게 되었는가?


이들의 특별한 우정, 거기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


영화 <빅토리아 & 압둘> 한 장면 ⓒ유니버셜픽처스



압둘의 빅토리아를 향한 무한한 애정부터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애정의 사연과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출세에 눈 먼 평범한 청년인가. 차라리 그렇게 그려졌다면 최소한 이해는 되겠지만, 영화는 그를 그렇게 그리지 않는다. 빅토리아를 향한 인간적 애정이 한껏 묻어나오는 것이다. 


빅토리아의 압둘을 향한 총애는, 압둘이 잘 생겼다는 것, 그녀를 둘러싼 암투와 격식과 시샘 등 온갖 것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순수함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명목상의 통치자일 뿐 정작 가본 적 없는 인도에 대한 동경 등이 함축되어 있다. 압둘의 애정과는 달리 빅토리아의 애정엔 최소한의 이해는 가지만, 반면 이해하기 싫은 측면이 있다. 


다름 아닌 여기에, 이 영화가 내세우는 특별한 우정에 함정이 있다는 걸 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빅토리아 여왕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최전성기인 19세기를 온전히 통치해온 자다. 그녀는 제국의 수장으로, 뼛속깊이 제국주의가 들어찬 인물인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런 그녀를 마치 반제국주의자, 반인종차별주의자이자 수많은 파렴치한들에 둘러싸여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으로 그린다. 


한편 빅토리아 여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명제로 유명하다. 유럽 대부분이 혁명으로 왕권제 자체가 사라지는 와중에 영국은 수상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에 정치권력 대부분을 내어주는 대신 상징성만을 남겨두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안에 대한 결정권은 행사했으며, 정치에서도 수상들을 통해 의견을 관철시켰다. 말하자면, 그녀는 명백한 제국의 수장이었고 고로 수많은 나라와 백성과 전통을 없애버린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영화 <빅토리아 & 압둘>은 균형감을 완전히 상실한 잡종에 불과하다. 


빅토리아 여왕, 대영제국의 치졸하고 무서운 술수


영화 <빅토리아 & 압둘> 한 장면 ⓒ유니버셜픽처스



영화는 말년의 빅토리아 여왕을 완벽하리만치 연기한 주디 덴치를 앞세워 19세기 영국 왕실을 역시 완벽하리만치 재현해냈다. 의상과 분장면에서 위화감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그 겉모양과 겉치레를 앞세운 영국 왕실을 빅토리아 여왕이 셀프 디스(?)하며 자잘하게 균형을 맞추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 


압둘과 같이 오게된 모하메드가 죽으면서까지 영국의 추악한 면모를 가멸차게 비판하는 장면 또한 자잘한 균형 맞추기의 일환이다. 하지만 그 모습들이 애써 끼워맞추기 내지는 균형을 맞추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술수로 보이는 건 비단 나뿐 만이 아닐 것이다. 이는 빅토리아 여왕의, 대영제국의 치졸하고 무서운 술수와 다름 없다. 


일제강점기, 문화통치시기가 그러했다. 겉으로는 전에 없이 조선인의 자유를 묵인했지만 실상 조선을 일본의 완전한 속국으로 만드려는 잔인한 술수였지 않은가. 그 기반엔 '당연함'의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 빅토리아가 영화 내내 '인도의 여제' 운운하는 것도, 모든 이들의 위에 군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수많은 나라와 백성과 전통들이 사라지는 아픔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의 집합체이다. 


우리로서는 조금만 시선을 돌려 생각해보면 될 일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천황과 천황을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조선인 평민이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런데 영화가 천황을 반제국주의자이자 반인종차별주의자로 그리며, 천황이기 때문에 받게 되는 불만 등 때문에 매우 불쌍한 사람인 것처럼 그려내면 어떠하겠는가. 이건 명백한 진실 오도와 잘못된 망상이 아닌가. 더욱이 그것이 실화을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면...


이 영화 때문에 우정이 갖는 순수함과 그 어떤 것도 초월할 수 있는 우정의 무한함이 퇴색되어버린 느낌마저 든다. 물론 빅토리아와 압둘의 우정은 특별했다. 그 자체로 신분과 인종과 나이를 초월한 순수함과 무한함이 엿보였다. 그러나, 영화는 그 너머까지 특히 빅토리아를 중심으로 나아갔고 무참히 찬물을 끼얹어버렸다. 영화의 만듦새 때문에 한편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히려 그 만듦새가 진실을 오도하는 데 앞장섰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빅토리아 & 압둘> 안 본 눈을 사고 싶다. 

728x90